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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호 초점/임태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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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부
댓글 0건 조회 2,302회 작성일 08-07-16 00: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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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악文樂으로 소설 읽기:섹시한 독서의 권장
임태훈|소설가


1. 문악文樂으로 소설을 즐기기 
이 글의 원래 주제는 ‘일본 소설엔 있고 한국 소설엔 없는 것’이었다. 그런데 막상 쓰려고 보니까 이런 주제엔 어떤 전제가 내재되어야 함을 깨닫게 되었다. 있고/없음을 분별하는 일이란 어떤 변화가 일어나길 원하는가에 따라 달리 가늠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생각의 순서를 수정해야 했다. 이 질문부터 답해야 했던 것이다. 나는 한국의 “소설읽기” 문화에 어떤 변화가 일어나길 원하는가? 
‘문학’이란 말에 괄호를 치고 생각해보기로 했다. 여기에는 여러 가지 입장이 있을 수 있다. 문학이란 외로운 백조라는 식의 도도한 자폐가 있는가 하면, 시장과 자본의 질서를 불구대천의 괴물쯤으로 여기는 결벽증도 있다. 분단․민주주의․민족 등의 키워드와 함께 문학이 소개되고 권장되는 일이나, 들뢰즈․데리다․푸코를 들먹이는 학구적인 독법도 분분하다. 오해가 있을까봐 밝혀두는데, 문학에 대한 그런 입장들이 틀렸음을 지적하려는 게 아니다. 그런 입장들이 문학文學을 이해하는 의미 있는 지평들임을 존중한다. 하지만 새로운 변화를 감지하기 위해선 또 다른 입장이 필요하다. 
그것은 ‘문악文樂’으로 소설을 즐기는 일이다.
문악文樂이란 읽는 쾌감 그 자체이면서, 읽는 행위를 기쁘게 자기 가치화하는 역능力能을 일컫는다. 그렇지만 개별 작품으로 환원될 수 있는 개념이 아니다. 왜냐하면 텍스트를 넘나들며 지속되는 읽는 행위의 운동성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민족문학, 한국문학, 순수문학, 고급문학이라는 식의 라벨은 중요치 않다. 문악文樂이 추구하는 것은 나를 기쁘게 하는 텍스트들과의 마주침이며, 더 나아가 마주침의 빠름과 느림의 관계를 즐기는 일이다. 이를테면 이것은 글 읽기의 정동(affect)인 셈이다.
하지만 앞서 예를 든 일련의 문학적 입장들은 ‘문악’의 역능을 의식적이든 무의식이든 억압하는 데 일조해왔다. 일찍이 김현은 「무협소설은 왜 읽히는가」(1969)에서 이런 말을 했다. 

“교양소설은 한 개인의 형성을 있는 그대로 묘사함으로써 독자를 그 세계 속으로 이끌고 간다. 그렇지만 독자 자신으로는 그 세계란 무섭고 불편한 세계이다. 그 세계 속에서는 일상의 편안함마저 불편한 것으로 느껴지며, 쾌락은 증오와 혐오로 느껴진다. 그것은 마치 ‘어머니’라는 발음을 무의식적으로 해대다가 우연한 기회에 그 말에 주의를 돌리는 순간, ‘어’ ‘머’ ‘니’라는 세 음소의 결합이 매우 불편하고 우스꽝스럽게 돌변하는 것과도 같다. 
예술이란 그런 의미에서 자각이며 고문이다. 그것은 인간의 여러 가능성을 하나하나 확인해주며, 그 중의 어느 하나만을 택한 것에 대해 질타한다. 예술은 순간적인 쾌락이 아니라, 오히려 계속적인 자기 각성이다. 교양소설이 무협소설에 비해 인기가 없다는 것은 바로 이점 때문이다. 무협소설의 주인공들이 우리에게 내보여주는 것은 개인의 가능성이 아니다. 그들이 내보여주는 것은 기존 윤리의 확대이며, 성공한 인간의 확인이다.”
김현의 이십대 시절 글이지만, 교양소설과 문학주의를 강조하는 그의 입장은 이후의 비평 작업에도 그대로 이어졌다. 이 글에서 김현은 ‘무협소설’이 전형적인 설정과 줄거리를 반복한다고 지적한다. 한마디로 그 얘기가 그 얘기라는 불평이다. 그에 반해 교양소설은 훨씬 더 변칙적이며 그래서 더 창조적인 것으로 긍정되고 있다. 일련의 비교가 반복될수록 무협소설은 교양소설의 타자로 배치된다. 김현은 둘 사이에서 가능한 접변接變을 조금도 궁금해 하지 않는다. 따라서 결론은 뻔하다. 교양소설 좀 읽으라고 훈계다. 
이 글에서 가장 문악적이지 못한 순간을 꼽는다면, 무협소설과 교양소설의 읽는 시간을 아예 분리하고 있는 대목이다. 교양소설을 읽는 일은 “각성覺醒의 시간”으로 명명되지만, 반대로 무협소설의 경우는 “동면冬眠의 시간”이 된다. 각성과 동면이 양립할 수 없는 것처럼 교양소설과 무협소설에는 마주침이 있을 수 없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 사르트르는 '말Les Mots'에서 밝히기를, 자신은 비트겐슈타인의 저작물보다는 괴기소설과 만화를 더 즐겨 읽는다고 했다. 문악도 체계를 중시하는 편집증적인 소설 읽기에 국한되지 않는다. 문악은 이것저것을 마구 펼쳐보는 분열증적인 탐색이며 기본적으로 쾌감에 좌우된다. 그래서 한 사람의 독서 시간 안에 비트겐슈타인과 괴기소설, 만화와 무협소설이 한 데 공존할 수 있으며 상상적 접변이 반복된다. 그리고 이 힘은 김현의 문학주의마저 전유해낼 만한 위력을 지닌다.
김현은 ‘예술은 자각이며 고문’이라는 주장을 두 번이나 반복한다. 그런데 이런 식의 예술에 대한 관심은 어떻게 생겨나는 걸까? 우선은 교육에 의해 유도된 타성일 수 있겠지만, 문악적인 넘나듦의 변이 또한 무시할 수 없으리라. 말초적 쾌락으로 가득한 소설이라 해도 독자의 싫증을 피할 순 없다. 그것으로 족할 때도 종종 있겠지만, 다른 쾌감을 추구하는 일과 맞바꿀만한 강도는 거의 드물다. 예컨대 독자는 바람둥이처럼 쉴 새 없이 다른 쾌감을 기웃거리고 있는 것이다. 그 결과 고문에 가까운 예술마저도 탐색 대상에 포함된다. 문악이 작품 그 자체로 환원되는 가치가 아니기 때문에 가능한 역능이다. 
읽는 쾌감을 쫓는 능산적能産的 탐색엔 자기 원인이 관계한다. 내가 싫증냈던 것이라고 모두가 싫증내는 법이란 없으며, 모두가 싫증내는 그것이 나에겐 새로운 쾌감일 수 있다. 내가 지나온 문악의 능동적인 변용들로부터 차별화된 쾌락의 근거가 생겨난다. 따라서 김현은 무협소설의 대중적 열광에 대해 섭섭해 할 필요가 없었다. 정말 암담하고 섭섭한 일이란 무협이든 교양이든 독서 자체가 외면 받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유종호의 「문학의 전락-무라카미 현상을 놓고」(2005)는 김현의 글과는 사십여 년의 터울을 두고 발표됐지만, 교양을 중시하는 문학주의라는 점에선 궤를 같이 하고 있다. 이 글에서 유종호는 하루키 소설을 “감상적인 허무주의를 깔고 읽기 쉽게 씌어진, 성적 일탈자와 괴짜들의 교제과정에서 드러나는 특이한 음담패설집”이라고 평가한다. 그런데 이런 노교수의 평과는 반대로 상당수 학생들은 가장 감명 깊게 읽는 책으로 하루키의 '상실의 시대'를 꼽았다고 한다. 유종호는 이런 현상이 ‘문학의 전락’이자 세계의 비속화가 가속되고 있는 징후가 아니겠냐며 개탄한다. 
그에게 '마의 산'이나 엘리엇의 시로 대표되는 고급문학을 읽는 일이란 문학의 매혹에 눈뜰 수 있는 좋은 마주침이다. 또한 이러한 경험의 유무에 따라 ‘마음의 귀족’과 ‘비루한 대중’이 구별될 수 있다고 적고 있다. 그런데 만약 SF나 추리소설 하다못해 허드레 포르노 소설이 최초의 매혹이라면 어쩔 것인가? 그는 비루한 대중의 습성에 젖게 되고 비속한 세상에 순응하며 살아가게 되는 걸까? 
'상실의 시대'를 최고의 소설로 꼽은 학생들은 뭔가 잘못된 게 아니었다. 문제 삼아야 할 것이 있다면 이 소설을 출발점으로 다양한 작품을 넘나들며 ‘읽는 쾌감’을 지속하고 있느냐이다. 유종호도 글에서 인정하고 있는 것처럼 하루키는 비디오와 스테레오에 경쟁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작가의 한 사람이다. 하루키에게 매혹된다는 것은 온갖 미디어의 재미가 난무하는 이 시대에 소설 읽기가 여전히 재밌는 일임을 확인하는 일이다. 따라서 학생들에게 고급문학을 읽게 하고 싶다면 '상실의 시대'를 욕하기 보다는, 문악文樂의 운동성을 끌어올릴 수 있는 방법부터 기획했어야 마땅하다. 
반대로 진짜 역겨운 패착은 비루한 존재로 구별당하지 않기 위해, 문학을 의무적으로 꾸역꾸역 섭취하는 상황이다. 가령 좋은 대학에 입학하기 위한 논술 준비로 고전을 읽는 학생은 소정의 목적을 이룬 뒤에도 그 책을 펼쳐보고 싶을까? 지긋지긋한 독서, 읽어야 하기 때문에 읽는 일엔 기쁘게 자기 가치화하는 역능이 발현되지 않는다. 노교수의 역정에 담긴 진정성을 이해하면서도 공감할 수 없었던 까닭이 여기에 있다. 왜냐하면 이미 우리 시대엔 교양에 대한 강권强勸과 조건부 순응이 만연해 있기 때문이다. 좋은 직장에 취직하기 위해 '마의 산'을 암기해야 한다면 학생들은 이를 악물고 읽고 또 읽을 것이다. 그에 비하면 읽는 쾌감 그 자체는 마땅한 가치를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애당초 평가를 필요로 하는 가치가 아니다. 필요로 하는 것이 있다면 우리를 매혹케 할 재밌는 읽을거리가 풍부해지는 것뿐이리라.

2. 독서는 섹시해져야 한다. 
한국과 외국 작품을 총망라해 출판계엔 재밌는 소설이 즐비해야 한다. 다행히 변화의 징후가 감지되고 있다. 바야흐로 장르 문학 붐이 일고 있는 것이다. 장르 문학의 선전은 문악文樂의 입장에선 반가운 현상이 아닐 수 없다. 장르 문학 특유의 읽는 쾌감뿐만 아니라 전통적 의미의 문학성까지 전유하는 창조적 확장성을 기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일례로 역대 노벨문학상 수상자 가운데는 SF를 통해 창작의 지평을 넓힌 작가가 적지 않다. 2007년 수상자인 도리스 레싱을 비롯해, '파리대왕'의 월리엄 골딩, 2400년의 미래를 배경으로 한 '유리알 유희'의 헤르만 헤세, '치료탑 혹성'의 오에 겐자부로가 그들이다. 해마다 수상후보로 거론됐던 어슬리 K 르귄, 故 커트 보네것(2007년 사망), 마가렛 애트우드 등도 SF 작가다. 이들이 SF 장르에 매혹된 이유는 무엇일까? 
무엇보다도 현대 사회의 불확실한 윤리적․철학적 좌표를 탐구하는 데 효과적이기 때문이다. 앨빈 토플러도 '미래 쇼크'에서 SF 소설을 학교에서 가르쳐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핵전쟁과 생태계 오염, 지구온난화, 유전자 조작과 자원고갈 등의 문제에 관한 예언적 성찰을 SF에서 배울 수 있다고 평한 바 있다. 
가까운 일본만 하더라도 장르 문학의 전통은 거의 일세기에 달한다. 세계적인 작가도 여럿 배출했다. 대표적으로 '일본침몰'을 쓴 고마쓰 사토, '모래의 여인'의 아베 코보, '시간을 달리는 소녀'의 츠즈이 야스카다, '기묘한 이야기'의 호시 신이치 등이 있다. 굳이 SF에 한정짓지 않더라도 추리, 공포, 코믹 등의 전 장르에 걸쳐 일본은 풍부한 작가군과 팬덤을 형성하고 있다. 수년 째 서점을 휩쓸고 있는 일본소설 인기의 비결도 실은 여기에 있다. 
장르 문학의 융성에는 몇 가지 조건이 필요하다. 우선 대중문화의 성숙과 함께 출판 시장이 거대화돼야 한다. 장르물에 대한 지속적인 팬덤도 빼놓을 수 없는 조건이다. 그런 의미에서 한국의 1990년대는 장르문화 성장의 중요한 비등점이었다. 컴퓨터 통신의 보급과 함께 자신의 작품을 동호회 게시판에 연재하는 젊은 작가들이 등장했다. 청소년들의 열광적인 지지를 받은 '드래곤 라자'의 이영도와 '퇴마록'의 이우혁은 이 시기의 비조였다. IMF 이후엔 2세대 판타지 작가군인 전민희, 이수영, 방지연, 방지나, 김예리, 홍정훈 등이 등장했다. 하지만 수준 이하의 작품이 무더기로 발표되면서 근래엔 독자의 관심이 한풀 꺾인 상태다. 
2005년 이후, 장르 붐 견인의 주역은 일본 미스터리 소설이었다. 미야베 미유키, 기리노 나쓰오, 기시 유스케 의 인기는 국내 여느 작가 못지않다. 국내 장르 소설의 응전도 만만치 않았다. 조선시대를 다룬 창작 팩션의 인기는 작년에 이어 올해도 뜨거우리라 예상되고 있다. 기존 문단에서도 박민규, 듀나, 천명관, 편혜영, 백가흠, 김언수 등이 장르 혼종적 작품을 발표하고 있다. 2007년엔 장르 문학 전문잡지인 '판타스틱'이 잡지 판매 순위 1위에 오르는 기염을 토하기도 했다. 그래서 출판계에선 2005〜2007년 사이를 ‘장르 엔터테인먼트’의 안착기로 평가하는 분위기다. 그렇다고 일반 문학이 상대적으로 위축된 것도 아니었다. 김훈, 황석영, 신경숙, 조정래의 소설은 여전히 전체 소설 판매량의 수위를 기록하고 있다. 
일반소설에서 장르 문학까지 문악文樂의 운동성이 한 단계 도약할 수 있는 호기가 찾아온 걸까? 하지만 전망은 낙관적이지 못하다. 한국은 소설을 읽는 독자층이 두텁지 못한 나라다. 장르 소설의 붐이라고는 해도 찻잔 속의 태풍이었던 셈이다. 게다가 독서 행위 자체에 세대 간 단절이 존재하는 것 같다. 한국에선 나이 서른만 넘어도 소설은 고사하고 아예 책을 읽지 않는 사람이 수두룩하다. 이유는 간단하다. 먹고사는 일이 바쁘기 때문이다. 굳이 독서를 해야 한다면 주식투자와 재테크 비결을 담은 실용서나, 취업과 이직에 도움이 될 만한 외국어와 자격증 학습서가 우선이다. 스트레스 해소 목적으로도 독서는 각광받지 못하고 있다. 날 새고 책은 못 읽어도 술은 다들 잘 마시는 세태이지 않은가. IMF 이후 한층 유난스럽게 느껴지는 현실이다. 
한창 읽는 쾌감에 취미를 들여야 할 십 대와 이십 대들에게도 소설을 읽을 시간은 부족하다. 새벽 일찍부터 학원을 가야하고 각종 자격증 준비에 아르바이트까지 그네들의 일상은 각박하다. 그들이 서른을 넘어 사회인으로 안착할 때면 소설은 일상으로부터 한층 더 냉정하게 밀려날지 모른다. 
게다가 한국은 책값마저 유난히 비싸다. 장르 문학의 성숙에 이만큼 불리한 상황도 없으리라. 대중문화는 결국 대량 생산과 소비에 기반 한다. 따라서 장르 문학이 대중문화다워지려면 값싸게 많이 찍고, 그만큼 시장에서 많이 팔려나가야 한다. 이것이 페이퍼백 문화다. 하지만 책값을 낮춰 문고판을 많이 생산하는 일은 현실적으로 거의 불가능한 모양이다. 해외 작품의 판권 경쟁 탓에 선인세가 급격히 상승했고, 마케팅 비용까지 감안하면 싼 책으로는 도무지 이윤을 남길 길이 없다. 전체 독서 인구 자체도 고만고만하다보니 초판 2000~3000부를 소화하는 것을 목표로 비싼 하드커버를 고집하게 되는 것이다. 악순환의 고리가 물고 물리고 있다.
전반적인 사회 분위기가 책을 멀리하고 있다. 오늘날 책은 읽는 사람이나 읽고, 안 읽는 사람은 전혀 안 읽는 미디어로 전락한 모양이다. 노교수의 쓴 소리를 심드렁하게 들을 수밖에 없는 이유도 현실 인식의 차이 때문이리라. 상아탑 바깥으로 한 발자국만 나가도 사람들은 죽어라고 책을 안 읽는다. 형편없이 위축된 한국의 문악文樂이 진짜 문제다. 따라서 정말 다급한 과제는 몇 페이지 읽다 질릴 고급문학의 귀환이 아니다. ‘읽는 쾌감’을 많은 사람들과 공유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독서는 마음의 양식’이라는 식의 구호부터 폐기해야 한다. 이 따위 관성적인 계몽으론 변화를 이끌어낼 수 없다. 어떻게 하면 읽는 쾌감의 섹시함을 전할 수 있을까? 모니터에 집중된 시선을 책으로 되돌릴 방법은 무엇일까? 컴퓨터 자판이나 두들겨대다가는 비루한 인간이 된다는 식의 설레발은 꺼내지도 말아라. 놀이를 함께할 동무를 찾는 어린이의 마음이 필요하다. 권하기 전에 우선 즐겨라. 뭐가 재밌는지 직접 느끼고, 그 흥분을 친구에게 전해라. '마의 산'이 됐든 하루키가 됐든 문악에 뜨거워질 수 있다면, 서가의 다채로운 책들을 탐색할 여유도 차차 생길 것이다. 개별 작품의 가치보다는 문악의 운동성 자체를 낙관하고 싶다.
그리고 나라면 문악의 도약대를 찾는 이들에게 장르 소설 읽기의 즐거움을 권하겠다. 장르 문학을 애들이나 읽는 것으로 여기는 무식한 편견이 여전히 잔존해 있지만, 직접 읽어본 이라면 알 것이다. 훌륭한 장르 소설은 기본적으로 문학이면서 사회학, 심리학, 인류학, 생명과학, 정치학, 경제학 등으로 자유롭게 사유를 접속한다. 밤이고 낮이고 ‘나’의 찌질함을 중얼거리는 일련의 작풍에 비교할 수 없다. 차이는 창의적인 역동성에 있다. 이것은 창작으로 전도傳導된 문악의 힘이기도 하다. 소설의 대가들이 장르적 상상력에 경도되는 까닭도, 기본적으로 그것이 문악적으로 즐거운 경험이기 때문이다. 읽고, 또 다른 것을 더 찾아 읽게 만드는 매혹! 그런 힘을 갖춘 작품을 새롭게 평가하고 함께 즐길 길을 찾아야 할 때다. 

3. 쓰레기통에 버려진 책에도 즐거움이 
이 글의 장르 문학에 대한 지지가 오해를 불러일으킬지 모르겠다. 문악文樂 개념이 교양소설이나 고급문화에 대한 적대적인 입장처럼 비칠 수 있을 테니. 하지만 분명히 밝혀두건대, 독서에 관해 고착된 입장에만 머무르는 것은 문악이 아니다. 개별 작품에 대한 가치 평가도 문악의 몫이 아니다. 문악은 독자와 작가 그리고 작품이 이루는 무수한 삼각형들을 넘나드는 쾌감의 운동 에너지다. 따라서 고급한 교양소설에 대한 애정 역시 얼마든지 문악으로 설명될 수 있다. 하지만 역능의 차이는 엄연히 존재한다. 가령 오로지 계급적 아비투스에 충실할 뿐인 독서는 자유로운 넘나듦의 독서보다 미미한 운동성을 갖는다. 반대로 새로운 읽는 쾌감을 위해 어떠한 편견도 무시할 수 있는 이의 즐거움은 최고 수준의 문악이라 할 만하다. 즐거움에 대한 그의 탐색은 능산적이다. 
또한 문악은 창작으로 전도 가능한 에너지다. 하지만 그 전에 문악은 일상적 정동(affect)으로부터 전도된 에너지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동과 문악을 구분해 부르는 까닭은 읽는 쾌감 그 자체로서의 성질 때문이다. 이때 문악은 ‘정동’이면서 ‘정서’로 설명될 수 있다. 두 개념의 차이를 간단히 설명하면, ‘정동(affect)’은 행동 능력의 연속적인 변이지만 ‘정서(affectio)’는 신체의 한 상태를 의미한다. 따라서 정서로서의 문악은 타인을 매혹시킬 수 있다. 나의 즐거움이 누군가의 호기심과 선망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신체 효과를 낳기 때문이다. 문악 개념을 ‘섹시한 독서의 권장’이란 말과 함께 설명한 까닭이 여기에 있다. 
이러한 문악 개념은 독서 문화의 역동성을 유도할 실천적 기획의 기초가 될 수 있다. 예컨대 문악으로부터 에너지를 전도 받은 창작은 문악적 넘나듦의 궤적을 감추지 않는다. 흔히 장르 혼종적이라 설명되는 작품에서 쉽게 발견할 수 있는 특징이기도 하다. 독자는 이런 작품으로부터 스토리와 주제뿐만 아니라 문악적으로도 공명共鳴될 수 있다. 다채로운 독서를 통해 발현되는 상상력의 즐거움에 눈뜨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그의 즐거움이 예술적이고 교양 있는 무엇에 대한 것이길 기대할 필요는 없다. 쓰레기통에 쉽게 내다버릴 수 있는 책에 빠져서 읽고 버리길 반복한다 해도 그의 문악에 결핍은 있을 수 없다. 문악이 추구하는 것은 나를 기쁘게 하는 텍스트들과의 마주침이기 때문이다. 
앞서 언급했던 장르 소설 전문잡지 ≪판타스틱≫에 이런 기사가 실렸다.

“80년대 일본 가도가와 출판사에서는 책이 쓰레기통에 들어 있는 광고를 한 적이 있었다. 보고 버리라는 의미였다. 일본은 실제로 그런 문화가 있기도 하고 많은 책을 빨리 보고 버리고 해야 시장이 넓어진다는 의미였을 것이다. 예쁜 책을 집에 꽂아놓고 감상하는 게 아니라 재밌는 책을 빨리 보고 또 다른 책을 읽고. 미국 공항에서는 페이퍼백이 불티나게 팔린다. 비행기 탈 때 사보고 덜 읽은 부분만 찢어서 가져가 마저 읽는다. 3~4시간 재밌게 읽을 수 있으면 족하다는 생각이다.”

책이 쓰레기통에 들어가 있는 광고는 문고판 소설의 저렴함을 부각하기 위한 전략이었으리라. 하지만 ‘마음의 양식’으로 책을 섬기는 사람들에게는 심히 못마땅한 이미지다. 책장에 고이 모셔둬야 할 고전이 쓰레기통에 처박혔다면 세상의 비속함을 탓할지 모른다. 반대로 포르노 소설이나 아동용 SF가 버려졌다면 그럴 법 하다고 여길지도. 하지만 결론부터 말하면 쓰레기통에 못 갖다 버릴 책이란 없다.
책을 귀하게 여겨야 한다는 관념은 필요 이상으로 억압적인 측면을 가졌다. 책에 대해서만큼은 누구라도 바람둥이가 될 수 있다. 문악文樂만 뜨겁다면 버리고 새로 만나길 반복해도 아무 상관없다. 하지만 독서가 순수한 의미에서 독서이기만 하기란 대단히 어렵다. 책을 귀하게 여긴다는 것이 그저 책에 대한 문제가 아닌 것처럼 말이다. ‘책은 책장에’라는 식의 고정관념부터 단순치가 못하다. 이런 생각은 독서와 책의 존재 양식을 어떤 시간과 공간 안에 정주定住시킨다. 언제 어디에서든, 어떤 글에 대해서든 가능한 게 독서다. 하지만 정동이며 정서인 문악은 독서 행위를 둘러싼 시공간성과 영향을 주고받을 수밖에 없다. 그래서 읽는 쾌감은 항상 얼마큼씩 책 바깥의 세상과 불화하게 된다. 
다음과 같은 질문이 가능하다. 그렇다면 독서하기에 부절적한 시간과 공간이란 어떻게 판단되는가? 중요한 변수는 내가 읽고자 하는 게 무엇이냐다. 남들 보기에 부끄러운 책, 이를테면 계급적인 의미에서 타인에게 나답게 보일 수 없는 책을 어떻게 대하게 되는가? 타인의 시선으로부터 홀가분해질 수 있는 장소와 시간을 찾지 않을까? 하지만 탐색은 쉽지 않다. 내 방의 책장조차 타인의 시선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운 공간이 아니다. 게다가 타인의 시선이란 물리적인 추적 없이도 의식의 이면에 붙어 다닌다. 평범한 독서에 대해 지나치게 강박적으로 분석하는 것처럼 느껴질 수 있다. 하지만 바로 그 ‘평범’이란 실상에 대해 묻고 있는 것이다. 내가 싫은 것, 끌리지 않는 글을 읽지 않을 자유는 누구에게나 있다. 그런데 정작 이 말을 뒤집어 놓는 것이 평범한 독서라면 어쩔 것인가? 싫어도 끌리지 않아도 읽어야 한다고 느끼는 일, 독서와 책의 정주된 존재양식에 선택을 한정당하는 상황이란 얼마나 일상적인가. 
책장冊欌은 터미널일 뿐이다. 새로운 마주침에 방해가 되선 안 된다. 쓰레기통에 버려진 책은 문악의 궤적이다. 공항에서 페이퍼백을 사서 읽듯 가뿐하게 독서를 대하자. 이런 태도 때문에 진중하고 예술적인 작품이 소외될지 모른다는 걱정은 지나치다. 대개의 경우 걱정만 할 뿐 그런 작품을 안 읽는 경우가 허다하다. 하지만 문악의 기획은 책에서 책으로, 새로움에서 또 다른 새로움으로 항로를 연결하는 일이다. 어떤 장르, 취향을 소외시키는 것이 목표가 아니다. 오히려 잠재화시켜서 독서 일상에 다채로운 리듬이 솟아오를 수 있게 하는 일이다. 그런데 이를 위해선 현실적인 출판 환경이 뒷받침돼야 한다. 쓰레기통에 버려도 부담 없을 만큼 책값이 싸져야 하는 것이다. 아래에 인용한 대목은 이 문제에 대한 출판업자의 생각이다. 

“문고판이 나오려면 도서관이 많아져야 한다. 도서관에서 양장판 물량을 소화해 준다면, 대중성 있는 문고판이 활성화될 수 있다. 하지만 신간 자체가 안 들어가는 도서관이 많다. 판타지는 안 받는 도서관도 있다. 도서관이 책을 많이 구매하지 않기도 하고.”

간단히 말해 국가의 지원을 받겠다는 발상이다. 하지만 이런 일에 국가의 재력을 끌어들인다면 거대한 억압의 책장과 관계하는 셈이 된다. 나랏돈은 아무 책이나 사들이는 데 결코 쓰이지 않을 것이다. 이미 우수문학도서 지원 사업이란 게 진행 중에 있다. 그런데 ‘우수문학’이라니? 그 선정 기준이 무엇일까? 그것이 충분히 문악적일 수 있을까? 문악은 우수한 것으로 심사된 한 묶음의 책 안에서 맴도는 운동성이 아니다. 그렇게 계도된 문악은 책장의 질서에 순응하기 쉽다. 박금산의 '바디페인팅'(실천문학사, 2007)이란 연작 소설집이 있다. 작가의 자전적인 문화예술위원회 지원금 운용/실행기쯤으로 요약될 수 있는 작품으로, 작가의 일상과 생계, 작품 생산과 제도의 관계가 얼마나 뻔뻔하게 뒤얽힐 수 있는가를 볼 수 있다. 소설 속 작가는 내내 찝찝해하면서도 ‘우수’ 작가가 되는 일을 결코 마다하지 않는다. 
내가 주목하고 싶은 대안은 ‘책 나눠 읽기’ 운동이다. 이 운동엔 여러 가지 변용이 있을 수 있다. 공동으로 책을 소유하는 길드를 조직해 구입비도 줄이고, 구성원들의 다양한 독서 취향을 즐기는 방법이 가능하다. 다 읽은 책을 관심 있는 누군가가 읽도록 지하철이나 버스에 놓고 가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다만 그렇게 공유되는 책들이 문악적이었으면 좋겠다. 굳이 교양서일 필요는 없다. 때론 음탕해도 좋다. 더러는 난해한 고전이어도 상관없다. 스릴러, SF, 팬픽이라 해도 좋다. 새로운 읽는 쾌감을 찾아 생기 넘치게 복작거리기. 단언컨대 독서만의 즐거움으로 그치지 않을 것이다. 
우리의 일상도 함께 변화할 것이다.


임태훈∙2006년에 대산대학문학상 평론부문 수상. 소설가.
추천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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