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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호 신작시/김혜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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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영
별자리 외 1편
아버지의 이름은 언제나 A였다고 기억해요
아빠의 팔베개를 베고
애국가를 불렀지요.
애국가가 끝날 무렵
여름밤 평상에 누워 바라본 별들은
크리스탈 모빌처럼 흩어졌다 모여들었죠
별자리에 아빠 이름과 내 이름이 있다는
소문만 들었어요
아버지의 이름이 X라는 비평을 읽었어요
아버지는 얼룩이며 보이지 않는 시선
잠재적인 목소리이며 때로는 외로운 담배냄새
낚싯줄에 걸린 물고기이며 다락방에 앉은 바둑판이며
침대에서 엄마의 잠옷 밑으로 손을 넣는 사자이며
아버지는 그림자이며 속이 다 비치는 어항
아버지의 이름이 X라면 내 이름도 X일 테지요
무한하게 확장되는 숫자처럼 우주에 가득한 별처럼
X의 긴 행렬을 상상하다가 입술을 닫습니다.
단 하나 밖에 없는 X에게 “안녕”
아빠, 퍼즐조각이 이어진 미로에서
더 이상 출구를 찾지 마세요. 헝클어진 길이
아빠의 집이었고 신발이었잖아요
구름의 자화상
화장실을 지나 긴 복도 끝으로 걸어갔어
검정색 양복을 입은 모델 두 명이
출구로 나가는데 머리 위로 찬물이 쏟아졌어
순서를 기다리는 경쟁자를 훔쳐보는 인형들
당신의 환한 미소가 궁금했어. 현실 같았어
이력서를 넣은 서류 봉투를 들고
회사 본부의 계단을 서둘러 올라갔지
7Cm 하이힐 뒷굽이 흔들렸어
매끈한 인사담당 물고기들이 인사를 한다
유리문 너머 벌통 난로에서 풍겨나오는
24도의 공기가 싸늘한 코끝을 간지럽혔지, 에취!
문 좀 열어 주세요
초인종을 눌러 당신을 불렀지
외출 중인지 외면하는 중인지
낯선 시간의 틈새를 지나가는 구름만 스쳐갔어
허둥거리는 구름의 자화상
물렁거리는 뭉게구름, 양떼구름, 새털구름, 빙하구름 ……
모니터에 현실이 나타났어
거부할 수 없는 답신이 비수처럼 날아왔어
사이버 공간이 리얼 그 자체였어
폭포수가 머리 위로 와장창 쏟아지더군
머리끝이 빳빳하게 곤두선 생쥐
사장은 태연한 사자처럼 지나갔어
김혜영∙1997년 ≪현대시≫로 등단. 시집 '거울은 천 개의 귀를 연다'. 평론집 '메두사의 거울' 부산대 영어영문학과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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