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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5호/신작시/임백령/노을 외 1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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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5호/신작시/임백령/노을 외 1편
임백령
노을
노을이 서녘에 범람하면 노을 댐 아래 사람들은
일몰의 낙조 빛에 휩쓸리는 재난을 당한다.
머리 위를 치덮어 온 땅 물들이는 홍운을 피해
재빨리 등 돌리고 창문을 닫아 보기도 하지만
엄습해 오는 초대형 붉은 염색에 물드는 전신
형상이 아닌 빛의 마술에 마비된 혀까지 붉다
검게 굳어진 폐허에서 무딘 시력을 회복한다.
민첩한 자들은 노을상조를 창업하기로 한다.
매일 아름다운 노을을 찍어 납부하는 것이 보험료
살아생전 보냈던 노을과 다른 고객의 노을 사진 중
그가 선택한 가장 아름답고 장엄한 노을을
장례 일주일 간 서쪽 길에 펼쳐 주는 비영리 서비스
매년 기일마다 제공하는 노을 병풍은 덤인데
한날한시 죽은 이의 노을이 같은 것은 아니다.
한 노을을 다른 곳에서 보면 차이가 나듯
적대감으로 갈라선 땅의 노을은 명암이 다르다.
노을보다 눈부신 조명을 밝히는 곳은 별 문제이나
노을이 지면 노을발전소에서 띄워 주는 하늘 별을
빛으로 삼아 길 더듬는 자들 있는 곳을 보라
촛불처럼 별을 이어 밤에 서로를 부르며 살기에
그런 땅일수록 하늘이 별천지로 눈부신 법이다.
내가 사는 곳은 볼거리가 밋밋한 넓은 벌판
해질녘 노을을 보러 밖으로 나가곤 한다.
고을 변두리 지는 노을이나 쓸쓸히 바라보면
노을은 나에게 날마다 새로운 옷을 지어 준다.
아름다운 옷을 나보다 많이 가진 사람은 없을 것
어둠의 옷장 속에 넣어 둔 옷 무늬를 나는 기억한다.
선연한 슬픔의 위로와 그 사이 망각의 눈빛 같은
오늘도 한 자락 입을 수 없는 옷을 허공에 던진다.
납골되니 한 생을 노래하고 춤추다
누르세요 그대 한 생 납골된 십팔 번 번호를 골라
내 것이기도 당신 것이기도 한 숱한 날들
짧은 가사 몇 마디로 불사를 수 있는 것은
내밀한 요술램프 제 사연 불러내기 때문이지요
어두운 조명이 서로의 눈을 가려 주어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는 그날 밤의 표정
일생에 단 한 번 꽃피워 보지 못한 자의 절규처럼
재생한 몸뚱이에 소리로 영그는 꽃송이 얼굴은
순간 정지 사진을 본다면 괴기스럽다 할까요
쏟아내야 할 것 많아 오직 신이 난 것은
제 몸을 이탈하여 돌아올 줄 모르는 고음들
또 왔냐고 고래고래 아직도 삶이 고단하냐고
천장에 매달린 미러볼은 그게 뭐 대수냐고
방전된 허물에 현란한 빛살 되쏘아 주는 에코
네 삶의 스타는 너야 알겠니 바로 나라고
관중 없는 밀실에서 터뜨리는 생의 불발탄
무지개 뜨는 하룻밤 미늘 갑옷 반짝거릴 때
어느 사이 하늘에서 어머니 다녀가셨나
녀석아 정신 차려 어린아이 안고 달래듯
몇 바퀴를 도시다 슬그머니 떠나셨는지
봉긋한 젖무덤 일침에 번져 오는 죄스러움
기념일 살라버리고 언제든 부활하는 소리의 유골들
어둠의 방에 풀어놓은 실연 아닌 시련도 슬픔도
다시 납골처럼 노래집에 돌려놓고 밖을 나서면
불 꺼진 미러볼 몇 개 장식을 높이 얹고서
겨울눈 맞고 서 있는 먼 나라 크리스마스트리
*임백령 2016년 《월간문학》으로 등단. 시집 『거대한 트리』, 『광화문-촛불집회기념시집(공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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