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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호 서평/이성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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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부
댓글 0건 조회 2,952회 작성일 08-07-16 01:01

본문

|서평|

■정진규, 껍질(세계사)
■정호승,포옹(창작과비평)

두 중진 시인의 새로운 시작詩作
―벼랑에서의 운필과 탈인간의 윤리 
이성혁|문학평론가



1.
한국 근대시는 세계를 예민하게 받아들이면서 아프게 반응하는 주체의 모습을 보여주어 왔다. 그런데 이 모습은 개인의 아픔만을 지시하지 않는다. 근대시는 개인의 서정을 통하여 시대의 고통을 섬세하게 드러내어 시대에 대한 반성을 이끌었다. 특히 일제 강점기와 그 이후 긴 나날의 독재체제를 견디어야 했던 한국의 시인들은 불행의 의식을 시를 통해 보여주면서 그 체제에서의 삶이 행복할 수 없다는 진실을 내밀하게 드러내는 저항을 한 바 있다. 알다시피 1990년대 이후, 절차적 민주주의가 어느 정도 자리를 잡았고 국가의 폭압은 예전보다는 줄어들었다. 그래도 시인들은 여전히 행복을 노래하지 않는다. 왜 그런가? 불행의 원인이 시대에 있지 않았던 것일까? 아닐 것이다. 비록 절차적 민주주의는 자리 잡혔지만, 모든 능력이 돈 버는 능력으로 환원되는 자본의 지배가 사회 곳곳에 더욱 전일화 되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불행에 빠져 있다. 물론 개개인의 불행을 모두 자본 탓이라고 하긴 힘들겠지만, 적어도 많은 이들의 불행이 자본 축적에 기여해야만 살아나갈 수 있는 이 시스템에 자신의 삶을 껴 맞추어야 하는 현실에서 비롯된 것은 사실이다. 
자본주의는 주-객 이분법에 기초한 근대적 사상을 실현시키고 있다. 너는 너의 삶의 주체라고 자본주의는 선언한다. 그래서 자본주의는 “돈이 없기 때문에 발생하는 너의 불행은 바로 너 때문이다. 너가 너의 삶의 주체니까.”라고 말한다. 인간 주체를 중심으로 놓는 서양 근대사상은 알다시피 객체를 점령하는 행위를 정당화 해왔다. 그렇다면 자본주의를 철폐했을 때 행복을 노래할 수 있을까? 현실 사회주의에서는 시인들이 그 체제에서의 삶이 구가하고 있는 행복을 정말로 노래하곤 했다. 아니, 사실은 행복을 노래할 것을 강요당했다. 시인들은 자기감정을 속여야만 했던 것이다. 자기감정을 속여야 하는 이들의 불행은 결국 현실 사회주의를 붕괴시켰다. 현실 사회주의 역시 주체와 객체의 이분법에 기초한 근대 사상을 바탕으로 역사의 주체를 상정했다. 그 주체는 프롤레타리아라고 선언되었지만, 결국 그 선언을 행한 당이 실상 역사의 주체가 되었다는 것은 다 아는 바다. 프롤레타리아는 주체가 되어야 한다고 당에 의해 강요당했을 따름이었다. 강요당하는 삶이 어떻게 자유롭고 행복할 수 있겠는가? 인간 주체를 우위에 두는 주-객 이분법의 근대사상은 개인을 주체로 놓는 자본주의나 당을 주체로 놓은 현실 사회주의 체제 모두에 작동되고 있었고, 그 결과 두 체제 모두 자연을 무분별하게 개발하여 심각한 환경 문제를 야기했다.   
현재 우리가 맞닥뜨리고 있는 자본주의의 전일화는 주체가 타인을 포함한 객체를 점령할 대상으로 여기게 만들어서 인간과 사물 및 인간과 인간 간의 관계를 파괴시키고 있으며 사고의 질료인 언어를 수단화한다. 이러한 관계 속에서의 삶이 행복해질 수 없음은 당연하다. 그래서 시인들은 여전히 불행을 노래하고, 더 나아가 주체-인간 중심주의를 회의한다. 주체-인간 중심주의에서 벗어날 때 대상과의 관계를 사랑으로 맺을 수 있고, 그때 역설적으로 우리는 우리의 삶을 정말 주체적으로 살 수 있게 될지 모른다. 대상을 점령하고 파괴해야 할 객체로 대할 때 도리어 삶은 그 객체에 의해 규정되고 속박되기 때문이다. 원래 삶은 더불어 살고 있는 것이다. ‘더불어’를 받아들이고 ‘더불어’의 관계 맺음을 창조적으로 만들어나가는 삶이야말로 주체적일 수 있다. 그래서 불행을 노래하고 주체-인간 중심주의를 비판하면서 대상과 새로운 관계를 맺으려고 하는 시인들은 진실로 주체적인 삶을 살기 위한 훈련을 시로써 행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제 살펴볼 신간 시집들인 정진규의 '껍질'과 정호승의 '포옹'은 모두 인간 중심주의를 비판하고 이에서 벗어나는 삶의 윤리를 모색하고 있다. 일찍이 정진규 시인은 '몸詩'를 상재한 1990년대 초부터 시에서의 자아 중심주의를 비판하고 주체-객체 이분법을 해체할 것을 주장했다. 이러한 사유를 더욱 진전시키고 발전시킨 시집이 '껍질'이다. 정호승 시인은 사랑의 상실과 희구를 서정적으로 노래함으로써 현대 사회에서의 파괴된 인간관계를 간접적으로 비판해 왔다. '포옹'에서는 사랑이 상실된 삶을 더욱 과격하게 아파하며 죽음에의 욕망까지 보여주고 있다. 더 나아가 인간 중심주의에서 벗어나 사물과의 관계를 재인식하고 재설정하려는 모습도 보여준다. 이 시집들을 읽으면서 시력이 사오십 년에 가까운 이 시인들의 시가 여전히 참신하고 생동감 있는 힘을 갖고 있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한 힘을 시에 갖출 수 있는 것은, 이 시인들이 신인 못지않게 세계를 날로 새로이 받아들이면서 또한 날카롭게 인식하고 예민하게 감각하려는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2.
정진규 시인은 '몸詩'를 상재하면서부터 대상을 자아가 조작할 객체로 다루지 않고 그 대상 자체(몸)를 몸으로 받아들이면서 자아와 대상의 촉각적인 ‘넘나듦’을 시에 실현시키려고 시도해 왔다. 시인은 그 시도를 밀고나가면서 '알詩', '도둑이 다녀가셨다', '本色', 그리고 이제 살펴 볼 '껍질' 등 독창적인 시집을 펴내게 된다. '몸詩'에서 시작된 정진규의 시에 대한 새로운 사상은 거론한 각 시집에서 더욱 깊고 예리하게 변환되고 있다. '몸詩'에서는 “시간 속의 우리 존재와 영원 속의 우리 존재를 함께 지니는 실체”인 ‘몸’(「자서」에서)을 발견하는 과정을 보여주었다면, '알詩'에서는 몸 중에서도 “그것 자체가 완성이며 원형”인 “하나의 小宇宙”인, “몸을 이루고 있는, 몸으로 경계를 지워낸 이 절대 순수생명체”인 ‘알’(역시 「자서」에서)의 발견을 보여주었다. '도둑이 다녀가셨다'에서는 도둑을 손님으로 부를 수 있는 이순耳順의 윤리학-섭생법攝生法을 모색하고 '本色'에서는 몸을 몸으로써 유지시키며 동시에 생성해나가는 몸의 리듬-이는 사물의 본색 중 하나일 터다- 등을 탐색했다. 시력詩歷이 50년이 다 되어가지만 정진규 시인은 어디에 안주하지 않고 자신이 발견한 무엇에 깊게 파고들어가는 정진을 멈추지 않는다. 참 부지런한 시인이다. 
신간 시집인 '껍질'에서 정진규 시인의 사유는 예전보다 더욱 예리하게 깊어졌다. 또한 시편들 한편 한편에 고전적인 품위와 가늠하기 힘든 깊이를 갖고 있어서 허술한 접근을 허락하지 않고 있다. 이전에는 볼 수 없었던 내용을 담은 시론인 「詩의 緣起本性에 대하여」는 역설적인 ‘필연적 우연’에 대한 시인의 사유를 보여준다. ‘연기설’이란 우연인 것처럼 보이는 어떠한 마주침도 그 안에는 운명적인 원인이 작용하고 있으며, 또한 그 마주침은 또 다른 마주침을 생성시킨다는 불교의 설법이라고 이해하고 있다. 하지만 이를 꼭 동양의 불교적인 사유라고 말할 필요는 없다. 연기설은 초현실주의자들이 말하는 ‘객관적 우연’과도 닮은 것이다. 여하튼, 기계적 인과론으로는 파악할 수 없기에 이해하기 난해한 이 연기는, 존재하지만 표면에 드러나지 않은 세계(가령, 무의식)에서 작동하고 있는 것일 게다. 초현실주의자들이 무의식 차원에서 작동하는 ‘객관적 우연’의 원리에 기대 예술을 창작했듯이, 정진규 시인 역시 이 시집에서 연기에 기대 시를 창작하고자 한다. 시인은 이 시론에서 “대상의 운명적인 緣起는 또 다른 緣起를 불러 그것을 생물론 빚는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작품은 쉴 새 없이 작품을” 부른다는 것과 “대상의 존재성은 쉴 새 없는 접속의 상태로 흐름 위에 무늬를 짓고 있”음을 깨달았다고 보고한다. 그리고 “그걸 보고 듣고 채취하는 즐거운 노동이 바로 시”라고 말한다.  
어떤 대상과의 마주침을 통해 보이지 않게 작동하고 있는 어떤 연기, 운명을 깨닫게 될 때, 그때 대상은 정진규 시인이 특유하게 규정하고 있는 상징이 될 것이다. 정진규 시인에게서 상징이란 물질의 옷을 입은 관념이 아니다. 상징은 실물, 즉 '몸詩」에서 일찍이 밝혔던 “시간 속의 우리 존재와 영원 속의 우리 존재를 함께 지니는 실체”다. 시인은 시 「별무덤」에서 일본 觀心寺에 있다는 별무덤 벽화에 대해 “형상이 아니라 필시 상징이 분명할 그 실체”라고 말한다. 언급한 시론에서는 이 시를 쓰게 된 내력을, 그 연기본성을 이야기하고 있는데 여기서 잠시 살펴볼만 하다. 불교 방송에서 하는 일본의 관심사에 대한 소개를 보면서 시인은 그 소개가 자신이 어젯밤에 보았던 책 '시인을 위한 물리학'의 내용과 무관하지 않다는 것을 깨닫는다. 우연한, 하지만 어떤 감추어진 운명이 작동하는 마주침이다. 이 마주침은 시인이 직접 관심사에 가서 그 벽화를 보도록 이끌었고 그 결과 「별무덤」을 쓰게 되었다. 실체인 일본 관심사의 별무덤 벽화는 그리하여 시인에게 연기를 감지하게 하는 어떤 상징으로 화한다. 그 별무덤 벽화는 “하늘과 땅이 한몸이 된 그 長大한 무덤”(같은 시)이라는 상징적인 의미를 갖게 되는 것이다. '껍질'에는 이러한 실체이자 상징인 대상들이 많이 등장한다. 가령 아래의 시 「달항아리」에서 ‘달항아리’라는 실체는 시의 창작과정, 즉 ‘運筆’의 상징이 된다.  

한여름 내내 천 개의 애벌구이에 한여름 내내를 쓴 적이 있다 붓이 잘 나가지 않았다 들끓는 나를 靑華로 달랜 적이 있다 자주 어지럽던 슬픔의 運筆을 구워낸 적이 있다 슬픔에 사흘 밤 사흘 낮 불을 지피자 항아리가 빚어졌다 슬픔이 항아리를 빚어냈다 터질 듯 달항아리로 떴다 속을 비워냈다 터질 듯 비워냈다 그때부터 그런 아궁이 하날 지니게 되었다 너는 떠나고 어제는 진종일 혼자서 장작을 팼다 이번 한여름에도 사흘 밤 사흘 낮 불을 때야 할 모양이다 슬픔의 運筆이 또다시 시작되었다 벌써 호되다  

자유로운 시상이 전개되는 이 시에서 일단 주목되는 시어는 ‘운필’이다. 이 시에서 한 편의 시를 써나가는 운필은 항아리를 구워내는 행위와 같다. 그런데 흙의 속을 비워내면서 항아리의 형을 만들듯이 시인의 시작에서는 생각의 속을 비워(“터질 듯 비워”내어) 시의 형을 만든다. 흙이 항아리의 질료라면 시의 질료는 언어, 언어로 이루어진 생각 자체일 것이기 때문이다. 사유하는 인간의 삶이 언어로 이루어져 있다고 한다면, 그 질료를 인간의 삶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다. 그렇다면 시인은 생각-인간으로서의 삶 자체-의 속을 비워 시의 형을 만든다. 그리고 저 낮은 곳에서 마음을 들끓게 하는 슬픔에서 애벌구이에 필요한 열을 가져온다. 이 운필의 과정은 이 시집을 여는 시 「삽」에서도 볼 수 있다. 이 시에서 그 비워내는 작업은 파는 작업으로 나타난다. 시인은 “땅을 여는 연장”인 “이 삽 한 자루로 너를 파고자 했다 내 무덤 하나 짓고자 했다”고 말하고 있다. 둥근 봉분의 모양은 항아리를 엎어놓은 모양이 아니겠는가. 인간으로서의 삶을 비워 항아리를 만드는 과정은 삽으로 땅(또는 ‘너’)을 열어(비워) 무덤을 만드는 과정과 유사할 터다. 그리고 삶이 다 비워진 무덤엔 껍질만 들어설 터다. “무덤 하나 짓고자”하는 과정 역시 항아리 만들기와 마찬가지로 인간으로서의 삶을 비워내는 과정인 시 쓰기라고 한다면, 시 쓰기는 “나를 염殮하”는 과정이다.   
그런데 정진규 시인은 「삽」에서 말의 오묘한 감각에 대해, 그리고 그 감각이 불러내는 상징에 대해 말하고 있어 주목된다. 즉, “삽이란 발음이, 소리가 요즈음 들어 겁나게 좋다”면서 “삽, 땅을 여는 연장인데 왜 이토록 입술 얌전하게 다물어 소리를 거두어들이는 것일까 속내가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음성-이 역시 물질적인 실체인데-을 세심하게 감각하고 그로부터 어떤 상징적 의미를 이끌어내는 장면은 「꽃 피는 시절」에서도 만날 수 있다. 그 시에서 시인은 “시를 쓸 때 그때마다 나는 꽃이 된다”면서, “꽃 핀다 그리고 이렇다 꽃, 사람인 내가 스스로 잡을 수 없는 중심, 꽃의 ‘ㅗ모음’이 시방 넓고 깊게 상처를 안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 소리내보라 시방 세상이 다 빨려 들어가 있다”고 꽃이라는 말의 음성 감각에 대해 말한다. 그리고 시는 “최초의 향기로 열리기 때문”에 이 “황홀한 상처”인 꽃과 같다고 말한다. 이 항아리처럼 움푹 파인 꽃이 시라면, 그 시는 꽃이란 문자의 “잡을 수 없는 중심”인 ‘ㅗ모음’을 통해 상처가 빨려들어 피어난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 입술이 동그랗게 오므라지는 ‘ㅗ모음’은 “온몸이 뚫려 있는”, “온몸이 문”인 “정직한 象形文字”(「나는 자꾸 音樂을 꺼내겠다」) ‘동그라미 살’을 연상시킨다. 항아리와 무덤, 꽃의 동그란 모양이 바로 그 정직한 상형문자일 터, 그렇다면 시란 온몸이 뚫려 있어 세상의 모든 것과 드나드는 무엇이라 하겠다. 이 뚫려 있는 동그라미에 대한 사유가 예전 정진규 시에서 더 진전된 새로운 차원을 열고 있다고 생각되는데, 시인이 이 뚫린 구멍을 통해 몸- 시가 만들어질 수 있다는 깨달음을 가져오고 있기에 그렇다. 예전 시집에서보다 '껍질'은 동사의 세계가 더 많이 있다. 연기의 시론에서 볼 수 있듯이, 이 시집에서 시인은 몸의 발견, 완성된 몸인 알의 발견, 사물의 본색의 발견을 넘어 세계에서 발생하는 움직임들의 원리를 찾아내려고 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 일환으로 시인은 “온몸이 뚫려 있는” 동그라미라는 상징을 발견하여 몸이 만들어지는 과정에 주목한다. 「새는 게 上策이다」는 그 과정을 밑받침하는 원리에 대해 진술하고 있다고 생각된다.  

새지 않으면 소리가 되지 않는다 음악이 되지 않는다 노래가 되지 않는다 구멍으로 새어야 소리가 된다 막히면 끝장이다 한 소식도 들을 수 없다 새는 게 상책이다 새지 않으면 사랑도 되지 않는다 몸을 만들지 못한다 새끼를 만들지도 못한다 막히면 끝장이다 새는 게 上策이다 달도 뜨지 않는 그런 여자 하나가 바다가 출렁대지도 않는 그런 여자 하나가 오지도 않는 보름사리 때를 부르며 슬피 울고 간다 새는 게 上策이다        

정진규 시인은, 이 뚫린 동그라미를 통해 무엇인가 “새지 않으면”, 어떠한 몸도 만들어질 수 없다는 것을 발견한다. 샐 수 있는 구멍이 있어야 소리가, 노래가 만들어질 수 있다. 이 구멍이 없으면 사랑도, 몸도, 새끼도 만들어낼 수 없다. 이 구멍, 뚫려 있는 동그라미는 온 몸이 뚫려 있어 세상을 다 빨아들일 수 있는 황홀한 상처인 꽃과 같을 터, 그것은 또한 ‘새끼’를 낳는 여자의 음문이기도 할 것이다. 즉 시는 여자의 음문과 같다. 그렇다면 시인은 삽으로 그 상처인 구멍을 파고, 그 구멍을 통해 자신의 삶을 새어나가게 하여 “터질 듯 비워”내는 일을 하고 있는 셈이다. 다시 말해 시는 성행위와 같다. 그런데 시인은 「껍질」에서 “어머니로부터 빠듯이 세상에 밀려 나온 나는 또 한 번 나를 내 몸으로 세상 밖 저쪽으로 그렇게 밀어내고 싶다”고 욕망하면서 “나의 구멍은 어디인가 나갈 구멍을 찾고 있다 쉽지 않구나 어디인가 빠듯한 틈이여!”라고 안타까워한다. 시를 쓰고자 하는 욕망이 자신의 삶, 자신의 몸을 세상 밖으로 밀어내고 싶은 욕망이라면, 그 욕망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몸에 어머니의 산도와 같은 황홀한 상처, 몸이 새어나갈 수 있는 구멍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시를 쓰기 위해서는, 시인은 여자의 몸을 갖고 있어야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정진규 시인의 시 쓰기는 자신의 몸에 여자의 음문을 파는 행위이기도 하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하나의 시 쓰기가 완성될 때 시인의 몸은 안의 몸이 다 빠져나가고 결국 “온전한 껍질”로만 남게 될 것이다. 그런데 시인은 빠져나간 몸에 주목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이 껍질에 주목한다. 그 껍질은, 시인이 「마른 들깻단」에서 말하듯이 “잘 늙은 사람내”가 나는“다 털고 난 마른 들깻단”과 같을 것이다. 그 들깻단에서 시인은 “저러히 반짝거”리는 슬픔을 보고 있다. 삶을 이루었던 몸을 다 밀어내고 난 후 남은 껍질에서 ‘늙음’이 가질 수 있는 슬픈 아름다움을, 시를 시인은 발견하고 있는 것이다. 이 시집에서 시인이 아픔을 토로하며 죽음에 가까이 다가가고 있는 시들이 많은 것은 이와 관련 있을 것이다. 정말 삶을 다 내놓아 껍질만 남았을 때 몸은 죽음과 맞닿아 있게 될 테니까 말이다. “저 황홀! 저승까지 몸 적시는 劇藥들, 꽃밭에 함부로 들지 마라 全生이 끝나고 있다”(「櫻花」 전문)고 시인이 경고할 때, 이는 바로 꽃밭에서 시를 써왔던 시인 자신의 경험을 이야기하는 것일 게다. 저 황홀한 상처인 꽃들, 즉 시들. 그 시를 지으면서 시인은 점차 껍질이 되어가고, 전 생애가 끝나가고 있다는, “크고 두려운 무게로 나를 가두고 떨리게”(「비극에 대하여」에서)하는 예감에 사로잡히게 된다. 하지만 이 두려운 예감 속에서도 시인은 어떤 능력을 얻게 된다. 그것은 “신열에 들뜬 꽃 핀 몸으로 외나무다리를 건너”본 후 짐작하게 된 “神通의 길 하나”를 “드나들”(「죽음」에서) 수 있는 능력이다. 이 능력을 바탕으로 시인은 계속 시를 쓰게 될 터인데, 그것은 「山菊」에서 시인이 하는 말에 의하면 “아직 다 내놓지 못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아직 무게가 나간다 가뿐하게 일어서 떠난 당신들의 뒷모습이, 하얀 고무신 뒤꿈치가 한참 보인다 비탈길 오른쪽으론 어머니의 진솔 버선목이 보인다 혼자 남았다 아직 다 내놓지 못했다 다 물어내지 못했다 조금 더 있어보자 여름이 한참 가고 있다 아직 몸이 비둔하구나 누더기가 되었다 누더기는 무게가 나간다 잘 개켜지지도 않는다 지난밤 나를 개키며 밖을 내어다본다  임박했는가 오늘은 하얀 山菊이 피었다

시인은 “가뿐하게 일어서” 저 세상으로 간 “당신들의 뒷모습”을 이젠 볼 수 있다. 저 세상에 계신 어머니의 “진솔 버선목”도 볼 수 있다. 하지만 혼자 남은 시인은 아직 “몸이 비둔하”다. 아직 온전한 껍질이 되지 못하고 “잘 개켜지지도 않는” 누더기로 남아 있을 뿐이다. “아직 다 내놓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세상에 “조금 더 있어보자”고 다짐한다. 하지만 무엇이 “임박했”다는 예감-아마도 죽음에의 예감일 것이다- 속에서 말이다. ‘임박했다’는 느낌은 무엇인가가 자신 쪽으로 다가오고 있다는 긴박감이다. 「立春․2」에서 시인이 “못 견디게 몸 조이는 그게 온다”고 했을 때의 그 느낌이다. 다가오는 ‘그게’는 ‘벼랑’이다. 벼랑-죽음의 임박-에 있다는 느낌 속에서, 죽음의 세계와 넘나들면서 시인은 시를 쓰며 삶을 질기게 이어나간다. 하지만 시인은 이 삶에 대하여 “시들시들한 게 오히려 질긴 바 있다 죽어가는 것들의 질기게 꼴림!”이라고 말한다. 여전히 이 삶은 “질기게 꼴”릴 수 있는, 욕망에 반응할 수 있는 몸을 갖고 있다. 그리고 이 삶은 마른 들깻단처럼 슬픔으로 반짝이는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어머니의 저승 냄새”(「저승새들의 집」에서)를 맡을 수 있게 된 시인은 저 세상과 이 세상 사이를 드나들기 위하여 그 사이의 허공에 거주하게 된다. 「새들은 왜 발 아래 허공 벼랑을 두는가」에서 시인은 “天上을 드나들자면 죽음을 드나들자면 허공 벼랑을 차고 오르는 힘, 그만한 높이가 필수”라면서 “사람들도 곳곳마다 높은 자리마다 하늘다락을 올려” 짓는데 “나도 사랑의 벼랑 끝에 누각 한 채 지어 놓고 서성이다 세월만 탕진했다 天上에 계신 어머니께서 다녀가신 흔적만 겨우 몇 번 짚었다”고 말하고 있다. 지상과 천상 사이에 있는 벼랑 끝 누각이 바로 시인이 거주하는 곳이다. 아직 시인은 완벽하게 천상과 왕래하지는 못하지만, 임박한 죽음과 삶 사이에서 아슬아슬하게 살아나가면서 천상의 어머니가 다녀가신 흔적들을 찾아낼 수는 있게 되었다. 죽음의 임박을 예감하면서 「죽음을 경배하며」에서 시인이 말한 “이승과 저승을 함께 묶은/함께 쓰는” 시를 써나가는 것, 결국 삶이 무덤으로만 남게 되는 그날 까지 무덤과 같은 시를 짓는 것. 이것이 정진규 시인의 시작의 현재라고 말할 수 있겠다. 앞으로 어떻게 시인의 시세계가 전개될지 모른다. 정진규는 탐구를 멈추지 않으면서 새로운 세계를 발견하고 구성해나가는 부지런한 시인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이 삶과 죽음 사이의 벼랑 끝에 아슬아슬하게 거주하면서 행하는 운필을 바탕으로 또 다른 시세계가 열리지 않겠는가 짐작해본다. 앞에서 잠깐 언급한 「죽음을 경배하며」는 매우 아름다운 시로, '껍질'의 세계를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시라고 생각하여 전문 인용해본다. 

鐘 하나가
하늘과 땅 사이
온몸 파르르 떨고 있다

하늘이다
새들이 왕래하고 있었다 새들의 발톱들이
깊은 글자로 할퀸 不立文字들을
몇 구절 解讀했다
이승과 저승을 함께 묶은
함께 쓰는 
結繩文字라는 게 있구나

밤이 되면 다만 
반딧불이들이 몸으로 반짝거렸다
무덤을 날고 있었다
길을 비추어주고 있었다
아직 조금 남은 길을 가고 있는 모양이었다

관능이 은유를 지우고 은유가 관능을 감추었던
고단했으리
一生이 끝이 났다
벗어 두고 간 모자 하나로 남았다
또다시 은유로 태어났는가
봉분 하나로 남았다
다 건넜는가
오늘 그의 뱃전에 달빛 부서진다
비로소 몸이 풀린다      
        
3.
정호승 시인은 알다시피 사랑과 슬픔, 희망을 주제로 한 따스한 서정시를 써오면서 독자들의 많은 사랑을 받아 왔다. 그런데 신작 시집 '포옹'에서는 예전의 시세계와는 다소 다른 세계를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된다. 이 시집의 시는 예전보다 더 비관적인 색채가 농후하다고 느껴진다. 그리고 더 암시적이고 상징적인 단시도 꽤 보인다. 이렇게 의미가 압축되어 난해한 시는 정호승의 시에 그다지 많지 않았다고 기억한다. 시인의 삶에 어떤 고통이 닥친 것일까. 시인과 개인적으로 알지 못하는 필자로선 이에 대해 알 순 없지만, 시를 보면 시인이 현재 힘들어하고 있다는 것을 짐작하게 된다. 물론, 글의 서두에서 말했듯이, 시인의 고통은 개인적인 차원에서가 아니라 사회적인 차원, 또는 철학적인 차원에서 사유되어야 한다. 시인의 고통은 사회적인 불행을 가리킨다. 하지만 또한 시인 개인의 주체성 역시 시 읽기에서 사유되어야 하기에, 이 시집에서 보여주는 시인의 세계 인식과 고통의 특이성, 그리고 그 고통을 극복하려는 시인의 노력도 같이 사유되어야 할 것이다. 시집에 첫 번째로 실린 시 「빈틈」부터 읽어보자.  

살얼음 낀 겨울 논바닥에
기러기 한 마리
툭 
떨어져 죽어 있는 것은
하늘에 
빈틈이 있기 때문이다

시인이 말하려는 바를 언뜻 알기 힘든, 앞서 말한 암시적이고 상징적인 단시다. 하지만 죽음에 대해 말하고 있는 시인의 어조가 암울하다는 것은 느낄 수 있다. 시인은 죽은 기러기를 묘사하고, 이 기러기의 죽음과 하늘의 빈틈을 인과 관계로 엮고 있다. 도시 위의 인간이 맨홀에 빠져 죽듯이 하늘에도 빈틈이 있어 날아가는 새들이 그곳에 빠져 죽은 것일까. 이 시를 「끈」과 같이 읽으면 시인이 말하려는 바를 좀 더 짐작할 수 있다. 「끈」에서는 “가는 발목에 끈이 묶여/날지 못하는” “한 마리/저 땅 위의/새”가 등장한다. 이 새는 “오가는 행인들의 발길에 가차 없이 차이”지만, “푸른 하늘조차 내려와 도와주지 않는”다. 여기서 하늘은 도와줄 수 능력이 있는 주체, 즉 신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시인은 저 새들의 죽음이 신의 ‘빈틈’ 때문에 일어나고, 속박당한 새를 신이 도와주지 않는다는 사실에 분노하고 있을지 모른다. 여하튼 신이 거주하는 천상의 공간, 하늘도 이 두 시에서 완벽한 구원의 장소가 아닌 것으로 드러난다. 현실에 기초한 종교적인 사유를 해왔던 정호승 시인의 신앙에 어떤 회의가 온 것일까? 구원의 희망을 좀처럼 찾지 못하겠다는 비관적인 의식이 이 시들에 깔려 있는 것이다.
죽어 있는 새, 저 묶여 있는 새는 물론 현재를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의 삶도 지시해주고 있다. 그의 비관은 도저히 출구를 찾지 못하는 사람들을 양산하고 있는 한국 사회의 현실에 대한 비통에서 비롯된 것이기도 하다. 「전깃줄」에서 “우리 세 식구 영원히 함께할 수 있도록 줄로 묶고 갑니다”는 유서를 쓰고 전깃줄로 몸을 묶고 죽은 “어느 젊은 아빠”의 모습이 바로 죽어 있는 새와 묶여 있는 새를 합친 이미지다. 비상할 수 있는 젊은 나이에 그 아빠는 스스로 전깃줄을 묶고 아이들과 함께 죽어야 하는 현실. 그 가족은 주택가 셋방에 살고 있었던 것으로 보아 무척이나 가난했을 것이다. 가난한 그들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주체는 사람들을 “알만 낳고 살”다가 결국 “통닭이 되는 일 외엔 아무 일도 남아 있지 않는”, “거죽만 남은 폐계”(「폐계」)처럼 취급하는 세상이다. 세상에 의해 폐기되어 좌절하는 사람들과 같은 시대를 산다는 일은 감성이 예민한 시인에게 비통한 마음을 갖게 했을 것이다. 게다가 아래의 시 「걸인」에서처럼 정호승 시인은 이들과 공명하면서 이들로 변환되는 자인 것이다. 

나는 그대의 불전함
지하철 바닥을 기어가는 배고픈 불전함
동전 한닢 떨어지는 소리가 천년이 걸린다
내가 손을 내밀지 않아도
내 손이 먼저 무량수전 마룻바닥을 기어가듯
천년을 기어가
그대에게 적선의 손을 내미나니
뿌리치지 마시라 부디
무량수전이 어디 부석사에만 있었던가
우리가 흔들리며 타고 가는 지하철
여기가 바로 무량수전 아니던가
나는 그대의 불전함
다 닳은 타이어 조각을 대고 꿈틀꿈틀 무릎도 없이
지하철 바닥을 기어가는 가난한 불전함
동전 한닢 떨어지는 소리가
또 천년이 걸린다
  
종교적인 공간은 특정한 장소에 있는 것은 아니다. 종교적인 구원은 사찰이나 교회에서만 이루어지지 않는다. 바로 지하철 안에서도 이심전심의 공간이 만들어질 수 있고, 동전 한 닢에도 천년을 넘나드는 불심의 실현이 이루어질 수 있다. 물론 대개의 사람들은 특정 장소에서만 종교적인 인간으로 변하고 일상 공간에서는 싸늘한 현대인으로 돌아와 산다. 시인은 자신이 지하철 바닥을 기는 저 폐기된 인간으로 변모하여 자신이 불전함이니 바로 이 자리에서 종교적인 마음을 실현시키라고 사람들에게 말한다. 물론 바로 무릎 없이 지하철 바닥을 가고 있는 사람을 보고 시인은 저 돈바구니가 불전함이로구나 생각하게 되어 시를 썼을 것이다. 그런데 화자가 ‘나’로 설정되면서, 종교심을 갖고 있는 시인과 저 걸인은 상호 변환될 수 있게 된다. 시인은 저 폐기된 걸인의 절망과 고통을 대리체험하기 시작하고 그로부터 벗어나기 힘든 현실에 깊이 비탄하게 된다. 시인의 “지금까지 내가 살아온 것은/바다가 보이는 여관방에 누더기 한 벌 걸어놓은 일이라”(「누더기」)는 다소 자학적인 발언은 좌절한 사람들이 되어보면서, 그리고 그 역시 정말로 좌절하게 되면서 감당해야 했던 마음의 고통 때문에 나온 것일지 모른다. 
더 나아가 시인은 자신의 죽음에 대한 욕망을 품게 되기도 한다. 그것은 감당하기 힘든 그 고통으로부터 벗어나고파서일 것이다. 예를 들어 보면, 시인은 「가방」에서 “나를 가방 속에 구겨넣고 출근할 때가 있”는데, “가방 속에 구겨져 있으면 인간이 되지 않아서 좋”으며 “나는 가방이므로 더 이상 대출상환금을 갚지 않아도 좋다”(「가방」에서)는 진술에서 그 욕망을 찾아볼 수 있다. 인간 사회 속의 삶보다 그냥 사물로서의 삶이, 어떠한 거짓도 하지 않아도 되고 돈을 벌어서 빚을 갚아야 하는 의무도 지지 않아도 되기에 시인은 더 좋다는 것이다. 소망이 보통 상승의 욕망을 품는 것을 의미한다고 할 때, 구겨진 가방이 되고 싶다는 소망은 소망의 전도라고 할 수 있겠다. 저 만물의 영장 인간에서 추락하여 구겨진 가방이 되고 싶다니! 하지만 이러한 전도된 소망은 결코 비현실적이지 않다. 피곤한 몸을 이끌고 온갖 걱정을 품은 채 지하철을 타고 출근하는 사람이라면, 저 무심하게 구겨진 사물들이 되고픈 생각을 가지지 않는 사람이 과연 있을까? 인간으로 태어나기 이전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소망, 자극에 반응하지 않아도 되는 사물로 돌아가고 싶다는 소망은 죽음에의 욕망이라 할 것이다. 이 시에서도 시인은 “한강대교 아래로 휙 내던져져 물속 깊이깊이 가라앉아 가다가/고요히 나를 찾아온 물고기들과 뜨겁게 키스를 나누었을 때/나는 그 얼마나 행복했던가”라고 말한다. 물속으로 들어가고 싶다는 욕망은 알다시피 자궁 회귀 욕망이고 태어나기 이전의 상태로 소멸하려는 욕망이다. 
소멸에의 욕망은 사막여우를 따라 “사막의 사막 속으로 도망쳐버”리고 “너의 먹잇감이나 되어”(「사막여우」에서)주고 싶다거나, 더 극단적으로는 “잔설이 남아 있는 낙엽더미에” “고요히 덮여 있”는 시체가 되어 발견되고 싶지 않다는 기원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하지만 이러한 욕망이 삶에 대한 욕망을 마냥 저버리는 것은 아니다. 프로이트가 지적했듯이 타나토스와 에로스는 뒤섞여 나타난다. 시인이 죽음에 접근하는 것은 “누구를 믿어야 죽어도 살까”(「옥산 휴게소」에서)라는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서다. 시인은 새로운 삶을 욕망하기 때문에 죽음을 욕망하는 것일지 모른다. 새로운 삶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기존의 삶이 파괴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 죽음-삶을 시인은 관과 함께 타는 꽃에서 발견하고 있는 것 같다. 타버린 꽃은 “이미 쓰레기”일 테지만, 그 “꽃은 쓰레기가 되면서 비로소 꽃을 피운다”고 「꽃을 태우다」에서 시인은 말하고 있다. 그 불의 “꽃이 만든 저 모닥불”에 “어린 상주들이 다가와 언 몸을 녹”일 수 있으며, “내리자마자 불길 속으로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저 눈송이들”은 그 불‘꽃’에 용해되면서 “봄이 오면 다라니 경을 읽으며/제비꽃으로 피어나 수줍게 웃”을 것이기 때문이다. 죽은 자와 더불어 죽으면서 다시 사는 꽃들처럼, 정호승 시인도 죽음으로 이끌리는 사람들과 더불어 죽으면서 새로운 삶을 살 수 있길 바라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면 어떤 삶을 죽여야 할 것인가? 정호승 시인은 ‘인간’의 삶을 버리고자 한다. 글의 서두에서 언급한 바 있는, 근대 사상의 바탕이 된 ‘인간 주체’를 버릴 것. 시인이 「물길」에서 말하듯이 “슬픈 인간의 길을 다 버리고/물의 길을 따라가는/어린 물고기를 따라”가기, 혹은 「나는 물고기에서 말한다」에서 말하듯이 “기어이 인간을 버리고 혼자 울고 싶을 때/나는 강가로 나가 물고기의 허리를 껴안고” 울기. 그렇다면 물고기의 길은 어떠한 길인가? 그것은 침묵의 길이다. 같은 시에서 시인은 물고기들은 “침묵 외에는 그 어떠한 말도 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물의 길을 살아내기란 물고기의 침묵, 그 말 없는 말이라는 역설을 살아가는 것이다. 이 역설의 삶은 “넘어지지 않으려고 할 때만 꼭 넘어”지고, “넘어져도 좋다고 생각하면 넘어지지 않”는 삶의 역설을 깨닫고 “일으켜 세우기 위해 나를 넘어뜨리고/넘어뜨리기 위해 다시 일으켜 세”(「넘어짐에 대하여」)우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그것은 또한 “돌파구는 밖에서 누가 열어주는 것도 아니고/안에서 누가 열 수 있는 것도 아”니어서 “마음을 열어놓고 기다리면/스스로 열리는 문”(「돌파구」)이라는 이치를 깨닫는 삶이기도 하다. 혹은 다음과 같이 벽에 걸리는 ‘인간의 삶’이 아니라 벽 자체가 되는 삶이다. 

나는 나를 벽에 걸어놓아야만 벽이 아름다워지는 줄 알았다
내가 벽에 걸려 있어야만 인간이 아름다워지는 줄 알았다
밤하늘이 아름다운 것은
스러져 보이지 않는 별들 때문이라는 것을 알지 못하고
캄캄한 내 눈물의 빈 방에
한줄기 밝은 햇살이 비치는 것은 
사라져 보이지 않는 어둠 때문이라는 것을 알지 못하고
빈 벽이 되고 나서 비로소 나는 벽이 되었다
― 「빈 벽」 부분
   
근대에서는 빈 벽과 같은 자연 세계에서 인간이 도드라져 나오는 과정이야말로 인간 역사의 의미요 인간의 아름다움이라고 생각되어 왔다. 가령 근대인은 도심의 웅장한 빌딩 숲을 보면서 아름다움을 느끼며 인간의 거대한 힘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곤 한다. 이러한 인간주의는 개인의 내면에도 각인이 되어, 사람들은 대개 자신의 삶의 의미요 아름다움은 흰 벽과 같은 배경 위에 자신을 화려하게 드러내는 것을 성취하는 데 있다고 생각한다. 시인 역시 자신도 그렇게 생각해왔다고 말한다. 하지만 시인은 햇살의 아름다움은 어둠 때문이요, 밤하늘의 아름다운은 “스러져 보이지 않는 별들 때문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이에 따르면 바로 이 무색의 배경인 빈 벽 덕분에 인간인 ‘나’의 아름다움은 발견될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정작 아름다운 것은 바로 이 아무 것도 없는 빈 벽이 아닌가. 
물고기를 따라가는 길이란 아마도 이 침묵하는 말인 빈 벽이 되는 길이리라. 그것은 인간의 일상사를 지탱해주는 배경인 사물이 되는 것이다. 여기서 놀라운 인간적 시각의 전복이 일어난다. 인간을 둘러싼 사물들, 인간의 필요에 특정하게 봉사한다는 목적을 위해 만들어진 사물들이 인간의 실존적인 삶을 지탱시킨다는 시각이 그것이다. 사르트르는 사물의 본질은 그 목적에 있다고 하고 이에 인간의 실존을 대립시켰다. 하지만 정호승 시인의 사유에서는 필요에 따라 사용되다가 폐기되는 사물들은 사실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인간과 다를 바 없는 것이다. 그런데 더 나아가 정호승의 사물들은 빈 벽처럼 인간의 실존을 지탱하고 뒷받침한다. 그래서인지 그러한 사물들은 따듯한 마음을 가졌다. 앞에서 인용했던 「전깃줄」에서 일가족의 자살에 쓰였던 전깃줄은 “그들이 함께할 수 있도록 끝까지 묶어주지 못한 일이 안타까워” 한다. 
좌변기는 어떠한가? 좌변기는 「좌변기에 대한 고마움」의 시구를 따른다면 “내 어머니의/또 다른 육체”이다. 시인은 좌변기가 “이 세상 모든 어머니의/자궁의 일부로 만들어졌다”면서 좌변기에 감사드린다. 좌변기는 그의 삶을 어머니처럼 품어 지탱시켜주는 존재다. 좌변기에서 어머니를 보는 시인의 상상력에서는 시인이 벽과 같은 사물이 되지 않으라는 법이 없는 것이다. 더 나아가 “냉장고가 내 아내고 세탁기가 내 딸이”며 “어떤 날은 텔레비전이 내 아들이고 늙은 소파가 내 어머니”(「집 없는 집」에서)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 벽이 된 시인은 저기 침묵한 채 놓여 있는 사물들과 가족과 같은 교감을 할 터이다. 사물들의 말 없는 말을 들을 수 있을 터이다. 이리하여 정호승 시인은 자신 속의 인간을 죽여 사물로서 다시 새로 태어나게 되었다. 이 새로운 삶은, 저기 던져져 침묵하고 있는 사물들, 동물들, 폐계들, 자살을 생각하는 자들, 좌절한 자들, 장애우들, 걸인들, 노숙자들로부터 말 없는 말을 듣고 그들에게도 말을 걸어 교감할 수 있는 삶이 될 것이다. 시인은 이 새로운 삶이 가져올 생활을 「수화합창」에서 다음과 같이 행복한 어조로 진술하고 있다. 전문 인용해 놓는다.    

봄비를 맞으며 걸어가는 초등학생들의 맑은 발소리를 듣는다
봄눈을 맞으며 보리밭을 밟는 아버지의 다정한 발소리를 듣는다
햇살을 보고 살며시 웃음 터뜨리는 아침이슬들의 웃음소리를 듣는다
한순간 정신없이 퍼붓는 소나기에 나뭇잎들이 장난을 치며 목욕하는 소리를 듣는다
나무들과 뜨겁게 사랑을 나누는 참매미들의 요란한 합창소리를 듣는다
절벽에 부딪혔다가 슬쩍 웃으면서 물러나는 수줍은 강물소리를 듣는다
나뭇가지에 앉은 새들이 일제히 나뭇가지를 흔들며 떠나가는 소리를 듣는다
가랑잎들이 굴러가다가 사람들 발에 밟혀 우는 소리가 들린다
오솔길을 기어가는 달팽이들이 사람들의 발에 소리 없이 밟히는 소리가 들린다
번개 몰래 심심하면 먹구름을 때리는 천둥소리가 들린다
엄마를 찾아 산그늘로만 산그늘로만 날아다니는 아기 산새의 울음소리가 들린다
달빛과 별빛이 서로 손을 꼭 잡고 잠드는 소리가 들린다


이성혁∙1999년 ≪문학과 창작≫ 2003년 <대한매일> 신춘문예로 등단. 평론집 불꽃과 트임. 현재 한국외국어대학교, 세명대학교 출강.
추천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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