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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호 권두칼럼/이성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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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두칼럼
현실을 시화詩化한 촛불
지난 5월, 미국과의 쇠고기 수입 협정에 반대하는 촛불 문화제가 처음 열린 후 100일이 지났다. 하지만 여전히 촛불은 꺼지지 않고 있다. 6월 10일 전국에서 100만여 명이 참여했을 때의 대규모 촛불 집회가 지녔던 열기는 많이 식은 것이 사실이지만, 그래도 대단한 일이다. 이렇게 자발적인 집회가 꾸준히 열린 일은 전 세계적으로도 흔치 않은 일일 것이다. 청소년들을 중심으로 열린 작은 문화제가 전 국민적인 대정부 항쟁으로 변한 이번 사태를 보면서, ‘사건’이라는 것을 생각하게 된다. 역사라는 것은 어떤 법칙에 의해 움직인다기보다는 우연한 사건이 기성 현실의 지반을 흔들어놓고 새로운 현실을 창출함으로써 변하는 것이 아닐까, 라는 생각. 물론 사건은 공허에서 갑자기 발생하는 것은 아니다. 여러 가지 원인이 중층결정되어 일어난다. 하지만 어떠한 원인도 그 일어남 자체를 보장할 수는 없다. 그래서 누구도 예측하지 못하는 사이, 사건은 일어난다.
하지만 많은 사건들이 일어나며, 그 사건들이 모두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것은 아니다. 미래의 삶에 심대한 영향을 끼칠 때, 그 사건은 중요하다 할 것이다. 소녀가 든 작은 촛불이 들불처럼 번진 이번 촛불 정국이 과연 미래의 삶에 얼마나 큰 영향을 줄 것인지는 아직 확실하지 않다. 사실 현재 상황에서 촛불에 대해 실망하는 사람도 많을 것이다. 100만 촛불이 모였지만, 성취한 것이 거의 없다는 실망. 현 정부는 촛불의 목소리를 무시하는 것으로 일관하고, 도리어 대놓고 폭력적인 진압을 행하고 있다. 또한 시위자들에게 과도한 형 집행을 부과하며 그들의 기를 억누르고 있다. 이러한 공권력 남용에 촛불은 무력하게만 보일 수 있다. 하지만 현 정권이 갓 잡은 권력을 호락호락하게 접을 것이라는 기대는 환상일 것이다. 쉽게 권력이 붕괴되리라고 생각했다면 촛불에 대해 오해한 것이다.
반면 어쩌면 촛불의 성과 중 하나는, 과도한 탄압을 통해 한국의 권력 카르텔이 적나라하게 드러나게 되었다는데 있을지 모른다. 촛불은 정부의 어처구니없는 협상에 대한 비판에서 시작되었지만, 곧 한국 사회의 모든 권력층과 싸워야만 했다. 조중동을 비롯한 보수 언론, 검찰, 경찰, 뉴라이트 계열의 학계와 법조계, 대형 교회, 여러 반공 보수 단체 등이 여러 방식의 공격을 촛불에 가했다. 이들은 오직 현 정권에 대한 비판을 방어하기 위해, 논리 따위는 무시하고 이데올로기와 국가기구를 총 동원하여 촛불을 역공했다. 가령, 어떤 학자는 광우병 위험을 확률론으로 무시하고자 했고, 어떤 학자는 광우병의 과학적 근거가 확실치 않다며 무시하고자 했다. 20개월 미만의 쇠고기만 미국에서 수입하는 일본이 미국에 들이대고 있는 과학적 근거에 대해서는 함구했다. 관료들은 왜 우리가 일본을 따라가야 하는가라는 비논리적인 말로 일본의 예를 드는 사람들에게 반문했다. 이 말은 국민의 건강을 무시하는데 있어 일본을 따라갈 필요는 없다는 의미로 들린다. 한국 사회에 군림하는 온갖 권력층들이 합심하여 미국 쇠고기의 안정성을 강변할 때, 촛불이 싸우는 대상이 명확해지기 시작했다. 그들의 허접한 변명과 강변은, 한국의 권력층들이 국민의 삶에 대해서는 별 관심 없고 자신들의 이익에만 충실하다는 사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줄 뿐이었다. 촛불 정국은 한국 기득권층의 뻔뻔함을 만천하에 드러냈고, 그들의 권력은 정당성이 없다는 것도 드러냈다.
그런데 촛불의 중요성은 이러한 권력층의 속성을 드러냈을 뿐 아니라, 이 권력에 굴복하지 않고 자율적으로 싸웠다는 데에도 있다. 촛불들은 집단 지성을 통해 대항의 방향과 방법을 결정했다. 어떤 지도부도 인정하지 않았다. 인터넷 카페가 노드(node)가 되어 투쟁을 연결하면서 다양한 방면으로 권력층에 대한 저항을 실천했다. 이러한 자발성은 집회를 축제의 방식으로 진화시켰다. 다양한 집단들과 사람들이 집회에 결합하면서, 자신들을 대변하는 기구를 통해서가 아니라 스스로 직접 자신들의 목소리를 발랄하게 발설했다. 새로운 문화가 등장한 것은 분명했다. 이러한 평화적인 집회가 곧 공권력의 폭력적 진압에 의해 무력하게 보이긴 했지만, 촛불은 그 폭력으로부터 도주함으로써 쫓아가는 폭력을 진 빠지게 하는 저항력을 발휘하기도 했다. 현재 촛불의 규모가 축소된 것은 사실이지만, 저항의 새로운 형식과 문화가 등장한 사건은 미래의 한국 사회에 어떤 식으로든 영향을 미칠 것이다.
그것은 새로운 저항과 불온성의 방식이 사회의 저변에 자리를 잡게 된다는 것을 말한다. 그 방식은 리좀적이고 도주적이고 축제적이다. 촛불의 저항이 현실적으로 약화된다고 하더라도, 그 저항은 언제 어디서 분출될지 모르는 잠재성으로 존재하게 될 것이어서 언제 어디서 다시 분출될지 모르게 될 것이다. 김수영을 따라 시가 불온한 것이라면 불온이 분출된 현실은 시 자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래서 어떤 시인은 촛불이 거리를 점령한 현실에 대해 시 자체라고, 문학인들은 여기에서 할 일이 없다고 말하게 되었을 것이다. 현실이 시가 되었기 때문에, 정말로 글로 씌어진 시는 이 현실에 무력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그 시는 기쁘게 무력함을 받아들일 것이다. 시의 가장 큰 열망은 현실을 시적인 세계로 변화시키는 것일 테니 말이다. 그러니 현실의 시화만큼 시를 기쁘게 하는 것은 없지 않겠는가? 하지만 시는 계속 씌어져야 하고 또한 씌어져야 한다. 현실의 시화는 다시 잠재성으로 이주할 터, 씌어진 시는 그 잠재성이 자라는데 식량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또한 그 잠재성이 다시 현실로 전화된다면 재생된 그 시적 현실은 새롭게 변모하며 진화해나가야 할 터, 이 변모의 힘을 길러내는 것은 새로운 상상력으로 충전된 시일 것이기 때문이다.
2008년 8월
이성혁(본지 편집위원,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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