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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호 기획/구모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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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부
댓글 0건 조회 2,161회 작성일 09-01-19 1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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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화와 지역문학
구모룡|문학평론가



1. 변화하는 세계와 지역
냉전체제가 와해되면서 1990년대 신세대 문학은 성급한 탈정치화 선언을 하고 만다. 각종 후기(post) 담론이나 종언주의의 범람도 이러한 흐름과 같이 하게 되는데 실상 최종심금으로 작동하는 전지구적 자본에 대한 이해는 더뎠다. 과연 대안은 사라지고 역사는 끝났는가? 정작 위기는 더 커져가고 있는데 놀랍게도 위기 그 자체를 일상적 삶의 조건으로 받아들이는 경향은 만연되었다. 자원의 고갈과 생태계 파괴 그리고 대기오염으로 인한 지구 온난화라는 돌이키기 어려운 근본적인 위기가 닥쳐오고 있는데도 많은 사람들은 이러한 위기의 근본 원인인 전지구적 자본주의 세계체제에 대한 대안이 없다고 한다. 
맑스의 예견처럼 자본의 물결은 만리장성을 무너뜨렸다. 티벳에 대한 탄압과 신강에서의 테러에도 아랑곳없이 지금 북경은 세계자본주의의 중심부로 발돋움하려는 중화의 화려한 불꽃을 피우고 있다. 북경 올림픽의 슬로건은 “하나의 세계, 하나의 꿈”이다. 하지만 세계가 평화라는 하나의 꿈을 꾸고 있다고 볼 수는 없는 것 같다. 세계 평화의 제전이라는 올림픽이 열리는 가운데 벌어지고 있는 그루지야와 러시아 사이의 전쟁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결국 하나의 세계는 이루어질 수 없으며 하나의 꿈이란 모든 나라들이 자국의 이익을 추구한다는 엄연한 사실을 의미할 뿐이다. “보다 빨리, 보다 높이, 보다 힘차게”라는 올림픽의 표어는 자본주의적 욕망의 표상이 된 지 오래다. 
한정된 자원을 가진 지구에서 모든 나라가 하나가 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이상적인 “세계공화국”의 꿈은 “살아남기”라는 생존 경쟁의 끝에 있을 파국에 대한 불안을 포함하고 있다. 자본주의 세계체제는 자본과 권력의 위계질서이다. 이러한 질서에서 상위 계층을 유지하거나 그에 포함되려는 국가 간, 지역 간 경쟁은 매우 심각하다. 그루지아-러시아 전쟁을 보더라도 단지 두 나라만의 분쟁이 아니라 그루지아-유럽-미국으로 이어지는 지역과 러시아-중국으로 이어지는 지역 사이의 자원 경쟁의 연장선에 있는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자본주의적 세계화에서 살아남는 길은 어디에 있는가? 중심부의 지위를 유지하거나 그에 위치하려는 “무한경쟁”을 지속해야 하는 것인가? 아니면 다른 길을 찾아야 하는 것인가? 전자의 길이 공멸을 향해 있다는 점에서 응당 후자의 길 찾기에 나서야 하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가장 먼저 기존의 체제 변동을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미국 중심 체제의 변동과 동아시아의 부상에 기대를 하면서 다중심의 세계를 상상할 수 있다. 유럽과 미국과 동아시아가 정립鼎立하는 것이 바람직한 구도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러한 상상과 기대는 관념에 불과하다. 실제 불확실성이 증대하고 있어 세계가 어떻게 달라질지 알 수 없는 것이 현실이다. 이러한 가운데 가장 우세한 담론은 세계화만이 유일한 방책이라는 것이다.    
세계화는 주변부 사회를 해체하고 농업과 생태계를 파괴하고 있다. 가령 멕시코의 치아빠스는 자원이 최고 풍부한 지역임에도 주민은 가장 가난하다. 그 지역에서 나오는 부가 그 지역 사람들에게 돌아가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은 멕시코시티로 가거나 미국 혹은 전세계 수출시장으로 흘러가고 만다. 그래서 이 곳 사람들은 먹을 것도 없고, 돈도 없고, 집도 없고, 옷도 없다. 이러한 상황에서 사빠띠스따 저항이 일어난 것이다. 사정이 이러하다면 세계화가 아니라 지역화로 가야 한다. 지역 스스로 자립적인 경제 시스템에 기반한 사회를 만드는 것이 희망적이다.
세계화냐 지역화냐? 세계화의 흐름을 조정하기도 힘들지만 지역화의 대안을 간과할 수도 없다. 자본과 권력의 편에 선 사람들은 세계화가 도달해야 할 목표라고 강변한다. 하지만 인류의 목표가 어찌 이 한 가지로 모아져야 하는가? 다양한 지역마다 다양한 사람들이 살고 있고 그들마다 삶의 목표가 다를 수 있는 것이다. 경우에 따라 세계화가 아니라 지역적 가치를 추구할 이유도 많은 것이다. 근대를 넘어서는 것이 세계화라는 생각은 단순하다. 오히려 전근대나 비근대의 가치들을 통해 근대적인 것을 극복하는 것이 바람직한 방향일 터이다. 이처럼 위대한 전환이라 명명되는 지역화의 가치가 발현될 수 있다. 그런데 세계화와 지역화가 이항 대립적 관계인 것은 아니다. 윤리를 전제한 세계화는 곧 지역화가 되기 때문이다. 민주적이고 평등한 가치를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고 문화 다양성과 생명 다양성을 지키려는 세계화는 지역화와 다른 방향이 아니다. 그러나 현금의 세계화는 폭력적이고 낭비적이고 비윤리적이다.  
          
2. 탈정치화를 극복하는 문학정치의 가능성
확실히 1990년대 신세대 문학의 탈정치화는 근시안적이었다. 자본주의 세계의 대안인 현존 사회주의가 무너졌다고 자본주의 그 자체의 모순들이 사라진 것은 아닐 터인데 신세대 문학은 사회주의 이념으로부터의 퇴각을 모든 이념으로부터의 탈피로 받아들였다. 그리고 신세대 문학은 문학주의로 회귀한다. 이러한 문학주의는 이전의 순수문학처럼 정치적 결탁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매우 광범한 흐름이 될 수 있었고 아직도 그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이처럼 탈정치화된 문학주의의 흐름을 지속시키는 데 동원된 개념 가운데 가장 큰 힘을 발휘한 것은 “문학의 죽음”이라는 담론이다. 기술의 비약적 발전으로 인쇄기술에 근거를 둔 문학은 쇠퇴하고 죽음을 맞을 것이라는 이야기이다. 참으로 우울한 진단을 내리는 이들은 맥루헌의 후예들로서 역설적이게도 문학주의자들을 뒷받침하게 된다. 문학이 위기인 만큼 문학을 지켜내야 한다는 것이다. 
맥루헌의 후예들은 일차적으로 텔레비전 시대를 통하여 문자시대의 종언을 고한 바 있다. 그러나 이들의 예견은 크게 빗나가고 말았다. 텔레비전에 식상한 대중들이 다시 신문과 문학으로 귀환하였기 때문이다. “문학의 죽음”이라는 이야기가 등장하는 것은 디지털 시대와 맞물려 있다. 디지털 기술이 등장하면서 맥루헌의 후예들은 지난날의 실패를 만회하기라도 하듯이 “맥루헌 르네상스”를 선포하는 한편, 디지털 기술이 활자 기술에 의거한 책 문화를 절멸할 것이라 주장한다. 일견 맥루헌 르네상스가 온 듯도 하다. 그럼에도 책은 여전히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매체이다. “문학의 죽음” 담론의 기저에는 기술결정론이 깔려 있다. 우리의 삶과 문화가 기술의 발달에 따라 변화한다는 것이다. 사실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러나 의식주 생활 전부를 기술이 바꿀 수 없는 것도 사실이다. 의식주의 경우 그 형질이 달라졌을 뿐 100년 혹은 200년 전과 그 본질이 변한 것은 아니다. 책이라는 것이 이러한 의식주의 문화 패턴과 흡사한 것이라면 음식을 알약으로 대신할 수 없듯이 책의 문화 또한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문학의 죽음”이라는 담론은 과장되었거나 허위일 가능성이 높다. 
“지구촌” 개념이 맥루헌에서 비롯하였듯이 맥루헌의 후예들은 또한 세계화를 옹호한다. 디지털 기술이 세계를 하나로 만들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오늘날의 기술이 발달하는 과정을 생각해 볼 수 있다. 과학의 발달에 상응하는 기술의 발달을 뒷받침하는 것은 국가와 자본이다. 디지털 기술은 국가 이익과 자본의 요구에 의하여 발달한다. 이것은 시간을 완벽하게 공간화함으로써 지역을 넘어 세계를 통합한다. 말할 것도 없이 디지털 기술이 자본과 국가에만 봉사하는 것은 아니다. 지역 간 네트워킹을 가능하게 함으로써 위로부터의 세계화에 저항하거나 지역문제를 세계화하는 방안이 된다. 사빠띠스따가 멕시코 다중의 지지를 받고 세계 여러 지역의 관심사가 된 것도 디지털의 힘이다. 
그렇다면 문학의 위기와 문학의 죽음 담론을 의지한 1990년대 신세대문학이 얻은 것은 탈정치화 이데올로기이다. 또한 자본과 시장에 저항하지 않음으로써 자기 확대를 도모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탈정치화가 가져온 손실은 매우 크다. 그 동안 한국문학이 견지해 왔던 긍정적인 가치들 가운데 많은 부분들이 쇠퇴하거나 주류에서 밀려나게 된 것이다. 왜 한국문학은 더 이상 민중을 말하려 하지 않는가? 만일 사회구성 개념으로서 민중이 사라졌다면 하위주체들, 약자와 소수자, 농민의 이야기를 하는 작가들은 왜 없는가?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위한 글쓰기를 하는 작가들은 있는가? 생태 환경이 파괴되는 현실을 비판하는 작가들은 누구인가? 이처럼 “문학의 죽음” 담론을 반사경으로 하여 이룩한 탈정치적 문학주의는 많은 의문을 남긴다. 
가라타니 고진이 근대문학 종언론을 제기하는 한편, 한국문학도 이러한 상황에 처한 것이라고 지적한 것은 한국문학의 탈정치화와 연관된다. 

우리는 현재 세 가지 해결해야 할 과제에 직면해 있다. 전쟁, 환경문제, 세계적인 경제적 격차. 이것들은 자연과 인간, 인간과 인간의 역사적 관계를 집약하는 사항들이다. 게다가 이것들은 시급한 과제들이다. 이전의 문학은 이런 과제들을 상상력으로 떠맡았다. 그러나 오늘날의 문학이 이것을 떠맡지 않는다고 해도, 나는 불만을 드러낼 생각이 없다. 그러나 나 자신은 그것을 떠맡고 싶다. 그것이 문학적이든 비문학적이든 아무런 상관이 없다.

그가 인도의 아룬다티 로이를 문학 행위의 정통으로 든 것도 그녀가 “전쟁, 환경문제, 세계적인 경제적 격차”를 글쓰기의 최우선 과제로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고진이 말한 근대문학의 종언론은 문학이 끝났다기보다 종래의 문학이 가졌던 ‘체제 비판 기능’을 잃었다는 의미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그렇다면 근대문학 곧 소설이 21세기에도 그 역할을 하려고 한다면 고진이 말한바 ‘세 가지 해결해야 할 과제’를 내용으로 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시장의 논리에 포섭되어 탈정치화한 소설이 다시 과거의 정치적 지위를 되찾는 일은 쉽지 않을 것이다. 고진이 아룬다티 로이를 예를 든 까닭도 거기에 있을 것이다. 그녀는 왜 소설쓰기를 그만두었을까? 민중 혹은 하위주체들을 망각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그녀의 소설 '작은 것들의 신'이 가져다준 부와 안락을 이들과 더불어 살기 위해 버린다. 

작가는 그렇게 쉽게 외면할 수 없다는 게 그의 저주받은 운명이다. 작가라면 늘 아픈 눈을 뜬 채로 있어야 한다. 날마다 창문 유리에 얼굴을 바짝 대고 있어야 하고, 날마다 추악한 모습들의 목격자가 되어야 한다. 그리고 날마다, 낡아빠진 뻔한 것들을 새롭게 이야기할 방법을 생각해야 한다. 사랑과 탐욕, 정치와 지배, 권력과 권력의 결여―이런 것들에 대하여 되풀이하여 이야기 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다면 한국의 작가들은 세계화 이후 더 심화되고 있는 양극화 현상이나 비정규직 노동자, 소수자, 이주 노동자, 농민의 문제를 외면하고 있는가? 또한 국가 권력과 자본에 의해 자행되고 있는 환경파괴와 폭력에 대하여 눈을 감고 있는가?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민중 혹은 하위주체들의 이야기를 아직 “낡아빠진 뻔한 것들”이라고 생각하는 이들이 더 많은 것도 사실이다. 다시 말해서 이들에 대한, “새롭게 이야기할 방법”을 찾고 있지 않은 것이다. 다만 이들이 아니라 “새로운 현실”을 더 새롭게 이야기하기 위해 매달리고 있는 것이다. 경우에 따라 기술주의에 편승하거나 세계화를 경배하는 것이 현실이다.

3. 세계화와 지역문학의 의미
문화의 세계화가 중심과 주변의 이분법적 단순화로 이해되는 것은 아니다. 자본 영역과 정치 영역과 달리 문화의 세계화는 복잡한 양상을 지닌다. 세계화는 한편으로 중심부 문화의 주변부 유입으로 나타나기도 하지만 주변부 문화의 변용을 가져오기도 한다. 아울러 주변부 문화에 대한 중심부 차용이 가능할 뿐 아니라 둘이 섞여 혼종화되는 현상[hybridity]을 만들기도 한다. 이러한 점에서 지역문화의 세계화를 뜻하는 글로컬 문화(glocal culture) 개념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그렇다면 세계화 시대에 지역문학은 어떠한 의미를 지닐까? 이에 대한 설명 이전에 먼저 모든 문학은 지역문학(local literature)이라는 관점을 전제할 수 있다. 지역 언어를 매개로 지역 사람들의 생활양식을 재현하는 문학은 곧 지역문학이다. 가령 토마스 하디와 위섹스 지역은 많은 이들에 의해 거론되는 사례이다. 그의 소설은 대부분 이 지역의 장소와 공간에서 형성된 이야기들을 담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문학은 문학연구자는 물론 인류학자와 인문지리학자의 연구 대상이 된다. 베네딕트 앤더슨은 국민국가 형성에 미치는 소설의 영향을 설명하면서 토마스 하디와 위섹스를 든다. 위섹스 사람들이 이 소설을 읽으면서 자기들이 같은 공동체에 있음을 상상하였다는 것이다. 또한 잭슨이나 다비같은 인문지리학자들도 토마스 하디의 지역소설을 통해 지역지리를 구성하고 장소경험을 서술하며 지역의 사회적 공간이 내포한 의미를 파악했다는 것이다. 비단 토마스 하디만의 특수한 예는 아닐 것이다. 김정한과 낙동강 지역의 관계 또한 지역문학의 전범이 되기에 족하다. 문제는 이러한 지역문학이 세계화 시대에 가지는 의미이다.
세계화는 전지구적 공간을 균질화하여 매끈한 표면을 만들려 한다. 그러나 이러한 균질화가 평등과 다양한 가치의 공존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이보다 동일한 교환 체계를 강요하는 것을 뜻한다. 차이와 특수성을 담보하는 지역문학은 이러한 세계화에 대하여 저항적이다. 지역문학이 지니는 일차적 의의는 일방적 세계화에 대한 저항에 있다. 다음으로 지역문학은 지역의 특수한 언어와 생활양식을 세계화한다. 말할 것도 없이 지역문학의 세계화는 쉽지 않다. 주변부 사람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일 사람들이 많지 않기 때문이다. 이러한 현상은 일국적인 차원에서도 설명이 가능하다. 서울의 지배적인 미학을 좇다보면 지방의 작가들은 자기 땅으로부터 소외될 수밖에 없다. 아울러 자기가 딛고 선 땅의 이야기를 하면 관심을 기울여 주는 이 적다. 그럼에도 세계적으로 뛰어난 작가들의 문학이 지역문학이라는 사실은 중요하다. 
간혹 지역문학의 가능성을 혼종성에서 찾는 경우가 없지 않다. 혼종성은 식민지를 겪은 나라들의 지역문학이 보일 수 있는 강점이 될 수 있다. 또한 반半주변부 지역의 문화 혼종성은 기존의 경계들을 허물면서 새로운 정체성을 형성할 수 있다. 하지만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지역의 역사성이다. 지역의 특수한 국면을 통해 지역적 삶의 심층을 파고든다면 혼종성은 부차적인 특성으로 확인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어떤 의미에서 혼종성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것은 세계화의 문화전략에 포섭될 수 있다. 혼종성이 탈영역화의 가능성이 되기도 하지만 재영역화의 기미도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저항과 협상의 구체적인 과정에 대한 천착이 중요하다.  
지역문학은 지역이라는 프리즘을 통하여 중층적으로 확장된 시각으로 세계를 읽어내는 문학이어야 한다. 그러므로 이것은 폐쇄적인 지방주의에 갇혀서는 안 된다. 예를 들어 김동리의 지역문학과 김정한의 지역문학이 가지는 차이는 뚜렷하다. 전자가 특정한 공간과 장소에 기반하고 있음에도 궁극적으로 그것을 무화시키고 초월한다면 후자는 특정한 공간과 장소에 스며든 역사의 두께들을 겹겹이 벗겨낸다. 말할 것도 없이 세계화 시대에 김동리의 지역문학이 가지는 의의가 전혀 없다는 것은 아니다. 그의 지역문학은 지역의 특수한 패션을 세계화하는 데 이바지 할 수 있다. 그럼에도 세계화가 내포한 문제에 대한 근본적 접근은 지역으로부터 국가와 제국을 읽어내는 노력으로 나타나야 한다.

4. 지역문학을 어떻게 할 것인가?
싱가포르에 갈 일이 있어 서점에 들렀으나 싱가포르 문학을 찾기가 쉽지 않았다. 제법 몇 군데 서점을 거쳐 겨우 발견한 것이 From Boys to Men이라는 표제의 국가가 제공하는 앤솔로지 한 권이었다. 과문한 탓도 있겠지만 자국을 소개하는 각종 역사서에 비한다면 약간의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또한 가는 서점마다 자기계발에 관한 책들이 서점의 중심을 빼곡히 차지하고 있는 광경을 보고 한 동안 의아해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시아 네트워크 도시이자 다문화 국가인 이 나라에서 문학이 그리 중요한 문화영역될 수 없는 까닭이 무엇일까? 세계도시(global city)가 지닌 문화적 특성의 한 단면은 아닐까?
세계도시도 여러 층위가 있는 것으로 안다. 또한 그 성격에 따라서 금융중심, 정치중심, 문화중심 등 나누어질 수 있다. 아무래도 자본의 회전이 빠른 싱가포르 같은 경우 문학보다 여타의 문화영역이 더 많이 수용될 것이라는 짐작이 가능하다. 그렇다면 서울을 제대로 그려내고 있는 지역문학은 어떤 것이 있을까? 부산은? 인천은? 광주는? 대구는? 군산은? 통영은? 마산은? 목포는? 우선 대도시와 중규모 도시를 열거해 보았다. 물론 문학사를 통하여 지역문학을 따지는 일이 선행되어야 한다. 그럴 때 많은 사례들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자기 지역을 지속적으로 그려낸 작가로 어떤 이들이 있을까? 박경리의『토지』, 이병주의『지리산』, 조정래의『태백산맥』을 드는 일은 어렵지 않다. 그렇다면 서울이나 부산, 인천, 목포를 지역문학이라는 관점에서 탐문하고 서술하는 현존 작가는 누구일까? 
많은 작가들이 서울에서 활동하고 있다. 그러나 서울이라는 프리즘을 통해 국가와 세계를 통찰하는 글쓰기를 하는 작가는 드물다. 박완서 문학은 어떨까? 여하튼 이에 대하여 답하는 것은 나의 능력을 넘어서는 일이다. 다만 여기서 이미 제출한 바 있는 지역문학의 방법론을 다시 생각하면서 그 가능성을 생각해보려 한다. 이는 기존의 지역문학이 아니라 세계화 시대에 지역문학이 새롭게 씌어져야 한다는 기대를 포함한다. 
지역문학의 방법론으로 첫째, 자기로부터의 글쓰기를 들 수 있다. 자기 땅으로부터 유배된 자들처럼 타자의 얼굴을 하고 타자의 말을 하는 작가들이 많다. 자기의 땅으로 귀환하여 자기의 목소리로 자기의 역사를 말해야 한다. 그렇다고 자기애적 주체로 말하라는 것은 아니다. 자기를 쓰되 자기를 둘러싼 문맥들의 구체적인 전망을 그려내라는 것이다. 둘째, 두껍게 쓰기이다. 이는 지역 사실의 박물학적 기술이 아니라 일상과 생활과 그 기저에 깔려 있는 삶의 역사를 구체적으로 해부하여 지역의 신체에 각인된 실상을 서술하는 것이다. 셋째 다시 쓰기이다. 지역문학에서 지역성과 역사성은 동의어이다. 다시 쓰기는 파편화된 지역성을 재구성하여 지역의 문제가 근대의 문제, 국가의 문제이자 세계의 문제임을 밝혀내어야 한다. 이는 기존의 역사적 사실을 반영하는 것이 아니라 지역을 새롭게 이해하려는 지역연구와 병행하는 글쓰기라 할 수 있다.
비록 간접적인 방법이긴 하지만 지역문학 간의 네트워킹도 중요한 과제이다. 이는 일국적 차원에서도 가능한 일이고 디아스포라 민족문학으로 확장될 수 있다. 또한 아시아 여러 지역과 연계함으로써 지역문학의 세계화를 이룰 수 있을 것이다. 세계화 시대 지역화가 대안일 수 있듯이 지역문학의 의의는 커지고 있다. 이제 자본과 권력의 유혹을 떨치고 지역문학에 매진하는 작가를 발굴하고 육성하는 시스템을 만들어야 할 때가 아닌가 한다.



구모룡∙ 1982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문학평론 당선.. 평론집 앓는 세대의 문학, 구체적 삶과 형성기의 문학, 한국문학과 열린 체계의 비평담론, 신생의 문학, 문학과 근대성의 경험, 제유의 시학, 지역문학과 주변부적 시각  등. 시전문 계간지 ≪신생≫ 편집위원.  한국해양대학교 동아시아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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