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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호 서평/이정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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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부
댓글 0건 조회 3,246회 작성일 08-07-16 0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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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조두진, 마라토너의 흡연(한겨레)
■공선옥, 명랑한 밤길(창작과 비평사)

존재의 남루함에 내재된 소통의 절실함에 관하여
이정현|문학평론가




1. 소박하고 정직한 그들의 작품
소설은, 환상이다. 작가에 의해 가공된 텍스트 속에서 현실은 과장되고 비틀어진다. 때로는 이 과장과 비틀림 속에서 과도한 풍자나 역설이 전개되며 형식의 전복이 시도되기도 한다. 우리는 이러한 과장과 비틀림의 몸짓을 멀리는 이상李箱으로부터 시작하여 이인성과 정영문의 소설에서 볼 수 있다. 또한 최근에는 논문의 형식을 빌려 지식인을 풍자한 박형서의 소설이나 미래형 시제를 구사하며 일상적인 시간성을 배반하는 배수아나 관념의 확대를 통해 근대적 서사에서 탈피하는 한유주와 같은 작가에게서 확인할 수 있다. 
어떤 절실함은 때로는 낯선 방법론을 필요로 하는 법이므로, 이 장場에서 작가가 개진하는 텍스트 속의 방법론이 지니는 장단에 대해서 시비를 걸 필요는 느끼지 못한다. 이 작가들이 창작하는 텍스트들 또한 나름의 의미를 지니고 있기에 더욱 그러하다. 그러나 작가의 낯선 방법론은 그 안에 내재된 어떤 절실함에도 불구하고 일반 독자들에게 울림을 줄 여지가 그만큼 줄어들 수 있다는 사실 또한 분명하다. 그러므로 소설은 작가가 창조한 환상이지만 서사를 지닌 이야기라는, 평범한 정의에 기반한 작품들이 실험적인 작품보다 가독성이 높을 수밖에 없다. 
소설 속의 이야기가 그것을 읽는 이로 하여금 텍스트 안에 활자로 존재하는 ‘저기-너머’의 풍경이 아니라 ‘지금-여기’에서 자신의 삶과 중첩되어 울림을 느끼도록 하는 것이야말로 소설이란 장르가 구체적으로 지닐 수 있는 가장 큰 매력이 아닐까. 그런 점에서 2007년 연말에 출간된 조두진('마라토너의 흡연' 한겨레), 공선옥('명랑한 밤길', 창작과 비평)의 소설집은 주목할 가치가 있다. 조두진과 공선옥의 소설들은 철저하게 현실에 기반을 두고 있다. 이 두 작가의 작품들도 한낱 ‘구라’일 뿐이라는 소설의 운명에서 벗어날 수 없지만, 이들의 작품은 솔직하다. 꾸미거나 에둘러 말하지 않는다. 이들의 작품은 솔직하며 건강한 방식의 거짓-이야기이다. 이들은 형식의 파괴, 기발한 발상, 관념의 증폭, 상징과 은유의 과잉을 탈피하여 평범한 일상에 대한 응시를 통해 이야기를 직조해 나간다. 

2. 의미 있는 질주-마라토너, 김영부, 돼지들
조두진의 작품집에 나오는 소설들은 대부분 이분법적인 대립 구도를 형성하고 그 대립항의 간극에 인물들을 배치시키는 형식을 취한다. 표제작 「마라토너의 흡연」의 주인공 ‘채’는 마라톤을 취미로 시작한다. ‘채’가 마라톤을 하는 이유는 특별한 자세가 필요하지 않고 마음 내키면 언제든지 혼자서 할 수 있는 매력적인 운동이기 때문이다. ‘채’는 결코 전력으로 질주하는 법이 없고 마라톤 완주 후의 흡연을 즐길 뿐이다. 그러나 아내는 다르다. “아마추어라면 건강에 커다란 도움이 돼야 하고, 프로 선수라면 돈이 돼야 한다”(42쪽)는 것이 아내의 생각이다. ‘채’의 기록이 향상될수록 아내는 음식을 새로 만들어 주며 기록에 악영향을 미치는 흡연을 삼가라고 하지만 ‘채’는 그런 말에 따르지 않는다. 

기록을 세우려고 마라톤 하는 것이 아닌데요. 담배 끊을 바에야 마라톤을 왜 합니까? 저는 평생 담배 피우려고 마라톤으로 몸 다지는 겁니다.(68쪽)

그에게 중요한 것은 단지 뛰고 움직인다는 사실일 뿐이다. 그러나 ‘프로’라는 단어로 압축되는 경쟁관계와 도시적인 압박감에서 채와 같은 사람의 달리기는 온전히 개인의 취미로 보전되지 못한다. 
주요 인물과 주변과의 대립구도는 「아름다운 날들」에서 더욱 두드러진다. 주인공인 김영부는 시골의 순진한 농부였으나 돈을 벌기 위해 산에 터널을 뚫는 공사에 참여했다가 발파작업의 와중에 청력을 상실한다. 그러나 그것에 대한 보상은 없다. 오히려 공사장 감독에 의해 일터에서 쫓겨나는 신세가 되고 만다. 동네사람들도 모두 그가 번 조금의 돈에만 관심을 나타낼 뿐 그의 불구는 입담거리에 불과하다. 게다가 동네에 개통된 신작로를 통해서 들어온 버스를 타고 아내가 떠나버린다. 그의 큰 아들 역시 도시로 나가 조직폭력배가 되고, 작은 아들은 오토바이 사고로 목숨을 잃는다. 이 대책 없는 불행의 연속 속에서도 김영부는 고작 눈물을 흘리거나 들리지 않는 소리를 대충 짐작하고 바보처럼 웃을 뿐이다. 댐공사로 인하여 마을이 물에 잠기게 되었을 때도 그는 아무런 소리를 듣지 못한 탓에 물이 들어찬 마을과 함께 수장된다. 조직 간의 다툼으로 한 팔을 잃은 큰 아들이 돌아왔을 때, 그는 맞아주는 건 정든 고향이 아니라 댐 주변을 에워싼 철조망이다. 

큰 아들은 붕대를 친친 감은 팔을 목에 걸고 고향에 나타났다. 고향은 이미 물에 잠긴 후였다. 고향집과 마을이 있어야 할 자리에는 푸른 물이 넘실대고 있었다. 댐 가장자리는 철조망이 둘러져 있어 들어갈 수 없었다.(99쪽)

조두진은 이렇듯 프로/아마추어, 도시/고향, 미소/냉소라는 대립항 사이에 평범하고 착한 인물들을 밀어 넣는다. 이들은 주변인들의 비웃음과 냉소에도 미소를 짓지만 그들의 미소는  바보스러움의 다른 이름에 불과하며 그들의 순수함은 부적응의 다른 이름일 뿐이다. 그렇다면 그들을 바보 취급하고 냉소로 일갈하는 주변인들의 초상은 어떠한가. 조두진은 단순히 바보스러운 인물들을 나열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바보로 비춰지는 인물들의 대립항으로 존재하는 사람들에 대한 묘사도 곁들인다. 이 작품집에는 총 네 명의 ‘김영부’ 라는 인물이 등장한다. 「마라토너의 흡연」의 주인공 채가 일하는 회사의 김영부 국장, 「아름다운 날들」의 귀머거리 김영부, 자신의 손자를 물었다는 이유로 족제비를 잡아서 재판을 벌이는 「족제비 재판」의 김영부 할아버지, 불구이지만 동네 골목의 어떤 남자보다도 절륜의 정력을 지니고 있는 김영부 노인. 「아름다운 날들」의 김영부를 제외하고 나머지 인물들은 하나같이 이기심과 속물근성을 지닌 인물들이다. 김영부 국장은 ‘기록’과 ‘경쟁’을 중시하는 현대인의 전형으로, 손자에 대한 복수로 족제비를 잡아서 재판을 벌이다가 주변의 장황한 말들에 울화가 치밀어 족제비를 불태워버리는 김영부 노인은 자신의 분풀이를 동물에게 푸는 소시민으로 읽혀진다. 또한 정력에 대한 모종의 비기를 지닌 듯한 냄새를 풍기며 주변 사람들의 호기심을 이용해 돈을 뜯어 틀니를 해 넣는 김영부 노인과 그에게 속는 사람들은 거짓과 상호간의 적당한 수준의 뜯어먹기를 묵인하는 세태를 반영하고 있다. 채와 귀머거리 김영부의 대립항으로 존재하며 그들을 비웃는 다른 김영부들의 모습을 통해 조두진은 현실을 우화로 끌어내리며 우리들 중 누구에게 약자에게 모멸감을 던질 자격이 있겠느냐고 되묻는다. 
이러한 현실 속에서 인간은 어떤 모습을 닮아간다. 그 모습은, 「돼지」에 나타나듯이 두 딸을 키우기 위해 술을 먹고 몸을 팔았지만 결국은 두 딸에게 버림을 받고 공원에서 몸을 파는 갈보로 전락하는, 인간대접을 받지 못하는 ‘돼지’의 모습으로 은유된다. 인간이 인간을 돼지처럼 취급할 때, 인간은 돼지처럼 변해간다는 진실. 돼지는 스스로 미친 듯이 먹어대며 살을 찌우다가 결국은 누군가의 위장에서 소화될 운명을 지녔다. 경쟁과 기록만을 중시하는 당신들도 돼지와 같지 아니한가. 경쟁과 기록은 늘 깨지게 마련이고, 그 과정에서 밀려난 자들은 귀머거리 김영부나 「돼지」의 갈보처럼 인간다운 대접을 받지 못하는 사각지대로 밀려나게 된다. 경쟁에서 밀려나지 않은 인간들의 모습도 긍정적이지 않다. 
의과대학을 졸업한 세 동기들의 어느 저녁식사 풍경을 그린 「손톱」에서는 의사라는 안정적인 직업을 가진 그들의 고민 또한 얼마나 속물적인가를 보여주고 있다. 피부과 의사인 기호와 정형외과 의사인 동조는 손톱이 피부냐 뼈인가를 놓고 언쟁을 벌인다. 성형외과 의사인 정수는 부유한 아내 덕에 잘되는 성형외과의 원장이지만 자신의 병원을 ‘감옥’처럼 느끼며 따로 애인을 사귀는데 몰두한다. 손톱에는 암 같은 것이 발생하지 않으므로, 자신들의 밥그릇을 네일 아티스트나 피부미용사가 빼앗아 간다는 푸념에 이르면 그들 또한 사회로부터 성공했다는 인정을 받았을지언정, ‘돼지’에 다름 아니라는 사실이 확연히 드러난다.

자고로 신체부위에는 암이 있어야 해. 그래야 개나 소나 함부로 나대지 않는다고. 머리카락이나 손   톱에 암이 있었어봐? 개나 소나 미용실을 열고 네일 케어점 열 수 있겠어? 지네들이 맘대로 지지고   볶고 깎고 밀 수 있겠느냐고?(255쪽)

당신이 약자인 김영부이든, 소시민적인 김영부이든, 혹은 성공가도를 달리는 안정된 인생이든 소설책을 덮으면서 어떤 느낌이 다가올 것이다. 인간을 돼지로, 약자로, 대책 없는 소시민으로 몰아가는, 위선적인 편견체제로 이룩된 현실에 대하여. 이 현실의 외부란 존재하지 않는다. 견고한 현실에 균열을 가하기 위하여 많은 소설 속의 인물들은 비현실적인 언어로 말을 건네거나 서사를 약화시키고 관념을 나열하며 순간적으로 명멸하는 이미지에 대한 몰입을 행한다. 그러나 외부를 탐색하고 소통의 활로를 모색하기 위한 시도는 그 자체의 난해함으로 인하여 더욱 요원해지는 경우가 많다. 
조두진은 외부의 탐색이나 저항의 형식을 찾기 위하여 애쓰지 않는다. 그는 소설을 통해 누군가를 계몽시키려고 하지 않는다. 마라토너 ‘채’가 완주 후에 흡연을 즐기는 순간을 조두진의 소설을 독해하는 우리의 행위에 적용한다면 어떨까. 특정한 정보나 지식의 습득, 뭔가를 해석해야 된다는 압박감에서 벗어나서 그의 소설 속에서 움직이는 소시민들의 행위를 읽어나가다가 책장을 덮는 순간, 잠깐의 사색에 빠지는 것. 현실과 흡사한 편협하고 이기적인 인물들과 박해받는 약자들의 이야기를 통해 당신이 위안을 받을 수 있다면, 삶을 교정하는 작은 계기가 된다면, 그것이야말로 마라토너의 흡연에 비견될 수 있지 않은가?

3. 불편하고 아픈 그녀들의 삶
공선옥의 소설은 불편하다. 좀 더 정확하게 표현하면, 공선옥의 소설들은 아프다. 이 불편함과 아픔의 이유는 무엇인가. 공선옥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하나같이 약자이며 답답하다. 그 현실을 묵묵히 감내하는 모습은 청승맞기까지 하다. 91년도에 등단한 공선옥은 비슷한 시기에 등장한 여성작가들과는 현저히 다른 글쓰기를 선보이고 있다. 동시대의 여성작가들이 제도에 발 빠르게 적응한 독신여성을 그리거나, 일탈적인 행위(불륜, 가출, 유희적 사랑)을 그리며 새로운 여성상을 창출해 나갔지만 공선옥이 그리는 여성들은 그러지 않는다. 많은 여성작가들이 유희적이고 가벼운 삶을 추구하며 현실에 대한 이탈을 꿈꾸었지만 공선옥은 현실, 더 정확하게는 삶 그 자체에 함몰된 여성과 제도와 관습이 가하는 비가시적 폭력에 노출된 여성들을 그렸다. 이번 소설집 「명랑한 밤길」도 예외가 아니다. 모두가 외롭고 아픈 사람들. 이를테면 이런 식이다. 
병에 걸린 노모와 양아치 같은 딸년과 같이 사는 이혼한 국어교사(「꽃 진 자리」), 남편이 죽었지만 마음 놓고 울지도 못하는 여자(「영희는 언제 우는가」), 치매에 걸린 어머니와 함께 살다가 도시에서 온 ‘글쓰는 남자’에게 버림받는 시골병원의 간호조무사(「명랑한 밤길」), 물난리에 남편을 잃고 홀로 서게 되는 여인(「아무도 모르는 가을」). 
그 뿐인가. 폐경을 앞둔 중년 여인이 된 전교조 출신 국어교사(「폐경전야」), 79년도에 버린 아이에 대한 죄책감을 안고 99년도에 낳은 아이를 재우고, 89년도에 낳은 아이를 마중 나가는 여인(「79년생의 아이」) 등 공선옥의 소설에는 유독 사랑에 실패하고 곤궁한 현실 때문에 안정적인 삶에서 비켜난 여인들이 등장한다. 이들은 모두 ‘입이 없는 존재’ 들이다. 자신들에게 가해지는 사회의 무관심과 폭력, 빈곤한 삶에 대해서 저항할 힘이 없는 존재들. 90년대 이후 가시적인 민주화가 이룩되고 산업화가 완성단계에 이르는 과도기에 변두리로 밀려난 이들에게 있어서 희망이란 요원해 보인다. 사회의 상징폭력은 견고하며, 오히려 사랑과 가족은 그녀들에게 ‘짐’으로 존재한다. 이혼한 남편은 계속해서 돈을 요구하고, 새롭게 만난 남자는 딸려 있는 자식은 배제한 채 여자만을 요구(「별이 총총한 언덕」)하는 식이다. 가난이라는 물질적인 조건의 결핍 외에도 사랑마저 자신을 배반한 풍경 속에서 공선옥이 그리는 여인들은 계속해서 살아간다. 

한번이라도 먹고 싶은 것을 먹어보고, 갖고 싶은 것을 가져봐야 꿈을 꾸지. 그게 어떻게 생겼는지도 모르는데 어떻게 꿈을 꿔?(72쪽)

이런 아픈 삶들에게 위안과 희망이란 존재할 수 있는 것인가. 가난을 전혀 미화하지 않은 채로 그려지는 소설 속 인물들의 삶. 그것을 바라보며 점차 불편해지고 아파오는 마음으로 되묻게 된다. “그녀들은 어떤 위안으로 삶을 지속하는가? 왜 그런 삶을 계속해서 그리는가?” 공선옥은 도저히 출구가 없을 것 같은 절망의 상황에 놓인 인물들이 ‘일상 속에서’ 어떻게 위안을 발견해 나가는지를 그린다. 공선옥의 소설이 밑바닥에 다가서는 삶들을 그리면서도 여전히 삶을 긍정하는 희망의 전언으로 남을 수 있는 것은 거기에 기인하지 않을까. 
도시에서 온 남자와 꿈같은 연애에 빠지지만 끝내 버림받는 「명랑한 밤길」의 주인공은 남자와 헤어지고 돌아오는 ‘무서운’ 밤길을 걷는다. 

내가 비에 젖어 걸을 때, 뒤에서 누군가도 비에 젖어 걸어오고 있었다. (…중략…) 나에게 융단폭격 같은 말폭격을 퍼부어대던 남자가 무섭고 칠흑 같은 밤이 무섭고 내 뒤에 오는 누군가가 무서웠다.(122쪽)

그러나, 남자에게 버림 받은 뒤 돌아오는 밤길에서 목격한 두 명의 외국인의 대화를 듣고 ‘나’의 ‘무서운 밤길’은 ‘명랑한 밤길’로 뒤바뀐다. 

싸부딘, 난 한국에서 슬플 때 노래했어, 한국 발라드야. 사장이 막 욕해. 나 여기, 심장 막 뛰어. 손가락 막 떨려. 눈물 막 흘러. 그럼 노래했어. 사랑 못했어. 억울했어. 그러면 또 노래했어. 그러면 잠이 왔어. 그러면 꿈속에서 달을 봤어, 크고 아름다운 네팔 달이야.(124쪽)

낯선 누군가도 자신처럼 슬퍼하며, 같은 노래를 듣고 같은 달을 바라보며 아픈 삶을 지나간다는 사실. ‘나’는 나직하게 유행가를 부르며 “뚜벅뚜벅, 명랑하게” 밤길을 걷는다. 
「명랑한 밤길」의 ‘나’가 느끼는 위안의 방식은 여러 작품에서 거듭된다. 「도넛과 토마토」의 문희는 자신과 이혼한 남편이 사망한 뒤에 마주친 남편의 새로운 처인 외국인 여자 ‘도넛’을 만나면서 자신보다 대책 없는 삶에 대해 연민을 느낀다. ‘도넛’과 만나고 돌아오는 길에 “낯모르던 고단한 인생에게 어깨를 빌려주고 있듯이, 도넛에게도 그럴 날이 온다면” 이라는 소박한 읊조림을 내뱉는 문희. 노숙자들이 일군 토마토밭을 갈아엎는 공원직원들을 보면서 작은 희망의 의미에 과한 글을 쓰던 문희의 글쓰기와 ‘도넛’에게서 느끼는 연민이 중첩되면서 소설은 고통을 바라보는 연민이 희망으로 전환되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러한 전환은 ‘외국인, 노숙자’라는 타자와의 관계뿐만 아니라 어머니와 딸이라는 가족 내에서의 관계에서도 빛을 발한다. 
열다섯 살에 ‘나’의 생일날 미역국을 끓여주며 “나는 너 낳고 미역국도 한 그릇 먹지 못했다”(224쪽)고 말하는 「지독한 우정」의 어머니. 남편 없이 ‘나’를 키우며 힘겹게 살아가던 어머니가 어떤 병든 ‘아저씨’와 사랑에 빠진다. 어느 날, 어머니의 전화통화를 듣던 ‘나’는 자기를 놓치지 않으려면 아이와 자신 중에 하나를 택하라는 아저씨의 말에 어머니가 흔들리고 있음 알게 된다. ‘나’는 자신이 어머니의 사랑에 걸림돌이 된다는 생각을 하며 돌아서려는데 그 ‘아이’는 ‘나’가 아닌 어머니가 새롭게 임신한 ‘아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나’는 남자친구와의 여행을 포기하고 시장에 가서 미역을 산다. ‘나’를 낳고 미역국 한 번 못 얻어 먹어본 어머니를 위하여. 시장에 가기 전 ‘나’는 어머니에게 메모를 남겨 놓는다.

엄마, 제 동생 낳아주세요. 그래도 이번 아이는 사랑해서 생긴 아이잖아요. 제가 보기에 이젠 사랑이 아닌 것이 확실하지만요.(237쪽)

‘나’는 “비리고 짜고 쓰고 그러고도 달콤한 듯한 냄새”가 풍기는 건어물 가게에서 미역을 사면서 그것이 바로 어머니와 둘이서 살아오면서 맺은 “우정의 냄새” 인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모녀만이 살아왔던 아픈 시간들이 어머니의 새로운 사랑과 동생의 임신을 통해서 ‘우정의 시간’으로 환치되는 순간, 아픔은 희망이 생성되는 거름으로 환치된다. 
공선옥의 소설에 대해서 “고통을 고통으로 위로하는 것이 과연 가능한 일인가. 공선옥의 소설은 이에 대한 해답으로서 존재한다.”라고 말한 이명원의 평가에 동의한다. 고통어린 삶을 위로하는 방식은 탈주나 전복, 위악이 아니라 같은 고통을 응시하는 소박한 삶의 진정성이 아니겠는가. 이 당연한 진실을 정면으로 응시하기 때문에, 아픈 자들을 바라보지만 이해하지는 않으려는, 자신의 안락이 우위인 사람들에게 공선옥의 소설은 불편하고, 아플 수밖에 없다. 

4. 병든 현실을 돌아보며 질문하기
조두진과 공선옥의 소설 속에는 늘 약한 자의 삶이 등장한다. 이 약자들은 자신들을 남루하게 만드는 체제나 구조적 역학에 대해 둔감하거나 무지하다. 다만 그것을 감내하거나 무시하며 묵묵히 살아갈 뿐이다. 그들의 약함은 상당부분 사회의 관습과 편견, 기득권 중심의 구조에 기인하지만 그들은 그것에 부딪히며 저항하는 몸짓을 취하지 않는다. 그럴 수밖에 없다. 그들은 암묵적인 사회적 편견이나 관습․제도들과 싸우기에는 상대적 약자일 뿐더러 그럴 여력도, 지식도 갖추고 있지 않다. 그들이 결정적으로 부딪히고 견뎌야 하는 것은 정작 자신의 삶, 그 자체이므로. 자기 자신의 삶조차 감당하기 어려운 이에게 그들을 약자로 만드는 구조의 모순에 대한 자각을 기대하기는 어려울 터. 그들은 버거운 삶, 그 자체를 통해 울림을 선사하며 그들을 약자이게 만드는 구조에 관해서 우회적으로 되묻는다. 조두진과 공선옥의 소설이 좋은 소설임은 여기서 드러난다. 구체적으로 화두를 제시하며 비판을 가하는 대신에, 소설을 덮은 이후에 독자가 스스로 질문을 생성하도록 만들기 때문이다. 그들은 육하원칙에 충실한 전통적인 소설문법을 통해서 약자들의 삶을, 다만 기록할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질문은 생성된다. 그들의 아픔이 발생되는 연유에 대한 이해와 연민어린 따뜻한 질문이 자연스럽게 파생되는 것. 이 질문의 생성 속에서 희망은 시작되지 않겠는가. 
“미래를 위하여 현재를, 허망한 권력을 위하여 인간의 실감나는 무게를, 찬란한 도시를 위하여 변두리의 비참을 잊고, 헛된 약속의 땅을 위하여 일상의 정의를 잊는” 지금-여기의 사람들에게 두 작가의 소설은 분명, 작은 쉼표로 작동할 수 있으리라.


이정현∙78년생 서울생. 2008년 <문화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추천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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