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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호 신작시/전건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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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건호
수선공 외 1편
고장 난 티비를 뜯어
회로판 미세먼지를 털고 봉합한다
지직거리던 화면 깨끗하다
먼지 좀 털어냈다고
고철덩어리가 살아 숨 쉰다
사각의 브라운관
여주인공 찬바람 일으키며 노려본다
냉랭하게 도리질 하고
아무리 달래도
회로 꼬였는지 말이 안 통한다
둘 사이 연결된 통로 마가 끼었는지 자꾸만 어긋난다
어디가 꼬인 걸까
무엇에 상처입어 눈물 흘리는 걸까
배배 꼬인 실타래
저 둘의 가슴속
뜨거운 눈빛으로 집도해보고 싶다
혈관 투시해 막힌 회로 풀고
눈물 얼룩진 신경선 말끔히 닦아낸다면
둘 사이 끊긴 회로 고압전기 통하지 않을까
등 돌렸던 사람들 애틋해지고
입술 달싹이며 서로 이름 불러주다가
불현듯 달려가게 할 수 없을까
분분하게 어지러운 전파 다 차단시키면
검은 밤 보름달 둥실 떠오를 일 아닌가
견본품
귀성길 파김치 되어
대문을 밀치는 순간 얼굴 후끈하다
근무복이 바뀌면서 남은 견본 몇 벌
견본품이란 빨간 글씨 거슬렸지만
들일 할 때 입으면 좋을 듯 해 몇 벌 보내드렸다
까맣게 잊고 살다 추석에 내려오니
빨간 인쇄 선명한 옷 입은 아버지 반색하신다
철없이 타관 유랑하다 귀향하는 훗날의 내가 저럴까
앞만 보고 달리다
우연히 만날 것 같은 내 자화상 같았다
뼈골 빠지게 가르쳐 놓았더니
저 먹고 살기도 바빠 까치발 띠고 헤매다
명절에야 삐쭉 고개 들이미는 염치없는 자식
삽살개가 나무라듯 컹컹 날뛴다
아버지 그 옷 벗어 버리세요
왜 이 옷이 어때 그러냐, 나 편하면 그만이지
껄껄 웃는 아버지 보며 어머니 혀 차신다
저 옷만 걸치고 나서면
야, 이놈아 옷이 견본이냐 네가 견본이냐
동네 영감탱이들 씨부렁대도
들은 채 만 채 저 옷만 끼고 다니신다
당신 견본품 되고 처자식 우세하는 줄 모르신다
용돈 한 번 못 보내드리고
견본 몇 벌 보내드렸더니
아들 회사 자랑할 요량인가
잘난 자식 둔 덕에 견본품 된 아버지
훗날 탈색되어 빛바랜 채 나타날
내 견본품이 저럴까
전건호∙2006년 ≪시와정신≫으로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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