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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호 신작시/장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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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이지
납량특선 외 1편
―한양호일漢陽好日․5
공중변소의 문이 활짝 열리고 도끼가 허공을 가른다. 수음을 하던 청소년의 머리가 ‘화들짝’ 떨어진다(라는 건 물론 어른들이 지어낸 이야기지만). 어느 날 달동네 쓰레기장에 머리가 굴러다닌다. 시간이 없어 연애를 못한다는 옥탑방 미스 윤이 머리를 어항에 넣고 기른다(라는 건 어느 만화에서 본 건지 아리송하다). 달동네의 달빛은 청승맞게 푸르고.
어느 날 달동네 꼭대기 집으로 돌아가다가 아내와 함께 내려오는 내 도플갱어를 본다. 아내도 내 편이 아니고, 아들도 나를 못 알아보고. 내가 있다고 할 수 있느냔 말이지. 밤새 공터 쓰레기장에 털썩 앉아 웬 머리와 더불어 존재의 비애에 대해 토론한다. 새벽은 달동네 사람들을 지운다. 겁 없는 똥개들만 짖고, 어느 날은 가끔이지만 머리를 지운다.
명예 퇴직한 교감 선생님(이라지만 정말은 전직 제비 선생님)이 어디서 부잣집 퍼그의 머리를 달고 나와 골목을 쓸고 계신다. 비는 어디다 두고 도깨비를 들고 나와 쓴다. 일상은 언제나 서늘하고 머리는 잃어버리기 십상이다. 동네 목욕탕 앞. ‘카운터에 맡기지 않은 물품의 분실에 대해서는 책임을 지지 않습니다.’ 에구, 내 머리는 조인성 머리였는데, 물어내세요. 으앙.
구멍가게 앞 편의점
―한양호일漢陽好日․6
달동네 구멍가게 앞에 새로 편의점이 생겼습니다. 구멍가게 아줌마가 가게 앞 평상에 앉아 편의점 구경에 한창입니다. 고시생이 소주 한 병, 세탁소 김씨가 라면 다섯 개, 모퉁이 양철대문 집 딸이 담배 한 갑을 사갑니다. 가로등이 드문드문 슬픈 눈을 뜨면 온전한 어둠이 가지색으로 익어갑니다. 어둠 속에서 편의점은 냉장고의 불빛처럼 아늑한 빛을 머금는다고, 죠스바를 먹으며 아줌마는 생각합니다. 아저씨는 야구중계에 넋이 나가 있고, 아줌마는 입가에 묻은 어둠을 스윽 닦으며, “밥이나 지으러 가야겠다.” 끙, 하고 일어섭니다.
자정의 달동네. “편의점으로 오세요. 만 원 이상 고객께 편의점 쿠폰을 드립니다. 쿠폰이 세 개 모이면 그 주에는 복권 당첨 기본, 성인비디오 주인공들과 만남을 주선해드립니다. 여당의 공천권과 달나라 왕복 여행권도 드립니다.” 턱없이 작은 푸른색 제복을 입은 편의점 주인이 대머리를 반짝이며 수선을 떱니다. 동네 사람들이 개미로 변해 편의점으로 몰려듭니다. 편의점에 빨갛고 노란 불이 들어오고 대머리 아저씨는 고무 가면을 뒤집어쓴 외계인으로 변신합니다. 전함 ‘편의점’은 아늑한 불빛을 발하며 달동네를 뜨려는 모양입니다.
“내 그럴 줄 알았지. 이 외계인 놈들아, 아, 아.” 구멍가게 아줌마가 자다가 말고 사자후를 터뜨립니다. 목구멍 속에서 목젖이 바르르 떨립니다. 아저씨가 한 다리를 들었다가 놓으며 군더더기 없는 스윙으로 베개를 집어던지자, 잠실구장을 가득 메운 동네 사람들이 열광의 도가니에 빠져듭니다. 홈! 런! 아저씨가 한 손을 번쩍 쳐들어 보입니다.
장이지∙2000년 ≪현대문학≫으로 등단. 시집으로 '안국동울음상점'이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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