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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5호/신작시/예순용/외출 외 1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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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부관리자
댓글 0건 조회 1,020회 작성일 20-01-14 1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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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5호/신작시/예순용/외출 외 1편


예순용


외출



시 속에 상상의 집 한 채 지어놓고
한 마리 거미가 되어 살았다
거미는 내내 어둡고 심란해서 은둔을 낳았다
그런데 오늘 당신의 부고를 받고
첫 번째 외출을 시도한다
균형을 잃고 앞뒤 좌우로 흔들린다
한계에 도전한다
날기를 시도한다
복부를 부풀리고
눈에 띄지 않게
최대한 많이 거미줄을 뽑아
미풍에 몸을 날린다
문은 많은데 출구를 찾을 수 없다
어린 시절 열고 닫는 일은
항상 자유로웠는데
모든 문에는 경계가 있다는 걸
어른이 되고서야 알았다
문을 넘는 일은
다른 세계가 되는 일
건너편에서 당신은 밤새 울었다
아파서 울고 지쳐서 울고
못난 내가 보고 싶어서 울었다
끝까지 출발점이었던 내 안의 당신
시마에 빠진 아들은
임종조차 보지 못한 채 자폐가 되었다
이젠 상상의 집 밖에서 시를 쓴다
오직 뜨거운 감정이 되어
마침내 경계 없는 세계가 되어





끼니



무수한 발목들을 요리조리 피하면서 어린 비둘기는 주저함이 없다.
자동차 경적이 부딪쳐도 요지부동이다
몇 번의 날개짓으로 펄떡이더니 이내 종종 걸음이다
오직 한 끼를 구걸하기 위해
어린 비둘기는 콘크리트의 시선을 답습하며
걸어야만 한다
인도 같은 차도
차도 같은 인도 속에서
스텝과 박자에 맞춰 생존과 생활 사이를 이리저리


나는 비둘기를 감상할 틈도 없이 전단지를 들고 뛴다
한 장에 30원, 1000장은 천 개의 손바닥이 아니라
만 개의 손바닥을 만나는 일이다
안 받아준 사람에겐 잘못이 없고
그들 앞에 장애물처럼 등장한 나는 잘못이다
전단지와 나의 감정은
처음부터 버려지기 위해 태어났으니까


순식간에 날아가는 비둘기는
시간제일까 정규직일까
스스로 고용하고 스스로 노동하니
고민할 필요가 없다
이 광장에서 끼니라는 말을
실감하는 사람은 오직 나뿐이다
눈물을 훔치며 바라본 저쪽
밥알 같은 이팝꽃들이
화서花序에 맞추어 수북이 터지고 있다





*예순용 2019년 《열린시학》으로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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