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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호 젊은시인 집중조명/이정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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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화
휘파람 부는 남자 외 9편
한 남자를 기억 한다. 해가 뉘엿할 무렵 미루나무 그림자가 어둑신한 천변 둑길을 물기 눅눅한 잡풀이 성한 습지의 들판을 어깨에는 투망을 걸러 메고 한손에는 잡고기 몇 마리 들어있는 양철 물통을 들고 또 한 손은 어린 딸의 손을 잡고 휘파람을 불던 남자 동그랗게 오므린 입술에서 새가 날아 나오고 노랑나비 나풀나풀 날기도 하다가 비바람이 몰아치면 얼굴이 빨갛게 부풀어 오르도록 쇠 된 휘파람을 부시던 아버지 어른이 되어서야 세상의 모든 음악이 휘파람 소리라는 것을 알았다
바닥없는 여자
들어오는 물과 나가는 물의 양이 달라 언제나 그렁그렁 물이 차있는 곳이 있다 보길도 세연지 회수담 이른바 五入三出 잘나가던 아버지의 사업이 절단 나고 눈물로 바닥을 말리던 어머니가 어느 날부터 울음을 그치고 대신 악을 쓰기 시작했다 바닥이 드러난 연못의 참붕어처럼 벌떡거리며 삼시세끼 밥이 되는 일이라면 가리지 않고 팔 걷어 부쳐가며 악착을 떨었다 어머니가 악을 쓰면서부터 매일 먹어야 했던 손칼국수나 감자수제비를 먹지 않아도 되었다 그 때 가둔 눈물이 아직도 그렁그렁한 어머니
포르쉐 911, 찔레, 붓꽃
꽁무니가 미끈하게 빠진 검정색 포르쉐 911을 보면 달아난 그 남자가 보인다 근육질의 딴딴한 허벅지가 보인다 담장에 흐드러진 찔레, 찔레꽃을 보면 밤마다 전화기에 대고 숨죽여 흐느끼던 그 여자가 보인다 빠알갛게 흐트러진 허리가 보인다 노오란 주둥이 바짝 치켜든 붓꽃, 붓꽃을 보면 엄마의 쪼그라진 젖가슴이 보인다 탱탱한 젖가슴 속에서 황홀하게 일어서며 하얗게 웃고 있는 아버지가 보인다 포르쉐 911, 찔레, 붓꽃을 보면 남자와 여자 여자와 남자가 보인다 검정 빨강 노랑 하양 선명한 純色의 살결에 무채색의 회색 선을 긋는다 남자 속의 여자 여자 속의 남자 이쪽과 저쪽을 온전히 넘나들어 흔들리지 않는 색色 비로소 사람이 보인다
놀이공원 모노레일이 뭐 어때서
한 방향으로만 간다
운행시간은 오차가 없다
매번 탈 때마다 요금을 내야한다
타고 내리는 곳은 변함이 없다
중간 기착지에 내리면
왔던 길도 가야 할 길도 다시는 갈 수 없다
당신들 어디에 있는가
사람들은 여전히 줄지어 차례를 기다리고
누군가가 이미 수없이 다녀간 길을
수순에 의해 달려야만 하는
지구의 자전과 공전에 무임승차한
당신들 어디에 있는가
목적지에 도착하면 자동으로 풀리는
안전장치 같은 운명을
다시는 돌이킬 수 없는 생의 어느 하루로
바짝 조이면서
죽음이 온몸을 휘감을 때까지
오로지 한 방향만을 고집하는
당신들 지금
삐딱나무
자세 봐라!
그래봤자 넌 나무야
뿔 달린 짐승이라도 된다는 거니?
넌 여기서 꼼짝 못해!
그게 사실이야
천변에 비스듬히 서있는 나무
어디든 튀어 나갈 태세다
도망치려다 들켰다
벌서고 있다
이별의 방식
통화는 자주 끊겼다 통화권을 이탈한 말들이 펄럭거리며 바쁘게 돌아다녔다 장대비가 쏟아지거나 폭설이 잦았다 한 여름이었다 의자가 있는 버스정류장은 숨어있기 좋았다 소매 없는 짧은 원피스를 입은 여자들이 깔깔거리며 팔다리를 던져 주고 지나갔다 입이 없거나 머리통이 없는 사람들은 눈물을 자주 흘렸다 눈물이 지나간 자리에 눈 코 입이 검은 얼룩으로 솟았다 나도 모르게 웃음이 터져 나왔다 버스를 기다리는 여자에게 팔다리를 던져주고 콧노래를 불렀다 화창한 가을이다
길
너를 사랑했으나
너에게로 가지 않았다 못했다
네 속에서 살아 왔으나
차 한 잔 따듯하게 나눈 기억이 없다
눈 한번 제대로 맞출 수 없어
물끄러미 바라보며
혼자 웃고 혼자 울었다
발꿈치에 돋아나는 굳은살 같은 너를
뜯어내느라
마음은 언제나 맨발이었다
어둔 저녁이면 또 다시 너는
생 가시 같은 울음소리로
비탈진 하루를 세우려 들겠지만
밤새 발톱을 세운 고양이 한 마리
어디론가 가고 있다
맨발이다
제 길 쪽으로 길게 고개를 빼고 있다
방식을 바꾸다
현관문이 탈이 났다
드나들 때마다 무슨 큰 결사라도 하는지
세차게 밀어부처야 제대로 닫힌다
쾅하는 소리가 선불 맞은 짐승의 비명소리다
고쳐서 되는 일이 아니다
아주 버렸다
들어갈 때 마음과 나갈 때 마음이 달라도
저는 알 바 없다고
한결같이 쿵쾅거리던 현관문이
경첩을 새것으로 바꾸고 나서 조용해졌다
변수가 있다고 믿어온 당신에게
새로운 인사를 건넨다
안녕?
앙정
조카애가 “앙정”이 무슨 뜻이냐고 물어왔다
사전을 찾아보고 인터넷 검색창을 뒤져보아도
“앙정”이라는 말은 찾을 수 없었다
그 애가 읽었다는 글을 다시 보니 “중앙정부”였다
앙큼하고 앙살스럽고 앙똥하고 앙달머리스럽게
앙잘 앙잘대는 앙정
순조롭게 읽히던 책이 펼쳐진 채로
며칠째 놓여있다
어느 부분에서부터 막혔는지
읽고 또 읽어보아도 뜻이 잡히지 않는다
책장을 넘기지 못 한다
나를 제대로 읽어다오!
조카애는 꼼꼼히 몇 번을 읽었는데도
계속 “앙정”만 보였다고 했다
손가락으로 한 글자 한 글자 짚어주자
그제서야 제 머리를 쳤다
읽혀지지 않는 책처럼
잘못 읽은 문장처럼
읽고 싶은 구절만 보이는 네가 펼쳐 놓은
네가 오! 제발
나를 읽고 있는 내가
제대로 짚고 있는 거라고 믿고 있는 내가
미술관 순례기
저것은 침묵
저것은 끝나지 않은 수다
저것은 수고로운 삶의 웅변
저것은 꿈꾸는 자만의 감옥
저것은 순정한 혼의 울림
저것은 타락천사의 눈물
저것은 체제의 거룩한 반란
저것은 일상의 지루한 터치
저것은, 저것은,
저
저
저
사각의 틀 속에 갇힌 집짐승의 비애
광포한 야성의 생존기
일종의 경고
생을 어르는 안전표지판!
시인의 말
조금, 아주 조금만이라도
‘어느 날 갑자기 모든 것이 사라졌다’라고 쓴다 ‘어느 날 갑자기 모든 것이 사라졌다’라고 쓰고 그 다음에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라고 쓴다. 이어서 ‘변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라고 쓴다. '그것이 사실이다'라고 쓴다. 사실과 사실 아닌 것들 사이에서 나는 실종된다. 정확히 2007년 여름부터 2008년 여름인 지금까지 단 한 편의 시도 쓰지 못했다. ‘쓰지 못 했다’라고 써놓고 잠깐 망설인다. 못 썼던 것이 아니라 안 썼다고 해야 하지 않을까? 그 사이 겉장을 들추지도 않은 문예지와 시집들이 책장 한 칸을 다 채우고도 모자라 책상 위에 한 자 높이로 쌓여있다. 명색이 시인이라는 위인이 시를 읽지도 쓰지도 않았으니 직무유기에 근무태만이다 명백한 자격 상실이다.
읽기와 쓰기를 멀리하는 동안 노래를 자주 불렀다. ‘나는 세상에서 잊혀졌다/너무도 많은 시간을 허비했던 그 세상으로부터/그들은 오랫동안 내 소식을 듣지 못했으니/당연히 내가 죽었을 거라고 생각하겠지/그들이 나를 죽은 사람이라 여긴다 해도 상관없다/부정할 수도 없다/사실 난 그들에게는 죽은 거나 다름없으니까/나는 떠들썩한 세상에서 벗어나 조용히 쉬고 있다/내 하늘 안에서/내 사랑 안에서/내 노래 속에서 홀로…….’ 구스타프 말러의 ‘나는 세상에서 잊혀졌다’라는 노래 가사 중에 ‘세상’과 ‘그들’이라는 말을 ‘시’로 대입해 부르며 나는 평화로웠다.
시가 나를 훼손시키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 언제부터인가, 시를 쓰는 동안 나도 모르게 쓰여 진 한 단어, 한 문장에 놀라워하며 완성된 한 편의 시를 놓고 무한의 기쁨으로 전율하던 내가 시로부터 공격을 당하고 있다는 생각, 쓰면 쓸수록 공격의 강도가 높아지고 있다는 생각, 옴짝달싹 할 수 없이 시에 매여 끌려 다니며 나로부터 점점 멀어지고 있다는 생각, 이대로 가다가는 어느 날 아침 눈을 떴을 때 생면부지의 낯선 내가 애처로운 눈길로 나를 바라보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시가 아니라 내가 시를 훼손시키고 있다는 생각, 열정과 몰입과 용맹정진만이 시에 이르는 길이라는 생각으로 웃고 울었던 지난날들에게 미안하기는 했지만 근 일 년여를 시와 떨어져 있는 동안 나는 시로 인해 더 이상 불행하지도 행복하지도 않았다. 사실이 그렇다. 내 임의대로 시를 규정하지 않을 수 있게 되었고, 시에게 어떠한 명령이나 요구를 하지 않고도 시를 생각할 수 있게 되었다. 시도 나를 그렇게 대하게 될 것 같다. 이제야 비로소 시와 내가 서로에 대해 조금 알게 된 것이라고, ‘蓮꽃/만나러 가는/바람 아니라/만나고 가는 바람 같이’(서정주, 「蓮꽃 만나고 가는 바람같이」) 나는 시로부터 자유로워 진 것이라고 말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조금, 아주 조금만이라도.
2004년 ≪현대시학≫으로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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