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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5호/미니서사/김혜정/석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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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5호/미니서사/김혜정/석화
김혜정
석화
여섯 달 전, 그녀를 처음 봤다. 눈이 내린 뒤 기온이 떨어져서 도로가 얼어붙었고 밤이 도시를 장악한 뒤였다. 그녀는 환락가의 중심에서 한 블록 떨어진 곳에서 한 사내와 몸싸움을 하고 있었다. 아무도 그들을 말리지 않았고, 오히려 종종 걸음을 치며 달아났다. 곧 주변이 한산해졌다. 나는 길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그녀를 일으켜 세웠고, 그녀는 나를 밀쳐냈다. 휴대전화로 구급차를 부르고 있는데 그녀가 소리쳤다. 병원 같은 덴 죽어도 안 갈 거야. 쓸데없는 짓 하지 마. 어둠이 전화기 저편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를 삼켜버렸다. 그럼 집이 어디냐고 물었다. 집 같은 거 없어. 집에 가고 싶지 않거나 무슨 사연이 있을 거라고 짐작됐다. 더 이상 관여하는 것은 아니지 싶어 돌아섰다. 그녀의 신음소리가 뒤통수에 달라붙었다. 몇 걸음 떼지 않았을 때 저기요,라고 그녀가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그녀에게로 다가갔다. 그녀가 모텔로 데려다 달라고 했다. 나는 택시를 불렀다. 택시가 오는 사이에 그녀는 토했고, 그러고 나서야 정신이 돌아온 모양이었다. 모텔 입구에서 계산을 하고 돌아서려는데, 그녀가 나를 붙잡았다. 한 시간만 같이 있어줘요. 부탁이에요. 나는 우선 약국에 다녀오겠다고 했다. 그녀는 약은 필요 없고, 대신 소주 한 병만 사다 달라고 했다. 내가 소주를 사가지고 갔을 때, 그녀는 바닥에 웅크려 앉은 채 울고 있었다. 나는 그녀와 소주 두 병을 나눠 마신 뒤 일어섰다. 빚을 갚고 싶은데, 혹시 전화번호를 알 수 있을까요? 나는 괜찮다고 말했다. 그런데 그녀의 눈빛을 보고 차마 거절할 수가 없었다. 일주일 뒤 그녀로부터 전화가 왔고, 이따금 만나 술을 마셨다. 어느 날인가부터 술을 마신 뒤 함께 그 방을 찾곤 했다. 심한 불면증에 시달렸는데 그 방에서만은 이상하게 잠이 잘 왔다. 오늘은 그 방에서 술을 마시자고 그녀가 제안했다. 나는 그녀가 왜 그러는지 알 것 같았고, 그래서 두려웠다.
태양이 이글거리는 한낮인데도 방은 어두침침했다. 행인들의 목소리와 발소리가 벽을 타고 올라왔다. 에어컨은 가동 중이었지만 곧 멈출 것처럼 둔탁한 소리를 냈다. 소음과 담배 연기가 방안을 가득 채웠다. 그날처럼 소두 두 병을 나눠 마신 뒤 그녀가 입술을 내 입술에 포갰다. 그녀는 늘 그렇듯 스스로 몸을 사르는 듯이 뜨거웠다. 감염이라도 된 듯 내 몸도 뜨거워졌다. 이러다가 정말 죽는 게 아닐까, 생각하게 될 정도였다. 정말이지 그녀는 죽을 것처럼 몰입했다. 그녀와 분리되는 순간, 나는 망망대해에 홀로 남겨진 느낌이었다. 나는 그녀에게 그 느낌에 대해 말하고 왜 그럴까,라고 물었다. 그녀는 여름 한낮에 했기 때문이라고 농담처럼 말했다. 나는 다음에는 낮에 하지 말자고 무심한 척 대꾸했다. 하지만 우리에게 다음이 있을까, 하는 생각 때문에 입안이 타들어갔다. 나는 다시 그녀가 입을 열면 무슨 말이 나올지 알 것 같았고, 시간을 붙잡으려고 담배에 불을 붙였다. 그녀는 나를 빤히 쳐다보면서 자신은 재수가 없는 여자이고, 늘 슬픔에 빠져서 허우적거린다고 했다. 그날 밤 동거남한테 늘씬하게 얻어맞았을 때마저도 자신은 그럴 수밖에 없는 인간이라고 생각했다고. 그런 유전인자가 핏속에 흐르는 것 같다고. 아주 어렸을 때부터 그랬는데, 그 이유를 모르겠다고 했다. 그래서 늘 남에게 상처를 주는 것 같다고 덧붙였다. 나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나를 떠날 거냐고 물었다. 그녀는 떠나는 것보다 머무르는 게 더 어려운 사람이 있는데, 그게 자기라고 담배 연기를 내뿜듯 말했다. 그런 유전인자를 타고 났다니까. 나는 혀가 굳어버렸고, 그녀 또한 말이 없어 한동안 침묵이 유지되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그녀가 담배에 불을 붙이면서 사막에 갈 거라고 했다. 모래사막에 돌이 돼서 잠들어 있는 꽃이 있대. 장미처럼 생겼다는데. 그걸 한번 보고 싶어. 그 말을 듣는 순간, 그녀야말로 오랜 세월 모래 속에서 잠들어 있다가 피어난 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가 담배 한 대를 다 피울 때까지 기다렸다가 나는 그녀에게 사막에 같이 가자고 했다. 그녀의 눈망울에 반짝 이슬이 맺혔다. 나는 그녀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그녀가 내 몸에 키스를 퍼부었다. 그녀는 여전히 뜨거웠고, 그것은 뜨거운 모래를 오래 견딘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것임을 알 수 있었다. 나는 벌써부터 붉은 태양이 작열하는 사막의 한가운데에 닿아 있는 느낌이었다. 그녀와 함께 모래사막에 누워 있는 광경을 그려보았다. 아마도 우리는 아주 오래 그러고 있을 것이고, 그러다 잠들어버릴 수도 있을 것이다. *
*김혜정 1996년 〈문화일보〉 신춘문예에 단편 「비디오가게 남자」 당선. 소설집 『복어가 배를 부풀리는 까닭은』, 『바람의 집』, 『수상한 이웃』, 『영혼 박물관』. 장편소설 『달의 문門』, 『독립명랑소녀』. 간행물윤리위원회(우수청소년 저작상) 수상. 송순문학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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