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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호 신작시/정영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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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부
댓글 0건 조회 2,198회 작성일 09-01-19 1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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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영운
모호함의 은행* 외 1편


그 은행은 덕수궁 미술관에 잠깐 세 들어 사네
장 뒤뷔페가 눈 부릅뜨고 꾸려가네

소식을 늦게 들은 나는 허겁지겁 덕수궁으로 가네
은행문은 활짝 열렸으나 무엇을 예금하고 무엇을
찾는다는 말인가
은행의 문서들은 뱀들처럼 똬리를 튼 채
와글거릴 뿐이네
해독할 문자를 찾아 어슬렁거리다가 겨우,
캔버스 한 모퉁이에서 사하라 사막의
쓸쓸한 바람이나 줍네
그때, 타다만 석탄덩어리들을 막 양동이에 주워 담던
장 뒤뷔페가 ‘그 흔하고 너덜거리는 바람의 알몸을
왜 꿰차느냐면서’ 나를 노려보네
‘전통도 관습도 쫒아버린 당신의 캔버스에
원시성의 석탄덩어리나 휘두르라며’
나도 버럭 소리를 지르고 마네
그가 떠돌던 사하라를 결코 모방하려는 게 아니었는데
야비하게 딴지를 거네
시시비비에 휘말리지 않으려 급히 발을 옮기네

그 은행은 결국 내방객들의 찬 가슴을 들쑤시기나 하고
세 든 방을 떠날 것이네
아무란 합의도 없이 말이네

*프랑스 화가 장 뒤뷔페(1901~1985년)의 1963년 작품.

 



할머니의 추억

겨우 일 년 농사만 지을 줄 아는 여자
그것도 상처의 알들만 주워
마른 땅에 쿡쿡 심는 여자
두통이 심할 때는 엉뚱하게도 박카스 한 병
들이키고 이제 괜찮다 괜찮다 하는 여자
보따리 하나 끼고 가출했다가
친정 오빠가 딸려 보낸 논 몇 마지기로
아주 잠깐만 시어머니의 구박을 피할 수
있었던 여자
작은 여자와도 화목했으니
여자끼리의 원망은 삭아들었으나
돌아가신지 오래인 영감을 깨워
이제 와서야 육탄전을 벌이고 싶다는 여자
주름진 기억들 속에서도
빳빳하게 일어서는 상처의 알들을 구슬리느라
밤을 낮처럼 불 밝히는 여자

백 년 가까이 살았다고 손사래 치며
앞으로 일 년 농사만 그럭저럭 짓겠다던 할머니
그러나 옆집 앞집 할머니의 인생을
모방했다는 누명과 함께
돌아가신지 오래인 지금까지도
소설의 주인공이 되지 못하는 우리 할머니


정영운∙1997년 ≪현대시≫로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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