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토피아 - (사)문화예술소통연구소
사이트 내 전체검색

수록작품(전체)

31호 특집/김석준

페이지 정보

profile_image
작성자 편집부
댓글 0건 조회 2,979회 작성일 09-01-19 19:06

본문

시말, 유희, 텍스트

김석준|문학평론가



삶(삶의 놀이, 세계-시간)이란 보드 게임을 하는 아이이다. 그 아이의 게임은 왕국이다. Aion, pais esti, paizon, pesseuon; paidos he basileie.

―헤라클레이토스 「단편 B52」



1. 글을 들어가며

니체는 <반그리스도> 서문에서 ‘나에게 속해 있는 것은 모레일 뿐이다’고 선언하기에 이른다. 이 의미심장한 말은 두 가지 뜻을 함축하고 있다. 하나는 당대에 니체의 철학적 사유가 수용 이해되지 못했다는 사실, 다른 하나는 니체의 철학이 근대를 넘어서 포스트모던적 이념을 전취하고 있다는 사실을 함의하고 있다. 사실 시적 유희를 이야기할 때, 니체가 문두에 나오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다. 왜냐하면 니체는 자신의 원근법적 사유를 통해서 칸트, 헤겔의 철학적 이념을 해체시켰을 뿐만 아니라, 바카스적 열광, 춤, 황홀한 사랑에 취한 자기 망각적인 디오니소스적 유희를 하나의 예술적 이념으로 삼기에 이른다. 이러한 니체의 의식은 헤라클레이토스의 「단편 B52」의 Aion을 재해석하여 총체적 예술 행위로서의 ‘세계 게임(Welt-Spiel)’이라는 개념을 형성하기에 이른다. 그리고 니체의 이 개념은 포스트모던적 예술실천을 가능하게 만드는 이념적 테제로 작용하게 된다.

유희적 게임이 이 세계의 예술적 원리로 수용 적용될 때, ‘모든 것은 예술이다. 모든 것은 아름답다. 모든 것은 허용된다.’ 리오따르가 <포스트모던적 지식>에서 현대성의 사유의 본질을 “놀게 해다오. 아무런 방해 없이 놀게 해다오.”라고 간명하게 정의했던 것처럼, 인간은 놀이하는 아이, 즉 아이온의 예술미학적 이념을 실천하기에 이른다. 다시 말해서 포스트모던적 예술철학은 세계-내-사태 전체를 텍스트로 재구성하는 것을 가능하게 만든다. 따라서 현대의 예술은 일정한 미적 양식을 정초하는 것이 아니라, 양식화된 미적 형식을 해체하는데 그 목적이 있다. 이러한 현대의 예술의 특성으로 인해 하이데거는 현대 예술 추세의 패턴을 분간할 수 없다고 말하고, 아도르노 또한 ‘현재 평가받는 유일한 작품들은 더 이상 작품이 아닌 것들이다.’고 극언하기에 이른다. 이를테면 현대의 예술은 목적이 없으나 의미 있는 놀이 양식이거나 하나의 올바른 해석틀로 의미 규정할 수 있는 작품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파열하는 텍스트로 존재하게 된다.

모든 것을 허용하는 텍스트. 모든 것을 예술로 승인하는 텍스트. 이제 현대의 예술은 저 지고한 의미해석의 지점으로 무한 내접해가는 절대적 순간이 아니라, 주이상스적 유희로 모든 미적 현실성을 장악하게 된다. ‘그냥 즐기기만 하시오. 더 이상 생각 같은 것은 필요 없소. 의미 따위는 일고에도 가치가 없소.’ 현대의 예술은 파열하는 주체 위에 기술되는 유희 텍스트로 존재할 따름이다. ‘모든 것이 허용되었소. 이제 마음껏 세계 게임에 참여하여 놀기만 하면 되오.’ 스스로 움직여 이 세계를 유랑하는 텍스트의 제국, 혹은 세계의 텍스트화. 텍스트를 텍스트로 이접하기.


2. 존재론적 게임-러시안 룰렛, 인생의 관조, 놀이하는 아이

존재라는 말과 게임이라는 말은 상호 결합이 불가능한 말이다. 이를테면 존재론적 게임이라는 말은 그 자체로 모순개념이거나 자기 목숨을 담보로 한 무모한 생존 게임이다. 왜냐하면 존재는 그 자체로 무거운 개념, 즉 인간학적 사태가 기투된 생과 사의 변증법적 개념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존재는 모든 한계를 넘어선 지점에서 작동하는 그 무엇으로 존재한다. 반면 게임은 호이징하나 카이유와가 말한 것처럼, 그 자체로 하나의 놀이다. 실제의 삶으로부터 벗어나 자유를 향유하는 놀이는 그 자체로 일탈적 유희다. 그런데 헤라클레이토스는 그러한 존재의 특성을 놀이와 절묘하게 결합시켜 이 세계 전체를 게임의 왕국으로 만들어 어 버린다. 놀이하는 아이인 Aion. 이 세계를 유희하는 삶-시간-아이. 헤라클레이토스는 「단편 B52」에서 존재를 작동시키는 삶-시간을 일종의 보드게임으로 인식하면서 이 세계 전체를 놀이의 왕국으로 만들어버린다. 그리고 헤라클레이토스와 그의 계승자인 니체의 놀이적 유희는 생을 향유하는 동시에 이 세계 전체를 예술적 향기가 피어나는 유미적 공간으로 예술화한다. 허나 가장 극적인 게임은 존재론적 게임이다. 그것은 존재를 거는 운명에의 도전이자, 삶-시간을 죽음으로 초극하는 무모한 도전인지도 모른다. 러시안 룰렛을 감행하는 킬링필드의 칠흙같이 어두운 저 광막한 공간. 존재론적 게임은 자기 보존 본능이라는 생명의 법칙에 대한 위반인 동시에 생에의 의미를 주체화하는 천형성을 내포하고 있다.


*

승용차가 강물에 추락하면

상수원이 오염됩니다

그러니 서행하기 바랍니다

*

나는 차를 돌려 그 자리로 가

난간을 들이받고

강물에 추락하였습니다.

기름을 흘리고

상수원을 만방 더럽혔습니다

*

밤이었습니다

하늘에 글자가 새겨졌습니다

별의 문자 말입니다

승용차가 강물에 추락해서

상수원이 오염되었습니다

서행하시기 바랍니다

*

내가 죽은 것은 사람들이 모릅니다

하느님도 모릅니다

―박찬일, 「팔당대교 이야기」 전문


삶이란 어쩌면 도발적인 게임인지도 모른다. 이때 이 도발은 이것과 저것 사이 혹은 너와 나 사이 또는 신과 인간 사이에 가라앉은 인간학적 충동이다. 도발은 펄럭이는 강렬한 기표들의 의미적 읽기인데, 그것은 우연을 가장한 필연이다. 삶이란 그 자체로 우연 속에 기입된 의미의 흔적들인데, 그 흔적은 영원한 청춘을 담보로 파우스트를 유혹하는 메피스토펠레스이다. 생은 언제나 기표화된 흔적들의 유혹에 넘어가게 되어있다. 생은 언제나 말과 말 속에 기입된 질서의 위반으로 향하게 되어있다. 들뢰즈가 <매저키즘>에서 인간학적 삶의 성향을 아주 주밀하게 살폈던 것처럼, 삶은 새디즘적 가학이 주는 저 압제적 쾌락으로 향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를 옭아매는 피학의 계약으로 수렴하게 되었다. 이때 이 피학을 유혹하는 계약 조건들은 인간학적 한계의 도전이거나 인간과 신의 형이상학적 거리로 환원된다. 하여 인간-시인의 이 계약은 존재를 거는 가장 극한적인 게임, 즉 러시안 룰렛이 된다.

박찬일 시인의 「팔당대교 이야기」는 가장 극적인 인간학적 게임을 벌이고 있다. 신과 인간 사이를 교묘한 고딕체 문장들이 질주하면서 혹은 약간의 休止期를 둔 연배치를 통해서 존재를 거는 인간학적 태도의 심연을 반추하게 만든다. 존재를 걸라고 유혹하는 문자. 죽음 쪽으로 모든 시선을 응고시키라고 말을 거는 문자. 시인 박찬일은 그 강렬한 문자에 유혹되어 존재를 거는 인간학적 결단에 이르게 된다. 타나토스. 실재계와 상징계 사이를 유랑하는 삶. 어쩌면 삶이란 그 자체로 부유하는 기표들이 만들어낸 허상인지도 모른다. 그런데 박찬일은 그 허상 같은 삶을 삐딱하게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그 삶의 존재론적 실태를 정관하면서 문자의 배후로 인간학적 사태를 내접시키고 있다. ‘그래, 삶이란 그 자체로 무엇인가를 걸어야만 하지. 그래, 삶이란 제로섬 게임으로 향하는 러시안 룰렛이지.’ 허나 박찬일의 존재론적 게임은 7~80%의 생존확률을 지닌 러시안 룰렛이 아니라, 죽음본능의 실현, 즉 제로이다.

말과 의미의 전도. 교묘히 전환되는 의미. 박찬일은 문자 사이를 종횡으로 가로질러가면서 인간학적 잠에 이르는데, 그것은 영원한 無(Nichts)일 뿐이다. “내가 죽은 것은 사람들이 모릅니다/하느님도 모릅니다”. 어쩌면 삶이란 그 자체로 무의미한 것이거나 나(시인 자신)와 무관한 그 무엇으로 짜여 있는지 모른다. 왜냐하면 시인의 의식 속에 존재론적 게임이 벌어지는 장 전체, 즉 시인-세계-신의 관계는 단절된 그 무엇으로 인지되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팔당대교 이야기」를 관통하는 존재론적 게임은 인간 세계의 규범은 물론 저 초월적 신의 영역을 침범하는 프로메테우스처럼 운명을 기투하는 존재론적 결단의 순간인지도 모른다. 허나 승리하는 죽음 본능. 허나 영원한 무에게 이르게 만드는 無性. 항상 존재론적 게임을 이기는 쪽은 승부를 건 자가 아니라, 게임의 타자이다. 승부를 건 자는 반드시 죽어 소멸하게 되어 있다. 저 무시무시하고 광폭한 실재계의 엄존성. 우리는 왜 이 시간, 이 공간 속을 살아 움직여야 하는가. 왜 우리는 죽음에 이르는 병에 걸려 넘어져 적멸에 이르는가. 박찬일의 「팔당대교 이야기」는 인간학적 한계성을 총체적으로 사유하면서, 인간의 운명을 응시하게 만드는 뼈아픈 시말운동을 전개하고 있다. 하여 소름이 끼칠 정도로 무시무시하다. 자신의 머리에 총구를 겨누면서 방아쇠를 당기고 있다.


‘푹’이라는 말의 품은 웅숭깊고도 넓다 둥글어서 뭐든지 부딪히지 않고 놀기에 좋다 묵은지 냄새가 담을 넘어가는 이 말은 詩가 알을 슬기에 딱 좋다 뭐든지 푹 익은 것은 시가 되는 법, 항아리 속에서 멸치젓갈이 푹푹 삭고 있는 마을마다 시가 넘실대던 시절이 있었다 집집마다 다른 손맛으로 익어가고 있었다 속을 삭히고 말을 삭히는 솜씨 따라 하늘과 땅의 기운을 빌려 오는 솜씨 또한 달랐다 청도에 가면 파리 잡는 끈끈이가 바람에 흔들리는 추어탕집이 있다 성미 급한 시간조차 한 숨 푹 자고서 가는 반질반질 닳은 마루가 있는 집, 소금같이 짠 김치 한 종지에 손님이 파리 떼처럼 득시글거린다 울퉁불퉁한 세월 따라 곰삭은 인생, 할머니가 담그는 멸치젓갈의 비결은 그 집 며느리도 모른다 아직 푹 빠질 줄 몰라서이다 ―최서림, 「푹」 전문


생은 그 자체로 언제나 무와 대면하는 필연의 과정이다. 존재론적 게임에 대한 인간학적 태도의 궁극적 귀결은 언제나 생을 정관하는 원숙미로 향하게 되어 있다. 그것은 필연이다. 만약에 생에의 형식이 부정성으로 귀결할 때, 혹은 삶이 박찬일적 존재론적 결단에 이르게 된다면 생은 언제나 비극적 운명성을 함의한 인간학적 한계상황으로 수렴하게 된다. 허나 최서림의 시 「푹」은 삶이라는 게임을 시말 속에 응고시켜 승화에 경지에 이르고 있다. 농익은 말 맵시와 정갈하게 정돈된 시의식이 시말을 타고 넘어가 시말 전체를 곰삭이면서 시인 최서림은 인생에의 의미를 유려하게 그려내고 있다. 말이 말을 불러일으켜 세워 시말 내부에 생에의 의미를 내파시키는 “푹”. 푹이라는 부사는 그 자체로 존재다. 푹은 곰삭은 인생인데, 시인은 푹을 존재론적 차원으로 승화시켜 푹의 의미를 인간학적 차원으로 곧추세우고 있다.

말품은 인간품이다. 말본새엔 은일한 인간학적 본성이 잠재해있는데, 시인 최서림은 “푹”이라는 말품 속에서 시적 상상력을 불러일으켜 존재론적 성찰에 이르고 있다. 푹의 말품새엔 인간학적 사태가 알알이 박혀있다. 하여 최서림은 푹 속에 잠재된 인간학적 문양을 아주 세밀한 필치로 그려내면서 푹 자체를 시간화시킨다. 왜냐하면 푹은 시간이 경과한 곳에서 발생하는 발효상태이기 때문이다. “울퉁불퉁한 세월 따라 곰삭은 인생.” 할머니의 주름이 푹 패인 얼굴. 푹은 얼굴이다. 푹은 시간이 기입된 흔적인데, 그것은 인간이 살아낸 수많은 삶-사태의 감성의 돌기다. 때론 저 오욕칠정의 욕망 속을 헤매기도 하고, 때론 감성적 욕망의 층위를 승화시켜가면서 궁극적으로 도달하는 지점이 바로 푹이다. 최서림의 「푹」은 인간에게 주어진 시간 전체를 응시하면서 “웅숭깊고도 넓”은 말품에 안겨 생에의 의미를 관조하게 만든다. 에로스적인 자기 보존본능의 저 치열한 생에의 모습을 부드럽고 둥글게 푹 곰삭여 생을 여유롭게 바라보도록 만들고 있다. 박찬일의 존재론적 결단을 「푹」은 “푹” 속에 감싸 안으면서 생 전체를 농익게 만들어가고 있다.


-하날때, 두알때, 사마중, 날때,

육낭거지, 팔때, 장군, 고드래뽕!

술래를 정하느라고 떠드는 소리가

토란잎 때르는 빗방울처럼 영롱한데

가위, 바위, 보 잘못 내는 바람에

에이참, 그만 내가 술래가 된다

-꼭꼭 숨어라 머리카락 보인다!

가쁘게 외치고 나서

동동걸음으로 숨은 동무들을 찾는데

빨래줄에 앉은 고추잠자리만

제풀에 날라 날아올랐다 이내 앉는다

마당에 일렁이는 감나무 그림자도

굴뚝새 날아오는 검은 굴뚝도

이냥 아슴푸레해지는 해거름,

저녁놀 반짝이는 장독대 사이로

나붓나붓 순이 머리카락이 보인다

까치걸음으로 몰래 다가가서

바둑머리를 톡 때리자

혀를 날름대며 나를 놀린다

-일부러 잡혀준 거야! 메롱!

숨을 데를 찾으며 생각해 본다

-쟤처럼 나도 그냥 잡혀줄까?

뒤안으로 뛰어가 토란잎 뒤에

궁둥이가 다 보이게 숨었는데도

순이는 나를 단박에 잡지 않는다

나 혼자 괜히 좀이 쑤시는 사이

나비 한 마리 내 뺨에 살포시 앉는다

―오탁번 「술래잡기」 전문


놀이하는 아이에게 이 세계는 바로 게임의 공간이다. 헤라클레이토스의 「단편 B52」처럼 놀이하는 아이, Aion은 게임의 왕국을 건설하면서 창조적인 몽상의 세계에 이른다. 놀이는 그 자체로 모든 창조의 모체이다. 니체가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아이에게서 초인의 형상을 읽고 영원회귀의 순간을 몽상했던 것처럼, 놀이하는 아이는 신의 아름다움을 현현하는 자이다. 하여 “아이는 순진무구하고 잊어버리며, 새로운 시작, 게임, 스스로 구르는 바퀴, 첫 운동, 거룩한 예(yes)이다.” 이를테면 세계 게임을 하는 아이는 그 자체로 신적인 아이이며 영원한 시간을 향유하는 존재이다. 오탁번의 「술래잡기」는 유년의 초상을 몽상하면서 게임의 세계에 빠져들고 있다.

저녁 무렵의 술래잡기. 토란이 익어가는 여름과 가을 사이. 시인은 고즈넉한 제천의 시골 풍경 속으로 회귀해 들어가 훼손되지 않은 시간을 재현하고 있다. 놀이하는 아이는 시인이 회귀하고 싶은 절대 지점인데, 오탁번은 놀이하는 아이의 순진무구한 형상 속에서 자신의 원형적 자아를 인식하게 된다. 허나 불가역적인 시간. 허나 이순을 지나 고희로 치달아가는 시간. 놀이의 순간은 시간이 정지된 절대의 순간인데, 시인이 불가역을 가역의 시간으로 만들어 유년의 술래잡기 놀이 속으로 이입해 들어간다. 놀이는 둥그렇게 모여 술래를 정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하는데, 시인은 허밍 같은 허두를 기억의 저편에서 길어 올려 “-하날때, 두알때, 사마중, 날때,/육낭거지, 팔때, 장군, 고드래뽕!”을 읊조리면서 시말놀이를 감행하기 시작된다. 시인에게 있어서 놀이는 시간이 소생하는 지점으로 회귀이자, 영원회귀의 순간인데, 그것은 애잔한 연민도 그렇다고 유년에 대한 원초적 그리움도 아니다.

술래잡기 놀이를 하는 시인-아이는 그 자체로 시말 속에 영원을 응고시켜 영원을 현재화시킨다. 다시 말해서 오탁번의 시말놀이는 단순한 유희적 시말놀이가 아니라, 순이와 나(시인 자신)의 때 묻지 않은 순수한 사랑으로 회귀해 들어가 사랑을 영원화시킨다. 놀이하는 아이를 몽상한다는 것은 그 자체로 영원 속으로 이입하는 순간이자 시말이 발생하는 순간이다. 하여 놀이의 순간을 아주 정확하게 재현하는 시인-아이는 시말과 함께, 시말 속에 영원의 눈으로 되살아나게 되어 있다.


3. 유희적 시말놀이의 네 차원

언어는 그 자체로 우주다. 언어는 진리가 현현되는 장소이다. 허나 언어가 그 무엇인가를 지시표상하지 않을 때, 혹은 기표와 기의 사이의 임의적 기호작용으로 드러나지 않을 때, 언어는 그 자체로 하나의 주체적인 말놀이로 전환되어 ‘말=삶’이라는 등식을 성립시킨다. 이를테면 언어는 그 무엇 무엇을 다른 무엇 무엇으로 대리 표상하는 매개체가 아니라, 언어는 그 자체로 삶이다. 비트겐슈타인이 <철학적 탐구>에서 말한 것처럼 ‘언어놀이란 언어를 말하는 것이 어떤 활동의 일부 또는 삶의 형태의 일부임을 부각시키고자 의도된 것이다.’ 그리고 ‘어떤 하나의 언어를 상상한다는 것은 어떤 하나의 삶의 형태를 상상하는 것이다.’ 이러한 비트겐슈타인의 언어에의 전회는 루소가 <인간언어 기원론>에서 말한 언어의 대리 보충적 성격을 일거에 무너트리면서 ‘언어=삶’, 즉 자기원인으로 존재하는 말, 자기가 자기를 지시하는 말 자체의 함수 속으로 모든 층위를 내접시킨다.

현대성은 언어에 의한 언어를 위한 언어의 작용 속으로 모든 시말을 수렴시켜가고 있다. 그것은 현대의 초미의 관심사가 언어라는 말인데, 이때 이 언어는 의미 표현이나 의미 지시적 기능을 담지하지 않는다. 언어는 라캉의 기표놀이, 데리다의 차연된 문자, 푸코의 담론으로 구조화되어 언어 그 자체가 이 세계의 주인의 위치를 점유하게 된다. 이를테면 파롤이든 랑그이든 상관없이 이 세계는 말 혹은 말-작용으로 환원이 가능하다. 비트겐슈타인이 <논리철학논고>에서 말의 한계가 세계의 한계라고 언명했던 것처럼, 현대성의 모든 미적 원리는 말에 의해서 시작되고 말에 의해서 종결되어 가고 있다.


1행이 걸어간다 해바라기 꽃길 따라

2행이 걸어간다 랄랄랄 시냇물 따라

3행이 걸어간다 겅중겅중 걸어간다

4행이 걸어간다 악기들과 걸어간다

5행이 걸어간다 콧노래 부르며 걸어간다

6행이 걸어간다 발 달린 가을도 걸어간다

7행이 걸어간다 하늘을 와삭와삭 베어 먹으며

8행이 걸어간다 사과나무 걸어간다

9행이 걸어간다 포도나무 걸어간다

―함기석 「즐거운 소풍」 전문


현재 우리 시단에 언어의식으로 무장한 일군의 시들이 각자 독특한 시말문체를 형성하면서 독이적인 시세계를 형성해가고 있다. 특히 함기석의 경우는 말-주체의 세계를 시말로 형상화하여 말의 극한에 이르고 있다. 사실 함기석의 시들은 비트겐슈타인이 <철학적 탐구>에서 고민했던 일상언어의 언어적 삶을 시말로 예인하면서 시말을 절대주체로 상정하고 있다. 그것은 의미의 해체론적 시말운동이 아니라, 의미가 존재하는 방식에 대한 혁신적인 시도이다. 이를테면 들뢰즈가 <의미의 논리>에서 루이스 캐럴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의 분석을 통해서 의미의 존재방식을 철학화했던 것처럼, 함기석도 기표-기의 관계를 표상하는 시말, 부유하는 기표운동이 아니라, 시말 전체를 즉자대자운동으로 구조화하여 시말-주체를 건설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함기석에게 있어서 시말은 살아 움직이는 실체다. 시말은 살아 움직여 스스로의 삶을 영위하는 하나의 객체이다. 시말은 그 자체로 존재론적 위상을 정립하여 이 세계의 중심에 위치하고 있다. 진짜 멋들어지게 시말을 주체화한 「즐거운 소풍」은 말의 작용이 곧 세계의 작용이라는 사실을 시인하게 만드는데, ‘시말=삶-세계’라는 등식을 성립시킨다. 즐거운 소풍은 시말-소풍이다. 시말은 세계의 정령이다. 시말은 이 세계를 주유하는 객체이자 주체인데, 그것은 스스로 말하고 스스로 언표하며, 스스로 말과 말 사이로 이동한다. 따라서 함기석의 시말놀이는 단순한 유희적 말놀이가 아니라, 말의 절대화를 지향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시인이 “행이 걸어간다”를 반복적으로 기술하면서 시말운동을 전개할 때, 그것은 시적 주체가 시인이 아니라, 시말 자체의 말성, 즉 스스로 발화하는 말의 본성이 시말 주체임을 천명한 것이다. 하여 함기석의 시말운동은 말의 특권화이자, 말의 순수화를 겨냥한 절대의 순간이다. 어쩌면 함기석의 시말운동은 말라르메가 고민했던 문자에의 운동을 극한까지 몰고 간 진짜 순수한 문자적 시말운동일지도 모른다. 시말의 소풍은 흥겹고 자유로우며 콧노래가 날만큼 즐겁다.


트럼펫, 트럼프, 드럼통, 트림, 비틀어 비틀기, 뒤틀림

몽상가들은 우연히 만나도 논의한다

목요일이 지나는 창가의 밤엔 바뤼흐 스피노자를 만나자,고

아타락시아ataraxia, 에티카Ethica의 정적

마음 독본, 독법/리기다소나무를 심을까, 숙의한다

you don't bring me flowers any more, 아무도 꽃을 가져다주지 않는

이상한 관습의 나라

꼰니페 임마추며 사랑을 속싸겨써찌~, 튤립꽃이 꽃잎을 사뿐 열어

내 입술에 아침을 배달하곤 했네

달빛침낭에 얽힌 비밀들

글렌 굴드의 연주,바흐의 클라비어 전곡은 농염하지 않아 지루해

토카타와 푸가 d단조에 흐르는 숨결에 편승하여

몰래 그녀 곁으로 잠들곤 했지

다시 관타나모,

―김영찬, 「관타나모에 내리는 비」 일부


시말운동은 언제나 새로움으로 치닫는 양식에의 혁명적 사태인가. 소월이나 목월의 시들은 이 시대에 진부한 미적 양식이거나 새로움을 더 이상 현시하지 못하는 낡은 시말이라고 말해야만 하는가. 도대체 가장 낡은 예술적 양식에 해당하는 시들이 새로움을 지향한다 할 때, 그것은 가능하기나 한 것인가. 시말의 새로움이 하이브리드 혹은 하이퍼텍스트로 이종 교배될 때, 그것은 새로운 미적 욕망을 현시한 것에 해당하는가. 마샬 맥루한이 <미디어의 이해>에서 말한 것처럼, 미디어가 인식을 선도하고 이끌 때, 혹은 아날로그적 환경에서 디지털적 환경으로 인식적 매체의 조건이 바뀌었을 때, 이 세계를 기술하는 시적 언어 또한 바뀌어야 하는가. 물론 해체적 시말놀이를 자유롭게 즐기는 김영찬은 당연히 그렇다고 긍정하겠지만, 그것은 진짜 새로운 시말혁명인가.

시말혁명의 주체는 양식인가, 의식인가. 만약에 시말들이 단순한 양식적 유희로 치달아갈 때, 혹은 기표들 내부에 존재했던 의미를 소거시켜 기표의 연쇄 작용으로 시말놀이가 전개될 때, 그러한 기표적 유희를 시말-사태의 한 측면으로 인정하여야만 하는가. 지젝의 말처럼 포스트모던의 예술적 원리가 친숙한 것을 낯설거나 친숙하지 않게 만드는데 있다면, 김영찬의 시적 실천들은 그 자체로 예술적 지배이념을 성실하게 수행한 것에 해당한다. 허나 포스트모던 예술을 포함한 다양한 미적 실험들에 대하여, 아도르노는 ‘현재 평가받는 유일한 작품들은 더 이상 작품이 아닌 것들이다.’고 극언하기에 이른다. 쇤베르크, 사무엘 베켙, 존 케이지 등의 미적 실천은 당대를 대표하는 예술적 양식이기는 하지만, 그것은 더 이상 예술이기를 포기한 것이라고 아도르노는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다시 말해서 해체론적 유희를 치달아가는 양식에의 욕구는 새로운 예술의 국면이지만, 그것은 더 이상 심미적 감성의 파동 속에서 작동하는 예술일 수 없다는 말과 같다. 따라서 단순한 시말놀이나 시적 유희는 새롭게 비등하는 21세기의 양식적 욕구를 충족시키는 기재이기는 하지만, 이 세계와 인간 사이를 매개하는 영혼의 육화과정일 수는 없지 않겠는가.

김영찬의 「관타나모에 내리는 비」는 의미를 겨냥하지 않는다. 관타나모는 그저 의미를 사상시킨 하나의 기표일 뿐이다. 관타나모는 그저 기표와 기표 사이를 매개하는 기표의 연쇄작용이거나, 기표들이 펼쳐내는 말놀이를 가능하게 만드는 시적 공간이다. 관타나모는 저 절망하는 수인들이 이합집산하는 아비규환의 공간이거나 미공군기지이기는 하지만 김영찬에게 있어서 그것은 시말들이 살아 움직이는 상상의 공간이다. 하여 관타나모는 가능성의 공간이다. 관타나모는 시인 박용래, 스피노자, 바브라 스트라이샌드, 바흐 등을 한 자리에 불러 모아 말놀이를 하고 클래식을 연주하고 노래를 부르면서 말 자체를 몽상하기도 하는 절대공간이다. 말하자면 김영찬의 「관타나모에 내리는 비」는 말과 말이 서로 이접하면서 말을 환기시키는 말의 순수한 작용이 육화된 시이다. 그리고 김영찬은 그러한 시적 유희를 통해서 말-자유를 적극적으로 실천하는 것 같다. 다시 말해서 말이 의미지시관계로 고정이 되면 말은 그 자체로 억압되거나 말의 의미가 한정된다. 따라서 시인이 관타나모를 다양하게 변주하여 기표화한 순간, 그것은 말을 말의 한계 밖으로 탈주시켜 말-자유를 실천하게 된다. 김영찬에게 있어 시말은 모든 유희가 가능한 그 자체로 자유의 공간이다.


풀잎을 뒤집으면

작은 몸 작은 나뭇잎 위,

머리 속에는 연못의 물이 채워지고

바람은 풀잎을 뒤집고

머리는 햇빛으로 가득하지

찾아오는 발걸음들

소리를 죽이지

나비가 날아오를 새라

숨을 죽이며

머리 속의 연못이 사라질 새라

―변의수 「∮」 전문


변의수의 시말들은 기호의 작용 속에서 세미오시스의 운동을 전개하고 있다. 기호 ‘∮’이 시말을 불러일으켜 시말-사태를 연출하게 될 때, 우리는 ‘∮’의 기호작용을 어떻게 이해하여야 하는가. 아니 더 정확하게 말해서 수학의 연산기호인 ‘∮’를 기호텍스트로 삼아 시인이 말놀이적 유희를 벌일 때, 우리는 어떤 이해의 상태에 도달하는가. 시 「∮」을 우리는 이해할 수 있는가. 만약 시인의 노림이 기호 ‘∮’를 무의식이 아닌 비의식의 상징체로 인식하고 있다면, 우리는 기호 ‘∮’를 의미 해석할 수 있는가. 역으로 만약에 기호 ‘∮’이 수학의 영역 내에서 어떤 연산기호로 의미를 실천하는 역할 담당할 때, 그 수학적 기호작용과 시말속의 기호는 동일한 의미를 지니고 있는가. 아니 우리는 변의수의 시말운동 속에서 기호 ‘∮’ 어떻게 작용하며, 그 기호가 어떻게 시말로 육화되는지를 묻게 된다. 단순한 유희인가, 아니면 기호가 시인의 상상력을 불러일으켜 시말-기호를 건설하는가.

변의수 「∮」은 의미의 지점으로 수렴해갈 수 없다. 다시 말해서 시의 제목 「∮」과 시말은 의미관계 또는 의미 지시 관계를 형성할 수 없다. 기호의 시말화는 의식과 무의식이 상호작용하는 시말운동이 아니라, 기호 자체의 표상력인데, 그것은 새로운 의미관계의 창조이거나 비의미이다. 왜냐하면 기호 ‘∮’과 시말은 최초의 관계맺음이기 때문이다. 기호의 표상작용은 자의적일 뿐만 아니라, 이해관계를 형성할 수 없다. 역으로 기호는 시말을 통해서만 이해된다. 기호 ‘∮’의 운명은 2연 10행의 시말로부터 역추적하여 기호의 표상적 의미를 검출할 수 있는데, 이때 이 기호텍스트는 의미인가 비의미인가. 아니 더 정확하게 말해서 의미를 표백한 기호 ‘∮’은 의미화과정 중인 시말을 통해서 의미화가 가능한가. 어쩌면 변의수의 세미오시스적 시말운동은 시말의 순수화이거나 기호의 상상적 읽기 통해서 새로운 시말-주체를 형성 중인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기호의 시말화는 의미화과정이거나 새로운 시말-기호를 예인하는 시말혁명이기 때문이다. 변의수의 기호 혹은 기호작용은 텍스트를 생산하는 하나의 방법적 전략이자 새로운 시말을 추동하는 시의 그릇에 가깝다. 새로운 시적 양식에의 욕구. 새로운 미적 형식의 창조.

미래의 연장자

벽에 박힌 Gentil lena 젠틸레냐의

얼굴 Lalena

그녀의 목소리로

걸어 들어가면 Gentilgentileschi

오른쪽 Gentilena 눈에서

흐른다 진주가

녹아 흐른다

청동으로치장된장례식에서 불어온머리카락굵기의시간들

그녀의땅에질질끌리는손톱

에찢기는 동안

내흰자위는 파랗게변하고

그녀의 옷은 모래가 되어 나를 뒤덮는다

물에 잠기는 계단

나는팔을 떨어뜨리며

걷고 있 었 다

―정재학, 「젠틸레냐를 위한 소묘」 전문


정재학의 「젠틸레냐를 위한 소묘」는 김영찬의 「관타나모에 내리는 비」와 달리 조금 무거운 층위에서 시말을 해체시키고 있다. 말하자면 김영찬의 가벼운 시적 유희와 달리 정재학은 “젠틸레냐”의 얼굴과 목소리를 소묘하면서 죽음본능의 지점을 응시하고 있다. 말하자면 젠틸레냐는 청동으로 된 데드마스크(dead mask)이거나 죽은 자의 초상인데, 시인은 이중의 지점에서 해체를 실천하고 있다. 표면적으로 해체는 통사구조의 파괴를 통해서 의미의 해체 쪽으로 향하는 것 같지만, 기실 정재학이 감행하는 해체적 시말놀이의 본질은 시간이다. 아니 더 정확하게 말해서 시인이 죽음제의가 거행되는 장례식에서 시간의 의미를 “머리카락굵기의시간들”이라고 명명했을 때, 시간은 모든 해체의 원인이자 결과이다. 하여 시인이 의도적으로 시말을 진하고 삐딱하게 입체화시켰을 때, 입체화된 시말은 삶의 흔적이거나 시인이 인식한 시간의 본질에 해당한다.

허나 정재학의 시말-유희는 가벼운 유희가 아니라, 무거운 유희다. 왜냐하면 시인이 바라보는 응시의 지점은 젠틸레냐의 녹아 흐르는 눈이거나 시간의 굵기이기 때문이다. 죽음본능의 임계점. 모든 것을 해체시키는 시간. 시말의 해체는 해체적 의지를 실천하는 시간의 다른 모습인데, 그것은 시인 정재학의 모습을 파열시킨다. 다시 말해서 젠틸레냐의 손톱에 의해 “내흰자위는 파랗게변하고/그녀의 옷은 모래가 되어 나를 뒤덮는” 저 아브젝션(Abjection)의 공포가 엄습하여 시인을 좀비로 만들어버린다. 이를테면 「젠틸레냐를 위한 소묘」는 단순한 시말의 해체가 아니라, 시간의 본성을 주밀하게 살펴가면서 해체된 삶, 즉 죽음본능의 임계점에 작동하는 무의 본질을 응시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하여 정재학의 해체론적 층위는 말-자유의 적극적인 실천이 아니라, 실재계에 작동하는 타나토스의 해체적 층위를 시말화한 것이다. 정재학의 해체적 시말놀이는 무겁고 무섭다. 저 죽음충동이 이끄는 광폭한 해체적 운명성을 해체적 시말 속에 응고시키고 있다.

4. 글을 나오며

말과 말 사이에 말이 있고, 말과 말 사이에 인간이 있고, 말과 말 사이에 세계가 있다. 말을 예인하는 것은 시인의 몫이다. 말을 예인하여 말을 말로 유희하건, 혹은 말이 말을 위무하건 상관없이, 말 속에 파묻혀 사는 시인은 그 자체로 시대의 바깥이다.

시인들이여! 말을 고무시켜라. 시인들이여! 말과 싸워라. 시인들이여! 말에게 말 자격을 부여하라. 시인들이여! 말을 기롱하시오. 말 안에 말과 말 밖에 말을 말로 포착하면서 말 전체를 말화시키시오. 시인들이여! 유희 혹은 기만. 말, 말, 말. 말 안에 말이 있고, 말 밖에 말이 있다. 말하시오. 시인들이여!


김석준∙1999년 ≪시와시학≫으로 시, 2001년 ≪시안≫으로 평론 등단. 서울 산업대 강사. 저서로 <비평의 예술적 지평, 현대성과 시>가 있음.

추천3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사)대한노래지도자협회
정종권의마이한반도
시낭송영상
리토피아창작시노래영상
기타영상
영코코
학술연구정보서비스
정기구독
리토피아후원회안내
신인상안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