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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호 기획/강인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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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부
댓글 0건 조회 5,341회 작성일 09-01-19 12:48

본문

을 여의고는 절대로 부처를 이루지 못한다.

그렇다면 내가 왜 구태여 이걸 꼭 쓰려고 하는가?

지금 세상에는 옥과 석이 혼동되어 있어서 그 옥석을 명료하게 가려 여러 선량한 사람들의 눈을 잃지 않게 하기 위함이다. 꿈에도 깨달음을 얻지 못한 사람이 당대 최고의 도인으로 그럴싸하게 포장이 되어 있는가 하면, 이름 없는 산야에 묻혀 아름답게 살다 간 고승 대덕들도 허다하기 때문이다.



의 얼굴

강인봉|시인․작가




“부처는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그대가 모르는 곳에 있다.”

“내가 모르는 곳은 어딥니까?”

“그것은 그대가 지금 잘 아는 곳이지 않는가!”

자성自性에 상이 있어서 자성을 보지 못한다.

그래서 다만 이 마음 하나 닦는 것을 출가出家라고 할 뿐이다. 이 일에는 원래 선후배가 없어 이제 막 입문한 사람이라도 견성見性만 하면 오히려 평생을 늙도록 공부한 노승老僧의 스승이 되는 법이다. 하지만 아무리 문자를 뒤지고 따져 봐도 책 속에서는 그 ‘나고 죽음’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그러므로 글(經典)은 사실 그림의 떡, 그것도 미완성의 그림이다.

을 여의고는 절대로 부처를 이루지 못한다.

그렇다면 내가 왜 구태여 이걸 꼭 쓰려고 하는가?

지금 세상에는 옥과 석이 혼동되어 있어서 그 옥석을 명료하게 가려 여러 선량한 사람들의 눈을 잃지 않게 하기 위함이다. 꿈에도 깨달음을 얻지 못한 사람이 당대 최고의 도인으로 그럴싸하게 포장이 되어 있는가 하면, 이름 없는 산야에 묻혀 아름답게 살다 간 고승 대덕들도 허다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아무리 깊은 산의 욕심 없는 풀꽃처럼 숨어 있는 도인이라 할지라도 아직 인가印可를 받지 않았다면 그 또한 명실 공히 도인은 아니다. 그렇다면 지금 과연 이 나라에 진정으로 깨달은 이가 몇이나 있는가? 옛사람도 말하기를 ‘그 여실히 참구하여 실지로 깨달은 도인은 금일에만 상봉하기 드문 것이 아니요, 옛날에 있어서도 또한 일찍이 다수를 볼 수 없었느니라.’고 했다.

그럼에도 그 수억 겁 덧없는 생사무명生死無明 속에서 어렵게 한 줄기 태양을 갈구하는 중생들을 오히려 도인이라는 미명하에 속이고 있는 무리들이 많다. 어떤 이는 다만 촛불을 보고 태양이라 하고, 어떤 이는 가로등을 태양이라 하고, 어떤 이는 반딧불을 태양이라 하고, 별빛, 달빛, 심지어는 다비장의 벌건 숯등걸을 태양이라 하기도 한다.

그래서 이것이 말법 시대이다.

깨닫지 못했으면 그냥 깨끗이 모른다 하고서 오직 자기 공부나 할 것이지, 어쩌자고 이처럼 남이 주는 밥을 얻어먹고서 도리어 그들에게 해를 끼친단 말인가. 이것은 도인을 논하기 이전의 양심적인 문제다. 그래서 이 시대에는 도인이 없는 것이 잘못된 게 아니라, 오히려 그 가짜 도인들이 너무도 많은 것이 잘못된 일이다.

또한 예부터 그 자칭 도인은 외도外道로 여겨 아주 엄하게 경계를 했다. 마침내 명안 종사明眼宗師로부터 인가印可를 받아야만 그것이 곧 합당한 도인인 것이다. 그러므로 도인이라고 한다면 오히려 수치이다. 차라리 ‘나는 모른다.’고 하는 것이 그나마 그 도인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이라도 지니는 것이다. 그런데도 그런 사람들이 자기도 모르는 길을 남에게 가르치고 있으니 세상이 지금 어디로 가겠는가.

가령, 대전에서 어떤 사람이 서울 가는 길을 물었다고 하자. 그 사람에게 서울 쪽이 아닌 부산이나 목포 쪽으로 길을 가르쳐준다면 그는 어떻게 되겠는가? 그 사람이 그래도 불행 중 다행으로 대구나 광주쯤에서 다시 다른 이에게 길을 물어 여태 잘못 왔음을 깨닫고 도로 대전 쪽으로 되돌아와도 그 손해가 이만저만이 아닌데, 자기가 길을 잘못 가고 있는 줄도 모르고서 무작정 영원히 서울에 도달하지도 못할 길을 걷다가 죽는다면 그 인생은 어떻게 되겠는가?

남을 속이는 죄가 바로 이렇다. 사기를 칠 것이 따로 있지, 그까짓 큰스님이라는 소리를 좀 듣고 싶어서 이렇듯 공연히 남의 인생을 망쳐놓는 거다. 그래서 진정 깨닫지 못한 이는 아예 깨끗이 ‘나는 모른다.’ 하고서 자기 공부나 해야 한다. 그러기에 고서古書에도 이르기를 ‘가난한 사람이 제왕帝王을 사칭하면 자기 한 몸만 죽지만, 깨달았다고 속여 법왕法王을 사칭해서 수많은 중생을 잘못된 길로 안내하면 그 죄상은 천 부처님(千佛)이 출현해도 용서받지 못한다.’고 했지 않는가.

대전에서 진정으로 서울 가는 길을 아는 이를 만난다면 그 사람은 마침내 목적지에 도달할 것이다. 그날 당일로 당도하지 못하고 천안쯤에서 날이 저물면 거기서 하룻밤 자고 다음날 다시 그 자리에서 시작하여 갈 것이다. 자기의 발걸음이 더디더라도 그 사람은 언젠가는 분명 서울에 당도할 것이다. 이렇듯이 진정한 선지식을 만나 수행을 한다면 비록 이생에서 견성성불見性成佛을 못한다 할지라도 다음 생에는 반드시 도를 이룰 것이다. 그래서 몇 생을 닦아서 깨달음을 얻거나 또는 몇 생을 거쳐서 오는 도인도 있다.

감히 외람되지만, 그래서 여기 비장한 결심으로 그 역대 선사들로부터 현존해 있는 한국의 도인에 이르기까지 선문답禪問答들을 집대성해서 재조명을 해본 것이다. 또 누가 해도 한번은 해야 할 일이고. 그러므로 나는 이미 이 일에 목숨을 내놓은 지 오래다. 하긴 그 불법 수호를 위해 자진해서 순교를 한 이차돈 같은 성사聖師도 있지 않는가. 다만 이것을 거울삼아 다소나마 몰록 깨치는 눈 푸른 후학後學들이 나왔으면 하는 마음만이 간절할 뿐이다. 구도자들 스스로가 오직 수도에만 전념하는 것이, 그것이 바로 개혁이다.

하지만 사실은 부처님이 어디 다른 곳에 따로 있어서 착한 일을 하면 복을 주고, 또 악한 일을 하면 벌을 주고 하는 것이 아니다. 요는 자기가 밥을 먹으면 배부르고, 술을 먹으면 취하고, 균을 먹으면 병들고 할 뿐이다. 이것이 바로 부처님의 법이다. 아무리 부처님이라도 심으면 반드시 그 인과因果는 받아야 한다. 비록 수없는 세월이 지날지라도 자기가 그렇게 한번 지어놓은 업은 사라지지 않는다. 오직 깨달음을 얻은 자만이 자기 스스로 용서를 하거나 받을 수 있을 뿐이지, 용서란 없다. 그렇다면 어째서 깨달음을 얻은 자에게만 그 용서의 권리가 주어지는가? 그래서 일찍이 석가모니도 그 전륜성왕의 보위를 걷어차 버리고 히말라야 설산雪山에 들어간 일이 다만 이 철저히 생사일대사生死一大事를 해결하기 위함이었다.

석가모니가 처음 인도에서 자비를 근본 종지根本宗旨로 하여 불교를 세운 후 그 제1대는 마하 가섭摩訶迦葉이었다. 부처님이 영산회상에서 법좌에 올라 말없이 대중에게 꽃 한 송이를 들어 보이자 오직 가섭만이 홀로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이것이 이른바 염화미소拈花微笑요, 이심전심以心傳心이며, 선의 시초였다.

이에 세존은 정법안장正法眼藏을 그 늙은 수제자에게 전한다.

(그렇다면 가섭은 무엇 때문에 미소를 지었던가? 덕숭산 수덕사 방장 혜암惠庵은 그 가섭의 미소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그 웃음은 비웃음의 웃음이다. 즉, 같잖다는 생각으로 웃었느니라.”

피차 이러한 선문답禪問答에 대한 거론은 한국 불교의 오랜 전통이다.)

그리고 제2대는 아란阿難이었고, 제3대는 상나 화수商那和修였으며, 그 법맥이 제27대 반야 다라般若多羅에게까지 내려왔을 때, 다시 그 수직의 법통을 계승한 이가 곧 보리 달마菩提達磨였다. 제28대가 되는 셈이다. 그는 또한 중국 선종의 초조初祖이다. 남인도 향지국왕의 셋째 아들로서 반야 다라를 40년 동안 섬기다가 스승이 죽은 뒤 중국으로 떠나왔던 것이다.

달마가 양나라의 무제를 만난 것은 520년 10월이었다.

“짐이 즉위한 후로 오늘까지 조불造佛 등 수많은 불사를 하였는데 그 공덕이 얼마나 되는가?”

양무제梁武帝가 물었다. 이에 달마는 양무제의 얼굴을 힐끔 한번 쳐다보고는 퉁명스럽게 말했다.

“무공덕無功德.”

그러자, 벌겋게 얼굴이 달아오른 양무제는 두 번째 질문을 던졌다.

“그렇다면 무엇이 불법佛法의 성스러운 진리 가운데 첫째가는 것인가?”

달마가 대답했다.

“진리는 확연하여 아무것도 성스러울 것이 없습니다(廓然無聖).”

양무제가 다시 물었다.

“그렇다면 짐을 대하고 있는 그대는 누구인가?”

“모릅니다(不識).”

(하지만 여기서 분명히 하나 짚고 넘어가야 한다. 달마는 무엇을 모른다는 것인가? 달마 자기가 자기를 모른다는 말인가, 달마가 양무제를 모른다는 말인가, 아니면 양무제가 달마를 모른다는 말인가? 도를 모른다는 말인가? 부처를 모른다는 말인가?

그래서 나 같으면 이렇게 말했으면 한다.

“대왕께서는 도리어 눈뜬장님을 아십니까?”

그러면 양무제는 틀림없이 이렇게 말할 것이다.

“그게 대체 누구인가?”

이때 비로소 말한다.

“모릅니다(不識).”

이래야 달마가 말하고자 하는 그 ‘무엇을 모른다.’는 하나가 확연히 드러난다.)

그 뒤 달마는 숭산 소림사에서 9년 동안 면벽 좌선面壁坐禪을 했는데, 어느 날 40세의 혜가慧可가 그의 풍성을 사모하고 찾아와 밤새도록 눈을 맞고 밖에 섰다가 차고 온 칼로 왼팔을 끊어 신을 바쳤으며, 제29대의 법맥을 이어받았다. 중국 선종으로는 제2조이다. 그는 때로 남의 집 머슴살이를 하는 등 승속에 구애 받지 않는 초탈한 세계를 넘나들었다고 한다.

혜가는 승찬僧璨에게 법을 전한다. 그 다음 제31대는 도신道信이고, 제32대는 홍인弘忍이다.

그리고 제33대가 바로 이 혜능慧能이다. 중국 선종으로는 제6조이다.

(성철이 편역한 혜능의 <돈황본단경敦煌本壇經>을 읽어보면 거기 유전돈법唯傳頓法에 ‘자성은 단박에 닦는 것이니 세우면 점차가 있으므로 세우지 않느니라(自性頓修하니 立有漸이라 此所以不立이니라).’라는 구절이 나오는데, 혜능은 그렇게 큰 오점을 남겼다. 혜능은 일자무식이라 누가 그렇게 기록을 잘못했는지는 모르지만, 이것은 명백한 실수다.

사실은 그 ‘자성은 단박에 닦는다(自性頓修).’는 것을 혜능 자신이 오히려 엉뚱하게 세운 것이다. 그러면서도 본인이 그것을 모르고 있으니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자성을 도무지 어떻게 닦는단 말인가. 이것이 감히 그 자성을 본 확철 도인으로서 할 수 있는 소리인가. 원래로 닦을 것이 없는 이 자성이요, 그 닦을 것 없음을 아는[自覺] 것이 곧 견성이다. 닦을 것이 있다면 그게 어디 불성佛性이겠는가. 그런데 혜능은 거기에 공연히 ‘돈수頓修’를 세워서 스스로 ‘점수漸修’를 하고 있는 것이다. 이 어찌 애닲다 아니 하리. 자성을 보는 것으로써 이미 다 닦은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 어찌 다시 돈․점이 있으리오. 다만 그 견성이라는 허물이 남아 있어 그것만을 닦을 뿐이다. 그러므로 돈오돈수頓悟頓修라고 하는 그것이 바로 돈오점수頓悟漸修다.)

제34대는 남악 회양南嶽懷讓이다.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

이것은 사실 이 회양이 한 말이다. 성철은 다만 그 말을 인용했을 뿐이다. 회양이 남악의 반야사 주지로 있을 때 어느 날 마조가 찾아왔다.

“좌선은 무엇 하려 하는가?”

회양이 물었다.

“성불하려고 합니다.”

마조가 대답했다. 그러자 회양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기왓장 하나를 집어다가 암자 앞의 바위에 갈기 시작했다. 기왓장 가는 소리를 듣다 못한 마조가 물었다.

“스님, 그 기왓장은 왜 갈고 계십니까?”

“이걸 갈아서 거울을 만들려고 한다.”

마조는 웃었다.

“기왓장을 갈아서 어떻게 거울을 만들 수 있겠습니까?”

이에 회양이 마조를 흘끗 쳐다보며 말했다.

“기왓장을 갈아 거울을 만들 수 없다면 좌선만을 해서는 성불할 수도 없지.”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마조는 좌선으로 방석을 일곱 개나 뚫었다고 한다. 좌에 집착되어 마치 죽은 사람 같았다는 것이다.

“소달구지가 움직이지 않으면 달구지에 채찍질을 해야 하느냐, 소에 채찍질을 해야 하느냐?”

마조가 아무 말도 못하고 서 있자 회양은 준엄하게 꾸짖었다.

“좌선한다면서 가만히 앉아 있는 것은 부처를 흉내 내는 것이니, 그것은 부처를 죽이는 일이다. 또 선은 앉거나 눕거나 하는 데에 있는 것이 아니다. 법이란 영원한 것이어서 어떠한 형태에 얽매이는 것이 아니니라.”

마조는 여기서 크게 깨달음을 얻고 회양을 10여 년간 모시다가, 강서江西로 떠나 방장方丈의 지위에 올랐다.

(그런데 이 ‘소달구지가 움직이지 않으면 달구지에 채찍질을 해야 하느냐, 소에 채찍질을 해야 하느냐?’의 선문禪問에 대해 아무런 답이 나와 있지 않으니, 내가 마조 대신 한 마디 할까 한다.

“소달구지가 움직이지 않으면 달구지에 채찍질을 해야 하느냐, 소에 채찍질을 해야 하느냐?”

하고 회양이 물었을 때, 마조는

“스님.”

하고 회양을 부른다.

“왜 그러느냐?”

하고 회양이 입을 열면 그 즉시 묻는다.

“제가 지금 달구지에 채찍질을 했습니까, 소에 채찍질을 했습니까?”

만약 이 도리만 알면 부처님이 영산회상에서 꽃을 들어 보인 뜻도 알 수 있을 것이요, ‘천상천하 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尊’이라고 한 의지도 알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이 아는 바로 인간 누구나가 다 본래 지니고 있는 그 불성佛性을 뜻함이다.

그런데, 그로부터 1500년 후 운문雲門은 그 ‘천상천하 유아독존’에 대해 ‘내가 만일 그 자리에 있었다면 한 방망이로 그를 때려 개 입에 처넣어 주었을 것이다. 그래서 천하를 태평하게 하는 데 조금이나마 공헌했을 것이다’고 큰소리 쳤다. 또한 고금의 많은 선지식들도 운문의 이 말에 한결 같이 입을 모아 칭찬해마지 않았다.

하지만, 사실은 운문의 그 말도 방망이 처리가 안 된 것을 알아야 한다. 도리어 그 개의 입에 들어간 게 석가모니인가, 운문인가?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되는가.

이것을 누가 내게 묻는다면, ‘나도 만일 그 자리에 있었다면 한 방망이로 그를 때려 개 입에 처넣어 주었을 것이다’고 말하리라. 이렇게 해서 다시 한 번 운문을 좋게 살려줄 수 있는 것이다. 법이란 바로 이런 것이다.)

마조 도일馬祖道一은 제35대이다. 그리고 그 법통이 제56대 석옥 청공石屋淸珙에게 내려왔을 때, 고려 말의 태고 보우太古普愚가 이어 받는다. 이것이 곧 한국의 법맥이다. 그래서 한국의 초조는 제57대이다.

서산 대사는 제63대이다. 그의 법명은 휴정休靜이고, 속성은 최씨이며, 자는 현응(玄應), 호는 청허淸虛인데, 묘향산에 오래 주석하여 서산西山이라고 칭했다. 21세에 부용 영관芙蓉零觀에게 입문하여 촌락으로 돌아다니다가 정오에 닭 울음소리를 듣고 홀연히 심성心性을 깨달았다고 한다.

이것은 그의 「오도송悟道頌」이다.

머리 세어도 마음 안 센다

옛사람이 벌써 말하잖았나.

닭소리 한번 이제 듣고서

대장부 큰일, 어허 마쳤네.

髮白心非白

古人會漏洩

今聞一聲鷄

丈夫能事畢

(그렇다면 그 닭은 언제 어디서 울었는가? 이것만 알면 그 즉시 견성見性이다. 이것이 바로 팔만대장경의 결집이요, 그 마지막 돌파구 곧 선이다.

그런데, 성철은 이러한 서산이 44세 때 저술한 <선가구감禪家龜鑑>을 ‘돈오점수頓悟漸修’를 주장한다 하여 마음껏 따지고 나무랐다. 심지어는 지해종도知解宗徒라고까지 신랄하게 꾸짖었다. ‘돈오점수 사상을 신봉하는 자는 전부 지해종도이다. 원래 지해는 정법을 장애하는 최대 금기이므로 선문禪門의 정안 조사들은 이를 통렬히 배척하였다. 그러므로 선문에서 지해종도라 하면 이는 납승의 생명을 상실한 것이니 돈오점수 사상은 이렇게 가공한 결과를 초래한다.’라고.

그렇다면 다시 한 번 더 따져볼 일이다. 참으로 돈오돈수頓悟頓修의 실체를 안다면 감히 어떻게 돈오돈수라고 말하겠는가? 성철은 침묵의 실체를 모르기 때문에 ‘침묵’이라고 말을 하는 것이다. 그러나 감히 침묵이라고 했을 때 그것이 과연 ‘침묵’인가, 아니면 ‘웅변’인가? 같은 이치다. 그래서 돈오점수이다. 가령, 죽은 놈이 ‘나 죽었소.’라고 한다면 그게 과연 죽어 있는 놈인가, 살아 있는 놈인가?

그 <선가구감>은 도를 닦는 이들의 영원한 교과서이다.)

서산 대사의 문하에 천재 소년 소요逍遙가 있었다.

소요는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자비하여 성동聖童이라고 고을 사람들한테 칭송을 받았다. 13세에 출가하여 17세에 이미 일대시교一代時敎를 통달하고 운곡雲谷, 송월松月과 더불어 법문 삼걸法門三傑이라는 칭호를 받았다. 하지만 그 소년 강사講師 소요는 아무리 생각해 봐도 부처님의 경전을 아는 것만으로는 도저히 생사 일대사生死一大事를 마칠 것 같지가 않았다.

그래서 그는 어느 날 묘향산에 있는 서산 대사를 찾아가서 법을 가르쳐 줄 것을 청하니, 대사는 보자마자 법기法器임을 알고 그날부터 시봉을 시키면서 능엄경 한 구씩을 매일 가르쳐 주었다. 이미 경전을 통달한 강사인지라 능엄경을 모를 리 없지만 대사의 가르침이라 매일 배우다 보니 3년이 다 지나갔다. 소요는 생각해 보니 한심하기 짝이 없었다. 대선사요, 대도인이라 하여 찾아왔는데 법은 가르쳐 주지 않고 이렇게 다 알고 있는 능엄경만을 가르쳐 주니 화가 나는 것이다.

그러나 참고 계속 배워 가는데 소요가 잠깐 밖에 나갔다가 들어오면 대사는 웬일인지 때 묻은 작은 책을 보다가는 곧 안주머니에 집어넣곤 하는 것이었다. 이렇게 여러 번 계속되고 보니 소요는 그 작은 책에 대해 매우 관심이 많아졌다. 하루는 대사가 잠자는 틈을 타서 그 작은 책을 보려고 하자 대사는 깜짝 놀라 깨어나서 그 책을 더욱 소중히 감추는 것이었다. 그러니 무슨 책인지 점점 의심이 커졌다.

하지만 그 작은 책을 보려고 하면 할수록 더욱 단속이 심하고, 또 그냥 그대로 아무런 법도 얻지 못한 터라 소요는 결국 더 이상 화를 못 참고 그곳을 떠나기로 결심했다. 하직을 고하니 그때서야 비로소 대사가 그렇게도 소중히 여기던 그 때 묻은 작은 책을 주었다.

“가려거든 이 책이나 가지고 가게.”

대사가 준 책을 펴보니 거기 게송偈頌이 하나 적혀 있었다.

그림자 없는 나무를 베어다가

물 가운데 거품을 태워 다할지니라.

가히 우습다 소 탄 자여

소를 타고 다시 소를 찾는구나.

斫來無影樹

哨盡水中嘔

可笑騎牛者

騎牛更覓牛

소요는 이 게송을 가지고 호남으로 내려가 20년간을 참구했으나 깨닫지를 못했다. 나이 40에 이르러서야 다시 묘향산에 돌아가서 대사를 뵈니 감개가 무량하여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20여 년간을 하루도 잊어본 적이 없던 스승이었다.

대사가 물었다.

“공부가 어떻게 되었느냐?”

“떠날 때 주신 게송의 의지를 아직도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러자 대사가 말했다.

“가히 우습다 소 탄 자여, 소를 타고 다시 소를 찾는구나.”

그 순간 소요는 언하에 확철 대오했다.

(이것이 이른바 활구 법문活句法門이다. 서산 대사의 말은 너무도 견고해서 이빨이 들어갈 데가 없다. 금강석이다.

그렇다면 나도 여기서 한 마디 해볼까 한다.

소를 타고 다시 소를 찾는다는데 이것은 무슨 도리인가? 그 찾는 소는 그만두고 탄 소만 데리고 올 줄 알면 된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소를 타고 다시 소를 찾는다니 나는 그렇게 이르지 않겠습니다.”

이렇게 일단 말을 건다.

“그러면 그대는 어떻게 이르겠는가?”

“소를 타고 다시 소를 찾는다.”

이 소식을 아는가, 마는가? 하지만 이렇게 말할 줄 알아야 이 공안을 확실히 아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는 천 마디 만 마디 해보았자 그게 다 헤매는 짓이다.)

하지만, 이렇게 부처님의 정법이 대대로 밀전密傳되어 오다가 제74대 만화 보선萬化普善에게서 그만 끊어지게 된다. 그 혜명의 등불이 아주 꺼져버린 것이다.

그런데 그 끊어진 법맥을 다시 이은 이가 바로 경허鏡虛였다. 실로 그 조등祖燈이 꺼져버린 100여 년간의 암흑세계에 비로소 경허가 동해의 태양처럼 출현한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그를 중흥조中興祖라고 부른다. 가위 ‘한국의 달마’라 할 수 있는 위대한 선지식이다. 이제 경허는 제75대이다.

그는 전북 전주 출생으로 속명은 동욱東旭이요, 성은 송씨이며, 법명은 성우惺牛이다. 9세의 어린 나이에 출가하여 불과 20여 세 때부터 대강사大講師로 이름을 떨치다가, 생사의 절박함을 크게 경험하고 돌아와 비로소 발심發心, 화두를 참구하기 시작했고, 마침내 활연 대오豁然大悟를 했다. 때는 1879년 11월 보름께였고, 그의 나이 31세였다.

그리고 그는 그 뒤 보임처保任處를 충남 서산 연암산 기슭의 천장사로 옮겨 다시 처절한 용맹정진에 들어간 지 1년만에야 오도송을 읊었다.

이것은 그의 「오도송悟道頌」이다.

홀연히 사람에게서 고삐 뚫을 구멍이 없다는 말을 듣고

몰록 깨닫고 보니 삼천 대천 세계가 이 내 집일레.

유월 연암산 아랫길에

들사람이 일없이 태평가를 하는구나.

忽聞人語無鼻孔

頓覺三千是我家

六月燕巖山下路

野人無事太平歌

(다시 한 번 자세히 이 오도송을 들여다보라. 이 가운데 어디에 티끌이 한 점 묻어 있는가. 팔만대장경 속에는 글자가 있지만, 그러나 이 오도송 속에는 글자가 한 자도 없다. 글자가 있으면서 또한 글자가 없다. 그야말로 불립문자不立文字다. 그럼에도 이것은 팔만대장경의 결집이요, 그 마지막 돌파구이다. 이것이 바로 조사선祖師禪이다.

대저 오도송이나 전법게, 열반게가 제대로 된 것이라면 이렇게 그 속에 글자가 단 한 자도 없어야 한다. 요즘의 선시禪詩도 마찬가지다. 그것이 곧 무문인無文印이며, 부처님의 심인心印이다. 공이면서 공이 아니요, 공이 아니면서 또한 공이다. 마음은 마음이 아니다. 그러므로 마음이다.

글자가 있으면 그것은 똥이다. 두고두고 냄새가 나는 고약한 똥이다.)

이제 그 경허의 법은 만공滿空과 혜월慧月이 각각 이어 받는다. 이들은 제76대이며, 이것이 이른바 양대 산맥이다.

만공의 속명은 송도암宋道岩이요, 법명은 월면月面이다. 13세에 출가하여 23세 때 깨달음을 얻었고, 34세에는 경허로부터 전법게傳法偈를 받았으며, 그 후 덕숭산에 주석하면서 많은 사부대중을 거느리고 선풍禪風을 크게 떨쳤다.

이것은 만공이 읊은 「오도송」이다.

빈 산의 이치 기운 고금 밖인데

흰 구름 맑은 바람이 스스로 오고 가누나.

무슨 일로 달마는 서천을 건너왔는고?

축시엔 닭이 울고 인시엔 해가 뜨느니라.

空山理氣古今外

白雲淸風自去來

何事達摩越西天

鷄嗚丑時寅日出

(세상에 이보다 더 확실한 불법佛法이 어디에 있겠는가. 이 오도송이야말로 그대로 글발 없는 인(無文印)이다. 마치 인장을 허공에 찍은 것과 같다. 그러면서 그야말로 만인의 향기로운 등불이다. 누가 되었든 이 오도송의 뜻만 알면 그 역시도 그대로 견성見性이다. 그렇다면, 닭 울음소리는 무엇이고 또 해가 뜬 소식은 무엇인가?)

“천하에 살인하기를 좋아하는 자가 있으니, 그게 누구입니까?”

효봉이 어느 날 덕숭산에 있는 만공에게 찾아와 이렇게 물었다. 이에 만공이 즉시 답했다.

“오늘 여기서 보았노라.”

효봉이 다시 물었다.

“화상의 머리를 취하고 싶사온데 허락하시겠습니까?”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만공이 목을 길게 빼어 내미니, 효봉이 문득 예배를 드렸다.

다음은 만공이 물었다.

“제석천왕이 풀 한 줄기를 땅에 꽂고 부처님께 여쭙기를 ‘범찰을 이미 지어 마쳤습니다.’ 함에 부처님께서 미소를 지었다고 하니, 그 뜻이 무엇이겠는가?”

효봉이 말했다.

“스님은 참으로 절 짓기를 좋아하신다 하더니, 과연 그 말씀이 옳습니다.”

이에 만공은 그냥 한바탕 웃어 버렸다.

효봉曉峰은 14세 때 이미 과거에 장원 급제를 했으며, 일본 와세다대학 법과를 졸업하고 10여 년간 판사직에 종사하다가 세속에 염증을 느껴 다 때려치우고 어느 날 엿판을 메고 떠돌기 시작했다. 엿장수로 3년간을 방랑하던 끝에 마침내 스승 석두石頭를 만나 금강산 신계사에서 출가했고, 깨달음을 얻었으며, 75세 때는 조계종 초대 종정으로 추대되기도 했다.

(참으로 아귀가 잘 맞는다. 서로 깊이 정곡을 찔러 버렸다. 바로 이것이 진실로 깨친 경지이다. 이것이 조사선祖師禪이요, 이심전심以心傳心이다. 이 속에 부처가 두 번이나 모습을 나타냈다. 역대 조사들 중에도 이처럼 실답게 깨친 이들이 극히 드물다. 이분들이 사실 이 시대의 중생들을 위해 그 마지막 사자후獅子吼를 토한 도인들이다.)

어느 날 만공이 한가로이 앉아 있을 때 19세의 시자 진성侍者眞性이 차를 달여 가지고 왔다.

만공이 말했다.

“아무 일도 않는 사람에게 왜 그렇게 차를 대접하는고?”

그러자 진성이 한 걸음 다가서며 말했다.

“노스님! 한잔 더 잡수십시오.”

만공은 그만 허허허, 하고 웃었다.

진성眞性은 원담圓潭의 법명이다. 전북 옥구에서 독자로 태어나 12세 입산했고, 16세에 벽초碧超를 은사로 사미계를 받았으며, 그때부터 만공을 시봉侍奉하기 시작하여 만공이 입적할 때까지 줄곧 시자를 했다. 지금은 덕숭산 수덕사 방장方丈으로 납자들을 지도하고 있으며, ‘만공 법어’ ‘경허 법어’를 번역, 간행하기도 했다.

(가위 그 사자의 그 새끼이다. 만공은 이렇듯 어린 도인의 시봉을 받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만공의 독특한 가풍家風이다.)

전강田岡은 전남 곡성 출생으로 속성은 정씨이다. 16세에 출가하여 경을 보다가, 도반의 죽음으로 무상함을 느끼고 선방에 나가 용맹정진하던 끝에 깨달음을 얻었다고 한다. 만공에게서 전법게傳法偈를 받았다. 제77대이다.

전강이 어느 날 고봉, 석암과 함께 수덕사 아래 수덕 고개에 있는 주막집에 들어가 술을 사먹게 되었다. 참선 공부에 있어서 한창 바람둥이 시절의 세 사람이었다. 각기 잔마다 술이 넘치고 있었다. 그런데 이제 막 그 잔을 들려고 할 때였다. 세 사람 가운데 누군가 말했다.

“우리 술 도리나 한 마디씩 이르고 마십시다.”

그러자 고봉은 노래를 하고, 석암은 퉁소를 불었다. 그런데, 전강은 느닷없이 일어나더니 술상을 냅다 발길로 차버렸다. 그리고는 가는 곳마다 이 술 도리를 들어서 자랑을 했다.

후일 여기에 대해 혜암이 전강에게 말을 걸었다.

“나 같으면 스님과 같이 그렇게 아니하겠소.”

그러나 전강은 그 술 도리를 뺏으려고 하는 것을 미리 눈치 채고 말했다.

“천하없어도 뺏기지 않겠소이다.”

그러자 혜암이 씩 웃으며 말했다.

“이 깍쟁이!”

(하지만 나 같으면 전강처럼 그렇게 술상을 냅다 발길로 걷어차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 또한 개가 흙덩이를 쫓아가는(韓盧逐塊) 격이 아니고 무엇인가.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나는 냅다 그 ‘술 도리를 이르고 마시자’고 한 사람의 멱살을 움켜잡고 외쳤을 것이다.

“이게 바로 술 도리다.”)

어묵동정 한 마디 글귀를

이 낱 가운데 누가 감히 부딪힐 것이냐?

나에게 동정을 여의고 이르는 말을 묻는다면

곧 깨진 그릇은 서로 맞추지 못한다고 하리라.

語黙動靜句

箇中誰敢着

問我動靜離

卽破器相從

이것은 혜암惠庵의 「오도송悟道頌」이다.

혜암의 속명은 최순천崔順天이요, 법명은 현문玄門이다. 12세에 출가를 했으며, 23세 때 발심, 34세에는 비로소 대오大悟를 했고, 45세 때 만공에게서 전법게傳法偈를 받았다. 제77대이다.

어느 해 여름 해제解制하던 날이었다. 만공이 천천히 승당僧堂에 내려와 대중을 두루 돌아보며 말했다.

“올 여름 대중들은 용맹스럽게 정진을 잘들 하였다. 그러나 나는 홀로 하는 일 없어 그저 그물을 하나 폈더니라. 그런데 오늘 와서 이 그물 속에 한 마리의 고기가 걸려든 것이다. 자, 대중들은 일러라. 어떻게 해야만이 고기를 구해내겠는가?”

그때 대중 가운데 한 선객禪客이 일어나 입을 들먹하자마자 만공이 무릎을 탁 치며 하는 말이,

“옳다! 한 마리 걸려들었다.”

했다. 다시 한 선객이 벌떡 일어나 무슨 말을 하려고 입을 열자마자 만공은 무릎을 탁 치며,

“옳다! 또 한 마리 걸려들었다.”

했다. 그렇게 대중이 누구든지 입만 들먹하면 무릎을 탁 치며 똑같은 말을 하자, 혜암이 가만히 자리에서 일어나 만공의 옷깃을 잡아당겼다.

“큰스님! 어서 그물에서 나오십시오.”

(이것이 바로 법거량法擧揚이다. 가위 확철 대오한 자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법이란 이렇게 철저하고 정확한 것이다. 사실 지금 이 시대에는 우리 중생들의 갈증을 해갈해 줄 만한 이런 선지식善知識을 찾기가 어렵다.)

혜암은 자기 문하門下의 한 제자에게 전법게傳法偈를 내려준다. 그래서 그 문인門人은 제78대이다.

여기서 잠깐 그 전법게에 대해서 한마디 할까 한다.

전법게란 무엇인가? 법을 전해 주는 게송偈頌이다. 그만큼 전법게는 수행修行의 결정체이다. 도인 면허증이다. 그래서 전법게는 원래 친필로 써서 내려주는 것이 원칙이다. 하지만 그 당시 혜암은 건강상 친필로 써서 내려줄 처지가 못 되어, 그 제자에게 전법게를 내려줄 때 시자 일묵侍者 一黙한테 대필代筆을 시켰고, 또 거기에 필히 <전법게>란 말까지 넣으라고 했다 한다. “그 전법게란 말을 꼭 넣어야 한다!”고.

대필은 왜 시키는가? 혜암의 전법게임을 증명하기 위함이다. 말하자면 그렇게 확실한 증인을 세운 것이다. 그러므로 혜암의 친필도 아니고 시자의 대필도 아닌 것을 가지고 전법게라고 한다면 그것은 조작한 가짜이다.

또한 혜암은 전법게를 내려줄 때는 “이것은 전법게다”라고 말했고, 분명히 “거기에 전법게란 말을 넣으라.”고 했으니, 누가 되었든 그것이 틀림없는 전법게라면 그 제자 뒤에 받은 전법게에도 당연히 <傳法偈>란 말이 들어 있어야 한다. 생각해 보라. 그것이 다 같은 전법게라면, 왜 그 제자에게만 전법게란 말을 넣으라고 했겠는가.

혜암은 그렇게 해서 그것이 전법게임을 정확히 구별해준 것이다. 이 사실을 절대 간과해서는 안 된다. 그렇지 않으면 그것은 위조문서僞造文書이다. 혜암은 오직 그 문인 외에는, 그 뒤 아무에게도 전법게를 내려주지 않았다는 것은 그 문하에서 다 공공연히 아는 사실이다. 뿐만 아니라 혜암 생존시에는 누구든 그 앞에서 감히 전법게란 말을 꺼내지도 못했던 것이다. 옛사람도 말하지 않았는가. “그 여실히 참구하여 실지로 깨달은 도인은 오늘에만 만나기 드문 것이 아니요, 옛날에 있어서도 또한 일찍이 다수를 볼 수 없었느니라.”고.

참회게懺悔偈는 삼보三寶에 귀의歸依한 사람이면 누구에게나 다 주는 게송이다. 그러므로 참회게는 그냥 혜암이 불러주는 대로 본인이 직접 받아 적어도 되고, 아무나 한문을 잘 아는 자가 대신 받아 적어 줘도 된다. 어차피 그것은 자기 한 개인의 기념비적인 것일 뿐이지, 전혀 아무런 상속문서相續文書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유의할 점은, 그 전법게와 참회게도 하나 구분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다. 바로 혜암 문하에 그런 자들이 몇 명 있는데, 그중 청봉이라는 사람은 어느 누구에게 묻기를 “스님은 불법佛法을 아시오?” 했다고 한다.

“모릅니다.”

그러자 그가 다시 물었다.

“무엇을 모르시오?”

“그저 모릅니다. 그럼 스님은 무엇을 모르오?”

이에 그는 말했다.

“모르는 그놈을 모르오.”

그러고 나서 그는 그 뒤 주위 사람들에게 말했다고 한다.

“도대체 안다는 병이 크게 든 자요. 저런 자들이 불법을 잘못 말하고, 도인인 체하여 부처님 가르침을 흐리게 하는 것이 오늘날 우리 불교계의 풍토요. 법을 잘못 말하는 자는 그 과보를 크게 받을 것이며, 그것은 부처님 몸에 피를 내는 것과 같은 짓이므로 때려 죽여도 죄가 되지 않는 법이오.”

한 후, 손바닥을 한번 쳤다는 것이다.

(하지만 ‘모르는 그놈을 모른다.’니? 모르는 그놈을 어떻게 모르는가? 정말로 모르는 그놈을 모른다면, 모른다는 말은 왜 하는가? 그래서 그것이 사구死句인 것이다. 자기들 끼리 굴러다니던 공안 파설公案破說 몇 개 주워들은 걸 끝내 못 버리고 잔머리를 굴려 선문답禪問答에 이리저리 꿰어 맞춰서 원숭이 흉내를 내본들 그게 다 말장난일 뿐 자기 분상에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그는 그 모른다는 무명無明에 떨어진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답을 해야 하는가? ‘그럼 스님은 무엇을 모르오?’ 하고 물었을 때 “아는 것을 모른다.”라고 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활구活句이다.

그럼에도 이 사람은 자기가 했다는 말이 가관이다. 자기가 바로 자기의 말을 한 것이다. 그렇다면 이 사람이야말로 자기 말대로 때려 죽여도 죄가 되지 않으므로 아무 할 말이 없지 않겠는가.

이 사람이 더욱더 목불인견인 것은, 자기가 감히 혜암에게서 전법게傳法偈를 받아 경허, 만공, 혜암으로 이어진 법맥法脈을 전수한 제78대 선지식으로 자처하고 있다는 점이다. 도무지 혜암이 주지도 않은 전법게를 어떻게 받았다는 것인지 모를 일이다. 그렇다면 그 받았다는 전법게 원본을 한번 당당하게 내놓아봐야 할 게 아닌가. 시자 일묵이 대필해준 그 글씨의 원본이 바로 확실한 물증이다. 일생을 학처럼 청결하게 살다 간 혜암이거늘 심히 안타깝고 유감스러운 일이다.

혜암으로부터 법을 이어받은 그 문인이 스승이 열반한 뒤 그 법어집法語集을 출간하려 할 무렵이었다고 한다. 그가 혜암에게서 받은 참회게를 그 문인에게 보여준 것이다. 그래서 그 참회게도 법어집에 넣기 위해 자세히 보니 뭔가 잘못되어 있었다. 제대로 받아 적지 않았는지 모르지만 법에 딱 맞아 떨어지지가 않았다는 것이다.

그 문인은 부득이 스승을 대신해서 그 참회게를 고칠 수밖에 없었다. 앞의 두 구는 원문 그대로 놓아두고(上方春日花如霰 異鳥聲中午夢甘), 뒤의 두 구를 자기 임의대로 빼고 다시 다른 말로 법에 맞게 채워주었다(萬法通光無證處 唯有揷天是淸峯)는 것이다. 잘못된 것을 그대로 법어집에 넣을 수는 없지 않겠는가. 또한 그 문인은 그 법어집을 번역할 때도 혜암과 의논하여 원문까지도 고친 일이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그가 그 고쳐준 참회게를 가지고 혜암으로부터 받은 전법게라고 사람들을 속인다면 혜암은 무엇이 되며, 또 그 문인은 무엇이 되겠는가. 또한 그렇다면 그것이 과연 누가 내려준 전법게가 되겠는가. 거기다가 더구나 그가 그걸 가지고 혜암의 가짜 전법 제자傳法弟子로 행세하며 또 다른 사람들에게 전혀 말도 되지 않는 그 거짓 전법게를 만들어서 내려주고 있다면 그들은 어떻게 되겠는가. 사람이 돈 몇 푼을 사기 당해도 억울한 일인데, 하물며 그 인생을 사기 당하면 어떻게 되겠는가.

그래서 그 받았다는 전법게 원본을 한번 당당하게 내놓아 보라고 하는 것이다.

그런데 어느 거사가 그에게 전법게를 보여 달라고 하자, 그가 그 거사에게 한다는 말이 자기의 전법게를 그 문인이 가지고 있다는 것이고, 또 어느 지면을 보니 그가 하는 말이 “그 문인이 스스로 엮어 쓴 혜암의 법어집 <늙은 원숭이>에 내 전법게를 올려놓았다”고 한다는데, 혜암이 그에게 주지도 않은 전법게를 그 문인이 어떻게 그 책에 올려놓겠는가. 그렇다면 고작 그 문인이 고쳐준 참회게(上方春日花如霰 異鳥聲中午夢甘 萬法通光無證處 唯有揷天是淸峯)를 가지고 끝내 전법게라 하고 있단 말인가.

하지만 정작 자기가 눈이 있는 사람이라면 그 참회게를 받을 때 그것이 잘되었는지 잘못되었는지부터 알 수 있었을 게 아닌가. 무엇보다도 첫째는 깨달음(見性)을 얻어야 한다. 전법게는 그 다음의 일이다. 사람이 언감생심, 아무리 욕심을 낼 게 따로 있지, 언제까지 그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릴 수 있겠는가. 혜암이 여러 문도門徒들에게 참회게를 줄 때, 시자 일묵이 일일이 다 불러주는 대로 옥편을 찾아가며 받아 적어 주었고, 그의 참회게도 분명한 일묵의 필체였으니, 그 참회게의 원본 글씨를 확인해 보면 금방 모든 것을 다 명백히 알 수 있는 일이다.

그리고 또 한 가지 분명히 밝혀 둘 것은, 그 문인이 15년 혜암을 모시는 동안 그 문하에서 견성見性을 했다고 인가 받은 사람은 단 하나도 없었고, 다만 그 문인이 그에게 오도송悟道頌을 포함해서 무자 화두無字話頭에 대한 것을 준 것은, 그 당시 그가 그 문인한테 공부를 하고 있을 때여서 더욱더 분발해서 공부하여 자기한테 인가印可를 받기로 한 약속 때문이라고 한다.

조주의 무자를 누가 감히 깨달아 얻을 것인가.

부처라도 입만 열면 살인검이 내리리.

무슨 일이 있었는가, 묻는 이가 있다면

어젯밤 삼경에 이미 달이 달을 삼켰다고 하리라.

趙州無誰敢得悟

佛開口下殺人劍

若人問我當何事

昨夜三更月呑月

이것이 바로 그 문인이 그에게 준 오도송이다.

그리고 그 조주의 무자 화두에 대해 ‘무라고 한 뜻이 무엇이냐?’고 묻거든 “무엇을 삼키고 무라고 했습니다.”라고 말하라 시켰고, 다시 더 묻거든 “다시 더 이를 것이 없습니다. 그 무 다음에 입만 열면 목이 떨어집니다.”라고 하라 시켰으며, ‘그 도리는 어디서 보았느냐?’고 묻거든 “달이 뜨는 곳에서 보았습니다.”라고 하라고만 시켰을 뿐이어서 그는 그 속에 담긴 뜻은 전혀 알지 못한다고 한다.

종탈 법문從脫法門 역시 마찬가지다. ‘이것을 힘으로 뺏지 말고 말로 빼앗아 가보라’고 말하면, 무엇이 되었든 손에 들고 있는 것을 내보이며 “스님이 이것을 힘으로 뺏지 마시고 말로 빼앗아 보시오.”라고 하라 시켰을 뿐 왜 그런가에 대해서는 감히 말하지 못하는 법이므로, 그는 그것이 무슨 말인지 전혀 알지 못한다고 한다. 또한 도는 오직 다 버리고 본래의 마음(本心)으로 돌아갈 때 자기 스스로 깨닫게 되는 것이지, 남이 아무리 설명을 해서 가르쳐 준다고 해도 그 깨달음은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도는 바로 자기 진실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문인은 그것을 자기 스스로 참구해서 직접 깨달아 인가印可를 받으라고 했다는 것인데, 그때 그가 그 인가를 받기 위해 혼자 조용히 앉아서 자기 공부나 열심히 하고 있었으면 얼마나 좋았겠는가? 그렇다면 사실 아무 문제도 없을 일이다.

하지만 일이 결국 이렇게까지 되고 보면, 그 문인이 설사 좋은 의도에서 개인적인 공부 차원으로 그렇게 해서라도 한 사람을 이끌어 주고 싶은 충정이었다 해도, 그것은 결코 바람직한 행위가 아니었다. 어찌 그리 쉽게 인간을 믿었는가. 더구나 그가 아무리 요구를 해도 완강히 거절해야 했는데, 공과 사를 신중히 구별하지 못하고 ‘기어이 해냈구나’느니, ‘종탈 법문’이라는 말을 만들어서 그것들을 혜암의 법어집 <늙은 원숭이>에 넣어준 것은 그 문인의 심각한 실수이다. 거기다가 그 문인은 ‘혜암 현문 선사 행장기’까지 자기가 쓴 것을 그의 이름으로 넣어주었다고 한다.

그 결과, 그는 오히려 엉뚱하게 그것까지 악용해서 꿈에도 생각 못할 너무나 엄청난 일을 벌이고 있는 것이다. 그가 도를 깨달았다면 그 본래 자리에 머물러 있으려고 할 뿐(保任)이지, 어떻게 자기 스스로를 더 비참하게 오염시키며 그런 일을 하겠는가. 일이 결국 이렇게 되었다면 그 문인은 그리 위험을 무릅쓰면서까지 한 사람을 이끌어 주려다가, 오히려 불행하게 사람을 하나 버려놓은 꼴이 된 셈이다. 왜 가슴 아픈 일이 아니겠는가? 무엇보다 사람이 본심本心으로 돌아가 진실하고 깨끗하게 살기 위해 도를 닦는 것이거늘.

그래서 그 문인은 백번 그 책임을 통감하고, 우매한 불자들을 데리고 서로 피차 더 이상의 피해를 입지 않게 하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만인 앞에 이 사실을 밝히지 않으면 안 되었다고 한다. 그것을 말미암아 더 씻을 수조차 없는 죄업을 쌓기 전에 이제 도로 회수할 것은 회수하고, 바로잡을 것은 바로잡아서, 다시 본래대로 되돌려놓겠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문인은 이후 어쩌다 본의 아닌 그 한 때문에 자신의 존재를 나타내지 않고 그냥 산야에 묻혀 아무 이름없이 피었다 지는 풀꽃처럼 혼자 숨어 살기로 했다고 한다.

은 바로 진실의 결정체이다. 이제라도 그는 더 이상 혜암을 팔며 그 이름을 더럽히는 역사의 죄인이 되지 말고 다시 초발심初發心으로 돌아가 부단히 공부를 해서 깨달음을 얻어 누구한테서든 인가印可를 받아야 할 것이다. 공안 파설公案破說 몇 개 주워들은 걸 끝내 못 버리고 잔머리를 굴려 선문답禪問答에 이리저리 꿰어 맞춰서 원숭이 흉내를 내는 그 말장난도 이제 그만 때려치우고.

이것이 결코 작은 일인가? 바로 자기 자신의 인생이다. 어찌 색신色身의 일을 믿겠는가. 안광 낙지시眼光落地時를 생각해 보라. 한번 소중하게 인간의 몸을 받고 태어나서 그리 초라하게 ‘남의 것’을 가지고 일생을 삿되게 마감해서야 되겠는가 말이다. 이제라도 ‘자기의 것’을 찾아서 참되게 살아야지. 깨달음만 얻는다면, 누구한테 인가를 받든 법法은 하나이니 그게 다 그것이 아니겠는가. 그래서 깨달은 사람에게는 불교나 기독교나 진리는 같은 ‘하나’이므로 따로 불교니, 기독교니, 고집하지 않는다.

그렇지 않고는, 자기 자신도 인가를 받지 않은 사람이 어떻게 남을 인가할 수 있겠는가? 그것은 운전대도 한번 잡아보지 못한 자가 운전 면허증을 받았다고 하는 것보다 더 위험천만한 일이다. 아무리 그럴듯하게 양의 탈을 쓰고 남의 글들을 긁어모아 그것이 마치 자기의 말인 것처럼 책을 내어 위장을 한다 해도 법을 모르면 빈 그릇의 공허한 울림일 뿐이다. 아무리 감추려 해도 가짜는 언젠가 그 가면이 처절하게 벗겨지기 마련이다.

그래서 옛사람도 말하기를 “가난한 사람이 제왕帝王을 사칭하면 자기 한 몸만 죽지만, 깨달았다고 속여 법왕法王을 사칭해서 수많은 중생을 잘못된 길로 안내하면 그 죄상은 천 부처님(千佛)이 출현해도 용서받지 못한다.”고 했지 않았는가. “부모를 살해한 대역중죄는 오히려 참회할 수 있으나, 깨달았다고 거짓말하여 반야般若를 비방한 죄는 이처럼 극히 무거우니, 지옥을 천만 번 갈지언정 깨달았다고 거짓말해서는 안 된다.”고. 이런 줄을 “알면서도 일부러 저지르면 산채로 지옥에 떨어진다.”고.

일체의 법은 있는 것도 아니요, 없는 것도 아니요, 있고 없는 두 가지가 다 공空하여 없는 것도 아니다. 일체의 법은 일체의 법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법이다. 진실로 깨달으면 바로 그 자리이지만, 깨닫지 못하면 아득히 멀고 컴컴하다.)

일체의 법을 분명히 요달해 알면

자성에 있는 것이 없다.

이 법 성품이 이런 줄 알면

곧 노사나를 보리라.

了知一切法

自性無所有

如是解法性

卽見廬舍那

이것은 경허가 혜월에게 내려준 전법게傳法偈이다.

혜월慧月은 충남 예산에서 태어났으며, 속성은 신씨, 법명은 혜명慧明이다. 12세에 출가하여 글 한줄 제대로 배워본 적이 없다가, 24세 때 경허를 만나 참선의 관문을 두드리게 되어 깨달음을 얻었고, 40세 때 경허로부터 전법게를 받았으며, 20여 년 동안 덕숭산에 주하다가, 61세 이후로는 남방의 제선방諸禪房을 두루 유력하면서 납자를 제접했다. 제76대이다.

혜월이 양산 내원사에서 주석하고 있을 때였다. 그 당시 혜월은 논밭을 만들기 위해 공부하는 스님들을 동원해서 황무지 개간 사업을 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그러나 대중울력만 호되게 시킬 뿐 먹는 것에 대해서는 아주 소홀했다.

하루는 혜월이 부산에 가고 없는 틈을 타서 고봉이 몇몇 스님들과 같이 소를 끌고 양산 시장에 나가서 팔아 없앤 후 그 돈으로 술을 실컷 사 마시고 와서 남은 돈을 원주에게 주며 대중공양에 맛있는 반찬을 장만해 드리라고 부탁했다.

며칠 뒤 혜월이 돌아와 보니 소가 없었다.

“누가 내 소를 가져갔느냐?”

하고, 혜월은 큰 소리를 치며 소를 찾아오라고 야단을 했다. 대중은 놀라 전전긍긍할 뿐 한 사람도 나서서 대답하는 이가 없었다. 그때 고봉이 갑자기 옷을 홀랑 벗어 버리고 조실 방에 들어갔다.

“음매, 음매…….”

송아지 소리를 내면서 그는 사방으로 기어 다녔다. 혜월은 벌써 고봉의 장난인 줄 알고 그의 볼기짝을 찰싹 때리며 문 밖으로 쫓아냈다.

“내 소는 애비 소요, 에미 소이지, 이러한 송아지가 아니다.”

하지만 그 이후로는 혜월이나 고봉이 아무 말썽없이 지냈다고 한다.

고봉古峰은 21세에 출가, 25세 때 팔공산 파계사 마당가에 있는 바위 위에서 좌선을 하다가 홀연히 견성을 했다고 한다. 만공의 법제자이다.

(하지만 내가 볼 때, 고봉은 그렇게 옷을 홀딱 벗고 기어 다닐 필요까지도 없었다. 다만 그 울음소리 하나를 잘못 내었을 뿐. 고봉 자기가 바로 그 소라 생각하고 그리 기어 다녔단 말인가? 그렇다면 그것은 천만의 말씀이다.

만약 고봉이 어미 소의 울음소리를 냈더라면 혜월은 어찌했을 것인가? 그때도 문 밖으로 쫓아낼 수 있었을까. 혜월은 아예 꼼짝도 못하고 그냥 좋게 지나갔을 것이다. 안 그러면 그 소는 그만두고 당신은 목숨까지 잃어야 한다. 물론 혜월이야 그 소가 지금 어디에 있다는 걸 잘 알고 있는 것이다. 그러기에 ‘내 소는 애비 소요, 에미 소이지 이러한 송아지가 아니다’고 말한 것이다. 그렇다면 혜월이 찾고 있는 그 소는 어디에 있었는가?

안불견眼不見이요, 이불문耳不聞이다.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한다.

나는 이렇게 말한다.

“지금 그 소는 안산案山에서 홀로 울고 있습니다.”)

운봉雲峰은 혜월의 법제자로 법명은 성수性粹이다. 13세에 출가하여 35세 때 우연히 새벽녘 문 밖에 나서는 순간 홀연히 마음 광명이 열려 가슴에 막혀 있던 의심이 완전히 해소되었다고 한다. 혜월에게서 전법게傳法偈를 받았다. 제77대이다.

어떤 스님이 운봉에게 물었다.

“옛 부처님 나시기 전에 ‘응연한 한 모양 뚜렷하다’ 하니, 그 뜻이 어떤 것입니까?”

운봉: 늦더위가 찌는구나. 부채질이 바쁘니라.

(인봉: 청풍기처월자명淸風起處月自明이니라. 맑은 바람이 이는 곳에 달이 스스로 밝았다.)

스님: 더위가 상관없는데 부채가 무슨 필요 있습니까?

운봉: 더우면 부치고 시원하면 버리느니라.

(인봉: 도리어 그대가 더 부채질이 바쁘군.)

스님: 풍월을 읊는 것은 어떻습니까?

운봉: 진흙 밭에 개가 뛰니 자국마다 매화로다.

(인봉: 그러잖아도 지금 앞산에서 뻐꾸기가 먼저 풍월을 읊고 있느니라.)

향곡香谷의 법명은 혜림惠林이다. 16세에 천성산 내원사에서 출가하여 32세 때 가을 산골짜기에서 일어난 돌풍이 열린 문짝을 거세게 닫아 버리는 소리를 듣고서 화두에 대한 의심을 풀었다고 한다. 운봉의 법을 이어 받았다. 제78대이다.

향곡이 상당上堂하여 묵좌하고 있는데 진제眞際가 나와서 여쭈었다.

“불조께서 아신 곳은 여쭙지 아니하거니와, 불조께서 아시지 못한 곳을 스님께서 일러주십시오.”

“구구九九는 팔십일八十一이니라.”

“그것은 불조께서 다 아신 곳입니다.”

“육육六六은 삼십육三十六이니라.”

이에 진제가 예배드리고 물러가니, 향곡은 아무 말 없이 법상에서 내려왔다.

다음날 진제가 다시 여쭈었다.

“불안佛眼과 혜안慧眼은 여쭙지 아니하거니와, 어떤 것이 납승衲僧의 안목입니까?”

향곡이 답했다.

“비구니 노릇은 원래 여자가 하는 것이니라.”

그러자 진제가 말했다.

“오늘에야 비로소 큰스님을 친견하였습니다.”

그러자 향곡이 물었다.

“네가 어느 곳에서 나를 보았느냐?”

“관.”

“옳고, 옳다.”

여기서 향곡이 전법게를 내려 태고 보우로부터 경허, 혜월, 운봉, 향곡으로 내려온 임제 정맥臨濟正脈을 진제에게 이어 주었다고 한다. 그래서 그는 제79대이다.

(하지만 나는 여기서 하나 짚고 넘어가야겠다. 내가 볼 때는 한 마디도 서로 깊이 정곡을 찌르지 못했다. 진제는 분명히 ‘불조께서 아시지 못한 곳을 스님께서 일러 주십시오’라고 물었다. 그런데 그 물음에 대해 향곡은 ‘구구는 팔십일이니라.’라고 하였고, ‘육육은 삼십육이니라.’라고 했다. 그것이 ‘불조께서 아시지 못한 곳’이란 말인가?

누가 만일 나에게 그와 같은 질문을 했다면 나는 이렇게 답했을 것이다.

“아는 것은 알지 못한다.”

그리고 다음날 진제가 ‘어떤 것이 납승의 안목입니까?’ 하고 물었을 때, 향곡은 ‘비구니 노릇은 원래 여자가 하는 것이니라.’고 했는데, 그 말이 진제의 문처問處와 하등 무슨 관계가 있는가?

그래서 나 같으면 이렇게 말한다.

“어떤 것이 납승의 안목입니까?”

“견곡노오진안목犬哭鷺嗚盡眼目이라. 개 짖고 당나귀 우는 것이 그대로 다 제 안목이니라.”

또, 향곡이 ‘네가 어느 곳에서 나를 보았느냐?’고 묻자 진제는 ‘관’이라고 했는데, 나라면 그렇게 말하지 않았을 것이다. 분명히 그 본 곳을 알아서 정확하게 말해야 한다.

“네가 어느 곳에서 나를 보았느냐?”

“문 앞 글 읽는 데서 보았습니다(門前讀書人).”

본래 불이문不二門이다.)

금오에 천추 달이요

낙동에 만리 파로다.

고기 잡는 배가 어느 곳으로 갔는고?

의구히 갈대꽃에서 자더라.

金烏千秋月

洛東萬里波

漁舟何處去

依舊宿蘆花

이것은 용성龍城의 오도송이다.

용성은 전북 장수 출생으로 속성은 백씨이다. 16세에 해인사에서 출가하였고, 기미년(1919)에는 만해 한용운과 더불어 불교계의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한 사람으로 독립운동에 힘쓰기도 했는데, 이 오도송은 낙동강을 건너면서 지었다 하며, 뒷날 대각교를 창설했을 때 종지宗旨의 구로 삼았다고 한다.

(보통 사람이 보기에는 은유가 너무 깊고 어렵긴 하나 이것이 곧 진짜 오도송이다. 참으로 더없이 아름다운 오도송이다. 고기 잡는 배는 무엇을 뜻함이며, 갈대꽃은 어디에 있는가? 이것만 분명히 알면 누구나 오도悟道를 할 수 있으며, 실은 삼세의 모든 부처님과 역대 조사들이 바로 그 갈대꽃에서 안신입명安身立命을 하고 있는 것이다.)

혜월과 만공이 양산 통도사로부터 청장請狀을 받아 그곳에 이르렀다. 대중이 모두 모여 공양을 받으려 할 때 혜월이 별안간 할喝 일할一喝을 하였다. 대중공양을 마치고 마악 발우를 걷으려 할 때 만공이 할 일할一喝을 하였다.

그 뒤 모든 선객들이 이 일을 듣고 놀라 의심하고 두 분 선지식의 할을 한 뜻이 어떤 것인가 하여 쟁론이 끊어지지 않다가, 드디어 용성에게 물었다.

“노승이 비록 그 사이에 들어 입을 놀려 말하고 싶지 않으나, 가히 여러 사람을 위하여 의심을 풀어주지 아니 할 수 없노라.”

하고, 용성도 할 일할一喝을 하였다.

(세 선지식의 대가풍大家風이여! 이제는 더 이상 할을 할 자리가 없구나. 아무리 석가모니 부처님이라도 여기다 다시 입만 대면 머리가 두 쪽이 나리라. 할 일할一喝!)

한암漢巖은 강원도 화천 출생으로 속성은 방씨이다. 21세에 금강산 장안사에서 출가하였고, 경허 문하에서 깨달음을 얻었다. 서울 봉은사 조실로 있던 50세 때는 맹세하기를 ‘차라리 천고에 자취를 감춘 학이 될지언정 삼춘三春에 말 잘하는 앵무새의 재주는 배우지 않겠노라’고 하면서 오대산에 들어가 그 후 27년 동안 동구 밖에 나오지 않은 채 그곳에서 조용히 일생을 마쳤다.

만공이 오대산 적멸보궁을 참배하고 돌아갈 때 한암은 몸소 산문까지 전송을 했다. 둘이 다리에 다다르자 만공이 돌멩이 하나를 주워 한암 앞으로 던졌다. 그러자, 한암이 그 돌멩이를 주워서 개울에 던져버렸다.

이에 만공이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이번 걸음에는 손해가 적지 않다.”

(공연히 남의 생다리를 걸다가 오히려 자기가 제 꾀에 넘어졌다.

대체로 선법禪法은 세 가지로 나누어 말하는데, 의리선義理禪이란 말이나 글로 해석하고 설명하는 선을 말함이고, 여래선如來禪은 생각과 알음알이가 아주 끊어지지 않아서 아직도 말 자취와 이치 길이 남아 있어 참다운 선에 이르지 못한 것을 말함이고, 조사선祖師禪은 의해義解나 명상名相, 문자에 걸리지 않고 바로 이심전심以心傳心하는, 달마가 본래 전한 선법을 말한다. 즉 교외별전敎外別傳이 그것이다.)

춘성이 도봉산 망월사에서 겨울을 날 때였다. 심한 추위가 닥쳐와 승려들에게 벌목을 시켰는데 그 일 때문에 춘성은 의정부 경찰서로 불려가게 되었다. 서장이 조서를 작성하려고 춘성에게 물었다.

“왜 벌목을 하였소?”

“날은 추운데 땔감이 없기 때문이오.”

“하지만 그것은 불법 아니오. 스님의 본적은 어디요?”

춘성은 벽력같은 소리로 말했다.

“우리 아버지의 ××요.”

그러자 경찰서장이 놀라서 같이 소리를 질렀다.

“그것 말고 스님의 고향이 어디냔 말이오?”

“우리 아버지의 ××라고 벌써 답하지 않았소.”

“당신 돌았소?”

“아니오.”

“어디에서 오셨소?”

서장이 다시 물었다.

“우리 어머니의 ××요.”

춘성은 여전히 집이 떠나갈 듯한 목소리로 답했다. 서장은 어처구니가 없어 춘성을 그냥 돌려보냈다.

“이 늙은 중아, 어서 그만 가시오.”

그 후 누가 춘성에게 그 벌목 사건을 어떻게 무사히 넘기셨느냐고 묻자 오히려 천연스럽게 반문했다.

“내가 당연히 할 소리를 했는데 어찌 하였겠느냐?”

춘성春城 13세 때 설악산 백담사에서 만해 한용운을 은사로 출가하여, 만공의 문하에서 깨달음을 얻고, 한 평생을 구름처럼 바람처럼 걸림 없이 수행 정진을 했다. 특히 그는 아무 악의 없이 ‘씨브랄 놈’이라고 욕 잘하는 도인으로 유명하다.

(욕도 곧 법이다. 만약 여기서 경찰서장이 그것을 자기에게 하는 욕인 줄로 알아듣는다면. 춘성이 내뱉은 말의 진정한 의미는 바로 그 ‘씨브랄 놈’에 있는 것이다. 그것이 또한 그 ‘돌장승이 애기 낳는 도리’이다. 이 씨브랄 놈!)

고불총림 백양사에서 ‘무차선회無遮禪會’가 86년만에 새롭게 복원되어 뜻 깊은 불사가 행해졌다. 무차선회란 지위가 높고 낮음, 권력이 있고 없음, 재산이 많고 적음에 상관하지 않고 누구나 평등하게 법을 논하는 법회를 말한다. 또한 피차 선문답禪問答에 대한 거론은 한국 불교의 오랜 전통이다.

서옹의 뜻을 받들어 이루어진 이번 행사는 한국 불교가 조사선의 전통을 올바로 계승하고, 국내외 학자들에게 조사선의 종지를 정확히 알리며, 과학 문명의 극대화로 정신적 위기에 처한 인류에게 희망을 안겨주기 위해 열렸다. 전국의 불교인들은 물론 외국의 불교 석학들까지 모여 회상에는 5천의 사부대중이 인산인해를 이루고 또 인터넷으로 전 세계에 생중계를 하는 등 아주 굉장했다.

MBC-TV에서도 이것을 1시간 동안 다큐 스페셜로 방영해 주었는데, 법상에는 백양사 방장 서옹, 조계종 원로회의 의장 혜암, 해운정사 금모선원 조실 진제가 앉아 있었다.

이때 어느 위풍이 당당한 젊은 스님이 성큼 사자좌 앞으로 다가가 삼배를 마친 뒤 서옹에게 법거량法擧梁을 청했다.

“고불총림인데 부처님도 안 계시고 또한 스님도 저는 뵙지를 못했습니다. 이상한 임제 스님께서 이 자리를 다녀가셨다고 하는데, 임제 스님은 그만두시고 금일에 스님의 모습을 보여주십시오.”

이에 서옹은 법상에 앉은 채 주장자를 높이 잡고 대답했다.

“나의 모습이라도 삼십방, 나의 모습을 투과했더라도 삼십방, 여하즉시如何卽是냐? 말하거라, 이놈!”

그러자 그 젊은 스님이 말했다.

“맞았습니다.”

“헤엄! 안 된다, 그래서!”

(하지만 또 그래서는 안 될 것이, 이미 나의 모습이 지금 바로 코앞에 드러나 있는데 그걸 전혀 보지 못하고, ‘나의 모습이라도 삼십방, 나의 모습을 투과했더라도 삼십방……’ 하고 왜 다른 말만을 하고 있는 것일까.

서옹은 무슨 생각에서 그리 말했는지는 몰라도 나의 견해로는 이 한 가지 아쉬움이 남는다. 그것은 바로 자다가 남의 다리를 긁는 격이 아니고 무엇인가. 무엇보다 여기서 ‘문 앞의 한 길이 이미 장안으로 통한 것’을 알아야 한다.

대단히 죄송한 말이지만, 그래서 눈을 뜨지 못한 장님이란 말을 아니 할 수 없는 것이다. 지금 바로 코앞에 드러나 있는 그 나의 모습을 떠나 따로 나의 모습은 없다. 그럼에도 오히려 엉뚱하게 없는 그놈을 설명하려 하다니.

그런데, 그 젊은 스님은 자기가 무엇을 알아서 맞았다고 했는가? 차라리 ‘그 또한 좋게 삼십방이오.’라고 해야지.

사자교인獅子咬人이요, 한로축괴韓盧逐塊라. 사자는 돌을 던진 사람을 물고, 개는 흙덩이를 쫓아간다. 실은 또한 ‘나의 모습이라도 삼십방, 나의 모습을 투과했더라도 삼십방, 여하즉시냐(이것이 무엇이냐?)고 말하는 그것이 지금 곧 ‘나의 모습’이다.

그러므로 서옹은 이렇게 답을 했어야 한다.

“너는 지금 어느 곳에서 나의 모습을 보았느냐? 말하거라, 이놈! 고불과거구古佛過去久니라. 옛부처가 이미 지나간 지 오래니라.”)

부산 해운정사 금모선원의 조실로 있는 진제眞際는 ‘수선회’와의 문답에서 이런 말을 남겼다.

문: 도가 높을수록 마가 세다고 하는데요. ‘도고마성道高魔盛’이 사실입니까?

답: 잘못된 인식이니라.

(인봉: 도가 높다는 그 생각이 곧 마다. 그러므로 그 도고마성은 당연한 말이다. 도무지 도가 높고 낮은 것을 어느 곳에서 보았는가.)

문: <선가구감>에 서산 대사께서 말씀하시기를 ‘이즉돈오 사비돈제理卽頓悟 事非頓除. 이치로는 깨달았어도 습기는 없애지 못했다)’라 하셨는데요.

답: 그것은 모순이다. 육조 대사도 금을 캐서 녹여 잡금을 제하면 순금이 된다고 하셨지. 물에 있으나 산에 있으나 순금은 변하지 않는 것과 같이 견성(見性)을 하면 습기와는 상관이 없는 것이지. 번뇌가 곧 보리, 완전히 진리로 돌아갔는데 번뇌에 놀아나게 되겠는가.

(인봉: 하지만 나는 전혀 그 말씀과는 다른 생각이다. 어째서 그런가 하면, ‘견성을 하면 습기와는 상관이 없다’고 하는 그 말이 바로 습기이기 때문이다. ‘완전히 진리로 돌아갔다’고 하는 그놈이 오히려 돌아가지 못하고 번뇌에 놀아나고 있다는 말이다. 번뇌가 곧 보리라고? 오히려 보리가 번뇌이다.)

문: 무자 화두無字話頭를 참구할 때 ‘조주는 어째서 무라고 했는가?’ 하고 그 뜻을 참구하는 것이 바르게 하는 것입니까?

답: 그렇지. ‘부처님께서는 모든 중생에게 다 불성佛性이 있다고 하셨는데 조주 선사는 왜 개에게 불성이 없다고 하셨는가?’ 하고 오매불망 조주 선사의 뜻을 참구하는 것이지. ‘개도 불성이 있습니까?’ ‘없느니라.’

(인봉: 이 ‘무자 화두’ 드는 법도 큰 문제다.

“개도 불성이 있습니까?”

“없느니라.”

이렇게 말을 하면 틀린 답이다.

여기서는 이렇게 말해야 맞는 답이다.

“개도 불성이 있습니까?”

“개는 짖는 것이 곧 불성이니라.”

언뜻 이해가 안 될 줄 안다. 하지만 ‘개도 불성이 있습니까, 없습니까?’라고 해야 ‘없느니라.’라는 답이 나온다. ‘없습니까?’라는 말이 빠지면 ‘없느니라.’라는 답은 나올 수 없다. 그러므로 ‘개도 불성이 있습니까?’하는 물음은 이미 무자 화두로서 성립이 될 수 없다.

그런 식으로 백날 화두를 들어보라. 무슨 소득이 있겠는가. 백년하청이다. 아무리 공부하려고 애를 써도 벌써 그 문제부터가 틀려버렸으니 어떻게 답이 나오겠는가. 그러면 어떻게 그 무자 화두를 들어야 하겠는가?

조주의 무자를 누가 감히 깨달아 얻을 것이랴

부처라도 입만 열면 살인검이 내리리.

무슨 일이 있었는가, 묻는 이가 있다면

어젯밤 삼경에 이미 달이 달을 삼켰다고 하리라.

趙州無誰敢得悟

佛開口下殺人劍

若人問我當何事

昨夜三更月呑月

중이 조주에게 묻되 “개도 불성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조주 이르되, “무.”

그렇다면 어째서 무라고 하였는가? 천칠백 공안의 대의가 다 그 ‘무’ 속에 있다. 하지만 이제 그 ‘무’ 다음에 입만 벌리면 머리가 두 쪽으로 박살이 난다. ‘개도 불성이 있습니까?’하고 물으나, ‘개도 불성이 있습니까, 없습니까?’하고 물으나 그게 다 그거 같지만 실로 천지현격이다.

왜 그러느냐 하면 비록 개 불성의 유무有無를 물었지만, 그보다도 먼저 지금 그것을 묻고 있는 게 누구인가? 바로 나다. 내 불성이 지금 바로 그렇게 묻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 ‘무’는 이미 내게 대한 답인 것이다. 그러므로 개 불성과는 무관하게 무다. 또한 개 불성이든, 내 불성이든, 부처님 불성이든, 조사님 불성이든, 그 누구의 불성이든 불성은 다 같은 하나다. 그런데 왜 그리 모두들 한결같이 개 불성에만 집착하는 것인지 모를 일이다. 지금 내 불성이 바로 개 불성이다.

이 ‘무자 화두’를 어떤 조사는 ‘일체 명근一切名根을 끊어버리는 칼이다’고 했고, 또는 ‘일체를 열어주는 자물쇠통이다’고도 했으며, ‘일체를 쓸어버리는 쇠빗자루다’ ‘나귀를 매어두는 말뚝이다’라고도 했다. 이는 곧 삼세 제불三世諸佛의 골수요 역대 조사歷代祖師의 안목이다.

하지만 ‘부처님께서는 모든 중생에게 다 불성이 있다고 하셨는데 조주 선사는 왜 개에게 불성이 없다고 하셨는가?’ 하고 오매불망 조주 선사의 뜻을 참구해서는 절대 안 된다. 그렇게 의심을 지어 나가면 크게 화두를 잘못 드는 것이다. 하긴 전강田岡도 무자 화두는 ‘무’자에 뜻이 있는 것이 아니고 ‘무’라고 말씀하신 조주 대사에게 뜻이 있는 것이니 ‘무’라는 말을 참상參想하지 말고 ‘무’를 말씀하신 조주 대사의 의지意旨를 참구해야 한다고 했다. 무자 화두를 참구하는 학자들은 꼭 조주 대사의 뜻을 깨달아야 할 것이라고.

실로 어림도 없는 소리다. 크게 잘못된 말이다. 그러니 도무지 어린 학인들이 누굴 믿고 공부를 하겠는가. 오히려 배워야 할 사람들이 남을 가르치고 있는 세상이다. 자기의 목숨을 잃는 것은 말하지 않겠지만, 공연히 아까운 학인들의 눈을 멀게 하고 있으니 그게 탈이다. 그래서 더욱 말법시대라는 얘기다. 그렇게 조사 공안祖師公案을 더럽히다 죽으면 어느 곳으로 떨어지는 줄이나 아는가. 그 죄 무간지옥이다. 그러기에 자기 공부부터 해야 한다.

‘무자 화두’는 바로 그 ‘무’에 절대적인 뜻이 있으며, 이미 그 ‘무’로써 일체가 다 끝난 경지이다. 이제 그 ‘무’ 다음에 다시 입을 열면 목숨을 잃는다. 그 ‘무’라고 한 것이 바로 조주의 뜻인 거고, 그 외의 다른 뜻은 없다.

모르면, 그냥 그 모르는 것을 알기 위해 오직 자기 수도에만 전념할 뿐이다. 그것이 바로 중생제도다. 자기 제도를 떠나서는 그 어떤 중생제도도 있을 수 없다. 지금 세상에는 중생제도를 말하는 이들이 많지만, 이 화두를 들어 도를 깨닫게 하는 일만이 중생제도요, 그 외의 것은 또한 생사윤회라 그 무엇도 중생제도가 아니다. 오직 대해탈大解脫의 길로 인도하는 것만이 그것이다.

누구나 간절히 정진을 하면 아상我想은 저절로 소멸되어 버린다. 그 아상이 없는데 무엇이 나고 무엇이 죽겠는가. 하지만 사실은 그 아상이 소멸되어 버린다는 그놈이 바로 이 아상이다. 그놈을 빼놓고 또 무엇이 있겠는가. 하지만, 그 아상이 바로 깨달음이다. 그 생사가 곧 열반이요, 영생永生이다. 이것을 떠나 따로 부처는 없다. 그러니, 다시 무슨 도를 닦고 말고 하겠는가.

불법佛法은 비단 석가모니의 것도 아니요, 무슨무슨 종단 종정의 것도 아니요, 승려들의 것도 아니요, 신도들의 것도 아니다. 그것은 그야말로 일체 중생들의 것이다. 그러므로 불법에 죄를 지으면 일체 중생들에게 죄를 짓는 결과가 된다. 이제는 이미 석가모니의 제78대이니, 제79대이니 하는 게 도리어 무의미해진 지 오래다. 다시 그 ‘경허’가 동해의 태양처럼 걸출하게 솟아 나와야 한다.



강인봉∙1949년 전북 김제 출생. 1970년 원광대 국문과 재학시절 불교에 입문, 그해 첫시집 <수덕사의 쇠북소리>를 발간하였고, 견성見性을 하였으며, 1984년에는 혜암 선사로부터 전법게傳法偈를 이어 받았음. 1979년 ≪한국문학≫ 1백만원 고료 신인상 당선. 1989년 ≪문학정신≫ 제1회 1천만원 고료 소설문학상 수상. 장편소설 <구나의 먼 바다(전3권)>, <다시 에덴에서>, <불의 침묵>. 시집 <첫사랑>, <간월도>. 산문집 <풀>, <누가 부처를 보았다 하는가>. 혜암 선사의 법어를 편역한 법어집 <늙은 원숭이> 등을 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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