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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5호/신작시/이린아/엄마의 지붕 외 1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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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5호/신작시/이린아/엄마의 지붕 외 1편
이린아
엄마의 지붕
엄마는 죽고 싶다고 말할 때마다
꼭 하늘을 쳐다봤어요
대답할 것이 너무 많아
막막한 지붕들은 무거워요
구멍 난 지붕을 막기 위해 기와공 아저씨가 찾아 왔어요
아저씨의 턱수염은 지붕 밑을 받치느라 늘 꼬불꼬불하지요
아저씨가 다녀간 날이면
엄마에게도 꼬불꼬불한 털이 있어요
엄마는 올 여름엔 비가 많이 내릴 거라며
뒤뜰에 모아둔 조각 몇 개를 가리켰지요
기와를 받아 든 아저씨는 내게
좋은 날씨에 태어났다고 말해주었지만
그건 지붕 속으로 들어가 버린 엄마의 날씨일까요?
조각마다 날짜를 적어 두었어요
바람이 불어 치마를 입었거나
날이 맑아 엄마가 말을 걸지 않았던 날짜들 말이에요
더 이상 날짜를 새길 조각들이 없을 땐
잔디는 꽃 밑에 숨고 내 발자국들은 잔디 밑에 숨어요
뼈대만 남은 나무들은
문도 벽도 없이 지붕을 만들기 시작한 걸까요?
아저씨는 우리 마을에 있는 모든 지붕에 올라가 본
유일한 사람이지요
지붕을 만든 아저씨는 엄마보다 물어볼 게 많아졌을 거예요
바스락거리는 셈법
두 살 아니면 여섯 살 쯤일까요?
어른 속에 숨어다니는 아이는
둥글게 둥글게 짠!
물건을 넘어뜨리거나
하나의 숫자로 모든 문을 열어요
백 개의 눈을 가진 주머니를 달고
집안 곳곳 백 명의 관중을 숨겨 놓으면
떡갈나무 잎으로 날개를 만들어 줄 수도 있지요
가망이란 안타까운 실패에요
발소리가 큰 아이예요
아이의 뱃속에는 다섯 칸짜리 신발장이 있지요
불편한 신발을 신고 편하게 걷거나
편한 신발을 신고 불편하게 걷는 법으로
뾰족한 구두를 훔쳐요
그러니까, 아이의 어깨는
살살 두드려야 해요
배에서 난 숨소리처럼
이마에서 난 숨소리처럼
동공을 쭉 찢어 만져 주어야 해요
바스락거리는 셈이 가능한
어른과 울음을 맞바꾼 아이의 눈 처럼요
*이린아 2018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당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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