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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호 서평/오순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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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김윤식, 청어의 저녁(서정시학)
■김완하, 허공이 기르는 나무(천년의 시작)
■최금진, 새들의 역사(창작과 비평)
존재의 극점들-물고기, 허공, 달빛
오순영|문학평론가
1. 죽음-실존의 기관들 또는 형태론적 욕망
김윤식의 시집, '청어의 저녁'에는 숱한 바다 생물들의 이름들이 등장한다. 이 한 권의 시집이 모두 바다 생물들에 관한 기록이다. 시적 대상을 결정하는 것 자체가 시적 행위이며, 그들 통해 의미를 생성하고 궁극적으로 하나의 세계를 창조하는 것은 시적 행위의 오랜 근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먼저 김윤식이 바다생물들을 시적 대상으로 설정한 이유를 물어야 하며, 다음으로 그것이 어떤 의미와 세계를 생성하는지 생각해야 한다.
김윤식의 시 속에서 시적 자아는 바다 생물들과 일정한 구도적 관계를 설정한다. 사실 그러한 관계 설정은 그 특이한 바다생물들의 이름만큼 낯선 것은 아니다. 시를 구도의 행위를 위한 방편으로 삼는 것, 즉 시를 통해 깨달음에 이르는 것은 오랜 동양적 시 전통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시적 대상인 사물 자체의 존재론적 의미를 탐색하거나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는 행위는 결국 시적 대상의 근원 또는 본질에 다가가거나 그것을 새로운 좌표 위에 그림으로써 의미론적 생성의 장을 만드는 것이다. 그러므로 김윤식의 시 속에 등장하는 숱한 바다생물들은 시인의 실존 속에 새롭게 배치된 것이다.
김윤식의 시 속에서 무수한 바다생물들은 바다의 기관이며 나아가 시적 자아의 기억과 슬픔이나 고독, 그리고 초월의 기관이다. 시적 자아는 바다생물과 자신을 동일시하거나 그 안에서 자신을 발견한다. 각각이 하나의 기관인 바다생물들은 시적 화자의 피부이거나 촉수나 뼈대/갑각이다. 이를테면 시적 화자는 꼼치의 흐물흐물한 살집과 일정한 모양을 갖추지 못한 몸에서 특별한 존재 방식을 발견하며 ‘흐물흐물한 내 몸, 팔다리, 머리 겨드랑이, 옆구리, 가랑이’가 곰치가 되어 흐물흐물한 고독 속에 죽고 싶어 한다.(「꼼치에 대하여」) 또 시적 화자는 미더덕의 입에서 나는 향내와 움츠린 듯 울퉁불퉁한 껍질 속에서 肉感을 느낀다.(「미더덕에 대한 의미 분석」)
한번 꼼치의 몸을 가지고 싶다. 흐물흐물 살고 싶다. 흐물흐물 네게로 가서 네가 되고, 흐물흐물한 정신이 되었다가, 연꽃이 되었다가, 차를 타고 속초로 갔다가, 흐물흐물 드러누웠다가, 창문을 열고 생각하다가, 흐물흐물한 내몸, 팔다리, 겨드랑이, 옆구리, 가랑이 모두 흐물흐물 네게로부터 돌아와, 이윽고 꼼치가 되어 다시 흐물흐물 녹아내린 뒤 가장 흐물흐물한 고독 속에서 죽을 때가 되어, 어느 어부의 그물에나 척 하니 걸리고 싶다
― 「꼼치에 대하여」 중에서
이러한 형태론적 탐색은 사실 시인 자신의 형태론적 욕망이며 들뢰즈의 ‘동물-되기’의 작동방식과 유사하다. 들뢰즈의 ‘되기(becoming)’ 즉 생성은 하나의 결연(alliance)으로서 생성의 블록을 형성한다. 인간이 자신의 총질량보다 더 많은 질량의 박테리아와 연속적인 슈퍼 유기체이듯이 결연을 통해 생성의 블록을 형성해 나가는 것이 들뢰즈가 말하는 동물-되기인 것이다. 그러므로 들뢰즈의 ‘동물-되기’는 궁극적으로 자아 또는 주체를 무화시키게 된다. 그러나 김윤식의 시에서 서정성의 주체는 사라지지 않는다. 다만 그 형태론적 욕망 속에 이차적인 의미들을 생성해내며 그 의미들은 다시 서정의 주체인 시적 화자에게로 회귀한다. 그런 의미에서 김윤식의 시는 전통적인 서정시의 어법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체에서 의미생성으로, 그리고 다시 주체로 회귀하는 과정 속에서 주체의 복수화가 이루어진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시적 화자인 ‘나’의 형태론적 욕망은 필연적으로 시적 주체를 복수화하는 바 복수화 된 시적 주체의 목소리는 바다생물들 자신의 육성으로 발화되기도 한다. 시적 화자인 ‘나’와 갈치나 개불 또는 청어 등이 스스로 발화의 주체로 등장하는 그 ‘나’는 서로 동치이다. 화자인 ‘나’는 갈치이거나 개불이거나 고등어인 것이다. 「고등어」와 같은 시는 자칫 시적 화자가 사람인 ‘나’인지 고등어인 ‘나’인지 분간하기 어렵다.
① 고독만이 내 것인가. 강원도 황지 검은 숲길로 가는 마을 어귀 빈집 담벼락에 불현듯 내가 비스듬히 기대어 나를 바다처럼 바라보고 있었다. ② 내 것이 아닌 것은 내 몸뚱이 위에 피었다 지는 소금 꽃 같은 것이려니. 알몸으로 떠난 고단한 꿈같은 것이려니. ③ 어떻게 여기까지 따라왔소? 청산에 등을 대고 나그네처럼 여기서 잠들고 싶었소. ④ 출렁출렁 어느 곳엔들 왜 물결이 가 닿지 않으랴. 오오, 푸른 고등어여. 허위허위 헤엄쳐 온 산비탈, 달빛이 쓸고 있는 환한 行旅, 그 고독만이 꿈결 같은 나그네의 것이다.
― 「佐飯 고등어」 전문
「佐飯 고등어」에는 적어도 4가지 국면의 언술 형태가 존재한다. ①에서 ‘내’가 ‘나’를 바다처럼 바라볼 때 바라봄의 주체(S)와 바라봄의 대상(O)은 분리되어 있다. ‘나’가 주체인 동시에 객체이므로 여기서 ‘나’는 사람인 ‘나’와 고등어인 ‘나’로 분리될 수도 있으며 둘 다 사람인 ‘나’들일 수도 있고 둘 다 고등어인 ‘나’들일 수도 있다. 그러나 ‘내 것’이 아닌 것이 ‘내’ 몸뚱이 위에 피었다 지는 소금꽃 같은 것이라는 시적 진술 ②는 다시 대상/객체(O)가 대상/객체에 대해 진술하는 것으로 읽혀야 할 것이다. 객체가 객체에 대해 진술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따라서 바라봄의 대상이 발화의 주체로 전환된 것으로 봐야 한다. 그런데 ③에서 애초 주체와 객체는 대화의 주체들이 된다. 대화 속에는 주객의 관계가 아니라 다성성이 존재하므로 주객의 관계는 소거되었다고 봐야 할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 ④의 국면에서 발화자는 고등어의 고독에 대해 얘기하는 사람 화자인 ‘나’이다.
이러한 주체와 객체의 변전을 통해 시적 화자는 바다생물들을 그 자신의 실존의 기관으로 만들어 나가며 시적 의미를 생성한다. 시적 화자의 형태론적 욕망의 대상인 동시에 실존의 기관인 가자미의 납작함, 곤쟁이들의 작은 몸, 미더덕의 우중중한 덩어리, 신발깔창처럼 생긴 서대기, 청어의 푸른 등, 바짝 말라 한 유적 같은 문어의 몸 등 다양한 바다생물들의 몸 형태들은 그 자체로 의미 생성의 담지체이다. 넙치의 납작한 몸과 한데 모인 눈동자는 침묵이며 마른 문어의 몸은 ‘전혀 감정이 닿지 않을 먼 과거’나 ‘내장이 없는 암흑’이다. 참다랭이의 주검은 ‘거대한 침묵, 혹은 말없이 붉게 멈춰 서던 천 마일의 황혼자락’이다.
그러한 의미를 생성케 하는 것은 ‘몸길이 3m, 체중 380Kg’의 육중함과 그것의 ‘여기에 없음’이다. 있음이 없음이 될 때, 그 사이에 어떤 과정 또는 경과가 있지 않다. 혹은 시적 화자에게 그 사이의 경과는 생략된다. 낮에서 밤으로의 이행, 또는 사이 시간인 황혼조차도 참다랭의의 거대한 죽음은 멈춰 서게 한다. 죽음과 사멸을 예비하는 이행의 느린 시간인 인간의 황혼은 참다랭이의 주검인 ‘멈춰 서던 천마일의 황혼 자락’과 분명한 대비를 이룬다. 이 극명한 대비 속에 시인의 형태론적 욕망이 꿈꾸는 지점이 있다.
죽음은 인간에게 시간적 과정의 종결을 의미하지만 이들 바다생물들의 죽음은 시간성 속에 있지 않으며 공간화 된다. 인간에게 황혼은 가장 짧고 아름다운 순간이지만 참다랭이의 주검은 멈춰 선 천 마일의 황혼이다. 있음과 없음 사이의 과정이 삭제된 자리에 공간적 지평이 열린 것이다. 바다 속을 유영하던 온갖 바다생물들과 어시장 바닥에 널려 있거나 새끼줄에 매달려 말라가는 바다생물들 사이에 이행과 변화의 과정은 없다. 「변산바다」에서 화자는 자신이 ‘물 위에 저무는 황혼처럼 아름다운 저녁’이 될 수 있는지 자문한다. 인간에게 죽음으로 가는 여정인 저녁의 황혼은 수없는 회의와 망설임, 그리움과 고독감을 불러일으키는 시간이다. 반면 바다생물들은 모두 그 ‘바다’를 떠나 새로운 공간적 지평 속에 배치되었다. '청어의 저녁'에 등장하는 바다생물들에게 그 죽음으로 가는 이행의 시간은 없거나 멈춰선다. ‘갈치’는 ‘죽어도 고독하지 않은 내 영혼에 묻은 비린내/긴긴 내 몸의 칼날로 다시 바다에 가지 않는다’고 단언한다. 장생포에서 스스로 그물에 걸려 죽은 고래는 ‘크고 넉넉한 자유/그가 살았을 연대와 집과 위대한 사상’을 생각게 한다. 결국 시인의 형태론적 욕망은 죽음의 윤리성을 지향하는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바다생물들은 시인의 죽음-실존의 기관들인 것이다.
Ⅱ. 생성의 공간, 허공
시의 언어예술로서의 가능성은 무한하다. 세계의 무한과 시적 상상력의 무한이 그 가능성의 근원이기 때문이다. 시적 상상력이란 시적 자아의 규정되지 않는 범위와 운동, 즉 시의 역동이다. 김완하의 '허공이 기르는 나무'는 시적 상상력이 세계를 어떻게 분할하고 확장하는 지 보여준다. '허공이 기르는 나무'는 3부를 제외하면 나무와 숲에의 헌정이라 할 만하다. 나무와 숲 같은 자연물은 서정시의 오래된 서정적 상관물이지만 김완하의 시에서 그들은 하나의 영역이며 영토이다. 일반적으로 시적 상상력은 사물들의 병치를 통해 시적 동력을 획득해 나가지만 영역이며 영토인 나무와 숲들은 세계의 분할과 확장을 통해 특유의 역동을 획득한다. 그리고 그 역동은 ‘허공(the void)’을 영역화함으로써 가능해진다.
새들의 가슴을 밟고/나뭇잎은 진다
허공의 벼랑을 타고/새들이 날아간 후,
또 하나의 허공이 열리고/그곳을 따라서/나뭇잎은 날아간다
허공을 열어보니/나뭇잎이 쌓여 있다
새들이 날아간 쪽으로/나뭇가지는,/창을 연다
― 「허공이 키우는 나무」 전문
본래 ‘허공’은 형이상학적 공간이며 그 존재 유무는 철학자들 사이의 논쟁거리였다. 섹스투스 엠피리쿠스는 허공(the void)을 무형의 실체(intan
gible substance)라고 규정하며 이는 에피큐로스 물리학 즉 원자론의 근본 토대였다. 그들은 사물의 총체(the all)를 물체와 허공이라고 보았다. 김완하의 시에서 허공은 단순히 비어있음 또는 여분, 虛나 無가 아니라 존재론적 영역으로서의 의미를 갖는다. 그래서 허공은‘집’이라는 공간적 이미지로 변전되며 ‘좁은 허공’과 ‘더 넓은 허공’이라는 물리적 규정이 가능해진다. ‘허공의 땅’과 ‘허공의 빗장’ 등의 표현들은 모두 허공을 공간적 실체로서 존재-영역화하려는 시도들이다. 김완하의 시에서 ‘허공’이 갖는 의미를 탐색하기 위해서는 허공이 어떤 방식으로 영역화 되는가를 살펴야 할 것이다.
「허공은 나무들의 집」에서 허공은 이중 이미지(dual image)의 공간이다. 나무들은 ‘보이지 않는 뿌리’를 ‘허공의 땅’에 길을 내고 푸른 잎새들은 ‘팔을 뻗어 하늘 깊숙이 손을 묻는다’ 땅에 묻힌 나무의 뿌리에 대해 허공에 길을 낸 그 뿌리는 동근원적인 사물의 두 양태이거나 실제적인 뿌리의 반영일 것이다. 전자를 나무A, 후자를 나무B라고 할 때 ‘허공’은 이 둘을 양태화하는 형이상학적 영역일 수 있으며, 전자와 후자 모두 변양태이므로 더 근원적이고 실제적인 실체의 존재를 가정하게 한다. 나무A에서 나무B의 생성이 허공에 의해 가능해지고 나무의 또 다른 실존인 ‘부드러운 바람’을 놓아주는 것은 그러한 허공의 생성이 나무의 실존을 완성한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따라서 나무A에서 나무B로의 형이상학적 생성은 그것이 더 근원적인 실체의 또 다른 양태라 할지라도 그 어떤 완성으로의 길을 의미한다. 허공의 길은 이런 방식으로 확장되는 것이다.
생성의 공간으로서의 ‘허공’의 의미는 ‘허공에 매달려보다’에서도 확인된다. 허공에 매달린다는 것은 일생을 고운 빛깔로 만드는 기다림이며 허공은 ‘보이지 않는 힘으로 감싸는 빈 손’이다. ‘대숲’에서 허공은 ‘우리를 비껴간 모든 것’이 대숲 속에서 ‘캄캄한 구멍’으로 열리는 것이며 마디마디 고이는 침묵과 안으로 패인 시간의 깊은 주름, 속 깊어 둥글어지는 고통의 잔잔한 몸살 등의 연대인 나무와 숲과 시적 화자 사이에 맺히는 ‘단단한 빛의 고리’이다. 허공이 생성과 완성의 공간인 이유는 그것이 삶에서 지나쳐진 모든 것들이며 침묵-시간-고통을 연대하게 만드는 빈 지점이기 때문이다. 한 그루 나무의 ‘여기-있음’은 모순율 속에서 ‘다른 곳에 없음’을 의미하지만 ‘허공’이라는 생성의 공간 속에서는 ‘여기-있음’ 뿐만 아니라 ‘모든 곳에 있음’을 함축한다. ‘우리를 비껴간 모든 것’이 허공 속에 캄캄한 구멍으로 열리기 때문이다.
결국 ‘허공’은 존재와 비존재 사이의 모순율과 동일률을 뛰어넘는 무형의 실체인 것이다. 나무A는 허공 속에서 나무B나 C가 될 수 있고, 허공의 무한성은 그 과정의 무한성의 전제가 될 것이다. 또한 허공은 우리를 비껴간 ‘우리 아님’이고 나무A에 대해 ‘NOT-나무A’이며 그 모든 것들의 총체이므로 존재 확장을 가능케 한다. ‘나래짓 한 번에 구름을 휘몰아 사해 성난 파도 다 잠재우’기 위해 나래 밑에 ‘큰 허공’을 품어야 하는 것은 바로 그런 의미에서이다.(「대붕 삼만리」)
얼마나 숨 가쁜 고요가
저 숲을 움켜쥐고 있는가
나무는 잠시도 쉬지 않는다
바람의 장단 숲에 들어와
나무를 키우고 있다
서로의 어깨 감싸는 나뭇잎
하늘 들고 일어서는 나뭇가지
숲이 또 하나의 나무를 끌어들인다.
눈 쌓인 응달과 머릿속 환한
나목의 뿌리를 재우며 계곡이 흐른다
순간, 벼랑 뛰어내려 하늘로 솟구친
매 한 마리
능선을 타고 맴돌다 날갯짓 멈춘다
사이, 허공이 팽팽하게 긴장한다
― 「일순」 전문
그런데 세계와 존재의 형이상학적 생성의 공간인 허공은 시인 또는 시적 화자의 내면에서 발견되며 그 허공을 대면하는 공간은 숲에서 가파른 ‘벼랑’으로 옮겨진다. 숲이 움켜쥔 ‘숨가쁜 고요’는 허공의 다른 이름이며 ‘순간’ 날아오른 매가 날갯짓을 멈출 때 허공은 팽팽하게 긴장한다. 매가 날갯짓을 멈추는 것은 매가 비상하는 공간의 속성이 바뀌었기 때문이다. 팽팽하게 긴장하는 허공은 그 공간적 속성의 변화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암시하고 있다. 역으로 매의 순간 정지가 공간의 속성을 바꾸었다고 해석할 수도 있을 것이다. ‘벼랑에 서다’는 허공과 대면하는 시적 화자의 내면을 보다 직접적으로 드러낸다. 시적 화자는 벼랑에 서서 ‘시간의 끈’을 풀어버린다. ‘가벼운 시간의 거푸집과 가파른 시간’이 무너지는 소리를 들으면서 홀로 산중에 내리는 비를 바라보는 시적 화자는 그 ‘수직의 시간’ 속에서 ‘내 안의 빈터’가 넓어지는 것을 느끼는 것이다. ‘일순’에서 매가 순간 날갯짓을 멈추고 허공이 팽팽하게 긴장하는 것처럼 시적 화자 자신은 가볍고 가파른 시간을 버리고 수직의 시간 속에 자신을 던진다. 벼랑을 타고 내리는 비라는 수직의 시간은 매의 날갯짓과 같은 시적 화자 자신의 투신인 것이다. 아마도 그 투신은 거듭될 것이며 내부의 허공은 확장되어 갈 것이다.
Ⅲ. 달빛, 또는 세계의 비애
최금진의 '새들의 역사'는 세계에 대한 환멸과 비애의 삽화들이다. 정확히 말하면 세계에 대한 환멸이 생에 대한 비애로 전이된 것이다. 환멸이 비애로 전이되는 것은 세계의 부조리가 끝없이 이어져 왔고, 앞으로도 이어질 것이라는 비극적인 인식 때문이다. 그래서 그의 시에는 대를 이어 가난하게 살아온 종친들이 씨족처럼 묘사되며 동물들과 近親性을 띄게 되는 것이다. 가난과 부조리 속에 살아온 화자인 ‘나’의 ‘빼빼 마른 조상들’은 ‘피 묻은 쇠소기를 허겁지겁 맨손으로’ 먹고 핥고 ‘굶주린 개들처럼’ ‘나’를 바라본다. ‘가난하게 살다 죽은 최씨들’은 죽어서 ‘코끼리들처럼’ 초원을 떠도는 이미지로 변환된다. ‘최씨 종친회’는 ‘서로 닮은 입속에 고기를 찍어 넣어주며 충직하고도 길쭉한 얼굴들끼리’ 서로 안쓰러워하며 음식을 권한다. 또는 ‘퇴화된 꼬리뼈 세우고 수로 바닥을 걸어가는 양서류들’(「저수지 가까운 동네」)처럼 뒷모습이 모두 구부정하다. 유전 배열처럼 또는 ‘푸석한 혈통의 새끼줄’을 따라 남루하고 오래된 가난의 年代가 이어져온 것이다.
그러한 그의 세계 인식은 ‘저수지’나 ‘석회암지대’와 같은 공간 속에 구체화된다. ‘우리가 태어나기 전부터 있었던’ 저수지에 빠져 죽은 ‘신원미상의 젊은 여자’나 ‘앓다가 엉금엉금 기어와’ 물 속에 뛰어든 ‘할망구’들은 잉어의 이목구비와 닮아있다. ‘그 낯익은 잉어떼들’은 저수지의 역사만큼이나 오랫동안 익사한 사람들과의 근친적 관계 속에 살아온 것이다. 개별자들의 죽음은 잉어떼와의 근친성 속에 익명적이며 또한 영속적인 생의 비극으로 치환된다.
저수지의 잉어들은 빠져 죽은 사람 얼굴과 닮았지
건져올려놓고 보면 영락없이
작년에 죽은 누군가의 이목구비가 달려 있었지
……
유서도 못 쓰고 죽은 신원미상의 젊은 여자와
병들어 앓다가 엉금엉금 기어와
신발만 겨우 벗고 뛰어든 할망구
물먹고 죽은 그들의 너덜너덜한 얼굴조각들이 흘러 다니는 저수지
― 「잉어떼」 중에서
‘석회암 지대’에서 동물과의 근친성과 오래됨(영속성)은 설화의 공간으로 구체화된다. 근친적 공간으로서의 ‘저수지’는 밤이면 ‘말조개들이 울고’ 우렁이들이 ‘익사자 살가죽을 벗겨먹으며 토실토실 여무는’ 순환의 공간으로 묘사된다. 동굴에서 나온 박쥐들이 몰래 사람들과 어울려 살고, 노인들이 젊은이들보다 오래 살며, 오래 살아 검은 머리가 다시 돋은 노파는 자주 뒷산 동굴 구멍으로 들어간다. 마을회관 앞 우물에는 ‘늙은 메기’가 살고 누이들은 ’얼굴 시커먼 청년들에게 제물로 바쳐지곤’ 한다. 동네는 석회암 지대여서 ‘집 밑에는 커다란 땅구멍이 서너 개씩은 미로처럼 나 있었다.’ 땅구멍은 생의 지반을 무너뜨리며 눈에 보이는 세계의 견고함을 위협한다. 가난한 설화적 공간 속의 사람들은 개별적인 인간 실존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마을 한가운데에 있는 ‘구멍 숭숭한 묘지’로 표상되는 죽음과 동물들의 연속체로서 살아간다. 그 속에서 사람들은 반은 동물이고 반은 흙인 것이다. 그래서 ‘땅구멍’은 죽은 사람이 ‘찾아 돌아가야 할 땅구멍’이며 그를 문상 가는 ‘나’는 개미들처럼 곡소리를 ‘입속에 물고’ 간다. 죽은 사람이 ‘찾아 돌아가야 할 땅구멍’은 개미들이 제 몸을 메고 들어가는 ‘장판 밑 따스한 구멍’과 병치되면서 죽음을 삶과 완전히 분리되지 않은 채 늘 그렇게 함께 있는 것으로 만든다.
애초에 세계에 대한 환멸로부터 시작된 최금진의 시들은 소외되고 빈곤한 사람들의 삶은 먹이 피라미드의 맨 위에 있는 인간이 아니라 ‘동물’의 다양한 이미지들 속에 배치되었다. 「오래된 결혼식」의 늙은 부모들은 흐린 겹눈을 가지고 있으며 복날 파리약을 먹고 죽은, ‘발가벗겨진 노파의 보랏빛 도는 입엔 서둘러 쌀 한줌이 콱 물려졌다’(「조용한 가족」). 늙고 가난한 자매들은 ‘여우원숭이처럼 킥킥 웃으며’ 사과를 먹는다.(「자매」) 지친 여행자는 ‘먹이 피라미드의 맨 밑바닥’에 눕는다.(「여행자」) 동물 이미지를 통해 빈곤과 소외를 드러내는 것은 그들이 자본주의의 정글, 그 먹이 피라미드의 밑바닥에 있다는 인식을 반영한다. 그래서 육식의 이미지가 종종 등장하여 생의 근본적인 잔혹성을 드러내지만 오래된 설화성 속에서 그것은 하나의 익명적인 순환의 논리로 전화한다. 우렁이들이 익사자들의 살가죽을 먹고 토실토실 살이 오르는 밤의 저수지는 오래 전부터 그렇게 있어왔던 순환의 공간으로서 아이들은 그곳에서 익사자의 이목구비를 한 잉어떼를 잡는다. 할아버지는 순한 잇몸을 드러내며 웃는 사슴의 피를 마시고 ‘통통하게 피가 올라 출렁’거린다. 사슴의 피를 마시는 ‘사람들 두상은 모두 말처럼 길쭉해서 어떤 악의도’ 없었다.(「봄날은 간다」) 피를 팔리우는 사슴과 ‘제일 싼 血 팝니다’라고 외치는 ‘나’(「팝니다, 연락주세요」)는 위상학적으로 크게 다르지 않다. 세계의 부조리에 대한 환멸은 이런 방식으로 ‘비애’가 된다.
최금진의 시에서 ‘비애’는 밤의 ‘달빛’이라는 양가적 시간성 속에서 시적 상징성을 얻게 된다. 낮이 분리와 경계, 그리고 생산의 시간-물리적으로 생산은 사물들 간의 경계와 분리가 있어야 가능하다-이라면 밤은 저수지에서 말조개가 울고 잉어떼와 우렁이들이 여무는 조용한 환원의 시간이다. ‘먹이피라미드의 맨 밑바닥에 몸을 눕’히고 죽음을 기다리는 ‘여행자’에겐 ‘어둠의 네 귀퉁이’가 무너져 온다. 「달과 함께 흘러가다」에서 집을 떠나는 사내는 ‘여행자’의 前身으로서 밤의 내장이 훤히 다 보이는 창문’의 커튼을 열고 달을 보며 달을 가져가고 싶어 한다. 이들이 가지고 싶어 했던 달은 자본주의적 현실 또는 먹이 피라미드가 오래되고 익명적인 설화성, 순환성의 논리로 전화되는 지점을 가로막고 새로운 시적 긴장을 생성시킨다.
방부처리가 되어 어둠 속에 누운 고흐(「고흐와 함께 하는 달빛 감상」)에게 ‘이제 막 피 묻은 고개를 쳐드는 잔뜩 독 오른 달’이나 밤의 저수지, 그 익명적 순환의 공간에 ‘하얗게 머리를 풀어헤친 달’은 먹이피라미드와 연결된 익명적 순환성과 설화성을 부정하는 독기나 광기 같은 것이다. 먹이피라미드와 설화적 순환성은 오래되고 견고하며 쉽게 부정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그 부정은 독기와 광기를 띨 수밖에 없을 것이다. 「악령」에서 ‘달 위에 둑방을 내고 밤마다 훌쩍 뛰어올라가 하염없이 달 속의 썩은 해골물’을 마신 ‘나’는 슬픔을 욕심껏 따먹는다. 그리고 그의 노래는 ‘반쯤은 악귀’가 되어 ‘조용히 잠든 마을에 환하게 달빛 되어 내린다.’ 슬픔이 왔을 때 회피하지 않고 그것을 욕심껏 따먹는 것이야말로 세계의 비애에 대한 시인의 태도를 상징하는 행위이다. 현실의 논리인 ‘육식’은 달 속에서 ‘슬픔을 먹기’로 다시 한 번 전화된다. 시인에게 달/빛은 밤, 즉 순환의 시간에 속하지만 한편 익명적 순환성의 슬픔을 집어 삼키는 독기와 광기의 시간에 속하기도 한 것이다.
오순영∙2007년 ≪리토피아≫ 평론 신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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