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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호 연재| 김영식의 하이쿠 에세이⑧/김영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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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부
댓글 0건 조회 2,961회 작성일 09-01-19 1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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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식


1.
 한 여인숙에서 
 유녀도 같이 자네
 싸리꽃과 달

 一つ家に遊女も寢たり萩と月(芭蕉)
 hitotuyani yujomo-netari hagi-to-tsuki (basho)

 방랑길에 묵은 어느 여관에 우연히 유녀遊女도 함께 투숙하였다. 마당에는 싸리꽃이 피어있고 하늘에는 달이 떠 있다.
 유녀는 술집 여자나 기생, 창녀를 말한다. 일본어로 ‘놀자(遊ぶ)’는 매춘을 의미하기도 한다. 이 구의 해설에 따르면 바쇼와 제자가 묵은 여관에 여행길의 유녀들도 우연히 옆방에 투숙하였다고 한다. 그 유녀들을 불러 술 마시고 놀다 잠까지 같이 잘 수도 있었지만 바쇼는 출장길의 돈 많은 상인도 아니며 나이도 한창 때가 아니다. 더구나 제자와 동행이므로 사정은 여의치 않다. 그렇지만 유녀와는 벽 하나 사이로 누워 있으니 바쇼는 남자로서의 욕정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유녀와의 교섭에 대한 상상으로 몸을 뒤척이며 잠 못 이루던 바쇼가 밖으로 나가보니 마당에는 싸리꽃이 아름답게 피어있고 하늘에는 훤한 달이 떠 있다. 싸리꽃은 유녀이고 자신은 달이 된다. 지상의 아름다움과 하늘의 아름다움은 그 미의 세계가 다르다. 싸리꽃은 속세에서 피고 지지만, 달은 영원 속에 떠 있다. 언뜻 보면 영원히 먼 거리에 있는 두 존재처럼 생각되나, 밤의 싸리꽃은 하늘의 달빛에 의해 비로소 아름답게 자태를 드러낸다. 사는 세계는 다르지만 음(地)과 양(天)은 빛으로 합일(한 집, 자다)한다. 바쇼는 유녀와 실제로 잠을 자지는 않았지만, 잔 것이나 다름없는 마음을 노래한다. 세속을 떠난 하이쿠 여행이지만 세속의 사랑을 잃지 못한, 아니 사람이기에 잃어버려서도 아니 되는 그 마음이 엿보인다. 
 비록 어떤 사정이 있거나 삶의 갈 길이 달라 다시 못 만난다 하더라도 매순간 스치는 인연은 소중하다. 물레방앗간에서 우연히 만난 처녀와의 하룻밤 사랑은 아름다운 메밀꽃으로 들판에 가득 피어나듯, ‘싸리꽃 필 무렵’의 사랑은 이렇게 한편의 하이쿠로 남았다. 


   2.
 산길을 가다 
 왠지 그윽한 향기 
 제비꽃 하나 

 山路きて何やらゆかしすみれ草(芭蕉) 
 yamaji-kite naniyara-yukashi sumire-kusa (basho)

 홀로 한적한 산길을 걸어가다 문득 길옆에 피어있는 가련한 제비꽃을 보았다. 그 은은한 보라색 꽃이 왠지 모르게 반갑고 사랑스럽게 느껴진다. 
 외롭게 걷는 방랑의 인생길에, 시인의 발을 멈추게 하는 제비꽃은 마치 그윽한 향기를 가진 여인과도 같다. 여인의 매력에 발걸음을 멈추고 그 자리에 머물러 한껏 향기에 취해보고 싶다. 더 나아가 여인이 내 거친 인생길에 동반자가 되어 준다면 얼마나 행복할까 생각해 보기도 한다. 그러나 꽃은 그 자리를 떠나지 못하는 운명을 가졌다. 시인이 가지려고 손으로 뽑아 버리면 꽃의 그윽함은 이내 시들어 사라진다. 꽃을 꺾는 시인의 마음은 그 순간 진실이지만, 그러나 그 이후로 향기가 사라진 꽃을 되살릴 수도 없고 차마 버리지도 못하는 멍에를 쓰고 만다. 방랑 속에서 살아가는 시인은 여인을 책임질 수도 없다. 시인은 제비꽃을 뒤로하고 아쉬움에 무거운 발걸음을 내딛는다. 

   3.
 나비를 쫓아
 봄날의 깊은 산을
 헤매이누나

 蝶おうて春山深く迷ひけり(久女)
 cho-oute haruyama-hukaku mayoikeri (hisajo)

 여류 하이진(俳人. 하이쿠 시인) 히사조(久女 1890~1946)의 작품이다. 
 ‘나비를 쫓아’는 자신이 쫓는 대상이 나비이다. 그 나비는 하이쿠일 수도 있고, 스승 교시(虛子)일 수도 있다. 봄날 나비를 쫓고 또 쫓아 산 속을 헤매는 자신에 대한 안타까움이 엿보인다. 
 꿈꾸는 자(夢想家 dreamer)와 결혼하지 말라고 한다. 몽상가는 현실에 만족하지 않고 죽을 때까지 꿈을 찾는다. 꿈을 이루기 위해 노력하는 것은 좋다. 그러나 그 꿈이 허황되거나 오염된 것일 때, 현실의 삶은 그 꿈으로 인해 괴로워진다. 히사조의 꿈은 안타깝게도 욕심에 물든 것이었다.
 히사조는 동경의 여학교 졸업 후 동경미술학교 출신의 스기다와 결혼, 교사가 된 남편을 따라 큐슈의 고쿠라에서 살게 되나, 화가의 꿈을 버린 예술적으로 무능한 남편에 대한 실망감으로 자신의 꿈을 찾아 나섰다. 지금도 존재하는 하이쿠 최고의 동인지 [호토토기스(ホトトギス. 두견새)]의 지도자 다카하마 교시(高浜虚子)의 제자가 되어 뛰어난 구를 많이 발표하였다.
 그러나 그녀의 몸과 마음은 밖으로 나돌았다. 물론 두 가지 일을 동시에 하는 것은 힘들어 가족의 희생을 필요로 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문단생활에서도 그녀의 인간관계는 좋지 않았다. 마쓰모토 세이초의 소설 ‘국화베개(菊枕)’는 그녀의 이야기인데, 제목에서 상징하듯 그녀는 국화 꽃잎으로 정성스럽게 베개를 만들어 스승에게 바치는 등, 스승에게 몸과 마음을 다 바쳤다. 그러나 그것도 정도를 벗어나기 시작하여 스승의 총애를 독차지하기 위해 남들의 시선도 아랑곳하지 않는 행동을 일삼다가 결국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다는 이유로 동인에서 제명되었다. 예술가이기에 그럴 수 있다고 인정할 수도 있지만, 과연 후세에 남을 수 있는 걸작 때문에 현세의 부덕에 눈 감을 수 있는 것일까. 극단적인 말이지만 창작의 욕심으로 살인을 할 수 없듯, 예술가라 하더라도 현실사회 속의 자기를 잃지 말아야 한다. 만년에 정신병원에 입원하여 죽음을 맞이한 그녀의 삶은 안타깝게도 문학 본연의 길은 결코 아니었다.  
 장자莊子의 호접지몽胡蝶之夢은 내가 나비 꿈을 꾼 것인지 나비가 내 꿈을 꾸는 것인지 모르겠다는 말이다. 현실의 내가 나비(꿈)를 쫓고 있지만 나비는 현실의 나를 꿈꾸고 있는 것이 아닌가. 나는 저 세계를 꿈꾸지만 나비는 이 세계를 꿈꾼다. 히사조가 쫓는 나비는 문명(文名)의 성취와 스승의 사랑이지만 나비가 날아가는 곳은 잃어버린 그녀 자신의 세계이다. 나비를 쫓아 산속을 헤맨 끝에 나타난 풍경에는, 그녀가 떠나온 고향의 자연과 가족이, 그리고 옛날의 순수했던 어린 그녀가 방긋 미소 지으며 서 있을 것이다.

 참고로 전 시대의 여성 치요조(千代女 1703~1775)의 나비에 관한 구를 하나 소개한다. 

 봄 나비들아 무슨 꿈을 꾸기에 날개 짓하니(손순옥 역)

 蝶蝶や何を夢見て羽づかひ
 chochoya naniwo-yumemite hanedsukai

 치요조는 지금의 이시카와현 하쿠산시에서 표구사의 딸로 태어나 12세부터 시작을 배워 16,7세부터 두각을 나타냈다. 18세에 결혼하였으나 25세에 남편과 사별하고 곧이어 하나밖에 없던 아이도 죽어 친정으로 돌아왔다고 전해진다. 1753년에 출가, 73세에 사망하였다. 그녀는 영주의 지시로 조선통신사에게 헌상할 하이쿠를 지은 적도 있다. 하시조의 나비와 치요조의 나비, 그리고 당신의 나비를 비교해 보기 바란다.


 김영식∙1962년 부산 출생. 2002년 ≪리토피아≫ 수필 등단. 번역서 모리오가이의 기러기. 아쿠타가와 류노스케의 「라쇼몽」 ‘일본문학취미’ 사이트 운영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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