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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호 초첨/김남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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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부
댓글 0건 조회 2,682회 작성일 09-01-19 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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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의 시를 다시 읽다

― 늘어나는 지역 잡지를 위하여․2

김남석|문학평론가


1. 지역의 잡지란?

지역 잡지가, 진정 지역을 대표하는 잡지가 되기 위해서는 어떠해야 하는가? 이 질문에 함부로 대답하기 힘들다. 지역의 시인을 등용해야 하는가? 아니면 각 지역의 고유 정서를 앞세워야 하는가? 지방 사투리를 동원한 시를 쓰면 지역색을 가미한 지역 잡지가 될까?

어느 가장 하나 완전해 보이지는 않는다. 너무나 많은 반론의 여지가 있기 때문이다. 가령 한 지역을 거점으로 삼으면서 지역 시인들에게 배타적 권리를 인정했던 잡지들을 보자. 그 잡지들은 차츰 그 정책을 철회하고 있다. 지역의 잡지라고 해서 타 지역이나 이른바 중앙에서 활동하는 시인들을 배척하는 것이 온당하지 않기 때문이다. 시의 발전을 위해서도 그렇고, 잡지의 발전을 위해서도 그러하다고 판단하고 있다. 지역의 시인들에게 일정의 보호구역을 설정하면서 생기는 문제점 역시 결코 작다고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반면 이에 대한 지역 시인들의 불만도 상당한 것으로 보인다. 중앙의 잡지들이 중앙의 시들을 위주로 싣고 있는 상황에서, 지역의 잡지마저 중앙의 시인들을 수용한다면 그야말로 부익부 빈익빈 현상만 가중할 것이라는 것이 반발의 요지이다.

그 해결이 간단하지 않아 보이는 두 관점은 서로 충돌하면서 더 복잡한 문제들을 야기한다. 가령 누가 지역의 시인이냐는 것이 대표적인 문제이다. 서울이 아닌 지역에 사는 사람이 지역의 시인인가? 지역의 시인 중에서도 서울에 문학적 연고를 지닌 채, 이른바 주변의 부러움을 사는 사람들도 상당하다. 그들은 지역의 시인인가 아니면 중앙의 시인인가? 만일 활동무대를 중심으로 본다면 지역 시 잡지에 실리는 서울지역 시인들의 시는 지역의 시가 되는 셈인가?

이런 문제들에 일일이 대답하기 힘들다. 골치 아픈 문제이고 민감한 문제이다 보니 지금까지는 이 문제에 대한 언급이나 단정을 가급적 미뤄왔다. 나 역시 지엽적인 문제라면 문제일 수 있는 이러한 문제제기에, 썩 만족할만한 해결책이나 대안을 제하지는 못하겠다. 다만 우리가 이러한 문제를 생각해야 할 시점이 되었으며, 중앙문단이 이를 외면한다면 지역문단 혹은 지역의 잡지들이 이 문제를 고민해야 할 시점이 되었다는 사실만은 분명히 하기로 하자.

다시 지역의 잡지 문제로 돌아가자. 지역의 많은 잡지들은 현재 전국의 시인들이 골고루 포진하는 시 지면을 꾸려나가려고 하고 있다. 이러한 정책은 이른바 형평의 원칙에 입각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구색 맞추기를 하고 있다는 의혹도 지우기 힘든 경우도, 무시하지 못할 만큼 빈번하다.

지역의 시를 읽고 지역의 잡지를 올바른 위상에 올려놓은 일은 균형과 안배의 힘에 의존하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는 생각이 든다. 모든 지역의 잡지들이 자신의 지역과 타지역을 고르게 안배하기만 하면 맡은 바 소임을 다한다고는 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자신의 지역과 문화를 가꾸고 어떤 면에서는 성장시키기 위해서 무언가 다른 조치가 필요하다고 믿기 때문이다.


2. ≪시와 사람≫(2007년 겨울)에서:시를 통해 지역을 이해하다

≪시와 사람≫ 2007년 겨울호를 읽다가 한 편의 시를 보고 잠시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이유는 그 시를 내가 제대로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세파에 시달리다 속에 불이 날 땐

푸조나무 아래로 가지

가서 나무가 꺼내놓은 그늘을 걸치지

걸치고 있노라면 열이 슝슝 빠져나가는 옷 한 벌

그 때 내가 옷값으로 지불하는 것은

그저 노거수를 안아 주는 것

껴안으면 지난 겨울 삭풍에 살이 에이고

북풍에 가지가 찢겼던 몸이 귀를 당기지

그 몸에 귀를 맡기면 들리는 나무의 말

끓는 속 타는 몸 식혀주는 이 그늘

무엇으로 씨줄 날줄을 삼아서 짠 것인지

오백년 세월 면면한 직조비법이 귓속에 고이지

폭포를 맞은 듯 정신이 번쩍 들게 하는

나무의 비법은 주저 없이 불난 속으로 쏟아지지

쏟아져 오장육부 구석구석 흘러들지

마침내는 서늘해진 몸에선 함박함박

웃음꽃 피어나지

―원무현, 「푸조나무 아래서 함박꽃 피우기」 전문


이 시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가장 커다란 이유는 푸조나무 때문이다. 나는 이 나무를 본 적이 없다. 적어도 나의 기억으로는 그러하다. 하지만 시인은 푸조나무를 너무나 당연하다는 듯이 노래하고 있고, 그에 따라 푸조나무에 대한 부연 설명도 하고 있지 않다. 푸조나무를 전혀 몰랐기 때문에 당황하기도 했지만, 푸조나무를 당연히 알고 있으리라고 믿는 시인의 태도 때문에도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할 수 없이 푸조나무를 이해하기 위해서 관련 자료를 찾아보았다.

푸조나무

*학명 Aphananthe aspera Planch.

*분류 활엽수>느릅나무과>푸조나무속>푸조나무

경기도 이남 해안 지방에서 잘 자라는 나무다. 중부 지방에서는 흔히 볼 수 없지만 남쪽 지방에서는 중부의 느티나무나 팽나무만큼 흔하다. 나뭇가지가 넓게 퍼져 자라기 때문에 해안가 마을의 정자나무로 썩 잘 어울린다. 특히 소금기 섞인 바닷바람에 강해 방풍림을 조성할 때도 많이 심는다. 푸조나무는 느티나무, 팽나무와 함께 느릅나무과에 속한다. 그 잎이나 열매가 팽나무와 비슷해서 푸조나무는 개팽나무, 개평나무, 공병나무라고도 불린다. 팽나무와 많이 닮았지만 자세히 보면 다른 점들이 눈에 띈다. 잎사귀의 잎맥이 잎 가장자리에 난 톱니까지 닿아 있다는 점도 그렇고, 5월에 피는 꽃이 팽나무의 노란 꽃과 달리 연두색이라는 점도 그렇다. 또 9~10월쯤 맺는 자줏빛이 도는 검은색 열매도 약간 갸름한 달걀형으로 팽나무보다 훨씬 굵다. 푸조나무의 열매는 지름이 12밀리미터 정도이며, 단맛이 있어 좋은 간식거리가 된다

관련 설명 중에서 가장 눈에 띠는 것은 중부 지방에서는 흔히 볼 수 없지만, 남쪽 지방에서는 흔하다는 설명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남부 지방 곳곳에 이름 난 푸조나무가 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 지역들은 전남 장흥, 전남 강진 대구면, 경남 하동군 범왕리, 부산 수영 등이었다. 그곳에는 천연기념물이나 이에 육박할 정도로 특별한 나무들이 서식하고 있었다.

그런데 나에게는 외국산 나무 이름으로 들릴 만큼 낯설고 또한 신기했다. 제대로 본 적이 없으니 이 시에서 말하는 ‘오백년 세월 면면한 직조비법’이라고 극찬한 그늘의 모양이라든지 특징을 이해할 수 없는 것은 당연하다. 중요한 것은 이것이 비단 나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점이다. 즉 이 시는 푸조나무를 이해하는 남도 혹은 특정 지역의 정서를 싣고 있기 때문에, 그 지역의 특색을 이해하지 못하는 이들에게는 동일한 어려움을 초래한다는 것이다.

나는 이 시가 남도의 정서를 대변하고 있다고 추측한다. 거꾸로 남도의 정서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이들은 이 시를 통해 그 때까지 몰랐던 남도 지역의 특성을 이해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마치 「어셔가의 몰락」에 등장하는 괴물같은 나무를 작품을 통해 먼저 이해하듯이, 우리는 원무현의 시를 통해 우리 땅 어디에선가 찬란한 꽃 그늘을 만들고 있는 푸조나무를 먼저 대할 수 있다. 이것은 광주의 특색(≪시와 사람≫의 지역 연고는 광주이다)만은 아니지만, 의미 있는 지역의 특색이 될 수 있다고 또한 믿는다.


다음과 같은 시도 지역의 특색을 유연하게 드러낸 경우에 해당한다.

산이 날개를 친다

발톱 세운 우화등선의 그늘 아래

해비늘 바슬바슬 빗살무늬 질 때

산자락의 산자고

핀다

탈탈탈, 경운기 한 대

농로 위 저 문체가 간결하다

파밭의 이슬을 다스리는

날 벼린 마을의 골목들

탱자나무 가시, 가시 울타리

한 치 안에 갇힌 몸

歲寒의 붓 끝이 산 하나를 품어

啾 啾 啾

산이 날개를 친다

―정군칠, 「단산 그늘」 전문


위의 시에는 각주로 ‘단산’에 대한 주석이 붙어 있다. 옮겨 보면, “추사적거지가 있는 대정읍 안성리와 이웃해 있다. 박쥐를 닮았다 하여 바구미오름이라고도 한다” 솔직히 말해서 나는 추사적거지가 어디를 가리키는지 알지 못했다. 참고 자료를 통해 그곳이 제주도 서귀포시 대정읍 안성리 마을에 있으며 현재는 제주기념물로 지정된 곳임을 알았다. 더욱 중요한 사실은 그곳에서 추사 김정희가 유배생활을 했고 추사체를 완성했고 「완당세한도」를 그렸다는 점이다.

「완당세한도」는 고결함과 지조의 상징이다. 간단한 선 몇 개로 이루어진 간결한 공간 속에서 서릿발 같은 꼿꼿함을 느낄 수 있으며, 그 공간에 걸려 있는 추사의 염결성을 감지할 수 있다. 따라서 속세를 초탈한 정신의 고절한 경지를 표현한 그림이라고 볼 수 있다.

시인은 이러한 그림 속의 세상을 글자로 다시 그려내려고 하고 있다. 산이 날개를 친다는 표현 속에서 단아한 산이 속세를 떠나려는 기운을 실어내고 있으며, 옛 선인의 꿈이었던 우화등선의 경지를 언급하면서 정신의 자유로움을 추구하고 있다. 해비늘의 비스듬히 눕는 모습이나 고풍스러운 산자고 등을 언급하는 것도 이러한 정신의 경지를 보다 사색적인 경지로 이끌려는 의도 때문이다.

「완당세한도」를 이루는 붓끝의 선은 ‘파밭의 이슬’이나 ‘날 벼린다’는 문구 속에 숨어들고 있으며, 추사의 잔영을 ‘추’라는 의성어를 통해 머릿속에 되울리고 있다. 이러한 장치들은 추사와 그의 그림 그리고 그의 성품을 하나의 경지로 보고 그것에 도달하기 위해 언어를 벼리는 행위와 다르지 않다.

여기서 주목되는 점은 이러한 행위와 연결이 단산이라는 공간을 통해 이루어지고 있으며, 「완당세한도」라는 널리 알려진 그림을 통해 보완되고 있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서 추사를 이해하고 「완당세한도」를 이해하기 위해서 시인은 단산이라는 지역적 특수성을 끌어들이고 있는 셈이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단산을 보지 못하고 체험하지 못한 이들에게 이러한 시상의 전개는 위험한 일이다. 하지만 거꾸로 보면 우리는 어쩌면 우리에게 익숙한 추사와 그의 그림을 통해 단산이라는 지역의 특수성과 그 지역을 바라보는 시인의 독자적인 시각을 읽어낼 수 있다.

지역을 이해한다는 것은 곧 보편의 눈과 생각을 통해 지역의 가치를 인정한다는 뜻이 아닐까. 푸조나무와 그에 걸린 서민들의 삶의 애환을 이해하기 위해서 원무현의 시는 복무할 수 있다. 어떠한 경우에는 시를 통해 삶의 일부를 이해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단산 그늘을 통해 추사와 그의 그림과 고절한 정신세계를 노래한 정군칠의 경우도 유사하다. 우리는 추사와 그의 그림 그리고 그 안의 정신세계를 담아내려 했던 시를 이해하여, 거꾸로 단산의 풍광과 그 안에 담긴 지역(인)의 마음을 읽어낼 수 있다. 이것도 우리 삶을 이해시킨다는 점에서, 좋은 시가 해야 하고 할 수 있는 역할일 것이다.

3. ≪애지≫(2007년 겨울호)에서:언어로 새로운 주변을 열다

이대흠은 이 시대에서 가장 주목받는 젊은 시인 중 하나이다. 이미 그의 나이는 젊다는 표현을 쓰기에는 다소 무리지만, 그의 시는 이전의 시와는 다른 탄력과 개성을 지니고 있기에 ‘젊다’는 표현이 지금도 가능하다. 이대흠의 시가 기존의 시와 차이를 보이는 중요한 이유 중 하나가 그의 시가 지닌 지역적 특수성이다.


청 보리 팰 때는 청 보리처럼 푸르게 웃음 짓던 여자

빈 들 보리밭 가 점심 굶고 걸어도 마냥 나를 배부르게 하였던 여자

쓸쓸함이 산수유 꽃그늘 같아서 열에 들뜬 내 머리를 가만히 다스려주고

쉬운 분노와 쉬운 뉘우침을 반복하던 나에게 가시 몸 속 탱자 꽃을 보여주던 여자

내 오래 절망했을 때 치약처럼 상큼한 냄새로 제 몸이 걸레 되어

더께 낀 내 속을 찬찬히 닦아주던 여자 내가 아플 때면

메 꽃잎 같은 손으로 상처의 뿌리를 매만져주던 여자 눈동자가

초꼬지불 같아서 어둠 속을 초롱초롱 빛내던 여자 그 눈동자에

눈부처로 있는 게 즐거워 오래도록 눈 마주쳐 보았던 여자

불경 같은 여자 연꽃 같은 여자 숯불 같은 여자 차심 같은 여자

짐승 같은 여자

마른 낙엽 밑 돌멩이처럼 감추어진 여자 잔바람에도 쉬 드러나 찢긴 내 맨살을 아리게 하는 여자 덖은 찻잎에 숨은 그늘처럼 오래도록 감추어져 있다가 맑은 찻물로 우려지곤 하는 여자 내 오래 사랑하였고 한 번도 미워한 적 없었던 여자 너무 깊이 사랑했으므로 보낼 수밖에 없었던

그 여자 모두에게 버림받고 아파 울더라도 곁에 두고 싶었던 여자 여자 몸 영 못 가누게 되어 기저귀 차고 지내게 되면 내 손수 기저귀 갈아주고 고운 노래 불러 주고 싶었던 여자 내 숨 막힌 세월 몸통 터주고 제 아픔 하나도 나누어 주지 않았던

나쁜 그 여자, 생각하면 목련길이 떠올라서 세상의 모든 밤을 봄밤으로 만드는 여자 꽃에 허기진 내가 밤 깊도록 잠 못 이루고 검게 바랜 목련 꽃잎에 눈물 떨구게 하는 여자

과냥과냥 불러보면 어느 날 문득

자응자응 대답할 그 여자

―이대흠, 「광양 여자」 전문


제법 긴 시이지만, 이해하는 데에는 큰 어려움이 없어 보인다. 1~3연은 여자의 특성을 수식하는 말로 되어 있다. 시인이 노래하고자 여자의 특색은, ‘**하는 여자’에서 찾을 수 있다. 4연도 비슷하다. 다만 여자를 수식하는 호흡이 길어지면서 정서적인 고조가 일어나고 그것은 5연에서 최고조에 달한다. 6연은 최고조에 도달한 여자에 대한 그리움과 사랑을 다소 역설적으로 반전시키고 있다. 반전을 불러오는 표식이 ‘나쁜 그 여자’이다. 그 직전까지는 여자의 장점을 주로 긍정적인 언사로 나열하다가, 이 대목에 오면 여자에 대한 사랑을 부정적인 언사로 표현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나쁜 그 여자’는 고조되었던 여자에 대한 상념을 가라앉히고 냉정하게 정리하는 역할을 하는 표식이다.

문제는 마지막 연이다. 마지막 연은 다른 연들과는 다르다. 그것은 두 개의 단어 때문이다. 하나는 ‘과냥과냥’이고, 다른 하나는 ‘자응자응’이다. 두 개의 의태어, 어쩌면 의성어일 수 있는 구문은 이대흠의 다른 시에서 그 편린을 드러내고 있다.


예순 넘어 한글 배운 수문댁

몇 날 지나자 도로 표지판쯤은 제법 읽었는데

자응 자응 했던 것을

장흥 장흥 읽게 되고

과냥 과냥 했던 것을

광양 광양 하게 되고

광주 광주 서울 서울

다 읽게 됐는데

새로 읽게 된 말이랑 이제껏 썼던 말이랑

통 달라서

말 따로 생각 따로 머리 속이 짜글짜글 했는데

자식 놈 전화 받을 때도

옴마 옴마 그래부렀냐? 하다가도

부렀다와 버렸다 사이에서

가새와 가위 사이에서

혀와 쎄가 엉켜서 말이 굳곤 하였는데

―이대흠, 「수문 자지 왕자지」 부분


이대흠의 「수문 자지 왕자지」를 참조하면 ‘과냥’은 ‘광양’을 가리키고, ‘자응’은 ‘장흥’을 가리킨다. 하지만 이러한 단어의 기원이나 원초적 개념으로는 「광양 여자」의 마지막 연을 해석할 수 없다. 아니 굳이 해석한다고 하면 못할 것도 없지만, 그 해석은 옹색하기 이를 데 없을 것이다. 광양 여자가 글을 잘 못 읽어 ‘광양’을 ‘과냥’으로 읽었고, 엉뚱한 대답이 지나쳐서 ‘장흥’도 아닌 ‘자응’이라고 대답한다는 설정으로는 「광양 여자」의 곱고 매끄러운 호흡을 감당할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결국에는 ‘과냥과냥’과 ‘자응자응’을 단어가 가진 뉘앙스와 상황 논리에 맞게 두루뭉술하게 해석하는 편이 현명할 듯하다. ‘거시기’가 다른 단어로 쉽게 해석되지 않은 것과 같은 원리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이대흠의 「광양 여자」가 매력적인 것은 이 대목에 있다. 해석되지 않은 시 구절의 모호함을 활용하고, 그 자체로 긴 여운과 깊은 여백을 남기는 단어와 구문을 배치했기 때문이다. 이것은 표준어가 아닌 지방색 가득한 사투리가 가져온 결과이다. 사실 마지막 구절의 애매모호함이 없었다면 이대흠의 「광양 여자」는 오규원의 「한 잎의 여자」의 아류 작품 신세를 모면하지 못했을 것이다. 시를 어느 정도 공부한 사람이라면, 이대흠의 이 시를 읽으면서 오규원의 「한 잎의 여자」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두 시를 비교하면 왜 이대흠의 시가 지역적 특수성을 지니게 되는지, 그것으로 인해 어떠한 차이를 가져오는지 알게 된다.


나는 한 女子를 사랑했네.

물푸레나무 한잎같이 쬐끄만 女子,

그 한잎의 女子를 사랑했네.

물푸레나무 그 한잎의 솜털,

그 한잎의 맑음,

그 한잎의 영혼,

그 한잎의 눈,

그리고 바람이 불면 보일 듯 보일 듯한

그 한잎의 순결과 자유를 사랑했네.

나는 정말로 한 女子를 사랑했네.

女子만을 가진 女子,

女子 아닌 것은 아무것도 안 가진 女子,

女子 아니면 아무것도 아닌 女子,

눈물 같은 女子, 슬픔 같은 女子,

病身 같은 女子,

詩集 같은 女子,

영원히 나 혼자 가지는 女子,

그래서 불행한 女子.

그러나 누구나 영원히 가질 수 없는 女子.

물푸레나무 그림자 같은 슬픈 女子.

―오규원, 「한 잎의 여자」 전문


오규원의 이 시는 유명하다. 2편과 3편도 나와 있을 만큼 호소력이 강한 시라고 할 수 있는데, 이 시를 이대흠의 「광양 여자」와 비교하면 유사점이 많음을 한 눈에도 알 수 있다.

그러나 유사점에도 불구하고 이대흠의 시는 오규원의 시와는 다른 맛을 느끼게 한다. 그것은 그의 묘사방식과 마지막 연의 미묘함 때문이다. ‘청 보리’, ‘꽃그늘’, ‘탱자꽃’, ‘더께’, ‘메꽃잎’, ‘초꼬지불’, ‘목련길’ 등의 어휘는 시 내부에 신선한 느낌을 부여하면서 청량한 ‘말의 그늘’을 드리운다. 이대흠이 바라보는 대상들이 오래된 것들에 고착되어 있음을 알려주는 동시에, 그러한 단어들과 나머지 구절의 차이를 통해 완전히 사라지지 않은 것들의 세계를 그리고 있음을 인식시키고 있다. 그리고 가장 중대한 차이인 마지막 연의 ‘과냥과냥’과 ‘자응자응’의 미묘한 단어들로 그 차이점들이 수렴된다.

이대흠의 「광양 여자」는 지역색(언어)이 어떠한 파장을 불러 올 수 있는지 보여주었다. 이대흠은 이전부터 전라도 사투리를 맛깔스럽게 구사하는 것으로 유명했지만, 이 시에서는 더욱 절제된 상태로 그 맛깔스러움을 증폭시키지 않았나 싶다. 그것은 표준어와 세련된 문장으로는 도저히 다듬어낼 수 없는 언어 구사의 특수함 때문일 것이다.


4. ≪리토피아≫(2007년 겨울)에서:생활인의 눈目을 얻으려 하다

≪리토피아≫는 본래 서울에 근거지를 두고 있던 종합잡지였다. 그러다가 근거지를 인천으로 옮기면서 인천을 근거지로 하는 지역잡지로 변모했다. 하지만 이러한 변모가 곧 인천 지역(문단)에 대한 특혜를 뜻하는 것은 아니었다. 인천을 중심으로 꾸려지고 있던 기존 잡지들도 이러한 ≪리토피아≫의 변모에 대해 크게 달가워하지 않는 상황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리토피아≫는 중앙잡지도, 지역잡지도 아닌 어중간한 상태에 놓이게 되었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지역잡지가 곧 지역 시인을 위한 잡지이어야 할 까닭은 없다. ≪리토피아≫ 역시 지역적 근거를 옮겼다고 해서 기존까지 유지하던 전국적 필자 등용과 젊은 평자들의 획기적인 등용 정책을 바꾸지 않았다. 그것은 ≪리토피아≫가 가진 기본 정책이다. 하지만 지역적 근거를 하나의 특색으로 끌어들여야 할 필요성마저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그런 입장에서 다음의 시는 ≪리토피아≫가 겨냥해야 할 하나의 목표에 대한 가능성을 열어준다고 할 수 있다.


1. 새우만 먹고 깡은 확 버리죠

어머머! 눈치 채셨군요 좋은 곳에 태어나 고생 모르고 자랐지요. 부잣집 무남독녀였냐구요? 호호 터가 좋고 뼈대 있는 집안에 뭐 환경이 좀 나았다고나 할까요.

어휴! 땡볕엔 왜 나가요? 아, 이 땀 냄새, 우린 원래 땀을 싫어하는 체질이거든요 우린 말예요 그냥 쉬다가 심심하면 한 바퀴 빙 돌아보는데, 어찌나 아랫것들이 아양을 떨어대는지, 저마다 뱃전에 나와 손 흔들며 새우깡을 봉지 째 바쳐대니 원, 고것들 맘 상할까 봐 우린 잠시 입만 빌려주면 되죠 뭐

그래서 이렇게 뽀얗고 예쁘군요, 어머 뭘요 제 탱탱한 몸매 유지하려면 이제 썬텐이나 좀 해야겠어요, 호호 몸매 유지 비결이 뭐냐구요? 별 다른게 있나요 그냥 삶을 릴렉스 릴렉스하게……

근데 아무거나 다 받아 먹냐고요? 무슨 말씀, 친환경제품에 영양식으로만 골라먹어요 그러니까 새우는 먹고 깡은 확 버리죠, 우린 깡 같은 건 필요 없거든요 호호호

(중략)


3. 화장실만 갔다 바로 오세요


네, 지금까지 잘 들으셨죠? 고기 안 잡고도 몸매 탱탱 유지 여유 있는 생활의 소유자 갈매기 집안과, 횟집 수돗가에서 오늘도 꿈을 찾아 방랑하는 낭만파 고양이, 반짝이는 삶의 이야기는 남의 것만은 아닙니다요

바로 여러분도 그 주인공이 될 수 있습니다. 자, 그럼 잠깐 휴식 시간을 갖겠습니다. 화장실만 갔다 바로 오세요. 곧바로 이어지는 2부를 기대하세요

외포리 446-7번지에 사는 김새네 씨의 재미난 농사이야기가 지금 이 순간 기다리고 있습니다.

―정순옥, 「외포리 주민들 생활 현장에 관한 한 프리젠테이션―쪽․14」 부분


이 시를 읽으면서 외포리가 과연―우리가 흔히 아는 대로―김포의 그 외포리인가 하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서울과 가깝고 바다와 배가 있는 아름다운 풍경을 자랑하는 외포리. 혹시나 하는 마음에 백과사전을 찾아보니, 외포리에 대한 설명은 다음과 같았다.

인천광역시 강화군 내가면에 있는 리(里)이다. 남쪽으로 바로 서해와 접해 있는 반농반어촌 마을이다. 대부분의 지역은 평지로 이루어져 있다. 자연마을은 골말, 넘말, 마루테기 마을이 있다. 골말 마을은 대정 북쪽 골짜기에 있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며, 넘말 마을은 정포 위쪽 등성이 너머에 있다 해서 이름 붙여졌다. 마루테기 마을은 정포의 위쪽 마루터기에 있는 마을이라 해서 지명이 유래되었다.

행정구역 상으로 인천시 강화군에 속하고 있으며, 서울 사람들이 즐겨 찾는 석모도와 연결된 곳으로, 갈매기와 어시장과 고창굿으로 알려진 지역이다. 그런데 정순옥 시인은 널리 알려진 외포리를 이방인의 시선으로 다가가지 않았다. 이러한 태도는 이 지역의 아름다운 풍경과 그 의미를 여행자의 태도로 이해하려 했던 많은 시들과 다르다고 할 수 있다.

인용된 시의 첫 번째 단락(1)은 갈매기의 시선으로 바라본 유람객들의 모습이다. 사람들은 배를 타고 가면서 새우깡 한 봉지씩을 준비한다. 뱃전에는 아예 새의 모이를 팔고 있음을 광고하고 있을 정도로 보편화된 유희이다. 사람들은 그 모이를 사서 새들에게 던져주며 환호성과 기쁨에 들뜨곤 한다.

하지만 위의 시에서 갈매기는 냉정하게 이러한 사람들의 행태를 추태로 규정하고 있다. 사람들을 아랫것으로 지칭하고 있고, 그들의 행태를 아양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이것이 갈매기의 착각이든, 시인의 지나친 자기 비하이든 간에, 이러한 시선이 갈매기와 뱃전과 풍경의 아름다움을 노래하며 그 안에서 시의 정서를 구현하려던 다른 시들과 확연하게 다른 것만은 틀림없다.

두 번째 단락(2)은 인용하지 않았지만, 세 번째 단락(3)을 통해 그 내용을 짐작할 수 있다. 두 번째 단락의 중심 화자는 고양이이다. 오수를 즐기면서 횟집 수돗가를 전전하는 고양이. 그 고양이는 쥐를 잡기보다는 인간들이 남긴 회를 먹는 쪽을 택한다. 흥미로운 것은 고양이의 말 가운데, 정곡을 찌르는 한 마디이다. “주인이 쫓아내냐구? 야야, 그런 걱정은 허덜덜 말아라 우리 그것 볼 새가 워디 있냐고, 한 달째 항생제로 버텨준 고긴데 싱싱해서 맛있다고 인사하는 손님 카드 웃음살 얹어 긁느라고 야야……”

갈매기나 고양이나 인간들의 세상을 조롱하는 어투를 사용하고 있다. 그들은 인간들이 유람삼아 식도락삼아 들리는 외포리가 사실 그 외포리가 아니라고 말한다. 여행 삼아 들리는 사람들에게 외포리는 아름다운 갈매기가 아양을 떨고 싱싱한 회가 기다리는 곳이지만, 그곳의 물정을 아는 이들에게, 도리어 아양을 떨고 싱싱한 먹잇감이 되는 것은 이곳을 여행 삼아 찾는 손님(관광객)들이다.

사실 위의 시를 정교하게 구성된 시라고는 할 수 없다. 어휘 선택과 표현 방식에도 적지 않은 고심이 투여되어야 할 시라고 보는 편이 옳을 듯하다. 그럼에도 이 시가 주목되는 이유는 삶의 외피를 뚫고 그 내부를 들여다보려는 시각과 태도 때문이다. 표면적인 아름다움을 거부하고 그 안에서 일어지는 삶의 메커니즘을 직시하려는 태도는, 그 지역의 삶을 이해하려는 자만이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이 시의 공간적 배경이 인천이라는 우연적 사실에 기대어 한 걸음 더 나아가 보자. 잡지 ≪리토피아≫가 인천이라는 지역적 기반 위에서 일정한 토대를 세우려면, 지역의 정서와 삶에 보다 깊이 천착할 수 있는 시와 시인들을 발굴․육성․지원해야 할 것이다. 이것은 편협한 자기 섹트를 만들고자 함이 아니라, 보다 균형 잡힌 지역 잡지를 만들고자 함이다. 다시 말해서 지역 잡지는 지역의 문제를 지역민이 아닌 사람보다 더욱 정교하게 바라볼 수 있는 어떤 시각과 자세를 취할 때만 진정한 지역 잡지가 될 수 있을 것 같다. 정순옥의 경우에도 장난스러운 태도를 마저 덜어버리고, ‘외포리 주민들 생활 현장’에 관한 보다 깊이 있는 탐구를 행한다면, 이러한 성취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각 지역을 기반으로 하는 모든 지역 잡지들이 신경 써야 할 부분이며, 지역에 거점을 두고 활동하는 시인이라면 한 번쯤 문제의식으로 삼아야 할 지점이 아닌가 싶다.


5. ≪작가들≫(2007년 가을)에서:지역의 정서를 대변하려 하다

≪작가들≫ 2007년 가을호를 보면, 몇 가지 주목되는 코너가 있다. 특집은 “작가들, 도시공간 속을 거닐다”로, 부제로 “시와 산문으로 보는 배다리”랄 어구를 첨부하고 있다. 여러 명의 시인과 수필가들이 ‘배다리’를 소재로 시와 산문을 발표한 란이다. 특집 의도로 보건대 ≪작가들≫ 측에서 배다리라는 키워드를 주고 시와 산문 청탁을 의뢰한 것 같다. 발표된 기존 시를 모아 온 것이 아니라 특집을 위해 주문 생산된 시인 셈이다.

이것말고도 이 호에는 지역 연고인 인천과 관련된 코너들이 꽤 많다. 기회연재 코너를 보면 세 개의 세부코너가 있다. ‘인천도시정체성의 발견’, ‘인천문학기행’, ‘인천공간탐사’ 등이 그것인데, 모두 시리즈로 연재되고 있다. 이러한 코너들은 이 잡지가 인천의 지역색에 얼마나 역점을 두는가를 잘 대변한다고 하겠다.

게다가 ‘이 계절의 작가’로 선택된 이경림도 신작시로, 「부평에서 도원까지」를 발표하고 있다. 이 시는 ‘인천’의 지명을 활용하여 인천의 풍경과 정서를 담아내려 한 시도로 볼 수 있다. 이경림 역시 인천과 관련된 시를 주문 제작했는지는 확인할 길이 없으나, 이경림의 신작시 역시 인천관련 코너들과 어울리면서 ≪작가들≫이 의도하는 바를 직간접적으로 돕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다시 ≪작가들≫ 2007년 가을호의 목차를 보자. 특집, 이 계절의 작가, 기획연재, 그리고 위에서는 설명하지 않았지만 현장문화통신(이 호에는 「‘7.27 한강하구 평화의 배 띄우기’를 다녀오면서」가 실려 있다)까지, 그야말로 인천과 그 주변 일대의 문화적 지역적 특징을 조망하기 위해서 애쓴 글들로 빽빽하다. 더구나 이러한 노력은 한 호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장기적인 기획으로 연재를 이어가고 있는 형국이다.

≪작가들≫의 이러한 노력은 내 판단으로는 지역 잡지가 지역의 기여할 수 있는 방안 중 하나가 아닌가 싶다. 비록 분량과 정도의 측면에서 과다하다는 한계와 세부적인 문제점들이 산견되지만, 거시적인 측면에서 보면 이러한 노력은 지역 잡지가 지역의 잡지로서 혹은 그 숱한 잡지들의 홍수 속에서 존재해야 할 이유를 스스로 정립하려는 시도에 해당한다. 따라서 전체적인 입장에서 ≪작가들≫의 이러한 노력에 지지를 표한다.

그러나 세부적인 시각으로 접어들면 문제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이 글에서는 시 작품을 중심으로 살펴보고 있으니, 특집에 제시된 네 편의 시를 대상으로 그 문제점을 진단해 보겠다.

‘배다리’는 인천의 고유한 지명인 것 같다. 인터넷 상에 이 배다리를 지키는 모임이 있을 정도로 유서 깊은 공간이다. 그러나 안타까운 것은 네 편의 시, 어떤 것도 외부인들에게 배다리가 어떤 지역적 특성을 지니는지 효과적으로 알려주지 못한다는 점이다.

물론 시는 정보의 집합처가 아니다. 줄줄 말로 설명하고 그 원인과 결과를 통해 사물의 질서나 위상을 설명하는 것에 주된 목적이 있지 않다. 하지만 ≪작가들≫의 특집이 인천의 ‘배다리’를 알리고 그 정서를 활용하고 모르는 이들에게 그 의의를 이해시키는 것에 있다면, 이러한 시 창작은 분명 잘못된 것이다. 구체적으로 예를 들어보자. 네 편의 시 중에서 「살고 피고 그저 그렇게」를 먼저 인용해 보겠다.


맨드라미 꽃이 피었습니다

안 송림 판자촌

채송화 꽃이 피었습니다

바깥 송림 8번지에 피었습니다

민들레 꽃이 피었습니다

부처산 길 섶마다 지천으로 피었습니다

할미꽃이

만수산 만신의 주문따라 울며 피었습니다

망초꽃이 피었습니다

화도 매화 혈에 넋이 있고 없고 피었습니다

이른 봄 물치도 섬 흰 궁둥이 가리며

찔래꽃, 산수유도 피었습니다

화도고개, 발길 없는 양키시장 음지에

쑥부쟁이 꽃도 피었습니다

(중략)

아, 그러나

문학산에 꽃이 피나요

금강, 장백산에 무슨 꽃이 피었나요

한라, 지리산에 무슨 꽃이 피는지

마라도에도 꽃이 필건지

필래면 피라지요

나는 보지 못했습니다

듣도 못했습니다

그저

배다리에 핀

사람 꽃을 편지처럼

보고 지고

살고 지고픔 뿐

―김학균, 「살고 피고 그저 그렇게」 부분


이 시를 읽으면서 난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이유는 대략 세 가지이다. 일단 송림, 부처산, 만수산, 화도, 물치도, 양키시장 등의 단어는 시 읽는 이를 난감하게 만들었다. 이것들은 지명으로 여겨진다. 그것도 인천의 지명이 아닐까 싶다. 하지만 시에서는 이 지역이 마치 보편적인 지형인양 설명한다. 이와 유사한 시였던 황지우의 「꽃피는 삼천리 금수강산」의 일부를 보자.


개나리꽃이피었습니다.

미아리 점쟁이집 고갯길에 피었습니다.

진달래꽃이피었습니다.

파주 연천 서부전선 능선마다 피었습니다.

백목련꽃이피었습니다.

방배동 부잣집 철책담 위로 피었습니다.

철쭉꽃이피었습니다.

지리산 노고단 상상봉 구름 밑에 피었습니다.

라일락꽃이피었습니다.

이화여자대학 후문 뒤에 피었습니다.

유채꽃이피었습니다.

서귀포 앞 남마라도 산록에 피었습니다.

안개꽃이피었습니다.

망월리 무덤 무덤에 피었습니다.

망초꽃이피었습니다.

―황지우, 「꽃피는 삼천리 금수강산」 부분


황지우의 시에서 지명으로 거론된 미아리 점집, 파주 연천, 방배동 부잣집, 지리산 고고단, 이화여자대학, 서귀포 앞 남마라도, 망월리 무덤은 보편적인 지명이다. 보편적이라는 것은 이 시를 읽은 이들에게 정서적인 감수성을 자극할 수 있다는 뜻이다. 실제로 이 지명들은 시에서 미묘한 의미의 울림을 만들어내면서 뒤에서 이루어지는 반전을 지지한다. 그 반전은 다음과 같다.


그러나,

개마고원에 무슨 꽃이 피었는지

영변 약산에 무슨 꽃이 피었는지

은율 광산에 무슨 꽃이 피었는지

마천령산맥에 백두산 천지에

그렇지 금강산 일만이천봉에

무-슨-꽃-이-피-었-는-지

무슨 꽃이 피었는지

나는 못 보았습니다

보고 싶습니다

―황지우, 「꽃피는 삼천리 금수강산」 부분


반전은, 우리가 가보지 못했던, 어쩌면 가야 한다고 생각하지 못했던 공간에 대한 의미 있는 전언을 함축해내고 있다. 한글을 배운 대한민국 사람이라면 황지우의 시에서, 그리고 지명의 선택과 배열에서 숨겨진 의도를 읽을 수 있다고 판단된다. 그러나 「살고 피고 그저 그렇게」는 이와 다르다. 이 시는 우리가 잘 알 수 없는 지역적 명칭을 제시하기 바쁘지만, 그 지역 명칭이 줄 수 있는 의미상의 울림은 계산하고 있지 않다. 오히려 우리가 알 수 있는 지명들을 거부함으로써(가령 금강, 장백, 한라, 지리산), 시인이 옹호하는 시적 공간에 대한 의구심만 부채질 할 뿐이다.

두 번째 난감함도 반전과 관련된다. 인천을 제외한 다른 대한민국의 전역을 부정하는 것이 어떤 뜻인지 짐작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가령 은둔자의 삶을 찬양한다는 것인가? 아니면 지역적 배타성을 강조하겠다는 것인가? 배다리의 소중함을 강조하겠다는 것인가? 가장 마지막 대답을 선택한다고 해도, ‘내’가 사는 곳이기 때문에 혹은 ‘내’가 잘 아는 곳이기 때문에, 인천은 소중하고 다른 곳은 소중하지 않다는 식의 논리는 용납하기 힘들다. 이것은 또 다른 지역 차별이며, 중심에 대한 정당하지 못한 반발이며, 지역 정서를 악용한 편협함이라고 할 수밖에 없지 않을까.

세 번째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는 ‘배다리’의 의미이다. 시인은 배다리에 사람들의 꽃이 피기 때문에 그곳에서 살고 싶다고 말하고 있다. 시적 언어의 다의성을 염두에 둔다고 해도 사람꽃이 핀다는 것은 충분하지 못한 설명이다. 무엇보다 한 대중가요의 노래 가사 속에서 이미 세상 사람들이 널리 이해하고 있듯이, ‘사람이 꽃보다 아름답다’는 단순 논리는 이제는 상투적이다. 세 가지 난감함을 하나하나 궁리해보았지만, 이 시에서 배다리가 함축한 정서와 특성 그리고 창의적 상상력에 대해서는 끝까지 의문 부호를 남길 수밖에 없다.

다시 말하지만 시는 산문이 아니며, 논리적인 인과관계를 따라야 할 필요도 없다. 그러나 시가 되기 위해서는, 그것도 지역의 아름다움과 정서를 전하는 좋은 시가 되기 위해서는, 단순 서술 이상이어야 할 필요가 있다고 하겠다. 그런 측면에서 박일환의 「배다리의 밤」은 주목해야 할 지점이 있는 시라고 할 수 있다.


인천의 성냥공장 아가씨들 찾아볼 길 없고

소성주로 날리던 인천양조장은 건물만 을씨년스러운데

몇 안 남은 헌책방끼리 서로 어깨를 맞대고 저물어가는

배다리의 밤

산업도로 공사현장 앞에 자리잡은

〈개코막걸리〉집 둥근 탁자에 둘러앉아

누런 양은주전자에 담긴 막걸리를 비우며

콩되비지를 떠먹는 동안

옛것들이며 헌것들이며는 모두 다

건너편 수도국산 달동네박물관에 곤한 잠 자고 있다

달빗 대신 공사장 불빛이 어릉대는

막걸리잔을 비우며

나는 뭐라고 웅얼거렸는가

너는 뭐라고 고개 주억거렸던가

술자리가 파한 뒤

취한 건 세상이지 내가 아니라고

애써 변명할 것도 없이

똑바로, 똑바로 걸어보자고 다짐하는데,

그 옛날엔 바닷물이 예까지 밀려들기도 했다는데,

꿈결엔 듯

출렁이는 물결 소리 들려왔던가

그렇게 깊어가는 배다리의 밤길을

쓸쓸히, 쓸쓸히 돌아나왔던가

―박일환, 「배다리의 밤」 전문


이 시를 읽으면서, 나는 어느 정도 배다리의 모양새나 쓰임새를 이해할 수 있었다. 배다리가 왜 책과 연결되는 이미지를 가지는지, 왜 그곳에서 시낭송을 하고 그곳을 지키기 위해서 문화계 인사들이 어떻게 노력하는지, ‘배’라는 물과 관련된 물건이 왜 지명과 연관되는지 등등.

이 시의 1연과 2연의 옛스러움의 정취를 표현하면서도 현재 배다리가 처한 상황을 알려준다. 간결한 표현 속에 배다리의 양면성이 들어있다고 할까. 또한 배다리가 가지고 있는 서민적 정취 역시 깊이 묻어나고 있다. 3연과 4연은 이러한 배다리를 보는 지역인들의 정서가 애틋하게 담겨 있다. 상실감과 씁쓸함, 세상에 대한 변명과 자기에 대한 위안이 묘하게 공존하면서, 현재와 과거 사이에 위태롭게 걸린 배다리의 운명과 겹쳐지는 효과를 가져온다. 이러한 측면에서 박일환의 시는 배다리의 특징을 외부인들에게도 설명할 수 있는 힘을 가졌다고 판단할 수 있다.

하지만 조금 더 비판적인 눈으로 보자. 가령 ‘몇 안 남은 헌책방까리 서로 어깨를 맞대고 저물어간다’는 표현을 보면, 이러한 정취가 비단 배다리만의 것이냐는 의문이 자연스럽게 생겨난다. 부산 보수동 헌책방 골목도 비슷한 정취를 느끼게 한다. 그곳 역시 바닷물이 인접해 있으며 과거에는 더 부근까지 들어왔던 곳이다. 서민적인 정취가 물씬 풍겨나고 옛것들이 새로운 시간의 파도 앞에서 위태롭게 서 있는 곳이다.

이러한 꼬투리를 잡는 것은 ‘배다리’라는 단어가 놓여할 자리에 다른 지역명이나 정취를 대변하는 단어가 놓인다면 어떻게 되겠느냐는 우문을 상기시키기 위해서이다. 지역의 정서와 감각을 대변한다는 것은, 유일무이한 오직 그곳만이 가질 수 있는 정취를 언어로 포착하는 행위여야 한다. 그런 측면에서 보면 박일환의 시를 비롯한 네 시 모두 너무, 보다 깊게 숙고될 필요가 있다고 하겠다.


6. ≪시에≫(2007년 겨울)에서:과연 지역이란 어디를 말하는 것일까

전다형의 시 「종가」 한산한 아름다움을 전하는 시이다.


그 집 가면 한 생을 한자리에 서서 평생을 견딘 나무가 있다 달빛이 제 그림자까지 쓸어놓고 아들의 아들로 물려줄 가난이 무서워 대처로 떠났던 한씨(氏) 마중을 나가 중천에 떠 있다 갈라진 벽으로 빗물 스미듯 몰래 한씨(氏) 종가 찾아 들 때 나무 그림자가 안절부절했다 아래채에 매달린 무청이 바람 끝에 나앉자 시래기가 된 가문의 서러움을 말리고 있었다 순진한 아내 떠나기 직전 품다만 닭장 속 썩 달걀처럼 부화하지 못한 가난만 두엄 더미에 남아 흘러간 시간을 두루마리로 풀어내었다 오동나무에 어깨를 기댄 흙 담이 모처럼의 인기척에 자세를 고쳐 앉고 눈빛 선한 달빛이 나무그림자를 끌고 와 먼지 앉은 툇마루를 연신 닦아내었다 엉덩이를 반쯤 걸친 그 남자 달빛의 속마음을 읽고 대청마루로 올랐다 떠나기 전 심어놓은 옥수수 제 홀로 속 여물어 출출한 허기 달래는 야참하기에 좋았다

녹슨 가마솥에 옥수수를 넣고 검불에 불을 붙이자 청솔가지 매운 연기보다 뒷산 개구리 울음이 동네방네 소문을 돌렸다 뜸은 더디게 들고 개구리 울음 따라 무안한 내 설움이 후렴으로 잦아드는데 30촉 알전구보다 밝은 달빛이 더 낮아져도 좋았다 글썽한 옥수수 설익은 하모니카 번갈아 불렀다 남새밭가 마구 자란 풀숲에 아무렇게 주저앉은 이 빠진 그릇이 언제 빗물을 품었는지 희미한 초승달을 띄워놓고 어린 쥐들에게 몽당 숟가락으로 물을 떠먹이고 있었다 그 남자 함부로 자란 개망초 꽃대를 뽑는 동안 달빛의 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사람 떠나고 쥐가 아침상을 차리는지 쌀뒤주 긁는 소리가 내 마음을 더 긁어대었다 궁색한 손님 대접을 눈치 챈 달빛이 고봉으로 달아낸 윤슬, 찬 대신 눈물로 쓱쓱 비벼 먹고 쥐도 새도 모르게 빠져나오던 경남 의령군 백곡리 537번지

―전다형, 「종가」


전다형의 출생지가 의령인 점으로 보건대, 위의 시는 전다형의 고향 마을의 한 풍경을 읊은 것으로 보인다. 전다형은 시적 화자인 ‘그’를 객관적으로 묘사하다가 중간 부분부터는 그 사람의 마음속으로 이입하여 시를 풀어나가고 있다. 이러한 기술 방식을 보건대, 전다형은 시적 화자와 ‘그’를 일치시키려 했음이 분명하다. 이러한 가설을 넓게 받아들이면, 시 「종가」의 정서는 시인의 정서와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이 시를 해석하기 전에 ≪시에≫에 대해 말해 두어야 할 것이 있다. 이 잡지는 창간된 지 2년 쯤 되는 신생잡지로, 시와 에세이를 주로 다루고 있다. 나는 무슨 이유때문인지는 모르지만, 이 잡지의 연고가 ‘강원도’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내가 착각을 한 것이고, 실제 출판등록지는 서울이었다. 하지만 그러한 객관적인 사실에도 불구하고, 나에게 <시에>에 실린 전다형의 「종가」는 지역시의 운명을 상기시키는 역할을 했다.

이것은 「종가」가 지역적 연고를 버리고 대처(아마도 서울)로 떠난 이의 귀향 일지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마치 자신의 고향과 지역을 버리고 중앙문단으로 뛰어든 시인의 운명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이 시의 화자에게 자신이 살던 곳은 억울할 정도로 가난한 것 같았고, 대책 없이 보잘것없는 것도 같았으며, 그래서 빨리 떠나야 할 것 같았다. 그는 미련 없이 대처로 떠났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 오래된 집은 폐가가 되었다. 다시 시간이 흘러, 그 집으로 집주인이 조용히 찾아들고, 마을 사람들은 숨죽인 채 전 주인의 느닷없는 방문을 지켜본다.

전 주인의 방문에 놀라기는 집안 안의 물건들과 자연물들 역시 마찬가지이다. 나무 그림자가 안절부절 하고, 흙담도 자세를 고쳐 앉으며 정색을 하기에 이른다. 뒷산 개구리들은 소리 높여 상황을 보고하고 있고, 모든 것을 보고 있는 달빛도 긴장한 기색이다. 도대체 전 주인은 왜 예전에 버린 집으로 돌아왔을까 다시 이 집에서 살 생각일까? 자연스럽게 집을 물려받고 새로운 주인의 반열에 오른 쥐들도 궁금하기는 마찬가지이다.

하지만 전 주인은 오래 머물지 않는다. 예전에는 분명 자신이 집이었되 이제는 자신의 집일 수 없는 눈앞의 집을 인정하기로 한 것이다. 그럼에도 전 주인은 그 사실을 확인하고 싶었으리라. 자신이 지금 겪고 있는 모든 일의 기원과 그곳에 있었기 때문이다.

혹여, 시인에게 ‘지역’이란, 이 오래된 그리고 버려진 종가 같은 곳은 아닐까. 시인들은 지역에서 성장했지만 곧 문학적 표준어를 구사하면서 문단을 향한다. 일부 예외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서울에 간다는 것은 보다 많은 이들이 모이는 곳으로 간다는 것이고, 그것은 모이는 이들끼리 공통으로 약속해야 하는 것들을 자연스럽게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곳은 한씨가 떠났던 대처의 논리와 같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대처의 논리는 모든 이에게 기회와 형평을 제공하지는 않는다.

중앙은 항상 기득권을 가지려는 자들로 넘쳐나고, 그러한 풍경에 눈살을 찌푸리는 이들은 떠나온 곳을 생각한다. 그곳이 이 시로 말하면 ‘종가’이고, 일반적으로 말하면 고향이며, 시와 문학으로 말하면 그들이 나고 성장한 지역이 아닐까. 그렇다고 지역이 서울과 중앙을 등진 이들이 다시 복귀하는 곳이라는 뜻은 아니다. 지역은 많은 사람들이 모여드는 중앙의 대척점으로도 존재할 수 있어야 하며, 실망하고 돌아온 이들에게 위안과 힘을 불어넣는 역할도 역시 수행할 수 있어야 한다.

종가는 또한 뿌리이다. 지역에 기반을 둔 많은 시인들은 자신들이 나고, 성장하고, 조바심 치고, 고통 받고, 그토록 떠나고 싶거나, 혹은 전혀 떠나고 싶지 않은 지역을 거쳐 시인이 된다. 지역 잡지는 그러한 시인들에게 시를 쓸 수 있도록 힘을 제공해야 하며, 그러한 시인들이 될 후보자들에게 기회를 제공해야 한다. 또한 중앙의 모습에 지쳐 돌아온 이들에게는 안식과 재기의 기회를 주어야 하며, 과거와 시작을 알고 싶은 이들에게는 뿌리와 근원을 확인시켜야 한다.

지역의 잡지는 지역의 시를 일으키는 역할을 해야 하는 동시에, 지역의 시로 복귀하거나 지역의 시로 자신의 시를 보완하도록 도와야 한다. 그것은 어떤 측면에서는 중앙과의 대립을 일으키게 만들기도 하고, 어떤 측면에서는 중앙과의 보완을 촉발시키기도 할 것이다.

그러면서 동시에, 전 주인이 나간 자리를 누군가가 지킬 수 있도록 배려해야 한다. 「종가」에서 한씨가 집을 비운 후, 그 집은 많은 다른 이들의 터전이 되었다. 나무와 그의 동반자인 그림자, 흙담, 무청, 두엄, 튓마루, 달(빛), 옥수수, 가마솥, 뒷산 개구리, 이 빠진 그릇, 쥐들.

특히 한 생을 한자리에 서서 평생을 견딘 나무는 어쩌면 한씨 이전에 이 집 주인이었는지 모르며, 설령 아니라 해도 현재는 이 집을 증언할 수 있는 가장 명망 있는 주인임에 틀림없다. 마찬가지로 지역의 시는 지역의 정서와 문화와 삶과 열정을 지키는 자들에 의해 유지되어야 한다. 그것은 지역의 개성만을 옹호하자는 것은 아니다.

「종가」에서 여러 집주인들은 긴장할지언정, 먼저 주인 한씨의 방문을 가로막거나 방해하지 않았다. 그들은 한씨 역시 또 한 사람의 집주인으로 받아들일 마음의 자세가 되어 있었다고 단언할 수 있다. 또한 마찬가지로, 지역의 잡지는 해당 지역 사람들뿐만 아니라, 그 지역민이 아닌 사람들에게 문호를 개방하는 잡지여야 한다. 그렇지 않고서는 그 집은 ‘종가’가 될 수 없을 것이다. ‘종가’는 많은 이들이 그 중요성과 우월성을 인정할 때만, 탄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7. 지역 잡지 편집자들에게:지역 잡지란 과연 무엇이어야 하는가.


중앙, 중앙, 중앙이 무엇이길래

중앙은 사람들을 길들이려 하나

중앙, 중앙, 중앙이 무엇이길래

맘에 들지 않는

중앙에게 등 돌리지 못하고

사람들은 자꾸만 굽실거릴까

중앙이 다 그러는 것은 아니지만

중앙은 무엇이 부족해

변두리라는 중앙과 어울려

세를 넓히려고 하나

중앙, 중앙, 중앙이

우리를 엿먹인다는 것을

가지고 논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대항하지 못하고 매달리는 사람들

중앙, 중앙, 중앙이

간간지 던져주는 떡밥에

사족을 못쓰는

중앙에 충성하는 일부의 사람들이

중간에서 농간을 부리기 때문일까.

―김재석, 「중앙, 중앙, 중아이 무엇이길래」 부분


김재석의 시는 처절하다 못해 허탈한 웃음까지 자아낸다. 그의 말대로 다시 물어보자. 중앙은 과연 무엇인가. 그 대답이 쉽지 않다. 그러면 바꾸어 물어보자. 왜 지방, 혹은 지역, 아니 변두리에 있는 것은 모자라다는 생각을 자아낼까. 왜 시인들은, 문학평론가는, 잡지를 편집하는 사람들은, 문학하는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지역 거점에 만족하지 못하고, 지역을 떠나 중앙으로, 중심으로 움직이려 하는 것인가.

현재 우리 문단의 문제점 중 하나가 지역 잡지의 창궐이다. 오해를 불식시키기 위해 부연하자면, 그 자체로는 문제될 것이 없다. 지면이 늘고, 활동무대가 늘고, 등용문이 늘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면은 느는 것이 곧 발표 기회의 확대를 뜻하지는 않는다. 지역 잡지가 늘어난다고 해서 글을 발표하고 싶고 인정받고 싶어 하는 욕망마저 충족시키지는 못한다. 늘어난 지면은 다시 위계를 만들 것이고, 많은 작가들과 평론가들과 문학하는 사람들은 상위 위계 즉 지명도 있는 중앙 지면으로 나아가고자 할 것이다.

늘어난 지역 잡지는 마치 중앙 무대로 나가기 위한 계단쯤으로 인식되거나, 중앙 무대의 여분 공간 정도로 인식되는 것이 사실이다. 그 책임은 어디에 있을까. 김재석의 경우처럼, 중앙이라는 매력에 시인들이 사로잡혀 있어서일까. 인정받기 위한 시인의 욕망은 모든 문학하는 사람들의 자연스러운 소망이니, 함부로 비난해서는 안 될 것이다. 다만, 왜 우리는 지역 잡지가 필요한가라는 근본적인 물음만큼은 잊지 말도록 하자. 그토록 중앙이 소중한데, 왜 지역 잡지를 만들어야 할까. 그냥 중앙잡지를 더 만들면 되지 않을까.

지역의 잡지는 지역이 그 잡지를 꼭 필요로 하는 이유를 가지고 있을 때에만 진정 지역을 대표하는 잡지가 될 수 있다. 하지만 우리 문단의 사정은 그렇지 않은 것 같다. 많은 잡지들이 지역의 필요성보다는, 문학적 섹트와 헤게모니 건설을 위해 창간되고 있고 또 창간되었기에 어떻게든 유지하려고 하고 있다. 지역 잡지들이 주관하는 행사들과 수많은 특집들이 타잡지와 별반 차별화되지 않은 상태에서, 단지 유지하기 위해서 끊임없이 반복 재생산되고 있는 형국이다. 왜 필요한지는 설명하지 않고, 이미 존재하기 때문에 계속 생산되어야 한다는 논리라고나 할까.

지역 잡지 출판인이나 편집위원들은 섭섭한 이야기일 테지만, 목적 없는 잡지가 결국 문학의 위기를 초래하고 있다. 지나치게 많은 소리는 결국 아무 소리도 아닌 것이다. 문학이 누군가를 향한 근원적인 외침이라고 할 때, 우리는 꼭 필요하지 않은 외침들로 가득한 세상을 만들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나는 이 지면을 통해서 그 외침들 중에서―내가 생각하기에―지역 잡지에 꼭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소리들만을 구별해 보려고 했다. 때로는 지역민이 들으면 웃을 수 있는 이야기도 했을지 모른다. 지역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주변 지역민으로서의 낯선 시각을 내놓기도 했을 것이다.

하지만 무엇보다 먼저 말하고 싶은 것은, 지역 잡지 관계자들이 지역 잡지를 통해 중앙과 경쟁하고 중앙에 못지않은 잡지를 만들겠다는 생각을 버려야 한다는 점이다. 지역 잡지가 정녕 지역 잡지가 되기 위해서는 지역에 필요한 일을 한다는 생각이 먼저가 되어야 한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하지만 우리의 잡지들은 이 당연한 생각을 지금 너무 망각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다. 그것을 일깨우는 것도 지역 잡지의 몫이 아닌가 한다.



김남석∙1973년 서울 출생. 1999년 <중앙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저서 <비평의 교향악> 등. 부경대 교수. 본지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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