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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호(2008 여름호) 계간평(시)/장성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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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간평/시
시를 묻는 시, 혹은 성찰과 소통의 언어
장성규|문학평론가
∙문태준, 「혼동」(≪한국문학≫ 2008년 봄호)
∙윤종영, 「시를 베다」(≪시와 정신≫ 2008 봄호)
∙염창권, 「타이프라이터2-1983년 겨울, 누이에게」(≪21세기 문학≫ 2008 봄호)
∙강기원, 「퍼스나」(≪서정시학≫ 2008 봄호)
∙김소연, 「침묵 바이러스」(≪창작과 비평≫ 2008 봄호)
∙김행숙, 「타인의 의미」(≪시인세계≫ 2008 봄호)
∙서효인, 「박치」(≪문학들≫ 2008 봄호)
∙조용미, 「혼자 도배를 하다」(≪리토피아≫ 2008 봄호)
1. 다시, ‘시란 무엇인가?’를 묻는다는 것
진부하지만 중요한 질문들이 있다. 그 중 하나가 ‘시란 무엇인가?’이다. 아마도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 이전부터 존재했을 이 물음은, 그럼에도 여전히 현재형으로 존재한다. 시라는 것 자체가 변화하는 컨텍스트적 맥락에 따라 스스로를 끊임없이 변화시킴으로서 그 존재 의미를 확인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에 대해 명료한 단답형의 답은 존재할 수 없다. 오히려 존재하는 시 만큼이나 많은 답이 존재할 것이며, 이를 하나로 규정하는 것이야말로 수많은 구체적인 텍스트들을 억압하고 배제하는 ‘폭력’일 것이다. 중요한 것은 전통적 서정의 가능성 자체가 회의되는 지금-여기의 우리 시의 장場에서 새로운 시의 존재 근거와 그 의미를 모색하려는 시의 자기 갱신의 징후들을 꼼꼼히 살펴보는 것이다. 그리고 이 징후들에 대한 독해를 통해 우리 시대의 ‘시란 무엇인가?’에 대한 하나의 ‘가능성’을 제기하는 것이다.
비평의 미덕중 하나는 텍스트가 지니는 다양한 미적 특질에 구체적인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에 멈춘다면 비평은 비평이기를 스스로 포기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 의미가 생성되는 컨텍스트적 맥락과 텍스트의 ‘긴장’을 읽어낼 때, 비로소 비평은 텍스트에 대한 주석적 독해를 넘어, 그 텍스트가 지니는 풍부한 잠재된 가능성을 열어 낼 수 있기 때문이다.
지난 봄에 발표된 시들 중 주목되는 경향은 바로 시를 묻는 시가 두드러지는 성과를 보인다는 것이다. 물론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시 자체의 의미를 묻는 시의 자기 성찰과 모색의 노력은 존재했지만, 전통적 서정과 타자와의 소통의 가능성 자체가 부정되고 있는 지금, 다시 시란 무엇인가, 나아가 시란 무엇이어야 하는가를 밝히려는 시적 모색은 매우 치열하게 전개되고 있다.
가을밤에 뒷마당에 서 있는데/풀벌레가 울었다/바람이 일고/시누대 댓잎들이 바람에 쓸렸다/앞서거니 뒤서거니/풀벌레 소리/댓잎 소리/또 한 번은/겹쳐/서로 겹쳐서/그러나 댓잎 소리가 풀벌레 소리를 쓸어내거나/그러나 풀벌레 소리가 댓잎 소리 위에 앉거나/그러지는 않았다/혼동이라는/그 말에/큰 오해가 있음을 알았다/혼동이라는/그 말로/나를 너무 내세웠다
―문태준, 「혼동」, '한국문학', 2008 봄
문태준의 「혼동」은 지금-여기 우리 시가 서 있는 상황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한 편으로는 시적 주체의 목소리만을 강조하는 자폐적 독백이, 다른 한 편으로는 섣부른 시적 주체의 폐기와 이로 인한 타자와의 ‘관계맺음’에 대한 회의가 제기되는 것이 우리 시의 현실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시란 무엇인가?’에 대한 발본적인 질문은 “풀벌레 소리”와 “댓잎 소리”가 서로 “앞서거니 뒤서거니”하면서 “서로 겹쳐서”내는 시의 가능성, 즉 시적 주체의 자기 성찰과 타자와의 소통의 가능성을 묻는 것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서로 겹쳐서”소리를 내면서도 “혼동이라는/그 말로/나를 너무 내세”우지 않는 시. 주체와 타자간의 ‘우애로운 마주침’을 통한 새로운 “풀벌레 소리”와 “댓잎 소리”의 어우러짐으로 나아가는 시. 이러한 우리 시의 자기 성찰과 타자와의 소통의 가능성을 살펴보는 것이 이 글의 목적이다.
2. 시의 자기 성찰과 새로운 ‘불온시’의 가능성
캄캄한 밤의 모가지에/잘 벼린 한 칼 긋는다/떨어지는 별들의 붉은 잔해/언어의 조각들이 도로에 머리를 박는다/질주하는 자동차가 밀고 간다 쏜살같이/시는 베어졌다 그러므로 창백하게 아침이 올 것이다/시인이여 기침을 하자고 김수영이 가래침을 뱉으며 기어 나올 것이다/현실은 풍자다 도적들이 신문의 활자마다 웃고 있다/자살하지 못하는 시는 그래서 베어져야 한다/목 잘린 시들은 아파트 주차장 사이 빌딩의 엘리베이터 안을/배회해야 한다 기침을 하던 시인이 다시 기어 나오고/베어진 시는 떠돌아야 한다/흩날리는 자음과 모음들 찢긴/살점들 저 붉은/피붙이들
―윤종영, 「시를 베다」, ≪시와 정신≫, 2008 봄
윤종영의 「시를 베다」는 자폐적인 내면의 고백과 생경한 기법적 실험에 경사되어 있는 현재 우리 시의 주류적 경향에 대해 날카로운 자기 성찰을 보여준다. 그는 일찍이 시가 시대와의 불화임을 ‘온몸의 시’로 보여준 김수영의 오마주를 통해 ‘온몸의 시’가 지니는 시적 윤리의 현재적 가능성을 탐색한다. 그에게 ‘온몸의 시’의 무게감을 상실한 시대, “자살하지 못하는 시는 그래서 베어져야 한다”. 이 “목 잘린 시들은” 안온한 시집과 서재가 아니라 “아파트 주차장 사이 빌딩의 엘리베이터 안”에서 “배회해야 한다”. 그럴 때 비로소 시는 구체적인 삶에 천착하여 ‘불온함’을 잃어버린 “신문의 활자”를 전복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김수영의 ‘온몸의 시’는 그렇게 쉽게 존재할 수는 없다. 김수영의 말대로 머리도 아닌, 가슴도 아닌 ‘온몸’으로 시대와의 ‘불화’를 견디어 낼 때, 비로소 ‘온몸의 시’는 그 가능성을 확보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베어진 시”는 결코 안온한 현실에 안주할 수 없다. “캄캄한 밤”으로 표상되는 지금-여기의 신산한 삶에서 ‘온몸의 시’는 끊임없이 “떠돌아야 한다”. 그리고 그 시는 잘 빚어진 완결된 구조물이 아니라 구체적인 현실과의 접속을 통해 스스로를 베어버리는 존재여야 한다. 그래서 윤종영은 ‘베어진 시’의 존재 형식을 “흩날리는 자음과 모음들 찢긴/살점들 저 붉은/피붙이들”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 “찢긴 살점들”에서 비로소 지금-여기에서의 구체적인 현실과의 접속을 통해 시대와의 불화를 증명하는 ‘온몸의 시’가 생성될 것이다.
나뭇가지 위에 슬그머니 내린 햇살들이/자판을 두드린다/그 사이로 누이와 함께 길을 걸어간다/춥다 추워……,/아무도 따라오지 않는 길, 먼 길/검은 리본의 실선을 따라 타이핑 소리/드륵 드르륵, 빠르게 미싱바늘 지나가는 소리/타다닥거리면서 지루하게 가야 할 길/그 심부름 길을 따라 아직도 걸어가는 중이다/뒤를 돌아보는 건,/누군가 우릴 따라오고 있을 거라는/허약한 가능성 때문/아무도 우리의 누추한 길을 따라오지 않았으므로/한 꾸러미의 테잎이 다 풀릴 때까지/걷기만 하는 중/무어라 해명할 수 없는 절망을 맛보았던 길,/아버지는 금세 책을 펴 놓고/큰형의 가면으로 바꿔 쓰는 중이었다/우리가 구로공단 쪽으로 걸어가지 않았더라도/방문이 벌컥 열리면서 비린 욕설이/토사물처럼 흘러나왔겠지만/그 당시엔 모두 추웠고/그 추위보다도 독한 두려움 속에는/누군가, 우리를 함부로 끌어가리라는 생각 때문/데려가서 마침내 팽개칠 것이라는 절망 때문/이후로 아주 헐벗은 몸이 되었지만/달콤한 한 마디가 필요했는지 모른다/“ㅊㅜㅂㄷㅏ…”/그 말은 네가 너를 향해 던진 말이면서/나에겐 세상에서 가장 따뜻한 말이었던 것/지금도 또박또박 발자국을 남기며/우리는 여전히 외출 중이지……/으스름달밤 울타리 사이로 불쑥,/손가락이 튀어나와/우리를 두드려 줄 때까지/그 손가락들이 토닥거리면서/나머지 길을 마저 설명해주기까지/햇살 자판으로 두드려진 저 마른 나뭇가지에서/새 눈이 돋기까지/춥다, 진짜!
―염창권, 「타이프라이터2-1983년 겨울, 누이에게」, ≪21세기 문학≫, 2008 봄
그렇다면 우리 시대의 ‘온몸의 시’란 어디서 출발해야 하는가? 무엇보다 신산한 삶의 추위를 외면하지 않고 응시하는 것에서 시작해야 할 것이다. 염창권의 「타이프라이터2-1983년 겨울, 누이에게」는 ‘온몸의 시’의 구체적인 출발점을 잘 보여준다. 1983년의 “무어라 해명할 수 없는 절망을 맛보았던 길”은 기실 지금-여기에서도 그대로 적용된다. 이 “그 추위보다도 독한 두려움 속”에서 ‘온몸의 시’는 무엇을 할 수 있고, 또 해야만 하는가? 고답적인 언어의 유희로 추위와 독한 두려움을 외면하는 것도, 반대로 섣불리 추위를 넘어서는 추상적인 가능성을 설파하는 것도 ‘온몸의 시’와는 거리가 멀다. 오히려 ‘온몸의 시’는 “슬그머니 내린 햇살들이/자판을 두드”리는 시여야 한다. 바로 “슬그머니” 내렸기에 이 “햇살”로 쓰여진 시는 섣부른 따뜻함을 설득하지도 않으며, 동시에 가공된 언어로 “자판을 두드”리지도 않는다. 그렇다면 다시, ‘온몸의 시’는 정확히 어디에 위치해야 하는가? 무엇보다 시대와의 불화를 기꺼이 감내하는 과정을 거쳐야 하지 않을까? 그 추위에 대해 “ㅊㅜㅂㄷㅏ…”라고 웅얼거리는 것. 그 말은 분절된 자음과 모음의 형식이기에, 논리적으로 조합된 투명한 언어가 아니기에 정직하다. 그러나 바로 그렇기에 그 말은 어떠한 언어보다도 “그 말은 네가 너를 향해 던진 말이면서/나에겐 세상에서 가장 따뜻한 말”일 수 있다. 그 ‘온몸의 시’가 지니는 미덕이 비로소 여전히 “외출 중”이며 “나머지 길”을 알 수 없는 우리로 하여금 추위에 대해 “춥다, 진짜!”라는 발화를 가능하게 한다. 이 발화는 여전히 “우리의 누추한 길”과 “무어라 해명할 수 없는 절망을 맛보았던 길”에서 이루어지지만, 바로 그 길에서 이루어진 것이기에 “햇살 자판으로 두드려진” 발화 일 수 있으며, 추위를 이겨내려는 “새 눈”을 돋아낼 수 있는 힘을 지닌다.
밤의 식탁에서 나는 쓴다/사흘쯤 굶어도 식욕이 없는 자/신발 사이즈는 커지고/브래지어는 B컵에서 A컵으로 줄고/거울을 닦지 않는 자/립스틱은 점점 진해지고/뼈의 피리를 지녔으면서도/느린 재즈의 선율에 눈 감지 않는 자/사내의 땀내를 맡아도 달뜨지 않으니/더 이상 사랑을 믿을 수 없는 자/누구인가/이 맛없는 자/오미의 구별이 안 되는 자/백색 스크린 같은 자/얽힌 탱고의 다리 사이에서 태어났고/요귀와 함께 자랐으며/간절기마다 발작을 일으키던/바람의 유전자를 지녔던/너는 어디로 사라졌는가/네 얼굴 위에 벗겨지지 않을/돌의 가면을 덮어씌운 자/너의 알록달록함 잿빛으로 바꾼 자/누구인가/구멍 하나 없는 가면 속에서/미라처럼 서서히 숨 막혀 가는 너/이제 눈물샘마저 막힌 채/혀가 굳어가는 퍼스나/새벽이 오는 식탁에서 나는 쓴다 쓰고 있다
―강기원, 「퍼스나」, ≪서정시학≫, 2008 봄
그러나 여전히 문제는 남는다. 시대와의 불화를 감내하려는 ‘온몸의 시’는 과연 ‘온몸’으로 존재하는가? 어쩌면 ‘온몸’이란 ‘몸’의 각 개체와 부분이 지니는 개별자적 속성을 폭력적으로 봉합하려는 섣부른 조급함의 표현은 아닐까? 그렇다면 ‘온몸’속에서 배제된 기형적인 몸‘들’에 대한 치열한 자기 인식의 부재가 김수영의 ‘온몸의 시’가 지니는 치명적인 한계는 아닐까?
강기원의 「퍼스나」는 이 지점에서 빛난다. 기실 완결된 주체로서의 ‘온몸’이란 근대적 상상력에 의해 고안된 개념일 뿐이다. 그렇다면 시대와의 불화를 감내하려는 ‘불온시’는 ‘온몸의 시’ 조차도 회의하고 성찰할 때 비로소 이른바 후기 근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진정한 ‘불온함’을 줄 수 있을 것이다. 강기원은 ‘온몸’에 의해 폐제되어온 ‘퍼스나’의 존재를 복원시킨다는 점에서 시란 무엇인가? 라는 질문에 대한 본질적인 문제제기를 보여준다. 이 ‘퍼스나’는 ‘온몸’이 만든 “구멍 하나 없는 가면 속에서/미라처럼 서서히 숨막혀 가는 너”이다. ‘온몸’이 기실 시대와의 불화를 근거로 단단한 시적 주체를 상정하면서 만들어진 “가면”이라면, 이 “가면”에 의해 폐제된 “너”의 존재를 복원시키는 것이야말로 ‘온몸의 시’를 넘어 지금-여기에서 새로운 ‘불온시’의 가능성을 탐색하는 핵심적인 시적 과제일 것이다.
중요한 것은 이 시에서 ‘퍼스나’는 “혀가 굳어가는 퍼스나”로 언표된다는 점이다. 공적인 발화에서 폐제되는 ‘퍼스나’를 복원시키는 것, 그 ‘혀’를 다시 움직이게 하는 것은 “거울”로 표상되는 투명한 주체의 발화가 아닌, 주변부의 웅얼거림과 같은 형식으로만 가능하다. 이 웅얼거림을 ‘시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공적 담론의 영역에서 논리와 추상에 의해 발화되지 않지만, 그 이면에 분명히 존재하는 퍼스나‘들’의 목소리를 복원시키는 것이 바로 시가 아닐까? 그렇다면 강기원의 다음과 같은 진술은 그녀가 지니는 시적 지향이 우리 시대 새로운 ‘불온시’의 한 가능성임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새벽이 오는 식탁에서 나는 쓴다 쓰고 있다”. 위의 문장이 “쓰고 있다”는 현재형임에 주목하자. 그녀의 작업은 아직 현재형이라는 것. 따라서 ‘퍼스나’의 복원과 이에 기반한 새로운 ‘불온시’는 이제 시작일 뿐이라는 것. 그리고 여기서 김수영의 ‘온몸의 시’를 넘어서는 시적 자기 성찰과 윤리가 생성될 수 있다는 것. 정확히 이 지점이 지금-여기의 시적 성찰과 윤리가 도달한 곳이다.
3. 시적 소통을 통한 타자와의 ‘우애로운 마주침’
나는 말비듬이 떨어진 당신의 어깨를 털어주었다. 당신은 말들을 두 손 가득 담아 내 몸에 뿌려주었다. 눈을 맞은 나무처럼 꼿꼿이, 이 거리에 함께 서 있던 잠깐 동안의 일이리라.//말을 상자에 담아 당신에게 건넸을 때, 당신은 다이얼을 돌려가며 주파수를 잡으려 애를 썼다. 라디오 앞에 귀를 내어놓은 애청자처럼, 나는 당신의 사연을 읽어주는 DJ가 됐을지도 모를 일이다.//그때 우리는 들을 준비가 되어 있었다. 누구도 말하려 하지 않았을 뿐. 올겨울은 침묵 바이러스가 모두를 몸져눕게 했다. 말하지 않았기 때문에 가해진 체벌이었을 수도 있다. 결백을 입증하는 것보다 죄를 입증하는 데에 말이 더 무력한 탓일 수도 있다.//사람들은 발가벗은 몸으로 거리에 서 있었다. 서로를 부둥켜안고 말없이 열렬히 속삭였다. 그럴 때 당신은 꿈을 꾸고 있었으리라. 말로 할 수 없는 몽롱한 꿈이거나 말로 하면 안되는 알몸의 꿈. 햇빛 받은 나무처럼 온몸으로 투명해지는 형벌.//벌을 선 채로 우리는 꿈속으로 들어가길 갈구했다. 서로의 꿈속으로 들어가 사지를 포갠 채 말을 대신하길 바랐다. 당신이 듣고 싶은 한마디가 입에서 나오질 않는다. 할 말을 하지 않아서 내가 앓는 동안, 당신에게 가는 버스는 끊기도, 막차를 놓친 사람들과 함께 이 겨울을 받아내며 나는 서서히 얼어간다. 눈은 쌓여 어깨가 버겁다. 말을 잘하려고 침묵하는 것인지, 말이 필요치 않아 침묵하는 것인지,//귀가 천개라도 모자랄 새벽, 손이 만개라도 못다 쓰다듬을 당신,이 쏟아낼 말들에, 제대로 된 자세로 몰매를 맞아보려고 손을 뻗어 라디오를 끈다.
―김소연, 「침묵 바이러스」, ≪창작과 비평≫, 2008 봄
시가 자폐적인 ‘독백’이 아닌 타자와의 ‘우애로운 마주침’을 위한 미학적 표현이라면, ‘시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고민은 시를 매개로 한 타자와의 소통의 가능성으로 나아가야 한다. 김소연의 「침묵 바이러스」는 이에 대한 성실한 시적 탐색을 보여준다. 근대적인 문학 장르의 하나로서의 ‘시’는 시인이라는 절대적 주체의 발화 형식을 지닌다. 따라서 이 발화 형식은 “말을 상자에 담아 당신에게 건”네는 형식이다. 이때 타자는 ‘나’의 말을 듣는 위치, 즉 “다이얼을 돌려가며 주파수를 잡으려 애를”쓰는 위치에 놓인다. 이때 ‘라디오’란 시의 주체와 타자간의 위계질서가 암묵적으로 존재하는 근대적 시의 메커니즘을 의미한다.
그런데 이러한 ‘라디오’를 통한 타자와의 소통은 가능한가? 아마도, 불가능할 것이다. 소통은 단순한 메시지의 전달이 아니라 타자와의 윤리적 ‘교감’과 ‘연대’이기 때문이다. 이 타자의 언어는 ‘라디오’가 아닌 형식을 요구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말로 할 수 없는 몽롱한 꿈이거나 말로 하면 안되는 알몸의 꿈”이기 때문이다. 이미 ‘말’과 그 표현인 ‘시’가 특정한 언어적 규칙에 의해 지배되는 형식이기에, 이로부터 배제된 타자의 언어는 ‘라디오’의 형식일 수 없다. 따라서 그 형식은 현실논리가 지배하는 ‘라디오’의 영역이 아닌, ‘꿈’의 영역에만 존재한다.
그러나 김소연은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그녀는 자신의 시적 주체로서의 위상 자체를 급진적으로 전복시킨다. 바로 자신의 “말을 상자에 담아 당신에게 건”네는 ‘라디오’의 ‘DJ’로서의 시인의 위치를 폐기하는 것이다. 그녀는 바로 “당신”의 말, 타자의 말을 듣기 위해 다음과 같이 행동한다. “귀가 천개라도 모자랄 새벽, 손이 만개라도 못다 쓰다듬을 당신,이 쏟아낼 말들에, 제대로 된 자세로 몰매를 맞아보려고 손을 뻗어 라디오를 끈다.” 시인의 발화를 매개하는 ‘라디오’를 끄는 것, 그리고 이를 통해 바로 타자의 말을 듣고자 하는 것에 김소연의 시적 소통에 대한 급진적인 재인식이 존재한다. 왜냐하면 기실 타자의 말이란 “몰매”와도 같은 무게를 지니기 때문이다. 이 작품이 시적 소통의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주는 것은 ‘라디오’를 넘어, 바로 이 “몰매”를 맞으려는 “온몸으로 투명해지는 형벌”을 기꺼이 감수하고자 하는 의지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살갗이 따가워,/햇빛처럼/네 눈빛은 아주 먼 곳으로 출발한다/아주 가까운 곳에서//뒤돌아볼 수 없는/햇빛처럼/쉴 수 없는 여행에서 어느 저녁/타인의 살갗에서/모래 한 줌을 쥐고 한없이 너의 손가락이 길어질 때//모래 한 줌이 흩어지는 동안/나는 살갗이 따가워.//서 있는 얼굴이/앉을 때/누울 때/구김살 속에서 타인의 살갗이 일어나는 순간에
―김행숙, 「타인의 의미」, ≪시인세계≫, 2008 봄
타자와의 ‘우애로운 마주침’은 단순한 타자와의 만남이 아니다. 타자의 타자성을 인식하면서 주체와의 동일성을 강요하지 않는 것, 동시에 타자를 통해 주체의 새로운 변형을 이끌어 내는 것, 나아가 타자에게 주체의 변형됨을 보여줌으로써 다시 타자와의 ‘관계맺음’의 윤리를 복권시키는 것으로 나아가야 하기 때문에, ‘우애로운 마주침’이란, 기실 주체와 타자간의 치열한 ‘충돌’을 동반한다. 그리고 이 ‘충돌’의 과정을 경과할 때, 비로소 마주침에 의한 ‘생성’이 가능하다.
김행숙의 「타인의 의미」는 이러한 ‘우애로운 마주침’이 지니는 ‘충돌’의 지난함을 잘 보여준다. 타자를 인식한다는 것은 “쉴 수 없는 여행”이며 “살갗이 따가”움을 동반하는 과정이다. 시적 주체가 타자를 동일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타자와의 ‘충돌’을 감내하기 때문에 이런 “살갗이 따가”움이 발생한다. 이 타자는 “아주 가까운 곳”에 있지만, 마치 “뒤돌아볼 수 없는/햇빛처럼”존재하기 때문에 그와의 대면이란 시적 주체의 인식 방법인 시각을 통한 ‘바라봄’을 불가능하게 한다. 그렇다면 어떠한 방법을 통해 타자와 대면할 수 있는가? 바로 “구김살 속에서 타인의 살갗이 일어나는 순간에” 그것은 가능하다. 충돌이 동반하는 “구김살”이 있을 때, 비로소 “타인의 살갗이 일어”날 수 있으며 이를 위해서는 시적 주체의 “살갗이 따가”움을 감내해야 한다. 타자와의 ‘우애로운 마주침’이 지니는 ‘충돌’의 의미에 대한 심도 깊은 탐색이야말로 이 시가 이룬 시적 소통의 새로운 가능성일 것이다.
모든 도로에 도도한 박자가 흘러요 차선 마디 사이사이에, 네 발로 진화한 인간의 굽은 척수를요 드럼의 피막皮膜삼아서요 두들겨요 끼니처럼 사라지는 지난한 아스팔트의 익은 얼굴은요 언제나 갱충맞게 다시 나타나지만, 지나가면 그뿐 우리는 길을 기억하지 않아요 박자에 껴묻혀 가다 섰다를 반복할 뿐, 박자가 몸에 들었어요 나이트에서 군무를 즐기는 그녀들의 가슴처럼요 한 개의 밤을 직립보행하는 그들의 허리처럼요 박자를 기억하는 거죠 박자는 본능, 온전한 몸의 언어, 라디오는 틈틈이 센박과 여린박을 안내해주지만 그게 무슨 상관이람 거대한 도로를 굴러다니는 척수의 진폭은요 일 년 전이나 일 년 후나 내비게이션의 맑은목소리처럼 똑같은 표정을 하고 있는데요//핸들에 턱이 붙은 아줌마에게 도로는 궁상각치우, 궁상각치우, 뒤로 물러나고 집에서밥이나하지도로에쳐나와서는감히박자를깨뜨리나,를 안면에 붙은 굽은 척수들이 가다 섰다를 반복하는, 도도한 오후의 거대한 칸타빌레, 아줌마는 눈을 질끈 감고요 빗나간 차선에서요 엇박의 악센트를요, 쿵따쿵따 그렸습니다.
―서효인, 「박치」, ≪문학들≫, 2008 봄
그러나 타자와의 ‘우애로운 마주침’이란 논리와 추상의 영역 이전에 ‘몸’의 영역에서 일어나기 때문에 더욱 지난하다. 우리의 ‘몸’은 모두 개체마다 다른 ‘비트’를 지니며, 이 비트의 엇박자를 감내하는 것은 바로 ‘몸’의 영역에서 이루어져야 하기 때문에 결코 쉽게 성취되지 않는다. 서효인의 「박치」는 이 사실을 잘 보여준다. “모든 도로에 도도한 박자가”흐르며 이 “박자는 몸에 들었”다. 게다가 “박자는 본능, 온전한 몸의 언어”이기 때문에 우리의 구체적인 몸의 움직임을 규율한다. 문제는 이 비트가 철저하게 동일화의 논리에 의해 구성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궁상각치우, 궁상각치우”로 표상되는 타자의 비트는 동일화의 논리에 의해 “집에서밥이나하지도로에쳐나와서는감히박자를깨뜨리나”는 주체의 폭력성에 의해 억압되고 배제된다. 동일화의 논리 속에서 ‘우애로운 마주침’이란 결국 “도도한 오후의 거대한 칸타빌레”를 방해하는 타자성으로 규정되며, 이는 곧 폐제의 대상으로 규정된다.
그럼에도 타자는 바로 주체의 이면에 분명히 존재하는 것이기에 언제나 이 “칸타빌레”의 균열을 비집고 등장하며, 다른 비트를 통해 “칸타빌레”를 전복한다. 서효인의 작품은 이 점을 정확히 인식하고 있다. “아줌마는 눈을 질끈 감고요 빗나간 차선에서요 엇박의 악센트를요, 쿵따쿵따 그렸습니다.” 이 “엇박의 악센트”와의 ‘충돌’을 통한 새로운 비트의 ‘생성’이야말로 시적 소통을 통한 ‘우애로운 마주침’의 결과이다. 그리고 지금-여기의 시가 타자와의 소통을 고민한다면, 그 고민은 무엇보다 이 “엇박의 악센트”를 듣는 것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4. 시적 윤리와 생성의 가능성
저 목소리를 언젠가 들은 적이 있다/우물 속에서 길어 올린 듯/웅웅 웅리는,/아슬아슬한 평온함이 불안을 느끼게 하는/그 목소리를//오래 전 이른 아침 손을 더듬으며 받은/어떤 목소리, 잠이 싹 물러나고/뒷목이 서늘해지는 그 낮은 소리를/눈을 감고 들은 그날 이후 삶은 비루해졌다//혼자 이사를 하고/밥을 먹고/잠자리에 들고/도배를 하고/철마다 수건을 받치고 장롱을 옮기고//혼자 하지 못하는,/천장의 벽지만/누렇게 바랜 지난 옷을 입고 있는/오랜 독신녀의 방/오늘 그의 목소리가 죽은 이의 음성과/배추흰나비의 날개처럼 겹쳐진다//사방연속무늬의 넝쿨은 천장으로 올라가지/못하고,/누군가 넝쿨을 걷어 올려주어야 하는데/그가 누우면 갈 곳 몰라 허공을 헤매는/넝쿨손들이 보이겠지//그 넝쿨손들의 허전한 손을 잡아주어야 하는데/버팀목이라도 세워주어야 하는데/몸을 누이면/하늘로 뻗지 못하는 넝쿨의 손가락뼈들이//마디마디 다 보일 텐데/사방을 올라온 벽지의 棺은/어쩌면 뚜껑을 덮지 못할 텐데/오늘 누가 혼자 도배를 했다
―조용미, 「혼자 도배를 하다」, ≪리토피아≫, 2008 봄
‘시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명료한 답이 있다면, 바로 그것이야말로 시가 더 이상 자기 성찰과 타자와의 소통의 가능성을 지니지 못했다는, 따라서 시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일 것이다. 시 자체가 끊임없이 스스로를 성찰하며 변화시키고, 타자와의 ‘우애로운 마주침’을 통해 새로운 의미를 ‘생성’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조용미의 「혼자 도배를 하다」는 이러한 시적 윤리와 의미의 생성 가능성을 뛰어나게 보여준다. 시적 주체는 “아슬아슬한 평온함이 불안을 느끼게 하는”, 그리고 “뒷목이 서늘해지는 그 낮은 소리를”듣는다. 그 소리는 기실 “죽은 이의 음성”이기에 시적 영역에서만 들을 수 있는 소리이다. “죽은 이의 음성”으로 표상되는 타자의 목소리는 인식하는 시적 주체의 ‘평온함’에 ‘충돌’을 일으킨다. 타자의 목소리를 통해 시적 주체는 “그날 이후 삶은 비루해졌다”는 인식에 도달한다. 타자의 목소리가 부재한 “아슬아슬한 평온함”은 시가 지녀야 할 급진적인 ‘불온성’이 배제된 세계이며, 따라서 이 세계에서의 시는 “비루해졌다”. 그러나 김수영이 “젊은 시인이여 기침을 하자”(김수영, 「눈」)라며 절규하던 이 지점에서 조용미는 한 걸음 더 나간다. 김수영이 시대와의 ‘불화’에 대한 절규로 시의 ‘불온성’을 극한까지 밀고 나갔다면, 조용미는 김수영에게는 존재하지 않던 시적 주체와 ‘타자’간의 ‘충돌’을 감행한다. 시적 주체는 “그의 목소리가 죽은 이의 음성과/배추흰나비의 날개처럼 겹쳐”지는 ‘충돌’을 통해 새로운 시의 ‘불온성’을 보여준다. 이 ‘불온성’이야말로 지금-여기에서의 우리 시의 타자와의 ‘우애로움 마주침’을 통한 의미의 ‘생성’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빛난다. 왜냐하면 조용미에게 시란 “혼자 하지 못하는,/천장의 벽지”와도 같은 타자와의 충돌의 영역에서 생성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영역을 시적 주체가 선험적으로 장악하는 것이 아니라 “사방연속무늬의 넝쿨은 천장으로 올라가지/못하”는 타자성을 인식하면서, 동시에 시적 주체의 영역 자체를 “사방을 올라온 벽지의 棺”으로 만듦으로써 그 타자와의 ‘마주침’을 감행한다. 그리고 이 ‘우애로운 마주침’을 통해 조용미는 우리시대 ‘시란 무엇인가?’에 대한 치열한 고투의 한 가능성을 생성시킨다. 그 가능성은 아직 과정중이다. 그녀는 말하고 있지 않은가? “사방을 올라온 벽지의 棺은/어쩌면 뚜껑을 덮지 못할”것이라고. 그럼에도 “누군가 넝쿨을 걷어 올려주어야 하”며, 그것은 “혼자 하지 못하는, 천장의 벽지”에서만 가능하다고 말이다. 그녀의 “오늘 누가 혼자 도배를 했다”라는 담담한 진술은 “젊은 시인이여 기침을 하자”라는 김수영의 ‘불온성’의 시적 윤리를 넘어서, 지금-여기의 시적 윤리를 타자와의 ‘우애로운 마주침’을 통해 새롭게 생성하려는 의지를 보여준다.
지금-여기에서의 시를 묻는 작업은 두 가지 층위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하나는 시에 대한 자기 성찰을 통해 시의 ‘불온성’을 김수영의 그것과는 다른 ‘불화’의 맥락에서 재구성하고자 하는 경향이며, 다른 하나는 시적 주체로 환원될 수 없는 타자와의 ‘우애로운 마주침’을 통해 새로운 시적 의미를 ‘생성’하려는 경향이다. 그러나 이 두 가지 경향을 분리해서 인식할 수는 없다. 무엇보다 지금-여기의 시의 ‘불온성’이란 타자와의 ‘우애로운 마주침’을 통해서만 ‘생성’가능하기 때문이다. 이 글에서 다룬 시들이 우리 시의 장(場)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것은 이 시들이 김수영의 ‘불온성’과는 다르지만, 그 치열한 “젊은 시인이여 기침을 하자”라는 시의 ‘불온성’을 재구성하고자 하는 의지를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부디 이 시인들이 ‘기침’을 하기를. 그리고 그 ‘기침’의 울림이 타자와의 ‘충돌’로 이어지기를. 그 충돌이 새로운 의미의 ‘생성’으로 나아가기를 바랄 뿐이다.
장성규∙1978년 서울 출생, 2007년 <경향신문> 신춘문예로 등단. 저서 한국현대작가와 불교(공저). 서울대학교 박사과정 재학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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