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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호 서평/진순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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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김동호, <五弦琴>(고요아침)
■허형만, <눈 먼 사랑>(시와사람)
‘회의’와 ‘포용’으로 지어진 두 개의 긍정의 집
진순애|문학평론가
1. 회의와 포용
사람은 집을 지으면서 존재의의를 확인하는 존재이다. 물론 사람만이 집을 짓는 것은 아니나, 집이 있어도 또 다른 집을 짓고자 한다는 점에서는 사람만이 집짓기를 한다. 때문에 집에 살면서 또 다른 집을 짓고자 하는 사람의 갈망은 창조력에 속한다. 지어져있는 집을 버리거나 무의식 속에 저장하고 새로운 혹은 반성적인 또 다른 집을 짓고자 하는 역설적이며 창조적 존재라는 점에서 사람은 부분적으로 신을 닮아 있다. 사람의 집짓기란 신에게 다가가고자 하는 내지는 신이 되고자 하는 반성적 갈망에서 비롯된 신성한 창조력인 것이다. 이는 사람의 집이란 언제나 미완의 집이라는 사실을 은유하므로, 사람의 집짓기는 지속적이어야 한다는 사실 또한 은유한다. 그것은 사람의 존재의의에 속하는 까닭이다.
곧 사람의 집짓기는 ‘왜 사는가’, 그리고 ‘무엇으로 살아야 하는가’라는 질문과 같은 원리에 있다. ‘사람’이라는 두 개의 글자를 모으면 ‘삶’이 되는 것처럼, ‘사람’ 내지는 ‘삶’에는 ‘왜’와 ‘무엇’이 가로놓여 있는 것이다. 그 ‘왜’와 ‘무엇’을 해결하기 위해 사람은 반복적으로 반성의 집을 짓는다. 반복적으로 짓는 집일지라도 그 집은 언제나 새로운 집이다. 그것은 신을 닮고자 하는 사람의 집짓기인 까닭에 그러하며, 우주를 닮고자 하는 사람의 끊임없는 성찰의 집짓기인 까닭에 그러하다.
주체적으로 반성하는 집짓기의 하나가 시의 집짓기다. 김동호와 허형만은 ‘회의의 시선’과 ‘포용의 몸짓’으로 시의 집, 우주의 집을 짓고 있다. ‘회의의 존재론’과 ‘포용의 존재론’을 은유하는 ‘회의의 시선’과 ‘포용의 몸짓’은 다르면서도 그 귀결지가 같은 까닭에 다르지 않다. 회의를 통해 포용에 이르므로 그러하며, 포용에 이르기 위해 회의하므로 그러하다. 물론 회의와 포용은 반드시 이와 같은 선후의 순서를 지키는 것은 아니나, 인생이라는 세월의 힘은 포용에 이어 회의에 이르게 하기보다는, 회의에 이어서 포용에 이르게 한다. 궁극적으로 사람의 집짓기에서 회의와 포용은 공존하나, 부상할 때의 상황 논리에 따라 회의가 부상하거나 포용이 부상하거나 하는 차이로써 그 다름을 드러낸다. 회의와 포용은 신을 닮은 우주의 집에 이르는 김동호와 허형만의 시의 길이자 사람의 길에 놓인 두 개의 길이면서도 하나이다.
시집 한권에 내재된 시의 길은 시 편편마다 개별적이면서도 시집 전체로는 통일되어 있어서 여러 개의 시선과 몸짓이면서도 그 여러 개가 하나의 길, 하나의 집에 이르고 있다. 시 한편 한편은 시의 길에 대한 각각의 길을 안내하나, 한권의 시집 전체에 걸쳐서는 그 시인이 짓고자 하는 시의 집을 일관되게 떠받치는 하나의 길을 향해 놓인 것이다. <五弦琴>의 ‘회의의 시선’과 <눈 먼 사랑>의 ‘포용의 몸짓’이 두 시인의 반성적 삶을 은유하면서, 동시에 우주적 집짓기를 향한 주춧돌이었음을 은유한다.
2. 회의의 시선-김동호의 <五弦琴>
‘왜 사는가’라는 삶의 명제, 내지는 ‘왜 살아야 하는가’라는 회의의 명제에 따르듯 김동호의 <五弦琴>은 ‘회의의 시선’이 주축을 이루고 있다. <五弦琴>은 ‘회의의 시선들’이 모여서 ‘오현금’을 지었음을 은유하고 있어서, 결국 <五弦琴>은 회의의 명제들이 해결됐음을 내포한 것으로 보인다. 더욱이 시집 <五弦琴>에는 시 「五弦琴」이 없다는 사실이 각각의 시들이 시집 <五弦琴>을 짓는 하나하나의 주춧돌이 되고 있음을 암시한다. 이는 결국 각각의 ‘회의의 시선’은 ‘회의’로 남으나, ‘회의의 시선’들이 모여서는 ‘회의’로 남지 않고, ‘오현금의 집’으로 완성된다는 사실을 은유한다. 그것은 회의의 시선이 짓는 우주적 집이라는 변증법적인 결과이다.
1.
굶어 누렇게 부황이 든
소작小作들을 나무에 매달아놓고
개 패듯 패대는 대작大作들이 있었다
‘쌀 나무에서 쌀 털어낸다’고
서러움과 무서움 밖에 모르는
양민良民들을 나무에 매달아놓고
개 패듯 패 죽이는 미친개들이 있었다
‘사思, 사상思想을 털어 낸다’고
개죽음! 일차대전 이차대전
한국전 월남전 중동전- 그 숱한
객죽음들을 보고도 어떻게 그 분은
가만히 있었을까, 꽃을 빚고 꿀을 빚고
무한 무한 화원을 빚은 분이-
2.
???을 머리에 이고
돌길 지나 들길 지나 물굽이를
몇 번이고 넘고 돌아
사십 고개 마루턱에서
고향집 저녁연기 사이로
우연히 바라본 담벼락의 나팔꽃!
?모양의 나팔꽃 넝쿨손이
나를 잡고 놓지 않는다
?도 언어이다
하늘이 준 언어이다
짐슴에겐 없는 인간의 언어이다
―「‘물음’ 연가戀歌」 일부
<五弦琴>은 ‘물음 연가’로 출발하여 그 물음의 해답 내지는 회의에 대한 정의를 내리면서 우주적 집짓기의 완성에 다가간다. 김동호의 시의 길은 회의로 시작되는 길이므로, 시의 집도 회의가 있어서 정의를 내리며 완성된다. “???을 머리에 이고/돌길 지나 들길 지나 물굽이를/몇 번이고 넘고 돌아/사십 고개 마루턱”에 오르기까지는 ‘물음의 길’이었다는 전언은 회의가 있어서 ‘사십 고개 마루턱’에 오를 수 있었다는 역설을 동반한다. 회의는 불안하고 불명확한 삶의 길이면서도 삶의 힘이 되는 역설의 길인 것이다. “?도 언어고/하늘이 준 언어이고/짐승에겐 없는 인간의 언어”라는 해답이 ‘물음’ 연가의 마무리가 되고 있어서, 궁극적으로 ‘회의의 시선’을 뒷받침하는 방법의 길은 이성의 언어라는 데 있다.
‘짐승에겐 없는 인간의 언어’를 은유하는 ‘회의의 시선’은 김동호의 시의 집짓기이자 삶의 집짓기를 위한 방법의 길인 셈이다. 때문에 회의의 방법이 있고 없음에 따라서 김동호의 시의 집은 <五弦琴>이 될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을 것이므로, ‘회의의 시선’은 시인이 궁극적으로 이르고자 한 우주적 집짓기의 주춧돌이 된다. ‘언어’로써 ‘짐승과 다른 인간의 삶’이 가능하다는 전언으로 인해 ‘왜 사는가’와 ‘무엇으로 사는가’는 결국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로 그 해답이 내려진다.
죽음은 본래 아름다운 것
낙엽처럼 따뜻한 것
전사戰死 참사斬死 비명횡사-
숱한 개-죽음들만 아니었어도
―「죽음은」 전문
인생 짧지 않다
견딜 수 없는 졸음
쏟아질 때까지 영장靈長들
늘어지게 놀다 간다
―「인생 짧지 않다」 전문
우주적 집짓기를 위한 김동호의 회의와 그에 따르는 정의라는 변증법적 시쓰기는 죽음을 동반한 생이라는, 곧 생사가 하나라는 역설의 원리를 닮아있다. 삶이 죽음을 동반한 집이라는 역설의 원리를 닮은 김동호 시는 “죽음은 본래 아름다운 것/낙엽처럼 따뜻한 것”이라는 전언에 그가 짓고자하는 우주적 집을 은유하고 있는 까닭이다. 그것은 ‘개죽음’을 맞는 현실의 죽음 앞에서 ‘낙엽처럼 따뜻한 죽음’이 있는, 그리고 ‘짐승과 다른 인간의 죽음’의 집짓기를 꿈꾸는 까닭에 있다.
‘죽음은 본래 아름다운 것’이라는 정의처럼 “인생 짧지 않다”는 생에 대한 정의는 생사의 역설의 원리처럼 회의하는 김동호의 방법의 길을 은유한다. ‘늘어지게 놀다 가는 인생’이 ‘짧지 않다’는 정의는 ‘인생이라는 놀이’가 즐겁지 않은 놀이라는 역설적 정의이므로, 여기에 ‘회의의 시선’의 출처가 있는 셈이다. ‘전사, 참사, 비명횡사, 숱한 개죽음’만 아니었어도 ‘인생이 짧지 않은 것’은 아니었을 것이고, ‘죽음이 아름다운 것’으로 생보다 더 미화되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역설적 전언은 역설적 반성에서 비롯된다.
석양의 거울
투명 반사를 받아
마침내 온 누리 비춰주는
영경靈鏡이 되네
―「석양의 거울」 전문
응달의 꽃이 먼저 핀다
코딱지 꽃이 먼저 여문다
작은 꽃이 더 크다
청사초롱 아린 씨방은
―「씨방」 전문
가위로는 안 된다
쌍雙들아, 맷돌이 되라
시간의 알갱이 곱게 빻아
사랑의 고운 떡가루가 되라
―「맷돌」 전문
불과 물이 꽃을 낳지 못한다면
무슨 재미로 이 세상을 사나
물과 불이 서로를 끄지 못한다면
무슨 수로 이 큰 화원을 지키나
―「음양가」 전문
김동호의 우주의 집짓기를 위한 물음과 해답 사이에는 사물의 이음새가 놓여 있다. ‘석양’과 ‘씨방’과 ‘맷돌’과 ‘음양가’를 비롯한 사물의 이음새는 그의 회의의 시선이 우주의 집으로 마무리되도록 작용한다. ‘온 누리 비춰주는 영경이 되는 석양’, ‘꽃이 피고 지는 이치’, ‘시간의 알갱이들이 사랑의 고운 떡가루’로 화하는 시간의 일, ‘물과 불의 음양이 꽃을 낳고 서로를 끄는 자연의 화원’에 이르기 위한 경과가 회의와 그에 대한 정의를 내리는 이성의 언어라는 방법이었던 것이다. 이성의 언어는 보편적인 우주의 집을 향해 가는 반성적 방법의 길이었단 것이다.
3. 포용의 몸짓-허형만의 <눈 먼 사랑>
‘포용의 몸짓’은 우주를 닮은 성스러우면서도 깊은 보편의 길이다. 그러므로 ‘눈 뜬 사랑’이 이성의 사랑이라면, ‘눈 먼 사랑’은 우주의 사랑인 셈이다. 비록 이성의 ‘눈 먼 사랑’이 있어도, 그것은 순간적으로 눈이 먼 사랑일 것이므로, 이내 ‘눈 뜬 사랑’으로 회항하기 쉽다. 때문에 ‘이성의 눈 먼 사랑’이 아니라 ‘몸으로 오는 눈 먼 사랑’은 순간의 사랑이 아니라 근원의 사랑이며 영원하도록 포용하는 우주의 사랑이다. 이와 같은 포용의 사랑은 느티나무와 멧새의 깜찍한 발가락과 고요한 하늘의 파동과 같은 성스러운 존재들에게 동일화된 시인의 몸짓을 은유한다.
그래서 허형만의 <눈 먼 사랑>에는 자연이 이음새로 있는 것이 아니라 몸, 그 자체로 있다. 자연에 겸허하게 동일화된 허형만의 몸짓은 우주의 몸을 은유하는 시의 언어이자 자연의 몸이다. 자연의 몸은 이성의 언어를 포월하는 포용의 언어이며, 허형만의 우주의 집을 향한 성찰의 언어이다.
백운면 애련리에
세수 삼백 오십 세가 되셨다는
느티나무 한 그루 가부좌 틀고 계셨다
수많은 사리들을 거느리시며
내가 보기엔 나이보다 훨씬 더 들어보이시지만
원래 사람이 매긴 나이란 게
허망하고 믿을 것이 못되는지라
그냥 그러려니 하고 그 넓으신 그늘에 쉬다가
어찌나 한기가 드는지 벌떡 일어나
두 손 모으고 우듬지가 보일 때까지 우러렀다
한사코 햇살 탓만은 아닐 터
휘추리와 애채 사이를 포롱포롱 건너다니는
멧새의 깜찍한 발가락이 은비늘처럼 번득였다
그때였다 수많은 사리들은 서로 몸을 비벼댔고
고요한 파동은 서서히 하늘을 밀어 올리고 있었다
백운면 애련리에
세수 삼백 오십 세와는 무관한
수많은 사리를 거느리신 분 한 분 계셨다
세상의 발자국도 가는 체로 걸러내시며
계신 듯 아니 계신 듯
―「사리를 거느리시는 분」 전문
‘사리를 거느리시는 분’은 세속적 존재가 아닌 ‘가부좌 틀고 계신 삼백 오십 세수의 느티나무’라는 낯선 은유적 존재다. 우주를 경배하는 허형만의 겸허한 몸짓이 자연의 몸을 성聖의 세계로 고양시킨다. “내가 보기엔 나이보다 훨씬 더 들어보이시지만/원래 사람이 매긴 나이란 게/허망하고 믿을 것이 못되는지라/그냥 그러려니 하고 그 넓으신 그늘에 쉬다가”라고, ‘사리를 거느리시는 고양된 느티나무’와 ‘믿을 것이 못되는 사람의 허망함’을 비교하는 포용의 몸짓은 ‘이성의 한계적 사랑’에 대한 성찰을 은유한다.
“세상의 발자국도 가는 체로 걸러내시며/계신 듯 아니 계신 듯”이 ‘사리를 거느리시는 느티나무의 사랑’이 이성의 한계를 성찰하도록 독려하며 포용의 몸짓을 유인하는 근원이다. 그러므로 포용의 몸짓은 자연에 동일화된 시인의 몸짓이자 성스러운 우주에 대한 은유로 확대된다. 성스러운 우주를 은유하는 포용의 몸짓은 허형만의 성찰의 길이자 삶의 길이며 우주에 이르고자 하는 시의 길인 것이다.
한 방울 한 방울 물방울이 모여
강을 이룬 동굴이 있습니다
그 동굴에는
눈이 먼 사랑이 살고
그리움이 살고 아픔도 살고 있습니다
그리움은 눈 먼 사랑을 잡아먹고
아픔은 그리움을 잡아먹고 삽니다
눈 먼 사랑이여
한 방울 한 방울 물방울 떨어질 때마다
그 파동으로 울음 우는
서러운 짐승이여
―「눈 먼 사랑」 전문
그런데 ‘포용의 몸짓이 서러움으로 온다’는 사실이 성찰적이자 지상적인 사람의 사랑을 은유한다. 우주의 ‘눈 먼 사랑’을 닮고자 꿈꾸는 사람의 ‘눈 먼 사랑’은 서러움, 울음, 슬픔, 그리움, 아픔들을 포용하는 ‘지상의 사랑’인 까닭이다. 그것은 아직 ‘사리를 거느리시는 느티나무의 완성된 몸’에는 이르지 못한 반성적인 사람의 사랑이자 몸짓인 까닭에 있다. 우주적 완성을 향해 가는 몸의 언어는 아직은 ‘지상의 파동’으로 울움 우는 언어인 까닭이다.
“바람이 불면/허리가 아파오는 꽃처럼/네가 생각나는 날은/늘 이렇게 가슴이 저리단다”(「通」 전문)는 통증의 울음은 지상에서의 포용의 몸짓이 우주적 완성의 몸에 이르기 위한 경과인 것이다.
풍경이 운다
적요의 강을 치솟아오르는 저 등 푸른 그리움 한 마리
아, 하고 온몸이 짜릿해 온다
―「등 푸른 그리움」 전문
항주의 西湖를 느릿느릿 걷고 있을 때
초저녁 물기를 머금은 강이
입술을 꽃잎처럼 둥글게 말아
푸우우 안개를 뿜어내고 있었다
그 광경이 마치 무슨 상처처럼 보였다
안개에 젖기 시작한 숲은
잠시 미세한 파동이 일었다 멈추고
초저녁 길이 서서히 쓸쓸해지기 시작했다
내 곁을 맴돌던 시간의 그림자도
덩달아 쓸쓸한 듯 내 차가운 뺨을 비비다가
이내 사라졌다
초저녁, 그 쓸쓸함으로
나는 녹실녹실하게 부드러워지고 있었다
―「초저녁, 그 쓸쓸함」 전문
그러므로 사람의 몸짓은 시간의 그림자를 초월할 때 우주같은 온전한 포용의 몸이 될 것이나, 아직 시간의 그림자를 만드는 사람의 몸짓은 그리움과 쓸쓸함과 상처와 함께한다. 더욱이 하루의 그림자인 ‘초저녁’이라는 시간은 하루의 그리움과 쓸쓸함과 상처의 몸짓이 확대되는 시간이나, 또한 역설적이게도 ‘그 초저녁 쓸쓸함으로 녹실녹실하게 부드러워지는’ 포용의 몸짓이 확대되는 시간이기도 하다는 점에 ‘초저녁’과 ‘사람’과 ‘쓸쓸한 몸짓’은 하나를 이룬다. 포용의 몸은 어둠이고 저녁이고 우주이나, 외로움과 그리움과 눈물과 슬픔의 발효로써 완성되는 사람의 몸이기도 한 까닭이다.
‘초저녁’이 쓸쓸한 부드러움을 유인하는 역설적 힘이자 시간의 그림자이듯이, ‘풍경소리’도 ‘적요의 강’에 빠져서 그리움으로 ‘온몸’을 태우게 하는 역설적 힘으로 작용한다. 삶이 숨죽이는 ‘적요’의 시간에 ‘온몸을 태우는 그리움’과 함께한다는 역설이 아직은 시간의 그림자와 함께하는 지상의 포용의 몸짓을 은유한다. 그러나 궁극적으로는 ‘초저녁과 적요’는 우주이자 세속이며 빛과 그림자라는 이중의 몸으로 허형만의 겸허한 포용을 유인하는 힘으로 작용한다.
항주에서 상해로 가다가
가흥에 들렀더니
한 그루 나무의 뿌리가
천년을 얽히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무여, 나는 그대를
단 하루도 생각해 본 적이 없건만
그대는 천년을 기다리고 있었구나
천년 동안의 병
천년 동안의 그리움
천년 동안의 울음을
나의 가슴에 묻으려고
나무여, 그대는 뜬 눈으로
오매불망 기다리고 있었구나
―「인연」 전문
김동호에게 삶이란 이성의 언어로 풀어가는 회의와 정의의 길에 있다면, 허형만에게 삶이란 몸의 언어로 포용하는 사랑의 길에 있다. 김동호에게 삶이란 짐승과 달라야 하는 언어가 중심에 있고, 허형만에게 삶이란 근원을 닮도록 성스러워지는 일이 중심에 있다. 두 시인은 방법적으로 대립되어 있으나, 그 두 개의 방법은 방법으로 다를 뿐, 꿈꾸는 귀결지는 같으므로, 결국 두 시인이 이르고자 하는 시의 집과 사람의 길, 삶의 길에 대한 전언은 다르지 않다. 그것은 이성의 출처이기도 한 자연의 몸이자 우주인 까닭에 있는 것이다.
김동호의 <五弦琴>은 회의의 시선을 거쳐서 우주의 집에 이르고, 허형만의 『눈 먼 사랑』은 포용의 몸짓으로 출발하였으므로, 우주의 집에 이르는 것은 보다더 자연스럽게 형성된다. 허형만에게 그것은 출발부터 ‘나와 나무’의 관계가 ‘천년’ 전부터 맺어져있었던 것처럼 보이지 않는 ‘인연’의 관계에 따른 존재론에 있으므로 그러하다. 깨달음을 위한 천년의 기다림은 ‘내’가 행한 일이 아니라 ‘나무’의 일이었다는 허형만의 겸허한 존재론은 포월적 존재론인 까닭이다. 이처럼 ‘회의’와 ‘포용’으로 지어진 두 개의 시의 집은 사람을 사람으로 유인하는 중력의 세계는 보편적 세계라는 오래된 사실을 새로운 사실로 환기시키는 우주적 은유의 집이다.
진순애∙전남 고흥 출생. 1993년 《문학사상》으로 등단. 저서 <한국 현대시의 모더니티>, <아니무스를 위한 변명> 외. 성균관대학교 출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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