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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호 정서영 작품 해설/장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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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부
댓글 0건 조회 2,183회 작성일 09-01-19 12:52

본문

|해설|
심미적 시선이 머무는 자리
―정서영 시의 클리셰와 그 극복에 관하여
  장이지|시인




1. 머리말
정서영의 시를 읽어보면 그녀의 성실성이 자연 느껴진다. 일단 언어적인 면에서 그녀의 시는 개성이 분명하고 섬세하다. 어휘 면에서 정서영은 순우리말을 찾아 쓰려는 의도적인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데, 이러한 미덕은 요즘 시인들에게서 좀처럼 찾아보기 힘든 것이다. ‘애기똥풀’이라든지 ‘때죽나무’와 같은 식물들의 이름을 고르는 신중함은 교과서적인 데가 있다. 문장의 활용 면에서도 천편일률적인 ‘-이다’ ‘-있다’類를 벗어나 제법 다채로운 문장을 구사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중간 중간 명사로 끝을 맺는 구절을 넣는 등 문장의 활용을 통해 자유율의 리듬을 만들어내는 품이 예사롭지 않다. 비슷한 구문을 반복해서 쓰는 등의 시도도 스타일리스트의 면모를 연상케 한다. ‘명마가든’, ‘몽블랑빵집’ 등 고유명사의 적절한 활용은 무척 정감 있는 뉘앙스를 풍긴다.
정서영의 시를 논하는 데 있어 이렇게 세공적인 문제를 먼저 거론하는 것은 그녀의 성실성에 대한 상찬의 의미와 더불어 그녀가 아직 신인임을 강조하기 위한 내 나름대로의 안배임을 말하고 싶다. 정서영은 특이하게도 아마추어리즘을 아직 간직하고 있고, 미완의 상태에서 정진을 거듭하고 있다. 그녀는 예술지상주의적인 전통의 영역에 거주하고 있으며, 자기 자신에 대한 관념을 미적으로 형상화하기를 즐기는 ‘나르시시즘적 명상’에 쉽게 빠져드는 경향이 있다. 그녀의 명상적 시선이 머무는 자리야말로 그녀의 시가 지닌 개성을 보여주는데, 이 글을 통해 그 점에 대해 몇 마디 해보려고 한다.

2. 예술지상주의, 완미한 것에 대한 不安
정서영의 시에는 식물 이미지들이 많이 나온다. 그것은 전통적인 서정시의 ‘클리셰’로도 여겨지는 면이 있다. 그러나 그녀는 식물을 단순히 완상한다거나 식물에 감정을 이입하는 것이 아니라 ‘식물이 되어감’에 대해 이야기한다는 특징이 있다. 철쭉꽃잎이 식탁 위로 떨어져 ‘꽃밥’에 ‘꽃반찬’을 먹고 몸이 ‘철쭉나무’가 되어간다거나(「비밀」) ‘해바라기 씨’를 먹고 해바라기가 되어 몽골의 어느 고원에 서 있게 된 사연(「꿈꾸는 해바라기」) 등이 그 단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복용과 변신의 메커니즘도 중요하지만 여기서 방점을 찍어야 할 것은 ‘무엇이 되었느냐’의 문제이다. 물론 정서영의 시적 자아들은 ‘꽃’이 된다. 그렇다면 ‘꽃’이란 무엇인가. 
정서영이 이 꽃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너무나 뚜렷하게 의식하고 있기 때문에 클리셰에 대한 불안이 제기되는 것이다. 「비밀」의 경우는 어떠할까. ‘꽃밥’을 먹고 ‘철쭉나무’가 되어간 이야기에 정서영은 ‘비밀’이라는 제목을 달아놓고 있다. 이 시는 “꽃잎도 쌓이면 무겁다.”라는 구절로 끝난다. 비밀은 무거운 것이다. 자신이 꽃이 되는 ‘사건’이 왜 비밀이 되어야 하는 것일까. 꽃이 되는 것은 아름다워지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스스로 발설하면 자만이 되고 감추면 감출수록 더 드러나는 것이다. 비밀이 많아지면 마음이 무거워지고 그것을 ‘시’로 풀어놓지 않고는 못 배기게 되어 있다. ‘꽃’이란 결국 ‘시(예술)’였던 셈이다. ‘꽃’이 떨어지는 사건에 대해, 다시 말해 미적인 것에 대해 “철렁!” 하고 감응을 하는 것 자체가 이미 ‘詩的’이다.
「비밀」이 순전히 미적인 것에 대한 경이를 보여주었다면, 그래서 ‘순금부’의 시적 모멘트를 담아냈다면, 「꿈꾸는 해바라기」는 이 ‘순금부’에 불순물이 개입해 있는 형국이다. ‘경이’에서 멈추는 것이 아니라 ‘욕망’이 끼어들어 있는 것이다.

해바라기 씨 한 봉지를 샀다

해바라기 씨를 먹었더니
내 몸에 해바라기 싹이 돋더니
내 키보다 더 큰 해바라기 자라더니
급기야 나는 해바라기가 되어
몽골의 어느 고원에 있었다
건조한 바람 속에 낮은 풀들 경련처럼 비틀리는
까마득한 벌판
그 한 곳에 해바라기들이 모여 살고 있었다
코 흘리는 해바라기 눈곱 낀 해바라기 이 빠진 해바라기…….

아, 눈부셔라
언젠가 마주친 듯한 기인 속눈썹의
저 반짝이는 눈망울들

나는
여물지 못한 해바라기로 오랫동안 그들을 향해 있었다
―「꿈꾸는 해바라기」 전문

해바라기 씨를 먹고 해바라기가 되었다는 이 시의 도입부는 「비밀」의 반복에 지나지 않는다. 해바라기는 ‘미적인 것’을 표상한다. 그렇다면 시적 자아는 이 미적인 것을 ‘경이’로 보여주기만 하면 될 것이다. 그것이 「비밀」의 구조임은 앞에서 이미 살펴보았다. 「꿈꾸는 해바라기」의 시적 자아는 제2연에서 그 ‘경이’를 보여준다. 그 “반짝이는” 풍경을 “언젠가 마주친 듯한” 기시감으로 제시하고 있는 것은 이와 같은 찬탄이 하나의 클리셰가 되고 있음을 시인 자신도 무의식중에 알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심을 품게 한다.
아무튼 제2연의 ‘경이’는 우리가 미적인 것을 대면했을 때 보이는 익숙한 반응이라고 할 것이다. 그러나 제2연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제1연의 마지막 행이 중요하다. 해바라기의 군락이 “반짝이는” 황홀경에 다름 아니었다면 제1연의 마지막 행은 이 시에서 불필요한 부분이다. ‘경이’는 그렇게 쉽게 세부적인 묘사로 들어갈 수 없는 것이다. ‘경이’는 순간적인 놀람이기 때문에 세부를 들여다볼 여지가 없다. 게다가 정서영이 세부적으로 묘사한 해바라기의 형상은 미적인 것이라기보다는 훼손되어 있고 뭔가 결락되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 코를 흘리고 있는 해바라기나 눈곱 낀 해바라기, 이 빠진 해바라기 같은 것은 “반짝이는 눈망울”이라는 찬연한 아름다움과 배치되는 이미지이다. 따라서 제1연의 마지막 행은 蛇足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왜 정서영은 ‘경이’의 순간에 이런 蛇足을 달아놓은 것일까. 그것은 제3연의 메시지와 관련지어 보지 않고는 쉽게 답할 수 없는 물음이다. 「비밀」의 시적 자아가 자신이 ‘철쭉나무’가 되는 상상력에 의해 한껏 미적인 감정으로 충일해 있었던 데 대해, 「꿈꾸는 해바라기」의 시적 자아는 해바라기가 되고도 충일한 미적 상태가 되지 못했다. 제3연은 ‘시적 자아-해바라기’가 찬탄을 자아내는 해바라기의 군락으로부터 외따로 떨어진 곳에 서서, 해바라기 군락을 바라보고 있는 형상을 담고 있다. 이 ‘향해 있음’에서는 소외감과 질시를, 더 충일한 아름다움의 상태로 ‘되어가고자 하는’ 욕망을 읽을 수 있다. 제1연의 마지막 행에 나온 손상되고 더럽혀진 해바라기의 형상은 이 소외감과 질시가 빚어낸 환영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정서영의 ‘미=예술’에 대한 욕망은 존 키이츠(John Keats)나 찰스 램(Charles Lamb)類의 예술지상주의 전통을 그대로 이어받고 있다. 「두 여자」는 찰스 램의 「올드 차이나(Old China)」처럼 커피 잔과, 커피 잔에 그려진 그림 이야기를 통해 미적인 것의 경험에로 나아가고 있다. 그러나 저 유명한 「그리스 항아리에 부치는 노래」나 「올드 차이나」에 나타난 상상력이 정서영의 「두 여자」에서는 폭발적인 감동으로 이어지지 않고 있다. 이 경우 상상력이란 항아리라든지 올드 차이나에 그려진 그림만의 묘사가 아니라 그림이 감추고 있는 ‘이야기’의 디테일을 얼마나 그럴 듯하게 살리느냐의 문제일 것이다. 
「두 여자」는 “커피 잔 두 개를 샀다”라고 시작하고 있지만 기실 ‘커피 잔’을 하나만 샀다고 하더라도 시적 상황에 변화가 있을 것 같지 않다. 어차피 시인은 하나의 ‘커피 잔’에 대해서만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커피 잔에 그려진 그림이 ‘피카소 그림’을 닮았다는 데서 이미 시는 성립하고 있다. 그림 속 ‘붉은 모자의 여인’과 시적 자아의 대비가 바로 이 시의 ‘상황’이다. 시적 자아는 ‘붉은 모자의 여인’을 바라본다. 이 바라봄은 예술에 대한 응시여서 찬탄과 질시가 뒤엉켜 있다. 커피를 담은 커피 잔이 뜨거워지자 마치 ‘붉은 모자의 여인’이 생명을 얻은 것처럼 뜨거워진다. 이 뜨거운 감촉을 시적 자아는 천천히 음미한다. 이 뜨거움은 곧바로 시(예술)에 대한 열정으로 치환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예술지상주의의 주제는 어딘지 불안함을 준다. 그녀가 음미하고 있는 것은 피카소도 아니고 피카소를 닮은 복제품의 세계라는 점에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커피 잔을 하나만 산 게 아니라 똑같은 디자인에 색깔만 다른 두 개를 샀다는 설정은 시인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그녀의 자기 예술에 대한 불안, 내가 쓴 것이 詩인가에 대한 원초적인 불안을 환기시킨다.
이러한 불안감은 「꿈꾸는 해바라기」 마지막 연의 소외감에 이어져 있으며 다시 「안경에 관한 명상」으로 뻗어 있다는 점에서 정서영 시를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요소라고 할 수 있다. 

갈색 선글라스 안경알 속에 각각
노란 우주복을 입고 산소통을 멘 사람과
그린 필드 위에 노란 깃발이 꽂혀 있는 그림이 있다
그것은 어느 책의 표지로 되어 있다
그 책 표지 위에 내 안경이 올려져 있다
나는 또 다른 안경을 끼고 안경 밖과 안경 안을 잠시 오간다
가까이에서 잘 보이지 않는 안경 밖을 보기 위해 돋보기를 끼고 있다
명료하게 나의 망막에 잡히는 문자와 그림
‘현대○○’ 작품상 이모 씨가 2003년 7월 ‘용의자’라는 제목과 함께
올라 있다 나는 안경 안에서 발버둥친다
나는 우주복을 입고 산소통을 메고
겨우겨우 그린 필드 위 깃발을 향해 걸어간다

내 안경에 관한 명상은 돋보기를 벗고도 눈에 번쩍 뜨이게
용의자를 찾을 수 있는 그 시점에 다다르는 것이다
맨눈으로도 망막 속에 확연히 그물처럼 걸리는
명료한 시 한 편 건져 올리는 것이다
―「안경에 관한 명상」 전문

이 시는 평범한 진술형의 시이지만 그 평범함으로 인해 오히려 진솔한 느낌을 준다. 시가 품고 있는 뜻 역시 더욱 완미한 예술적 형식을 향한 지향이라는 도덕적 내용이다. 시인들은 누구나 다른 사람이 쓴 좋은 시를 보면 부러워하게 되고 그보다 좋은 시를 쓰고 싶어 한다. 누구나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지만 그 점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싫어한다. 잘못 하면 질투로 비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정서영이 이런 내용의 시를 쓸 수 있었던 것은 앞서 지적한 것처럼 그녀가 아직 아마추어리즘을 간직하고 있고 미완의 상태에서 정진을 계속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이것이 특유의 성실함으로 이어지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한다. 
정서영에게 시(예술)는 일상성의 세계에서 벗어나 ‘진공의 상태’에서 만들어지는 형식이다. 아무도 가보지 않은 이 우주 공간에 ‘깃발’을 꽂을 수 있는 것은 어느 문학상으로 표상되는 ‘진짜’ 시(예술)밖에는 없을 것이다. 그녀가 서 있는 현주소는 ‘우주복’을 입기는 했지만 아직 ‘깃발’을 향해 걸어가고 있는 상태이다. 이 예술지상주의적 공간인 천체를 정서영은 ‘이중의 안경’ 너머로 보고 있다. 이 ‘이중의 도수’로 인하여 우주복을 입은 우주인은 ‘이중의 진공’에서 더욱 허우적거릴 수밖에 없는 것인지도 모른다. ‘진짜’ 시(예술)에 이르기 위해서는 이 ‘이중의 도수’를 걷어내고 ‘신비한 투시력’을 회복해야만 한다. 대상을 굴절시키는 안경이 아니라 어떤 관찰도 대상의 본질을 피해가지 않는 ‘직관’이 요청되는 것이다.
‘우주복’과 ‘산소통’과 ‘깃발’의 메타포는 ‘문학상’이라는 범속한 욕망을 중개하기에는 참으로 완미한 표현이 아닌가 싶다. 그 ‘진공’의 세계가 과연 문학이 놓여야 할 자리인지에 대한 더욱 중대한 물음은 꺼내지 않더라도 이 산소가 부족한 천체에 가닿기 위한 것만으로도 길이 험하다는 사실을 굳이 숨길 필요는 없을 것이다. 이 시에 사용된 갈색의, 혹은 노란색의 색채 이미지가 화려한 감각의 세계에 대한, 혹은 더욱 완미한 예술에 대한 불안을 더욱 부각시키는 면이 있는데, 이 화려한 색감은 어떤 메시지보다는 장식적인 기능에 봉사하고 있는 것이다.

3. ‘빈자리’에 대한 명상
문학이 점점 ‘실추’되고 있는 시기에 정서영의 시를 읽고 있자니 감회가 남다르다. 왜냐하면 그녀는 아직도 문학의 威儀를 믿고 시(예술) 그 자체에 일생을 걸고 있는 ‘최종적으로’ 진지한 독자이기 때문이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그녀가 좀 더 생각해 보아야 할지도 모른다. 그녀의 예술지상주의가 지향하는 문학은 지나치게 일반화된 ‘문학이라는 관념’에 함몰되어 있는 느낌이 있다. 메타시(예술)적인 시들이 특히 그렇다. 문학을 둘러싼 현실 정세의 현격한 변화에도 불구하고 문학의 존재 양태라든지 문학의 기능에 대해 고민하지 않고 기존의 관념에만 몰두하고 있는 것은 자칫 문학의 枯死를 부채질할 수도 있는 태도라고 생각한다. 지금의 그녀는 이 ‘문학이라는 관념’을 해바라기의 군락(「꿈꾸는 해바라기」)으로 보거나 진공의 우주에 꽂힌 ‘깃발’(「안경에 관한 명상」)로 보면서 한 없이 가서 닿으려는 도약을 멈추지 않고 있다. 그러나 막상 그 황홀경에 도달하고 나서 우리의 인생은 어떻게 변할 것인가. 
정서영은 이 문제에 대해 「문학역에서」와 같은 시에서 답변할 기회가 있었는데 아쉽게도 실기하고 말았다. 이런 고언을 하는 것은 이 시가 매우 아름답기 때문이다.

인천과 정동진 사이에 문학역이 있다
문학의 대합실로 들어가면
미카 31호 기차를 탈 수 있다
그날, 비 오는 간이역은
조용했고 우리는 기차 안에 있었다

나는 문학에 대하여 아는 것이 없었다
그녀가 문학과 문학의 아류에 대하여 
물음표를 달 때

나는 유리창을 흘러내리는 비의 저 편
문학의 안개 속으로 걸어 나가고 있었다
젖은 오동꽃 아래를 지나 자갈 위를 지나 천천히
문학역을 빠져나가는 건널목 앞에 우두커니 있었다
비는 빠르게 내 앞을 뛰어가고
신호등은 붉은 눈을 부릅뜨고 있었다
나는 그 건널목을 건너지 않았다

미카 31호는 아직 문학역에 정차 중이었다
―「문학역에서」 전문

‘문학역’은 기차역 이름이지만 ‘문학(예술)’에 대한 알레고리이기도 하다. 그것은 ‘미카 31호’로 명명된 기차 카페의 어딘가에 붙어 있는 간판에 적혀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미카 31호’라는 고유명사가 ‘문학’이라는 알레고리와 결부되는 방식에는 자의성이 介在되어 있다. 정서영은 이렇듯 문학의 기표에서 기의를 탈색시키는 경향이 있다. ‘미카 31호’라는 기표에는 메시지는 없고 ‘취향’만이 부각되어 있다(이런 경향 자체가 잘못된 것은 아니다). 그것은 현실과는 섞일 수 없는 가상으로서의 예술에 대한 취향이다. ‘문학역’이 인천과 정동진 사이에 존재한다는 이상한 지리학의 의미는 예술지상주의적 가상의 공간으로 수렴된다. 그녀가 지향하는 시(예술) 역시 바로 그러한 취향으로 설명될 수 있을 것이다.
시적 자아와 ‘그녀’는 카페 ‘미카 31호’에 앉아 차를 마시며 문학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말하는 것은 주로 ‘그녀’이고 시적 자아는 창밖을 보며 딴전을 피우고 있다. 제2연의 “나는 문학에 대하여 아는 것이 없었다”라는 언설은 일종의 역설처럼 들린다. 이 언설에는 문학의 호오를 가리고, 문학적인 것과 그 아류를 구분하는 행위에 대한 반감이 들어 있다. 그것은 문학의 바깥에 있는 사람이 문학에 대해 말하는 것에 대한 반감일 수도 있고, 至高의 미에 대해 함부로 말하는 것 자체에 대한 거부일 수도 있다. 정서영에게 문학은 논리적인 언설로 말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경이’로서만 그 모습을 드러내는 것인지도 모른다. 아닌 게 아니라 제3연에서 정서영은 시적 자아가 ‘문학’의 영지를 산책하며 머무는 모습을 신비로운 판타지로 보여준다. ‘젖은 오동꽃’이나 ‘자갈길’이 詩趣를 자아낸다. 시적 자아는 이와 같은 시적 경험을 통해 일행인 ‘그녀’의 문학론에 대해 우위를 확인한다. 시적 자아는 ‘건널목’을 건너지 않는 행위를 통해 완고하게 문학의 영지를 지킨다. 
정서영은 ‘대화’를 지우고 아무도 없는 ‘진공’의 공간, 클리셰적인 詩趣로 물든 공간에 눈길을 준다. 그 시선은 매우 명상적이지만 한편으로 그것은 ‘들림’의 상태이기도 한 것이어서 대상으로부터 의미를 환기시키기보다는 현실과는 거리를 둔 몽환적 기분만을 유도해낸다. 이러한 시선은 「몽블랑 빵집 앞에서 아직」에서도 반복적으로 나타나는데 그 의미는 다소 다르다. 

날 땅콩 하나를 깨물며
돌멩이를 쳐다보며 수첩을 쳐다보며
손수건을 쳐다보며 휴대폰을 쳐다보며
거울을 쳐다보다가, 나는 안경을 닦는다

나팔꽃이 지나가고, 맨드라미 거기 서 있고
호박꽃이 지나가고, 맨드라미 거기 서 있고
대추가 지나가고, 맨드라미 거기 서 있고
감이 지나가고, 맨드라미 거기 서 있었는데

立冬 지난 어느 날
그가 보이지 않았다

생각을 뛰쳐나온 이름 하나
날렵하게 모퉁이를 돌아서고 있을 때
나는 가랑잎이었고 전봇대였고
말라가는 웅덩이였고
미루나무 가지에 걸린 연이었고
삐뚜름한 달이었다

아직, 몽블랑 빵집 앞에서 그렇게 30년
안개 속에는 그림자도 보이지 않는다.
―「몽블랑 빵집 앞에서 아직」 전문

이 시는 「문학역에서」와 같은 정서영의 메타시들이 내포하고 있는 문학에 대한 管見에서 훌쩍 벗어나 있다. 문학론(메타시)에서라면 ‘모랄’을 따질 수 있지만 지극히 사적인 경험의 영역에 대해서는 ‘모랄’이 논외가 될 수도 있다는 점에서 그렇다는 말이다. 시적 자아가 응시하고 있는 ‘不在’가 문학에 대한 일반 관념으로부터 훌쩍 벗어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이 시는 ‘연인의 부재와 기다림의 지속’이라는 클리셰만을 반복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이 시의 개성은 ‘나’의 형상-변환(shape shifting)에서 찾을 수 있다. 그것은 제4연에서 나타난다. 제1연의 기다림과 제2연의 계절의 변전, 제3연의 不在에 대한 재확인에 이어 제4연에서는 시적 자아 ‘나’의 전존재가 요동치는 사건이 그려지고 있다. 不在하는 사람의 이름을 새삼 떠올렸을 때 시적 자아의 존재는 걷잡을 수 없는 존재의 흔들림을 경험한다. ‘나’의 정체성은 ‘가랑잎’으로 ‘전봇대’로 ‘말라가는 웅덩이’로 ‘미루나무 가지에 걸린 연’으로 ‘삐뚜름한 달’로 연속적으로 미끄러진다. 이와 같은 존재의 흔들림은 눈 줄 곳 없는 불안한 자의 시선의 이동과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정서영은 착 가라앉은 분위기에서 한없이 ‘빈자리’를 응시한다. ‘몽블랑 빵집’이라는 정감어린 고유명사가 그 ‘빈자리’를 더욱 쓸쓸하게 보이도록 하는 것은 물론이다. 그러면서도 만지면 閃電처럼 튕겨져 나갈 것 같은 그리워하는 자의 섬세한 감응력이 ‘형상-변환’의 수법으로 적확하게 그려져 있는 것이다.
「그들, 수화처럼」에서도 정서영은 不在를 응시한다. 「그들, 수화처럼」은 ‘명마가든 뒷마당’에 잠시 머문 자동차 드라이브를 나온 연인들의 형상을 ‘말의 흔적’조차 모른 채 ‘아름답게 그리고’ 있는 시이다. 정서영은 이런 식으로 ‘不在’를 ‘아름다움’으로 직접 호명한다. 정서영의 심미적 시선이 이 ‘不在’에서 문학에 대한 일반 관념을 추출할 때 클리셰에 귀착하는 한편, ‘不在’를 사적인 정서의 감응력을 통해 풍경으로 부각시킬 때 예술지상주의의 한 가작을 남기고 있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다른 한편으로 ‘不在’를 ‘아름다움’으로 직접 호명하는 방식이 지닌 깊이 없는 풍경의 깔끔함이랄까 말쑥함 역시 기억할 만하다고 하겠다. 그러나 이 ‘깊이 없는 풍경’이 「내일은 없다」의 “우리의 그늘을 서럽게 밟아가야 할 저들/하루의 밥그릇이 너무 깊다”와 같은 구절의 측은지심만 못하다는 점 역시 부기해 두고 싶다. 

4. 소멸에서 피는 꽃
정서영의 시를 읽으면서 가장 재미있게 본 것은 그녀의 고집스러운 예술지상주의적 태도와 빈자리를 바라보는 명상적인 시선이었다. 아마도 그것이 그녀 시의 저류를 형성하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녀의 예술지상주의적 태도는 문학에 대한 일반 관념에 지나치게 고착되어 있다는 느낌을 받았는데 그로 인해 그녀의 시들은 자주 문학적인 클리셰의 함정에 빠졌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그녀의 클리셰들은 역설적으로 그녀의 성실성을 나타내는 징표로도 여겨지는 면이 있다. 그것은 오랜 습작의 흔적이기도 한 것이다. 그녀가 맹목적으로 최고 경지의 문학에 대한 소망만 드러내지 않았다면, 그녀가 삶을 투과하면서 미적 체험에 이르렀다면 아마도 더 아름다운 진경의 시를 보여줄 수도 있었을 것이다. 문학에 대한 일념이 그녀의 시를 클리셰의 함정으로 몰아갔지만, 그것만이 그녀 시의 전부는 아닐 것이다. 게다가 그녀는 아직 신인이다.
나는 정서영의 가능성을 「안부」와 「벽난로 앞에서」에서 찾고 싶다. 재로 되는 순간 꽃이 되는 참나무의 소신공양에서 ‘참나무의 길’을 보아내는 「벽난로 앞에서」의 경우 여전히 클리셰적인 완결성에 대한 고집이 느껴지지만 이 시는 클리셰인대로 아름다움에 대한 깨달음이 핍진하게 그려져 있다. 그리고 「안부」에서 비로소 정서영은 체험을 아름다움 위에 올려놓는 방법을 터득하게 된 것 같다.

묵직한 배 한 덩이를 손에 든다
가슴이 손바닥 안 깊게
가라앉는 배의 중심 쪽으로 기운다

평생 비탈을 등지고 살아온 날들
꽃잎이 질 때마다 
머리 위에 배꽃 같은 서리가 내렸고
펄럭이는 세상 밖에서 햇빛을 모으며 
두엄처럼 늙어온 당신

당신의 고집만큼 안으로 꽉 채워진
배가 무사히 잘 정박해 있습니다

배를 깎는다
젖은 날들이 길게 잘린다
굽이굽이 칼이 지나간 흔적 따라
그가 지켜온 축축한 길 하나 보인다

거기, 배꽃 환환 나무 한 그루 걸어가고 있다
―「안부」 전문

「안부」가 다른 시들보다 진실성이 있어 보이는 것은 다른 시들이 미적인 것을 시적 자아 자신에게 투사하고 있는 데 반해, 이 시가 미적인 것을 시적 자아의 육친에게 부과하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나르시시즘적 명상이 진공 상태의 관념으로 한없이 침잠하는 것에 비해, 이 시에서 아름다움은 육친의 두엄 냄새 나는 실체적 삶을 꾸미는 데 바쳐지고 있다는 점도 지적할 만하다. 가늘게 잘린 ‘배’의 촉촉한 단면에서 육친이 지켜온 신념의 길을 보아내고, 육친의 신념에 알리바이를 제공하는 독창적인 詩境은 정서영이 다른 시들에서 보여준 예술지상주의적 시들이 이룩한 문학관의 높이를 뛰어넘고도 남음이 있다. 「안부」에서 정서영이 보아낸 그 ‘축축한 길’ 하나가 앞으로도 그녀 시의 활로가 되어 그녀가 배꽃 환한 한 그루 나무로 그 길을 걷게 되기를 진심으로 빈다.


장이지
2000년 ≪현대문학≫ 신인추천으로 등단. 시집으로 안국동울음상점이 있음.
추천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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