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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호(2008년 겨울호) 특집/고은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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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_무서운 신예들의 ‘나의 문학’
차가운 식탁의 시간
고은강|시인
가만히 생각해 보니 아직 시집이 없는 제가 <나의 문학 세계>에 대해 글을 쓴다는 것이 여간 겸연쩍은 일이 아닙니다. 주제넘은 짓 같기도 하고 또 제게 무슨 거창한 문학 세계가 있을까 싶어 한동안 이 글을 쓰기가 망설여졌습니다. 그러면서 지난 2년간 발표한 작품들을 다시 읽어볼 기회가 생겼고 자연스럽게 그동안의 시 쓰기를 돌아보는 귀중한 시간을 갖게 되었습니다. 객관적 거리가 확보된 상태에서 내가 나의 작품과 정면대면을 한다는 것은 아주 많은 용기를 필요로 합니다. 곤혹스럽더라도 고여 있지 않고 흐르기 위해선 반드시 가져야하는 시간이라 여겨 이번 기회에 독자의 입장에서 지난 발표작들을 읽어보게 됐습니다. 그러나 아무래도 제 문학은 ‘세계’라 이름 붙이기엔 시력詩歷도 짧고 덜 여물었다 생각됩니다. 따라서 이 글은 그냥 여러 가지 문학 장치들 속에 숨은 제 시의 첫 번째 목소리를 들려주는 정도의 소박한 작업이 될 거라는 고백을 먼저 드려야겠습니다.
시간의 밖, 남자 혹은 아버지
1970년대 생에게 역사는 그리 광폭하거나 위험하지 않았습니다. 이전 세대들에게는 치열했을 정치ㆍ경제적인 문제와도 조금은 떨어져있어서 천진난만한 구석을 가지고 있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전 세대와 매우 근접해있기 때문에 그들과 완전히 분리되지 못하고 여전히 그 잔재 속에 있습니다. 대체로 학구적인 편이었지만 정서적 욕구가 이전 세대에 비해 부족하고 요즘 젊은 세대들에게서 돋보이는 환상적 세계관도 그리 풍부하지 못합니다. 물론 이것은 매우 주관적인 생각이겠지만 제 경우는 그러했습니다. 아직 단단한 아버지의 집에서 창을 통해 놀라운 세계화를 구경하고 어린 친구들의 눈부신 상상력을 동경하면서도 한편으론 부족한 정서적 욕구에 대한 자책으로 필독서 목록에 빨간 줄을 그어가며 즐겁지 않은 독서를 경험했으니까요. 지금도 앞뒤 세대가 두서없이 혼재되어 있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저는 대학원에서 리얼리즘문학을 공부했습니다만 사실 리얼리즘문학이 피부에 확 와 닿지는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 즈음 인터넷을 뜨겁게 달구었던 판타지 소설들에게 열광할 만큼의 동질감을 얻었던 것도 아니었습니다. 다만 문학의 방식에 우열을 매길 수는 없다는 것이 제 확고한 생각입니다.
그러나 방식의 문제를 떠나 역사의 최전방에서 역사를 온몸으로 체험한 황석영 같은 작가는 늘 존경과 부러움의 대상이었습니다. 비록 그것이 고통과 충격의 역사라 할지라도 그것을 직접 체험할 수 있다는 것은 작가나 시인에게 있어서 소중한 재산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고 보면 시인으로서 제가 가진 재산은 보잘 것이 없습니다. 이전 세대해 비하면 치열함과 절박함이 부족하고 이후 세대에 비하면 자유로운 상상력이 부족하고 여자로서 최소한 가져봄직한 모성애나 시인으로서 최소한 가져봄직한 측은지심 또한 부족합니다. 이것은 때로 창작의 열의를 깨뜨리는 한계가 되기도 합니다만 저는 제 시에 대한 바람이 없으므로 대체로 시 쓰기가 즐거운 편입니다.
지인들은 제 시가 거칠고 격양되고 남자에 대한 부정적 시각이 도드라져있다고 말합니다. 부정하지 않겠습니다. ‘바깥’ 세상은 제가 애증하는 세계이기도 합니다. 말하자면 세상과 저는 마치 애증관계에 놓인 부부와도 같습니다. 제가 시에서 ‘남자’, ‘애인’ 혹은 ‘아버지’라 이름 붙인 세계를 굳이 ‘바깥’이라 부른 것은 제 삶이 그들의 방식에 완전히 동조하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제가 바라보는 ‘바깥’은 폭력적이고 이기적이고 이중적이며 기득권을 포기하지 않는 늙은이들의 추악함이 난무하는 곳입니다. 그래서 저는 그 세계 속의 이들을 호랑이가 못된 ‘고양이’에 빗대어 조롱하기도 하였습니다. 이것이 제 개인적 생애와 무관하다고 발뺌하지는 않겠습니다. 어차피 시인이나 작가의 생애는 은밀한 것이 되어서는 안 되고 작품의 해석을 위해서라도 어느 정도 창작자의 발설이 필요한 부분이라 생각합니다.
제 아버지는 한국전쟁을 겪은 세대로 매우 가부장적인 분이십니다. 그 세대의 가장들이 대체로 그러하듯 대화를 할 줄 모르는 독선적인 분이셨습니다. 더군다나 아버지의 타고난 결벽증은 늘 집안을 숨 막히게 하였습니다. 사회적으로는 청렴결백한 선비였지만 집안에서는 아내를 함부로 대하는 폭군이나 다름없었습니다. 또 아버지의 병적인 자상함은 자식들을 화병의 꽃처럼 나약하게 만드는 부드러운 폭력과 같았습니다.
저는 얼마 전 예술영화를 좋아하는 한 지인의 소개로 루이스 부뉴엘(1900-1983)의 영화 '범죄에 대한 수필(1955)'을 보게 되었습니다. '범죄에 대한 수필'은 한 남자의 살인에의 욕망과 좌절을 그린 블랙코미디였는데 저는 그 영화를 보는 내내 어린 시절 즐겨하던 상상놀이가 떠올라 웃음이 났습니다. ‘아버지를 죽이는 백가지 방법’이란 것이 바로 그 상상놀이였는데 완전범죄에 대한 집착 때문에 상상은 늘 상상 속에서만 존재할 수 있었습니다. ‘미필적 고의’나 ‘일사부재리’ 같은 용어를 저는 아마도 꽤 어릴 적부터 알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다행히 부모님은 제가 초등학교 6학년 다니던 해에 이혼을 하셨습니다. 이혼은 제 부모님이 한 일 가운데 가장 훌륭한 일이었다고 자부합니다. 상상놀이는 제가 대학을 다니던 때까지 계속 이어져왔지만 더 이상 억압된 어머니의 모습을 보지 않아도 되었으니까 저는 참으로 덜 병들게 되었습니다. 물론 가정의 붕괴는 전통과 관습에 대한 부정적 사고를 갖게 했습니다만 궁극적으로는 그것이 ‘깨우친 눈’이 아니었을까 생각합니다.
시간의 안, 당신이 나를 데려다주는 곳으로
제 시의 첫 번째 키워드를 꼽으라면 저는 ‘시간’이라 말하고 싶습니다. 결국 인간은 시간을 사는 여행자이기 때문입니다. 지금 제가 살고 있는 시간은 표면적으로는 남자 혹은 아버지의 시간입니다. 그리고 그 시간과 동거하고 있는 저는 애증하는 아내의 모습으로, 그들과 완전히 분리되지도 완전히 이해하지도 못하는 고통스런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쓸쓸하고 춥고 공허한 시간 속에서 뭔가 따뜻한 것이 필요하겠기에 저는 만져보지 못하고 떠나보낸 ‘스무 살의 그’를 방에 들여 오랫동안 끌어안고 살았습니다. ‘스무 살의 그’는 ‘남자’, ‘애인’ 혹은 ‘아버지’라 이름 붙인 세계에 속하지 않는 사람이므로 온전히 그립고 따스하기만 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 그 모든 게 실체가 없는 환영이 되고 보니 잠깐의 온기는 환각처럼 사라져버리고 ‘스무 살의 그’는 차가운 방을 둥둥 떠다니는 새파란 입술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안팎이 추운 시간의 방안에서 여전히 곁에 두고 보는 제 거울 속의 사람입니다.
저는 참으로 무책임하고 불성실한 시인입니다. 제 시에 대한 어떠한 포부나 바람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애초에 독자와의 소통은 생각해본 적도 없고 사람들의 마음속에 혹은 문학사에 조금이나마 기여하고자 하는 시인으로서의 최소한의 의무감조차 가져본 적 없습니다. 남성성이 강한 세계를 비난하고는 있지만 페미니스트이기를 바라지는 않습니다. 새로운 시창작법을 선보여 사람들에게 문화적 충격을 줄 능력도 호기심도 제겐 없습니다. 제 시는 또한 누군가에게 위로가 될 여력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우상도 닮고 싶은 시인도 없는 저는 제가 가진 언어 안에서 제 시간을 쓰다 가면 그것으로 족할 뿐입니다.
저는 얼마 전부터 「차가운 식탁」이라는 시편들을 발표하고 있습니다. 한 지인은 제게 “그렇게 재미없는 시를 왜 쓰느냐” 하기도 하였지만 그것이 제가 지나가야하는 시간이라면 가려고 합니다. 안으로는 부재에 대한 그리움과 공허가 있고 밖으로는 제가 애증하는 세상과의 고통스런 관계가 있습니다. 지금은 이 안팎이 차가운 식탁 앞에 앉아 맛없는 밥을 꼭꼭 씹어 먹을 때인 것 같습니다.
말하자면 제 시는 문학을 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다만 제 시간을 살기 위한 단 하나의 구멍이자 열정인 것입니다. 제 그릇은 딱 그만한 것이어서 제 시간 너머의 더 커다란 것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머물러있는 시간은 없습니다. 지금 저와 동거 중인 이 차가운 애증의 시간들이 훗날 저를 어디로 데려다줄지 그건 모르겠습니다. 간혹 윤회가 떠오르기도 하지만 아직은 피상적일 뿐이고 여전히 ‘바깥’ 세상은 이해불가입니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어떤 문학적 평가보다도 시간과 싸우지 않는 시를 쓰는 것이 제겐 가장 간절한 일이라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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