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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호 신작단편/김병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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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부
댓글 0건 조회 2,412회 작성일 09-01-19 12: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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움마에 천국을 건설하라
/김병덕




어둑새벽, 정윤은 교회로 들어선다. 아무도 없는 줄 알았는데 단상에 엎드려 통성기도를 하는 목사님의 뒷모습이 보인다. 그녀는 발소리를 죽여 안으로 들어간다.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님을 보자 어지러웠던 마음이 한결 가라앉는다. 
밀알이 될 수 있다면…….
정윤은 조용히 기도를 한다. 육신의 고통을 초월한 주님께 모든 것을 맡기자. 당신의 뜻대로 이루어질 것이다. 사지에 뛰어들기로 결정한 후, 지난 삼개월간 사역을 담당할 형제자매들과 아프가니스탄 언어를 배우며 한국 이슬람 연구소에서 강좌를 듣고 의료 봉사를 준비했다. 그러나 막상 떠날 날이 하루하루 다가오자 조금씩 마음이 흔들린 것도 사실이다.
생에의 미련 따위는 없다. 그곳에서의 죽음도 두렵지 않다. 사탄의 땅에서 순교한다면 차라리 영광이다. 주님은 죽음의 대가를 천국에서 보상하실 것이다. 젖과 굴이 흐르는 가나안 땅에서 당신의 자애로운 손길을 받으며 천사들과 마음껏 노래하고 뛰노는 영생은 정윤이 소원하는 바이기도 하다. 
오직 걸리는 것은 전남편이 키우고 있는 초등학생 아들이다. 새엄마에게 혹시라도 박대나 당하지 않는지 평소에도 노심초사했지만 결단을 한 이후로 근심이 더욱 크다. 어쩌면 마지막이 될지도 모를 아들의 얼굴을 단 한번만이라도 보고 떠났으면 싶다. 하지만 전남편은 단호히 거부했다. 아들에게 새로운 혼란을 주기 싫다는 이유에서이다. 
정말 아이를 사랑한다면 그런 얘기는 더 이상 하지 마. 전화도 걸지 말고. 이 후, 몇 차례 건 전화를 그는 아예 받지 않는다. 출국 전에 학교로 찾아가 먼발치에서나마 아이를 보아야겠다. 정윤이 할 수 있는 최선책은 고작 그 정도이다. 
묵도를 하며 정윤은 흐느낀다. 서른여덟, 많은 인생을 살지는 않았지만 이혼한 다음부터는 악의 구렁텅이에서 헤어나지 못했다. 처음에는 마음을 다잡고 살았다. 직장생활도 했고 부동산으로 제법 재미도 봤다. 그러나 그런 삶은 아들을 잊기 위한 몸부림에 다름 아니었다. 길거리나 텔레비전에서 아들 또래를 보면 쏟아지는 눈물을 주체하지 못했다. 집안 장손을 애지중지하는 시어머니의 악다구니도 두려워하지 않고 아이의 집으로 찾아갔지만 그들이 이미 외국으로 떠난 다음이었다. 전남편이 해외 지사 발령을 받았다는 것은 회사에 전화를 해서 알게 되었다. 
깊은 상실감에 술 담배를 입에 댔고 아무 남자랑 거리낌 없이 몸을 섞었다. 산골 처녀의 청순한 삶은 이제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어느 새벽, 술에 취해 비틀거리며 우연히 들어선 교회. 그녀는 타락한 자신의 삶을 주님께 거짓 없이 고했다. 주님은 그녀의 가슴 한복판에 강림했고 당신의 가슴팍에 파묻힌 그녀는 회개의 눈물을 흘리며 울부짖었다.
죄 많은 어린 양이여. 내가 고통 받는 너희를 위해 왔노라.
정윤은 사방을 둘러보았다. 단상의 예수님은 지긋한 눈길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다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 부드럽게 귓전을 울리던 목소리는 가슴에 또렷이 남았다. 
주여, 더럽고 추한 제가 죄를 사함 받을 수 있겠습니까?
주님의 따뜻한 눈빛을 정윤은 느꼈다. 신이라는 존재를 충분히 감지하게 하는, 하여 죄인은 모든 것을 당신께 의탁하게 만드는 인자한 시선. 인간으로서는 감히 흉내조차 낼 수 없는 눈길에 정윤은 당신의 존재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날 이후로, 정윤의 삶은 바뀌었다. 모든 것을 예수 그리스도께 의지한 삶을 살았다. 예배와 전도와 심방에 빠지지 않고 사역에 전념했다. 그것은 두고 온 아이를 잊는 방편이기도 했다. 새로운 삶을 살기 위해 복자에서 정윤으로 개명을 한 것도 그 무렵이었다. 그러다 아프가니스탄 선교원 모집 공고를 보았다. 가장 낮은 곳에서 예수 천국을 위해 헌신하는 것은, 만신창이 그녀가 주를 위해 할 수 있는 최대의 봉사였다. 어차피 한번 죽었던 육신이다. 당신에 의해 부활한 몸, 당신의 뜻에 맞게 쓰이는 것은 당연하다. 부름 받아 나선 자로서 불구덩이라도 못 갈 이유가 없다. 
자매님, 오늘도 일찍 나오셨군요.
묵도를 끝낸 정윤이 고개를 든다. 목사님이다. 정윤은 그가 이른 새벽부터 나와 기도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발 딛는 곳이 언제 전쟁처가 될지 모르는 죽음의 땅에 성도를 보내야 하는 목자의 편치 않은 마음을 그 역시 기도로 달래고 있다. 초췌한 목사의 낯빛은 정윤이 보기에도 안쓰러울 지경이다.   
막상 선교를 가려 하니 마음의 고통이 크시지요?
정윤은 힘없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곳은 사탄이 역사하는 뎁니다. 이미 여러 기독교 단체에서 수도 없이 선교를 갔지만 아직 변한 게 없습니다. 어쩌면 그것이 주님의 뜻인지도 모르지요. 척박한 광야에서 마침내 복음의 큰 꽃을 피우시기 위한…… 우리 함께 기도합시다.

별 하나 없는 밤, 초승달만 홀로 빛난다. 어스레한 달은 한 줌 빛으로 사위를 고루 비추는 솜씨를 뽐내고 있다. 절용의 지혜로 광량을 배분하는 신월에 만상은 숨을 곳이 없다. 만물의 명암과 요철을 구석구석에서 끄집어내듯, 현월은 이슬람 형제들의 어스러진 삶도 놓치지 않는다. 빈한한 현실과 외세의 꼭두각시 정권에 고통 받는 설움과 하루도 총성이 그칠 날 없는 참화…… 가리고 싶은 치부와 부끄러운 비밀도 저 달 앞에서만큼은 적나라하다. 
그럼에도 만월彎月의 은혜를 무슬림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다. 땡볕을 피해 걷는 밤길에 가녀린 달빛은 유일한 길라잡이가 된다. 망망한 대지를 가로지르는 동지들에게 칠흑의 어둠과 무지막지한 모래폭풍은 생존을 위협하는 커다란 장애물이다. 뼛속을 도려내는 고독의 엄습은 다른 무엇보다 발걸음을 힘겹게 한다. 한 걸음을 더 내딛지 못하면 사지에서 뼈를 묻고 말 절체절명의 순간에도 달은 어깨에 다소곳이 내려앉는다. 
자애로운 빛을 의지해 다시 밤길을 재촉하는 그들에게 달은 다정한 동반자이기도 하다. 험준한 산악지대에서 총력전을 펼치는 동지들에게는 또 어떤가. 고산준봉의 험로를 야간 행군하는 그들에게 달은 곧 생명줄이다. 한 발만 삐끗하면 천 길 낭떠러지로 추락할 위기를 달은 막아준다. 생사를 건 투쟁에 밀려드는 불안도 달은 인자한 빛으로 누그러뜨린다. 한 줄기 구원의 빛으로 밤을 밝히는 초승달을, 그래서 우리 무슬림은 알라의 현현으로 여긴다. 신이 그러하듯 달은 언제나 앞길을 인도하기 때문이다. 
휴월은 또 영고한 무슬림의 삶과 닮아 있지 않은가. 흐드러진 영화를 지난 시절 우리 이슬람 왕조는 누렸다. 교조 무함마드의 메카 입성과 오스만 제국의 영광은 알라의 신성이 순항한 결과임을 역사는 서술하고 있다. 무슬림은 무지한 이교도에게 알라의 관용을 체험케 했다. 그 과정에서 저항하는 적들과의 불가피한 쟁투도 있었지만 그것도 오직 알라의 뜻이다. 그러나 영예롭던 시절은 시나브로 사위었다. 존엄한 전통은 손아귀의 모래처럼 새어나갔고, 찬란한 문명은 여타 문명권의 기세에 주눅이 들고, 알라의 축복인 유전도 서구의 등등한 세력에 수탈당하고 있다. 
그러고 보면 저 달은 선대 전사들의 샴쉬르도(刀)와 닮았다. 매끄럽게 휘어진 호형의 칼날은 샴쉬르의 온화한 일면이지만, 날의 내면에는 살륙의 욕망이 잠재되어 있다. 샴쉬르는 이제껏 베고 찌른 적들의 육신을 황홀하게 기억한다. 살을 파고들 때의 감미로운 떨림과 적의 목에서 솟구치는 피분수와 선혈이 낭자한 전장에서의 무용도 생생하다. 성전을 수행하며 맛 본 피의 달콤함. 이교도의 박해와 배교도의 기만에 샴쉬르는 언제나 용맹한 춤을 추었다. 그때처럼 샴쉬르는 움마 건설을 위해 다시 피의 춤을 추어야 한다.
움마!
무함마드가 메카에서 온갖 탄압을 겪다 메디나로 성천해 최초로 건설한 신정국가. 움마에서 모든 일은 알라의 뜻으로 집행되었다. 이슬람의 영혼으로 충만했던 사람들은 모두 알라에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살았다. 하지만 신성한 정신은 이제 이슬람 국가에서도 점차 썩어들고 있다. 알라께 드리는 찬미를 등한시하고, 목숨 던져 지키던 명예와 자존심은 간 곳 없고, 남녀의 유별도 점점 무너지고, 여자들은 부르카를 벗어던지지 못해 안달이다. 부패한 서구 문화는 알라의 영토를 타락으로 물들이고 있다. 세계 연합국은 평화와 안정을 명분으로 이슬람 형제들을 핍박한다. 저들은 꾸란에 씌어진, “억압은 살인보다 나쁘다.”는 말의 의미를 모른다. 그런 그들에게 휘두를 응징의 칼날에 주저함이 있을 리 없다. 
우리 무슬림은 이슬람이란 말에 담긴 평화의 의미를 종교적 신조로 삼아 생활했다. 그렇다, 폭력은 우리와 거리가 먼 단어이다. 그런 우리를 “한 손에는 꾸란, 한 손에는 칼”이란 문장으로 서방제국은 호도한다. 저들에 의해 악의 무리로 전락한 우리는 생존과 구겨진 명예를 회복하기 위해 샴쉬르를 들 수밖에 없다.  

정윤은 아들이 다니는 초등학교 교실 뒷문에서 서성거리고 있다. 사지에서 살아온다 해도, 다시는 아들을 찾지 않으리라 다짐하고 나선 걸음이다. 그러니 이번이 뱃속에 열 달을 품었던 새끼의 얼굴을 볼 마지막 기회이다. 아이는 제 엄마의 얼굴도 잊었을 것이다. 아이가 여섯 살 때 이혼을 했으니 벌써 칠 년 전의 일이다. 하지만 정윤은 아이의 근황에 대해 나름대로 알고 있다. 실명으로 개설되는 싸이월드에는 아이의 일거수일투족이 올라 있다. 아이의 기분, 가족 및 교우 관계 등등. 특히 사진을 통해 나날이 커가는 모습을 보는 것은 큰 즐거움이다. 정말이지 딱 한 번만 얼굴을 보고 싶다. 멀리서나마 바라보기라도 하면 모든 근심이 사라질 것만 같다.
교실에서는 담임선생님이 종례를 하고 있다. 정윤은 선생님에게 들키지 않기 위해 조심한다. 혹시라도 맞부딪쳐 신분을 물어보면 난감하다. 왁자지껄한 소리가 교실 밖까지 울린다. 연이어 아이들이 물밀듯이 교실을 빠져나온다. 한꺼번에 몰려나오는 통에 아들을 찾기가 힘들다. 정윤은 둘레둘레 살피지만 아들은 보이지 않는다. 혹시나 싶어 교실을 물끄러미 들여다보니 그제서야 가방을 싸고 있다. 한달음에 달려가 껴안아주고 싶지만 정윤은 입술만 깨문다. 
아이가 복도를 걸어 나갈 때, 정윤은 맞은쪽에서 천천히 걷는다. 사진에 나온 그대로의 얼굴이다. 웬일인지 오늘 아이의 얼굴에 수심이 가득하다. 정윤은 마음이 무겁다. 아이 곁을 스치고 나서 정윤은 방향을 튼다. 어깨를 잔뜩 구부리고 걷는 뒷모습이 보인다. 달려가 볼을 비비대며 “내가 네 엄마야.”하고 소리치고 싶은 충동을 또 간신히 억누른다. 정윤의 눈에는 어느새 그렁그렁한 눈물이 고인다. 패기라고는 눈곱만큼도 없이, 남는 시간을 주체하지 못하는 노인네처럼 걷는 아이가 안쓰럽기만 하다.
저걸 놔두고 정말 아프가니스탄에 가야 하나? 언젠가는 친어미를 찾을지도 모르는데. 
담대한 마음으로 동요를 물리쳐야 한다. 열방列邦은 지금 수 많은 선교자를 필요로 한다. 한갓 사사로운 감정에 치우쳐 복음을 전파하는 일에 소홀히 한다면 그것이야 말로 사탄에 놀아나는 것과 다르지 않다. 정윤은 마음을 다잡는다. 얼굴을 봤으니 됐다. 냉연히 발길을 돌려야 한다. 그러나 발은 저만치 앞서 걸어가는 아이를 놓치지 않기 위해 재게 움직인다. 느릿하게 걷던 아이가 문득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본다. 그 바람에 정윤과 눈이 마주친다. 정윤은 얼른 눈길을 외면하고 먼 산을 본다.
아이가 사는 아파트 단지가 보인다. 집은 싸이월드에서 보아 이미 알고 있다. 아이가 단지 안으로 들어서면 그것으로 끝이다. 어쩌면 이승에서의 마지막 만남일지도 모른다. 정윤의 마음이 자꾸 허둥거린다. 아이와의 간격이 점점 멀어진다. 
준용아, 이준용!
정윤은 자신도 모르게 소리친다. 아이가 고개를 돌린다. 정윤은 얼른 아이에게 달려간다. 아이는 우두커니 서 있다. 정윤은 쪼그려 앉아 두 손을 잡는다. 뜻밖에도 놀라거나 두려워하는 기색이 없다. 
준용아.
정윤은 아이를 끌어안고 눈물을 흘린다. 아이는 여전히 무덤덤하다.
아줌마, 날 낳아준 엄마지요.
정윤은 그러나 고개를 끄덕거릴 수 없다. 되레 놀란 낯빛으로 얼굴을 바라볼 뿐이다. 정윤은 일단 근처의 피자집으로 들어간다. 자식에게 밥 한 끼 먹이는 것이 욕먹을 일은 아니다. 애초의 마음과 달리 담대해진 자신이 조금 놀랍다.  
난 지금 엄마가 새엄만 줄 이미 알고 있었거든요. 동생 서연이가 그랬어요. 전에 외갓집에서 들었다면서…….
아이는 태평하게 피자를 먹는다. 되레 하학시간이 늦어져 걱정하고 있을 아이 식구들을 정윤이 걱정하는 꼴이다. 학원도 가고 과외를 받아야 할지도 모른다. 그런 아이를 붙잡고 있는 것이 죄를 짓는 것만 같다. 한편으로는 오늘 하루인데 하는 심정도 없지는 않다.
아빠가 그랬어요. 어떤 아줌마가 어디 가자고 해도 절대 가면 안 된다고. 그 아줌마는 아주 나쁜 사람이라고 했어요. 하지만 난 이미 눈치 챘어요. 그 아줌마가 날 낳아준 엄마일 거라는 사실을요.
아이가 무심히 내뱉은 엄마라는 말에 정윤은 또 눈물이 핑 돈다. 먹성 좋게 피자를 먹어대는 아이를 보자 정윤은 욕심이 든다. 오늘 하루만 품에 끼고 있자고…… 아니면 따뜻한 밥이라도 지어 먹이고 데려다주자고 말이다. 아이를 집에까지 데리고 온 것은 그런 이유 때문이다. 아이는 집 걱정 따위는 아랑곳 않고 집안 여기저기를 기웃거린다. 저녁 여덟 시 무렵 전남편과 통화하는 것을 눈치 채고서도 가타부타 말이 없다. 정윤은 차라리 그것이 마음 아프다. 얼마나 집이 싫으면 하는 생각에 속절없이 또 눈물이 난다.
정윤은 전남편에 전화를 걸어 최후통첩을 하듯 일방적인 통고를 한다. 
오늘 데리고 잘 거예요. 내일 늦지 않게 등교시킬게요. 이번이 처음이자 마지막이니 이해하리라 믿어요.
너는 늘 네 멋대로지. 그런 네가 지겹다, 지겨워…….
상대의 말을 더 듣지 않고 정윤은 전화를 끊는다. 어느새 잠든 아이를 정윤은 품에 안는다. 막 샤워를 마친 몸에서 기분 좋은 향내가 난다. 어쩌면 아이는 자신이 찾아오기를 기다리고 있지 않았을까? 너무 늦게 찾아간 자신이 원망스럽기만 하다. 그리고 오늘이 아이와 함께 하는 마지막 밤이라는 생각에 서럽다. 행복이란 먼 곳에 있지 않다. 앞으로의 삶이 두렵지 않은 것도 행복에의 간절한 소망이 있기 때문이다. 
때가 찼다.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라. 복음을 믿으라. 
주님께서 말씀하지 않으셨는가.  

어둠이 깊어져 신월이 좀 더 하늘로 돋았다. 교결한 빛은 아니다. 달 전체가 계란 노른자 빛깔을 띠고 있다. 달의 한가운데는 주위보다 한층 불그스름하다. 기억이 생생하다. 파키스탄의 마드라사에서 본 초승달이…… 달은 조국에서 본 것과 다르지 않았다. 고향의 달은 늘 시뻘건 빛을 발하고 있었다. 마치 피눈물을 흘리는 듯한 초승달에서 우리 무슬림의 운명이 연상되었다. 인근 사원에서 예배시간을 알리는 낭랑한 아잔 소리가 울리면, 나는 알라에게 궤배跪拜를 드리며 다짐했다. 저 피를 되돌려주리라. 피는 알라를 욕보인 자들에게 돌아갈 심판의 몫이다. 그 누구의 강요도 없지만 나는 무언가 고결한 일을 해야 한다는 사명감에 불타올랐다. 
순교의 결의를 나는 마드라사에서 결정적으로 굳혔다. 지난해 파키스탄 방문은 오로지 마드라사에 들어갈 목적으로 행해진 것이었다. 나는 파키스탄에 체류한 석 달 내내 그곳에서 학습했다. 이슬람 전통 원리에 입각한 교육은 주로 꾸란을 정독하고 재해석하는 것으로 이루어졌다. 근엄한 교수의 한마디 한마디는 학생들을 전율케 했다. 
“국에는 테러리스트지만 이슬람 세계에서는 해방 전사이다.”
이 말은 특히 나의 심장을 고동치게 했다. 다른 학생들의 가슴도 박해 세력에 대한 분노로 이글거렸을 것이다. 그때 그들은 저마다 알라를 위한 순교를 떠올리지 않았을까. 그리고 지금 그들은 무자히드가 되어 온몸으로 알라의 뜻을 전하고 있지 않을까.
각국의 항전 수행자들 다수는 마드라사 경험을 했다. 침략국 심장부에서 장렬하게 산화한 무슬림들은 어쩌면 마드라사에서의 동료였을 수도 있다. 함께 꾸란을 독송하고 적개심을 키우며 우의를 다진 이슬람 형제들 말이다. 그곳에 모인 많은 학생들처럼 그들도 선량한 미소의 소유자였을 것이다. 매사를 부드럽게 처리하는 도량을 넉넉히 지니고 있고, 내면에 도사린 그러나 도저히 감출 수 없는 울분과, 청춘과 순교 사이에서 고뇌하는 모습도 감추지 못했던 형제들. 그들이 굳이 곁의 동지가 아니었다 해도 괜찮다. 마드라사에서 함께 한 또래들이 모두 미래의 무자히드라는 사실만큼은 분명하지 않은가.
그리고 나의 형. 나는 형을 통해 참다운 이슬람을 만났다. 형은 짓밟힌 자들이 폭력을 통해 참된 인간으로 회생할 수 있음을 강조했다. 무엇보다 가슴을 때린 것은, 형이 일러준 “나는 누구인가?”라는 말이었다. 
정말 나는 누구인가? 가난한 조국과 이슬람 국가들이 외세에 자존을 굽히는 꼴이 답답한 나. 무슬림 형제들이 세계 도처에서 성전으로 죽어갈 때 눈물만 찔끔거리던 나. 지하드를 위해 지금 어딘가를 떠돌고 있을 형의 동생 나. 침략국에 투쟁하다 총상을 입은 아버지의 열렬한 피가 흐르는 나. 이슬람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라도 기꺼이 알라에게 내놓을 어머니의 아들 나. 
아무리 생각해도 어머님께는 죄송하다. 어머니는 나의 실체를 알고 계실까? 나는 아무런 말도 없이 무자히드가 되기로 했다. 지하드에 참여함으로써 알라와 이슬람에 봉사한다는 자부심은 결사 의지를 공고히 했다. 어쩌면 당신은 이제 곁에서 보살필 자식이 하나도 없다는 사실에 조금 슬퍼할지도 모르겠다. 아니다, 어머니는 그런 나약한 분이 결코 아니다. 어머니는 새로운 무슬림 전사를 잉태하기 위해 연약한 몸뚱이를 내놓을지 모른다. 내가 무자히드로 전사해도 당신은 회한의 눈물 따위를 흘리지 않으리. 신산한 무슬림의 삶을 어머니는 누구보다 끝장내고 싶어 한 분이다.
나는 우리가 건설할 나라를 꿈꾼다. 우리가 새로 세울 움마는 천년왕국이어야 한다. 아니 움마의 천년은 영원의 상징이어야 한다. 현재의 세계는 알라에 의해 끝나고 새로운 세계가 도래할 것이다. 적대 세력에 박해 받은 우리 무슬림은 그날을 기약하며 영원의 삶을 준비해야 한다. 최후의 심판일에는 극진하게 알라를 섬긴 무슬림만이 천당에 들어갈 수 있다. 신을 위한 지하드에서 순교한 나 또한 천당에 영주할 수 있을 터이다. 평화의 기운으로 충만한 그곳에는 온갖 부귀영화와 알라를 찬미하는 삶이 있다. 그때 나는 많은 동료 전사들과 상봉하여 힘겨웠던 지난 삶을 웃으며 회상하리라. 그 날을 위해 우리 무자히드는 고단한 오늘을 견딘다.

두려워 말며 놀라지 말라.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너와 함께 하시니라. 
출발 전 사역자들과 성도가 함께 드린 예배에서 목사님은 말씀하셨다. 당신의 뜻과 말씀을 믿는다. 두바이를 경유해 아프가니스탄 수도 카불로 가는 내내 정윤은 신의 시선을 느꼈다. 뭐라 구체적으로 표현할 수는 없지만, 신비한 원광圓光이 자신의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느낌이었다. 간호사인 옆자리의 인자 언니에게 말했더니 그녀 역시 마찬가지의 가호를 느낀다고 말했다. 
그러나 수도 카불에 도착했을 때의 분위기는 영 달랐다. 신으로부터도 버림받은 나라라는 인상이 든다. 저들이 신봉하는 마호메트는 그렇다 하더라도 여호와마저 이곳을 외면한 것이 이해하기 어렵다. 지저분한 거리와 생기 없는 사람들. 좁은 시가의 낮은 건물들과 폭격에 잔해만 앙상한 그것들 뒤로는 황야가 가뭇없이 펼쳐져 있고 그 뒤로는 산이 첩첩하다. 남자들은 거의가 소총을 메고 다닌다. 미처 퇴각하지 못한 탈레반 잔병이나 도심에 은밀히 숨어 탈레반을 돕는 스파이들이 많아 그렇다는 말은 이곳에 오기 전에 들었다. 또 매복된 탈레반과의 총격전이 벌어지기 일쑤라는 말도 들었다. 말 그대로 생사의 경계가 따로 없는 지역이다.
초청 단체 사람들과 예배를 보고 임시로 마련된 숙소로 간다. 거리는 일찌감치 어둠에 파묻힌다. 전력 사정이 좋지 않기 때문이다. 정윤은 거리 뒤편으로 난 창을 본다. 암흑의 구덩이에 별들이 성령처럼 반짝거린다. 잘할 수 있을까? 이런저런 사념으로 뒤척거리다 정윤은 잠이 들었다. 
정윤은 준비된 버스에 오른다. 카불에서 칸다하르로 이동해야 하기 때문에 일찍부터 바쁘다. 현지에서 마중 나온 안내인 둘은 한국어를 제법 한다. 이미 다녀간 봉사단원들의 통역을 전담했다고 한다. 울퉁불퉁한 비포장길을 버스는 달린다기보다 헤쳐 나간다. 시내를 벗어나자 이내 산길 물길을 헤쳐야 했기 때문이다. 자욱한 흙먼지가 차창에 뽀얗게 쌓인다. 물길로 가면 물이 차안으로 흘러드는 때도 있다. 산을 깎아내 만든 구절양장의 길을 달릴 때면 벼랑 아래서 죽음이 두 팔을 벌리고 있는 느낌이다. 그럼에도 운전기사는 경주를 하듯 속도를 줄이지 않는다.
눈도 부칠 수 없겠군, 불안해서.
서지철 전도사가 하품을 하며 말한다.
우리가 달리는 길 사이에 탈레반군이 매복해 있을지도 몰라요. 여긴 매우 위험한 곳이에요. 
라비라는 안내인의 말이다. 이 오지에서 언제 저들의 총탄이 날아들지 모른다는 말은, 정윤이 지금 있는 곳이 어디인가를 또 다시 실감하게 했다. 한참 산길을 오르니 산마루에 흙집 한 채가 보인다. 잠시 정차하는 줄 알았는데 차는 더 속도를 낸다.
이런 데 탈레반이 있을 수 있잖아요.
괴괴한 바깥처럼 차안에서 누구도 입을 열지 않는다. 고도가 높아질수록 냉기가 느껴져 정윤은 입은 옷을 바싹 추스른다. 성경을 읽고 기도를 하고 잠을 청하는 일밖에 할 것이 없다. 정윤은 눈을 감는다. 덜컹거리는 차안에서 얼마쯤 잠이 들었을까. 추위에 저절로 눈이 떠진다. 차는 여전히 질주하고 있고 피곤에 지친 몇몇은 곯아떨어져 있다. 산중의 밤은 깊을 대로 깊다. 차 소리만 아니면 신의 음성이라도 들을 수 있을 것만큼 차창 밖은 적요할 터이다. 
진리의 허리띠와 성령의 검과 믿음의 방패로 광야에서 승리하게 하옵소서.
정윤은 간절히 기도한다. 준용의 얼굴이 떠오른다. 전화번호를 알려줬음에도 출국 전까지 아무 연락이 없었다. 아버지에게 호된 꾸지람을 들었는지 모르겠다. 준용과의 하룻밤은 과욕이었을까. 
탕, 타타타타탕…….
사위의 적막을 깨는 소리와 함께 차가 급정거 한다. 앞 등받이에 몸을 받힌 사람들이 일시에 눈을 뜬다. 사방을 둘러보지만 보이는 것은 어둠  뿐이다. 그러나 여전히 밤을 가르며 울려대는 굉음에 불안이 치민다. 정윤은 뒷자리의 라비 얼굴을 본다. 그 역시 긴장한 기색이 역력하다. 그때 기사가 정면을 가리키며 뭐라고 소리친다. 어둠 속에서 연이은 괴성이 울린다. 소리의 주인공이 하늘에다 대고 무작정 방아쇠를 당기는 사람들이라는 것은 그들이 전조등 안에 잡힌 다음에 알았다. 군복을 입지 않고 있어 불안감이 가중된다. 아니 카불에서도 군복을 입은 사람은 드물었다.  
탈레반인가 봅니다. 운이 좋으면 통행증 검사를 하는 정부군일지도 모르고요. 적인지 아군인지 지금으로서는 알 수 없습니다.
그들은 차 정면에서 총신을 겨누고 있다. 운전기사와 또 다른 안내인이 차에서 내린다. 그러자 그들이 차 안으로 뛰어든다. 두 손을 올리게 하고 소지품을 검색한다. 그들에게 특별히 위협될 것은 없다. 아니다, 누구나 가지고 왔을 십자가나 성경책이 문제가 될지 모르겠다. 여기는 예수 천국이 아니라 마호메트의 나라이다. 

이들은 여기서 자신의 종교를 전파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오랜 내전으로 황폐해지고 미군과 북부동맹의 공격으로 초토화된 이 나라에서 말이다. 
국기에 새겨진 모스크는 우리가 얼마나 어렵게 이슬람의 평화를 쟁취했는지를 보여준다. 적어도 우리는 타 종교인에게 개종을 요구하지 않고 죽을지언정 종교를 바꾸지도 않는다. 또한 꾸란에 씌어 있다시피, 우리는 무함마드 이전의 위대한 예언자로 예수의 존재를 인정한다. 다만 그를 메시아로 인정하지 않을 뿐이다. 그런데도 저 기독교도들은 우리를 증오하고 경멸한다. 얼마 전에 신성한 사원에서 예배를 본 작태는 무슬림 모두의 공분을 자아냈다. 그것을 자랑스러워하는 저들에게 우리가 할 일이란 피의 보복밖에 없다. 그래서 이번 일을 계획했다. 누구의 지시도 없이 자체적 판단에 따른 결정이다. 카불에 암약하는 동지들은 한국 선교단의 계획을 알려주었고 우리는 주저없이 작전을 실행했다. 미리 와 활동하는 한국 선교단이 이런저런 문제를 일으켜 어차피 한번 손을 보려고 작정하던 터이기도 했다.
한국, 나는 한국에 대해 조금 알고 있다. 이제는 다 지난 이야기지만, 나는 카불대학의 역사학도였었다. 그때 이슬람이 다른 문명권에 전파한 문화를 배우다 그 나라에 대해 알게 되었다. 나는 이슬람 문명이 고대에 한국과 교류한 사실을 배우고는 좀 놀라기도 했다. 
한국의 고대국가 신라는 중세 아랍문헌에 이미 등장한다. 멀고 먼 이국땅을 고생스럽게 찾아간 우리 무슬림은 그곳에 발자취를 남겼다. 내가 책에서 본, 경주 괘릉의 무인석상은 아랍인의 형상이었다. 그 이방인 석상이 상징적으로나마 한 나라 왕의 무덤을 지키고 있다는 사실은 두 문명권의 평화로웠던 교류를 추측케 한다. 놀라운 것은 신라라는 동방의 자그마한 국가가 천 년을 이어왔다는 사실이다. 세계의 통일국가 중 이집트와 로마를 제외하면, 천 년을 단일한 국가체계로 유지한 예는 없다. 한 시절을 풍미했던 페르시아왕국도 이백 년 남짓에 불과하다. 
고대국가 시절부터 시작된 양 문명권의 교류는 현재까지도 이어진다. 한국은 원유 수입량의 대부분을 우리 이슬람 국가에 의존하고 있다. 그리고 지난 연대에 한국 건설업체들은 이슬람 제국諸國에서 달러를 벌어갔다. 그런데 그들 군대는 평화유지라는 미명 하에 우리나라에 주둔하고 있다.
우리는 오만방자한 한국인들의 목을 샴쉬르로 벨 것이다. 팔루자에서 납치되어 참수를 당한 김선일과 똑 같은 방식으로 말이다. 망자가 “나는 죽고 싶지 않다. 나는 살고 싶다.”고 애원했음에도 납치 조직에 공개 경고를 천명한 이상한 나라의 겁 없는 작자들. 
겁에 질려 꿈쩍도 못 하는 저들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아직도 이 땅에 예수라는 작자를 알리고 싶어 할까? 자신의 운명은 알고 있을까? 죽음 앞에서도 그들은 신의 사도를 자처하며 당당할 수 있을까?
그러나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침묵이야말로 공포를 극대화하는 방법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전에 납치했던 벽안의 이방인들은 처음에 마구 웃고 떠들어댔다. 그들이 말을 걸기도 했지만 우리는 시종일관 침묵을 견지했다. 무겁고 질긴 그 침묵 앞에서 그들의 허세는 차츰 수그러들다 마침내는 입을 닫아걸었다. 침묵의 공포를 이겨낼 자는 아무도 없다. 
마침 예배 시간이다. 우리는 메카 방향을 향해 서서 두 손을 뒤로 올리며 “알라는 가장 위대하시다”고 나지막이 읊조린다. 이어서 “자비롭고 자애로우신 알라의 이름으로……”로 시작되는 꾸란의 개경開經장을 송독한 후, 궤배를 드린다. 예배를 드리는 나의 마음은 유일신 알라에 대한 경외로 가득하다. 오직 알라만이 세상을 창조하고 심판한다. 나는 알라의 명예를 위해 몸 바칠 따름이다. 그것이야말로 나의 실존을 확인하고 무슬림의 자존심을 지키는 유일한 방식이다.

저들은 일단 성도들을 격리시키는 작업부터 했다. 남자 다섯 명과 남은 여자들을 일 곱 명씩 두 무리로 나누었다. 통역이 가능한 라비는 정윤과 남게 되었다. 토굴을 나서는 남자 일행의 눈동자가 불안하게 흔들린다. 인자 언니는 토굴을 나가며 정윤에게 입만 벙긋거리며 할렐루야라고 한다. 목이 말라 마른 침만 삼키고 있던 정윤은 아멘 하고 화답한다. 
폭탄이 장착된 조끼를 입고 있는 탈레반 대원 두 명은 정윤네 앞에서 총부리를 겨누고 앉아 있다. 토굴 밖에는 또 다른 대원이 안팎을 감시하고 있다. 가끔 밖에서 총소리가 나면 몸이 오그라드는 느낌이다. 행여 다른 성도들이 위해를 입었을까 싶어서이다. 그러나 밖의 상황은 전혀 알 수 없다. 누구도 입을 떼지 않고 설혹 저들이 말을 한다고 해도 알아들을 수 없다. 
당신이 곧 길이요 진리니 믿고 가겠습니다.
정윤은 이런 핍박도 당신의 뜻이라 믿는다. 운명이 어떻게 되든 말이다. 정윤은 속으로 찬송가를 읊조린다. ‘죄 짐 맡은 우리 구주 어찌 좋은 친군지……’  떤 역경에도 굴하지 않으리. 꼭 이 사탄의 땅에 하느님의 빛을 보게 하리. 원래 다른 종교적 확신을 가진 사람들에게 예수님의 유일성을 가르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라고 목사님은 말했었다. 마음이 좀 편안해진다.  주님의 뜻에 맡기면 해결되지 않을 일이 없다.
저들이 정윤네에게 포악한 짓거리를 하지 않은 것은 그나마 다행이다. 저들은 하루 두 끼의 식사를 공급했다. 아침에는 빵과 감자를 주었고, 저녁에는 가지와 토마토와 요구르트 같은 것을 섞어 만든 듯한 음식을 주었다. 맛은 없었지만 어떻게든 배를 채웠다. 
먹고 싸는 일 외에 아무 할 일이 없다. 그저 온종일 정윤네를 감시하는 저들과 얼굴을 맞대고 있어야 한다. 저들은 양치와 세수를 모르는 모양이다. 누런 이와 꺼무튀튀하고 꺼칠한 피부. 그들이 움직일 때마다 타 종족 특유의 노린내와 뒤섞인 고약한 냄새가 난다. 벌써 사흘 째 씻지 못한 정윤도 몸이 군시러워 미칠 지경이다. 
어쩌면 육신의 문제는 아무것도 아니다. 정말 견디기 어려운 것은 시간의 정체이다. 속으로 아무리 성경을 암송하고 찬송을 부르고 기도를 해도 토굴로 스며드는 가녀린 햇살은 금방 지지 않는다. 그때면 정윤은 준용을 생각한다. 먼저 천국에 가서 준용을 기다리겠다. 나중에 그곳에서 만나게 되리라. 그러니 지금은 힘들어도 준용이 주님의 말씀에 맞게 살아가는 사람이기를 소원한다.
밖의 상황을 알 수 없다는 것도 답답하다. 초청 단체는 우리의 피랍 사실을 알고 있을 터이니, 한국 정부도 현재 상황을 파악했을 것이다. 고국의 성도들은 피 끓는 마음으로 우리의 무사귀환을 위해 기도를 할 것이다. 오직 기도만이 저들의 사악한 마음을 돌릴 수 있다. 또 물밑으로는 한국정부와 이들과의 대화 창구가 열려 있을 것이다.
변함없는 하루하루가 닷새째로 접어드는 아침이다. 여느 날과 달리, 일찍부터 소란을 떠는 저들에 의해 잠이 깼다. 저들은 뭐가 그리 신이 나는지 주절주절 떠들어대고 있다. 포승줄에 묶인 우리 일곱 명은 저들이 이끄는 대로 따라나선다. 
대소변을 보기 위해 토굴에서 나왔을 때 본 적막한 산야가 신새벽의 어둠속에서 기지개를 켜고 있다. 누런 초승달은 마지막 광채를 발하며 사위어간다. 격리되었던 다른 성도들의 모습이 맞은쪽에 보인다. 정윤은 하나하나 세어본다. 안내인을 제외하고 한 사람이 없다. 또 세어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 사람이 누구인지는 명확하게 판별할 수 없다. 불길한 예감에 정윤의 가슴이 쿵덕쿵덕 뛴다. 
구레나룻이 유난히 긴 사내 하나가 떠들어댄다. 무슨 말인지는 알아들을 수 없다. 저들은 환호성을 지르며 허공에다 총을 내갈긴다. 정윤은 라비를 본다. 고개를 떨구고 있어, 현재의 분위기를 읽을 수 없다. 연설하는 사내가 손으로 한 방향을 가리킨다. 사위는 일순 조용해진다. 정윤도 그쪽으로 고개를 돌린다. 거기 검은 천으로 눈을 가리고, 포승줄에 묶인 사내 하나가 끌려오고 있다. 그들이 공터 한가운데에 도착했을 때야 정윤은 그가 서지철 전도사라는 사실을 확인한다. 
또 다시 저들의 환호성이 잠든 대지에 들썩거린다. 그 함성에 파묻혀 간간히 아멘, 아멘 하는 소리와 주여, 주여 하는 소리도 들린다. 서지철 전도사는 무릎을 꿇린다. 
주여! 주여!
서지철 전도사가 절규한다. 사내 하나가 칼을 뽑아든다. 초승달처럼 날이 휜 날렵한 칼이다. 그는 서 전도사에게 칼날을 겨냥하다 한 칼에 목을 벤다. “악!” 여기저기서 날선 비명도 터진다. 전도사의 목이 댕강 나가떨어진다. 피분수가 사방에 솟구치고 동체는 앞으로 고꾸라진다. 저들의 환호성과 쏘아대는 총소리가 지축을 흔든다.
주여! 주여! 
형제자매들이 소리친다. 누군가는 속엣 것을 게워내고 또 누군가는 실신 했다. 정윤 역시 꾸역꾸역 토해 낸다. 
다시 해산이다. 남자 성도들이 저들과 몸싸움을 하다 얻어맞는다. 여자들 역시 몸부림을 치지만 저들의 완력을 당해낼 수 없다.
당신에게 헌신한 어린 양이 고작 이렇게 죽어야 합니까? 이렇게 야만스런 족속을 구원하기 위해 성스러운 피를 흘려야 합니까? 
정윤은 끌려들어가며 하늘에 대고 또 묻는다.
주여, 당신의 뜻은 진정 어디에 있습니까?
이국의 찌푸린 하늘에서 당신은 아무 대답이 없다.

김병덕∙1967년생. 2007년 ≪문학나무≫ 신인상으로 등단. 경기대, 중앙대 출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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