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작품(전체)
30호 젊은시인 집중조명/정서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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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밀」 외 9편
정서영
비밀 외 9편
철렁!
철쭉꽃잎이 떨어진다
어제처럼 왔다가
철렁!
철렁!
오늘의 식탁 위로 떨어지는 붉은 꽃잎들
꽃밥을 먹는다
꽃반찬을 먹는다
내 몸 점점
철쭉나무 되어간다
꽃잎도 쌓이면 무겁다
문학역에서
인천과 정동진 사이에 문학역이 있다
문학의 대합실로 들어가면
미카 31호* 기차를 탈수 있다.
그날, 비 오는 간이역은
조용했고 우리는 기차 안에 있었다
나는 문학에 대하여 아는 것이 없었다
그녀가 문학과 문학의 아류에 대하여
물음표를 달 때
나는 유리창을 흘러내리는 비의 저 편
문학의 안개 속으로 걸어 나가고 있었다.
젖은 오동꽃 아래를 지나 자갈 위를 지나 천천히
문학역을 빠져나가는 건널목 앞에 우두커니 있었다.
비는 빠르게 내 앞을 뛰어가고
신호등은 붉은 눈을 부릅뜨고 있었다
나는 그 건널목을 건너지 않았다
미카 31호는 아직 문학역에 정차 중이었다
*미카 31호: 인천 문학에 있는 기차 까페, 인천. 문학. 정동진 순으로 역 이름이 붙어 있음.
꿈꾸는 해바라기
해바라기 씨 한 봉지를 샀다
해바라기 씨를 먹었더니
내 몸에 해바라기 싹이 돋더니
내 키보다 더 큰 해바라기 자라더니
급기야 나는 해바라기가 되어
몽골의 어느 고원에 있었다
건조한 바람 속에 낮은 풀들 경련처럼 비틀리는
까마득한 벌판.
그 한 곳에 해바라기들이 모여 살고 있었다
코 흘리는 해바라기 눈곱 낀 해바라기 이 빠진 해바라기……
아, 눈부셔라
언젠가 마주친 듯한 기인 속눈썹의
저 반짝이는 눈망울들.
나는
여물지 못한 해바라기로 오랫동안 그들을 향해 있었다
안경에 관한 명상
갈색 선글라스 안경알 속에 각각
노란 우주복을 입고 산소통을 멘 사람과
그린 필드 위에 노란 깃발이 꽂혀 있는 그림이 있다
그것은 어느 책의 표지로 되어 있다
그 책 표지 위에 내 안경이 올려져 있다
나는 또 다른 안경을 끼고 안경 밖과 안경 안을 잠시 오간다
가까이에서 잘 보이지 않는 안경 밖을 보기 위해 돋보기를 끼고 있다
명료하게 나의 망막에 잡히는 문자와 그림.
‘현대ㅇㅇ’ 작품상 이모 씨가 2003년 7월 ‘용의자’라는 제목과 함께
올라있다 나는 안경 안에서 발버둥친다.
나는 우주복을 입고 산소통을 메고
겨우겨우 그린 필드 위 깃발을 향해 걸어간다
내 안경에 관한 명상은 돋보기를 벗고도 눈에 번쩍 뜨이게
용의자를 찾을 수 있는 그 시점에 다다르는 것이다
맨눈으로도 망막 속에 확연히 그물처럼 걸리는
명료한 시 한 편 건져 올리는 것이다.
내일은 없다
산 아래 꺾인 길로 들어가니 돼지우리 하나 있다
흡!
우리 바닥에 한배 깔고 누워있던
출출 허리춤 흘러내린 허연 등줄기가 고개를 불쑥 든다
지독하게 살아있는 뿌리, 그 숨 막힘의 울타리 옆에
쪼그려 앉은 애기똥풀 눈이 노랗다
휑 뚫린 칸막이 방마다
밥통 속에 머리 쳐 박고 있는
제 오물 위에서 질퍽이고 있는
입들, 끊임없이 저항처럼 꾸덜거린다
또 다른 세상 속으로
우리의 그늘을 서럽게 밟아가야 할 저들
하루의 밥그릇이 너무 깊다
꺾인 길로 들어설 때 이미 어두워진
오늘,
산을 넘어 온 봄바람이 때죽나무 흰 꽃잎보다
무겁게 우리 속을 돌아나간다.
축축한 눈빛들이 자꾸 나를 따라온다
몽블랑 빵집 앞에서 아직
날 땅콩 하나를 깨물며
돌멩이를 쳐다보며 수첩을 쳐다보며
손수건을 쳐다보며 휴대폰을 쳐다보며
거울을 쳐다보다가, 나는 안경을 닦는다.
나팔꽃이 지나가고, 맨드라미 거기 서 있고
호박꽃이 지나가고, 맨드라미 거기 서 있고
대추가 지나가고, 맨드라미 거기 서 있고
감이 지나가고, 맨드라미 거기 서 있었는데
立冬 지난 어느 날
그가 보이지 않았다
생각을 뛰쳐나온 이름 하나
날렵하게 모퉁이를 돌아서고 있을 때
나는 가랑잎이었고 전봇대였고
말라가는 웅덩이였고
미루나무 가지에 걸린 연이었고
삐뚜름한 달이었다
아직, 몽블랑 빵집 앞에서 그렇게 30년
안개 속에는 그림자도 보이지 않는다.
두 여자
커피 잔 두 개를 샀다
커피 잔에는
액자 안 망토 입고 모자 쓴
여인의 상반신이 그려져 있다
잔 하나에는 붉은 망토 붉은 모자.
또 다른 하나는 녹색 망토 녹색 모자.
피카소 그림을 닮았다
지금 나는 코스모스 꽃무늬 잠옷을 입고
커피를 마시며 붉은 망토의 여인과
마주하고 있다
붉은 망토 여인의 몸을 만져본다
뜨겁다
그 여인의 뜨거운 몸이
다 식을 때까지
나는 그저 커피를 마신다
안부
묵직한 배 한 덩이를 손에 든다
가슴이 손바닥 안 깊게
가라앉는 배의 중심 쪽으로 기운다
평생 비탈을 등지고 살아온 날들.
꽃잎이 질 때마다
머리 위에 배꽃 같은 서리가 내렸고
펄럭이는 세상 밖에서 햇빛을 모으며
두엄처럼 늙어온 당신.
당신의 고집만큼 안으로 꽉 채워진
배가 무사히 잘 정박해 있습니다
배를 깎는다
젖은 날들이 길게 잘린다
굽이굽이 칼이 지나간 흔적 따라
그가 지켜온 축축한 길 하나 보인다
거기, 배꽃 환한 나무 한 그루 걸어가고 있다
벽난로 앞에서
쪼개진 몸들이 타고 있다
화석처럼 단단한
껍질부터 벗는다
둥근 몸속에 감추었던
모서리들이 무너지기 시작한다
탁탁, 목쉰 소리로
타오른다. 운다
불속에도 길이 있다
어둠으로 어둠으로 날아오르면
길의 끝이다
재로 되는 순간 꽃이 되는 그것
뜨겁고 환한 생애를 접으며
하얗게 피는 꽃
비로소 참나무의 길이 열린다
그들, 수화처럼
명마가든 뒷마당에 먼지 낀 가로등 하나 기우뚱 서 있는데
아카시아나무 그림자 설렁설렁 지나가고 있는데
담장 위에 호박넝쿨 납작 엎드려 있는데
핼쓱한 달 물끄러미 내려다보고 있는데
자동차 한 대 곁눈질하며 뒷걸음질 치더니
마당 귀퉁이에 슬그머니 자리 잡는다
여자, 이따금 차 창가에 팔을 기댔다 내렸다
남자, 머리 뒤로 팔 깍지를 끼었다 풀었다
여자, 가로등을 바라보기도 하고
남자, 나무그림자 쪽을 내려다보기도 하고
여자, 고개를 기웃거리며 손가락으로 달을 가리키는 듯
남자, 하늘을 올려다보는 듯
그들,
얼굴을 마주 보았다가
서로 손을 내젖다가
아주 오랫동안 앞만 보고 있다가
그대로 떠나갔다.
나는 그날 밤,
명마가든에 그들이 풀어놓은 말의 흔적을
전혀 알지 못한다. 다만 아름답게 그림을 그리고 있다.
시인의 말
전자파 차단에 선인장이 좋다하여 조막만한 선인장 화분 하나를 사다가 모니터 위에 올려놓았다 그런데 이 선인장이란 놈은 몇 달이 지나도록 살아있는 것인지 죽은 것인지 생장의 모습을 그리 쉽게 보여주지 않았다 그래도 가끔씩 물을 주며 제 몸에 바늘을 키우면서 묵묵히 지탱하는 선인장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사막의 고요함과 모래바람과 사진에서 본 기하학적 구릉의 모습을 연상하곤 했다 나는 이 선인장에게 햇빛을 좀 쐬게 해야겠다싶어 모니터 위에서 창가 창틀 위로 이사를 시켰다. 그렇게 한동안 방치한 채 의식 없이 지나갔다 그런데 어느 날 보니 이놈의 몸이 창 쪽으로 비스듬히 구부러져 있지 않은가. 자신이 찾아가고 싶은 근원지 쪽으로 고개를 돌리려는 무의식의 세계. 나의 시 쓰기는 죽은 듯 지탱하던 무표정에서 살아있음을 확인하기 위해 창가로 몸을 구부리려는 선인장의 몸짓과도 같은 것이었다.
보르헤스는 인간과 우주 앞에서 느낀 당혹감이 그로 하여금 글을 쓰게 했다고 말하고 있다 그는 시를 ‘마신다’고 표현하고 시의 실체는 열정과 즐거움이며 그런 감정이 살아날 때 삶이란 시로 만들어져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고 말하고 있다. 살아있는 식물이 빛 쪽으로 가려는 습성의 굴광성屈光性처럼 침체된 자아를 일으켜 세우고 열정과 즐거움으로 살아가기 위해 찾아 나선 빛과 같은 것. 그 빛에 닿기까지 生은 얼마나 많은 어둠을 지나가야 하는지를 통찰해 보려는 몸부림. 그것이 내 시 쓰기의 원천인 것이다.
그러나 시를 ‘마시는’ 열정과 즐거움으로, 삶이 시로 만들어졌다는 것을 진정으로 알기까지 나는 아직 멀고먼 길을 더 걸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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