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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호 희곡/손영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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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부
댓글 0건 조회 3,298회 작성일 09-01-19 13: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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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꿈―낙화유수落花流水/손영미




「사랑의 꿈」은 '삼국유사' 의 조신설화를 모티브로 한 춘원 이광수의 「꿈」을 각색하여 인간의 탐욕이 부르는 인과응보의 과정을 새롭게 해석한 작품이다.

(등장인물)
조신.
달례.
미륵(아들, 16세).
달보고(딸 15세).
칼보고(아들, 7세).
거울보고(딸, 2살).
평목.
용선대사.
화랑 모례.
김 태수.
태수부인.
사령 4명.
왈패들 5〜6명
어린 동자승 3명.
고을 사또.
사냥패거리 4〜5명.
스님들 3〜4명.
이웃 농부 아낙 2〜3명.
망나니 2명.
옥중인 3〜4명.
관가 일행 외,

#프롤로그
낙산사 절경, 무대는 무르익은 봄날의 도화색으로 채색된다. 무릉도원, 석벽의 절경을 연상케 하는 산봉우리가 한눈에 보이고, 철쭉이 만발한 산사의 아늑한 숲. 잔잔하고 은은한 목탁소리와 불경소리, 합창소리, 염불소리 오버랩 되는 가운데 무대는 마치 누구의 꿈인 듯 자욱하고 몽롱하다.
염불소리 점점 작아지면 건넛마을 왈패 무리 망태를 둘러매고 등장한다.

왈패 1  으음, 철쭉향이 죽이는구먼! 그려.
왈패 3  고운 건 또 어떻고.
왈패 2   (막대를 휘저으며 ) 자네들 그거 아나? 그 세달사 조신이란 땡중 말일세. 태수의 외동딸한테 반해 철쭉을 꺾어 바쳤다지 뭔가? 
왈패 1  그래? 그래서 꼬였다던가? 그 땡중한테? 
왈패 2  무슨, 쫓기고 쫓기었다지, 아마.
왈패 3   자고로 계집과 꽃은 향내를 풍기어 사내들 근심 사고 애욕 태우는 요물일세 그려.
왈패 1  그래 봐야 그게 다 순간 피었다 지는 꿈이지 뭐. 
왈패 2, 3 그래 꿈이니 그리 혼을 빼지 않겠어?

(어허, 둥실 춤을 추며 노래하는 왈패 1, 2, 3)
꿈이로세! 꿈이로세!
누구나 한 번쯤 꿈을 꾸지.
들꽃 만발한 푸른 들에
그림 같은 집을 짓고,
군계일학 귀녀 만나
떡두꺼비 아들 낳아.
선녀 같은 딸을 낳아.
백년가약 부귀공명
누군들 마다 하리?
한숨 자고 일어나서
눈 떠보니 눈 떠보니,
인생 만사 꿈이로세!
생로병사 일장춘몽,
꿈이로세! 꿈이로세!

위 노래 중 둔탁한 목소리의 염불 소리 이어지며 조신이 무대 어딘가를 거닌다. 달례, 소옥과 봄나들이 중이다.

조신     봄 아지랑이에 취하니 정신이 아득하구나! 이 푸르른 날 가슴은 무슨 연유로 이리 설레는가. 춘추절색에 만발한 꽃의 유혹인가? 구름 따라 바람 따라 흘러온 꽃향기가 나를 취하게 하는구나! 

달례, 소옥과 등장.

달례     저 철쭉이 나를 부르나! 이 푸르른 날 누군가 날 부르는 소리 아련히 들려오는 듯하구나?
소옥    아씨, 봄 아지랑이가 눈부시옵니다.
달례     저 나비 떼인가? 봄 아지랑이인가? 자유로이 넘나드는 저 구름이 날 부르는가? 아름답기가 절경이라! 꿈에서 본 듯한 아스라이 핀 저 철쭉 곱기도 하여라.
소옥     아씨도 참! (호호!!) 간밤에 없는 서방님이라도 만나셨습니까?
달레     그리도 그리던 임 말이냐? 오늘은 없는 서방님도 올 것 같구나. 바람 따라 꽃향기가 나를 취하게 하는구나.
        
조신, 애써 듣지 않으려 하나 기어이 여인의 소리에 지고 만다. 여인의 소리를 쫓아 무대를 헤맨다. 여인을 찾는다. 조신, 무엇엔가 취한 듯 절벽을 기어 올라가 꽃을 꺾어 여인에게 바친다.
  
조신     그대는 누구시오? 하늘에서 내려와 잠시 쉬어가는 선녀련가! 그 누구시기에 이토록 눈부신가! 그 음색 옥구슬 같고, 그 자태 춘풍의 꽃과 같구나! 붉은 입술, 옥같이 흰 얼굴, 꽃분홍 옷자락 펄럭일 때 이 가슴도 함께 출렁이네.

다가서서 꽃을 건네는 조신, 수줍은 듯 받아든 달례. 두 사람의 만남은 머지않아 거대한 바라 소리를 동반한 낙산사 재 행렬의 소음에 묻혀 버린다.

#1막 1장
(세월의 흐름) 재가 시작되는 불탑 앞. 젊은 스님들이 둘러서고, 태수 가족일행과 용선대사, 회색 장삼에 금실로 수놓은 붉은 가사를 입고 법사에서 진언을 염한다. 무사 안일과 태평세월을 노래하는 합창의 재 의식에 어우러진다. 조신의 모습도 보인다.

(왈패들 1, 2, 3,)
무사안일 태평세월
보아라! 태평세월.
무릉도원 춘삼월에 
백화는 만발하고,
들에는 오곡백과
푸른 물에 세월도 잠기네!
세달사 깊은 골 풍요로운 인심
새소리 바람소리
물처럼 흐르고 산처럼 치솟아,
에헤라 절씨구 우주 삼라만상
강처럼 흐르고 산처럼 푸르러,
내 뜻대로 못할쏘냐?
인간 속세 주무르고 
풍년을 기약하리. 
떠난 임을 불러오리?
하늘은 푸르고 드높구나!
보아라! 하늘은 푸르고 푸르다.
평화로다, 평화로다, 무릉도원 평화로다. 

이 단조로운 합창은 1막1장의 끝까지 이어지고, 부분 장면들이 겹치어 진행된다. 시녀를 데리고 모친과 함께 재의 뒤 행렬로 들어서는 달례의 모습. 달례를 발견하고 놀라는 조신. 자신의 신분도 잊은 채 재 행렬에서 이탈한다.  
따라 나오는 평목.

조신     꿈이런가, 생시런가? 꾸지 못할 꿈이런가? 이 마음을 어찌 하리? 세달사 농장 그 편하고 좋은 자리 마다하고, 낙산사에 들어온 지 작년 이 맘때라. 꽃구경 온 그댈 본 후 깨어서는 그대 생각, 잠들어서 그대 꿈을 꾸니 무엇이 이리 사람을 어리게 하는가? 왜 이리 가슴은 저려오는가. 어이 하리, 어이 하리, 수행자인 몸으로 어찌 그대를 탐하리? 무슨 인연 무슨 심보로 아리따운 그녀를 네게 보냈는가? 꾸지 못할 꿈이런가? 아름다운 그 자태 꽃에 비길까, 선녀에 비길까, 어이할꼬? 이내 마음 걷잡을 길 없어라.

평목, 이를 지켜보다,

평목     무슨 소리야? 태수 나리의 달례아씨를 어찌 알고 수행자의 몸으로 경거망동하느냐! 행여, 용선대사님이 아시면 어찌하려고…….
조신     작년 이 맘때 거북제 산에 올랐을 때, 그때 처음 꽃놀이를 나온 아씨를 뵈었지. 하늘에서 내려온 선녀 같았어! 그때만큼은 불도를 닦는 중인 것도 잊어버렸어!
평목     그만 접어. 더구나 달례아씬 화랑 모례와 혼인을 약조한 몸일세. 오늘 그 축원도 함께 겸하는 행사일세. 문마다 淨濟所라 써 붙인 종이가 안 보이는가? 마음을 가다듬게. 구도자로 여색을 탐하다니 아니 되네. 아니 되네. 나무관세음보살.
조신    그럴 수는 없네!
평목    어허, 이 사람 일 낼 사람이구먼?
조신     무슨 인연 무슨 심보로 아리따운 그녀를 내게 보냈는가! 어찌 다시 떠나보내리? 이럴 수 없어. 보낼 수 없어. 이내 인연  사사로이 보내지 않으리. 이내 마음 다할 때까지.

위 상황을 한 쪽에서 지켜보는 용선대사.
(왈패무리)

왈패 1  ‘세속의 꿈’ 위태롭다, 위태로워. 중생의 몸으로. 
왈패 2  사랑의 눈을 떴으니. 천지만물 봄이면 피었다 가을겨울 시드난데,  근심 사고 위태 사고 애욕을 부르네! 
왈패 3   불도자의 몸으로 세속의 꿈 탐욕을 꿈꾸네! 자고로 아름다움 애증 키워 갈등 파급이라. 세속 향한 미련 버려 무위 두어 열반합쇼.
왈패 1, 2, 3 사랑이 근심 사네. 사랑이 두렴 사네. 욕망이 근심 사네. 욕망이 두렴 사네. 집착이 근심 주고, 집착이 두렴 주네. 생사 인연의 흐름을 어찌어찌 거스를까.

왈패들 소리 실랑이를 벌이는 가운데, 용선대사의 지팡이가 조신의 머리를 사정없이 내리친다. 암전과 정적.

#1막 2장
부싯돌이 번쩍이더니 조용히 향불과 촛불이 살아나면서 무대가 차분히 밝아진다. 용선대사는 불상을 향해 미동도 없이 앉아있고 그 발치에 조신이 엎드려 있다. 낮고 굵은 용선대사의 염불소리 조신의 흐느낌 같은 하소연과 넋두리.  
  
조신      어찌 하면 좋습니까? 달례아씨 혼사라니요. 어찌 합니까. 어찌 합니까? 저는 이대로 인연을 접을 수 없습니다. 달례아씨와 연분을 이루지 못한다면 이 세상에 살 수 없습니다. 축생도에 떨어지더라도 달례아씨를 따르겠습니다. 새가 되어서라도. 뱀이 되어서라도.

용선대사 조용히 염주를 굴리며 기도한다.

용선대사 그것도 노상 마음대로 안 될 것을. 그만한 인연이라도 없으면 그렇게도 안 될 것을.
조신     그러면 소승 사또 따님을 단칼로 죽여 버리고, 소승도 그 피 묻은 칼로 죽겠습니다.
용선대사 그것도 노상 마음대로 안 될 것을.
조신     어찌 하여서 안 됩니까? 금방 이 칼로 이렇게 목을 따면 죽을 것이 아닙니까?
용선대사 목이 따지지도 아니 할 것이어니와, 설사 목을 따더라도 지금은 죽어지지 아니할 것이다. 네 찌그러진 모가지에 더 보기 흉한 칼자국 하나만 더 내고 너는 점점 사또 따님과 인연이 멀어질 것이다.
조신      그러면 소승은 어찌하면 좋습니까? 시님, 자비심을 베푸사와 소승의 소원을 이룰 길을 가르쳐주옵소서.

조신, 오체투지로 엎드려 이마를 조아린다. 용선대사, 염주를 넘기고 말이 없다.

조신     시님, 법력을 베푸사와 소승의 소원이 이루어지도록 하여 주시옵소서. (수없이 조아린다.)
조신     달례아씨와의 인연으로 어떠한 악보도 달게 받겠습니다. 일 년이 멀다 하면 한 달만이라도, 한 달이 안 된다 하오면 하루만이라도, 하루도 분에 넘친다 하오면 이 밤이 새일 때까지 만이라도, 자비를 베푸소서! 소승의 소원 이뤄주옵소서. 맺은 인연으로 어떤 악보도 달게 받겠나이다. 부디 이내 소원 이내 마음 이루어주옵소서.
용선대사 오냐, 그래라. 네 소원이 이루어질 것이다.
조신     금생?
용선대사 바로 사흘 안으로.
조신     네? 사흘 안으로? 소승이 달례 아씨와 연분을 맺습니까?
용선대사 오냐, 태수 김 공이 사흘 후 이 절을 떠나기 전에 네 소원이 이루어질 것이다.
조신      시님, 그게 참말입니까? 어리석은 소승을 놀리시는 것 아니시겠죠? 소승이 백번 죽사와도 이 은혜는 잊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용선대사는 또 한참을 염주를 세이더니, 손으로 무릎을 치며.

용선대사 조신아!
조신     네! 시님
용선대사 (염주를 조신, 무릎 앞에 내던지며) 네, 꼭 내 말대로 하렸다.
조신      네, 물에 들어가라시면 물에. 불에 들어가라시면 불에라도. 팔 하나를 버리라시면 팔이라도. 다리 하나를 자르라시면 다리라도.
용선대사 그러면 너 이제부터 법당에 가서 관음기도를 시작하는데, 내가 부를 때까지 나오지도 말고 졸지도 말렸다.
조신     네, 이틀 사흘까지라도.
용선대사 어서 가서 목욕하고 새옷으로 갈아입고 관음전으로 들어 가렸다.
조신     그러면 소승의 소원이 이뤄지는 것이옵니까?
용선대사 어허! 믿지 않는 놈이로고! 의심을 버리고 관음전으로 가거라! 어서.

#1막 3장
관음상 앞에 홀로 앉은 조신, 어둠침침한 등잔불 하나 비춰진 관음전 안. 채비를 갖춘 조신, 정갈히 옷고름을 맨다. 문을 나가는 용선대사의 마지막 경고의 소리와 함께 크게 과장되어 들리는 자물쇠 잠기는 소리. 조신의 불안하면서도 절실한 염불소리가 이어지는데. 코러스, 갖가지 형태의 캐릭터로 설정되어서. 어린 동자승, 도깨비 왈패 등이 조신을 야유 실험한다.  

(합창)
어허, 땡중 신세로 사랑이라니.
사랑이로다! 사랑이로다!
어찌 그 모양새로
선녀 같은 아씨를 넘봐.
외꺼풀에 치켜뜨는 눈 좀 보소. 
모로 앉은 굽은 저 등은 어떻고. 
비뚤 삐뚤 코도 비뚤,
걸을 땐 어떻고.
저 꼴 보소. 저 꼴 보소.
누군들 낭군 삼으리?
고놈의 상판 떼기
어디다 내놓으면, 
누군들 데려갈까.
몸뚱이가 비뚤어져,
마음은 성할 손가.
마음 잡아야 몸을 바로잡지.
아서라, 말어라.
땡중 신세에 여색을 탐하다니.

도깨비들의 장난에 깔깔대는 어린 동자승 등장. 함께 야유를 퍼붓고 시험한다.

(어린 동자승 합창)
거짓말 거짓말이지.
아무리 기도한들
어여쁜 아씨가 어찌 쳐다보기라도 하나.
대사님이 시험한 거지.
놀리는 거지, 놀리는 거지.
믿을 말을 믿어.
믿을 말을 믿어.
어떻게 아씨와 맺어지길 바래.
꿈을 깨라.
포기해라.
접어라, 두어라.
아서라, 말어라.

왈패 1    사랑이 원수로구나. 사랑이 원수로구나! 그 마음이 괴롭구나! 그 모양새 처량쿠나.
왈패 2   그것은 오래 가지도 않지. 세속의 끈을 놓아라. 후세 그 업장을 어찌 받으려고. 하지만 어쩌면 모르지, 기적이 일어날지도. 절망은 아직 이르지, 그래 아직 일러. 기다려 봐라. 아니야, 아니야. 더 큰 죄를 어찌 받으려고.
왈패 3   할 수 있어. 할 수 있어. 밀어 붙여. 밀어 붙여. 아니야, 아니야! 박차고 나와. 박차고 나와. 대사께 참회하고 잊었다고 고해. 어서어서 용서를 빌어. 한 순간 눈멀었다고, 잊었다고. 속세의 고통을 어찌 감당 하려오. 속세의 고통을 어찌 감당하려오.

점차 염불소리가 크고 거칠어지는데…….

조신    안 돼, 이대로 포기할 수 없어, 절대로!  

조신의 외마디 소리와 함께 들고 있던 목탁이 부러져서 바닥에 뒹군다. 엎어지는 조신. 주위는 조용해진다.

#1막 4장
달례. 중앙의 관음전 동상 뒤를 넘어서 쓰러져 있는 조신에게 조심스럽게 다가오는 달례.

달례    (조신을 깨우며) 함께 이곳을 떠나요, 어서요! 서두르세요.

조신. 어리둥절한 가운데 그녀와 함께 관음상 너머로 도망을 친다. 멀리 두 사람을 부르는 태수와 용선대사의 목소리. 두 사람의 목소리는 조신과 달례가 도망치는 동안 계속해서 반복적으로 들린다.
두 사람이 도망간다. 왈패들이 갖가지 형태로 집요하게 방해하고, 평목이 나타나서 두 사람의 도주를 마무리한다.

왈패 1  속세의 징검다리 유료일세! 유료일세! 그냥갈 수 없지.
왈패 2   세속의 인연 따라 중생의 몸으로 도망가네! 도망가네! 수행자가 여색을 탐했네.
왈패 3   그 욕망이 끝이 없네! 여우의 유혹에 넘어가네! 넘어가네! 저 죄를 짓고도 어찌 면할 수 있으리.
왈패 1   도망가는 곳에, 숨는 곳에, 그 죄 도리어 커 가리. 세속의 꿈 키워 도망가네. 도망가네. 세상만사 그리 쉽지 않지. 그 고통을 어찌 감당하리! 의혹과 미혹 속에 일으킨 망상의 그물을 찢고서 애욕의 불안한 흐름을 어찌어찌 거스를까. 어디메오! 어디메오. 세속의 길 그냥 갈 수 없지.
왈패 1, 2, 3 유료일세, 유료일세! 무엇을 얻고, 무엇을 잡으리. 세상은 쉼 없이 불타고 있나니, 어지러운 사바세계 의지할 곳 없어. 어라 어라, 어딜 가시나. 그냥 갈 수 없지. 그냥 갈 수 없지. 어디로 갈까, 어디로 갈까? 이 쪽 저 쪽, 어느 천지 갈길 멀어. 아서라, 말어라, 부질없는 놀음이라.
평목     어허, 저놈 보소! 너희들은 점점 어둠 속에 덮여 있구나? 눈 뜨고 어서 꿈을 깨라. 눈 뜨고 어서 꿈을 깨라. 중생의 꿈속에서는 육도의 굴레라! 기꺼이 빈 배를 얻어 탄 채 세상 인연을 따르네 그려, 눈 뜨고 나면 꿈꾸던 대천세계 구름처럼 흘러가련만. 어허, 이놈 봐라! 네 기어이 일을 냈군 그래! 이 못난 녀석이 어디 그런 기운이 있었어? (평목이 달례, 조신을 번갈아 보며 껄껄 웃는다) 기왕 세속의 짐을 지려거든 잘 살아야 하네 .(평목. 어깨에 걸쳤던 보퉁이를 내려서 조신 앞에 밀어내며) 엇네. 노 시님이 보내시는 걸세.
조신    그게 무엔가?
평목    풀어보면 알지,
조신      (열어보며) 법당에 벗어 팽개친 칡베 장삼과 붉은 가사를 보내시다니.
평목     시님께서 돌아오고 안 돌아오고는 자네 마음이나 이걸 꼭 몸에 지니고 다니라 이르셨네. 지금은 몰라도 꼭 쓸 날이 있으리라 이르셨네. 재미나게 살게. 내 사또 뵙고 자네들이 하슬라 쪽으로 가더라 거짓말을 하여 줌세. 사또도 사또지 이제 저렇게 된 것을 다시 붙들어 가면 무얼 하시겠나. 이곳은 곧  태수 일행이 닥쳐올 것이니 반대편 길로 들어서게, 어서. 예끼놈들, 어서 길을 내줘라. 어서 어서!
조신    고마우이, 평목이 고마워.
어린 동자승 (왈패도깨비 길을 내주며) 예!
평목     용선대사의 각별한 배려일세, 어서 서둘러 이곳을 떠나게. 되도록 세달사에서 아주 먼 곳으로 말일세.

조신, 달례 눈물 훔치고 암자를 향해 합장.
          
#1막 5장
평목이 떠나자 어둡고 혼란스럽던 무대는 밝고 광활한 태백산 기슭, 물 좋고 바람 좋은 깊숙한 곳에 터를 잡은 두 사람의 보금자리로 바뀐다. 개도 말 같이 크고, 송아지, 큰 소, 지붕 위 호박 넝쿨이 평화롭다.

조신     세속의 뜰, 내 이런 날을 맞이할 줄 꿈엔들 알았으랴! 그 누구의 은덕인가? 관세음보살님 덕이야, 산신님 덕이고. 옥 같은 달례아씨를 아내 삼아 백년해로, 뭘 더 바라리오. 수행자의 몸으로 그대를 꿈 꿨으니. 이 행운 다 그대 은덕이요         공이로다.
달례     그대를 믿고 따르던 그때 이 맘 또한 매 한 가지지요. 이 뜻 하늘의 뜻, 보살님 은덕, 산신님 덕이지요.
조신     굽어본 세상 인연 굽이굽이 은혜라. 이제 구름도 달도 해도 모두 우리 것이라. 꽃이 진 들 슬프리오! 새가 운 들 슬프리오. 그대 있으매 백년 시름 다 잊으오.
달례    긴 바람, 긴 한숨소리, 이제 다 거두시어요.

두 사람 다정히 안고, 곧 이어 그들을 맞이하는 마을 사람들의 합창이 축제처럼 이어지고. 신방으로 드는 두 사람. 
아이들에 대한 일화들 노래로 미륵, 달보고, 칼보고, 거울보고. 마지막에 다시 합창으로 발전.

(마을 사람들 합창)
한 쌍의 원앙이라.
꽃 같은 신부 맞아
부러울 것 무엇이라.
심산유곡 산수초목 마련하고,
일월성신 마련하고,
하나로 인연 일궈,
부부인연 세웠네.
마주 떠도는 구름도 산도 오늘은 어우러져 두둥실
태백산 자락 깊은 기슭
산허리 돌아가는 구름도 쉬어가고,
해도 달도 흥겨이 쉬어가네.
어허라! 어허라! 
부러울 것 없네.  
이렇게 한 세상 굽이치누나.
에구! 잘났구나?
에구에구, 잘 났어.

이웃 1   에구에구 잘났어. 첫 아들이 났다. 아, 그 꿈에 미륵님을 보았다 하여 그 이름이 ‘미륵’이라. 어허 절시구, 날시구, 어절시구라.
이웃 2   어허 절시구 잘났어!  살림 밑천 큰딸이라. 아! 그 꿈에 달을 보았다지 그 큰 둥근달을. 허여 그 이름 ‘달보고’라.
이웃 3   “경사가 겹겹이네 어허 절시구. 아! 글쎄, 셋째 또 아들이라, 이 아들 그 꿈은 번뜩이는 칼을 보았다 하여 그 이름 ‘칼보고’라.
이웃 4   짝을 맞춰 넷째 또 딸을 낳았것다. 그 생김새 거울처럼 맑다 하여 그 이름이 ‘거울보고’라 하였네.

(이웃 사람들 흥겨움에 젖어)
경사로다, 경사로다. 
부족함이 무엇이라. 
어여쁜 색시 얻어
아들딸 짝 맞춰 다복한 가정 이뤘으니.
무엇인들 부러우랴.
이내 풍요로움 돈 주고 사리.
이내 사랑 일심으로 믿고 따르니.
그 무엇에 비하리.
에헤라 좋을시고.
백년해로, 늙음과 죽음이 두려우랴.
세세풍년이로다.

조신     세달사 떠나온 지 어언 십여 년, 무슨 두려움이 있으리. 무엇 하나 부러울 것 없으니, 내 꽃 같은 그대와 자식이 넷이라. 듬직하고 의젓한 아들이 둘이라. 옥같이 어여쁜 딸이 둘이라네. 부러울 것 없소 마는 다만 한 가지 그대와 나도 막을 수 없는 늙음이라. 꽃 같은 그대 눈가에도 잔주름 일고, 그 희고 백옥 같던 살에 빛도 줄었구려!
달례     이제 더 이상 무얼 바라리오. 아픔과 늙음 죽음 그 무엇도 두렵지 않구려. 당신이 늘 곁에 있으니 말이오. 이대로도 충분히 행복하지요.
조신     내 그 꽃다움 돌려주리다. 내 용을 다려주고 산삼도 캐오리다. 서로 그 늙어감을 안아주고 나눠가지리오. 안아주고 달래주고 나눠가지며 이대로 오래오래 살아봅시다 그려. (조신, 달례 두 사람 다정히 돌아서 퇴장.)


# 1막 6장
나른한 어느 오후 . 낮잠을 자고 있는 조신. 조신의 드르렁거리는 콧소리 집 안팎까지 요란하다. 평목이 그를 깨운다. 놀라는 조신.

평목     어허, 팔자 늘어 졌소 그려. 이보게 조신이, 그 코고는 소리 꼭 대갓집 머슴이네. 그 코고는 소리에 구만리 모례도 찾아 들것네 그려.

조신 일어나며, 짓궂은 평목의 농에 속도 모르고 즐거워하는 가족. 점차 격앙되는 조신, 눈빛이 예사롭지 않다.

평목      어찌 이 상판으로 저리 아리따운 달례아씨를 녹였을고꼬. 세상 알다가도  모를 일일세 그려. 그런데 아무튼 부럽네 그려. 참 재미나게 사시는구려.
조신     재미가 무슨 재미요 부끄러운 일이지. 그런데 이곳에 평 시님이 어인일로?
평목     지나던 길에 우연히 들렀소. 어허 재미가 무슨 재미? 그럼 나하고 바꾸려오?
조신    (불끈하며, 벌떡 일어나 앉으며) 바꾸다니?
평목     아니, 나는 이 집에서 재미나게 살고, 시님은 나 모양으로 중이 되어서 떠돌아 다녀보란 말이오.

속도 모르고 즐거워하는 조신 가족 퇴장.

조신     에잉. 원, 아무리 친한 처지라 해도 할 말이 따로 있지. 농담이라 하시오? 그게 다 무슨 소리란 말이오?

노여움에 입맛을 다시며 오가는 조신.

평목      너무 노여워 말게. 자네 이 행복이 오래 지속하고 싶거든. 내 그동안 모례 화랑이 자넬 십오 년이 지난 오늘에도 찾고 있는 걸 봤네. 어디 내 입에서 말 한 마디만 나와 보오. 흥, 재미나게 살겠소. 모가지는 뉘 모가지가 날아가고? 강물은 제 곬으로 가고, 죄는 지은 데로 가는 거야! (평목이 침을 탁 뱉고) 모례가 지금 어떻게 자네를 찾고 있는 줄 알고. 한 순간에 깨질 수도 있는 물거품 같은 행복일세! 알잖는가? 모례 화랑 말야! 칼 잘 쓰고 말 잘 타기로 서울까지 이름난 화랑. 한 번 먹은 뜻은 변함이 없고, 한 번 맺은 의를 끓는 법이 없으니, 모례가 십 오년이 지난 오늘에도 달례를 찾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닌가? (평목은 가슴을 내밀고 고개를 젖힌다.)
조신    그저 다 잘못했으니 살려만 주오.
평목      허흠 으음! 그러면 내가 자네와 같이 사는 부인이야 어찌 달라겠소마는, 아까 보니 예쁘장한 게 보아하니 큰 딸 달보고가 어지간히 쓰겠습디다. 
조신    (토끼눈을  뜨고) 무슨 농을 그리 하오? 아직 그 어린 걸.
평목     어허! 어리기는 열다섯이 어리오? 내 먼 길 오느라 피곤하니 오늘은 이만 자야겠소.

헛기침을 하며 방으로 들어가는 평목, 안절부절 마당을 오가다 들어가는 조신. 깊은 밤 평목과 나란히 누워있는 조신, 잠을 이루지 못한다. 
밖으로 나와 안절부절 못하는 조신.  

조신     내 어찌 이룬 꿈인데 한 순간에 잃어! 누구도 이 꿈을 깰 수 없어! 어떻게 맺은 인연인데. 무너지게 놓아둘 수 없지. 어미를 닮아 어여쁜 내 딸 달보고를 내놓으라니. 능구렁이 같은 평목에게 그 아이를 주다니. 차마 못할 일이지, 차마 못할 일이지. 살려두어서는 안 돼! (도깨비들 놀리고 부채질한다. )
왈패 1   안 되지 안 되지 안 돼. 죽여! 죽여! 안 돼, 사람을 죽이다니 안 되지, 안 되지.
왈패 2  아니야! 아니야. 없애버려, 없애버려! 그래야 편하지 안 그러면 그 입을 어찌 막아. 한 순간에 풍비박산이다. 죽여라, 죽여라 어서 어서.
왈패 3   잠이 든다. 잠이 든다. 잠든 틈을 타 없애라. 어서어서. 목을 조일까, 도끼로 내려칠까.
왈패 1   이래도 저래도 안 죽으면 큰일이다. 어허 평목 시님 잠이 든다. 잠이 든다.
왈패 3  이때다 요때다. 죽여라, 죽여라! 

조신, 방으로 들어가서 잠든 평목의 목을 조른다. 버둥대는 평목.
서서히 어두워지고, 도깨비 패거리 보인다. 

조신      내 이 행복 그 누구도 깰 수 없어. 누구도 위협하게 놓아두진 않아! 세달사 깊은 골 중놈 신세 보잘 것 없는 나를 세상 가장 귀히 봐준 하늘이 주신 선녀를 안았거늘 어찌 이 행복을 깨. 내 그리 할 수 없지. 안 되지, 안 돼! 억 겹 인연의 업보를 이제 또 다시  진다한들 그리 할 수 없지. 그리 할 수 없지.

조신, 전신의 땀을 흘리며 이를 떨고 있다. 도깨비 왈패들의 참견.

왈패 1  어 저놈, 보기보다 무서운 놈일세!
왈패 2   억 겹의 업보를 다 어쩌려고 사람을 죽여. 수행자로 지아비로 세속의 꿈 지키려다 어이 할거나 살생을 하였네.
왈패 3  새벽이 오기 전 어서 감춰, 어서 감춰. 날이 새기 전 꼭꼭 감춰.
왈패 2  그런다고 죽은 사람이 돌아오나 돌아와. 일 났다 일 났어.
왈패 3  겹겹이 근심이라. 그 죄를 어찌 감추려고.

#2막1장/동굴 앞
조신, 힘겹게 평목의 시체를 동굴로 밀어 넣는다. 주변을 살피고 나서 주저앉아 합장하는 조신. 달빛이 황량하다. 패거리 숨죽이고 지켜본다.

조신     이 모든 게 자네 업이니, 부디 이 몸 원망 말고 시주하듯 잘 가시게. 이제 이 내 몸도 불자도 내던지고 욕심의 늪에 헤매는 속인으로 살 수밖에. (조신, 그대로 누워 서서히 잠이 든다.)
도깨비 왈패 1, 2, 3 나무 관세음보살. 헤헤헤, 되는 대로 가보세!

#2장 2장/마을 어귀
마을 우물가의 사령이 사람들을 모아 놓고 방을 읽는다.

사령     에헴, 내일 해저녁에 고을 원님께서 이 마을로 사냥을 오신다네. 이번 사냥엔 평사 벼슬을 지내시는 지체 높으신 손님도 함께 하실 예정이네. 채비에 소홀함이 없어야 하네. 그래서 말이네만, 사냥 뒤에 나으리가 묵으실 거처가 필요한데, 누구 없는가?  
조신    (나서며) 내가 맡겠네?
사령    자네가?
조신      우리 집이 그 중 위쪽 아닌가? 한갓져서 번거롭지도 않고, 사냥터도 가까우니 어떤가?
사령     음, 그럼 그리 하세. 자, 모두 채비들 하세. (사람들, 흩어진다. 달래가 조신을 끌고 한쪽으로 가서.)
달례    당신 미쳤소?
조신    뭐가?
달례    고을 원님이란 말이오.
조신     허허, 그러니까 내가 나섰지. 잘만 하면 상도 줄 거고, 또 알아?  나중에 고을 아전 자리라도 하나 받을 지.
달례    두렵지도 않소?
조신    뭐가? 우리가 뭐 죄졌나?
달례    참말 큰일 나겠소.
조신     허허, 이런 참. 우리 잘난 아이들이 평생 이런 궁색한 산골에서 살아야겠소? 우리도 한 번 남들처럼 보란 듯이 살아 볼 때가 되지 않았냐 말이오. 이건 우리 두 사람한테 다시 없는 기회란 말이야.
달례    나는 내키지 않소. 그냥 이대로 조용히 사는 게…….
조신     그 동안 십 몇 년 이리 살았으면 충분하지 뭘 더해. 난 더 이상 이 산골에선 숨이 막혀 못 살겠소. 아이들은 커 가고, 나이는 점점 들어가고, 허허 장부의 삶이 이런 산골에서 썩어서야. 어험.
달례    여보.
조신     아 뭐해. 얼른 들어가서 준비하지 않고. 가만 내가 이럴 때가 아니지.  (뛰어나간다.)
달례    여보, 어디 가요?(쫓아 나가며 암전.)

# 2막 3장.
비 오는 한밤중  동굴 앞. 빗속 어둔 밤. 동굴 근처로 삽자루를 든 조신이 조심스럽게 접근한다. 도깨비 왈패 지켜본다.
        
왈패 1  이 밤에 여기가 어디라고 와.
왈패 2  그러게, 칠흑 같은 이 밤에 비까지 내려.
왈패 3  내 숨소리에도 겁에 질리는데 말이여! 
왈패 1  불안해 견딜 수 있간디. 꼭꼭 묻어야지, 꼭꼭.
왈패 3   한 번 놀래켜 볼까나. 이제 막 제삿밥 한 그릇 챙겼더니 배도 부르고.
조신    송장 썩는 냄새로 보아 여기가 분명한데. 허허 왜 이리 발이 안 떨어지누.
왈패 1  사시나무 떨 듯 덜덜 떠는 조신의 발목 잡아라. 
왈패 2  검은 나무 머리 풀고 나뭇잎 곡을 한다.
왈패 3  삽자루는 왜 매고 기어오느냐.
왈패 1, 2, 3 게 누구냐! 이히히히히히. 저 중생이 누구냐! 이히히히히히.
왈패 3  너 이놈! 나를 찾느냐?

다가서는 도깨비 1. 승복을 입은 채 바랑을 맨 모습이 꼭 평목이다. 동굴 앞 나무에 벼락이 떨어지고 나무가 쓰러진다. 조신 기겁을 해서 도망을 간다.  
패거리 웃음소리 잦아들면 암전.

#2막 4장/산중 사냥터 
아침 햇살이 눈부신 가운데 사냥이 시작된다. 조신이 앞장선다. 메아리 같은 사냥꾼들의 소리가 여기저기서 이어지면서 사냥이 시작된다. (사냥패거리 도깨비 왈패가 사냥 꿩의 모습으로 변형해도 무방.)
거리, 징소리 간다. 북소리 뜬다. 꽹과리가 요동친다. 포수가 오고, 창꾼이 뛰고, 말 탄 원님 등장.

사냥패거리 1, 2, 3, 4 허라차 날도 좋다. 어허라차 사냥꾼 간다.
원님     꿩이 제철이니 몰이꾼들은 꿩 사냥으로 가고 우리는 노루나 사슴이 어떨까 하오만.
모례     사슴 하나를 상으로 하고, 멧돼지 두 마리를 품으로 해서, 후에 잔치를 베푸심이 어떨지요.
원님    그거 좋은 생각이오.
모례    사슴 목에 술이 석 잔입니다.
원님    좋소, 하하하.

노루가 숨고, 장끼가 뛰고,  토끼가 날고, 멧돼지 긴다. 꿩 한 마리 푸드덕 날면  온 하늘에 화살이 난다. 꾀꼬리는 소리도 없고  굴 속 여우 꼬리가 없네! 산짐승 들짐승 숨을 막고 온 산 가득 사냥꾼 휘저어 간다.

사냥꾼   사슴이다. 저 앞 쪽 솔숲에 사슴이오. 몰이꾼들은 양쪽으로 갈라서 모시오.
조신    사슴이 솔숲을 나왔소, 몰이꾼들은 앞을 막으시오.
모례    두어라, 저쪽은 가봐야 벼랑이니 앞서지 말고 쫓으라.
조신    아니, 저 눔의 사슴이 하필 왜 저리로.
원님    멈춰라!
모례    저, 동굴로 들어간 듯하오.
원님    헌데 이 고약한 냄새는?
모례    꼭 뭐가 썩는 듯한데,
원님    누가 들어가 보거라.  

사령 하나가 들어간다.  조신은 사색이 되어 떨고 있다. 사령, 비명과 함께 급히 뛰쳐나온다.

사령    소 소 송장이 있소.
원님    뭐라?
사령    저 안에 사 사람의 송장이 있사옵니다.
원님    사람의 송장? 허허! 뭣들 하느냐 어서 이리로 옮기거라.
          
몇몇이 들어간다. 동굴 속에서 시체를 끌고 나온다. 

모례     제가 좀 살펴보겠습니다. 시신이 조금 부패되긴 했어도 이건 분명 살인인 듯하옵니다. 혀를 빼문 것으로 보아 질식해서 죽은 건데, 목에 줄을 맨 자국이 없고, 여긴 줄을 맬 곳도 없소이다. 또한 행색으로 보아 중이 분명한데, 인근에는 절이 없고 갓이나 행구도 없는 것으로 보아 다른 곳에서 죽어 이곳으로 옮겨졌다는 뜻이지요. 그리고 중이 도둑을 만났을 리도 없으니, 원한으로 인한 타살로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원님    음, 역시 모례 평사십니다. 대단하시오.
모례    별 말씀을.
조신    (혼잣말로) 뭐라! 모 모례 평사. 모례, 모례라고!
원님     가만, 이곳에 시체를 옮겼다면, 예서 가까운 마을에 살고 이곳 지리에도 밝은 자이겠구려!
모례      그렇게 보입니다. 죽은 중의 행구를 찾는다면 범인을 알 수 있겠지요.
원님     모례 평사의 말이 맞소. 자 날이 저물었으니 이만 하산하고, 내일 날이 밝는 대로 마을 사람 모두를 모이게 하라.
모두     예.
원님     또한, 사령들은 마을 밖으로 경계를 세워 누구도 마을을 나가지 못하게 하렸다.
사령들  예.
원님    갑시다.(일행들 퇴장, 뒤 따르던 조신이 홀로 빠져 나온다.)
조신    허허. 평목의 송장에 모례까지. (암전)

# 2막 5장/사랑채 뒤.
한밤중 .조신, 생각에 잠겨 초조하게 서성이며 혼잣말로 중얼댄다.

조신    행구만 없애면 되는데, 갓하고 바랑하고 지팡이가 남았을 건데. 사랑방 벽장 속에 있는 평목의 행구만 없애면 아무도 모를 텐데, 근데 하필 원님과 모례가 사랑방에. 허허 내가 무덤을 팠구나! 팠어!
동자    뭐가?
조신    사랑방 벽장을 파는 거야.
도깨비  정말?
조신    제 무덤도 판 놈이 이깟 벽장 하날 못 팔까?
허깨비  쥐새끼처럼?
조신    목숨이 걸렸는데, 쥐새끼가 대수야? 

조신, 살금살금 사랑방 벽장 뒷벽으로 걸어간다. 사랑방에 잠든 원과 모례의 코고는 소리가 낮게 들린다. 패거리 따라간다.
패거리들 살금살금 다가간다. 사랑채로 다가간다. 벽장 뒷벽 뜯어내고  중의 행구를 꺼낸다. 뒤꿈치 들고 종종걸음 그림자로 다가가서 쥐 쏠듯이 벽을 파서 중의 행구를 꺼낸단다. (사랑채 뒷벽에 다가간 조신, 벽에 귀를 대고 잠시 살핀다. 코고는 소리만 들린다.)

조신     온 종일 사냥을 했으니 깊이 잠이 든 게 틀림없어. (조신, 작은 칼로 조심스레 뒷벽을 파내기 시작한다. 처음엔 조심스레 하다가 이내 리듬을 탄다.) (신이 난다.)
조신     됐다. 헤헤.(바랑을 잡아당기는데 덜컹하고 밥그릇 구르는 소리가 들린다.)
원님    (안에서 소리만) 어험.
모례     (안에서 소리만) 거, 벽장에 쥐가 있나 보오. (조신, 한 팔을 어깨까지 뒷벽 구멍 속에 넣은 채 엉거주춤한 자세로 굳어 있다. 패거리도 숨는다.) ( 사이)
도깨비  더 뚫다간 들통날 걸!
조신     (조심스럽게 팔을 빼내서) 더……  더 하다간 내가 놀래서 먼저 죽겠다. 조금만 더 뚫고. (다시 벽을 뚫기 시작한다.)
        
부스럭, 찍, 긁는 소리. 콩콩, 폭폭, 뚫는 소리.

원님     (안에서 소리만) 어허 그것 참…….
도깨비패 바랑끈은 잡았는데 저런 지팡이도 딸려온다. 과부신세 꼬이듯이 지팡이에 엉켰구나! 
모례     (안에서 소리만) 쥐새끼가 바람이 났소.
도깨비패 팔과 다리에 쥐는 나고, 벽에 묻혀 숨 막히고, 놔두자니 나중 죽고,  당기자니 지금 죽고.
패거리  에라 모르겠다. 당겨보자.
조신    나무관세음보살, 이 놈 조신이 살려주오!

한 번에 용을 써서 바랑을 당기는 조신. 바랑끈에 걸린 지팡이도 딸려 오면서 뒷벽이 통째로 뜯어져 조신의 위로 쓰러진다. 조신은 벽에 깔리고 한 쪽 벽이 완전히 뜯겨져 나간 벽 너머로, 자다가 놀라 벌떡 일어나 앉은 원님과 모례의 놀란 모습.

원님    (고함친다) 여봐라! (암전)

#2막 6장/도망길
급박한 장단 속에 조신이 달례와 아이들을 데리고 도망치고 있다.

도깨비패 조신이가 도망간다. 조신이 또 도망간다. 다 갖자고 도망 와서  다 버리고 도망간다. 잠든 식솔 영문 몰라 아닌 밤중 홍두깨라. 우는 아이 등에 업고, 보채는 애 품에 안고. 다 큰 아들 혼쭐내고, 다 큰 딸애 손목 잡고. 맨 발에 속옷 바람 뛰는 아낙이 처량하구나!
달례     (멈춰 서서) 갈 때 가더라도 무슨 일인지 알아야 가지요. 덮어놓고 쫓아온다니, 대체 누가 쫓아온다고 그래요, 이 밤중에.
조신     누군지 몰라서 묻는 거야. 우리를 해할 사람, 한 사람 밖에 더 있어?
달례    그럼……. 모례가 왔소. 어제 온 평사가 모례란 말이오? 
목소리 1 저 놈 잡아라!
목소리 2 살인하고 도망갔다.
목소리 3 도망간 조신이를 잡아라!
조신    으이그, 내 팔자야!
           
멀리 동이 튼다. 아이들은 제각각 쓰러져 잠들어 있고, 달례는 넋이 나간 듯 앉아 있다. 우뚝 솟은 바위 곁을 조신 혼자 서성댄다.

달례      (사이. 바위를 가리키며) 저 바위…… 우릴 내려다보는 게 꼭 미륵을 닮았어요. (사이) 아직도 더 남았소?
조신     무슨 소리?
달례     미련 말이오? 그 동안 우리 둘 이만큼 잘 살았으면 그만 아니오. 지금이라도 죄를 고하면 불쌍한 이 아이들은 무사하겠지요.
조신    허허 쓸데없는 소리…….
달례    평목 스님 해한 거 처음부터 알고 있었어요.
조신    허허 참!
달례    미리 단속 못한 내 탓도 있다 생각했지요.
조신    누구도 내 복을 뺏을 수는 없지. 평목은 물론이거니와 모례도 마찬가지지.
달례    그 사람은 다르지요.
조신    뭐가 달라?
달례     이게 다 처음엔 그 사람의 복이었지요. 그걸 우리 두 사람이…….
조신     닥치지 못해. 내 평생 꿈속에서조차 짐이 되어 따라다니던 게 그 잔데, 이게 그 자의 복이라니…….
달례     단 하루만 살아도 좋다고 하지 않았소, 그런데 이제 와서 어떻게 그런 말을…….
조신     오호라! 이제 보니 후회하고 있었구만. 그렇겠지. 나 같이 볼품없는 산골 땡중보다야 저 잘난 평사가 백 번 낫겠지.
달례    어찌 그리 모진 말을……. (모례가 일행을 거느리고 나타난다.)
모례    멈춰라!
조신    (떨어지며) 허!
달례    모례님!
모례    네 이놈 조신아. 네 아직도 죄가 부족하더냐?
조신    그런 게 아니옵고…….
모례    저 놈을 당장 포박하라!
일행들  예. 
(암전)


#2막 7장/고을 관아
옥에 갇힌 조신 홀로 앉아 있다.

조신     그 어디서 멈춘 시간 날 버리고 잘도 간다. 이 몸 이제 눈을 감네. 다 버리고 눈을 감네. (모례가 다가온다.)
모례     내 일찍이 평목이란 중을 통해 자네와 달례아씨를 찾으려 했었다네. 입은 닫고 있으나 자네가 있는 곳을 아는 듯 했지. 몇 달 전에 마지막으로 찾아본다 하고 떠난 뒤로 소식이 끊기고. 이에 하는 양이 괘씸하여 평목의 행적을 수소문한 끝에 이곳까지 오게 된 것일세.  못할 짓을 했네 그려. 어찌 된 일인가?
조신     우매한 중생이 저지른 일에 따로 무슨 연유가 있겠소이까? 이미 많은 죄를 지은 몸, 그저 바삐 죄값을 치루고 싶을 뿐이오.
모례    다 비운 겐가?
조신     그리 쉽게 비울 줄 아는 중생이라면 미리 가려서 담았겠지요. 그저 한 가지 이놈으로 인해 죄를 쓴 달례아씨와 이놈의 업으로 태어난 자식들에게 씻지 못할 죄로 남겨져 한스러울 뿐이오. 
모례      다시 돌아간 듯하니, 여기 자네 것을 돌려줌세. (사령이 조신의 승복을 내어주고 머리 깎을 채비를 한다.)
조신     (사령들의 도움으로 옷을 입으며) 이 몸 죽어 보잘 것 없는 미물로 다시 난다 해도 이 은혜는 못 잊으리다.
모례    자네의 모습을 원께 잘 청하겠네. 보기보다 인정 많은 사람이니 달례아씨와 자네 자식들이야 별 탈이 있겠는가?
조신    그리만 된다면 금생에서 소인이 무얼 더 바라겠나이까?
모례    자, 그럼

모례는 퇴장하고 조신은 삭발을 하고 있다. 한편에 패거리 모여든다.

도깨비 1 끝난 거야?
도깨비 2 이리 쉽게?
도깨비 3 그럼, 뭐가 더 남았나?
도깨비 1 중옷을 입었잖아?
도깨비 2 그럼, 나두 그 옷 입고 중이 되랴? 헤헤 헤헤!
도깨비 3 우리 조신한테 직접 물어보자.

조신 삭발을 끝내고 승복을 입었다. 합장을 한 채 가부좌를 틀고 앉아 나지막하게 염불을 외우고 있다.

도깨비 1 햐…… 몰라보겠는 걸!
도깨비 2 인물 났다.
도깨비 3 이 눔은 속도 없나?
도깨비 2 그러게 말야…….
패거리   헤헤 헤헤!
도깨비   조신이만 죽는 거지?
패거리   헤헤 헤헤!
도깨비 1 달례는 복도 많지.
도깨비   지지리 복도 없는 조신이…….
패거리   헤헤 헤헤! 낼 모레 조신의 목 치고 나면…….
도깨비 3 달례하고 애들은 모례를 따라가고…….
도깨비 2 불쌍한 조신이 목만 들판에서 뒹굴겠지.
패거리   헤헤 헤헤!

묵묵히 잡념과 씨름하며 버티고 있던 조신, 비아냥에 못 참고 폭발을 한다.

조신    으아아아!
패거리  깜짝이야!!
조신     그래! 내가 속은 거야! 이 잘난 승복이 뭐고, 이 잘난 삭발이 다 뭐야, 어차피 죽어 목 떨어지긴 마찬가진데.
패거리  얼씨구!
조신      달례는 미리 다 알고 있었던 거야? 평목이란 놈이 집에 와서 달례하고 속삭일 때마다 모례의 소식을 전한 거야. 때가 되고 모든 게 준비 됐을 때, 내가 평목을 죽여서 이것들이 옳다구나 한 거지.
패거리들 아하……. 절씨구! 잘 돌아간다.
조신      그리고 이제 와서 적선하듯 승복 하나 던져 놓고 편히 맘을 비우라고? 머리 깎고 달게 죄를 받으라고? 어허 이런 죽일 놈들이 있나?  
패거리   좋을씨고! 한번 밀어붙여라. 깡으로 들이 받어! 그냥 넘어가면 죽는다.
조신     허허, 내가 못나 이제야 그걸 알다니 허허, 제 죽을 날 이제야 그걸 알다니. 너 이놈 모례야 너 이년 달례야. 이리 와서 나를 봐라. 끓어 넘치는 지옥불에 같이 가야지 이놈들. 게 누구 없느냐. 이리 와서 나를 봐라.

사령들이 급히 달려오고, 뒤 따라 원이 나타난다. 멀리 삭발을 하고 승복을 입은 달례의 뒷모습과 모례의 모습도 따라 온다.)

원님     웬 소란이냐?
조신     나리. 이놈의 억울한 사연을 들어주오. 대명천지 밝은 날에 이런 원통함은 다시 없소.
원님    억울하고 원통하다? 그래, 무엇이 그러하더냐?
조신     일찍이 소인의 아내와 저는 이루어질 수 없는 연이었지요. 하오나 서로의 정이 너무나 깊었기에, 모든 굴레를 벗어 던지고 이곳까지 도주를 해서 살게 된 것입니다.
원님    그래서? 
조신    그게 다 소인의 아내로 인해 벌어진 일이 온데…….  
원님    아낙 핑계를 대느냐?
조신     그 뿐이 아니오라 저기 있는 모례 평사와 이미 모든 걸 맞춰 놓고.
원님     허허, 이놈이! 철 지난 더위를 먹었느냐, 복날 개꿈을 꾸었느냐! 무슨 헛소리를 이리도 장황하게 하는고?
조신    나리…….
원님    닥쳐라 이 놈! 그래, 네 놈이 말하던 네 아낙이 여기에 있느냐?
조신    여긴…….
원님    그럼 혹 저 여인은 아느냐?

원이 달례를 가리킨다. 달례, 천천히 조신을 향해 돌아선다.

조신     당신…….
달례     너무 원망하지 마세요. 우리 처음 만난 날도 그러하듯 길 떠나기 날도 좋소. 꽃이 피어 영영 가면 꽃 피는 게 아니듯이 우리 세월 여기까지 곱게 왔고, 다 왔구려. 남은 것은 우리 사랑 하루라도 고운사랑 피었다가 지더라도 그 정이야 변하리까? (달례, 조신에게 합장을 하고 서서히 떠나간다.)
조신    달례! 가지 마오. 잠시만 달례, 달례…….
원님     죄인 조신은 듣거라! 네 처가 삭발을 하여 네 죄를 나눠 지고, 모례 평사 또한 네 선처를 부탁한 바가 있어, 네가 승려의 몸으로 돌아간다면 불자의 몸으로 목숨만은 살리려 하였으나, 끝내 뉘우침은 고사하고 오히려 저를 살리려는 이들을 의심하고 해하려는 죄악이 극에 달했으니, 부디 원망 말라. 여봐라!
사령들  예이!
원님    더 볼 것도 없다. 지금 당장 저 놈을 끌어다가 목을 쳐라.
사령들  예이!

사령들, 조신을 끌어내고, 망나니가 칼을 들고 춤을 춘다.

조신     (끌려 나가며) 나리, 소인 아니 소승의 말을 좀 들어보시오. 소승이 잠시 귀신에 홀려…… (목을 잡히고 칼이 허공에 들린다.) 나으리 잠시만, 잠시…….  
          
칼이 떨어짐과 동시에. 
(암전) 
희미하게 쓰러져 있는 조신의 모습만 보인다.

#에필로그. 관음전
엎드려 있는 조신, 어둠 속에서 서서히 손을 더듬어 본다. 문득 깨어진 목탁이 손에 잡힌다.  조신, 서서히 고개를 든다. 달빛이 서서히 법당 안으로 번진다. 목을 만져 본다. 문득 조신이 고개를 들어 불전 앞을 보는데 관음상은 간데없고 그 자리에 달례가 앉아 말없이 미소를 짓고 있다. 그 좌우로 모례와 평목, 용선대사, 원님, 조신의 자식들의 모습이 있고 찡그린 얼굴을 하고 마지못해 앉아 있는 동자, 도깨비패거리 보인다. 놀라서 펄쩍 물러난다. 잠시 그들을 바라보던 조신 문득 깨달음이 있어 한참을 크게 웃는다. 이윽고 천천히 합장하고 절을 올린다. 조신이 절을 하고 다시 일어서면 무대가 밝아진다. 무대가 밝아지면 인물들은 간데없고 다시, 관음상의 인자한 미소로 바뀐다.



손영미: 서울예술대학 극작과 졸업. 한국방송작가협회교육원 13~15기 수료. 동랑예술센타 공연미디어아트 전문가과정 연희창작/연출과정 수료. 한국방송대학 희곡문학상 수상. 2007년 ≪리토피아≫ 희곡 신인상. 연극 「서민귀족」, 「섬」, 「겨울나무」 외. 창극 「명성황후」, 「황진이」, 「바우덕이」. 그 외 드라마 영화 시나리오 각색 및 극 연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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