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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호(2008년 겨울호) 특집/이제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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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부
댓글 0건 조회 2,732회 작성일 09-02-26 16: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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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_무서운 신예들의 ‘나의 문학’
미지의 글쓰기
이제니|시인


글쓰기는 개인의 고독과 병증으로부터 출발한다. 그것이 겉으로 드러나든 드러나지 않든 간에 글쓰기는 한 개인 내부의 가장 허약한 지점에서 떠오른다. 백지 위로. 불쑥. 하나의 신음처럼. 어떤 고통들, 어떤 결핍들, 어떤 충격들. 그 글쓰기가 나아가는 지점은 그 개인의 더 큰 고독과 병증, 거대한 입을 벌리고 있는, 아직 자신에게조차 밝혀지지 않은 심연의 저 밑바닥이다. 글쓰기의 치유의 힘이나 구원의 가능성에 대해 말하는 것은 순진하고도 단순한 낙관이 아닐까. 말하지 못한, 말할 수 없는, 함구되어진 내부의 내부, 그 내부의 닫힌 문틈 사이로 위험을 무릅쓰고 기어이 들어가려고 하는 것,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곧장 내려가는 것. 글쓰기에서 얻을 수 있는 구원이라면, 바로 그렇게 자신과 자신을 둘러싼 상처를 직시하는 순간에 얻을 수 있는, 그 순간과 정면으로 맞부딪침에서 오는 벼락과도 같은 충돌의 순간, 자신이 누구인지, 자신의 상처가 무엇인지를 알게 되는 바로 그 순간의 불빛에 있는 것이 아닐까. 시간이 지나도 상처는 없어지지 않는다. 다만 의식의 저 깊은 수면 아래 가라앉아 있을 뿐이다. 그 모든 상처들은 내부 혹은 외부의 사소한 충격에도 다시 모습을 드러낸다. 확대되거나 변형된 형태로. 그런 일들이 반복되면서 우리는 강해지는 것이 아니라 조금씩 무뎌지는 건지도 모른다. 무뎌지는 것도 나쁘지만은 않다는 것을 알게 되는 순간, 우리는 비로소 늙어간다. 그리하여 그럼에도 그렇기에 나는 오늘도 글쓰기로 나아간다. 글쓰기로부터 시작해서 다시 글쓰기로 돌아간다. 어떤 미지의 순간을 향해. 어떠한 보상도 바라지 않으며. 구원이나 치유의 가능성에 대해 어떠한 기대도 하지 않으며.
머리맡에 국어사전을 두고 잠들던 시절이 있었다. 나만의 문장을 만들고 싶다는 욕망이 무럭무럭 자라나던 낮과 밤, 하나의 단어에 하나의 세계를 대입해보며 잠자리 날개 같이 얇디얇은 사전의 페이지 위에 침을 묻혀 얼룩을 남기거나 귀퉁이를 세모꼴로 접어놓곤 했던 날들. 내 글쓰기는 그런 어느 날 난데없이 나타난 낡은 타자기와 함께 시작되었다. 열 살 무렵, 아버지가 물려준 수동식 타자기는 어린 내게 이전과는 다른 자각을 심어주었다. 소박한 허영심과도 닮은, 작가적 자의식과도 닮은 그 무엇. 그 타자기가 내 책상 위에 얌전히 앉아 있던 순간을 아직도 잊지 못한다. 하얀 백지 위에 찍히던 활자 활자들. 한 줄의 타이핑이 끝나자마자 경쾌하게 울리던 맑은 종소리, 백지 위에 검은 글씨가 돋아나던 순간의 기쁨, 백지의 첫 줄에서부터 마지막 줄까지 검게 채워나가는 단순한 쾌감에 중독되어 먹지가 다 닳도록 타자기의 자판을 두드리던 시절. 어떠한 개연성도 논리도 의미도 없는 글쓰기. 손글씨의 평범한 일상성을 단번에 뛰어넘는, 내가 만들어낸 인쇄 활자에 대한 매료는 곧바로 더 많은 단어와 문장에 대한 탐닉으로 이어졌다. 
꿈속에선 언제나 말더듬이 소녀가 나뭇가지로 땅을 파고 있었다. 말더듬이 소녀와 친구가 되고 싶었지만 말더듬이 소녀는 자신을 너무나도 미워했다. 말을 더듬지 않는다면 친구 삼고 싶은 기분도 들지 않았을 테지. 누군가를 친구 삼기엔, 누군가의 친구가 되기엔, 우리는 우리 자신을 마음 속 깊이 미워했다. 내 속의 너는, 네 속의 나는, 그들이 사실은 존재와 세계와의 근원적인 불화의 한 양상이라는 뚜렷한 인식도 없이, 서로의 언어 속으로 혹은 서로의 언어 밖으로 더듬더듬 뛰쳐나가려고만 했다. 유년을 물들였던 어떤 상처와 슬픔, 고독의 시간들. 그 구체적인 세목들을 일일이 나열해야만 할까. 내 글쓰기는 상처 때문에 시작되었다고 굳이 고백해야만 할까. 그때 나는 그저 유약하고 예민하고 조로한 감수성을 지닌 아이였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누가 타인의 고통과 상처에 대해 단언할 수 있을까. 하나의 상처, 하나의 고통, 하나의 슬픔은 그것 자체로 개별적이고 절대적이다. 누구의 슬픔도 누구의 슬픔보다 더하거나 덜하지 않다. 각자 개인이 견뎌야 할 저마다의 슬픔과 상처가 있을 뿐이다. 타자기의 출현으로 시작된 내 글쓰기는 한 예민한 유년의 내부와 외부를, 그 자신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불러들이는 주문이 되었다. 그 누구에게도 내뱉지 못한, 내뱉을 수 없는, 지극히 개인적인 언어들이 밤마다 백지 위로 모여들었다. 말들은 끝없이 끝없이 백지 위로 날아와 박혔다. 어떤 정신적 허기에서 비롯된 글쓰기는 더 큰 허기로 나아갔다.
그와 동시에 기억으로부터 끊임없이 소환되는 어떤 이미지들이 있다. 그 모든 길의 이미지들. 언제나 혼자 걸어가던 좁고 긴 길들. 멀고도 먼, 가도 가도 끝이 없었던 그 길들. 길가의 키 작은 풀들을 퍼덕퍼덕 신경질적으로 뜯으면서 집으로 돌아가던 그 길은 마치 미지의 세계로 향하는 통로 같았다. 어떤 검은 무언가가 그 길 끝에 죽어 있을 것만 같은 불길한 예감들. 마주보게 될 공포의 순간을 최대한으로 지연시키기 위해 될 수 있는 한 천천히 걸어가던 그 길들. 그러나 실제로 집에 도착하면 어제와 다름없는 평온한 일상이 기다리고 있었고 그 평온함에 알 수 없는 안도와 함께 실망을 느낀 나는 거친 모험에서 돌아온 사람처럼 갑작스런 피로에 시달리곤 했다.
끊임없이 멀어지는 그 길의 감각은 오늘도 여전히 이어진다. 그 감각은 글쓰기의 한복판에 있을 때면 더욱더 뚜렷해진다. 어찌하여 그 길의 이미지들은 끊임없이 되살아나는 걸까. 그것은 내가 언어를 대하는 감각과 닮아 있다. 언어를 밀고 나가면서도 끊임없이 언어를 의심하는. 보다 적확한 문장을 찾으려 하면 할수록 그 적확함에서부터 점점 더 멀어지는 문장들. 우리가 믿는 이 언어란 얼마나 연약한가. 이 언어는 근본적으로 무력하고 미끄럼타기를 좋아한다. 진리라고 당연하게 믿어왔던 한 줄의 언명이, 그 진리의 값이 참이냐 거짓이냐는 논외로 하고, 말 혹은 글로 옮겨지는 순간, 우리가 바라보게 되는 것은 이제 막 죽은 언어의 시체인지도 모른다. 그것을 살려내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이란, 또 다른 문장, 오로지 ‘차이’의 개념으로써만 의미를 부여받을 수 있는 대상 밖의 사물과 세계를 불러들이는 일뿐이다. 허나, 의미는 끝없이 지연되고, 끝없는 묘사들만 허망하게 자꾸만 자꾸만 이어질 뿐이다. 
우리는 애초에 잘 닫혀지지 않는 상자 속에 내던져진 존재들이라는 자각. 그리고 그러한 언어에 대한 불신은 이 세계 자체에 대한, 인간의 인식 체계에 대한 무수한 의문들로 이어졌다. 내가 인지하는 이 세계와 당신이 인지하는 이 세계가 똑같은 곳일까. 내가 바라보는 이 한 송이 붉은 꽃이 당신에게도 내가 보는 그대로의 붉은 꽃으로 존재하는 걸까. 나는 볼 수 있지만 당신은 볼 수 없는 것들, 당신은 볼 수 있지만 나는 볼 수 없는 것들. 그리고 우리가 설령 같은 인지 시스템을 가지고 있어 같은 시각으로 같은 그림으로 이 세계를 파악한다고 하더라도 대상에 대해 서로가 말하는 그 말들은 과연 어느 정도 일치하는 걸까 하는 의문들. 우리가 완벽하게 구사한다고 믿는 이 모국어가 실은 초급 영어를 익힌 사람들의 대화 수준보다 못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들. 그런 의문들로 가득 차서 한동안 한 줄의 글도 쓸 수 없었던 시절이 있었다. 대체 내가 무엇을 쓸 수 있을까, 쓸 수 있기나 할까, 쓴다고 한들 그것이 과연 어떤 의미를 지닐 수 있을까 하는 생각. 나는 아무것도 얘기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헤라클레이투스의 그 유명한 전언, 누구도 같은 강물에 두 번 발을 담글 수 없다는 말에 기대지 않더라도, 나는 이 시공간에 대한 그 무엇도 제대로 설명할 수도, 포착해낼 수도 없을 거라는 절망감에 사로잡혔다. 우리가 인식할 수 있는 유일한 시간, 이 ‘순간’이라는 개념조차도 그저 하나의 환상일 뿐이라는, 그 순간마저도 명확히 규정할 수 없는 거라는 절망. 그러나 그런 정신적인 말더듬이 상태에서 다시 깨어날 수 있었던 것은 결국 우리는 잡히지 않는, 잡을 수 없는 ‘순간’에 집중할 수밖에 없는, 그 순간을 간신히 말할 수밖에 없는 아주 작은 존재일 뿐이라는 인식, 그리고 그 ‘순간’이 ‘영원’으로 이어진다 라는 지극히 평범한 진리를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그럼에도 내 글쓰기는 그 모든 의심과 의문으로부터 다시 시작된다.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하려는 그 불가능한 시도 자체에 글쓰기의 진정성이 있는 것이 아닐까 라는 생각. 문학 장르 간에 특별히 경계를 두진 않지만, 시를 쓰고 발표하는 현재의 상황에서 글쓰기에 대해 말하자면, 내가 좋다고 느끼는 시는, 언제나 미지의 것을, 미지의 저 너머를 보여주는 시들이다. 뭐라고 설명할 수는 없지만 어떤 알 수 없는 아름다운 감각으로 무장한 시, 무의식적인 리듬과 직관의 세계에 몸을 맡긴 채 보다 넓고 먼 곳으로 나아가는 시, 이상한 활기와 비약, 도약으로 충만한 시, 날아오르는 허공의 여백, 혹은 추락하는 공기의 속도를 보여주는 시, 언어 이전의 어떤 멜로디, 음악 이전의 음악을 닮은 시, 그 모든 시적 언어의 관습을 깨뜨리는 시, 한마디로 나를 울게 하는 시들. 다소 주관적인 표현들이긴 하지만 나는 내 글쓰기가 내 시쓰기가 이런 방식으로 나아가기를 바란다. 이것이 현재로서의 내 글쓰기에 대한 현실 감각이고 나만의 소통 방식이다. 어쩌면 우리는 단지 어떤 뉘앙스, 문맥적 배치에서 비롯된 언어의 낌새만으로 소통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어떤 소음들에 의해 중간 중간 끊겨버린 음악들처럼, 드문드문 공백이 있(다고 느끼)는 문장만으로 완전한 이해를 하고 있다고 착각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우리는 실제로 그렇게 불완전한 이해만을 공유하며 살아가고 있다. 슬프지만 그 불완전함을 있는 그대로 들여다볼 때, 바로 그 지점에서 보다 나은 이해를 위한 풍요로운 지점이 열리고, 이전에는 보지 못했던, 느끼지 못했던 언어의 낯선 지점이 보이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때, 언어의 알 수 없는 미학적 아름다움이 발생한다. 언어의 어떤 특별한 기미를 예민하게 감지할 수 있는 사람들이라면 알아차릴 수 있는 이상한 소통, 이상한 동감, 이상한 감흥이 생긴다.
그리하여 내게 있어 글쓰기는 언제나 알 수 없는 그 너머에 있다. 미지의 것, 완전히 써내려가기 전에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그 무엇, 그러나 이미 내 속에 있는 그 무엇. 관습화된 언어의 구조에서, 언어의 감옥에서 벗어나는 일. 익숙한 언어의 규칙 혹은 질서를 내려놓고 습관화된 의식의 통제에서 벗어나 무의식의 입구에 서 있는 일. 의도하지 않았던 어떤 의미나 무의미함을 발견하게 되는 일. 그 너머와 만나는 일. 그리하여 나는 아직 내가 쓰지 않은 글만을 편애한다. 씌어지지 않은 문장들만 편애한다. 이미 내가 만들어놓은 얼룩 같은 문장들을 디디고 또 다른 얼룩을 만들어 내면서. 내 글쓰기가 언어의 황폐함의 극단만큼이나 언어의 숭고함의 극단까지 나아가기를 바라면서. 황폐함과 숭고함의 극단은 맞닿아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면서. 결국 쓸모없는 아름다움만이 우리를 구원할 것이다. 지금으로서는 그렇게 계속 실패하고 실수하며 나아갈 수밖에 없다는 생각. 나는 여전히 허기를 느끼면서 글을 쓰고 더 큰 허기를 느끼며 문장을 마친다. 그 어떤 구원도 없지만, 글을 쓸 때의, 그 몰입하는 순간을 즐기면서. 명상의 한 방식으로 여기면서. 마침표는 우리에게 속한 것이 아니다. 그리하여 알 수 없는 미지의 세계로, 결국 나에게로. 그리고 가능하다면 너에게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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