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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호 초첨/임태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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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결되지 않은 별자리 찾기―문악과 호러
임태훈|소설가
1. 문악文樂이라는 놀이
봄호에 실었던 첫 번째 글에 대해, 어떤 분에겐 메일을 통해 또 다른 분에게선 직접 만나 의견을 들을 수 있었다. 그런데 왜 하필 ‘문악文樂’이라고 부르냐고 이상하게 여기는 분들이 적지 않았다. ‘즐거움’이라는 의미로 ‘樂’을 썼다면 ‘락’이나 ‘낙’으로 읽었어야 정확하지 않느냐는 지적도 있었다. 또 어떤 분은 ‘文樂’이라고 한자어를 쓰는 건 고전적인 냄새를 풍겨 별로였다는 의견도 주셨다. 그런데 의견을 청취하는 입장에서 흥미로웠던 점은, 그분들이 ‘문학’과 ‘문악’을 연이어 발음할 때였다.
‘문악’이라는 명명命名에 의도된 감각은 ‘된장공장공장장’하는 식의 언어유희다. ‘문악’과 비슷한 발음의 ‘문학’을 연상하게 하면서도 동시에 ‘문학’과는 개념적으로 다름을 의식하게 만들고 싶었다.
‘문악’의 의미를 다시 한 번 정의하면, 이것은 읽는 쾌감 그 자체이면서 읽는 행위를 기쁘게 자기 가치화하는 역능力能을 일컫는다. 그렇지만 ‘문학’과 달리 개별 작품으로 환원될 수 있는 개념이 아니다. 왜냐하면 텍스트를 넘나들며 지속되는 읽는 행위의 ‘운동성’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문악文樂이 추구하는 것은 나를 기쁘게 하는 텍스트들과의 마주침이며, 더 나아가 마주침의 빠름과 느림의 관계를 즐기는 일이다.
어쨌든 매뉴얼이라면 구체적인 물건을 제시해야 할 것이다. 이장욱의 장편소설 <칼로의 유쾌한 악마들>과 김종일의 연작소설 <몸>을 소개한다. 두 작품은 한국 문학이 장르 문화와 이룬 접변接變 가운데 가장 주목할 만한 수작들이다. 우선 두 작품을 분석한 뒤, 문악과 관련하여 갖는 의의를 이야기하도록 하겠다.
2. 칼로의 유쾌한 악마들
<칼로의 유쾌한 악마들>은 세 사람의 죽음에 관한 이야기이다. 이들은 모두 같은 장소에서 죽었다. 두 사람은 자살이고, 나머지 한 사람은 철로 밖으로 떠밀렸다. 고의는 아니지만 우연이라고도 말하기 힘들다. 이 남자는 대학을 졸업하고 군대를 제대한 뒤 백수로 지내고 있었다. 그가 이 소설의 내레이터이다. 굳이 이 청년이어야 했던 이유는 특별히 없어 보인다. 소설의 내레이터는 백수 청년으로서 이야기하지 않는다. 세 사람의 죽음이 집적되어 있는 회로 위를 그는 조망한다. 그는 사자死者의 시선으로 소설에 맴돈다.
청년은 외팔이 남자에게 부딪혀 철로 위로 떨어졌다. 이 외팔이는, 또 다른 두 사람의 자살자, 여자와 기관사의 자살을 목격한 사람이다. 이런 걸 우연의 일치라고 불러야 할까? 우리는 앎만큼이나 무지를 필요로 한다. 세상을 애매모호한 상태 그대로 사고하는 일에 우리는 익숙하지 못하다. 상식의 프레임 안에 대상을 겨냥하는 일이야말로 신뢰할 만하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프레임 바깥에 대해 판단을 중지하는 일은 당연하게까지 여겨진다. 오히려 그런 영역의 존재 자체를 의식하지 못하는 때도 허다하다. 우리는 한 줌의 앎을 쥐기 위해 헤아릴 수조차 없는 거대한 무지를 등지며 살아간다. 그래서 ‘우연’이라는 말은 무지의 음영陰影에 불과할지 모른다.
사자는 자신의 죽음과 관계된 퍼즐을 하나씩 맞춰나간다. 애당초 자신의 죽음에 음모 따윈 없음을 알고 있다. 그렇기에 사자의 시선엔 원망도 회한도 없다. 그렇지만 일면식도 없던 이들의 평생이 백수 청년의 허무하기 이를 데 없는 죽음과 연루돼 있다.
‘확실히 이 모든 것은 한 여자의 두통에서 시작되었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면, 꼭 그렇다고는 말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모든 것은 윌리엄 월슨 콤플렉스라는 이상한 질병에서 시작되었는지도 모른다. 로또 복권이나 홈쇼핑에서 시작되었다고 누군가 주장한다 해도 틀렸다고는 할 수 없다. 아니, 이 모든 것은 한 마리의 치와와나 한 마리의 비글 때문이거나, 휘휘 허공을 휘젓는 왼쪽 팔의 흔적 때문이거나, 갈라파고스라는 알 수 없는 섬의 자이언트거북 때문일지도 모른다.’(213p)
사자는 ‘글쎄’라고 중얼거리며 좀 더 생각해 본다. 그래도 궁금증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그에게 과거는 미시 우주처럼 열려있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볼수록 거기엔 또 다른 차원이 입을 벌리고 도사리고 있다. 그 길을 따라가면, 너와 나는 어떤 방식으로든 연결되어 있음을 확인하게 된다. 우리는 공존재共存在이다. 죽음은 우리의 공동 숙명이다. 우리는 서로의 죽음에 연루되어 있다. 복잡하게 톱니가 맞물린 기계를 떠올려 보자. 톱니의 작은 딸깍거림이 다른 톱니를 움직이고, 연달아 회로 전체를 완주한 힘은 어김없이 죽음을 생산해 낸다. 우리는 회로 속의 부품이며 회로 그 자체이다. 죽음을 생산하는 자이며 죽음 그 자체이다. 모든 죽음은 타살의 혐의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철로에 뛰어들기 전, 기관사는 자신의 과거가 지금 이 순간을 향해 오랫동안 침전되어 왔음을 깨닫게 된다. 어릴 때 그는 쌍둥이 형을 똑같이 따라했다. 형제는 두 몸뚱이에 한 영혼을 공유한 것처럼 모습이며 행동이 꼭 닮아 있다. 하지만 형이 교통사고로 죽은 뒤로 동생은 심각한 강박증을 앓기 시작한다. 그런 그를 이해해 줄 것 같던 여자도 만났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헤어지고 말았다. 기관사가 된 뒤에도 어둡고 긴 터널 안에서 쌍둥이 형과 옛 애인의 환영에 시달린다. 그가 몰던 전철에 여자가 치인 뒤론 강박증이 극에 달하게 된다. 결국 그는 철로 밖으로 몸을 던진 여자의 행동을 똑같이 따라하게 된다. 그제야 그는 자신이 사랑했던 사람을 꼭 닮을 수 있게 된다.
철로에 뛰어든 그 여자는 동화작가였다. 남편은 불륜 중이었고 딸은 자폐증에 걸렸다. 공들여 쓴 동화는 퇴자를 맞았고 친정 엄마는 치매를 앓고 있다. 이 여자는 조금 뒤에 일어날 일이 무엇인지 재빨리 감지해내는 능력이 있다. 물론 초능력 같은 건 아니다. 일상 자체가 반복의 연속이기 때문에 예상을 깨는 일 따윈 좀처럼 생기지 않는 법이다. 따지고 보면 이런 식의 지레짐작은 어려운 일도 아니다. 여자의 몸은 일상의 리듬에 거의 완전히 일치해 있었다. 그런데 바로 그 몸이 그녀 자신을 기만했다. 여자는 열차가 눈앞에서 멈춰서 자동문이 열리는 것을 봤다. 그리고 여느 때처럼 출입문 안 쪽으로 발을 내딛었다. 하지만 실제로 여자가 내딛은 곳은 허공이었다. 철로 위로 떨어진 여자의 몸 위로 열차가 달려들었다. 리듬이 엇나갔던 것이다. 그렇다면 그녀 앞에 멈춰선 그 열차는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비정상적인 환영이 아니다. 여자의 몸이 정상적으로 산출해낸 세계다. 여자는 그 세계를 살아왔다. 우리도 조금도 다르지 않은 방식으로 살고 있다. 이런 환영은 실제의 일상과 구분할 수 없을 만큼 감쪽같이 겹쳐 있다. 그래서 그 둘을 분리해서 생각할 수조차 없다. 이를테면 이런 상황을 떠올려 보자. 자기 집에서는 정상인처럼 감쪽같이 행동할 수 있는 시각장애인이 있다. 십수 년째 그의 집안 가구며 물건의 배치는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문을 열거나 물건을 쥘 때마다 그는 머릿속엔 자연스럽게 이미지가 떠오른다. 이미지는 언제나 실제와 겹쳐지며 온전한 생활을 보장한다. 하지만 누군가 집의 구조와 가구의 배치를 완전히 바꿔놓는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그래서 문고리일 거라고 믿고 쥔 것이 달궈진 프라이팬이었다면? 이런 일은 멀쩡히 눈 뜬 사람에게도 벌어질 수 있다.
세 사람의 죽음을 모두 목격한 외팔이 남자는 그 누구보다 그들의 죽음을 분명히 목격했다. 이 남자는 극심한 불면증 환자인데다 죽은 아내를 냉장고에 넣고 생활하고 있다.
‘안전선 근처에서 여자는 고장 난 텔레비전 화면처럼 흔들렸다. 남자는 멍해지는 시선에 힘을 주고 여자를 바라보았다. 여자가 서 있고, 여자에게서 흘러나온 여자가 안전선 쪽으로 걸아 갔다. 흘러나온 여자는 노란 안전선 앞에 잠시 멈추더니, 한 손을 올려 머리 언저리를 누르는 것 같았다. 마치 두통이라도 있다는 듯한 자세였다. 여자가 관자놀이를 매만지는 동안 여자 뒤의 여자가 여자를 따라 천천히 걸어가 부드럽게 여자에게 겹쳐졌다. 그때 안내 방송이 역사에 울려 퍼졌다.’(46p)
이 소설에서 외팔이 남자는 칼로의 그림에 등장하는 노인처럼 보인다. 온갖 기괴한 환영과, 환영보다 끔찍한 현실이 그를 휘감고 있다.
‘펜화인지 판화인지 분간이 되지 않는 흑백의 그림이었다. 폐허 같은 곳인데, 아마 사원이 아닌가 싶었다. 폐허 위쪽으로는 기괴하게 생긴 커다란 짐승이 하늘을 날고 있고, 입에서는 검은 연기가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그 주위에 뿔과 날개를 가진 이상한 인간들이 어지럽게 날아다니고 있는데, 가만히 살펴보니 인간이 아니라 작은 악마들 같았다. 제대로 된 사람이라고는 오른쪽 아래 구석에 그려진 노인뿐이었지만, 무슨 수도승 같은 차림새를 한 노인은 그나마 겁에 질려 있는 듯하다. 전체적으로 뭐가 뭔지 분간이 안 될 정도로 어지러웠다.’(174p)
이 그림은 자크 칼로(Jacques Callot)의 1635년 작인 「성 안토니의 유혹Temtation of St Anthony」이다. 이 그림에 얽힌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사막에서 홀로 수도생활을 하던 성 안토니는 악마들의 온갖 방해에 시달렸다. 악마는 온갖 음란한 생각, 기분 좋은 자극, 여자의 교태 등으로 안토니를 유혹하려 했지만 모두 수포로 돌아갔다. 그러자 악마는 무지막지한 폭력으로 그를 좌절시키려 했다. 마귀 떼들이 안토니를 잔인하게 구타했다. 하지만 그는 굴복하지 않고 ‘너희가 분별없는 짐승들의 모습으로 가장한 것이 바로 너희가 약하다는 증거이다’라며 당당히 비웃어줬다. 소설에 인용된 칼로의 그림은 바로 이 일화를 그린 작품이다. 보쉬, 달리, 에른스트도 같은 제재를 취해 기괴한 화풍을 뽐낸바 있다.
소설의 화자인 백수 청년도 칼로의 악마들을 본다.
‘지금 나는 다만 자크 칼로의 기이한 풍경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다. 미친 듯이 날아다니는 유쾌한 악마들이 승강장에 가득하다. 악마들은 날개 소리와 함께 기괴하게 날카로운 울음소리를 내고 있다. 인간에게는 들리지 않는 소음들이, 조금은 얼이 빠진 듯한 사람들의 귓속으로 들어갔다가 빠르게 흘러나온다. 대체 저 유쾌한 표정의 악마들이란 무엇인 것일까?’(214p)
성 안토니에 대한 첫 번째 공격에서 악마가 이용한 무기는 안토니의 ‘배의 힘줄’(욥40:16)이었다. 환영은 외부로부터 찾아온 것이 아니라 안토니의 몸으로부터 생겨났던 것인지 모른다. 칼로의 그림을 가득 메운 마귀 떼도 마찬가지다. 외로움과 고독이 악마를 만들어낸다. 이런 일은 성 안토니에게만 일어나는 게 아니다. 인간의 여린 마음 한 편엔 악마를 기르는 태胎가 자리하고 있다. 우리는 성자聖者처럼 악마와 대결하려 하지 않는다. 악마들도 우리를 공격하지 않는다. 다만 침울한 인간들의 머리 위에서 한껏 유쾌함을 뽐내며 저희들끼리 어울려 날아다닐 뿐이다. 그것들은 한 박자 늦게 도착하는 상징에 불과하다. 악마보다 유독한 것은 우리의 외로움 그 자체일 것이다. 외로움은 한 사람 안에 고이지 않고 난반사한다. 그래서 관계로부터 고립된 사람은 관계를 거부하는 사람이기도 쉽다. 이 우울한 회로 안에 들어서면 벗어나기 힘든 악순환이 시작된다.
지금 이 순간도 누군가 악마를 하늘로 날려 보내고 있다.
3. 몸
<칼로의 유쾌한 악마들>이 각광받는 비평가이자 시인의 첫 번째 소설이라면, <몸>은 국내에 몇 안 되는 공포소설작가의 본격물이다. 미리 밝혀두건대, 이 둘 사이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가능한 ‘문악’의 계기이다.
두 작품의 공통점은 호러(horror) 코드를 통해 독자와 소통한다는 데 있다. 그리고 두 작품 모두 장르문화가 강조하는 ‘기대와 부응’의 법칙을 충실히 따르고 있다. 그 법칙이란 이런 것이다. 에로물을 감상한다고 할 때, 화끈한 베드신과 노출을 기대하는 것은 당연하다. 공포물 역시 공포물다운 화끈함이 드러나지 않는다면 시시하다는 악평을 면키 어렵다. 그래서 장르 소설을 읽는 일이란 무엇을 읽고 싶은지 알고, 무엇을 썼을지 아는 ‘기본’을 딛고서 시작된다.
이장욱은 ‘작가의 말’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허무주의나 장르 같은 것이 날 자유롭게 하지 않으리라는 것쯤은 알고 있다. 하지만 허무주의나 장르에 대한 매혹 없이는 검은 고양이도 흰 고양이도 울어주지 않는다.’(230p)
결국 독자를 매혹하는 일이 중요하다. 문학도 문악도 여기서 시작한다. 책이 독자의 몸을 동하게 하지 않는 상황에서 문단/비문단, 교양/비교양, 장르/순수의 구분은 허무하기 짝이 없다. 검은 고양이든 흰 고양이든 울게 하려면 작가는 자신의 글로 독자를 꾀어낼 수 있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독자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작가는 혼잣말하는 존재가 아니다. 천생 가까이에서 고매한 정신세계를 뽐내는 이는 더더욱 아니다. 독자와의 ‘이야기’에 실패하는 한, 그들은 아무것도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김종일의 <몸>이 지닌 매력을 눈여겨보지 않을 수 없다. <몸>은 눈, 입, 얼굴, 귀, 머리카락, 구토, 몸, 손에 관한 연작 소설이다. 콤플렉스와 스트레스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이 작품에 대해 이야기하기 위해선 본의 아니게 장르문화의 불문율을 어겨야 할 것 같다. 만약 <몸>을 미지의 상태에서 읽길 원한다면 아래는 스포일러로 읽힐 수 있으니 세 단락 건너 뛰어 읽어도 좋다.
「눈」의 주인공은 소심하고 유약한 남학생이다. 그는 불량배에게 린치를 당해 오른쪽 눈을 잃는다. 그 후로 소년은 의안義眼을 끼고 살게 된다. 그런데 이 의안이 불가사의한 초능력을 일깨운다. 상대의 몸을 시선을 통해 조정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소년은 자신을 해코지한 불량배를 찾아 잔인하게 응징한다. 그런데 그 후로 의안은 점점 부풀어 오르기 시작한다. 소년은 몸뚱이를 통째로 빼앗기고 거대한 눈알 덩어리로 변하게 된다.
「입」의 주인공은 비만 여성이다. 이 여자는 한 남자를 진심으로 사랑했으나, 살이 쪘다는 이유로 모욕적인 대접을 받는다. 큰 충격을 받은 여자는 입을 실로 꿰매는 극단적인 다이어트에 몰입한다. 결국 날씬한 몸으로 거듭나지만 변화는 몸무게만이 아니었다. 그녀의 몸 곳곳에 새로운 입이 생겨났다. 여자는 그 입으로 자신을 업신여겼던 남자를 잡아먹는다.
그리고 「몸」에는 왜소증에 걸린 남자가 등장한다. 그의 키는 148센티, 아내는 170센티이다. 아내는 진심으로 남편을 사랑하지만, 남자의 콤플렉스는 아슬아슬하기만 하다. IMF로 남자가 실직한 뒤엔 부부 사이도 금이 가기 시작한다. 남자는 중증 인터넷 중독 환자로 전락해간다. 거의 광적으로 다운로드와 웹 서핑에 몰두하는 남편을 아내는 못 견뎌한다. 하지만 아내가 나무랄 때마다 남자는 자신의 왜소한 몸을 들먹이며 신경질적으로 반응한다. 결국 부부는 파국을 맞이하게 된다. 컴퓨터를 부수며 화를 내는 아내를 남자는 토막 살해한다. 그리고 남자는 왜소한 몸뚱이를 벗어나 광활한 웹의 바다와 하나가 된다.
「몸」의 주인공들은 결말에 이르러 하나같이 부서져 버린다. 도식적이라고까지 느껴지는 이런 비관주의를 어떻게 받아들어야 할까? 하지만 이런 ‘도식’이야말로 「몸」을 즐기는 핵심이 아닐까? 다시 원점에서 질문해보자.
「몸」은 어떤 소설인가?
거대한 눈알로 변해가는 소년이나 온 몸에 입을 단 다이어트 중독녀의 이야기보다 섬뜩한 것은 ‘뉴스’다. 「몸」에서 느낄 수 있는 것은 ‘진짜 공포’가 아니다. 아무도 소설을 읽으면서 ‘진짜 공포’를 느끼길 원치 않는다. 어떤 작가도 글을 쓰는 일만으로 ‘진짜 공포’를 전할 수 없다. 어두운 밤길을 걷다가 강도의 칼에 배를 열두 번 찔리는 일을 ‘실제로’ 겪는 것과, 이 상황을 소설로 읽는 일이 절대로 같을 리 없다. 모든 공포소설은 ‘공포’라는 말에 괄호를 치게 마련이다. 이 단어는 다른 욕망에 대한 것으로 굴절을 거친다. 「몸」이 독자에게 보장하는 재미 역시 ‘공포’라기 보다는 어떤 ‘후련함’에 가까울 것이다. 주인공들의 고난은 어떤 방식으로든 반드시 ‘끝장’을 본다. 이야기의 전개 속도 또한 대단히 빠르다. 경직된 일상에선 느낄 수 없는 격변激變이다. 격변의 내용보다도 격변 그 자체가 갖는 강렬도强烈度에는 매혹과 불안이 동시에 빛나고 있다.
「몸」은 ‘공포’를 표방하지만 ‘끝장’과 ‘속도’를 즐기는 소설이다. 콤플렉스와 스트레스의 완전 해소란 살아있는 한 언제나 좌절될 수밖에 없는 숙명이다. 현대 자본주의는 그 둘을 성장의 동력으로 전유한다. 비만이 콤플렉스라면 살을 빼기 위해서, 빠진 몸무게를 유지하기 위해서 만만치 않은 스트레스를 겪어야 한다. 이 모든 과정을 돕는 혹은 조장하는 생산과 마케팅이 있을 것이며 소비 또한 꾸준히 반복된다. 이 악순환이 끝장나는 순간은 아득하기만 하다. 자살은 여기서 벗어나는 가장 과격한 ‘끝장’이자 ‘속도’이다. 실제로 적지 않은 사람들이 이 방법을 택하고 있다. 하지만 그런 일을 실제로 저지르기보다 가짜 ‘끝장’을 자주 소비하는 일이야말로 언제나 현명하다. 이것이 공포소설이 남발하는 ‘죽음의 도식’이 갖는 효용일 것이다. 이 설명이 자살하고 싶은 사람이 대리만족을 위해 공포소설을 읽는다는 식으로 이해되지 않길 바란다. 모든 죽음은 자장磁場을 갖고 있다. 삶의 가장 밝고 기쁜 순간에도 죽음의 그늘은 드리워있다. 이것은 공포소설에 흔히 등장하는 저주 같은 게 아니다. 하이데거는 죽음에 대한 고뇌가 없으면 삶의 소중함을 알 기회도 없다고 말했다. 공포소설의 가짜 ‘끝장’을 소비하는 일은 역설적으로 우리의 삶이 계속되고 있음을 확인하는 일이다. 현대사회의 관성화慣性化된 일상은 우리의 감각을 기계화한다. 이런 시대일수록 우리는 감각의 강렬함을 원한다. 가짜 ‘끝장’을 소비하면서 소름이 돋고 심장이 뛰고 속이 메스꺼워지는 순간에도 우리가 확인하는 것은 살아있다는 감각이다.
“우리의 삶은 고통이며 공포다. 따라서 인간은 불행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인간은 인생을 사랑한다. 그것은 고통과 공포를 사랑하기 때문이다.”
「몸」의 한 페이지에 인용된 도스토예프스키의 말이다.
4. 문악 매뉴얼
이 글을 읽는 당신의 책장엔 어떤 책이 꽂혀 있는지? 어떤 이의 책장이나 인력引力과 척력斥力이 작용한다. 지속적으로 끌어당기는 유의 책이 있는가하면, 반대로 냉정하게 밀어내는 책이 있다. 독서 취향이 드러나게 되는 것이다. 그게 무엇이든 나는 진심으로 존중하고 싶다. 이 글에서 두 편의 소설을 소개했다. 그런데 아무래도 조심스러운 게 있다. 부디 이 글이 이 작품을 읽으라는 식으로 받아들여지지 않길 바란다. 읽고, 읽지 않고는 당신의 선택이자 즐거움이다. 나는 그런 이야기를 하고 싶지 않다. 이 글의 목표는 독서의 권장이 아니다. 이번 매뉴얼에서 제시한 것은 이런 소설들이 갖고 있는 즐거움의 두 좌표다. 세상의 모든 책은 그 나름의 가치와 즐거움을 갖고 있다. 하지만 별자리로 연결되는 좌표는 여러 가지 이유로 한정되기 쉽다. 우리 각자의 선택만의 문제가 아니기에 답답함이 앞선다.
<칼로의 유쾌한 악마들>은 문단에서 나온 ‘장르 냄새를 풍기는’ 소설이다. 「몸」은 비문단에서 나온 본격 대중소설이다. 두 점을 연결하는 문악文樂의 모험엔 저항감이 적지 않을 수 있다. ‘문학’이라는 제도에 익숙해진 사람일수록 이 둘을 함께 즐길 기회를 갖기가 쉽지 않다. 장르 문화가 싫을 수도 있다. 대중문학은 유치해서 못 읽겠다는 사람도 있으리라. 호러 코드에 거부감을 느끼는 사람도 적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느끼는 이유를 궁금해본 일이 있을까? 나에게 익숙한 ‘취향’의 정체란 대체 어디서 연유한 것일까? 그간의 독서 체험으로부터 얻어진 것일까? 선입관의 영향은 없는 걸까? 내가 소설을 즐기는 방법이 겨우 한두 가지에 불과하기 때문이라면? 다양한 소설을 좋아하는 일보다 다양한 소설을 싫어하는 일에 더 익숙해져 있다면? 당신의 독서가 드러내 보이는 것은 독서 그 자체인 것만이 아니다. 당신의 삶이 세상과 맺고 있는 구조가 덧씌워져 있다. 그래서 소설과 독서에 대해 논하는 것은 한가롭기만 한 일이 아니다.
어떤 종류의 독서가 당신에게 불쾌하다면, 그 불쾌함을 유심히 관찰해보라. 그리고 ‘진짜 자신의 취향’을 만들어나가길 바란다. 그것은 누군가 가르쳐줘서 되는 일이 아니리라. 어떤 책도 당신 자신이 겪은 모험보다 많은 것을 알려주지 않는다. 우리는 제도가 우리에게 주입한 것보다 훨씬 더 다채로운 즐거움을 누릴 역능을 갖췄다. <칼로의 유쾌한 악마들>과 「몸」은 한 예에 지나지 않는다.
당신이 당신만의 별자리로 만들어 낼 수 있는 책들의 좌표는 실로 무수하다.
임태훈∙2006년 대산대학문학상 평론부문(「비디오 파놉티콘의 죄수-백민석론」)을 수상했고, 1999년 삼성문학상 희곡부문(「애벌레」)에 당선됐다. 2000년 올해의 연극 BEST 5 작품상(「애벌레」)을 받았다. <판타스틱>에 「팽형자」(2008년 2월)를 발표하면서 소설가로도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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