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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호 서평/임영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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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정지아, <봄빛>(창작과 비평 2008.3.)
■이지민, <그 남자는 나에게 바래다 달라고 한다>(문학동네 2008.4.)
1. 풍경이 되어버린 과거와 순금 같은 삶의 시간들
정지아의 <봄빛>을 읽어나갈 때 우리는 편안하면서도 친숙한 어떤 세계를 떠올리게 된다. <봄빛>에서 독자들이 편안함 같은 것을 느낀다면 이유는 아마도, 그 이야기들이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익숙한 소설의 문법에 기대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정지아의 <봄빛>은 소설이란 본질적으로 기억과 회상에 의존하는 장르라는 사실을 새삼스레 환기시켜주고 있는데 여기서 우리는 ‘과거’를 향해 거슬러 오르는 회고체의 이야기들과 만나게 된다. 시간적인 의미에서 이미 지나간 일이 되어버린, 그리하여 기억 속에서 천천히 잊혀져가고 있는 어떤 삶을 우리 앞에 하나씩 불러내고 있는 이 <봄빛>의 세계는 이야기의 공간에 있어 우리 시대의 중심부로부터 소외되어있는 지역, 변두리를 자신의 거점으로 삼고 있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봄빛>에 등장하는 과거형의 삶들, 그 기억과 회상의 중요한 무대는 우리 시대의 일상적 삶의 터전인 도시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 이름 모를 지방의 소읍들이다. 예컨대 「못」의 경우, 삼백년 묵은 늙은 팽나무가 서 있는 남도의 한적한 시골마을을 공간적 배경으로 삼고 있다. 「봄빛」의 ‘그’는 늙은 부모가 살고 있는 ‘고향 마을’에 내려와 있으며, 「풍경」에 등장하는 늙은 아들과 노모는 ‘산속의 외딴집’에서 살아가고 있다. 「순정」, 「길2」, 「세월」 등은 지리산에 인접한 남도의 어느 곳을 무대로 삼고 있는 경우이다. 그런 이야기의 시공간 속에서 <봄빛>은 ‘지금-여기’로부터 철저하게 소외되어 있는 ‘그때-거기’의 풍경으로 대두한다. 그 이야기들은 희미해진 자신의 기억을 더듬어 오래 전에 떠나왔던 고향이나 친지를 찾아 가는 여행과도 같은 의미를 띠고 있다.
<봄빛>을 펼쳤을 때 독자들은 처음부터 기이한 풍경에 직면하게 된다. 나이 육십이 된 조카가 그보다 더 늙은 작은 어머니에게 기대어 한 집에서 살아가는 「못」이 그것이다. 일찍이 부모를 잃은 반병신 조카 강우와 그의 작은 어머니 단 두 사람만이 지키고 있는 ‘작은집’은 숙모가 어머니를 대신하고, 조카가 남편을 대신하는 비정상성의 세계이다. 불행한 가족사에서 비롯되고 있는 이 비정상성의 세계는 한편으로 삶이란 상처와 결여라는 사실을 떠올리게 만든다. 그러나 「못」에서 그런 상처와 결여는 종국적으로 운명적인 의미를 띠고 있다. 말하자면 그것은 나이 묵은 나무의 불거져 나온 옹이와도 같은 것이다. 여기서 인간은 자연의 섭리를 담지하고 있는 운명적인 것을 수용함으로써 세계와 화해한다. 이 운명으로서의 삶에 대한 발견은 「봄빛」에서 치매를 앓고 있는 아버지를 바라보는 아들 ‘그’의 시선을 통해 그려지고 있다. 이제 ‘그’ 앞에서 자신이 알고 있던 강인한 아버지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치매를 앓고 있는 늙은 아버지 앞에서 흘리는 ‘그’의 눈물은 인간적 한계, 운명적인 것의 받아들임을 의미하고 있다.
「못」과 「봄빛」이 그리고 있는 운명으로서의 삶의 본질은 「풍경」에 이르러 마침내 자신의 전모를 드러낸다. 「풍경」에 등장하는 운명적인 삶의 주인공은 늙은 모자이다. 산속의 어느 외딴집에서 늙은 아들 ‘그’는 치매를 앓고 있는 노모를 모시고 살아가고 있는데 그녀는 오래전에 집을 나가 소식이 끊겨버린 형들을 늘 기다리고 있다. 「못」과 「봄빛」의 세계에 대하여 「풍경」이 구별되는 것은 부재하는 형들에 대한 모자의 기억과 관련되어있다. 여순 사건 때 두 형은 산사람을 따라 입산했고 그 후 막내 형까지 집을 나가 버렸던 것이다. 「풍경」이 그리고 있는 운명적인 삶이 제목처럼 풍경화와 같은 아름다움을 담고 있다면 그것은 ‘그’의 내면에 상처와 결여를 봉합하는 순금 같은 삶에 대한 기억이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어머니 곁에 붙어 앉아 아궁이 속에서 타오르는 불빛을 바라보던 시간과, 온 식구가 밥상 앞에 둘러앉아 강된장에 꽁보리밥을 비벼먹던 시절에 대한 기억들이 바로 그것이다.
「풍경」은 <봄빛>에 담겨 있는 비극적인 삶의 운명, 그 치유될 수 없는 깊은 상처 중의 하나가 ‘빨치산’으로 대변되는 ‘과거-역사’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사실을 은밀하게 드러내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봄빛>의 작가 정지아가 <빨치산의 딸>의 작가임을 상기해야만 하는데 이때 「풍경」은 ‘빨치산의 딸’의 작가로서 정지아 문학의 한 가지 도달점이자 지금까지 그녀가 견지해온 작가적 정체성의 확인이라는 의미를 띠게 된다. 이 ‘빨치산의 딸’로서 정지아의 작가적 고유함은 「순정」과 「세월」에서도 엿볼 수 있다. 「순정」의 ‘그’는 “허방에 발을 디딘 느낌”으로 평생을 살아왔다. ‘그’의 삶이 ‘가없는 심연’과도 같은 것은 그가 안고 있는 과거의 어떤 기억 때문이다. 지나간 청춘의 어느 한 시절, ‘그’는 “세상에 꿈꾸지 않는 사람은 없는 법”이고 “노동자, 농민이 이 세상의 주인”이라는 목소리에 자신의 온몸을 내던진 적이 있다. 그러나 그는 그런 믿음과 희망을 스스로 배반함으로써 그 기억은 돌이킬 수 없는 치유불가능의 상처로 남고 말았다. 그 상처의 기억 가운데서 역사와 이념이라는 이름의 진실들, 그리고 유토피아를 향한 인간의 소망과 다시 대면하는 순간은 인상적이지 않을 수 없다. 「세월」은 그런 유토피아에의 꿈으로부터 배반당한, 그래서 지울 수 없는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자들에게 바치는 진혼곡이다. 지나간 어느 시절, ‘좋은 세상’에 대한 꿈을 품고 혁명의 대열에 동참했던 늙은 부부의 이야기를 담고 있는 「세월」은 이렇게 끝을 맺고 있다.
이만허먼 됐소. 말로는 못해도라. 나는 알 것만 같그만이라. 생명이란 것의 애달븐 운멩을 말이어라. 헥멩도 뭣도 아니고라. 생명은 말이고라. 살아봉게 애달프요. 짠허고 애달프요. 긍게 우리, 허공중에 산산이 흩어져, 생명 가진 잡초로도 말고라, 사램으로도 말고라, 뵈도 않는 먼지 같은 것으로나 날라먼 나서 말이어라, 슬픔도 없이 기쁨도 없이, 여그저그 떠돔시로나, 암것에도 맘 주지 말고 말이어라, 시시허게 고로코롬이나 살아볼라먼 살아보등가요. 벹이 좋소. 짜울짜울, 나도 잠이 와라. 안 깼으먼 좋겄소. 이냥 이대로 봄벹 속에 잠을 잠시로 다시는……(236쪽)
「세월」에서 늙은 아내의 넋두리는 무당의 사설과도 같은 힘을 발휘하고 있는데 여기서 그녀는 스스로 무당이 되어 고단한 삶을 살아온 영혼들을 위무하는 진혼굿을 벌이고 있는 것이다. 「세월」에서 인간적 존재와 삶의 의미는 역사나 이념의 차원을 넘어 대자연의 생명법칙, 우주적 섭리의 차원에 포섭되는 운명적인 것으로 대두한다. 「양갱」, 「스물 셋 마흔 셋」, 「운명」과 같은 이야기들은 역사나 이념이라는 거대한 기억-과거에서 벗어난 자리에 서 있는 작가의 모습을 드러내주고 있는 경우이다. 그 이야기들은 ‘지금, 여기’에 서 있는 작가의 맨언굴에 다름 아니다. <봄빛>에 등장하는 일인칭 화자 ‘나’의 세계는 정지아 문학의 여정 내에서라면 ‘역사 이후’ 혹은 ‘이념의 상실’이라는 단계에 대응하는 삶의 형식이라는 의미를 띠고 있다. 그 이야기들은 루카치가 ‘선험적 고향 상실성’으로 부르고 있는 ‘고독해진’ 개인의 내면의식을 표현하고 있는 경우이다. 그리고 이때의 삶이 가지는 의미 역시 환멸과 체념을 자신의 본질로 삼고 있는 운명적인 것으로 대두하고 있다.
2. 과거도 미래도 없는, 낙관도 비관도 아닌 오늘의 삶
이지민의 <그 남자는 나에게 바래다 달라고 한다>는 철저하게 ‘지금, 여기’에 관심의 초점을 두고 있는, 오늘의 우리 삶에 대한 이야기이다. 이 창작집의 작가 이지민은 1974년생으로 오늘의 한국 문단에서 젊은 세대의 작가군에 속한다. 그들이 청소년기를 보낸 80년대가 우리 역사상 초유의 물질적 풍요를 누리게 된 시대였다면, 그들이 성인으로 입사하는 90년대는 앞시대의 변화에 연속하여 이념과 가치의 재구축 작업이 이루어지는 정신적 모색기였다. 그들은 물질적․정신적 경험이라는 측면에서 어떤 기성세대와도 뚜렷하게 구별되는 자신만의 세계를 가지고 있는 세대이다. 그들 세대가 가진 정체성은 ‘조국 근대화’를 구호로 내건 1970년대 이후 한국 사회의 변화 양상을 내면에 담지하고 있는 ‘신세대’라는 데 놓여있다. 그러니까 <그 남자는 나에게 바래다 달라고 한다>는 새로운 시대에 대응하는 새로운 삶의 주인공으로서 신세대 작가 이지민의 자신에 대한 이야기인 셈이다.
미혼의 젊은 두 남녀를 주인공으로 삼고 있는 표제작 「그 남자는 나에게 바래다 달라고 한다」에서 우리가 마주치게 되는 것은 그들만의 ‘특별한’ 사랑법이다. 여자 주인공 ‘나’가 사랑하는 ‘그’는 ‘나쁜 남자’이다. 그 남자는 새 여자친구가 생기자 “신문이나 우유를 끊듯 하루아침에 나를 끊어”버리기도 한다. 그렇지만 ‘나’는 ‘그’가 ‘이기적인 순수함’을 가진 ‘철없는 남자’임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를 사랑하는데 그 이유는 ‘나’가 좋아하는 아름다운 손을 가진 그가 “이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멋진 존재”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 두 남녀의 낯선 사랑법이 삶에 대한 그들만의 고유한 태도를 함축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 두 사람의 삶에 대한 태도는, 그들의 내면에 자리 잡고 있는 이기적인 순수함과 외부세계에 대한 냉정함에 근거하고 있는, 매우 ‘쿨한’ 성격의 것이다. 「그 남자는 나에게 바래다 달라고 한다」의 두 남녀가 보여주고 있는 것은 과거도 미래도 없는, 낙관도 비관도 아닌 ‘현재’의 그 자신의 욕망에 충실한 삶의 방식이다. 「대천사」는 그런 삶의 방식을 지탱하고 있는 욕망의 내면을 성형 중독이라는 소재를 통해 충격적으로 드러내고 있는 경우이다. 일곱 번의 성형수술 뒤에 ‘완벽한 성형미인’으로 살아가는 주인공 ‘나’가 찾아낸 자신의 ‘인생의 가장 어두운 부분’은 ‘육체의 단점’이었다. ‘나’에게 있어 성형수술은 자신의 어두운 “과거를 제거함으로써 현재를 아름답게” 만드는 “참으로 가치 있는 일”이다.
성형수술은 한번 하면 계속 하게 됩니다. 사람들은 그 때문에 성형수술 환자들을 속물 취급하지만, 그들은 잘 모릅니다. 성형수술 중독자들의 그 섬세한 생의 감각을 말입니다. 그들은 자신의 오감을 통해 직접 느끼고 소유하는 진정한 삶의 가능성을 알고 있습니다. 그들은 가족, 사회, 관습 같은, 애초부터 변화를 거부하는 질기고 뻔한 것들에 생의 가능성을 시험하는 어리석은 짓을 하지 않습니다. 그들의 우주는 따로 있습니다. 그들은 코끝의 미묘한 높낮이 변화에서 순수한 삶의 기쁨을 발견합니다. 대부분의 인생은 퇴보하지만 그들은 아닙니다. 그들은 언제나 발전된 현재의 증거만을 가지고 있습니다.(49쪽)
성형 중독자인 ‘나’에게 있어 성형수술은 ‘진정한 삶의 가능성’의 실현이자 ‘순수한 삶의 기쁨’에 대한 발견을 의미하고 있다. 「대천사」의 주인공 ‘나’가 보여주고 있는 성형 중독의 세계는 신앙과도 같은 믿음과 경건함을 갖추고 있다. 성당의 신부 앞에서 자신의 죄를 고백함으로써 구원을 희구하는 신도처럼, 주인공 ‘나’가 성형외과의 병원 원장 앞에서 고해성사와도 같은 자기 고백을 행하는 장면이 그렇다. 그러나 「대천사」에서 자신이 늘 새로운 존재이기를 바라는 주인공의 갈망은 결코 실현될 수 없는 환상으로 판명되고 있다. 문제적인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인공이 자신을 구원해줄 수 있는 새로운 신을 찾아 나서고 있다는 사실이다. ‘어쨌거나 미래는 알 수 없지만, 나는 계속 위험에 도전해야 한다’는 주인공의 마지막 언명에서 「대천사」는 우리시대의 진실을 드러내주고 있는 아이러니로 대두한다.
이지민 소설에 등장하는 여자 주인공들의 공통된 성격은 「대천사」의 ‘나’가 그렇게 말하고 있는 바와 같이 “스스로의 의지와 선택으로 행복해질 권리가 있는 존재”라는 데서 찾을 수 있다. 그런 스스로의 의지와 선택은 「그 남자는 나에게 바래다 달라고 한다」의 주인공 ‘나’가 보여주는 쿨한 삶의 근거를 이루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그 누구도 아닌 오직 자신의 의지와 선택만을 존중하는 주인공들의 그런 삶의 방식이 자신만의 신을 찾아나가는 일과 다르지 않다고 할 때 「서른 살이 된 롤리타」의 여자 주인공 ‘나’가 선택한 삶과 새로운 신의 모습은 문제성을 띠고 있다. 「서른 살이 된 롤리타」의 주인공은 소녀시절부터 이른바 원조교제의 형식으로 다양한 남자들을 만나왔는데 그녀는 그런 자신에 대해 스스로 ‘인생 나가리 도우미’로 부르고 있다. 그녀는 「그 남자는 나에게 바래다 달라고 한다」의 주인공이 보여주는 동경과 추억의 감정도, 「대천사」의 주인공을 지배하는 ‘환상’도 가지고 있지 않다. 세상은 “거저 거대한 비닐봉지에 불과한 것”이라고 믿는 그녀 앞에서 삶은 이미 그 자신을 지탱하는 의미를 잃어버린 채 지독한 환멸과 냉소의 대상이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물론 「서른 살이 된 롤리타」의 주인공 또한 자신의 삶을 구원해줄 수 있는 새로운 찾아 나서고 있는데 ‘새로운 인생을 살고 싶다’는 생각에서 비롯된 그녀의 선택은 ‘돈’으로 판명되고 있다. 그 선택은 동경이나 추억, 환상의 반대편에 놓여있는 냉정한 현실에 대한 주인공의 투신을 의미한다. 「서른 살이 된 롤리타」에서 주인공이 찾아낸 그녀만의 경배 대상은 냉혹함을 자신의 본질로 삼고 있는 물신의 모습을 띠고 있다. 그 물신의 세계는 정신이나 영혼 따위에 집착하는 것을 이신숭배로 적대시한다.
한 소녀를 서른 살의 롤리타로 만들고 있는 물신의 세계는 「오늘의 커피」의 여주인공 ‘인옥’이 몸을 담그고 있는 세계에 대비된다. 인옥의 간절한 소망은 자기 삶의 주인이 되고 싶다는 것이다. 그녀는 카페 이녹의 주인이 됨으로써 생의 충만감을 되찾게 된다. 그러나 그녀 자신이 “스스로의 힘으로 자유롭고 아름다울 수 있는 존재”라는 인옥의 깨달음은 오래 가지 못한다. 인옥이 꿈꾸었던 그녀 자신이 주인이 되는 삶은 쓸쓸하게 좌절되고 만다. 주목할 것은 ‘자신이 주인이 되는, 자신만의 삶’에 대한 주인공의 욕망이 나르시시즘의 형태를 띠고 있다는 점이다. 물신을 경배의 대상으로 삼고 있는 세계 속에서 겨우 숨을 쉬고 있는 정신과 영혼의 존재를 대변하는 이 주인공의 나르시시즘은 오늘을 살아가는 소외된 개인들, 그 실존의 순수한 원형이라는 의미를 띠고 있다. 「오늘의 커피」에 등장하는 주인공의 나르시시즘은 「대천사」의 ‘성형미인’과 「서른 살이 된 롤리타」의 ‘서른 살의 소녀’의 것이기도 하다. 「오늘의 커피」의 나르시시즘이 병적인 차원으로 내면화할 때 ‘성형미인’을 낳는다면, 그 나르시시즘이 외부세계와 만나 지독한 환멸과 냉소로 바뀌는 순간 ‘서른 살의 소녀’가 탄생하게 되는 것이다.
이지민의 <그 남자는 나에게 바래다 달라고 한다>에서 자신의 의지와 선택에 따라 자기만의 삶을 살고자 하는 여주인공들의 추구는 비극적인 운명을 안고 있다. 왜냐하면 그 주인공들은 결코 진정한 의미에서 자유로운 삶을 살 수 없기 때문이다. 그녀들이 욕망하는 삶은 자본주의라는 냉혹한 신이 내린 선물일 뿐이다. 그 신이 다스리는 세계에서 순수한 개인의 의지와 선택이란 존재할 수 없다. 그렇게 냉혹한 신에 의해 ‘만들어진’ 주체의 욕망은 「불륜 세일즈」와 「영혼 세일즈」에서 자기 기만적인 허위의식의 형태로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고 있다. 이지민 소설에 등장하는 똑똑하고 영리한 여주인공들은 어느 순간에 이르러 자신의 욕망과 삶이 가짜임을 스스로 알아차린다. 그리고 이때의 그녀들의 선택은 ‘바른생활 시민’으로 돌아가 ‘안전한 삶’을 사는 것을 의미한다. 「그 남자는 나에게 바래다 달라고 한다」의 주인공의 귀착점이 ‘집’인 것처럼 그들에게는 집과 가족이 있다. 그렇지만 「키티부인」과 「타파웨어에 대한 명상」에서 이 행복한 가족적 삶에 대한 우리시대의 꿈은 환상의 형태로 각자의 내면에 봉인되어있는 것으로 제시되고 있다.
임영봉∙경남 김해 출생. 1997년 ≪문학사상≫으로 등단. 저서 <늪에 빠진 언어의 표정>, <한국 현대문학 비평사론> 등. 중앙대 교양학부 교수. 본지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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