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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호 신작시/진해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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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해령
문현동 삽화 외 1편
의부증이 도지면 숙모는 어린 나를
자주 술청으로 심부름 보냈다
국제고무 공장 뒷담에 기대어 선 니나노집들
해도 떨어지기 전 자욱한 젓가락 장단에
개발독재가 놀아나던 시절이었다
초저녁부터 불콰하던 외삼촌의 잘 생긴 얼굴은
지금은 공원묘지에서 쓸쓸하다
그 때 버스비는 이 원, 왕복 사 원
할머니는 일 원도 더 주지 않았다
수정동 학교에서 범일동 로타리를 돌아
자성대 지나 외가로 가는 길
돌아 갈 차비로 재건건빵을 사먹고 먼 길을 걸어서 갔다
발보다도 그리움이 부르트던 시절
스웨터에 묻은 보풀을 떼어주던 손길에도
목이 메던 열두 살이었다
언덕 위 감리교회에서 눅눅한 풍금소리가 건너오던 저녁이면
엄마 생각에 이불을 뒤집어쓰고 코가 아프도록 울었다
먼 나라에서 끌고 온 원목들 위로 사선으로 떨어지던
제 오 부두의 불빛들, 가끔은 내가 멋모르고 끌려와
낯선 부두에 부려진 나무둥치 같다는 생각을 했다
너무 일찍 외로움을 알아버린 영혼
정이 고프던 그때 나는 열두 살이었다
이제는 추억의 색인으로 찾아도 대출 나가
돌아오지 않는 이름들,
두고 온 길 쪽에서 섬광처럼 빛을 쏘아
가끔 눈이 부시기도 하지만
다시 돌아가고 싶지는 않은 나는 그때
서른 같은 열두 살이었다
카네이션
어머니날이 되어서
사방에 붉은 꽃 피었다
그렇지만 저건 다 가짜야
진짜 카네이션은 어머니의 심장
원래는 둥글고 아주 매끈했던 것
살아서 두근두근 뛰었지
싱싱한 피를 쉴 새 없이 뿜어 올리던
불꽃의 사원이었지
어느 날 아기들이 태어나고
분홍 성게 같은 머리를 흔들며 죽자고 울어대고
어머니는 아기를 품에 안았지
조그만 손으로 가슴을 풀어헤치고
조그만 이빨로 심장을 조금씩 뜯어먹었지
꿈을 파먹고 울창한 시간을 파먹고
스웨터에 올이 풀리듯
심장의 끝이 조금씩 너덜너덜해졌지
겹겹이 벌어지다가 마침내
심장에 있는 피를 다 빨아 먹었을 때
꽃은 하얗게 되었지
오월이 되면 아이들은
제가 파먹은 심장 대신
가짜 심장을 어머니의 가슴에 달아준다
핀으로 꼭 질러 마지막 피 한 방울
핥아먹으며 웃는다
어머니 사랑해요
진해령∙2001년 ≪심상≫으로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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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회남님의 댓글
구회남 작성일문현동 삽화 2009년 좋은시 축하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