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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호 서평/조하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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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이재무, <저녁 6시>(창작과 비평)
■우대식, <단검>(실천문학)
■장이지, <안국동울음상점>(랜덤하우스)
1. 말소된 혁명의 기억으로서 일상성
현대인들에게 일상은 매일 쳇바퀴처럼 반복되는 출근전쟁, 시간에 쫒기는 과도한 업무와 극도의 권태감, 피로를 생각나게 한다. 그러나 현대인들은 스트레스를 유발하는 이러한 일상성에서의 일탈을 염원하면서도 실직이나 퇴직 등의 사유로 실제적으로 그것에서 벗어나게 될까봐서 전전긍긍해 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일상성이란 단순한 일상의 반복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현대성과 더불어 현대 산업 사회의 도시적 특징을 의미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일상성의 문제가 근대적 시간관과 도시적 공간성이라고 하는 현대성의 경험과 연관된 것이라고 할 때, 자연과의 연대기적인 삶의 방식에서 벗어나 인간은 도시적 공간성의 경험을 통해 자아와 세계의 동일성의 기원으로서 서정으로부터 추방되기에 이른다.
그런데 이때 자본주의 사회의 일상성 비판 속에서 태동된 사회주의 이데올로기는 혁명을 통해 소외의 문제점을 불식시키려는 노력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현대사회의 일상성을 비판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왜냐하면 그것은 일상성을 자본주의 사회의 구조적 모순으로 이해함으로써 정치적 전복으로서 혁명을 통해 자본주의 사회의 일상성을 타개하고자 했기에, (노동) 소외를 극복하려는 노력에도 불구하고, 이데올로기에 의해 자연인으로서 인간을 소외시키는 현상을 초래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사회주의 이데올로기에 의해 추동된 이러한 혁명은 무의식의 세계를 드러내기 위해 의식 세계 즉 문명의 세계에서 잠재된 무의식적 리비도인 성의 가치에 의해 일상을 회수한 프로이드와 마찬가지로, 자본주의의 구조적 모순으로 지목된 일상성의 전복을 위해 일상을 (노동) 소외라는 일상성의 맥락에서 파악함으로써 결과적으로 일상의 의미를 제한하였다. 소비 이데올로기에 의해 지탱되어가는 현대 사회의 모순에도 불구하고 전복의 상상력으로서 더 이상 혁명을 꿈꾸지 않게 된 것은 이 때문이다. 시효가 상실된 언어처럼 혁명은 오래되었으나 이제 아무도 혁명을 꿈꾸지 않게 된 것이다.
2. 사디즘과 마조히즘으로서 일상의 수락과 알.량.한. 낭만에 관한.
이재무 시인의 시집 <저녁 6시>는 이러한 일상성의 시․공간이 잘 드러나 있다. 특히 그 가운데 표제시에 해당하는 시 「저녁 6시」에는 시적인 것이라곤 전혀 찾을 수 없는 일상성의 시간 속에서 ‘저녁 6시’가 되어도 오지 않는 ‘저녁’을 찾아 배회하는 현대인의 모습이 드러나 있다.
저녁이 오면 도시는 냄새의 감옥이 된다
인사동이나 청진동, 충무로, 신림동,
청량리, 영등포 역전이나 신촌 뒷골목
저녁의 통로를 걸어가 보라
떼지어 몰려오고 떼지어 몰려가는
냄새의 폭주족
그들의 성정 몹시 사나워서
날선 입과 손톱으로
행인의 얼굴 할퀴고 공복을 차고
목덜미 물었다 뱉는다
냄새는 홀로 있을 때 은근하여
향기도 맛도 그윽해지는 것을,
냄새가 냄새를 만나 집단으로 몰려다니다보면
때로 치명적인 독
저녁 6시, 나는 마비된 감각으로
냄새의 숲 사이 비틀비틀 걸어간다
-이재무, 「저녁 6시」 전문
‘마비된 감각으로’ 몰려다니는 ‘저녁의 통로’에서 시적 자아는 ‘공복을 차고/목덜미 물었다 뱉는다’라고 표현처럼 사나운 공복감과 마주한다. 저녁의 도시에서 그곳은 ‘냄새의 폭주족’이라는 표현처럼 폭력적이어서 ‘향기와 맛’을 잃어버린 사나움의 집단성이 ‘떼지어’ 몰려다닌다.
이러한 도시의 풍경 속에서 ‘저녁 6시’의 시간은 기다림과 그윽함의 시간이 아니라, 공복과 허기의 시간일 뿐이다. 영원히 사라진 ‘저녁 6시’, 즉 도시라고 하는 일상성의 풍경 속에서 시인은 ‘마비된 감각’을 안고 살아가는 현대인의 삶을 드러냄으로써 일상의 상실을 역으로 드러낸다. 도시인들을 주체로 표상하는 세련된 감각의 이데올로기가 근대 이후 지속된 소비 이데올로기를 대신한다고 할 때, 이러한 습성을 시에서 ‘마비된 감각’, 나아가 ‘치명적인 독’으로 인식하는 것은 감각의 주체화에 대한 부정을 통해 시적 자아가 일상성의 시간-‘저녁 6시’-을 부정하려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일상성에 관한 이러한 부정은 지속의 시간으로서 경험적 시간, 즉 잃어버린 일상의 시간에서 비롯한다. 부정을 통해 그는 ‘치명적인 독’인 일상성의 감각적이고 관념적인 시․공간에 함몰되지 않고 스스로를 지켜나려는 것이리라.
오늘 나는 한 방향만을 고집하는
저 낯익은 사내에 대해 노래하련다
회초리가 와서 자신의 몸을
때리면 때려댈수록 더욱
돌고 돌면서 미쳐 날뛰면서 그는
회초리가 빨리 더 빨리
다녀가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다
맹렬한 속도로 돌고 도는 관성은
바라보고 있으면 바닥에 뿌리를 내린 것처럼
직립의 회전을 보이기도 하나
주기적인 매질이 없으면
언제라도 바닥에 내팽겨질 가련한 신세
그러기에 팽이는 돌면서 매를 부르고
회초리는 팽이의 몸에 척척 감기며
가학의 쾌감에 전율한다
저 현기 속에 오늘의 우리가 있다
오, 저것은 얼마나 지독한
자존의 마조히즘과 사디즘이란 말인가,
-이재무, 「팽이」 전문
‘주기적인 매질이 없으면/언제라도 바닥에 내팽겨질 가련한 신세’라고 하는 ‘팽이’의 존재방식을 통해 시적 자아는 유년 시절의 ‘회초리’에 대한 경험을 통해 삶의 고통을 정면으로 마주한다. ‘맹렬한 속도’로 도는 ‘팽이’의 ‘관성’을 보며 ‘바닥’에 ‘뿌리’내리기를 염원하는 것은 ‘때리면 때릴수록 더욱/돌고 돌면서 미쳐 날뛰’는 그것의 ‘관성’을 통해 감각적이지만 권태로운 일상성의 시간에서 벗어나 지속으로서 삶을 긍정하려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때 ‘팽이’의 속도를 통해 ‘자존의 마조히즘과 사디즘’이라고 하는 ‘가학의 쾌감’을 느끼는 것은 그의 시가 일상성에 대한 부정에서 나아가, 위악적일 망정 지속의 존재방식을 일상의 우위에 두려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지속의 의미야말로 이재무 시의 진정한 주체이다. 승패의 주도권을 섣불리 이야기하지 않으면서 본능에 가까운 생에 대한 열망이야말로 그의 시가 지닌 무시할 수 없는 무기인 셈이다.
그의 시에 ‘알량한’ 낭만의 현장이 자리하는 것은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생의 지속에 대한 열망으로 그의 시는 섣불리 낭패를 경험하는 낭만적 삶의 변두리로 나아가지 못한다. ‘몰래 숨겨놓은 애인’을 데리고 ‘소문조차 아득한 포구’에서의 삶은 생의 지속을 치열하게 열망하는 자에게 쉽게 허락될 수 없기 때문이리라.
몰래 숨겨놓은 애인 데불고
소문조차 아득한 포구에 가서
한 석 달 소꿉장난 같은 살림이나 살다 왔으면,
한나절만 돌아도 동네 안팎
구구절절 훤한, 누이의 손거울 같은 마을
마량에 가서 빈둥빈둥 세월의 봉놋방에나 누워
발가락장단에 철지난 유행가나 부르며
사투리가 구수한, 갯벌 같은 여자와
옆구리 간지럼이나 실컷 태우다 왔으면.
사람들의 눈총이야 내 알 바 아니고
조석으로 부두에 나가
낚싯대는 시늉으로나 던져두고
옥빛 바다에 시든 배추 같은 삶을 절이고
절이다가 그것도 그만 신물이 나면
통통배 얻어 타고 휭, 먼 바다 돌고 왔으면.
감쪽같이 비밀 주머니 하나 꿰차고 와서
시치미 뚝 떼고 앉아
남은 뜻도 모르는 웃음 실실 흘리며
알량한 여생 거덜냈으면.
-이재무, 「좋겠다, 마량에 가면」 전문
지속으로서 삶에 대한 열망에도 불구하고 그의 시는 선뜻 낭만을 동경하지 않는다. ‘알량한 여생’에 대한 인식은 그의 시의 두둑한 밑천이면서 동시에 한계점일 것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섣불리 낭만이라고 하는 생의 환상을 동경하기보다 본능에 가까운 지속으로서 삶을 추구하는 것은 그의 시가 자리하는 생에 대한 치열한 인식을 드러낸다. 일상성의 시․공간에서 감각의 이데올로기와 더불어 낭만적 환상에 대한 이러한 부정은 일상성을 부정하고 지속을 통해 일상을 일상성의 세계에서 확고하게 자리매김하려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즉 ‘지속’으로서의 일상의 의미를 일상성의 세계에 병치함으로써 일상성의 세계에서의 일상의 상실을 부정하려는 것이다. 그의 시에 낭만적인 세계에 대한 환상이 부재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따라서 그의 시는 ‘팽이’처럼 사디즘과 마조히즘으로서 일상을 수락함으로써, 일상성의 세계에서의 상실을 부정하고 절망에 섣불리 길을 잃는 일없이 견고한 지속의 삶으로서 일상을 향해 묵묵히 길을 터 가려는 것이리라.
3. 로드킬에서의 칼의 비애와 푹.푹. 잠기지 않는 황량한 낭만에 관한.
우대식 시인의 시집 <단검>은 무협영화에 등장하는 화려한 검객의 검술이 아니라, 시인의 생에 오롯이 얹혀진 칼의 운명과 그에 대한 비애의 노래이다. 무슨 화려함의 검술을 보려는 이에게 그의 시집이 다분히 실망스러운 것은 이 때문이리라. 그의 시는 ‘忍’이라고 하는 상형문자처럼 자신의 생에 오롯이 얹혀진 칼의 운명을 노래한다.
검수로 한 편의 시를 쓰겠다
가지와 잎, 꽃과 열매 모두가 칼인 나무
어딜 쥐어도 피가 철철 흐르는 그 나무
천 년을 삶아 종이를 만들겠다
꽃잎 모양의 칼끝으로 철필을 새기겠다
저 땅으로부터
모든 부채와 소통에서 해방되어
칼로 된 꽃과 맞설 것이다
그가 나를 찌르면 나는 꽃이 된다
허공을 가로지르는 필살의 가지 끝에서
나는 참혹한 노래다
―우대식, 「검수劍樹」 전문
‘가지와 잎, 꽃과 열매 모두가 칼인 나무’는 ‘어딜 쥐어도 피가 철철 흐르는 나무’라는 표현처럼 온몸이 칼인 시적 자아를 의미한다. 온몸이 칼인 나무는 오래 칼을 달고 사는 동안 ‘소통’될 수 없는 ‘부채’를 지고 ‘허공’을 향해 제 몸의 ‘칼’이 커가는 것을 보는 참혹함을 겪어야 했을 것이다.
그런데 이때 ‘칼로 된 꽃’과 맞서겠다는 것은 온통 칼인 제 몸의 참혹함을 벗어나려는 것이라기보다 생의 참혹, 참혹한 생의 얼굴과 정면으로 마주하려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애초에 ‘나는 참혹한 노래’였으므로 그는 생의 참혹함을 정면으로 바라봄으로써 참혹함의 생에게 정면 승부를 신청하려는 것이리라.
오라
이곳은 눈비 내리는 곳
이 진창으로 해탈도 오고
길 잃은 개들도 오라
철없는 사람도 용서하시라
바람의 지도를 따라 오늘 이 암유의 도시에
꽃이 피고 새가 운다
미학주의자들은 죽었다
모두 매장되었다
내 몸의 회로도 다 끊어졌다
피안에서 흘러오는 배 한 척
점등이 안 되는 초 한 자루가 오늘의 양식이다
이 시대에 시인들이 적어도
먹을 수 있는 것과 먹을 수 없는 것을 가르쳐야 하지 않는가
나는 계몽주의자인지도 모른다
인간에 대한 예의는 아무리 생각해도 답이 나오지 않는다
몸에 불이 들어오지 않는다
어두운 밤, 묵시의 밤
여자와 남자 사이를 걸어 도달한 강가에서는
아직도 노예들이 노래를 부르고 있다
가슴에 닿는 황홀한 물기, 황홀한 복종
신은 죽어서 우리를 구속하네
적은 살아서 나를 죽이네
이 별에서 이 거리에서 나는 죽어갈 것이다
로드킬,
킬킬킬대며 나는 살아갈 것이다
-우대식, 「로드킬」 전문
참혹함의 노래 속에서 ‘죽음’은 생의 다른 문턱이 아니라, ‘로드킬’이라고 하는 생의 연속이다. 이곳에서 ‘꽃이 피고 새가 운다’라고 하는 자연현상은 죽음이라고 하는 ‘로드킬’의 일상성 속에서 봄을 허락하지 않는다. 시를 쓰는 일조차 무의미한 공간에서 그는 인간에 대한 예의를 상상하는 허무한 자신을 ‘계몽주의자’라고 인식한다. ‘로드킬’이라고 하는 죽음의 일상성 속에서 인간에 대한 예의를 운운하는 자신은 얼마나 해괴망측할 것인가, ‘어두운/묵시의 밤’에 사랑은 부재하고 ‘노예들’이 ‘노래’를 부르는 ‘강가’에서 그는 도달할 수 없는 생의 ‘황홀’을 염원하지만, 그것은 ‘해탈’처럼 지독한 고독의 풍경이거나 구경을 위한 문자의 쓸쓸한 위안 같은 것이어서 ‘신은 죽어서 우리를 구속하네/적은 살아서 나를 죽이네’라고 하는 차별지성의 행성 속에서 절망에 도달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시에 ‘푹푹’의 낭만에 대한 염원이 나타나는 것은 이러한 절망 때문이다. 그는 고단하지만 시의 여정을 통해 절망적인 ‘로드킬’을 넘어 일상의 회복을 염원한다. 그런데 자아와 세계의 동일성의 기원으로서 서정의 회복을 염원하는 것은 일상성의 세계에서 분열을 경험하는 현대인들에게 오히려 혁명적인 일일 것이다. 이때 동일성에 대한 염원은 주체의 동일성으로서 파시즘의 성격을 지닌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일상성의 세계를 부정하려는 오래된 시의 혁명을 의미한다.
5월 청명한 날
새 한 마리 나뭇가지 끝에 앉자,
연한 가지가 부르르 떤다
순간 나도 떨리기 시작하여 온종일 멈추질 않는다
이 진동의 힘으로 저 가을 숲까지 가야 한다
그 작은 흔들림이 남아 있을 때까지
여자와 잠을 자고 저 깊은 강물을 조용히
헤엄쳐 다녀야 한다
나뭇잎이 다 떨어진 가을 숲에 당도하면
당나귀 한 마리 이리저리 시든 풀을 뜯고 잇을 것이다
11월의 눈이란 단단하고도 아슴하여
몸 굽이굽이 무진강산처럼 떠돌다가
피 속에 흰 멍으로 남는 것
겨울에 이르면 당나귀와 함께
흰 눈에 인세를 지불하고 그 나라에 들어갈 것이다
밥도 없고 잠도 없는 곳에서
붉게 도도는 지평선의 노을을 바라보다
눈 속으로 푹푹 잠겨갈 것이다
―우대식, 「잠겨간다는 것」 전문
이 시에서 낭만적인 세계에 대한 동경이 나타나는 것은 그의 시가 낭만적인 동경을 통해 서정의 회복을 염원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푹푹’ 잠겨가는 것에 대한 낭만적인 세계의 동경에도 불구하고 그에게 세계는 푹푹 잠기지 않는 황량한 낭패감의 경험일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적 자아가 ‘푹푹’ 잠겨가는 것에 대한 염원을 포기하지 않는 것은 낭만적인 동경을 통해 잃어버린 세계의 상실을 위무하려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상실은 ‘무진강산’처럼 ‘아슴’한 곳, 즉 ‘밤도 없고 잠도 없는’ 세계, 즉 시인이 지향하는 일상의 회복에 대한 염원을 드러낸다.
이때 ‘그 나라’에 들어가려고 ‘흰 눈에 인세를 지불’한다는 것은 시의 여정을 통해 서정의 회복을 염원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나아가 ‘시인’은 ‘별 아래/별별 소리를 다 쓰다가’ ‘없어질 것’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산 같은’ 것들, 그러나 ‘원래 거기 있었’던 것들을 향해 잠꼬대 같은 생의 여정을 걸어가는 자들이라는 시인의 운명-시 「시인」-을 통해 일상성의 세계에 대한 실패를 모의한다. 이러한 실패를 통하여 그는 일상성을 부정하고, 고단한 생의 여정에 대한 지불 방식으로서 낭만주의적 시관에 자신의 생을 기꺼이 투신함으로써 잃어버린 세계에 대한 회복을 염원하는 ‘계몽주의자’인 셈이다.
4. 늙어가는 태아의 악보와 툭툭, 털어내고 싶은 낭만적 울음의 계보
21세기, 인류의 여름이 시작되었으니
빨리 늙음의 가을이 오기나 바라라.
(중략)
나는 무엇을 갈망하는지 몰라서
피에 탐닉한다. 피에 물든 달을 꿈꾼다.
검붉은 노래와 울음과 시를 입 안 가득 머금고,
-장이지, 「젊은 흡혈귀의 초상」 중에서
장이지의 시는 계몽의 세계를 답습하지 않는다. 그는 계몽의 홈그라운드 안에서 출생하지 않은 자이다. 나는 B급 영화의 주인공들처럼 서성이는 장이지 시의 타자들을 들여다보다가 ‘무엇을 갈망하는지 몰라서’ 21세기의 여름을 배회하며 자신을 ‘젊은 흡혈귀’로 소개하는 시적 자아와 마주친다. 입 안 가득 ‘검붉은 노래와 울음과 시’를 머금은 그는 거리를 활보하는 젊은 영혼들 사이에서 그림자도 없이 서성인다.
그의 시를 따라가다가 나는 조르주 슈비츠게벨의 단편 애니메이션 「그림자 없는 사나이」를 떠올렸다. 어느 날 주인공 남자에게 회색 옷을 입은 한 사나이가 찾아온다. 그는 주인공 남자에게 풍족하고 화려한 삶을 대가로 남자의 그림자를 요구한다. 하지만 행복도 잠시, 그림자를 팔아버린 남자는 곧 자신이 더 이상 보통 사람과 함께 살아갈 수 없는 괴물 같은 존재가 되어 버렸음을 깨닫는다. 주변 사람들은 그를 향해 수군거리고 사랑하는 여인마저 그를 떠나버린다. 다시 남자 앞에 회색 옷의 사나이가 나타나 그림자를 돌려주는 대신 그의 영혼을 달라고 요구한다. 그러나 남자는 영혼 대신 그림자를 포기한 채 세상을 유랑한다. 그리고 그림자 없이 살아가게 된 그는 어느 날 그림자 인형극을 상연함으로써 눈에 보이는 가치에 눈이 멀어버린 사람들에게 그림자의 가치에 대해 드러낸다. 빛이 만들어내는 허상에 불과할 것이라는 그림자의 존재를 통해 눈에 보이는 가시적 세계를 실체로 여기며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존재의 의미에 대한 물음을 던지고 있는 것이다.
자신을 ‘젊은 흡혈귀’라고 소개한 그림자 없는 사나이는 ‘안국동울음상점’에 들렀다. 그곳에서 그는 자신의 속에 ‘울음’을 길어내는 ‘함지’라도 있다는 듯이 울음의 ‘음악’을 ‘주문’한다. 섣불리 슬픔을 박차거나 걷어치우지 않는 그의 취향은 일찍이 ‘일용할 울음’의 음악에 익숙했으리라.
나선형의 밤이 떨어지는 안국동 길모퉁이,
밤 푸른 모퉁이가 차원의 이음매를 풀어주면,
숨쉬는 집들, 비칠대는 길을 지나 안국동울음상점에 가리.
(중략)
나그네가 자신의 그림자에게 말하듯 내가 고양이 군에게
무언가 촉촉한 음악을 주문하면 스탄 게츠의 「이파네마에서 온 소녀」가
바다 밑처럼 깔리.
나는 내 안의 함지에서 울음을 길어다 주는,
이 세상에서 내 울음을 혼자만 들어주는 소녀 같은 것을 상상하며
그 아이가 아픈 것은 아닌지 어떤지 걱정을 하게 되리.
밤이 깊도록 나는 눈물차를 이백李白처럼 마시리.
내가 등신대의 눈물방울이 되는 철없는 망상에 빠져.
그러나 새벽이 오기 전에는 돌아가야 하리.
내일의 일용할 울음을 걱정하며 내가 일어서려 하면,
고양이 군은 ‘엇갈리는 유성들과도 같은 사랑’을 짐짓 건넬지도 모르리.
손에 가만히 쥐고 있으면 론도 형식의 회상이 은은히 퍼지는.
지갑은 텅 비었지만 울음을 손에 쥐고 고양이 군에게 뒷모습을 들키면서,
보석비가 내리는 차원의 문을 거슬러감동 없는 거리로 돌아와야겠지.
비가 내린다면 맞아야 하리.
비의 벽 저편 어렴풋 내 울음을 듣는 내 귀가 아닌
내 귀의 허상을 응시하면서,
비가 내린다면 역시 맞아야 하리.
―장이지, 「안국동울음상점」 전문
울음의 음악을 듣는 대가로 그의 ‘지갑은 텅 비었지만’, 그는 ‘감동 없는 거리’로 돌아오는 것보다 차라리 차원을 넘어서 울음의 ‘음악’을 주문할 수 있는 ‘안국동울음상점’에서의 삶에 자족하리라. ‘비가 내린다면 역시 맞아야하리’라고 반복하는 그는 제 안에 오래전부터 깃든 ‘함지’처럼 울음의 깊이와 형식의 음악을 제대로 이해하는 자이다.
그럼 잠깐 그의 일상을 들여다보기로 하자. 아주 많은 ‘월요일’의 삶 속에서 그는 ‘웅크린 태아처럼’ ‘해바라기’ 안에서 ‘십진법’과 ‘도덕경’을 배운다. 그런데 그는 왜 세계 밖으로 한 번도 태어나지 않는 걸까?
제2장
월요일, 나에겐 월요일이 아주 많다.
아직도 많이 남아 있으리라.
따뜻한 해바라기 안으로
해의 엄지발가락이 들어왔다. 돈오는 둥글까?
나는 조금 졸았나 보다. 웅크린 태아처럼.
(중략)
제4장
월요일, 나에겐 월요일이 아주 많다.
월요일이 월요일을 그만 좀 낳았으면 좋겠다.
월요일엔 해바라기를 한 바퀴 돌고
월요일의 알고리즘을 끝낼 궁리도 좀 하고
해나 보면서 보낸다. 해가 여섯 시를 친다.
말벌의 영문 모를 분노가 태양혈을 쏘면
나는 둥그랗게 늙어가서는 태아로 죽을 것인가.
―장이지, 「해바리기 수트라」 중에서
‘월요일이 월요일을 그만 좀 낳았으면 좋겠다’라고 하는 ‘월요일’의 연산법칙 속에서 그는 ‘십진법’과 ‘만유인력’, ‘도덕경’의 법에 의해 지탱되는 진리의 알고리즘을 끝내고 싶어 한다. 그가 해바라기 안에서 ‘늙어가는 태아’로 웅크려 ‘죽을 것인가’하는 고민을 하는 것은 이 때문이리라. 월요일의 알고리즘이 지배하는 세계 밖으로 그는 태어나기를 거부하는 웅크리는 태아인 것이다.
나는 늙어가는 태아의 악보 속에서 그만 ‘툭툭’, 끊어지다가 이어지는 울음의 계보를 듣는다. 그가 웅크린 태아로 늙어가는 것은 근대 주체에 대한 부정을 욕망하기 때문이다. 그는 한 번도 태어난 적 없는 세계에서 웅크린 태아로 살아가는 존재방식을 통해 주체로 살아가야 하는 일상성의 삶을 부정하고 나아가 이러한 삶의 비극을 ‘울음’의 음악을 통해 들려줌으로써 울음의 계보를 잇는 자인 것이다. 일찍이 시인 이상이 그러했듯이-負債의 계보-, 울음의 계보와 그 기원에 대해 들려주는 것이리라.
너구리 가죽을 뒤집어쓴 12월 바람, 눈은 내리는데
푹푹 쌓이는데, 너구리 가죽을 뒤집어쓴 할아버지 혼신,
너구리 가죽을 뒤집어 쓴 아버지, 수북한 털가죽에
손을 찔러 넣고 체념하지 못한 꿈을 노래하는데,
막걸리 한 잔씩을 걸치고 날 생선을 뜯으며.
세상은 머리까지 눈 이불을 뒤집어쓰고 잠꼬대를 하는데
너구리 가죽을 뒤집어쓴 고양이, 강아지, 수한무,
개그맨, 회사원, 꽃집 아가씨, 약국 아저씨, 농부,
너구리 가죽을 뒤집어쓴 두꺼비, 탐정, 손자놈, 전경 아우들,
썩은 굴참나무 밑 너구리 저택은 흥청흥청.
눈보라가 빗금을 그으며 떨어지는 12월.
너구리 가죽 가득 눈꽃들을 받아주겠다고
손녀딸의 잠을 툴툴 털어주고 계신 너구리 가죽을 뒤집어쓴
선생님, 우와, 하고 입을 쫙 벌린 너구리 가죽을 뒤집어쓴
조직 폭력배, 동승, 소설가 김씨, 사실은 순진했던
너구리 가죽을 뒤집어쓴 국회위원 양반,
통속적인 활극을 연출하는 너구리 삼인조,
(중략)
썩은 굴참나무 밑 너구리 저택에도 눈은 시간처럼 쌓이는데,
작은 혁명의 밤이 하얗게, 하얗게 지워지는데,
바람의 말을 자꾸 헛들어도 좋은,
너구리 말로도 그대로 좋은 너구리 저택의 밤.
하얀 눈 위에 찍힌 너구리 발자국,
그리고
천 년만큼 깊이 쓸쓸함, 눈을 툭툭 털고 들어오는.
―장이지, 「너구리 저택의 눈 내리는 밤」 중에서
시인 이상의 부채의 계보가 ‘아버지의 아버지의 아버지’를 껴안고 있다면, 장이지 시에서 울음의 계보는 ‘수한무’라고 하는 표현처럼 다양한 타자들을 아우르면서 확대된다. 일상성의 세계에서 인간의 주체를 거부하고, ‘너구리 가죽’ 뒤집어쓰는 이러한 행위는 ‘작은 혁명’이라는 표현처럼 주체에 대한 강한 부정을 담지한 것이리라.
‘천 년만큼 깊이 쓸쓸함’의 풍경이 고스란히 자리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그는 울음의 계보를 통해 이기적인 주체 욕망의 일상성을 부정하고 ‘툭툭’ 털어내고 싶은, 그러나 결코 털어낼 수 없는 울음의 기원을 통해 할아버지와 아버지에게 이어받은 ‘체념하지 못한 꿈을 노래’한다.
그림자 없는 사나이는 이러한 울음의 계보를 통해 눈에 보이는 것만을 쫒느라 울음을 상실한 이들의 그림자 속으로 들어가 그들에게 이기심의 실체를 들려줌으로써 그림자 없이도 세계에 살아가는 법을 들려주려는 것이리라.
깊은 밤, 웅크린 태아의 잠 속에서도 잠들지 않는 울음의 음악을 들었다.
조하혜∙1972년 서울 출생. 1994년 ≪현대시사상≫으로 등단. 시집 <도넛, 비어있음으로 존재한다>와 <울지 말아요, 비둘기>가 있다. 성신여대, 한양여대, 백석대 등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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