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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호 이정화 작품해석/강경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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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부
댓글 0건 조회 2,369회 작성일 09-01-19 19:11

본문

|해설|
기억을 현상現像하다
  강경희|문학평론가


1. 비탈진 생
시인 이정화의 눈은 곧고 평탄한 직선의 사물보다는 기우러지고 휘어진 대상을 향해 있다. 비틀리고 휘어진 사물들에서 그는 고통을 본다. 휘어짐과 꺾임은 세계와의 끊임없는 갈등과 마찰에 의한 것이다. 「삐딱나무」는 이러한 그의 인식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자세 봐라!

그래봤자 넌 나무야

뿔 달린 짐승이라도 된다는 거니? 

넌 여기서 꼼짝 못해!

그게 사실이야

천변에 비스듬히 서있는 나무

어디든 튀어 나갈 태세다

도망치려다 들켰다

벌서고 있다
―「삐딱나무」 전문 

“천변에 비스듬히 서있는 나무”는 고통의 표상이다. 비스듬히 서있는 나무의 형상은 어디로도 갈 수 없는 존재의 비극성을 드러낸다. “넌 여기서 꼼짝 못해!/그게 사실이야”라는 말처럼 절대로 변할 수 없는 나무의 현실을 화자는 단호하고도 직설적으로 알려준다. 나무의 욕망과 나무의 현실은 대립한다. “어디든 튀어 나갈 태세”인 나무는 결국 그 어디로도 떠날 수 없는 운명을 지녔다. 나무는 자신의 현실로부터 탈주하려고 한다. 하지만 나무의 내적 욕망은 “도망치려다 들켰다”라는 말이 함축하듯 자신의 현실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 나무에게는 주어진 그대로의 현실만이 허용될 뿐이다. 때문에 천변의 나무는 스스로 비스듬히 선 채로 운명의 형벌을 받아야만 한다. “도망”치려는 욕망의 의지는 결국 “벌”이 되고, 온 생이 “벌”이 될 때 그것은 불행한 삶일 수밖에 없다. 
이정화는 ‘삐딱나무’를 통해 억압된 내적 욕망과 현실의 한계를 넘어설 수 없는 인간의 삶을 알레고리 한다. 욕망의 좌절과 그로 인한 치욕의 시간을 견뎌야 하는 삶의 모순이야말로 이정화가 말하고자 하는 인간의 현상인 것이다. 「삐딱나무」의 전체적 어조는 담백하고 경쾌한 느낌마저 준다. 하지만 그 속에 담긴 내포적 의미는 현실의 굴레를 넘어설 수 없는 존재의 비감한 고뇌를 보여준다. 형식과 내용의 아이러니는 이 시를 가볍게 다가가 무겁게 만들어주는 묘한 울림을 주는 효과를 낳는다. 

2. 분리와 통합의 상상력의 중심인 ‘가족’
이정화 시인이 곧은 직선의 세계보다 휘어지고 비틀린 세계에 이끌릴 수밖에 없는 이유는 자신의 아픈 체험과 관련된 듯하다. 「바닥없는 여자」는 아버지의 사업 실패로 바닥난 가계를 일으키고자 악을 쓰며 살아야 했던 어머니의 고단한 삶에 대한 기억을 보여주며, 「포르쉐 911, 찔레, 붓꽃」 또한 고통스러웠던 집안 내력과 자신의 청춘의 어두운 그림자를 짙게 드리우고 있다. 

들어오는 물과 나가는 물의 양이 달라 언제나 그렁그렁 물이 차있는 곳이 있다 보길도 세연지 회수담 이른바 五入三出 잘나가던 아버지의 사업이 절단 나고 눈물로 바닥을 말리던 어머니가 어느 날부터 울음을 그치고 대신 악을 쓰기 시작했다 바닥이 드러난 연못의 참붕어처럼 벌떡거리며 삼시세끼 밥이 되는 일이라면 가리지 않고 팔 걷어 부쳐가며 악착을 떨었다 어머니가 악을 쓰면서부터 매일 먹어야 했던 손칼국수나 감자수제비를 먹지 않아도 되었다 그 때 가둔 눈물이 아직도 그렁그렁한 어머니
―「바닥없는 여자」 전문

굴절된 시간의 마디마디에는 아프고 힘들었던 기억들이 존재하기 마련이다. 「바닥없는 여자」는 비탈진 생의 기억들을 감각적으로 현상現像한다. “잘나가던 아버지의 사업이 절단”났음으로 생활은 추락하고 만다. 어머니는 “눈물로” 세월을 지낼 수밖에 없었을 것이리라. 하지만 살아야 했음으로 어머니는 “삼시세끼 밥이 되는 일이라면 가리지 않고 팔 걷어 부쳐가며 악착을 떨”어야 했다. 어머니의 “악”을 화자는 “바닥이 드러난 연못의 참붕어처럼 벌떡거”린다고 비유한다. 생존을 위해 필사적으로 바동거려야만 했던 고단한 현실을 시인은 마르지 않고 “그렁그렁한” 어머니의 “가눈 눈물”로 묘사한다. 이정화는 “보길도 세연지 회수담”의 “五入三出”을 어머니의 “가둔 눈물”과 결합시킨다. “언제나 그렁그렁 물이 차있는” 세연지 회수담에서 그는 어머니의 서러운 한의 “눈물”을 발견한다. 
「바닥없는 여자」의 시적 묘미는 가난과 씨름하면서 보내야 했던 지난날의 상처를 전혀 다른 대상과 유기적으로 결합해 내고 있다는 점이다. 연못의 물이 언제나 일정하게 차는 ‘회수담’의 ‘五入三出’의 원리와 어머니의 ‘가둔 눈물’을 동일한 이미지로 통합시킴으로써 이 시는 어려운 생활고를 회상하는 평이한 진술이 아닌 서로 다른 이미지들이 상치되지 않고 자연스럽게 용해되는 시적 미감을 성취하고 있다. 
이정화의 시가 지닌 장점은 이처럼 각기 다른 상황이나 서로 다른 이미지를 자연스럽고 유기적으로 통합하는 능력이다. 「포르쉐 911, 찔레, 붓꽃」도 이를 성공적으로 보여주는 작품이다. 

꽁무니가 미끈하게 빠진 검정색 포르쉐 911을 보면 달아난 그 남자가 보인다 근육질의 딴딴한 허벅지가 보인다 담장에 흐드러진 찔레, 찔레꽃을 보면 밤마다 전화기에 대고 숨죽여 흐느끼던 그 여자가 보인다 빠알갛게 흐트러진 허리가 보인다 노오란 주둥이 바짝 치켜든 붓꽃, 붓꽃을 보면 엄마의 쪼그라진 젖가슴이 보인다 탱탱한 젖가슴 속에서 황홀하게 일어서며 하얗게 웃고 있는 아버지가 보인다 포르쉐 911, 찔레, 붓꽃을 보면 남자와 여자 여자와 남자가 보인다 검정 빨강 노랑 하양 선명한 純色의 살결에 무채색의 회색 선을 긋는다 남자 속의 여자 여자 속의 남자 이쪽과 저쪽을 온전히 넘나드는 흔들리지 않는 색色 비로소 사람이 보인다
―「포르쉐 911, 찔레, 붓꽃」 전문 

“포르쉐 911”과 “찔레, 붓꽃”은 서로 어울리지 않는 사물이다. 이렇듯 이질적인 대상들을 시인은 하나로 통합해 낸다. 그것은 다름 아닌 ‘슬픔의 색’이다. “꽁무니가 미끈하게 빠진 검정색 포르쉐 911”은 “달아난 그 남자”를 기억하게 만드는 사물이다. 그 남자의 “딴딴한 허벅지” “근육”은 “포르쉐 911”의 잘 빠진 외모와 닮았으리라. 하지만 그는 떠나고 없다. 화자의  이별이 ‘검정색’으로 연상된다면, 어머니의 슬픔의 빛깔은 붉고 노랗다. “담장에 흐드러진” “찔레꽃”은 “밤마다 전화기에 대고 숨죽여 흐느끼던” 어머니의 “빠알갛게 흐트러진 허리”를 떠올리게 하며, “노오란 주둥이 바짝 치켜든 붓꽃”은 “엄마의 쪼그라진 젖가슴”을 상기시킨다. “탱탱한 젖가슴 속에서 황홀하게 일어서며 하얗게 웃고 있는 아버지”는 어머니의 “쪼그라진 젖가슴”과 대조를 이루며 뒤틀리고 어긋난 생활상을 보여준다. 
각기 다른 삶의 고통과 회한, 설움과 절망, 웃음과 행복했던 한때는 “검정 빨강 노랑 하양”의 색들로 부각된다. 하지만 이렇듯 서로 다른 빛깔들은 충돌하지 않고 “선명한 純色의 살결에 무채색의 회색 선”으로 섞인다. 각기 다른 색들을 섞어 화자는 ‘무채색의 회색’을 만든다. 여기서 무채색은 모든 색들이 뒤섞인 통합의 색이다. “이쪽과 저쪽을 온전히 넘나드는 흔들리지 않는 색色” 속에서 시인은 비로소 서로 다르지 않는 ‘인간’을 만나게 되는 것이다. 그것은 가족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서로의 고통과 절망 또한 하나일 수밖에 없음을 인식하는 단계라 할 수 있다. 이정화는 애써 가족의 화해나 공동체의 연대에 대해 말하지 않는다. 하지만 「포르쉐 911, 찔레, 붓꽃」 은 ‘가족’에 대한 그의 뿌리 깊은 사랑을 확인하게 한다. 모든 색을 통합시키는 무채색처럼 가족 구성원들이 안고 살아가는 각기 다른 삶의 문제는 “선명한 純色의 살결”위에 무채색의 선으로 각인된다. 
이정화에게 ‘가족’은 존재론적 딜레마를 안겨주는 근거인 동시에, 그것을 극복할 수 있는 근원적 처소라 할 수 있다. 가족이란 울타리는 무엇보다 인간 개체에게 강력한 구속력을 지닌다. 하지만 한편으로 가족 구성원의 역할은 인간 존재가 지닌 개별적 가치, 즉 하나의 독립된 인간으로써의 주체성을 인식하는데 방해가 되기도 한다. 다시 말해 ‘어머니’, ‘아버지’, ‘딸’을 ‘여자’, ‘남자’, ‘여자’라는 일반 주체로 인식하기 어렵다는 장애를 갖고 있다. 이는 ‘가족’이라는 구속력이 만들어낸 사회적 관념이다. 
이정화는 이러한 관념을 해체시킨다. 이정화는 ‘어머니’를 ‘어머니’가 아닌 ‘여자’로, ‘아버지’를 ‘아버지’가 아닌 ‘남자’로, 자신을 ‘딸’이 아닌 ‘여자’로 전환시킨다. 그럼으로써 그는 진정한 “사람”의 실체와 대면하고자 한다. “남자 속의 여자 여자 속의 남자”는 가족의 지위와 역할에 구속된 존재가 아닌 ‘인간’ 그 자체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한 소통의 구조이다. 여기서 이정화의 새로운 가족관은 탄생한다. 분리와 통합의 상상력을 통해 그는 기존의 의미와 다른 차원의 가족을 재정립시킨다. 진정한 가족에 대한 사랑의 바탕은 한 개체로써의 인간을 수용하고 이해할 때 가능하리라는 것이 시인의 생각이 아닐까.
가족과 관련한 또 다른 시 「휘파람 부는 남자」는 시각적 이미지와 청각적 이미지를 매우 유기적이고 절묘하게 결합시킨 작품이다. 

한 남자를 기억한다. 해가 뉘엿할 무렵 미루나무 그림자가 어둑신한 천변 둑길을 물기 눅눅한 잡풀이 성한 습지의 들판을 어깨에는 투망을 걸러 메고 한손에는 잡고기 몇 마리 들어있는 양철 물통을 들고 또 한 손은 어린 딸의 손을 잡고 휘파람을 불던 남자 동그랗게 오므린 입술에서 새가 날아 나오고 노랑나비 나풀나풀 날기도 하다가 비바람이 몰아치면 얼굴이 빨갛게 부풀어 오르도록 쇠 된 휘파람을 부시던 아버지 어른이 되어서야 세상의 모든 음악이 휘파람 소리라는 것을 알았다 
―「휘파람 부는 남자」 전문 

시각 이미지와 소리 이미지를 감각적으로 형상화하는 작업은 이미지즘의 시에서 활용되던 방법이다. 흔히 이미지즘의 시는 감각적 형상화에 집중하다보니 시의 내적 의미와 감동을 자아내는데 실패하는 경우가 종종 있어 왔다. 이정화의 「휘파람 부는 남자」는 공감각적 이미지를 형상화하는데 성공하는 동시에 시의 의미와 울림을 잘 전달하고 있다는 점에서 미적 안정감을 지닌다. 
아버지에 대한 기억은 자연의 색채와 몸의 구체적 묘사, 빛과 소리의 조응, 자연과 인간의 자연스러운 어울림으로 조화롭고 아름답게 그려진다. “해가 뉘엿할 무렵 미루나무 그림자” “어둑신한 천변 둑길”의 석양의 시골 풍경과 “물기 눅눅한 잡풀이 성한 습지”의 축축한 느낌은 ‘따뜻한 그늘’로써 자리했던 한 시절을 연상하게 만든다. 비록 화려하고 밝은 모습으로 자리하지는 않지만 부녀의 끈끈한 교감이 느껴지는 기억의 한 페이지를 화자는 잔잔하게 그려내고 있다. “어깨에는 투망을 걸러 메고 한손에는 잡고기 몇 마리 들어있는 양철 물통을 들고 또 한 손은 어린 딸의 손을 잡고 휘파람을 불던 남자”는 다름 아닌 화자가 기억하는 아버지이다. 
아버지의 손을 잡고 걸었던 강둑의 어둑하고 습한 길에서 들었던 아버지의 휘파람 소리의 의미를 철모르는 어린 소녀는 몰랐을 것이다. 하지만 그때의 기억은 성인이 된 ‘지금’ 새로운 의미가 되어 되살아난다. “세상의 모든 음악이 휘파람 소리”라고 말하듯 아버지의 휘파람 소리는 한 인간이 삶의 모든 것을 고스란히 담아낸 완전한 소리였다고 고백한다. “어른”이 돼서야 비로소 화자는 사랑과 절망, 시련과 기쁨, 고독과 따뜻한 인간애를 깨달은 것이다. “동그랗게 오므린 입술에서 새가 날아 나오고 노랑나비 나풀나풀 날기도 하다가 비바람이 몰아치면 얼굴이 빨갛게 부풀어 오르도록 쇠 된 휘파람”은 희망과 절망이 교차하고, 꿈과 현실이 넘나드는 ‘존재의 울음소리’였던 것이다. 
녹녹치 않은 삶, 세상의 풍파에 깎여 서럽게 울어야만 했던 아버지의 삶 속엔 슬픔만 존재하지 않았다. 거기엔 창공을 날아오르고자 했던 아버지의 꿈이 서려있고, 나풀거리는 날갯짓으로 비루한 현실을 넘어서고자 했던 소박한 염원이 담겨있었던 것이다. 이정화는 유년의 기억을 감각적으로 재구성함으로써 과거의 체험을 현재화한다. 그가 직조해낸 감각의 형상화 작업은 호소력 있는 미적 질서를 완성해 낸다. 이는 대상을 이미지화하는데 그치지 않고, 그 이미지를 통해 시의 의미를 보다 풍성하게 조각해내고 있다는 점이다.     

3. 형식미의 단조로움  
이정화는 실제적 경험을 감각적으로 직조하는 감수성을 지닌 시인이다. 체험의 공간화, 시각화, 형상화의 적절한 분리와 결합 방식, 이질적인 상황을 통합적이고 유기적인 의미로 환원시키는 능력은 이정화 시의 매력이다. 하지만 다소 단순화된 형식과 메시지 중심의 내용에 집중하는 몇몇의 시편들은 시를 싱겁게 만들 수 있는 부정적 요소라 할 수 있다. 가령 「놀이공원 모노레일이 뭐 어때서」나 「방식을 바꾸다」와 같은 시는 내용 전달에 비해 미적 형식이 다소 약화된다고 할 수 있다. 

한 방향으로만 간다
운행시간은 오차가 없다
매번 탈 때마다 요금을 내야한다
타고 내리는 곳은 변함이 없다
중간 기착지에 내리면 
왔던 길도 가야 할 길도 다시는 갈 수 없다 

당신들 어디에 있는가

(중략) 

목적지에 도착하면 자동으로 풀리는 
안전장치 같은 운명을 
다시는 돌이킬 수 없는 생의 어느 하루로 
바짝 조이면서 
죽음이 온 몸을 휘감을 때까지
오로지 한 방향만을 고집하는

당신들 지금 
―「놀이공원 모노레일이 뭐 어때서」 부분

이 시는 오로지 한 방향만을 요구하는 폭력적인 오늘의 삶을 비판하고 있다. 이러한 삶의 모습을 ‘모노레일’에 비유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 시가 전달하려는 메시지에 비해 진술한 내용은 다소 동어 반복적이다. 즉 묘사에 대한 장황함으로 인해 시적 긴장감이 떨어진다. 예를 들어 “한 방향으로만 간다”라는 모노레일의 특성은 “왔던 길도 가야 할 길도 다시는 갈 수 없다” “오로지 한 방향만을 고집하는”과 같은 방식으로 반복적으로 서술된다. 
또한 ‘한 방향’을 요구하는 오늘의 강압적 삶의 방식을 설명하는 표현도 반복적이다. 이는 시의 의미를 강화하기보다는 밋밋하고 평이한 느낌을 유발한다는 점에서 신선미를 확보하지 못한다. 즉 “매번 탈 때마다 요금을 내야한다”, “중간 기착지에 내리면/왔던 길도 가야 할 길도 다시는 갈 수 없다”, “사람들은 여전히 줄지어 차례를 기다리고”, “수순에 의해 달려야만 하는”, “다시는 돌이킬 수 없는 생”과 같은 진술은 메시지를 드러내기 위한 부연 상황의 설명으로 다가올 수 있다. 이런 점은 전반부에 언급한 시에 비해 상상력의 활달함과 생동감 있는 이미지의 묘사가 부족한 경우라 할 수 있다. 
또한 이정화 시에서 아쉬운 부분을 지적한다면 전달하려는 메시지의 심각성에 비해 시적 형식의 가벼움이 시의 의미를 풍성하게 뒷받침하지 못하는 경우이다. 예를 들어 「삐딱나무」의 경쾌한 어조와 심각한 내용의 반대적 결합 방식이 오히려 의미를 효과적으로 드러내는데 반해, 「방식을 바꾸다」는 형식의 단순함과 일상어의 어색한 조합이 시의 의미를 싱겁게 만드는 경우이다. 

현관문이 탈이 났다
드나들 때마다 무슨 큰 결사라도 하는지
세차게 밀어부처야 제대로 닫힌다
쾅하는 소리가 선불 맞은 짐승의 비명소리다
고쳐서 되는 일이 아니다
아주 버렸다
들어갈 때 마음과 나갈 때 마음이 달라도
저는 알 바 없다고
한결같이 쿵쾅거리던 현관문이 
경첩을 새것으로 바꾸고 나서 조용해졌다
변수가 있다고 믿어온 당신에게 
새로운 인사를 건넨다
안녕? 
―「방식을 바꾸다」 전문 

‘현관문의 고장’은 화자에게 난감한 문제이다. 왜냐하면 문으로써 제대로 된 기능을 수행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드나들 때마다” “세차게 밀어부처야 제대로 닫힌다” “쾅하는 소리”가 나야만 닫히는 문은 골칫거리다. 결국 “고쳐서 되는 일이 아니”기에 문을 새로 달아야만 했다. 이전의 문을 버리고 새로운 것으로 교체하려는 의도는 의외로 새 경첩을 달음으로써 고쳐진다. 이를 화자는 “변수”라고 말한다. 이정화 시인이 주목하는 말은 ‘변수’이다. 즉 이전 것을 버리고 새로운 것을 선택해야 삶이 달라지는 것이 아니라, “변수”로 인해 삶이 새로워질 수 있다는 전환적 사고의 방식이다. 
이는 삶에 신선한 자극과 충격을 주는 방향 전환이다. ‘이것’ 아니면 ‘저것’이라는 극단의 논리나, ‘소모’와 ‘폐기’의 원리만이 작동하는 무자비한 질서로만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때로는 기존의 ‘방식을 바꿈’으로써 새로운 계기와 차원을 경험할 수 있음을 이 시는 암시한다. 이렇듯 「방식을 바꾸다」는 우리 삶 전반에 대한 사뭇 진지한 문제를 시사하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시의 의미와 맥락을 이해하기 이전에 표현방식이 주는 진부함과 가벼움, 즉 “들어갈 때 마음과 나갈 때 마음이 달라도/저는 알 바 없다고” 라는 식상한 표현이나, “새로운 인사를 건넨다/안녕?”과 같이 가벼운 어조의 결말은 시의 의미를 반감시키는 요소로 작용한다. 
이밖에도 「미술관 순례기」같은 경우도 형식의 단조로움이 시의 의미를 확산시키는데 부정적으로 작용한다. 전반부에 묘사된 다양한 비유는 시의 마지막에서 시 전체를 떠받치는 상징적 의미로 응집되지 못하기 때문에 보다 고양된 의미로 집중하는데 실패한다. 즉 “저것”은 ‘침묵, 수다, 웅변, 꿈꾸는 자만의 감옥, 순정한 혼의 울림, 타락천사의 눈물, 체제의 거룩한 반란, 일상의 지루한 터치, 사각의 틀 속에 갇힌 집짐승의 비애, 광포한 야성의 생존기, 일종의 경고’와 같이 다양하게 은유 된다. 이렇듯 이질적인 의미들이 혼합된 ‘저것(그림)’을 시의 결말에 이르면 “생을 어르는 안전표지판!”으로 마무리한다. 이는 전반부에서 진행되었던 다양한 의미의 상충과 결합이 주는 시적 긴장감을 한 순간에 풀어지게 만든다. 보다 상징적 의미로 응집되지 못할 때 시는 산만하고 단조로운 느낌을 유발하게 만든다는 점을 상기해야 할 것이다. 

4. 맨발로 걸어가는 비탈진 하루 
시인은 대상을 특수한 관점으로 보고, 그 대상을 특수한 방식으로 해석하며, 그것을 특수한 방식으로 표현하는 사람이다. 한 시인의 개성은 이처럼 사물을 특수하게 인식하려는 상상력과 사유에서 출발한다. 
이정화의 시의 개성은 기억을 현상現像하는데 있어 특수한 방식을 보여준다. 감각적 이미지를 효과적으로 사용할 뿐만 아니라, 이질적 상황과 상치된 사건들을 자연스럽고도 유기적으로 결합시키는 방식은 그의 시의 미덕이라 할 수 있다. 섬세한 언어의 배열, 서로 다른 대상들이 갖고 있는 속성을 하나의 정서로 통합하는 능력은 신선하고도 강렬한 느낌을 준다. 특히 주관적 감성에 의해 선택된 이미지들이 서로 조응하고 결합하는 방식은 이정화 시를 돋보이게 만드는 점이라 할 수 있다. 이는 아마도 활달한 상상력과 시를 유기적으로 직조하는 오랜 시작詩作이 빚어낸 결과일 것이다. 
아쉬운 점은 앞에서 지적했듯이 시의 의미에 비해, 지나치게 단순한 표현이나, 진술방식의 단조로움, 다소 소박한 형식과 상투적 어조가 지닌 가벼운 뉘앙스이다. 물론 이는 시인 스스로가 시를 무겁지 않게 이끌고 가려는 의도된 계획이라 볼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의도가 자칫 시를 싱겁고 시적 긴장감을 반감시키는 요소가 될 수 있다. 
이정화는 자신의 시가 “읽혀지지 않는 책처럼/잘못 읽은 문장처럼/읽고 싶은 구절만 보이는” (「앙정」)이 되지 않기를 바란다. 자신의 세계에만 갇혀 소통하지 않는 시는 무덤의 시일 수 있다. 이정화는 어둠에 갇혀 신음하는 고통의 내면보다는 타자와 진정으로 아프게 소통하는 휘어짐의 고뇌를 사랑한다. “생 가시 같은 울음소리로/비탈진 하루를”을 “맨발”(「길」)로 걸어가는 그의 발걸음을 오래도록 지켜보고 싶다.



강경희
1967년 서울 출생. 숭실대 석사 및 동대학원 박사. 숭실대, 산업대 강사. 2001년 <문화일보> 신춘문예 평론으로 등단. 저서로 타자의 언어학, 표류와 유출의 상상력이 있음.
추천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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