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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호(2008년 겨울호) 특집/고춘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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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_무서운 신예들의 ‘나의 문학’
시간을 죽이는 힘.
고춘옥|시인
하늘은 가장 먼저 농부를 사랑하셨고 그 다음으로 시인을 사랑하셨다.
“자네. 시가 뭐라 생각하나, 아니 문학이 무엇인가?”
등단 이후, 몇몇 분께서 질문을 던지셨다.
하긴, 일상의 크고 작은 대면 속에서 이 질문은 계속 되었던 것 같다.
온통 시 속에 빠져 사는 녀석이라 궁금하셨나? 아니면 기대하는 걸까?
“아, 예. 저는 꽃이라고 생각합니다. 인류가 피우는 꽃.”
아차, 대답이 너무 짧았다.
“결핍 때문이 아닌가요? 끊임없이 진화하고자하는 인류의 욕망이 빚어내는 정신적 표현.”
돌아서는 순간 내 목구멍 속에서 미처 대답이 되지 못한 말들이 꾸역꾸역 밀려나오다 꽉 닫힌 잇몸의 문을 열지 못한 채 자그맣게 몸을 웅크리고 기어들어간다.
‘시는 꿈이에요. 아홉 개의 머리를 가진 괴물이 지키는 늪에서 자라나는 나무 가지 끝에 매달린 황금 사과. 손끝에 닿을 듯 끝내 닿지 않는…….’
문학이 문학으로 있기 전에 시였고 내게 있어 문학이란 시라는 씨앗이 만들어낸 이름이어서 나는 문학을 시라는 말로 통칭하고 싶다.
초등학교 4학년 때 우연히 같은 반 친구네 집에 놀러갔다가 보았던 세계명작 대전집 육십 권과 세계 위인전. 그것이 내 인생을 바꿔버렸다. 농사를 짓는 우리집은 그런대로 꽤 똑똑한 축에 끼었던 언니오빠의 학비 때문에 살림살이가 늘 빠듯했고 문화생활비란 생각도 해보지 못하는 그림의 떡인 상태였다.
세상에 그런 책들이 존재한다는 것이 문학이라는 양식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것이 너무도 놀라운 날이었다. 그다지 친하지는 않았지만 그저 순한 양 같아 그런대로 같이 놀만한, 시간을 때우기에 마직했던 친구 금숙이는 그 순간부터 안중에도 없었다. 다만 그 애의 책만 하루에 두 권씩 빌려갔고 다음날 반드시 돌려주었다. 책을 다 읽기 전에 행여 밉보이면 어쩌나 하는 마음에 저녁 먹을 새도 학교 수업을 들을 정신도, 밤잠을 잘 시간도 없었다. 시험 기간에도 시험 준비보다 책을 읽었으니까.
그렇게 약 한 달여 쯤 지났을 게다. 그날따라 일찍 귀가 하셔서 저녁상을 받고 있었던 금숙이 아버지께서는 책을 돌려주고 또 다시 빌리러 간 나를 보시고는 자기 딸에게 물었다.
“넌 저 책 다 읽었니?”
고개를 내젓는 금숙이의 머리통이 내 가슴 속에 소용돌이를 일으켰다. 드디어 올 것이 오고 만 듯싶었다. 그 다음에 조용히 무슨 말인가 나누는 듯싶더니 금숙이가 현관문까지 나를 데리고 나와
“저 있잖아, 우리 아버지가 너에게 이젠 책 빌려주지 말래.”
그만 확, 달아올라 빨개진 얼굴로 돌아서던 날, 부끄럽고 창피한 나는 또 다른 고통과 씨름하면서 불면의 밤을 지내야 했다.
그러나 어쩔 수 없었다. 그 다음 날부터 나의 헌팅은 다시 시작되었다. 나에게 좋은 친구란 책을 많이 가지고 있는 친구를 의미했고 가급적 빨리 그 좋은 친구들과 헤어졌다. 중학교 이학년 학교 도서관에 꽁꽁 잠겨진 책장의 유리문이 하나 떨어진 것을 발견할 때까지 말이다.
나는 문학으로 인해 그 또래의 꿈 많은 소녀가 아니라 지극히 비현실적인 아이가 되고 있었다. 가슴속에서 일어나는 수많은 삶의 의문투성이를 말로 쏟아낼 수도 없었고 들어줄 친구도 없이 오로지 문학책과 혼자서 풀어내는 낙서인지, 글인지, 시인지……. 즉, 내 평생 헤어날 수 없는 검은 물의 유혹에 넘어간 것이다.
나보다 두 학년 앞서 중학교에 들어간 언니는 책상 앞에 엷은 색 메모지에 교과서에 실려 있는 시들을 붙여 놓고 외우고 있었다. 기껏해야 당시 초등학교 오학년인 나는 유치한 동시나 몇 편 알고 있을 따름이었는데 언니의 시들을 읽고는 바로 외워버렸다. 그 아름다운 시의 흡인력은 놀랄 만큼 무서웠다. 한 마디로 시에 홀린 것이다. 그 다음부터 나는 시가 없이는 살 수 없는 아이가 되어버렸다.
“……그러니까 그 검은 마귀들은…….”
죽은 남자와 내가 낳은 아이에게 그 얘기를 들려주자
“똥이라고 하세요.”
녀석이 대뜸 대답한다. 아니 이런. 모짜르트식 발언을 해버리다니. 딴은 그렇다. 자본주의 현실의 경제적 가치를 상정하면 시란 당연히 밥 먹고 할 일 없는 사람의 밑구멍에서 빠져나오는 지극히 비생산적인 활동인 거.
어머니의 장례를 치른 다음 날 대학 면접시험을 치러야 했던 나의 생활은 한 마디로 비참했다. 물론 더 어려운 아이들도 많았을 테지만 나는 죽음이라는 명제 앞에서 걷잡을 수 없이 흔들렸고 그래서인지 문학마저도 재미가 없었다.
새로운 생활을 하고 싶던 차에 학생운동은 새로운 내 삶의 분출구였다. 소극적이고 개인적인 서정보다 뜨겁게 용출하는 사회적 정서의 힘이 나를 압도했다. 가진 것 없어도, 어머니가 없어도 외로운 줄 몰랐다. 아니 잠시 잊었을 뿐이다. 그 다음 닥쳐오는 더 큰 공허감을 끌어안고 몸부림치면서도 아니라고 자신을 속이면서 말이다.
누구보다도 첨예하게 앞장서서 길을 걷던 와중에도 실낱같은 음률은 끊임없이 내 뒤를 따라다녔고 혼자 있는 시간엔 시를 썼다. 아니 쓸 수밖에 없었다. 버리려고 애를 쓰면 쓸수록 한층 더 고운 시어들이 와르르 꽃을 피워댔다. 죽어가는 시간과 그걸 견딜 수 없어 시간을 죽이는 나의 행위는 이때부터 시작된다.
그 후, 나는 어머니처럼 따뜻한 남자와 살다가 어머니처럼 이별했다. 이유는 간단하다. 죽음이 갈라놓아서다. 죽음 앞에서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는 내 자신이 가증스러워 견딜 수가 없었다. 나도 빨리 늙어 죽을 수 있었으면 바래고 또 바랬다.
어느 날 죽어가는 내 귀에 환청이 시작되었다. 그의 목소리인지 또, 누군가 죽은 자의 목소리인지. 그 소리를 따라 쓰다보면 하루에도 수백 편의 시가 흘러나온다. 끊임없이 쟁쟁거리는 소리. 나를 위로하는 소리가 아니라 나를 끌고 다니는 소리. 참으로 고통스러운 시간. 그건 귀신의 호곡성이라고 밖에 말 할 수 없었으니까. 그 소리를 죽이기 위해 시를 써야했다. 이열치열以熱治熱, 이시제시以詩制詩다. 꿈속에서도 시들과의 사투는 계속되었고 시가 완성 되어서야 깊은 단잠을 잘 수 있었다. 그러니까 시는 진혼곡이기도 한 것이다.
우리 집 근처에 절이 있어서 새벽 네 시면 어김없이 뎅그렁뎅그렁 종소리가 마을을 흔든다. 고요를 뚫고 또 다른 고요 속으로 끌고 들어가는 소리 밖의 소리에 나는 잠을 깬다. 오소소 솜털이 일어서듯 찬 공기를 털어내며 내 몸 보다 먼저 몸 속 깊숙이 갇혀있던 소리들이 깨어난다.
그러고 보면 詩란 글자의 모양대로 마음의 소리이기도 하고, 그 마음을 다스리는 소리이기도 하다. 때론 道를 따르는 것이기도 하고, 온종일 힘겨운 노역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에겐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이기도 하다. 어쩌다가 권력이 손에 쥐어지는 순간에는 약자를 내리치는 칼이기도 하고, 한 순간 방심하면 정신을 갉아먹는 좀벌레이기도 하다.
우물 속에 비친 달의 모습. 그 달을 끊임없이 건져 올리려는 인간동물의 행위. 우물이 깊을수록 달은 매혹적이다. 그래서 옛 경전에 보면 학자들은 가급적 시를 쓰지 말라고 하셨나보다.
나의 시는 시로 존재한다. 아직 못다 이룬 꿈. 미래를 스스로 열고 나가는 문. 현실에 상처받은 신음소리와 그것을 치유하는 속삭임과 헤어나기 힘든 즐거움과 아직도 끝나지 않는 내 몸 안의 몸짓. 혹은 내 몸 밖의 몸짓. 정수리에 피어나는 꽃의 향기거나 언뜻 스치는 바람이거나 햇볕에 말라비틀어지는 무말랭이거나 나뭇가지에 걸린 달이거나 미친년 헛구역질하는 소리거나 그대 사랑의 메시지거나 발정난 고양이 울음소리거나 발길에 걷어 채인 깡통소리거나 민주화 운동의 구호이거나 썩어가는 시체에 몰려드는 쉬파리 날갯짓이거나 돈이거나 돈이 되지 못하는 소리거나 옛날에 내가 읽었던 시이거나 우주로 통하는 문이거나 똥이거나 개소리거나 온갖 세상 잡소리거나 그 소리를 엿 듣는 내 귀이거나 그것들을 끌어 모아 내 몸 안에서 글자로 추는 춤. 그 춤을 보고 따라 추는 춤…….
내 몸 속의 가장 순한 짐승의 피를 뽑아 얄팍한 순은 냄비에 달달 끓여 올린 후에 그 수증기를 막 받아 차갑게 증류수로 가라앉히는 마녀의 시간. 새벽 네 시. 또 다른 내가 웃고 있다.
‘어떤가, 자네. 그 탈을 벗어보게나. 무탈하지 아니한가! 시는 그저 시일뿐이라네.’
아직도 사람들이 명명하고 있는 숱한 이름들이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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