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작품(전체)
31호 기획/김영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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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먹열매
인물: 육영수 여사
문둥이(장로)
아들(시인)
인부
장소: 문둥이 마을 광장. 아새미연밭.
검은 빗돌 위에 한 줄기 빛이 쏟아진다. 앞면에 ‘육영수여사공덕비’란 글씨가 커다랗게 새겨져 있다. 뒷면에는 마을의 내력과 육영수여사 공덕을 새긴 글씨가 깨알 같다. 문둥이가 빗돌 주위를 돌며 살펴보고 있다. 그 옆에서 인부가 절삭기를 만지자 윙윙, 기계 돌아가는 소리가 시끄럽게 들린다. 그때 청년이 헐레벌떡 뛰어온다.
아 들 (다급한 목소리로)
안돼요, 멈춰요!
문둥이 (놀란 표정으로)
언제 내려왔느냐?
인 부 (어리둥절해하며) 뭐요?
인부가 절삭기를 끄자 주위가 조용해진다. 인부가 공덕비 옆에 기대 앉아 담배를 피워 문다.
아들 아버지,
지금 무슨 일을?
문둥이 (쯧쯧, 혀를 차며)
이 놈의 공덕비!
절단을 내던지,
깎아 버려야지.
아 들 깎아요? 어딜?
문둥이 (공덕비 뒷면을 가리키며)
여길!
아 들 (공덕비 뒷면으로 와서)
육영수여사가 우리 마을
방문한 공덕빈데?
문둥이 독재자 아니냐?
아 들 (공덕비 앞면으로 와서)
이제 와서요?
문둥이 마을 장로들도
다 동의 했느니라!
아 들 마을 내력 때문이죠?
문둥이 흠흠,
대통령 부인이니까
그러는 거야.
인 부 (갑자기 일어서서)
대통령?
대통령이고, 뭐고
일 할 거요? 말 거요?
나 원 참,
기계 놔두고 가니까
알아서들 하슈.
인부가 투덜대며 퇴장한다. 문둥이와 아들 한동안 말이 없다. 조용한 음악이 흐른다.
아 들 하지만 아버지,
견고한 성城처럼
부서지지 않는― 저를 합리화 시키는 것들이 사람 아닙니까.
문둥이 (심각한 어조로)
인독人毒이 징한거다!
아 들 (후우, 한숨을 쉬며)
그래서 대지가 병들었나 봐요?
이 마을도
사람이 사는 집보다
소 돼지가 사는
소막 돼지막이 많아졌으니,
쇠똥 돼지똥 냄새
지독하네요.
문둥이 그래,
마을이 많이 망가졌다.
냇가며 방죽
논밭이 다 오염됐어.
재래식 소돼지막 헐리고
축산 단지가 들어서고
모든 게 기업화 됐지.
그러니 자본이 없으면
부도가 나고
폐축사가 반은 될 꺼다.
아 들 어릴 적 일 생각나네요.
냇가에서 체를 가지고
고기 잡던 일이요.
밑이 빠져 어머니한테 혼난 일,
아새미방죽 연밭 뒤지다
물밤 가시에 발 찔린 일,
그리고, 실은,
아버지 고막손 보며
전 자랐어요.
문둥이 고막손?
아 들 네, 아버지.
문둥이가 고막손을 허공에 올려놓는다. 다섯 손가락이 안으로 굽어 오그라져 있다. 문둥이가 고막손을 든 채 걸어간다. 불빛이 고막손을 비추며 따라간다. 육영수여사공덕비에서 한참을 지나 외따로이 떨어진 곳에 동그랗게 연밭이 꾸며져 있다. 문둥이와 아들이 연밭가에 나란히 앉는다. 불빛이 연밭 무대 한쪽만 비춘다.
문둥이 (두 고막손을 억지로 펼쳐보며)
평생 병病을 섬기며 살았지만
병이 무언지 모르겠구나.
태어난 게 죄가 아니면
사는 게
늙는 게 죄가 아닌데,
유독
병에서 고리가 끊기니,
병을 알면
사死의 문門도
슬몃 열어 젖혀
볼 것 같은데,
아 들 (고막손을 유심히 들여다보며)
그 답이 아버지 손에
들어있지 않을까요?
문둥이 내 손에?
아 들 네, 아버지 손에요.
(연밭을 둘러보며)
저기, 연꽃이 보이죠?
연꽃 속에 연밥도 보이죠?
연꽃이 다 진
주먹만한 연밥도 보이죠?
문둥이 그래, 보인다만
그게 어쨌다는 거냐?
아 들 어릴 적엔
마을 사람들 고막손 보며
왜 그런지 몰랐어요.
그게 병들어 그런지도
몰랐고,
문둥이 근데,
아 들 (다시 연밭을 둘러보며)
어느 날 여기
아새미방죽 둑길을 지나다
주먹을 꽉 쥐고 있는
연밥을 보다가
생각했지요.
문둥이 무얼 말이냐?
아 들 주먹을 꽉 쥐고 있는
마을 사람들을요.
문둥이 고막손 말이냐?
아 들 네.
문둥이 난, 도무지?
아 들 (연꽃 한송이를 가리키며)
연꽃 속에 무엇이 있지요?
연밥이지요.
연밥은 꽃 속에
벌써 생겼지요.
연밥과 꽃이 함께
생겨났다는 말입니다.
아니,
연밥이 꽃보다 먼저
생겼는지도 모르죠.
문둥이 꽃보다 먼저?
아 들 꽃보다 먼저
열매가 생겼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그러니까,
꽃보다 먼저
열매가 열린 사람들이지요.
고막손 마을 사람들
아버지
모두.
문둥이 (고막손을 찬찬히 들여다 보며)
그, 글쎄다.
아 들 (자기 손을 들어 오므렸다 폈다 한다)
아버지, 보이지요.
사람 손을 오므렸다 폈다 하면
꽃이 피는 것 같아요.
(아버지 고막손을 만지며)
아버지는 아직 꽃이 피지 않았어요.
문둥이 (고막손을 억지로 펴보러 한다)
펴질 리가 없어.
(한숨을 쉰다)
아 들 항상 주먹을 쥐고 있는
주먹 열매 같지요.
아버지 손이 꽃 피려고
항상 아팠을 거예요.
문둥이 (고막손을 기도하듯 포개고)
열매와 꽃이 하나이듯이
병과 꽃도 하나이면 좋겠다만
현실은,
평생 병을 섬겼지만
억지로 손을 펴려하진 않았는데
괜한 짓을 했구나,
(연밭을 한참 바라보다 어두운 공덕비 쪽으로 눈을 돌리며)
어서, 인부를 데려와야 겠다!
아 들 (아버지 앞을 가로 막으며)
아버지, 장로직에서 물러나세요!
아버진 너무 늙으셨어요.
문둥이 (아들을 노려보며)
내가 늙었다고?
마을 일을 누가 다 해왔는데,
이번 일만해도 말만 많지
누가 나서질 못해.
인부, 인부를…….
문둥이 공덕비를 지나 급히 퇴장한다. 아버지를 부르며 아들이 따라가다 공덕비 앞에서 멈춘다. 불빛도 따라가며 비춘다. 연밭 쪽은 다시 어둡다.
아 들 (공덕비를 올려다보며)
참, 크게도 세웠네.
이젠 무너뜨리려 하니,
그때 갑자기, 불빛이 깜박거리며 음악 소리가 크게 들린다. 육영수여사가 빗돌 뒤에서 나타난다. 소복을 입었다.
아 들 (깜짝 놀라 뒤로 물러나며)
여, 여사님!
육영수여사 맞죠?
여 사 놀라지 마오.
아 들 (고개를 끄덕이며)
아, 알겠군요.
아버지가 공덕비를 깎으려 하니까
나타나셨군요?
여 사 아, 아니오.
아버지를 말리지 마오.
아 들 아, 아버지를
말리지 마라고요?
여 사 내가 한 자선은
자선이 아니었소.
이 마을을 방문한 것도
내 뜻만은 아니오.
아 들 그래도
마음에서 우러나지 않는다면
그리 밝은 모습을 할 수 있을까요?
그때 헬기 타고 오셔서
이 광장 단상에 서 계신
여사께 꽃다발을 드린 것도
저였어요.
여사의 미소가
여태 잊혀지지 않아요.
여 사 하지만 얼굴의 미소만 보고
판단하지 마오.
부드러운 것이
오히려 독기를 품고 사니까,
화면畵面은 분을 바르니까.
아 들 독기요?
여 사 내 십일면관음상
자비상 분노상 백아상출상 열한 개 얼굴
가면도 얼굴이란 걸
알았다면서?
아 들 (머리를 긁적거리며)
제 시를
보, 보았군요.
여 사 (공덕비를 둘러보며)
이 시대 얼굴은 그릴 수 있나?
너무 복잡한 인면人面 아닌가.
아 들 그래서 여사께서
희생양이 되겠다고요?
여 사 희생이 아니라
용서를 구한다오.
요즘
얼굴 들고 다니기가,
저승까지 저승까지
권력의 마수魔手가 뻗쳐와,
아 들 (고개를 끄덕이며)
하기야
사람들은
제 얼굴 변해가는 걸
눈여겨보질 않아요.
권력의 얼굴이 변하듯,
여 사 (광장을 둘러보며)
변했군.
아 들 사람의 집보다
소돼지막이 늘어나면서
경매로 넘어간 농장이 수두룩하고,
자살하는 사람이 생겼어요.
여사께서 이 마을에
새끼 돼지를 기증할 때와는
딴판이지요.
육영수여사 공덕비 쪽으로 걸어간다. 아들이 급히 연밭 쪽으로 걸어가 연꽃 한송이를 가지고 온다. 불빛이 아들의 뒤를 계속 쫓는다.
아 들 여사님, 잠깐만요!
이젠 영영 가시는군요.
마을의 공덕비 대신
마을의 연꽃을 바칠게요.
육영수여사에게 아들이 연꽃을 내민다. 연꽃을 받아든 육영수여사 공덕비 뒤로 사라진다. 잔잔한 음악이 흐른다.
아 들 잘 가세요, 여사님.
이 마을 이야기는
결국 추억이 될 수 없군요.
공덕비는 흉물스럽지 않게
처리할게요.
이 때 문둥이가 등장한다. 그 뒤를 인부가 포크레인을 타고 등장한다.
문둥이 뭐라고 혼자 중얼거리느냐?
일하게 비켜!
공덕비 뒷면을 깎으려 했다만
아예 없애기로 했다.
아 들 잘 생각하셨어요.
그게 흉하지 않겠네요.
동상이나 빗돌은
훼손되는 것 보다
없는 게 났겠지요.
문둥이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알 수 없는 일이군.
왜, 생각이 바뀌었느냐?
아 들 여사를 뵈었어요.
문둥이 (깜짝 놀라며)
육영수여사를?
공덕비 부탁하러?
아 들 부탁하러 온 게 아니라
영영 마을을 떠난다고
마지막으로 온 거예요.
문둥이 마지막으로?
아 들 네, 아버지
공덕비를 흉물스럽지 않게
치우죠?
문둥이 마을 장로회의에서
결정 한거니까 나도 어쩔 수 없다.
역사는 인정의 눈으로
바라보는 게 아니니까.
인 부 자아, 작업이요!
인부가 공덕비 주위를 파기 시작한다. 철커덕, 철커덕하는 음악이 흐른다. 곧이어 무대 위 천장에서 기중기 모양의 기계가 내려온다. 공덕비를 밧줄로 칭칭 감아 끌어올린다. 세 사람의 눈이 거기를 바라본다. 불빛이 승천하는 공덕비를 따라 간다.
김영산∙1964년 전남 나주 출생. 1990년《창작과 비평》으로 등단. 시집 벽화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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