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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호 신작시/하병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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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병연
시월논 외 1편
이상한 일이다. 여름 벼처럼 당당히 서서 영원히 들판을 푸르게 물들일 줄 알았다. 때앗빛 쏟아져 내려도 그 빛 다 품고 오랫동안 반짝일 줄 알았다.
“골다공증이 심한 척추관 협착증입니다”. 젊은 의사가 마른 논바닥 같이 패인 그녀를 보고 말한다. “이대로 가만히 두면 앉지도 서지도 못해요”. 그녀는 진액이 다 빠져 나간 나락잎처럼 잠깐 흔들렸고 나는 짜부라진 생의 버팀대를 안타까이 쳐다보았다.
그녀, 스무고개 물어물어 산 밑 두 마지기 논으로 시집 와 오월 가뭄, 유월 장마, 칠월 멸구, 팔월 폭염, 구월 태풍, 먼 산 붉어지는 시월, 그녀의 푸른 몸 마르자 이삭이삭 영글었다.
오후 5시 23분, 병원 문 열고 이우는 해 업고 나가는 구부런 등은 때앗빛 다 쏟아낸 벼 이삭과 같았다. 사람 속에 태어나 사람에게 모든 것 다 주어버린 텅 빈 등은 분명 황금빛으로 또롱또롱 익어가는 구부런 시월논이었다.
십일월논
어미 소가 푸른 싹을 먹고 있다
그루터기에서 돋아난 벼의 새살
긴 혀로 날름날름 잘라먹고 있다
가을 뒤주에 쌓아놓은 나락처럼
누렁소의 배는 봉긋하게 부르고
먼 시루봉 산봉우리처럼 아득하다
철벅 어미소의 똥은 논의 따순 밥
아침에 눈 뜬 논이 큰 입 벌려
한 그릇 먹고 있는 중이다
소화가 다 될 때에는 자운영 꽃 필 즈음
다시 봄 꽃밥을 배부르게 먹게 될 논은
든든한 밥심으로 어린모를 키워낼 것이다
오늘, 내 밥상에도 논이 만들어낸 밥
따뜻하게 올라올 것이다
이렇게 하루 밥을 먹고, 또 한 해 밥을 먹고 먹어
그러다가 내가 흙밥 되는 날
십일월논처럼 푸른 싹 밀어 올릴 수 있으려나
하병연
시월논 외 1편
이상한 일이다. 여름 벼처럼 당당히 서서 영원히 들판을 푸르게 물들일 줄 알았다. 때앗빛 쏟아져 내려도 그 빛 다 품고 오랫동안 반짝일 줄 알았다.
“골다공증이 심한 척추관 협착증입니다”. 젊은 의사가 마른 논바닥 같이 패인 그녀를 보고 말한다. “이대로 가만히 두면 앉지도 서지도 못해요”. 그녀는 진액이 다 빠져 나간 나락잎처럼 잠깐 흔들렸고 나는 짜부라진 생의 버팀대를 안타까이 쳐다보았다.
그녀, 스무고개 물어물어 산 밑 두 마지기 논으로 시집 와 오월 가뭄, 유월 장마, 칠월 멸구, 팔월 폭염, 구월 태풍, 먼 산 붉어지는 시월, 그녀의 푸른 몸 마르자 이삭이삭 영글었다.
오후 5시 23분, 병원 문 열고 이우는 해 업고 나가는 구부런 등은 때앗빛 다 쏟아낸 벼 이삭과 같았다. 사람 속에 태어나 사람에게 모든 것 다 주어버린 텅 빈 등은 분명 황금빛으로 또롱또롱 익어가는 구부런 시월논이었다.
십일월논
어미 소가 푸른 싹을 먹고 있다
그루터기에서 돋아난 벼의 새살
긴 혀로 날름날름 잘라먹고 있다
가을 뒤주에 쌓아놓은 나락처럼
누렁소의 배는 봉긋하게 부르고
먼 시루봉 산봉우리처럼 아득하다
철벅 어미소의 똥은 논의 따순 밥
아침에 눈 뜬 논이 큰 입 벌려
한 그릇 먹고 있는 중이다
소화가 다 될 때에는 자운영 꽃 필 즈음
다시 봄 꽃밥을 배부르게 먹게 될 논은
든든한 밥심으로 어린모를 키워낼 것이다
오늘, 내 밥상에도 논이 만들어낸 밥
따뜻하게 올라올 것이다
이렇게 하루 밥을 먹고, 또 한 해 밥을 먹고 먹어
그러다가 내가 흙밥 되는 날
십일월논처럼 푸른 싹 밀어 올릴 수 있으려나
하병연∙2003년 <농민신문> 신춘문예 당선.
시월논 외 1편
이상한 일이다. 여름 벼처럼 당당히 서서 영원히 들판을 푸르게 물들일 줄 알았다. 때앗빛 쏟아져 내려도 그 빛 다 품고 오랫동안 반짝일 줄 알았다.
“골다공증이 심한 척추관 협착증입니다”. 젊은 의사가 마른 논바닥 같이 패인 그녀를 보고 말한다. “이대로 가만히 두면 앉지도 서지도 못해요”. 그녀는 진액이 다 빠져 나간 나락잎처럼 잠깐 흔들렸고 나는 짜부라진 생의 버팀대를 안타까이 쳐다보았다.
그녀, 스무고개 물어물어 산 밑 두 마지기 논으로 시집 와 오월 가뭄, 유월 장마, 칠월 멸구, 팔월 폭염, 구월 태풍, 먼 산 붉어지는 시월, 그녀의 푸른 몸 마르자 이삭이삭 영글었다.
오후 5시 23분, 병원 문 열고 이우는 해 업고 나가는 구부런 등은 때앗빛 다 쏟아낸 벼 이삭과 같았다. 사람 속에 태어나 사람에게 모든 것 다 주어버린 텅 빈 등은 분명 황금빛으로 또롱또롱 익어가는 구부런 시월논이었다.
십일월논
어미 소가 푸른 싹을 먹고 있다
그루터기에서 돋아난 벼의 새살
긴 혀로 날름날름 잘라먹고 있다
가을 뒤주에 쌓아놓은 나락처럼
누렁소의 배는 봉긋하게 부르고
먼 시루봉 산봉우리처럼 아득하다
철벅 어미소의 똥은 논의 따순 밥
아침에 눈 뜬 논이 큰 입 벌려
한 그릇 먹고 있는 중이다
소화가 다 될 때에는 자운영 꽃 필 즈음
다시 봄 꽃밥을 배부르게 먹게 될 논은
든든한 밥심으로 어린모를 키워낼 것이다
오늘, 내 밥상에도 논이 만들어낸 밥
따뜻하게 올라올 것이다
이렇게 하루 밥을 먹고, 또 한 해 밥을 먹고 먹어
그러다가 내가 흙밥 되는 날
십일월논처럼 푸른 싹 밀어 올릴 수 있으려나
하병연
시월논 외 1편
이상한 일이다. 여름 벼처럼 당당히 서서 영원히 들판을 푸르게 물들일 줄 알았다. 때앗빛 쏟아져 내려도 그 빛 다 품고 오랫동안 반짝일 줄 알았다.
“골다공증이 심한 척추관 협착증입니다”. 젊은 의사가 마른 논바닥 같이 패인 그녀를 보고 말한다. “이대로 가만히 두면 앉지도 서지도 못해요”. 그녀는 진액이 다 빠져 나간 나락잎처럼 잠깐 흔들렸고 나는 짜부라진 생의 버팀대를 안타까이 쳐다보았다.
그녀, 스무고개 물어물어 산 밑 두 마지기 논으로 시집 와 오월 가뭄, 유월 장마, 칠월 멸구, 팔월 폭염, 구월 태풍, 먼 산 붉어지는 시월, 그녀의 푸른 몸 마르자 이삭이삭 영글었다.
오후 5시 23분, 병원 문 열고 이우는 해 업고 나가는 구부런 등은 때앗빛 다 쏟아낸 벼 이삭과 같았다. 사람 속에 태어나 사람에게 모든 것 다 주어버린 텅 빈 등은 분명 황금빛으로 또롱또롱 익어가는 구부런 시월논이었다.
십일월논
어미 소가 푸른 싹을 먹고 있다
그루터기에서 돋아난 벼의 새살
긴 혀로 날름날름 잘라먹고 있다
가을 뒤주에 쌓아놓은 나락처럼
누렁소의 배는 봉긋하게 부르고
먼 시루봉 산봉우리처럼 아득하다
철벅 어미소의 똥은 논의 따순 밥
아침에 눈 뜬 논이 큰 입 벌려
한 그릇 먹고 있는 중이다
소화가 다 될 때에는 자운영 꽃 필 즈음
다시 봄 꽃밥을 배부르게 먹게 될 논은
든든한 밥심으로 어린모를 키워낼 것이다
오늘, 내 밥상에도 논이 만들어낸 밥
따뜻하게 올라올 것이다
이렇게 하루 밥을 먹고, 또 한 해 밥을 먹고 먹어
그러다가 내가 흙밥 되는 날
십일월논처럼 푸른 싹 밀어 올릴 수 있으려나
하병연∙2003년 <농민신문> 신춘문예 당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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