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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5호/신작시/박신규/번제燔祭 외 1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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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5호/신작시/박신규/번제燔祭 외 1편
박신규
번제燔祭
꿈결처럼 들었네
너의 가장 소중한 것이 무엇이더냐,
벌거벗은 사이렌의 음성에 홀려
산으로 갔네 춥고 깊은 산 속으로 갔네
내 가진 소중한 것들을 보퉁이에 싸서 짊어지고
두렵고 떨려서 옷깃을 여밀 때면
흰 늑대가 울고 눈보라가 쳤네
설산을 넘으면 또 설산
고산병으로 토할 때마다 고도를 낮추고
다시 오르고 올랐네
종내에는 오르내리는 것도 구분하지 못하였네
더는 가닿을 데가 없다고 느끼는 순간
화이트아웃에 갇혀버렸네
신성한 기운은커녕 어깨를 짚고 넘어가는
신神의 헛기침도 없었네
엎드려 목숨 같은 보퉁이를 바치자마자
이것은 저잣거리의 것, 쓸모없는 것이라,
산사태 같은 음성을 들었네
아들을 도륙하려 칼을 드는 순간
말리는 사자使者도 어린 양도 없었느니
믿음조차 얼어붙은 족장처럼 서 있었네
억울한 얼굴로 독수리 떼 같은 눈송이가 달려들었네
설맹의 눈과 동상 걸린 발을 끌고
구르고 굴러 내려갔네
이방의 저잣거리에 쓰러져 혼절했네
전생 같은 긴 잠에서 깨어난 어느날
이방인이 도살해준 뜨거운 염소피를 마시고
이마에 적시고 잘려나간 발목에도 바르고
다시 내가 처음 떠나온 자리로 갔네
이것은 저잣거리에 속한 것,
신의 목이 내걸린 입구를 지나 게토 속으로
한낱 벌거벗은 목숨이 나를 끌고 갔네
장마
나흘 밤낮을 앓은 어린것이
고열에서 빠져나와 간신히
잠 속으로 들어갔다
고양이들과 삼라만상도 그제야
눈 붙이려 할 때
코 고는 소리,
바다
하늘이다
*박신규 2010년 《문학동네》로 작품활동 시작. 시집 『그늘진 말들에 꽃이 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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