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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호 신작시/이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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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부
댓글 0건 조회 3,017회 작성일 08-07-16 00: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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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현호
노을섬에서 온 편지 외 1편


부풀어 오르는 허기를 긁어대며 편지를 쓴다.
노을섬의 모래톱 위 낡고 오래된 여인숙에서.
창밖으론 넓은 음역으로 출렁이는 파도가 말을 건네 오지만,
오늘만큼은, 그가 전하는 말의 온기를 가슴에 채울 시간이 없다.
끄물거리는 전등 아래서 너의 주소를 더듬으며,
물끄러미 펜촉을 내려다보는데, 어느덧 발목까지 물들어 있었다.
이 편지는 내 뒷모습만을 기억한 채 바다를 건너겠지만,
모기의 침처럼 살을 뚫고 내려앉던 가렵도록 생생한 빛들
날 죽지 못하게 하고 자꾸 저녁의 모퉁이로 불러내던 색들
그 빛과 색이 봉투를 뜯는 순간 네 주위에 피어오를 것이다.
빛과 색이 얼굴을 맞대고 흔들리는 경계를 보면,
거기 얼굴을 지운 채 불멸을 꿈꾸는 내가 보일 것이다.
벌써 낮 동안 뒤죽박죽 섞인 색들이 어둠을 만들고
구름들이 안간힘으로 핏빛 날개를 부풀리기 시작한다.
어서 밖으로 나와 춤추는 수면을 가만히 지켜보라.
붉은 울음들이 몸을 푸는 시간,
노을섬에서 편지가 도착할 것이다.

 


물레방아의 힘


지상으로
다리 뻗어 발 구르는
어둠의 이마에 땀방울 맺힐 때,
깊게 가라앉은 눈빛으로 지켜보는 물레방아.
지구를 돌아온 물의 기억을 이끼로 키우고 있다.
한 번 제자리 벗어나는 일 없이, 공이도 방아확도 없이.
세상 한 곳을 오래 지켜볼 이유가 없다는 듯,
지팡이에 기대 꾸벅 조는 늙은이 같이
묵묵히 고개를 주억거린다.
어느 누구도
그 운행에 동참할 수 없다.
제 갈 길 다 제 속으로 감아올리는
물레바퀴처럼, 저마다 속으로 쌓이는 물기를
한 움큼씩 토해낼 뿐. 그 튼실한 허무의 힘만으로,
밤 내내 물레방아는 제 키만큼의 절벽 아래로 몸을 던진다.
그러나 물이 의문을 품고 흐르지 않듯, 무릎 꿇은 만큼
다시 일어서야 하는 도돌이표의 항해.
다른 물레방아를 돌고 온
물의 체온이
삐걱대는
또 다른 물레방아를 돌린다.
물은 밤새 낮은음자리표로 흐르지만,
뜬눈으로 물소리에 귀 담그고 있는 사람 있어
물길 닿는 한편엔 작은 물레방아, 와락
좁은 칸에 물 차오르는 순간
허물어진다.


이현호∙2007년 ≪현대시≫로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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