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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호(2008년 겨울호) 특집/이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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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부
댓글 0건 조회 2,579회 작성일 09-02-26 16: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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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_무서운 신예들의 ‘나의 문학’
우물의 시간이라 불리는 마을에서
―열두 달로 된 문학 사전
이현호|시인


1p. 신화의 부활
어둠의 골밀도가 가장 단단해지는 시간. 뿌리를 알 수 없는 말들이 관자놀이 새를 오락가락한다. 창밖에는 모든 걸 안다는 듯 단단한 침묵을 껴입은 가로수들. 수음을 하려다 말고 나는 가만 팔꿈치에 혀를 대어본다. 그 닿을 듯 말 듯 결코 가닿을 수 없는 간극.
젖꼭지가 팔꿈치보다 신성할 까닭은 없다.

2p. 청춘술집의 우울한 사랑기계
우울한 사랑기계 ; 단단해진 실연 코인을 넣으면, 녹슨 철문처럼 삐걱대는 가슴 열어젖혀 검은 침묵을 풀어놓는, 사람을 닮은 기계. 구름으로 빚은 엽총을 둘러멘 사람들은 사냥에 분주하고, 닳고 닳은 몇몇은 질긴 실연의 끈으로 공짜 게임을 즐기는 곳 ; 청춘술집.
결정할 때이다, 청춘을 벗어던지고 거리로 나가자.

3p. 이 고장의 고장 난 시계
한 시인은 어느 강물에 천 개의 달이 뜬다고 했지만, 그건 이 고장의 일이다.  살아간다는 건 사랑한다는 거. 여기선 구백구십 개의 달이 어깨동무하듯 나란히 떠오른다. 매일 얼굴을 바꾸는 달들. 사람들은 머리를 긁적이며 처음부터 오늘의 달을 다시 세고―.
한 달이 두 달을 낳고 두 달이 세 달을 안고…….

4p. 이방인의 빈 방
처음부터 빈방이었다. 밤마다 왼쪽 가슴에 달무리 진다. 계절은 누구에게고 언제나 되풀이되는 것일까. 땅 밑에 얽히고설켜 있을 나무뿌리를 상상하며 자위에 몰두하는 일만큼, 이방인에게 어울리는 몸짓은 없다.
사랑한다는 건 사라진다는 거.

5p. 기억의 방법
손바닥만 한 뿔테 안경. 거기 인공 호수같이 박혀 있는 눈. 짙은 쌍꺼풀을 우산처럼 쓴, 포용과 배반이 함께 서린 눈동자. 이번 생 너머를 가리키는 듯한 크고 두둑한 콧망울.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듯 굳게 밀봉한 입. 갈매기 날개처럼 처진 입꼬리로 가늘게 웃고 있는, 살 오른 입술. 세계사시인선 15와 26으로 책장 속에 살고 있는 그녀.
부동은 또 다른 흔들림을 위한 단잠에 불과할 뿐.

6p. 바닥
바닥 쳐봤니? 온갖 잡새들의 뾰족한 식탐과 (나만 아니길, 나만 아니길) 흉포한 비바람에 흔들리며 공포恐怖로 빨갛게 익어봤니. 툭, 시간의 끈에서 떨어져 침묵 속에서 까맣게 썩어봤니.
기억되기 위해서라면 한쪽 뺨을 올려붙이는 것으로 충분해. 원수의 사랑은 오른뺨을 때리고 왼뺨도 때리지.

7p. 델리컷
친구, 오늘은 델리컷(delicate) 하게 한 잔 어때? 술잔을 드는 손목에서 지렁이들 꿈틀댄다. 최진실이 죽었다는데 시․소설에서 골백번 사람 손목을 자른다한들 누가 움찔이나 하겠어? 짠, 부딪친 술잔 속에서 원래 그랬다는 듯 노란 전구가 끄물거리고 있었다.
죽음을 종기처럼 키우며 흔들리는 날들.

8p. 나무1의 시작법
어느 무명 극단의 ‘나무1’이 되고 싶어. 막이 오르기 전부터 무대 한편에 묵묵히 서 있는 나무. 배우들의 열연과 관객들의 환호와는 무관하게 꾸벅꾸벅 조는 나무. 막이 내리고 한참 뒤에야 느릿느릿 껍질을 벗는 나무.
텅 빈 객석에 앉아 연극이 끝난 무대를 바라보며 박수를 던지는 나무. 

9p. 사물과 시의 함수관계
일미진중함십방一微塵中含十方, 일체진중역여시一切塵中亦如是;작은 티끌 하나가 온 우주를 머금었고, 온갖 티끌 낱낱이 또한 그러하다. ; 스스로 시가 되는 사물들.
조사祖師여, 조사여, 어디에 눈이 있어 티끌을 보십니까.

10p. 퇴고 혹은 추고
막 수백 광년의 방랑을 마치고 돌아온 별빛. 나른하게 웅크리고 앉아 별바라기를 하던 고양이는, 자꾸 오줌 눈 자리를 덮으려고 한다. 윙크라도 하는 양 구름 뒤로 숨는 달을 보며 꽤 재치 있는 녀석이란 생각. 어둠이 눈꺼풀을 주머니에 넣어둔 채 히죽히죽 웃고 있다.
고양이의 오돌토돌 예민한 혀가 교감하는 세계.

11p. 自序
나도, 문학도, 세계도, 할 말도, (철학도, 미의식도, 형이상학도, 신화도, 침묵도) 없다. 나는 정해진 존재가 아니다. 나는 전적으로 당신에게 달려 있다. 당신이 나를 완성할 것이다.
그전에 당신이 작은 화분을 하나 가졌으면 좋겠다.

12p. 참고 문헌
커피색 추억이 드나들어 자꾸 갈비뼈가 가렵다. 벅벅 갈비뼈를 긁어대며 ‘의자’란 제목의 시를 쓴다. “동그란 방석에 각목 네 개/공상에 잠긴 턱 하나와 젖은 구두//두 팔을 슬며시 땅에 대면/둥그런 허리 위에/찻잔을 내려놓는 구름//잊고 있던 한 마리 새”
빈 의자에 웅숭그리고 있던 고양이는 가만 우물의 시간이라 불리는 마을을 핥기 시작한다.
추천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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