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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호 특집/이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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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이후 한국 퓨전사극의 유희성遊戱性
이현경|영화평론가
1. 역사의식의 탈각과 유희성의 틈입
사극에 대한 우리의 고정관념이 크게 흔들리게 된 계기는 MBC 드라마 <다모>에서부터 찾아야 할 것이다. 다모폐인이라는 신조어까지 만들어낸 이 드라마는 사극에 대해 갖고 있던 통념을 쇄신시켰다. HDTV로 찍은 고화질의 영상, 역동적인 카메라 워크, 현대화된 의상과 말투, 다모라는 생소한 전문직에 대한 정보 등은 이 드라마가 기존의 사극과는 확실히 차별된다는 인상을 심어주었다. 왕조사 중심의 역사나 궁중비사를 다루지 않는 이 드라마는 현대의 인물이 과거에 간 듯 동시대적인 감각으로 다가왔다. 이처럼 새로운 감각을 지닌 사극의 담론 유통을 위해 ‘퓨전사극’이라는 용어가 등장하게 된다. 21세기 들어 문화, 예술뿐 아니라 스포츠, 정치에 이르기까지 각계각처에 ‘퓨전’이라는 말이 사용되는데, 이때 ‘퓨전’은 경계를 넘나든다는 의미를 지닌다.
‘퓨전사극’이라는 용어는 2003년을 기점으로 대중적으로 각인된다. TV사극 <다모>(2003.7.28~2003.9.9 방영), <대장금>(2003.9.15~2004.3.30 방영)과 사극영화 <스캔들>(2003. 10.2 개봉), <황산벌>(2003.10.17 개봉)이 모두 2003년 하반기에 등장했다. TV와 영화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진행된 이와 같은 공진화(co-evolution)는 대중으로 하여금 사극에 대한 기존의 장르 통념을 수정하게 만들었다. 사실 퓨전사극은 현재도 그 실체적 속성이 형성되어 가는 중으로, 이 시점에서 우리가 규정할 수 있는 용어의 개념이란 것은 단지 지금까지 진행된 내용을 한시적으로 정박하는 정도의 효용이 있을 뿐이다. 2000년 이후 퓨전사극이 보여준 ‘경계의 넘나듦’ 현상은 다양하다. 사실과 허구의 위계가 허물어지고 코믹과 추리 같은 이질적 장르와의 혼종이 이루어지고 있다. 이런 다각적인 변화를 추동하는 바탕을 이루는 힘은 무엇일까? 아마도 그것은 역사를 소재로 한 서사에 지금까지 요구됐던 ‘역사의식’이라는 평가 잣대를 폐기처분하려는 시대적 흐름일 것이다. 역사는 왠지 교육적이고 교훈적이라는 수식어와 결합되어야 할 것 같은 강박관념이 오랜 세월 우리를 지배했다. 역사의식의 자리에 대체한 것들 중 두드러진 요소가 ‘유희성’이다. 특히 사극영화를 주류의 흥행 장르로 리뉴얼 시킨 일등 공신은 유희성이다.
<스캔들>, <황산벌>에서 시작된 사극영화 붐은 <혈의 누>(2005), <왕의 남자>(2005), <음란서생>(2006), <황진이>(2007)로 이어졌다. 흥행에 성공한 <스캔들>, <왕의 남자>, <음란서생>은 유희성을 서사구성 원리로 차용하고 있다는 공통점이 있다. 특히 1200만 관객을 모아 흥행기록을 갱신한 <왕의 남자>는 이 셋 중에도 ‘놀이’를 서사의 중심에 두고 있어 사극영화에 대한 관객의 취향변화를 실감할 수 있다. 이 영화들은 ‘놀이’를 다루되 놀이의 성격과 목적에는 차이가 있다. 프로이트에 의하면 놀이는 세계의 사물들을 새로운 질서에 맞추어 자신들의 취향에 따라 배치하는 일이다. 위의 세 편의 영화들은 과거를 동시대적인 주제의식을 풀어내는 데 적합하게 재배치하고 재해석하며 자유자재로 상상력을 발현시킨다. 그리스어로 ‘놀이’는 파이디아(paidia, 영어로 play)와 루두스(ludus 영어로 game)로 나뉜다. 파이디아는 즉흥적인 놀이고, 루두스는 약속을 따르는 놀이다. 파이디아와 루두스는 다시 다양한 놀이들로 세분될 수 있는데, 로제 카이와는 무한해 보이는 놀이의 분류원칙을 찾아내 네 가지 항목으로 구분하였다. ‘경쟁(Agôn)’, ‘우연(Alea)’, ‘모의(mimicry)’, ‘현기증(Illinx)’이 그것이다. 아곤은 규칙이 있는 게임을 뜻하고, 알레아는 도박과 같은 우연에 맡기는 놀이이며, 미미크리는 가장이나 연극처럼 흉내 내기를 의미하며, 소용돌이라는 뜻의 일링크스는 회전이나 낙하처럼 내부기관의 혼란이나 착란을 불러오는 놀이이다. 이런 놀이의 범주는 <스캔들>, <왕의 남자>, <음란서생>의 유희성 작동방식을 살피기 위한 하나의 참고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2. 퓨전사극에서 놀이와 그 대가代價
<스캔들>:게임으로 현실을 위장한 대가代價
<스캔들>은 ‘조씨추문록’이라는 춘화집이 어떻게 세상에 나오게 되었는지 밝힌다는 내레이션으로 시작되어 마치 그런 책자가 진짜 존재하는 양 가장한다. “선왕 갑인년에 쓰여진 글”이라든지 “계인년에 엮다” 같은 설명이 역사적 근거를 제시하는 듯 보이지만 이런 것은 제스처일 뿐이다. 이런 형식은 관객에게 놀이를 제안하는 것이다. 허구의 이야기지만 진짜라고 받아들이고 감상해 달라 이런 식이다. 이 영화의 모든 내용은 허구이다. 허구일 뿐 아니라 역사적으로 개연성이 낮다. 사대부가의 기혼여성이 양반가의 총각을 유혹에 안채로 끌어들이고, 열녀문까지 하사 받은 양반가 미망인이 사랑에 빠져 연경으로 도피행각을 계획하는 등의 에피소드가 현실에서 일어났을 법하지 않다. 그런데 다시 생각해 보면 그런 일이 일어났는지 일어나지 않았는지 알 수 없다는 게 정답 같다. 소품이나 풍속 등으로 미루어 보아 정조대로 추측되는 영화 속 시대를 우리가 전부 알 수 없다. 역사적 기록에 의거해 추론할 수 있겠지만 사료를 그러모아도 과거는 완벽하게 재구성될 수 없다. 그래서 과거는 영원히 상상된 것일 수밖에 없는 미정형의 세계이다. <스캔들>은 역사적인 지식 너머에 우리가 몰랐던 과거가 존재했을 수도 있다는 상상력에서 비롯된 가설을 세운다.
이 상상력을 작동시키는 호기심은 철저히 지금, 여기에 살고 있는 우리의 의식에서 출발한다. 즉, 우리는 과거에 실재한 어떤 일을 보고 싶다기보다 오늘날 우리가 궁금한 문제를 과거로 들고 가서 풀어보고 싶은 것이다. <스캔들> 같은 퓨전사극이 가정하는 질문은 동시대적인 공감대를 얻을 수 있지만 과거에는 존재할 수 없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런 위험을 무릅쓰고 굳이 과거를 배경으로 이야기를 풀어가는 이유는 무엇일까? 인간의 삶은 본질적으로 어느 시대나 같지만, 사회문화적인 환경이 다른 과거라는 거울에 비출 때 현재의 질문은 더욱 명료해지기 때문이다. <스캔들>은 묻는다. 사랑이라는 감정 없이 사랑을 위장하는 게임이 가능한가, 게임으로 시작했지만 진정한 사랑이 싹튼다면 그 게임은 어떻게 마무리 지어야 하는가. 이런 질문은 사실 정조 시대와는 어울리지 않는다. 낭만적인 사랑, 연애라는 관념 자체가 근대적인 것이고 연애나 사랑을 줄다리기 같은 게임으로 이해하는 사고는 최근의 트렌드이다. <스캔들>은 프로덕션 디자인이라는 개념을 최초로 심어준 사극영화이다. 프로덕션 디자인은 단지 미술이라는 개념을 넘어 주제에 맞춰 영화의 모든 시각적 요소를 디자인하는 작업이다. 순제작비의 절반가량을 세트, 의상, 소품에 투자한 이 영화에 동원된 시각적인 모든 것은 철저한 고증을 통해 밑그림을 얻어낸 뒤 현대적인 감각으로 변형됐다. 의상은 물론이고 수염 다듬는 도구, 화장 도구 같은 소품, 세트를 장식하는 가구도 모두 컨셉에 맞춰 새로 제작했다. 한옥세트도 고증을 바탕으로 하되 스토리에 걸맞게 상상력을 발휘해서 과감하게 구조를 바꿨다. 현대인의 입맛에 맞는 스토리를 현대인의 입맛에 맞는 미장센 안에 구현하고 있지만 고품격의 화면 덕에 우리 눈앞에 펼쳐진 과거는 너무나 그럴듯하다.
<스캔들>에서 조씨 부인(이미숙)과 조원(배용준)은 사랑이라는 감정과 연애라는 행동을 게임으로 즐기는 인물들이다. 이 둘은 목표물을 정해놓고 게임을 한다. 둘 사이에는 게임의 규칙이 있다. 그리고 이기는 자에게는 포상도 주어진다. 조씨 부인은 조원에게 자신을 상으로 내건 빅 매치를 제안한다. 그런 만큼 상대가 만만치 않다. 열녀문까지 하사받은 숙부인(전도연)을 함락시키는 것이다. 여기에는 숙부인이 정말로 조원을 사랑하여 마음의 문을 열어야 한다는 조건이 붙어있다. 조원은 숙부인의 마음을 얻고자 온갖 수단을 동원하여 접근한다. 조원은 조씨 부인과는 게임을 하고 있지만 숙부인 앞에서는 연기(play)를 한다. 이들의 게임을 알지 못하는 숙부인은 조원의 연기가 사실이라고 믿게 되고 조원에게 마음이 기운다. 알고 보니 숙부인은 천주학을 믿으며 평등, 인간주권 같은 서구적인 가치관을 내면화한 근대적인 인물이었다. 숙부인은 진심으로 조원을 사랑하게 되고 현실에서 용납되지 않는 사랑을 이루기 위해 연경으로 떠날 결심을 한다. 그러나 이 시점에서 조원은 딜레마에 빠진다. 연기가 어느덧 현실이 되어버린 것이다. 조원이 게임을 포기하면 게임에 동참한 줄도 몰랐던 숙부인에게 피해가 가기 때문에 조원은 끝까지 사실을 알리지 않고 다시 연기를 한다. 이번에는 사랑하는 척하는 연기가 아니라 사랑하지 않는 척하는 연기이다. 아무것도 모르는 숙부인은 실연의 상처를 안고 자살하고 조원은 허망하게 죽음을 맞이한다. 게임을 이용해 사랑하는 사촌동생 조원과 결합하고 싶었던 조씨 부인도 결국 조원까지 잃고 연경으로 떠난다. 조씨 부인과 조원은 모두 게임으로 현실을 위장해야 했던 인물이다. 그러나 게임이 진행되는 동안 현실이 바뀌어버리자 더 이상 게임을 계속 할 수 없게 된다. 게임의 대가로 이들은 진정한 사랑을 잃는다.
<왕의 남자>:놀이를 현실로 치환한 대가代價
<왕의 남자>는 남사당패의 접시돌리기로 시작해서 줄타기로 영화가 끝난다. 즉, 놀이에서 놀이로 끝나는 서사구조이다. 이 영화에 등장하는 놀이는 카이와가 분류한 네 가지 유형이 모두 있다. 전통적인 6가지 남사당패 놀이양식인 풍물, 버나, 살판, 어름, 덧뵈기, 덜미가 영화 속에서 모두 재현되는 이 영화에서 ‘놀이’는 서사원리일 뿐 아니라 시각적으로 중요한 소재가 된다. 연산과 장녹수가 사극영화의 익숙한 주인공임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에서는 새로운 모습으로 등장할 수 있던 까닭은 이들도 놀이판으로 들어왔기 때문이다. 이들을 놀이판으로 불러들이는 인물은 장터에서 푼돈을 벌기 위해 공연을 하는 장생(감우성)과 공길(이준기)이다. 처음에 장생과 공길은 놀이의 공연자이고 연산(정진영)과 녹수(강성연)는 놀이의 관람자였다. 하지만 연산은 장생과 공길의 놀이판에 끼어들고 더 나아가 공길하고 짝이 되고 싶어 한다. 본래 연산의 짝은 녹수이고 장생의 짝은 공길이었다. 하지만 연산-녹수, 장생-공길이라는 안정된 짝의 구도가 흔들리고 연산-공길-장생이라는 삼각구도가 형성되자 갈등이 불거진다. 놀이에서 소외된 녹수는 놀이판을 깨려들고, 같은 자리를 원하는 연산과 장생은 경쟁을 해야 한다.
서로 짝을 이룰 때 이 두 쌍은 가장행위를 통해 서로를 위로하고 마음을 주고받았다. 연산과 녹수는 구중궁궐 내실에서 탈을 쓰고 광대로 분해서 질펀한 놀이를 하고, 장생과 공길은 탁 트인 들판에서 봉사로 가장해서 “너 거기 있고 나 여기 있다”며 서로의 존재를 확인한다. 탈은 왕이나 후궁이라는 신분을 가려 딴 사람이 될 수 있게 해주고, 장님 행세는 성 정체성을 외모로 판단하지 않는 다른 세상으로 잠시 넘어가게 도와준다. 눈을 감지 않고도 장생과 공길이 서로의 짝이 될 수 있는 순간은 남사당패 연희 속에서 여성과 남성의 역할을 연기할 때이다. 연산은 공길과 짝이 되어 놀고 싶어 하지만 이 둘이 짝이 되기는 어렵다. 공길은 장생과는 완벽한 롤플레잉을 할 수 있었지만 연산과는 그렇게 할 수 없다. 공길은 손가락 인형이나 그림자극으로 연산을 위로할 수 있을 뿐이다. 즉, 왕의 처소에 마련된 둘만의 놀이판에서도 공길과 연산 사이에는 공연자와 관람자라는 구분이 여전히 존재한다. <왕의 남자>는 연산-녹수, 장생-공길의 놀이판을 복기하는 영화인데 이 네 사람의 놀이는 모두 루두스(game)가 아니라 파이디아(play)이다. 즉, 이들은 지금의 내가 아닌 다른 나로 가장하기 위해 놀이가 필요했다.
연산은 왕이라는 견디기 힘든 속박을 벗어던지기 위해 놀이가 필요하고 장생은 동성애를 이루기 위해 놀이가 필요했다. 그러나 이들은 자신들이 원하는 놀이에 영원히 다다를 수 없었다. 왕의 본분은 놀이가 아니라 일이다. 연산은 일을 접어두고 놀이판에 있고 싶었으나 세상은 허용하지 않는다. 중종반정으로 관람객의 자리에 앉아있던 연산과 녹수는 놀이판에서 끌려나와 심판 당한다. 광대는 놀이가 일이다. 장생과 공길은 자신들의 연희 속에서 “놈”이 되고 “년”이 될 수 있었지만 이것이 현실이 될 수는 없다. 다시 프로이트에 의하면, 놀이는 현실 세계의 가시적이고 촉지 할 수 있는 사물들에 기대어 상상적인 대상과 상황들을 보강할 수 있게 해준다. 이런 보강이 가능한 것은 현실과 놀이가 분리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장생과 공길에게 놀이는 곧 현실이다. 광대라는 직업의 특성상 이들은 현실의 부족함을 놀이로 보강할 수 없는 것이다.
놀이에도 일에도 규칙이 있다. 놀이와 현실 사이를 잇는 아슬아슬한 긴장의 끈이 끊어지면 놀이는 놀이가 되지 못한다. 연산과 장생은 놀이로 현실을 치환하기 위해 이 끈을 끊어버리는 인물들이다. 연산은 놀이를 가장해 자신의 어머니를 죽음으로 몬 후궁들을 칼로 찔러 버리고, 장생은 연희로서가 아니라 진짜 “놈”이 되고 “년” 되기 위해 줄에서 허공으로 뛰어오른다. 이들이 놀이와 현실의 규칙을 어기며 얻은 것은 현기증이다. 현실의 줄에서 완전히 발을 뗀 비상과 낙하는 전율과 쾌락을 제공한다. 그러나 이들의 일링크스(현기증)는 놀이동산에서 맛보는 순간적 쾌감이 아니다. 이들은 반半허공에서 한순간 비상하는 것이 아니라 아예 허공 속으로 돌진한다. 피가 거꾸로 솟는 느낌의 롤러코스터도 내장이 요동치는 낙하기구도 그 순간이 지나면 우리를 제자리로 돌려놓는다. 하지만 연산과 장생은 다시 현실로 돌아올 수 없는 가장 강한 현기증에 몸을 내맡긴다. 그것은 삶의 중심에 심연처럼 자리 잡고 있는 검은 동공, 즉 죽음으로 스스로 빨려들어 갈 때만이 느낄 수 있는 것이다.
<음란서생>:몽상 대신 놀이를 선택한 대가代價
영화가 시작되면 장옷을 입은 아낙네가 그릇가게에 와서 “위는 사기, 아래는 놋쇠”인 그릇을 찾는다. 세상에 그런 그릇은 없다. 그러니 이 손님은 없는 물건을 찾는 것이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이 그릇가게에는 그런 물건이 있는데, 그 물건이 바로 ‘소설’이다. 그것도 그냥 소설이 아니라 ‘음란소설’이다. 소설은 ‘사기’나 ‘놋쇠’처럼 세상에 존재하는 것을 재료로 삼고 있지만 완성시켜 놓으면 “위는 사기, 아래는 놋쇠”인 신기한 물건으로 변한다. 여기에 소설 창작의 비밀이 들어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 같으면서도 존재하지 않는 듯 하며, 실제보다 더 실제 같은 “진맛”이 들어있어야 제대로 된 소설이다. <음란서생>은 명문가의 자제로, 사헌부 장령의 벼슬에 있으며, 문장가로 알려진 선비 김윤서(한석규)가 시정에 나도는 천하고 몹쓸 음란소설 작가로 변신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윤서는 난생 처음 써본 자신의 소설에 대해 자부심 반 걱정 반이 뒤섞인 마음으로 그릇가게 주인이자 소설 판매업자에게 감상평을 청한다. 그러자 나온 업자의 예리한 지적이 “진맛”이 부족하다는 것이었다. “꿈꾸는 거 같은 거, 꿈에서 본 거 같은 거, 꿈에서라도 맛보고 싶은 거” 그런 게 진맛이라 설명해준다. 꿈은 현실의 뒷면이다. 현실이 존재해야 꿈을 꿀 수 있고 꿈의 맛도 볼 수 있다. 소설은 현실에 발 딛고 있는 사람이 현실과 유사하지만 현실 너머의 또 다른 현실을 맛보는 행위이다. 그래서 소설의 창작에는 현실의 경험이 필요하다. 스스로 경험하든 간접적으로 보고 듣든 소설 창작에는 이야기의 원천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사대부 선비로 점잖은 글만 읽고 반듯한 생활만을 해온 윤서의 경험에는 한계가 있기 마련이다. 그것도 음란소설이니 만큼 음란한 경험이 부족하다.
처음에 윤서는 현실에서 경험한 실마리를 이용해 소설 안에서 확대하고 변형시켰다. 가령, 왕의 총애를 받는 윤비(김민정)와 연등행사에서 밀회를 할 때 실제의 윤서는 윤비를 뿌리치고 뛰쳐나오지만 그가 쓴 소설에서는 완전 딴판으로 각색된다. 소설에서 윤서는 다짜고짜 윤비의 가슴을 움켜쥐고 거칠게 잡아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이 들어간 헛간 안에는 이미 정사를 나누는 다른 커플까지 있는 상황으로 둔갑했다. 현실에서 윤서는 “닭 잡을 힘도 없는 위인”이지만 소설 속 윤서는 박력 넘치는 사내대장부이다. 왕실의 여인과 사대부 관료의 로맨스는 삽시간에 장안의 화제가 된다. 현실에서 불가능한 결합일수록 흥미진진해지는 법인데 왕의 후궁이 몰래 궁을 빠져나와 격정적인 사랑을 나눈다는 스토리는 전무후무한 것이었다. 윤서는 자신의 소설 <흑곡비사>의 인기가 치솟을수록 더욱 더 자극적인 내용을 첨가해야한다는 강박관념에 시달린다. 결국 고심 끝에 사실적인 삽화를 그려 넣으려하자 문제가 생기게 된다. 삽화를 그리던 의금부 도사 광헌(이범수)이 눈으로 보지 않은 기묘한 체위를 도저히 실감나게 그리지 못하겠다는 것이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윤서는 넘어서 안 될 선을 넘는다.
작가의 창작 열쇠는 몽상이다. 놀이를 하던 아이가 자라 어른이 되면 몽상을 하게 된다. 몽상은 육체의 움직임이 없어도 즐거움을 얻을 수 있는 사전 쾌락이다. 그런데 윤서는 더 깊은 “진맛”을 소설에 담고 싶은 욕심에 몽상 대신 놀이를 선택한다. 윤비와 진짜 정사를 나누고 광헌으로 하여금 그 장면을 엿보고 그리게 한다. 윤비가 상상적인 대상에서 현실적으로 보고 만지는 대상으로 변하자 윤서는 위험에 빠진다. 영화는 여기부터 새로운 화두를 꺼내는데 그것은 ‘사랑’이다. 윤비는 자신의 진심이 이용당한 데 분노하고 윤서의 사랑을 확인하려 든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이 지점에서 윤서는 딜레마에 빠진다. 사랑이라고 말하면 살 수 있는 상황에서, 사랑이라고 말하면 살기 위한 변명이 될 테니 윤서는 사랑이라고 말하지 못한다. 일이 이 지경에 이르러서야 윤서는 윤비에 대한 “마음 속 음란한 상상”이 “사랑인지 음란한 욕심”인지 분간할 수 있게 된다. 윤서의 몽상 속에서 구분할 수 없었던 그 마음의 실체는 사랑이었다. 너무 큰 대가를 치르고 얻은 결론이지만 어쨌든 두 사람은 진심을 알게 된다. “더 사랑한 사람이 약자”라는 식의 사랑에 대한 담론을 펼치는 이 영화의 뒷부분은 다소 식상하다. 윤서는 이마에 ‘음란’이라는 단어를 새기는 벌을 받고 외딴 섬에 유배된다. 몽상 대신 놀이를 선택한 대가로 윤서는 명예와 벼슬을 박탈당하고 사랑도 잃었다. 그래도 앞의 두 영화의 주인공에 비해서는 행복한지도 모르겠다. 전업 작가로써의 새로운 인생을 얻기 했으니까.
3. 유희성에 대한 손익계산서
역사와 유희는 본래 아주 먼 거리에 놓여있었다. 역사는 유머와 농담의 대상이 될 수 없었고 역사를 놓고 가정을 하거나 게임을 하는 일은 불경스러웠다. 그러나 역사를 바라보는 패러다임이 바뀌자 역사는 견고한 껍질을 벗어던지고 말랑말랑해졌다. 특히 대중문화의 소재로써 역사는 무한히 변용 가능한 질료로 재평가 되고 있다. 기존의 위계, 경계가 해체되고 넘나드는 포스트모던 시대에 걸맞게 역사적 사실과 허구는 서로 틈입하고 역사를 다루는 고전적인 방식과 새로운 장르는 혼종 된다. 이런 현상은 역사에 대한 강박관념을 던져버리면서 나타나게 된다. 역사에서 교훈을 얻어야 한다는 당위성 대신 역사를 즐기고 역사와 놀 수 있게 된 것이다. 역사의식의 탈각은 역사와 유희성을 새롭게 짝지을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 주었다. 이런 변화들이 불러온 긍정적인 효과에도 불구하고 과연 잃어버린 것은 없는지 점검할 필요가 있다. 그저 얻기만 하는 계산서는 없다. 2000년 이후 퓨전사극이 유희성을 얻었을 때 잃어버린 것은 무엇일까? 이제 그 손익계산서를 한번 작성해보자.
우선, 영화 속으로 다시 들어가서 주인공들은 무엇을 얻고 무엇을 잃었는지 살펴보자. <스캔들>, <왕의 남자>, <음란 서생>의 주인공들은 모두 놀이를 했다. <스캔들>의 조씨 부인과 조원은 사랑과 연애라는 게임을 했고, <왕의 남자>의 연산과 장생은 현실에서 벗어날 수 있는 현기증(일링크스)을 선택했고, <음란 서생>의 김윤서는 창작을 위해 몽상 대신 직접 놀이를 했다. 이들은 놀이를 통해 원하는 것을 얻지만 모두 그 대가를 치러야했다. 조원은 조씨 부인과의 게임에서 이기지만 뒤늦게 찾아온 사랑을 얻을 수 없게 되고 조씨 부인은 게임의 논리를 포기하지 않아 사랑을 잃고 만다. 연산과 장생은 광대의 자리와 현실의 자리를 뒤바꿔서 소망을 이루지만 현실의 규칙은 이들을 용납하지 않는다. 김윤서는 “진맛”을 위해 놀이를 하지만 소설 속 진맛이 아닌 진짜 진맛을 깨닫는 딜레마에 빠진다. 궁극적으로 이들은 죽음에 이른다. 조원, 연산, 장생은 실제 죽고, 조씨 부인과 김윤서는 사회적인 죽음을 당한다. 사랑도 잃고 명예와 신분도 박탈당한다.
이와 같이 2000년 이후 유희성 담론을 내재한 퓨전사극의 주인공들은 나름대로 대가를 치르고 있다. 물론 위에서 살펴 본 대가는 영화의 서사구조 안에서 발생된 것이지만 이것을 상징적으로 해석하자면 역사와 유희의 결합이 안고 있는 대가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고루한 사극영화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고 현대적 감각의 미장센을 계발한 퓨전사극은 동시대의 관심을 과거에 투영함으로써 관객의 흥미를 유발할 수 있었지만 과거를 조망하는 렌즈의 폭을 좁힌 것은 아닌지 돌아보게 된다. 관객의 구미에 맞는 주제의 발굴은 당연히 필요하지만 새로운 입맛을 개발하지 않으면 곧 식상할 수 있다. 적어도 역사와 유희성에 있어 관객이 미처 느끼지 못했던 미각을 연구해야 한다. 결론적으로 현재까지의 손익계산서는 이익이 큰 것 같지만 손해가 발생할 지점을 살펴야 할 때 같다.
이현경∙영화평론가. 2006년 ≪씨네21≫로 등단. <대중서사장르의 모든 것:멜로드라마>(공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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