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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호 계간평(소설)/오윤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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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부
댓글 0건 조회 2,308회 작성일 09-01-19 14: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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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간평/소설
칙릿 소설 속 빨간머리 앤들
오윤호|문학평론가


∙서유미, 쿨하게 한 걸음(≪창작과 비평≫, 2008)
∙박주영, 냉장고에서 연애를 꺼내다(≪문학동네≫, 2008)
∙백영옥, 스타일(≪예담≫, 2008)



칙릿소설이 유행이다. 그 발랄하고 톡톡 튀는 스토리에 ‘문학상’이라는 딱지까지 붙은 작품들이 연달아 출간되고 보니, 일순간 2008년 봄의 한국 소설은 칙릿 소설이 점령한 듯한 느낌이다. 제1회 창비장편소설상을 받은 서유미의 '쿨하게 한걸음', 제1회 문학의 문학 장편소설상을 받은 우영창의 '하늘다리', 제4회 세계일보 문학상을 받은 백영옥의 '스타일', 2006년 장편소설 '백수생활백서'로 30회 ‘오늘의작가상’을 수상한 박주영이 쓴 '냉장고에서 연애를 꺼내다'와 같은 작품들이 비슷한 시기에 쏟아져 나왔다. 또한 칙릿문학이 아닌데도, ‘칙릿’이라는 이름이 붙여서 나오는 작품들도 있다. 이러한 현상을 두고 일각에서는 문학성과 상업성의 충돌이며, 도시 대중문화의 확산에 따른 새로운 장르의 등장처럼 서술한다. 
출판사들이 새로운 수익모델을 찾기 위해 오래 전부터 아동문학에 몰입하고, 최근에는 청소년 문학에 관심을 돌린 것은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다. 문화적 소비에 능동적인 20-30대 여성들을 대상으로 한 문학상품을 만들어낸다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현상이다. 그래서 칙릿 문학이 하나의 ‘트렌드’라는 점은 부인할 수 없다. 다만 여러 문학상이 동시적으로 칙릿소설에 주목한 것도, 다음 회에도 칙릿 스타일의 소설에 문학상을 부여할지도 궁금할 따름이다. 문학상이란 그래도 ‘문학적 비젼과 상상력의 가치’에 무게를 두어야 하지 않을까?
어쨌든 ‘문학적 자의식’이라는 강박을 조금만 지양한다면, 대중들의 통속적 욕망과 상업적 문학성이 낯설고 괴이하지만은 않다. 칙릿 소설이 그동안 암묵적이고 은폐되었던 장르소설을 공식화했다는 점에 방점을 두고 싶다. 책대여점에 즐비한 로맨스 소설과 서점에서 불티나게 팔리는 칙릿 소설은 어쩌면 종이 한 장 차이다. 무협소설, 판타지 소설, 로맨스 소설은 의외로 오랫동안 많은 매니아적 독자들을 만족시켜 왔지만, 출판사나 문단으로부터 상대적으로 관심과 평가를 받지 못한 것이 사실이다. '다빈치 코드'와 '해리포터 시리즈'가 스릴러, 추리 소설과 판타지 소설의 탄탄한 기반 위에서 창작되었다는 점에 주목하자. 
그런 점에서 이 계절에는 위에 언급한 책들을 살펴보려고 한다. 30대에 백수가 된 주인공부터 커리어 우먼까지 그녀들의 연애와 일, 가족에 대한 이야기는 상투적이면서도 흥미진진하다. 문학적이든 상업적이든 칙릿소설의 현실과 가능성에 대해 짚어볼 수 있는 좋은 기회이기도 하다. 

어느 30대 백수의 인생 학습 기록_서유미의 '쿨하게 한걸음'
서유미의 '쿨하게 한걸음'은 ‘크리스마스 이브의 이별’로부터 시작된다. 그러나 이 사건은 단순히 지루하게 지속되던 사랑이 깨졌다는 점만 의미하진 않는다. 오래된 애인과 익숙하지만 구질구질한 관계를 정리하는 순간, ‘결혼’이라는 관념에 결박당한 자신을 깨닫게 되고 현실에 대해 객관적 거리두기가 가능해졌다. '쿨하게 한걸음'이 ‘30대 여자’라는 점은 다른 칙릿소설과 별반 차이 없지만, 이러한 객관적 시선으로 우리시대를 살아가는 다양한 계층의 일상과 현실 부적응을 그려내고 있다. 그러고 보면 이 소설 속 인물들과 사건들은 모두 통속적이고 전형적이다. 어느 오후에 사람들이 모인 곳에서라면 쉽게 들을 수 있는 이야기들로 정신없이 살아온 생을 정리할 노후에 대한 고민들, 30대들의 직업과 결혼·출산 직업에 대한 혼란들, 10대들이 겪는 또 그들만의 사회에 대한 불만들이 이 ‘30대 백수 여자’의 시선을 통해서 서술된다. ‘인생’에 대해 모든 것을 다 알만한 나이에 다시 그 ‘인생’ 대해서 고민한다는 논조가 이 소설의 첫 번째 관심이다.

서른셋씩이나 되고 보니 달라진 것이 별로 없다. 삼십대는 빛나지도 않고 젊음의 절정도 아니며 여전히 바람과 파도가 아슬아슬하게 키를 넘기는 태풍 속일 뿐이다. 안정적이 궤도라는 것은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겠고 이루어놓은 것은 아무것도 없다.[중략] 이런 지경이니 사십대는 기대와 상상이 되기는커녕 낭떠러지 같은 기분마저 든다. 사십대를 기대하기에는 인생에 대해 너무 많이 알아버렸다.
―쿨하게 한걸음 중에서

남자친구랑 헤어지며 결혼에 대한 막연한 기대감이 무너지고, 직장에서 퇴사를 준비하며 경제적 기반마저 잃어버릴 주인공은 스스로를 ‘태풍 속’에 있다고 생각한다. ‘인생’이라는 막연한 물음표와 ‘현실’이라는 처절한 전투장은 사뭇 다룰 수 밖에 없다. 상투적인 욕망(돈, 결혼, 아파트 등)을 향해 치달아가면서도 늘 공허한 뱃속의 자의식은 현대인들이 겪는 비극적 사유의 한계점이기도 하다. 인생의 결정적 순간마다 자신의 욕망과 의지에 따라 행동했던 친구 선영마저도 돈많은 의사와 결혼했고, 고등학교 때부터 세속적으로 행동했던 사촌 연재는 그 느낌 그대로 부동산 부자로 잘 살고 있다. 한편으로는 부러워했고, 한편으로는 무시했던 두 여자를 지켜보면서 어쩌면 ‘현실’을 살아간다는 것이 ‘세속적’으로 살아가는 것이라는 점을 주인공은 깨닫게 된다. 그러한 타자화된 욕망의 현실 속에서 살지 못하는 주인공은 위태롭고 불안할 수밖에 없다. 이별하고 퇴사하고 택한 ‘영화비평가’를 꿈꾸는 것이 유일하게 스스로를 유의미하게 만든다. 
‘통속적으로’ 문제적인 현실과 ‘낭만적으로’ 내면적인 자의식적 관조는 이 소설의 진지함을 잘 보여주지만, 한편으로는 죽도 밥도 아닌 적당한 인생론과 다름없이 만들어 버린다. 실제 현실에서 30대 백수 여성이 이처럼 낭만적으로 현실을 관조할 수 있는 힘을 얻기란 힘들다. “나는 한번 멋지게 꾸려가보기로 했다. 숨을 가다듬고 일보 전진하면서!”라는 모호한 구호는 대중들이 원하는 칙릿의 욕망에 한참이나 못미치는 것은 아닌지 반문하고 싶다.

수다스러운 그녀들의 인생 레시피_박주영의 '냉장고에서 연애를 꺼내다'
'쿨하게 한걸음'이 ‘나’를 중심으로 벌어지는 다양한 주변 삶의 모습과 갈등, 그리고 잔잔한 희망을 만들어 보여주려고 했다면, 박주영의 '냉장고에서 연애를 꺼내다'는 대학 4년을 함께 다닌 수진, 유리, ‘나’의 “연애”와 “수다” 이야기를 초점화한 작품이다. '냉장고에서 연애를 꺼내다'는 한때 유행했던 「내 이름은 김삼순」을 떠올리게 하는 소설로 등장하는 모든 남자로부터 ‘사랑’받는 30대 여자 요리사의 이야기다. 요리와 인생이 어우러지는 가운데 잘 짜여진 식단을 보듯 소설의 내용이 전개된다. 프롤로그에 해당하는 「달콤한 아침」은 음식이 얼마나 아름다운 취향이 되고 행복한 일상이 되는지를 이야기한다. “요리는 갖가지 재료의 조화와 적절한 시간의 안배, 그리고 만만치 않은 정성이라는, 생각보다 까다롭고 복잡한 과정을 거쳐 완성된다.” 30대의 사랑과 인생이라는 것도 이처럼 요리사의 능숙한 요리법에 따라 완성되는 ‘그 무엇’이라면 얼마나 좋을 것인가? 
칙릿 소설에서 연애는 여자로서 살아가는 이유를 제시하는 유일무이한 소재다. 그래서 칙릿소설이 로맨스 소설의 연장선에 놓이게 된다. ‘연애’는 단순히 여성들의 사회적 진출과 신장된 여권의 문제만으로는 풀 수 없는 진화심리학적인 ‘생태 의식’과 문화사회학적인 ‘문화 관념’이 담겨있는 것이 분명하다. 
이러한 연애 이야기가 수진과 유리 등 동년배와의 수다(대화)로 전달된다. 연애의 극적인 갈등이 남자와 여자들 사이에 생기지 않는다. 경험에 대한 기억과 ‘이야기 능력’에 따라 대화를 통해서 서술된다. 수다는 연대와 질투, 동정과 위로를 통해 자기합리화의 활로를 개척하도록 도와준다. 이 소설에서 여자 친구 사이의 수다는 곧 인생의 레시피다.

“뭐? 아내? 그럼, 그 여자 유부녀야? 세상에. 그럼 결혼까지 한 여자가 다른 남자를 만났던 거야?”
“다른 남자? 아니야. 그 여자가 그 남자 부인이야.”
나는 멍해졌다. 세상에 사랑하지 않아야 할 사람이 정해져 있는 건 아니지만 내친구가 이미 결혼 남자를 사랑하다니. 그것도 냉철하디 냉철한 수진이가. 도저히 믿어지지 않았다.
“처음부터 알고 시작한 거였니?”
“아니, 몰랐어. 결혼했다고 얼굴에 써놓고 다니는 것도 아니고, 명함에 ‘아내 있음’이라고 박아놓고 다니는 것도 아니잖아. 알고 나서도 멈추기가 어려웠던 것뿐이야. 그 남자랑 나, 잘될 것 같니? 너의 느낌을 말해줘.”
아니, 안 될 거야. 되면 안 돼. 그러다가도 된다고 말해주고 싶고. 나 아니면 누가 이 말도 안 되는 사랑에 빠진 수진에게 된다는 말을 해줄 수 있을까.
―'냉장고에서 연애를 꺼내다' 중에서

주인공 ‘나’는 친구 수진의 불륜을 말리고 싶다. 그러나 수진은 반대로 ‘나’와의 대화를 통해 자기 사랑의 정당성과 지속 가능함을 원한다. 등장하는 세 친구의 성격이 서로 다르다는 점을 소설 내내 강조하고 있지만, 사랑, 연애, 불륜이라는 약호를 다양하게 풀기에는 그 막연함과 상투적 상상력이 두드러진다. 우리 사회에서 ‘연애’는 한 개인의 존재론적 가치가 되어버렸다. 연애를 하는 것이 꼭 자신의 삶을 자유롭게 살아가는 것인 양 서술하는 영화, 드라마, 소설들을 많이 접하게 된다. 위에서 수진이 서술하는 내용 역시 그러한 대중 문화들 속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남이 하면 불륜 내가 하면 로맨스”라는 논리와 크게 다르지 않다. 현실적으로는 일탈적이지만 소설적으로는 일반적이어서 식상해졌다. 말초적이면서도 가장 이성적인 인간 유희인 연애를 문제삼는다는 것은 쉬운 일이지만, 납득할만하게 설득하기란 어쩌면 가장 어려운 일이기도 하다. 
‘냉장고에서 꺼낸 음식은 맛이 없다.’라는 통념에 비추어 본다면 『냉장고에서 연애를 꺼내다』의 제목은 음식과 요리에 대한 기대와 상상력을 뒤틀어놓는 모순이 있다. 연애를 요리처럼 서술한 소설 전개로 본다면, 인스턴트 음식 같은 연애가 갖고 있는 얄팍함이거나 냉동실에 오랫동안 보관되어 낯설지만 다시금 그 맛을 느끼게 된 사랑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사실 요리에 대한 과도한 묘사와 레시피를 나열하는 것이 이야기 전개를 독특하고 신선하게 만들지는 않는다. 책을 덮고 나서 정말 먹고 싶은 요리가, 음식 이름이 떠오르지 않았다는 것이다.  

진부한 하이브리드한 쿨한 ‘스타일’_백영옥의 '스타일'
'쿨하게 한걸음', '냉장고에서 연애를 꺼내다'와는 달리 백영옥의 '스타일'은 칙릿소설류에서 ‘류’를 뺀만큼 칙릿소설답다. 다른 소설들이 주인공의 내면적 시선과 얄팍하고 낭만적인 몽환에 서술의 기원을 두고 있다면, '스타일'은 ‘닥터 레스토랑’의 진실이 밝혀지는 과정에서 패션계의 무수한 소문과 간절한 소비 문화의 현란함을 내걸고 있다. 사실 '쿨하게 한걸음'은 읽을수록 한층 성숙해 있을 여자주인공을 상상하게 되고, '냉장고에서 연애를 꺼내다'는 이 여자는 누구랑 연결될까라는 결말을 자꾸 떠올리게 된다. ‘사소한 공상’과 ‘역설적인 순진함’을 갖추고 스키니진을 입기 위해 살을 빼야하는 여자 주인공 서정과 그녀를 유년기부터 사랑한 ‘명품’ 남자 우진(유능한 의사이면서 비밀스러운 요리사), 이들의 우연처럼 빚어지는 만남과 해피엔딩으로 보자면 '스타일'은 2000년 이후 한국 드라마에서 쉽게 발견할 수 있는 ‘신데렐라’ 이야기와 다를 것이 없다. 또한 「어글리 베티」나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와 같은 미국 드라마에 등장하는 수다스럽고 까칠한 B급 캐릭터와 그들의 우악스러운 입에서 쏟아져 나오는 명품 브렌드의 나열이 반복되고 있다. 그러나 성수대교 붕괴의 아련한 기억이나 커피 속에 담긴 제국주의의 검은 빛을 담아냄으로써 도시인들의 의식 속에 각인된 가증스러운 공포와 미묘한 신경증을 가벼운 듯 문제적으로 제시한다. 발랄한 문체와 통속적인 욕망을 견제할만큼 문제적이지만, 그 생동감을 훼손할 정도로 진지하지 않은 묘미를 갖고 있다.
'스타일'은 패션 잡지 회사를 배경으로 크게 ‘맛’을 탐색하는 이야기와 ‘사랑’을 탐색하는 이야기를 서로 교직해 놓았다. TV마다 넘쳐나는 맛집 소개에서부터, 인터넷 블로그에 늘어붙어 있는 온갖 정보에 이르기까지, 도시인들에게 ‘맛집 정보’란 사막의 오아시스이고 게임의 빌드오더와 같다. 이러한 정서가 고스란히 담긴 '스타일'은 술집이든 밥집이든 승냥이처럼 ‘맛’을 찾아 빌딩숲을 헤매다니는 도시인들의 감각을 ‘패션’과 ‘장인 정신’, ‘소비 문화’라는 양념으로 버무려 놓았다. 닥터 레스토랑이라는 미지의 인물을 향한 동경과 질투심은 실체없는 욕망과 과도한 자극에 노출된 도시인의 영악한 욕망을 반영하고 있다.
사랑 혹은 연애를 맛이나 음식에 비유하는 영화나 노래처럼, '스타일'에서 키스는 ‘불가리 옴므, 민트향 담배, 몰트 위스키’를 느끼게 하는 것이고 ‘운남성에서 가져온 보이차’는 섹스를 위한 입가심이다. 뛰어난 능력에도 불구하고 세속적이지 않으며, 땀의 현장성을 서정에게 체험하게 해주는 우진은 모든 여성들이 꿈꿀만한 완벽한 남자다. 첫눈에 반하고 몇 년 동안 곁에서 지켜봐 주고 영원한 사랑을 이야기할 수 있는 남자란 이런 소설에서나 현실감을 갖는 존재이다. 또 그 비현실감이 채워질 듯 하지만 결코 채워질 수 없는 명품·사랑·맛의 유혹과 함께 '스타일'을 ‘소비’할 수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삶은 여전히 풀기 어려운 문제 같다. 그저 답을 찾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는 모두를 안쓰러워 할 뿐, 누구도 대신 해줄수 있는 건 없다. 저 평화로운 한강 다리도 어느 순간 무너질 수 있다고 생각하면 지금 이 시간, 바로 내 옆에 있는 사람을 이해하는 것보다 중요한 건 아무것도 없다는 생각이 든다.
나는 민준 선배를 위해 울지 않기로 했다. 그를 위해 우는 대신, 그의 미래를 위해 웃어주는 일에 대해서만 생각하기로 했다. 오해가 풀리고 그래서 기자 선배를 이해하게 되었다, 라고도 쓰지 않겠다. 나는 여전히 그녀를 모른다. 하지만 내가 받은 상처만큼 그녀 역시 내게 많은 상처를 받았을 것이다. 이젠 적어도 소문 속에서, 그녀가 나를, 내가 그녀를 오해하도록 내버려두진 않겠다.
―'스타일' 중에서

이러한 가볍지만 명료한 인식은 제니칼의 부작용에 시달리고, 마감증후군에 쫓기더라도 도시 여성의 하루를 감당하기에는 충분한 절묘한 탈출구가 된다. 이러한 상념이란 에스프레소 커피 한잔이면, 명품 청바지의 부드럽게 감기는 감촉이면 사라질 것이기 때문이다. ‘33살의 무거움’과 ‘30대의 결혼’에 맞서며 상투적인 감상에 빠지기 보다는, 도시 생활인으로서 자신을 변호할 수 있는 현실감각을 찾는 것이 어쩌면 더 유효한 인생의 처방전일지 모른다. 

낭만적 다락방의 목소리
이 소설들을 읽는 동안 내내 자신의 일기를 써가는 빨간머리 앤이 떠올랐다. 미래에 대한 막연한 기대와 느리지만 세속의 시간에 맞게 흘러가는 인생을 관조하려는 앤의 목소리가 귀가에 맴돌았다. 어쩌면 지금 칙릿소설을 쓰고 있는 30대 여성 작가들이 앤과의 동일시를 경험했던 세대라는 점에서 여전히 꿈꾸는 듯 중얼거리는 그들의 목소리를 이해할 수도 있다. 그러나 스스로의 발목을 잡는 그물이 될수도 있는 ‘낡은 낭만성’과 ‘골방같은 다락방’에 대해서는 한번쯤 생각해볼 만하다. 이왕에 상품으로 팔리는 것이라면 ‘자폐성’보다는 독자들이 원하는 ‘욕망’과 ‘이야기’에 귀기울여야 하는 것은 아닐까?
인터넷 개인 블로그에 쓰여지는 감수성 어린 문체에서도, 욕망하는 대상이든 현실적인 문제든 내적 합리화를 통해 뭉뚱그려 놓는 수법에서도 10대의 감수성에 빚진 30대의 상상력을 엿볼 수 있다. 또한 친구같으면서도 연인같이 살갑고, 지혜로운 언니이면서도 철딱서니 없는 옆집 동생 같은 쏘올 매이트들은 왕자님이 나타나면 폐기처분되는 타자이면서, 스스로를 되비추는 거울과 같은 존재다. 이러한 타자들과의 동일시를 통해 획득하는 공감과 지혜에 대한 신봉은 칙릿소설의 한 유형처럼 느껴진다. 
이러한 기법들을 얼마나 유지할 수 있을지 혹은 갱신해 나갈지가 어쩌면 칙릿소설의 운명이 될지도 모르겠다. 여러 이야기를 내포하고 있지만 뼈대를 훑어보면 ‘연애 이야기’가 주조를 이루고 있고 대중문화의 부스러기들(커피, 음식, 명품 등)을 죽을 때까지 종교처럼 떠받들 수는 없는 일이다. 장르적 규범과 일탈에 대한 욕망은 늘 상충되곤 했다. 쏟아져 나오는 칙릿소설들이 ‘칙릿’이라는 그 말을 수식어로 받아들일지, 그렇지 않으면 칙릿에 갇힌 로맨스 소설이 될지는 두고 볼 일이다.


오윤호∙2001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문학평론 당선. 저서 현대 소설의 서사 기법, 깨어진 역사 비평적 진실. 평론 「그림자 사나이의 틈에 대한 악몽」 외. 서강대, 서울예대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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