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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호 신작시/김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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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여정
다시 부석사에서 외 1편
한여름 폭염 속에
다시 부석사 찾았다
선묘낭자의 슬픈 사랑이
봉황산자락을 시퍼렇게 물들이고 있었다
억겁의 질긴 인연이
질경이풀로 뒤덮고 있는 언덕을 오를 때
호법護法의 번갯불 대신
빗방울이 후둑후둑 나뭇잎을 때리기도 했다
부석사 당간지주 앞에서
수평선 너머로 사라져간 의상대사를
애끓이며 그리는 여인의 모습이
부석사 주위에 산안개로 서리는 것을 보았다
사랑이 얼마나 가벼운지
천 년 세월이 한지 한 장으로 날아와
부석사 무량수전 뒤에
봉황새의 깃털로 내려 앉아 있었다
가벼워 너무 가벼워서
작고 예쁜 복사빛 두 발이 허공에 떠서
화엄의 바다에 뜬 연꽃
부석浮石으로
하늘을 받쳐들고 있었다
절을 한 바퀴 돌아 내려올 때
내 가슴속 석등石燈에
천 년 불멸의
사랑의 불이 켜지고 있었다
달팽이관을 하늘에 걸어 두고
칠십 평생 세상이 수도 없이 바뀌고
빙글빙글 어지럽게 돌아갈 때도
끄떡없이 평행감각 갖고 살아왔는데
내가 요즘 빙글빙글 도는 세상에 사네
어느 날 갑자기
나를 맷돌 위에 눕히고 초고속으로 돌려대는
이 자는 누구인가 했드니
생전 듣도 보도 못했던
이 괘씸한 달팽이관이란 놈
의 소행
무슨 억하심정에
뒤늦게 나를 이렇게 마구 돌려대는가
이비인후과를 찾았더니
그놈의 옹고집
내 요지부동의 평행감각이 괘씸죄에
딱 걸렸다지 뭔가
이제 좀 전후 좌우로 흔들리기도 하며
어지럼증에 익숙해 보라는 경고로 알라 하네
오늘부터는 아예
달팽이관을 귀에서 떼어내어
하늘에 걸어 놓고
하늘을 안고
하늘과 함께
빙그빙글 돌아보기로 하네
김여정∙1968년 ≪현대문학≫으로 등단. 시집 화음, 바다에 내린 햇살, 겨울새, 파도는 갈기를 날리며,어린 神에게, 날으는 잠,해연사, 사과들이 사는 집, 봉인 이후, 내 안의 꽃길, 초록묵시록, 눈부셔라, 달빛. 시선집 레몬의 바다. 수필집 고독이 불탈 때, 너와 나와의 약속을 위하여, 오늘은 언제나 미완성. 시해설집 현대시의 이해와 감상. 노천명 시해설집 별을 쳐다보며. 월탄문학상, 성균문학상, 남명문학상, 공초문학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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