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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호(2008년 겨울호) 신작단편/강인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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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부
댓글 0건 조회 2,492회 작성일 09-02-26 16: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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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작단편|
눈―어느 시인의 비밀 노트
강인봉


“어찌 왔는고?”
눈빛을 잔뜩 퍼렇게 세우고 아버지를 내려다보고 있던 지주가 퉁명스럽게 물었다. 그 앞에는 화롯불이 시뻘겋게 이글거리고 있었다. 하지만 아버지는 지주를 향해 납작 머리를 조아린 채 아무 말을 못하고 있었다. 
그 옆에 멀뚱히 쪼그리고 앉은 나는 하염없이 눈발이 쏟아져 내리고 있는 창 밖 먼 산을 바라보았다. 그날따라 눈이 온 산을 하얗게 뒤덮고 있었다. 나는 나도 모르게 목구멍 속으로 꼴깍 침을 넘겼다. 이런 날 스키를 타고 저 눈 위를 쌩쌩 내달리면 아주 제 맛이리라.  
“농사철도 아닌디…….”     
지주가 다시 내뱉었다. 이번에는 완연히 짜증이 섞인 목소리였다. 그제야 아버지는 나를 가리키며 겨우 더듬더듬 입을 열었다. 
“이놈이 이제 중학교에 입학하게 되었습니다요.”
“그래서?”    
이번에는 지주가 목소리를 낮추어 은근하게 물었다. 
그 말에 힘을 입은 아버지는 덥석 받았다.
“입학금이 모자라서 이렇게 영감님을 찾아온 겁니다요.”
그러자 갑자기 지주의 불호령이 아버지의 머리 위에 떨어졌다.
“중학교는 보내서 무엇 하나? 돈이 없으면 잠자코 엎드려서 농사일이나 가르칠 것이지.”
“이놈만은 그렇게 살도록 내버려둘 수 없습니다요.”
깜짝 놀란 아버지가 어눌하게 대꾸했다.
“지가 그렇게 안 살면?”
지주의 입가에 흐물하게 웃음이 물렸다.
“그러니까 가르쳐야 합지요.”
“허어, 그래도 이 사람이 말귀를 못 알아듣는구먼. 지금 당장에 돈이 없는데 자식놈을 어떻게 가르치나? 그리고 국민학교 나와서 농사를 지나, 중학교 나와서 농사를 지나 매한가지 아닌가. 나도 이 사람아, 소학교밖에 안 나왔네. 그래도 이렇게 잘만 살지 않는감.”
그날 결국 빈손으로 돌아오면서 아버지는 몇 번이고 깊게 한숨을 토해 냈다.
“사람이 원, 이렇게 맨날 개돼지처럼 천대를 받고 살아서야…….” 
하지만 나는 아버지의 뒤를 건성으로 따르며 집에 가서 얼른 스키를 탈 생각만 했다. 대나무를 적당한 길이만큼 잘라 반쪽을 낸 뒤 앞부분 끝이 위로 날씬하게 휘도록 불에 구워 만든 것이었다. 눈은 다시 솜처럼 펑펑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앞을 봐도 산이요 뒤를 봐도 산이었다. 내가 태어나서 자라난 곳은 그렇게 깊은 산의 한 언저리였다. 
그런데도 그 속에 그 어른의 논 백여 마지기가 용케 계단식으로 박혀 있었고, 우리 집은 그 천수답 몇 뙈기 소작으로 근근히 입에 풀칠이나 하며 사는 처지였다. 너무도 어린 탓이었을까. 그럼에도 나는 전혀 우리가 개나 돼지처럼 살고 있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렇게 나는 바보였다.
“돌아가신 느이 할아버지는 내가 너만 할 때 늘 이런 말씀을 하셨다. 사람이 모두 다 백 개 뼈마디가 똑같게 이 천지 사이에 태어났는데 누가 더 무엇이 귀하고, 천하고, 곱고, 추하겠는가.”
아버지는 다시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하긴 뭐 이놈의 가난이 죄지, 누굴 원망하겠냐.”  
그 자포자기를 할 수밖에 없는 심정 오죽했을까. 하지만 그때 나는 왜 그렇게도 아무 철딱서니가 없었는지. 내가 잠깐 한눈을 파는 사이 아버지는 성큼 저만치 앞서 가고 있었다. 벌써 20여 년이 지난 일이었다.
       
“그런데 여보, 저기 말야…….”
하다가, 나는 다시 또 입을 닫아 버렸다. 저녁 밥상을 부엌에 물리고 나온 아내를 붙들고 앉아 벌써 몇 번이나 이렇게 되풀이하고 있었다.
“이 양반이, 퇴근해서 집에 오자마자……. 하고 싶은 말이 있음 어서 하세요. 당신답지 않게 왜 그래요?” 
그제서야 아내는 내 코앞으로 바짝 다가앉으며 새침하게 말했다. 아내의 눈가에도 어느새 잔주름이 많이 잡혀 있었다. 나는 슬그머니 아내를 외면했다. 이런 아내에게 차마 그 말을 어떻게 꺼낸단 말인가. 우리에게 있어 이천만 원은 결코 적은 돈이 아니었다.
“하지만…….”
다시 신음처럼 내뱉다가 나는 문득 담배를 하나 꺼내 물었다.
등줄기가 으스스 떨려 왔다. 이놈의 방구석은 겨울만 되면 으레 이 모양이었다. 아침저녁으로 집 주인을 볼 때마다 수리를 좀 해달라고 하고 싶지만, 그러자면 자연 전세 방값을 올려달라고 할까봐 차마 그 말도 못하고 있는 실정이었다. 하지만 오늘은 결코 외풍 때문만이 아니었다. 
담배를 몇 모금 깊이 빨아 마시고 나는 지그시 눈을 감았다. 
오늘 출판사 앞에서 그분을 그렇게 만나게 될 줄을 어떻게 알았겠는가. 점심시간이었다. 다들 나가고 난 뒤에야 나는 하던 일을 덮어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출판사 앞 골목 속으로 깊숙이 들어가면 거기 허름한 설렁탕집이 있었다. 그래도 명색이 편집장 체면에 그런 곳에 가긴 뭣했지만 나는 혼자서 거의 1년 가까이 그 집에만 슬쩍슬쩍 드나들고 있었다. 
그런데 내가 마악 정문을 나섰을 때였다. 오십대 초반으로 보이는 사내 하나가 출판사 안으로 들어갈까 말까 망설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사내는 내가 식사를 다 마치고 돌아왔을 때까지도 그 자리에 그대로 머뭇거리고 서 있었다. 나는 희끗희끗 서리처럼 새치가 을씨년스럽게 내려앉은 사내의 머리를 보자 문득 추위를 느꼈다. 안 그래도 바람 끝이 매운 날이었다. 나는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그런데 그때였다.
“저어…….”
사내가 조금 떨리는 목소리로 나를 그 자리에 붙들어 세웠다. 머리를 두어 번 갸우뚱하며 나는 유심히 사내를 건너다보았다. 역시 모르는 얼굴이었다. 그럼에도 사내는 내 앞으로 다가왔다.
“자네, 김 종우지. 나를 모르겠나? 옛날 저 마석골에 살던…….”
그제야 나는 깜짝 놀랐다.
“아니? 선생님이…….”
나는 얼른 달려가 사내의 손을 꽉 잡았다. 코끝이 그만 시큰해 왔다. 그 동안 대체 어떻게 살았기에 이토록 행색이 몰라보게 초라해지시다니.
“반가우이.”
“선생님이 어떻게 여기까지…….”
눈물이 글썽 차올라 나는 말을 잇지 못했다.
“지나는 길에 그냥 한번 들러 보았네.”
하지만 그것은 거짓말이었다. 이분은 분명 나를 만나기 위해 일부러 어렵게 오신 것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자네 소식은 가끔 듣고 있었네. 이 출판사에 편집장으로 있다고? 자네 작품도 가끔 읽고 있었지. 시가 아주 좋더구먼.”
“모든 게 다 선생님의 덕분이지요.”
나는 다시 힘껏 담배를 빨아 마셨다. 모든 게 다 선생님의 덕분이지요. 아내는 벌써 이부자리를 깔고 아이들을 재우고 있었다. 다섯 살짜리 딸 하나와 세 살짜리 아들놈이었다. 그놈들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나는 다시 가만히 눈을 감았다.
그날 그렇게 빈손으로 집에 돌아온 아버지는 밤새도록 막걸리를 퍼마시며 횡설수설 세상을 원망했다. 
“하긴 뭐 누굴 원망하겠냐. 이놈의 가난이 죄지.”
보다 못해 나는 말했다.
“아버지, 너무 그러지 말아요. 그 할아버지 말이 맞는지도 몰라요. 지금 당장 돈이 없는데 중학교엔 들어가서 무엇 한대요. 그리고 그 할아버지 말대로 국민학교를 나와서 농사 지나, 중학교를 나와서 농사 지나 매한가지 아닌감요. 나도 그 할아버지보다 더 큰 부자가 될 수 있어요.”
“어느 세월에? 논 한 마지기도 없는데, 무슨 수로? 아무리 철때기가 없기로서니…….”
아버지가 기어이 나를 향해 두 눈을 부릅떴다.
그런데 그때 그 지주집의 귀하신 외아드님이 손수 우리 집에 찾아온 것이었다. 그는 그 무렵 대학교에 다니고 있었다. 그리고 그 도련님은 지주 영감과는 달리 퍽 인정이 많고 마음이 따뜻한 사람이라고 아버지로부터 늘상 듣고 있었다.
하지만 그날만은 아버지도 냉큼 그를 외면했다.
“도련님이 다 우리 집엔 어쩐 일이요?”
“아저씨, 제가 여기 종우의 입학금을 가지고 왔습니다.”
그럼에도 아버지는 무슨 오기에선지 심드렁하게 내뱉었다.
“그까짓 입학금만 있으면 무엇 한대요. 책도 사야 하고, 옷도 사야 하고…….”
“물론 그 돈까지 가지고 왔습니다.”
그제야 아버지가 도련님의 손을 덥석 움켜쥐었다.
“아이고 도련님, 이 은혜를 어찌 갚을지. 중학교만 나와도 대처에 가서 지 밥벌이는 할 수 있으니께요.” 
“하지만 종우야, 사람이 사는 건 꼭 잘 입고 잘 먹기 위해 사는 것만이 아니란다. 좀더 인간답게 살기 위해서 사는 거야. 그래서 꼭 중학교에도 들어가고, 고등학교에도 들어가고, 대학교에도 들어가야 되는 거지. 집안 형편이 어려우면 고학을 할 수도 있지 않냐. 지금 내 친구들도 고학하는 아이들이 많단다. 공부를 하기 위해 남에게서 도움을 받는 건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 너는 내가 앞으로 틈틈이 보살펴줄 테니까 그리 알고 공부나 한번 열심히 잘 해보자이.”
담뱃불을 비벼 끄며 나는 기어이 자신도 모르게 주르륵 눈물을 흘렸다. 그때 이상하게 어린 내 가슴에 그 지주집 안방의 시뻘겋게 이글거리는 화롯불 같은 것이 확 피어오르는 걸 느꼈다. 
나는 지금까지 세상을 살아오면서 그 말을 마치 성경처럼 여겼다. 그러기에 나는 아직 교회에 한번 나가본 적이 없었다. 교회 집사인 아내가 주일만 되면 그토록 교회에 나가자고 성화를 부렸지만, 나는 내가 믿는 종교는 따로 있다며 한사코 거절했었다. 그럼에도 나는 당장 오늘 점심때 있었던 그분과의 일을 차마 아내에게 못 꺼내고 있는 것이었다.
나는 다시 새 담배에 불을 붙였다. 하지만 담배가 마냥 쓰기만 했다. 그렇게 쓴 인생을 살다가 아버지가 시름시름 이름 모를 병을 앓다 돌아가신 뒤 나는 어머니와 내 밑으로 하나 있는 여동생을 데리고 서울로 아주 올라와 버렸다. 내가 서울에서 야간 고등학교를 나왔기 때문이었다. 
나는 그분의 말대로 기어이 대학교까지 나오려고 결심했는데 아버지가 그만 그렇게 돌아가시는 바람에 모든 꿈이 허무하게 무산되고 말았다. 내가 술을 입에 대기 시작한 것도 바로 이때부터였다. 그러던 어느 날 술집에서 우연히 그분과 마주친 것이었다. 방황하는 나를 보고 그분이 말했다.
“못난 녀석 같으니라구. 사내대장부가 그까짓 일로 좌절을 하다니. 대학에 가는 것은 좀더 인간답게 사는 법을 배우기 위해서야. 그렇다면 그 길이 어찌 꼭 한 가닥밖에 없겠는가. 그러지 말고 너도 한번 시를 써보지 않겠니?”
그때 그분은 모두들 알아주는 시인이었다.
“제가 어떻게 시를……. 저는 겨우 고등학교밖에 못 나왔는데요.”
“그러니까 한번 써보라는 거야. 그것으로 대학 대신 네 자신을 채워봐. 시는 왜 쓰는가? 저 자연과 하나가 되기 위해서지.”
“그럼 그 마석골 같은 우리 고향하고 말입니까?”
마석골은 참으로 물 맑고 아름다운 자연이었다. 봄에는 온 산이 마치 선혈을 흘린 듯 철쭉꽃이 지천으로 피었고, 여름에는 하얀 쌀밥 같은 싸리꽃이 달빛 아래 흐드러지게 깔렸으며, 가을에는 그 산이 온통 단풍으로 불타고 있었다.
하지만 그분은 말했다.  
“아니. 그건 자연의 일부일 뿐이야. 한 점 먼지 속에도 그보다 더 큰 자연이 깃들어 있지. 실은 삼라만상의 운행 이 자체가 바로 시요, 우리는 다만 제각기 다른 그 자기의 눈으로 그것을 보고 느낄 따름이지. 한 송이의 꽃, 강물, 구름, 바람 등등을 통해서 자기 내면의 소리를 듣는 행위. 그러므로 사물을 가장 정확히 보는 자가 시인이요…… 수양을 함으로써 참사람이 되고, 시는 거기서 오는 거야. 그래서 시수업詩修業은 곧 인간수업人間修業이라는 말이 있지. 그렇지 않고는, 제 아무리 몇 줄 끄적인다고 해서 그것이 결코 시가 될 수 없으며, 또한 시인이 될 리도 없지. 그 행위는 도리어 자연의 빛만 죽이는 결과인 거야. 저 흔한 참새들의 자기 넋두리지.” 
그런데 지금 그런 분이 돈 이천만 원 때문에 고통을 받고 있는 것이었다. 내게 자세한 얘긴 안 했지만 눈치를 보니 또 남의 빚보증이라도 잘못 서준 모양이었다. 그러기에 그의 부친은 아들 걱정 때문에 눈도 제대로 감지 못하고 저 세상으로 떠났다고 했다. 그럼에도 그는 그 부친이 돌아가시자 제일 먼저 한 것이 그 논들을 다 소작인들에게 나누어 준 일이었다.
“시누이가 정말 그 돈을 해줄까요? 그 돈만 해준다면 어떻게 해서든 이 기회에 내 집 하나 장만해 보겠는데…….”
아이들을 재우고 나서 내 쪽으로 돌아앉으며 아내가 말했다. 그래서 어머니는 여동생 집에 간 모양이었다. 그리 배운 것은 없지만 매제는 지금 수원에서 전자제품 대리점을 하고 있는데 사업이 꽤 잘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아내가 그쪽에다 진작부터 돈을 부탁해 놓고 있었다. 하긴 그러한 아내 덕분에 늦게나마 내가 대학까지 나오게 된 것도 사실이었다. 그래서 나는 더욱 그분과 약속한 이천만 원을 못 꺼내놓고 있었다.
“여보, 저기 말야……. 지금 은행에 들어가 있는 돈이 얼마나 되지? 천팔백만 원이라고 했던가?”  
이윽고 나는 힘차게 담뱃불을 비벼 꺼버렸다.
“그 돈은 왜요?”
아내가 시큰둥하게 되물었다.
“실은 말야, 저기 내 고향 마석골 그 지주집 아드님이…….”
그러자, 아내가 냉큼 다음 말을 받아 이었다.
“고향을 떠나올 때 부모님으로부터 물려받은 전답을 모두 무상으로 소작인들에게 나누어 주었다는 그 도련님 말이지요?”
“그러게 말야. 그런데 지금 그런 분이 사람 하나 잘못 믿어 집까지 몽땅 날려 버리고 길거리로 나앉게 되었다는구먼.”
생각해 보면 아내와 결혼을 하게 된 것도 다 그분의 덕분이었다. 그렇게 문학을 공부할 무렵 나는 또 하나 그분으로부터 일자리를 선사 받았다. 모처럼 운 좋게 부잣집 초등학교 6학년짜리 가정교사였는데 아내는 그 학생의 누나였던 것이다. 
그때 아내는 대학생이었지만 다행히 시를 좋아했던 까닭에 우리는 자연스럽게 가까워지게 되었고 그만큼 내 등단도 남보다 빨랐다. 그때 나는 그 삶의 향기가 짙게 배어 나오는 그런 시를 쓰려고 얼마나 부단히 애를 썼던가. 또한 그 부모의 반대를 물리칠 수 있었던 것도 아내가 어렵게 등록금을 마련하여 나를 대학에 보내주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단 한번도 아내의 도움 없이 등록금을 내본 적이 없었다.
“어머나, 그럼 그걸 어떻게 해요. 내가 그분의 시를 제일 좋아하는데…….”
“그래서 하는 말인데, 그 은행에 있는 돈을 어떻게 좀 빼내 쓸 수 없을까?”
“그 통장은 어머님이 가지고 계시잖아요. 그런데 어머님이 쉽게 허락하실까요? 당신도 어머님의 마음을 잘 아시잖아요.”        
“또 산 너머 산 이구만.”
나는 혼잣말로 쓰게 중얼거렸다. 사실은 아내보다도 어머니가 더 그 나이가 되도록 내 집 한 칸 없이 산다며 늘상 푸념을 늘어놓고 있었다.
“어머님이 오시면 잘 한번 말씀을 드려보세요. 이제 곧 어머님이 오실 거예요. 하지만 그분도 너무나 세상을 잘못 살아 왔어요. 아무리 세상 물정 모르는 시인이라지만…….”
이제 아내는 은근히 그분을 원망하고 있었다.
“그럼 세상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데?”
나는 아내를 향해 뚱그렇게 눈을 떴다. 
“아깝지도 않은가? 부모님한테서 물려받은 그 전답을 모두 소작인들에게 나누어 주게. 세상에 그런 바보짓이 어디 있겠어요.”
“그건 당신이 그 사람들의 생활을 몰라서 그래. 그때는 정말이지 소작인들 모두 그냥 밥 먹고 살기도 어려운 때였어. 우리 집만 해도…….”
더 이상 그 시절의 일들을 떠올리고 싶지가 않아서 나는 입을 다물었다. 사실 우리 집만 해도 그 지주집의 돼지우리보다 더 좁고 낮았다. 그래서 어른들은 방문을 열고 드나들 때마다 죄인처럼 허리를 잔뜩 구부려야 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요. 하기야 오죽했으면 그 부모님이 아들 걱정 때문에 눈도 못 감고 돌아가셨을까. 나도 다 어머님한테 들었어요.” 
“그러니까 보통 사람들은 이해 못할 위대한 시인이지. 그분은 언제나 말했지. 시인은 시인 이전에 성스러운 방랑자가 되어야만 한다고.”
……그러므로 모든 사람들의 고통을 자기의 고통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이것이 시인의 사명이다. 어떤 사물이든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것은 다른 또 하나의 형상을 가지고 있다. 그 자연을 다시 한번 내 안에서 발견할 때 시는 거기 있는 것이다. 사람들이 시를 읽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래서 좋은 시는 사람을 살리는 법이고, 모든 예술 작품은 그 방랑의 소산물이다.
“그나저나 어머님은 왜 아직도 안 오시지? 주무시고 오시려나. 조금만 더 기다려 보죠. 어쨌거나 그분은 당신의 은인이잖아요. 나는 시인이 아니어서 그런 세계는 잘 모르겠지만.”
역시 아내는 착한 사람이었다.
“물론 당신도 좀 도와주겠지?”
나는 아내의 손을 꼭 잡아 끌었다.
“왜 이래요. 당신은 꼭 무슨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만…….”
그러면서도 아내는 못 이기는 척 내게 몸을 맡겨 왔다.
“당신은 제발 그런 위대한 시인은 되지 마세요. 알았죠?”
아내가 꿈틀꿈틀 내 가슴속으로 파고들었다.
“실은 당신이 더 그쪽에 가까운 사람이야.”
나는 가만히 아내의 등을 쓸어 주었다. 그것은 사실이었다. 어쩌다 밖에 나가 못 볼 것을 보거나, 견디기 힘든 일을 당했을 때도 아내는 얼굴에 항상 그 넉넉한 미소를 잃지 않고 있었다. 그녀는 대체 어디다 그 밑뿌리를 두고 살기 때문일까. 사실 인간은 누구나 아름다워지기를 소망하지만 결국 자기의 얼굴은 자기가 만든다. 
마음의 움직임에 따라 그 얼굴의 모든 것이 변한다. 그러므로 무릇 미추美醜는 그 인간성의 정결 여부에 있는 것이지, 사실 화장이나 사치는 일종의 사기 행위와 다름없는 것이다. 나는 계속해서 포근히 아내의 등을 쓸어 주었다. 아내의 몸속에서는 차츰 깊은 샘물이 은은히 차오르고 있었다. 
“중국의 시성詩聖 백낙천이 지방의 관리로 있을 때였지. 하루는 관내에 시찰을 나갔는데 어떤 노승이 하나 나무 꼭대기에 앉아서 참선을 하고 있는 거였어. 그래서 백낙천이 거긴 위험하니 빨리 내려오라고 했지. 그런데 그 노승은 허허 웃으며 지금 참으로 위험한 사람은 내가 아니라 바로 당신이라고 하는 거야. 그 말을 들은 백낙천은 이분은 필시 보통 스님이 아니구나 싶어 귀감이 될 수 있는 좋은 말씀 한 마디를 부탁했어. 그러자, 노승은 착한 일을 하면 천당에 가고 악한 일을 하면 지옥에 간다고 했어. 그건 삼척동자도 다 아는 사실이 아니오, 백낙천이 말했어. 노승은 생각으로 아는 건 아는 것이 아니라고 했어. 몸소 실행으로 알아야 그것이 참으로 아는 것이다. 듣고 있어?”
아내에게서 아무런 반응이 없기에 나는 물었다.
“그래서 백낙천은 그때부터 시를 쓰면 꼭꼭 자기 옆집의 글자도 모르는 아주 무식한 노파에게 읽어드렸다는 얘기 아녜요. 벌써 당신한테서 열 번도 더 넘게 들었어요.” 
“그렇지만 그 노파가 어떻게 시를 이해할 수 있겠는가? 그래서 백낙천은 그 노파가 자기의 시를 이해할 수 있을 때까지 쉽게 고치곤 했다는 거지. 그러나 백낙천이 시를 쉽게 고쳤다고 해서 결코 그 어떤 시적 수준을 낮춘 것은 아닐 거야. 마음이지. 자기의 마음을 모든 이들에게 한 점의 가림도 없이 그대로 보여준 것이겠지. 마음이란 원래 자기를 가두고 있는 벽만 허물어 버리면 거울을 대하듯 맑게 드러나기 마련이니까. 그래서 백낙천의 시수업은 그 벽을 허물어뜨리는 위대한 작업이었던 거지.”
그때 도둑고양이처럼 살금살금 대문을 흔드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머니가 돌아왔다는 신호였다. 
어머니는 수원에서 여동생이 새 옷을 한 벌 사주었는지 못 보던 옷을 입고 있었다. 하지만 어머니는 그분의 말을 꺼내기가 무섭게 펄펄 뛰었다. 아직 돈 얘기는 나오기도 전이었다.
“우리가 마석골에서 살 때 그 영감태기한테 얼마나 억울하게 당하고 살았는디, 너는 뭐가 좋아서 아직도 그 사람들을 못 잊고 있냐? 너는 왜 아직 그 나이 먹고도 그렇게 철때기가 없냐?”  
나는 멍청히 입을 벌리고 어머니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억울하게 무엇을 당하다니요? 오히려 큰 은혜를 입었지.”
“너는 그때 어려서 잘 몰라. 시방 생각해 보면 느이 아버지도 그 집 머슴한테 즉사하게 얻어맞고부터 골롱골롱 하다가 죽은 거여.”
“그건 말도 안 되는 소리요. 아버지는 술을 너무 좋아해서 병을 얻어 돌아가신 거예요. 그리고 그 집은 논을 다 소작을 주었기 때문에 머슴도 없었구요.”
“안 그려. 그전에는 그 집에서 세 필지기 정도는 직접 농사를 지었어. 그러다가 일꾼들 품값이다 뭐다 해서 별 수지가 안 맞는다고 죄다 소작을 주었지. 나는 시방도 그 생각만 하면 이가 다 갈린다.”
“어머님, 설사 그렇다 해도 그때가 언젠데 그러세요.”
이번에는 아내가 조심스럽게 나를 거들었다.
“그리고 요즘 그 집 아들이 누구한테 사기를 당해서 쪽박을 차게 생겼다는구만.”  
무엇이 그리도 고소한지 어머니가 갑자기 생글생글 웃었다.
“아니, 어머니가 그걸 어떻게 알아요?”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정말이지, 그 웃는 얼굴을 한 대 쥐어박아 주었으면 싶었다. 
“어떻게 알긴. 수원 가서 느이 동생한테 들었지. 하기사 그 사람들은 우리가 그때 마석골 코딱지 같은 집에서 뼈 빠지게 고생하고 살 때 잘 먹고 잘 살았으니 그렇게 돼도 싸지.”
어머니는 마치 신이 난 아이 같았다.
“그래도 그 아드님은 그런 분이 아니었잖아요.”
“아니긴 뭐가 아니냐.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지.”
어머니는 더 이상 말할 것도 없다는 투였다.
“그럼 그때 제가 중학교에 입학할 때 그 입학금은 누가 주었나요?”
“…….”
어머니는 아무 말도 못했다. 다문 입만 삐죽거렸다. 
“그 돈은 갚아야 할 게 아녜요.”
그러자 어머니가 펄쩍 뛰었다.
“뭐, 뭐시야? 그 돈을 갚어?”
“그래요. 이자까지 쳐서요.”
“야가 시방 미쳤능가?”
“수원 가서 종순이한테 돈을 얼마나 빌려 왔어요?”
“무슨 돈을 빌려?” 
“아까 제가 다 전화를 해봤어요. 어서 그 돈 내놓으세요.”
전화를 해봤다는 말은 거짓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 말을 하면서 얼마나 목이 타는 듯했는지 모른다.
“어머님, 그러세요. 그래서 이이가 오늘 그분에게 이천만 원을……. 누구 일이 되었든 우선 급한 불부터 꺼야지요.”   
아내도 다시 나섰다.
“이제는 야까지 미쳤능가? 그 아이들도 시방 장사가 잘 안 돼서 혀 빠지게 고생하는디, 무슨 돈이 있겠냐.”
어머니가 아내를 향해 눈꼬리를 사납게 치켜 올렸다. 
“어머님, 집이야 언제라도 살 수 있지만…… 그분은 얼마나 답답하고 막막했으면 이이한테…….” 
다시 더듬거리는 아내의 말을 어머니가 야멸치게 잘랐다.
“이 돈은 내가 죽어도 못 내놓는다. 이게 어떤 돈이라고! 이참에 어떻게 해서든 내 집 한 칸 장만해 보려고 내가 그 사위 자식한테 가서 얼마나 혀가 닳도록 사정사정을 했는디.”
다음날 아침 나는 무거운 마음으로 집을 나섰다. 그래도 어쩔 수 없이 출근은 해야 했다. 골목을 돌아 큰 거리에 나오자 아랫도리가 자꾸 휘청거렸다. 사람들의 발걸음은 부산하게 오가고 있었다. 잡다한 소음들이 낮게 깔리고 있었다.
“그렇다고 너무 무리는 하지 말게. 어떻게 잘 되겠지.”
하지만 나는 그분의 이 말이 더 아프게 마음에 걸렸다.
휴지 조각들이 스산하게 굴러다니고 있었다. 문득 눈을 들자 길 건너 교회의 첨탑 끝에 올려놓은 십자가가 올연히 날개를 접고 앉아 먼 여행을 꿈꾸고 있는 학처럼 보였다. 그것은 이제 막 두 날개를 쫙 펴고 하늘 끝으로 불쑥 날아오를 것만 같은 모습이었다. 잠시 그것을 바라보고 있는 내 눈빛은 어느새 끈적하게 젖고 있었다. 
그런데 내가 버스 정류장까지 왔을 때였다. 뒤에서 허겁지겁 부르는 아내의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아내의 눈길과 마주치지 않으려고 부러 손목시계를 들여다보았다. 어쩌면 나야말로 시인의 탈을 쓰고 자신의 서글픈 넋두리를 마치 진리인 것처럼 착각하고 있는 건 아닐까.  
아내를 처음 만났을 때도 나는 그랬다. 지금은 믿음직스러운 처남이 되었지만, 그 초등학교 6학년짜리 아이를 가르치고 마악 대문을 빠져 나오는데 그때 내 뒤를 가만가만 따라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누굴까. 나는 걸음을 멈췄다. 또박또박 발소리가 내 곁으로 다가왔다. 아내였다. 그때 그녀는 대학생이었다. 서로 눈이 마주치자 그녀는 하얀 이를 드러내며 깨끗하게 웃었다.   
“나도 시를 좋아해요.”
하지만 나는 우물쭈물하다가 눈빛을 금방 땅바닥에 떨어뜨려 버리고 말았다. 그때까지 세상을 살아오면서 그렇게 사람의 얼굴을 어렵게 바라보긴 처음이었다. 뭐라고 설명하기 묘한 감정이었다. 어쩐지 그 집에서 무엇을 훔쳐 나오다 들키기라도 한 것처럼 부끄럽고 우울한 마음이었다. 그날 나는 끝내 그녀에게 그 시선을 들지 못했다.
“이 돈 가지고 가세요.”
아내가 웬 수표 뭉치를 내게 내밀었다.
나는 멍하게 아내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추운 겨울 날씨인데도 급히 달려오느라 콧등에 송골송골 땀방울이 맺혀 있었다.
“아니, 그건 무슨 돈이지?”
“훔쳤어요.”      
아내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훔치다니?”
“어머님 가방에서 훔쳐낸 거예요.”
순간 나는 입을 딱 벌리고 말았다. 
“뭐라구? 지금 당신 뭐라고 했어? 그러다 당신 정말 어머니한테 쫓겨나면 어떻게 하려고…….”   
눈이라도 오려는가. 하늘을 올려다보니 끝없이 마음이 찌뿌드드했다. 그래도 오늘은 바람 끝이 그리 맵지가 않은 걸 보면 어쩐지 모처럼 눈발이 한바탕 쏟아져 내릴 것만 같았다.
“그래도 당신 애간장 타는 거보다야 낫지요 뭐. 안 그래도 오늘 친정에 한번 가보려고 했어요. 친정어머니한테 잘 말하면 아마 그런 정도의 돈쯤은 도와줄 거예요.”  
“당신이야말로 정말 위대한 시인이군.”

하지만 내가 그 돈을 들고 찾아가자 뜻밖에도 그분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밝게 웃고 있었다. 습관인양 그분은 혼자서 서재에 앉아 책을 읽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것은 금강경金剛經이었다.
책을 덮고 일어서며 그분이 말했다.  
“그러잖아도 내가 먼저 자네에게 연락을 하려고 했는데, 왔군. 공연히 자네에게 걱정을 끼쳐서 미안하이. 사실은 나하고 무엇을 좀 동업하던 친구가 하나 있었지. 나는 그 친구가 아주 도망간 줄 알았는데 어젯밤 다시 돌아왔더군. 그러니 이제 그 돈은 필요가 없게 되었어. 어쨌든 고마우이.”
이윽고 그때 하늘에서 뚝뚝 진눈깨비가 떨어지기 시작했다. 그것은 이내 다시 눈송이로 바뀌어 벚꽃이파리처럼 풀풀 날리고 있었다.
“눈이다.” 
저 아래 골목에서 아이들이 뛰어나오며 철없이 하얗게 함성을 질렀다. 그래도 어쨌든 눈이야 오면 좋은 것이지. 나도 하늘을 향해 조그맣게 소리 내어 중얼거렸다. 이런 날 마석골에서는 그 날씬하게 대나무를 구워 만든 스키를 타고 쌩쌩 내달리면 아주 제 맛이리라. 
다기茶器를 꺼내 놓으며 무슨 생각을 하는지 언뜻 그분의 입가에 뜻 모를 미소가 스치고 있었다. 나는 까닭 없이 머리를 주억거렸다. 당신이 무엇을 생각하든 나는 그 한점 미소만으로도 그저 족한 것이다. 
전기스토브 위에 올려놓은 주전자의 물이 끓자 그분은 내 잔부터 차를 채워 주었다. 지난여름 쌍계사 스님한테서 선물 받은 것이라고 한다. 작설차의 맑은 향이 입 안에 은은히 퍼지고 있었다.  
그분은 다시 천천히 말을 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끊임없이 그 생명의 비밀을 찾아야 하는 거야. 그 생명의 비밀은 모든 사물들이 다 같이 공유하고 있거든. 자네 마음속에 내가 있듯이. 그러므로 우리가 쓰는 시는 자연에서 자신을 발견한 만큼의 기록이요, 그 인생의 한 표정일 따름이지. 여기에 무슨 기교가 따르겠는가. 사실 저 자연에 무슨 형식이 있겠나. 형식이 있다면 그것은 이미 자연이 아니지. 이것을 얼마나 체득하느냐에 따라서 그 신비의 문은 열린다. 신비. 이것이 바로 모든 생명의 비밀이자 시의 비밀이지.”
그분은 그제야 무심하게 눈을 들어 창 밖에 주었다. 어느 사이 하늘에서는 함박눈이 그 언젠가처럼 펑펑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저 점점 숨소리가 굵어지는 작은 생명들. 지금 그 하나 하나의 눈도 다 그대로 신의 한 소생들일까. 다들 철저히 신들린 얼굴이다. 몽롱하게 헛발을 디디고 하수구에 빠지는 놈들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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