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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호 신작단편/김영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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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부
댓글 0건 조회 2,014회 작성일 09-01-19 1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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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단편|
케사와 모리토(袈裟と盛遠)
아쿠타가와 류노스케(芥川龍之介) 원작, 김영식 번역



上.
밤, 모리토(盛遠)는 토담 밖에서 낙엽을 밟고 하늘에 둥실 훤히 떠오른 달을 바라보며  생각에 빠져 있다.

그의 독백
벌써 달이 떠올랐구나. 여느 때는 달이 뜨기를 이제나저제나 기다리던 나도 오늘은 밝아지는 것이 두렵기만 하다. 지금까지의 내가 오늘밤에 사라지고 내일부터는 살인자가 되어 버린다고 생각하면 이렇게 가만히 서 있어도 몸이 떨려온다. 이 양손이 피로 붉게 물든 것을 상상해 보라. 그 때의 나는 내 자신에게 얼마나 저주스러운 놈으로 보일 것인가. 게다가 내가 증오하는 상대를 죽이는 것이라면 나는 이렇게 고통스러운 생각을 할 필요가 없지만  나는 오늘 밤 내가 증오하지도 않는 남자를 죽여야 한다.
나는 그 남자를 예전에 본 적이 있다. 와타루 사에몽노조(渡左衛門尉. 사에몽노조(左衛門尉)은 황궁 경호대의 관리)라는 이름은 이번에 알게 되었으나 남자치고는 너무 온화하고 흰 얼굴을 보았던 것이 언제였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그자가 케사(袈裟)의 남편이라는 것을 알았을 때, 내가 한때 질투를 느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 질투도 지금은 내 마음에 아무런 흔적 하나 남기지 않고 말끔히 사라져 버렸다. 그러니 와타루는 내게 연적戀敵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나는 미움도 없고 원한도 없다. 아니, 오히려 나는 그 남자를 동정한다고 해도 좋을 정도다. 케사의 친정집에서 와타루가 케사를 얻기 위해 얼마나 정성을 다했는지 들었을 때 나는 참 그자가 가상하다고도 생각했다. 와타루는 케사를 아내로 맞이하고자 일부러 시 짓는 공부까지 했다고 하지 않는가. 나는 그 착실한 무사가 지은 연가를 상상하면 나도 모르게 미소가 입술에 떠오른다. 그러나 그것은 절대 와타루를 비웃는 미소가 아니다. 나는 그렇게까지 해서 여자의 마음을 사려는 그자를 안쓰럽게 생각했던 것이다. 혹은 내가 사랑하는 여자에게 그렇게까지 해서 마음을 얻으려는 그자의 열정이, 애인인 내게 어떤 만족을 주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렇게 말할 정도로 나는 케사를 사랑하는 것일까? 나와 케사의 연애는 지금과 옛날의 두 시기로 나누어진다. 나는 케사가 아직 와타루에게 시집가기 이전에 이미 케사를 사랑하였다. 혹은 사랑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것도 지금 생각하면 그 때 내 마음에는 불순한 면도 적지 않았던 것 같다. 나는 케사에게 무엇을 얻고자 했던가. 숫총각 때의 나는 분명 케사의 몸을 얻고자 했다. 만약 다소의 과장을 허락한다면, 나의 케사에 대한 사랑이라는 것도 실은 이 욕망을 미화한 감상적인 마음에 불과하였을 것이다. 그것의 증거로는, 케사와의 교제가 끊어진 그 후 3년간 여전히 나는 그녀를 잊지 않았음은 틀림없으나 만약 그 이전에 내가 그녀의 몸을 알았다면 그래도 여전히 잊지 않고 계속 생각했을까? 나는 부끄럽지만 그렇다고 대답할 용기가 없다. 나의 케사에 대한 그 후의 애착에는 그녀의 몸을 알지 못한다는 미련이 꽤 섞여 있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그렇게 몸부림치며 괴로워하는 정을 품고, 나는 이윽고 내가 두려워하던, 그러나 내가 기다리던 지금의 관계를 맺어 버렸다. 그럼 지금은? 나는 다시 내 자신에게 묻는다. 나는 과연 케사를 사랑하는가?
그러나 그 대답을 하기 전에 나는 억지로라도 그녀와의 사연을 대략 떠올릴 필요가 있다.-와타나베교橋 완성을 기원하는 공양供養 때, 3년만에 우연히 케사를 만난 나는 그로부터 약 반년 정도 그녀와 몰래 만날 기회를 만들기 위해 모든 수단을 다했다. 그리고 성공했다. 아니, 성공했을 뿐 아니라 그 때 나는 내가 꿈꾸던 대로 케사의 몸을 내 것으로 할 수 있었다. 그러나 당시 나를 지배하던 것은 아까 말했듯 아직 그녀의 몸을 얻지 못했다는 미련만은 아니었다. 나는 케사와 한 방에서 마주 앉았을 때, 이미 이런 미련이 어느새 가벼워진 것을 느꼈다. 그것은 내가 이미 동줆貞이 아니었다는 것도 그 자리의 내 욕망을 약하게 하는 데 한몫했으리라. 그러나 그것보다도 주요한 원인은 그녀의 용모가 시들었다는 것. 실로 지금의 케사는 이미 3년 전의 케사가 아니다. 피부는 전체적으로 광택을 잃고 눈 주위는 거무스름하였다. 볼 언저리와 턱 밑에도 예전의 토실했던 살이 거짓말처럼 없어져 버렸다. 굳이 아직 변하지 않은 것을 들자면 그 초롱초롱하게 빛나던 아름다운 눈 정도였던가. -이 변화는 내 욕망에 확실히 무서운 타격이었다. 나는 3년만에 비로소 그녀와 마주 앉았을 때 나도 모르게 시선을 돌리지 않을 수 없었을 정도로 강한 충동을 느낀 것을 아직도 확실히 기억한다…….
그럼, 별로 미련도 느끼지 않은 내가 왜 그녀와 관계를 맺었던 것일까? 첫 번째로, 나는 묘한 정복심에 몸이 불타올랐다. 케사는 나와 마주하자 그녀가 남편 와타루에 대해 가진 애정을 일부러 과장하여 들려주었다. 그러나 내게는 그것이 아무래도 어떤 공허한 느낌밖에 일으키지 않았다. ‘이 여자는 자기 남편에 대하여 허영심을 가졌다.’-나는 이렇게 생각했다. ‘혹은, 이것도 내 연민을 사고 싶지 않다는 반항심의 표현인지도 모른다.’ -나는 또 이렇게도 생각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이 거짓을 폭로시키고 싶다는 마음이 시시각각 강하게 나를 충동질했다. 단지, 왜 그것을 거짓이라고 생각했냐고, 또 그것을 거짓이라고 생각한 것에는 나의 자만심이 있었다는 말을 들어도 나는 항변할만한 근거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것이 거짓이라는 것을 믿었다. 지금도 믿는다.
그러나 이 정복심도 당시의 나를 지배한 모든 것은 아니었다. 그밖에, -나는 이 말을 꺼내는 것만으로도 얼굴이 붉어지는 듯하다. 나는, 순수한 정욕에 지배되었다. 그것은 그녀의 몸을 아직 모른다는 미련이 아니다. 더 저급한, 상대가 그녀일 필요도 없는, 욕망을 위한 욕망이었다. 아마 떠돌이 놀이패의 여자를 사는 남자도 그 때의 나만큼 저속하지 않았으리라.
어쨌든 나는 그런 여러 동기로 마침내 케사와 관계를 맺었다. 아니 그보다는 사실은 케사를 욕보였다고 해야 한다. 그리하여 지금 내가 처음 꺼낸 질문으로 돌아가면,-아니, 내가 케사를 사랑하는지 아닌지는 아무리 내 자신에 대해서라도 지금 새삼스럽게 물을 필요는 없다. 나는 오히려 때로 그녀에게 증오조차 느꼈다. 특히 만사가 끝나고 나서 엎드려 우는  그녀를 억지로 안아 일으켰을 때 케사는 파렴치한 나보다도 더 파렴치한 여자로 보였다. 흐트러진 머리카락, 땀에 젖어 지저분해진 얼굴의 화장, 뭐 하나 그녀의 몸과 마음의 추함을 드러내지 않는 것이 없었다. 만약 그때까지의 내가 그녀를 사랑하였다고 한다면 그 사랑은 그 날을 마지막으로 영원히 사려져 버렸던 것이다. 혹은 만약 그때까지의 내가 그녀를 사랑하지 않았다고 한다면 그날부터 내 마음에는 새로운 미움이 생겼다고 해도 좋으리라. 그리하여, 아아, 오늘 밤 나는 사랑하지 않는 여자를 위해, 내가 미워하지 않는 남자를 죽이자고 말한 것이 아닌가!
그것도 전혀 누구의 죄도 아니다. 내가 이 내 입으로 버젓이 뱉어버린 것이다. ‘와타루를 죽여 버릴까?’ -내가 그녀의 귀에 입을 대고 이렇게 속삭였던 때의 일을 생각하면 나로서도 내 머리가 돌아버린 것이 아니었는지 의아스럽다. 그러나 나는 그렇게 속삭였다. 속삭이지 않겠다고 생각하면서도 어금니를 꽉 물면서까지 속삭였다. 나는 그 말을 왜 속삭이고 싶었던 것일까? 지금 돌이켜보아도 아무래도 잘 모르겠다. 그러나 굳이 생각하자면, 나는 그녀를 경멸하면 할수록 밉게 생각하면 할수록 더욱 무언가 그녀에게 능욕을 가하고 싶어졌다. 와타루 사에몽노조를,-케사가 사랑을 과시하였던 남편을 죽이자고 말하고, 그리고 그녀가 좋든 싫든 억지로 승낙시킬 정도로 목적에 합당한 이유는 그것밖에 없다. 그래서 나는 마치 악몽에 휩싸인 사람처럼 하고 싶지도 않은 살인을 무리하게 그녀에게 권했던 것이리라. 그래도 내가 와타루를 죽이자고 말한 동기가 충분하지 않다고 한다면, 나머지 또 하나의 동기는, 사람이 모르는 힘이(수행을 방해하는 천마天魔의 힘이라 해야 할 것이다) 나의 의지를 유혹하여 나를 잘못된 길로 빠뜨렸다고도 해석할 수밖에 없다. 어쨌든 나는 강한 집념으로 몇 번이나 같은 말을 거듭 케사의 귀에 속삭였다.
그러자 케사는 잠시 후, 갑자기 얼굴을 들더니 순순히 내 계획을 수긍한다는 대답을 하였다. 그러나 나는 그녀의 대답이 쉬이 나왔던 것이 의외였을 뿐 아니라, 지금까지 한 번도 보이지 않았던 이상한 빛이 눈에 깃들어 있음을 나는 보았다. 간부姦婦-곧 나는 이런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동시에 실망과 비슷한 마음이 갑자기 내 계획의 무서움을 내 눈앞에 펼쳐 보였다. 그 사이에도 그녀의 음란한, 쇠퇴한 용모의 불쾌함이 끝없이 나를 괴롭힌 것은 굳이 말할 필요도 없다. 만약 가능하다면 그때 나는 내 약속을 그 자리에서 깨어버리고 싶었다. 그리하여 그 부정한 여자를 모욕이라는 모욕의 바닥까지 밀쳐 떨어뜨리고 싶었다. 그렇게 하면, 내 양심은 설령 그녀를 희롱하였다고 해도 아직 그러한 의분義憤의 뒤로 피난하는 것이 가능하였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아무래도 그렇게 할 여유를 찾지 못했다. 마치 내 마음을 들여다보는 듯 갑자기 표정을 바꾼 그녀가 가만히 내 눈을 노려보았을 때, -나는 솔직히 말한다. 내가 날자와 시각을 정해 와타루를 죽이는 약속을 맺게 되어버린 것은 만일 내가 거부하는 경우에 케사가 내게 가하려고 한 복수의 공포 때문이었다. 아니, 지금도 아직 이 공포는 강한 집념으로 내 마음을 사로잡고 있다. 겁쟁이라고 비웃을 사람은 얼마든지 비웃어도 좋다. 그러나 그때의 케사를 보지 못한 사람은 모른다. ‘내가 와타루를 죽이지 않는다고 한다면 비록 케사 자신이 직접 손을 대지 않는다고 해도 반드시 나는 이 여자에게 살해당하리라. 그렇다면 나는 와타루를 죽일 수밖에 없다.’ -눈물도 흘리지 않으면서 우는 그녀의 눈을 보았을 때 나는 절망적으로 이렇게 생각했다. 게다가 내가 맹세한 후에 케사가 창백한 얼굴에 한쪽 보조개를 지으면서 눈을 내리깔고 웃는 것을 보았을 때, 나의 공포는 더욱 확실한 증거를 얻지 않았던가.
아아, 나는 그 저주스런 약속 때문에 이미 거듭 더러워진 마음에 지금 또 살인의 죄를 더하려고 한다. 만약 오늘밤에 이 약속을 깬다면-이것도 역시 내게는 견딜 수 없다. 하나는 맹세의 체면. 그리고 또 하나는,-나는 복수를 두려워한다고 말했다. 그것도 결코 거짓은 아니다. 그러나 그밖에 아직 무언가가 있다. 그것은 무엇인가? 나를, 이렇게 비겁한 나를 충동질하여 죄도 없는 남자를 죽이게 하는, 그 커다란 힘은 무엇인가? 나는 모르겠다. 모르지만, 어쩌면-아니, 그럴 리가 없다. 나는 그녀를 경멸한다. 두려워한다. 미워한다. 그러나 그래도 아직, 그래도 아직 나는 그녀를 사랑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모리토는 이제 입을 다물고 계속 주위를 배회하였다. 훤한 달빛. 어딘가에서 노랫소리가 들려온다.

참으로 사람의 마음이야말로 무명無明의 어둠과 다를 바 없네
그저 번뇌의 불로 타올라, 사라질 뿐인 목숨인 것을.

下.
밤, 케사가 침대 밖에서 등잔불을 뒤로 하고 앉아 소맷자락을 입에 물고 생각에 잠겨 있다.

그녀의 독백
그 이는 올까, 오지 않을까? 설마 오지 않을 리는 없다고 생각하지만 벌써 이럭저럭 달이 다 기울어 가는데 발소리도 나지 않는 것을 보면 갑자기 마음이라도 바뀐 것이 아닐까? 만약 오지 않는다면-아아, 나는 마치 놀이패의 몸 파는 여자처럼 이 수치스러운 얼굴을 들고 다시 대낮의 해를 쳐다봐야 해. 그런 뻔뻔하고 사악한 짓을 어찌 내가 할 수 있단 말인가. 그 때의 나야말로 길가에 버려진 시체와 조금도 다르지 않아. 모욕당하고, 짓밟히고, 마침내는 수치스런 몸을 뻔뻔하게 훤한 곳에 드러내놓고 여전히 벙어리처럼 잠자코 있어야 하니까. 나는 만일 그렇게 된다면 설령 죽는다 해도 눈을 감을 수가 없어. 아냐, 아냐, 그 이는 반드시 올 것이야. 나는 전날 헤어질 때 그 사람의 눈을 들여다보았을 때부터 그렇게 생각했어. 그 사람은 나를 두려워해. 나를 미워하고, 나를 경멸하면서도 그래도 아직 나를 두려워해. 그래 내가 내 자신의 힘을 믿는 것이라면, 그 사람이 반드시 온다고는 말할 수 없을 거야. 그러나 나는 그 사람을 믿어. 그 사람의 이기심을 믿어. 아니, 이기심이 일으키는 비겁한 공포를 믿어. 그러니 나는 이렇게 말할 수 있지. 그 사람은 틀림없이 꼭 올 것이야…….
그러나 나 자신을 힘을 믿지 못하게 된 나는 얼마나 비참한 여자인가. 3년 전의 나는 내 자신을, 내 아름다움의 힘을 믿었지.
3년 전이라고 말하기보다는 어쩜 그날까지라고 말하는 게 더 진실에 가까울지도 몰라. 그날, 큰 어머니 댁 한 방에서 그 사람과 만난 때에 나는 단지 한 눈에 그 사람의 마음에 비춰진 나의 추함을 알아버렸어. 그 사람은 태연한 얼굴을 하고 이런저런 말로 나를 부추기는 듯 상냥하게 말을 걸어주었어. 그러나 한 번 자신의 추함을 알아버린 여자의 마음이 어찌 그런 말에 위로가 될까. 나는 단지 분했어, 무서웠어, 슬펐어. 어릴 때 유모 품에 안겨서 월식을 바라본 때의 불안하고 무서운 마음도 그 때의 마음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야. 내가 가진 많은 꿈은 한 번에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어. 남은 것은 단지 비 내리는 새벽과 같은 쓸쓸함이 가만히 내 주위를 감싸고 있을 뿐 - 나는 그 쓸쓸함에 떨면서 죽은 것과 다름없는 이 몸을 결국 그 사람에게 맡겨 버렸어. 사랑하지도 않는 그 사람에게, 나를 미워하는, 나를 경멸하는, 색마 같은 그 사람에게.-나는 내 추함을 보인 그 허전함을 견디지 못했던 것일까. 그래서 그 사람의 가슴에 얼굴을 대고, 열로 들뜬 것 같은 한순간에 모든 것을 속이려고 한 것일까. 그렇지 않다면 또, 그 사람처럼 나도 단지 더러운 마음에 몸이 움직였던 것일까. 그렇게 생각만 해도 나는 부끄러워, 창피해, 수치스러워. 특히 그 사람 팔에서 벗어나 다시 자유로운 몸으로 돌아왔을 때, 나는 얼마나 나 자신을 천박하게 생각했던가.
나는 분하고 쓸쓸한 마음에 아무리 울지 않으려고 해도 하염없이 눈물이 흘러 나왔어. 그렇지만 그것은 정조를 빼앗겼다는 것만이 슬펐던 것은 아니야. 정조를 빼앗기면서도, 게다가 경멸당하는 것이, 마치 문둥병에 걸린 개처럼 미움을 받고 학대를 받는다는 것이 무엇보다 나는 괴로웠어. 그리고 그 후 나는 도대체 무슨 짓을 했단 말인가. 지금 생각해보면 그것도 먼 옛날의 기억처럼 흐릿하기만 해. 단지, 흐느끼면서 우는 사이에 그 사람의 콧수염이 내 귀에 닿자마자 뜨거운 숨과 함께 낮은 소리로 ‘와타루를 죽여 버릴까’ 라는 말이 들렸던 것을 기억해. 나는 그 말을 듣는 동시에, 아직 지금도 알 수 없는 이상하게 생생한 심정이 되었어. 생생한? 만약 달빛이 훤하다고 한다면, 그것도 생생한 심정일 것이야.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달빛의 밝음과는 다른 생생한 기분이었어. 그러나 나는 역시 이 무서운 말 때문에 위로를 받은 것이 아니었을까. 아아, 나는, 여자라는 것은, 자기 남편을 죽여서라도 여전히 남에게 사랑받는 것을 기쁘게 느끼는 존재인가?
나는 그 달밤의 밝음과 닮은, 쓸쓸하고 생생한 심정으로 다시 오랫동안 계속 울었어. 그렇게 해서? 그래서? 언제, 나는, 그 사람을 안내하여 남편을 죽이게 한다는 약속 따위를 해버린 것일까? 그러나 그 약속을 맺음과 동시에 나는 비로소 남편을 떠올렸어. 나는 솔직히 처음이라고 말할 수 있어. 그때까지의 내 마음은 단지 나를, 욕을 당한 나만을 계속 생각하고 있었어. 그것이 지금, 남편을, 그 내성적인 남편을,-아니, 남편이 아니야. 내게 무언가 말할 때의 미소 지은 남편의 얼굴을, 또렷하게 눈앞에 떠올렸어. 나의 음모가 문득 가슴에 떠오른 것도 아마 그 얼굴이 떠오른 찰나였을 걸. 왜냐 하면, 그 때 나는 이미 죽을 각오를 했어. 그리고 또 그렇게 결심한 것이 기뻤어. 그러나 울음을 멈춘 내가 얼굴을 들고 그 사람을 바라보았을 때, 그리고 그곳에 아까처럼 그 사람 마음에 비친 내 추함을 발견했을 때, 나는 내 기쁨이 일시에 사라져버린 듯한 기분이었어. 그것은-나는 또, 유모와 같이 바라본 월식의 어둠이 떠올랐어. 그것은 이 기쁨의 바닥에 감춰진 여러 귀신을 일시에 풀어놓은 것과 같은 것이었어. 내가 남편의 몸을 대신하여 죽겠다는 것은 과연 남편을 사랑하기 때문인가. 아니, 아니, 나는 그런 그럴듯한 구실 뒤에, 그 사람에게 몸을 준 내 죄를 갚으려는 마음이 있던 것이지. 자살을 할 용기가 없는 나는. 조금이라도 세상의 눈에 나 자신을 좋게 보이고 싶다는, 치사한 마음이 있는 나는. 그렇지만 그건 그래도 날 좋게 봐 준 것이야. 나는 더욱 야비해. 더욱, 더욱 추해. 남편의 몸을 대신한다는 미명 하에 나는 그 사람의 중오에, 그 사람의 경멸에, 그리고 그 사람이 나를 농락한, 그 사악한 정욕에 대한 복수를 하려는 것이 아니었을까. 그것의 증거로는, 그 사람의 얼굴을 보면 그 달빛과 같은 이상한 생생함도 사라져 버리고, 단지, 슬픈 마음만이 곧 내 마음을 얼어붙게 해. 나는 남편을 위해 죽는 것이 아니야. 나는 나를 위해 죽으려고 해. 내 마음이 상처받은 분함과, 내 몸이 더렵혀진 원한과, 그 두 가지 때문에 죽으려고 해. 아아, 나는 삶의 보람만 없던 것이 아니야. 죽는 보람조차 없던 것이야.
그러나 죽는 보람이 없는 죽음조차 살아 있을 때보다는 더 나을지도 몰라. 나는 슬프지만 억지로 미소를 지으면서 거듭 그 사람과 남편을 죽일 약속을 했어. 눈치가 빠른 그 사람은 그런 내 말에서 만약 약속을 지키지 않은 새벽에는 내가 어떤 짓을 저지를지 대충 추측했을 것이야. 그렇다면 맹세까지 한 그 사람이 오늘밤 오지 않을 리가 없어.-아, 이 소리는 바람 소리인가.-그날 이후의 괴로움이 오늘밤 마침내 없어진다고 생각하면 마음이 가라앉는 듯해. 내일의 해는 필시 목이 잘린 내 시체 위에 싸늘한 빛을 비춰주겠지. 그것을 보면, 남편은 - 아냐, 남편은 생각하지 않겠어. 남편은 나를 사랑해. 그렇지만 나는 그 사랑을 어떻게 할 힘도 없어. 옛날부터 나는 단 한 사람의 남자밖에 사랑하지 않았어. 그리고 그 한 사람의 남자가 오늘 밤 나를 죽이러 오는 것이야. 등불 빛조차 이 못난 내게는 너무 과분하게 밝아. 게다가 연인에게 완전히 버림 받은 내게는…….

케사는 등잔불을 불어서 꺼버렸다. 점시 후 어둠 속에서 희미하게 문이 열리는 소리. 그와 동시에 희미한 달빛이 비친다.(1918년)


김영식∙2002년 ≪리토피아≫ 수필부문 신인상. 번역소설 기러기, 라쇼몽.
추천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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