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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호 계간평(시)/장성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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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간평/시
시적 현실의 지형도와 전복적 상상력
장성규|문학평론가
∙박강우, 「리얼리스트의 부활」(≪리토피아≫ 2007년 겨울호)
∙김경미, 「답장」(≪현대문학≫ 2007년 겨울호)
∙강성철, 「횟집수족관」(≪서정시학≫ 2007년 겨울호)
∙안주철, 「아프리카」(≪내일을 여는 작가≫ 2007년 겨울호)
∙고형렬, 「나의 황폐화를 기념한다」(≪실천문학≫ 2007년 겨울호)
∙강기원, 「가면우울증」(≪세계의 문학≫ 2007년 겨울호)
∙장석원, 「미각」(≪리토피아≫ 2007년 겨울호)
∙김지유, 「비바오락실」(≪문학수첩≫ 2007년 겨울호)
1. 다시, 시적 현실을 말한다는 것
작년 한 해 우리 시의 장場은 이른바 ‘미래파’ 논쟁으로 기억될 만하다. 한 편에서는 서정적 주체의 힘에 대한 신뢰를 강조했으며, 다른 한 편에서는 비-주체라고 명명될 수 있는 새로운 탈주체적 상상력의 가능성을 제기했다. 이들의 논의 과정 속에서 우리 시의 새로운 인식론적 틀에 대한 적극적인 가능성들이 논의된 것은 분명 높이 평가해야 할 우리 시의 성과이다.
그러나 현재 우리 시의 다양한 문제들이 모두 이 논쟁으로 환원되면서 ‘시적 현실’에 대한 논의가 간과된 것은 아쉬움으로 남는다. 물론 서정적 주체와 비-주체의 문제는 새로운 우리 시가 대결해야 할 핵심적인 문제 중 하나이다. 그러나 이 문제가 결국 현실의 컨텍스트적 맥락의 변화를 시적 주체의 층위에서 어떠한 방식으로 수용할 것인가에 대한 논의였다면, 이른바 ‘미래파’ 논쟁의 과정에서 정작 중요한 현실의 컨텍스트적 변화의 문제와 이에 기반한 새로운 ‘시적 현실’의 인식과 형상화의 문제는 간과된 것이 사실이다. 서정적 주체에서 비-주체로의 이행이라는 시적 경향은, 엄밀히 말해서 시적 현실의 급격한 변화와 잇닿아 있는 현상이다. 이 지점을 간과한다면, 작년 한 해 동안 진행된 이 격렬한 논쟁은 자칫 ‘자폐적 주체’로의 귀결로 현상할 수도 있다는 점에서 위험하다.
기실 서정적 주체와 비-주체를 이항대립적인 구도로 설정하기 전에 선행되어야 할 것은 새로운 시적 현실을 점검하고 이에 대한 시적 상상력의 발현 가능성을 모색하는 작업이다. 이 과정을 경과하지 않은 채 이루어지는 서정적 주체와 비-주체간의 대립구도는 결국 시적 (비)주체를 절대적이고 선험적인 존재로 상정한다는 점에서 관념론적 한계를 지닌다. 왜냐하면 시적 (비)주체의 변모는 구체적인 시적 현실의 변모로 인해 추동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손가락을 물고 있는 입술과/입술에 물려 있는 손가락은/입술과 손가락으로 분리되지 않는다/분리되지 않는 입술과 손가락에는/서로의 영토가 없다/손가락은 입술의 바깥쪽이고/입술은 손가락의 안쪽이다/구분되지 않는 입술과 손가락의 영토는/동시에 나타난 후/동시에 사라지고/다시 나타난다/그녀의 입술과 나의 손가락은/황홀한 부활을 기다린다
― 박강우, 「리얼리스트의 부활」, ≪리토피아≫, 2007년 겨울호, 전문
박강우의 「리얼리스트의 부활」은 주체와 비-주체간의 대립구도 자체를 부정하고 있다. “손가락을 물고 있는 입술과/입술에 물려 있는 손가락은/입술과 손가락으로 분리되지 않는다”. 이 시에서는 주체=입술과 비-주체=손가락이라는 도식이 부정된다. 왜냐하면 “손가락은 입술의 바깥쪽이고/입술은 손가락의 안쪽”이기 때문이다. 즉, 주체와 타자간의 교섭 가운데 현현하는 순간만이 곧 ‘리얼’한 것일 뿐, 어디까지가 손가락이며 어디까지가 입술이라는 선험적인 규정은 공허한 관념론에 불과하다. 오히려 “구분되지 않는 입술과 손가락의 영토”가 동시에 나타나는 순간이 곧 ‘리얼’한 것이다. 이 ‘리얼’한 순간, “그녀의 입술”이라는 주체와 “나의 손가락”이라는 비-주체간의 간극은 “황홀한 부활”을 통해 초극된다. 결국 주체=입술과 비-주체=손가락이라는 도식은 “황홀한 부활”이라는 주체와 타자간의 교섭을 통해 현현된 ‘리얼’한 것 속에서 그 의미를 잃는다. 따라서 선험적인 주체와 비-주체간의 대립구도 자체가 이미 ‘리얼’한 것을 벗어난 층위의 관념론적 규정에 머물게 된다.
이는 주체와 비-주체의 문제설정 자체가 선험적인 관념론적 성격을 지님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중요한 것은 구체적인 ‘사건’속에서 시적 현실이 현현하는 방식과 이에 대한 인식이지, 그 사건을 시로 형상화하는 ‘(비)주체’의 선험적 존재여부가 아니기 때문이다. 예컨대 다음과 같은 ‘사건’은 어떠한가?
휴대폰 문자로 급히 ‘시 창작 가는 길’ 전송했는데/그게 ‘시 창자 까는 길’로 써진 모양이다 답장-시로/회도 쳐? 나날의 위선이 가시연꽃의 연못물이어서 비린/속어들 입에 안 올리는데 손바닥이 썩은 어물전이다
― 김경미, 「답장」, ≪현대문학≫ 2007년 겨울호, 부분
시적 화자가 본래 보내고자 했던 문자 메시지는 “시 창작 가는 길”이다. 그런데 정작 상대방에게 전달된 문자 메시지는 “시 창자 까는 길”이다. 시적 화자의 의식은 “비린/속어들 입에 안 올리”려 하지만, 무의식은 손가락을 통해 시적 화자의 “위선이 가시연꽃의 연못물”임을 드러낸다. 이때 시적 주체는 누구인가? “시 창작 가는 길”을 보내려 한 ‘나’인가, 아니면 “시 창자 까는 길”을 보낸 ‘나’인가? 중요한 것은 구체적인 ‘사건’들 속에서 시적 주체와 비-주체간의 역동적인 모순과 그 균열점을 탐색하는 것이지, 선험적으로 시적 주체와 비-주체간의 간극을 설정하는 것이 아니다. 구체적인 ‘사건’에 따라 시적 주체는 다양한 전복적 상상력으로 시적 현실에 대응할 수 있으며, 이 전복적 상상력에 대한 인식이야말로 시적 현실로부터 출발하는 새로운 시적 주체에 대한 생산적인 논의를 가능하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문제의식 속에서 지난 계절 발표된 시들 중 주목되는 것은 크게 두 가지 경향의 작품들이다. 하나는 타자, 혹은 마이너리티라고 부를 수 있는 존재들에 대한 심도 깊은 윤리적 인식을 보여주는 시들이며, 다른 하나는 주체의 억압 속에서 구체적인 사건을 매개로 비집고 나온 비-주체들의 전복적 가능성을 보여주는 시들이다. 얼핏 보기에 이 두 가지 경향은 서로 상이한 시적 주체를 상정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선험적인 시적 (비)주체의 존재 자체가 관념론적인 것이라면, 그리고 구체적인 사건을 통해서만, 나아가 그 사건을 배태한 시적 현실을 통해서만 시적 (비)주체의 존재 근거를 찾을 수 있다면, 표면적으로 상이한 방향에서 시적 (비)주체를 정립하려는 이들 경향 속에서 우리 시대의 시적 현실과 그에 대한 전복적 상상력의 일단을 찾아내려는 시도야말로 우선시되어야 할 작업일 것이다. 그리고 이 작업을 통해 귀납적으로 얻어지는 시적 (비)주체의 존재야말로 탄탄한 시적 현실에 기반한 새로움으로 평가될 수 있을 것이다.
2. 마이너리티의 인식론과 ‘과정으로서의 주체’
투명한 감옥이다, 아주 투명한 감옥./온갖 사형수들이 불안한 마음으로 물 속에 갇혀,/매 순간을 견뎌내고 있다./살찐 방어의 사형이 집행되고, 곧이어 우럭이 잡혀갔다./광어는 자신의 몸을 최대한 낮춰, 방어를 해보았지만/결국엔 살이 발려지는 아픔을 겪어야 했다.//(……)//직장이라는 감옥에서 샐러리맨들이 우르르 쏟아져 나와/투명한 한낮 속으로 걸아가고들 있다./밝은 바깥도 햇살의 감옥이다./한 무리가 설렁탕 감옥으로, 또 한 무리가 삼계탕 감옥으로,/그리고 횟집이라는 이 물고기 감옥으로도 잘도 들어온다./이제 곧 명예퇴직이라는 이름으로/가정이라는 감옥으로 돌아가야 하는 죄수들이/‘소’라는 사형수를, ‘닭’이라는 사형수를,/‘물고기’라는 사형수도 잘도 삼킨다, 반주로 소주도 한다./대화의 꽃을 피우며, 정말 가까워 보인다.//식사를 마치고 죄수들이, 서로를 삼켜야하는 감옥으로/삼삼오오 떼 지어 잘도 들어간다./네가 아니면 내가 죽을 것이란 진실을/가슴 속 깊이 묻어둔 채,/떼 지어 희희낙락대며 잘도 들어가는 모습을,/수족관 물고기들이 담담하게 쳐다보고 있다.
― 강성철, 「횟집수족관」, ≪서정시학≫ 겨울호, 부분
새로운 시적 현실을 이야기하기 이전에, 자칫 시적 주체의 사회적 마이너리티에 대한 인식이 시적 주체의 특권화와 윤리적 우월성으로 귀결될 위험을 지닌다는 점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즉, 사회적 마이너리티는 시적 주체의 시선에 의해 ‘마이너리티’로 호명되면서 타자화 될 수 있으며, 시적 주체는 마이너리티를 인식한다는 사실만으로 윤리적 우월성을 확보하게 될 수 있다는 위험성을 지닌다. 이미 시적 주체와 사회적 마이너리티를 이분법적으로 나누는 순간, 이 두 범주는 일정한 위계서열화 된 존재로 고정될 수 있다.
이러한 위험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시적 주체 자신이 사회적 구조 속의 마이너리티라는 사실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강성철의 「횟집수족관」은 이러한 사실을 잘 인식하고 있다. 이른바 신자유주의적 세계화라는 사회적 변화과정 속에서 우리 사회 자체가 “투명한 감옥이다, 아주 투명한 감옥”이며, “밝은 바깥도 햇살의 감옥”이고, 나아가 우리 모두가 실은 “네가 아니면 내가 죽을 것이란 진실을/가슴 속 깊이 묻어둔 채”로 “떼 지어 희희낙락대며” 살아가는 모습을 날카롭게 읽어내는 시적 주체는 이미 시적 주체 자신이 사회적 마이너리티이며, 이 사회 속에서 존재하는 우리 모두가 실은 사회적 마이너리티임을 인식하고 있다. 기실 자본주의의 무한경쟁의 원리 속에서 마이너리티가 아닌 존재란 있을 수 없다. 이와 같은 시적 주체와 마이너리티간의 수평적인 관계에 대한 인식이 전제될 때, 비로소 특권화되고 윤리적 우월성을 지닌 시적 주체는 진정한 ‘마이너리티’의 위치에서 타자성을 인식할 수 있게 된다.
아프리카 소년 소녀로 채워진 액자에서/모래 먼지가 액자 밖으로 넘치고 있다//매달 몇 푼 되지 않는 후원금을 보내고/크리스마스가 다가오면 선물금을 부치지만/내가 남들처럼 착해서도 아니고/내 선량한 마음이 나를 넘쳐/먼 대륙에 말씀처럼 닻을 내린 것도 아니다//염소 한 마리와 주식으로 먹는 옥수수 두 부대/새로 산 살림살이가 몽땅 한 장에 들어 있는 사진을 받아보고/선물금 사용내용이 적힌 편지를 읽다 흘린 눈물 또한/건들면 모래 바람으로 쏟아질 소년 소녀의/거친 미래를 걱정해서도 아니고/좀더 아껴 살면서 나를 더 깊이 사랑하기 위해서도 아니었다//앨범에는 열 살짜리 내가 가죽이 벗겨진 빈집처럼/털갈이 하는 개를 타고 정오의 태양이 뜯어먹고 있는/엄마의 그림자를 향해 윙크하고 있다/뒤쪽 풍경엔 벼랑 끝에 발가락이 툭툭 끊어진 나무뿌리들/닭똥들이 갓 뒤집어진 채 햇빛처럼 펼쳐진 마당/개집 앞에는 살과 뼈가 잘근잘근 씹힌 병든 닭 반 마리/파리 떼는 내 몸의 일부처럼 공생하고 있다//미국에서 날아온 늙은 후원자 부부가 찍어서/선물금과 함께 크리스마스 선물로 보내주었던 저 사진/내가 나에게 선물이 될 수 있다는 거 그때 알았다//내 이름은 요세페, 트리시니자니/또 다시 알란, 안젤리나//내가 누군지 모르게 시들어 버린 가을은 지나갔지만/나는 나에게 머무를 수 없어 자꾸 슬프다//모래가 모래를 위로하면서 밀려가는 아프리카
― 안주철, 「아프리카」, ≪내일을 여는 작가≫ 겨울호, 전문
안주철의 「아프리카」는 이러한 맥락에서 주목된다. 이 시의 시적 주체는 아프리카 소년 소녀에게 “매달 몇 푼 되지 않는 후원금을 보내고/크리스마스가 다가오면 선물금을 부치지만” 이것이 일회적인 시혜나 자선의 층위에 머무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나 역시 “모래”일 따름이며, 나=기부자/아프리카=수혜자라는 이분법적 구도는 “내 이름은 요세페, 트리시니자니/또 다시 알란, 안젤리나”라는 시적 진술을 통해 부정된다. 즉, 시적 주체는 세계체제 속의 마이너리티와의 일치를 추구하며 이 속에서 시혜와 자선의 위치를 거부한다. 그리고 이들과의 일치 속에서 비로소 “모래가 모래를 위로하면서” 고정된 존재로서의 “아프리카 소년 소녀로 채워진 액자에서” “모래 먼지가 액자 밖으로 넘치”게 된다. 이는 주변부 인민에 대한 윤리적 우월감과 이로 인한 타자화된 시선을 벗어나 상호간의 ‘연대’와 ‘치유’의 가능성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그 의미를 지닌다.
그러나 이들의 시는 결국 시적 주체에 대한 방법론적 회의의 과정을 거치지 않은 채, 외부의 마이너리티에 대한 탐색으로 넘어간다는 점에서 다소 한계를 지닌다. 과연 외부의 마이너리티를 인식하는 시적 주체란 완결된 인식의 주체인가? 오히려 외부와의 끊임없는 교섭 과정을 통해 형성되고 변형되는, 유동적인 존재가 시적 주체이지 않은가?
나는 이미 황폐화를 시작했다/이 황폐화가 어디까지 나를 끌고 갈지 모른다/시를 뜯어고치기는 나를 뜯어고치기보다 어렵다/오래전, 시에 비할 것이 없었으므로/나의 앞에 수많은 생이 기다린다 해도 미완의/그 한 편의 시만 못했다,/더 이상 시가 씌여지지 않는다는 건 변명/환상은 나를 무한의 유혹으로 떠돌게 할 것이고/너는 어느 메타포의 시궁창에 처박힐 것이다/계속 흔들리는 심실 근처, 밖에서 웅성대는 침묵들/저들이 임시로 꿰매놓은 내장의 아우성/너는 이런 것들을 어떻게 할 작정인가,/그들이 어떻게 먹고살 것인지를 생각해 봤는가/꿈꾸는 것들의 하부에서 실종된 이름들/고쳐지지 않는 병력 같은 언어, 조사, 종결어미/한 편의 시를 쓰는 일은 꼭 하나의 외상을 남긴다/그럼에도 나는 나를 계속 변형한다/그때 네가 내리지 않을 역의 선착을 예측하고/누구보다 빨리 출발했지만,/결국 황폐화는 돌이킬 수 없는 시의 귀속/내가 도달할 곳은 오직 황폐화한 나의 이 내면/여기서 이름 없는 꽃이 피어날 것이다/그러므로 나는 이 도시 한쪽의 시단에 묻혀/이미 얼굴을 묻고 숨 쉬고 있다
― 고형렬, 「나의 황폐화를 기념한다」, ≪실천문학≫ 겨울호, 전문
고형렬의 「나의 황폐화를 기념한다」는 시적 주체가 선험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외부의 시적 현실과의 구체적인 교섭 과정을 통해 끊임없이 형성되는 ‘과정으로서의 주체’라는 점을 보여준다. 시적 주체는 시로 언어화 되지 않는 “꿈꾸는 것들의 하부에서 실종된 이름들”과 “밖에서 웅성대는 침묵들”을 배제하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 이 과정에서 주체란 “실종된 이름들”과 “웅성대는 침묵들”이라는 ‘타자’를 통해 배타적인 방식으로 형성된 것이다. 따라서 이 시적 주체는 기실 타자에 대한 억압의 형식을 지니는 비윤리적 주체의 표상이다. 고형렬은 이러한 시적 주체의 한계를 정확히 지적한다. 그는 시로 언어화 되지 않는 타자들을 배제한 형식을 통해 시적 주체를 확립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이 타자들을 “하나의 외상”으로 인식하며, 이를 통해 “나는 나를 계속 변형한다”는 테제로 나아간다. 이 시적 주체의 변형은 시적 현실의 마이너리티들인 “실종된 이름들”과 “웅성되는 침묵들”을 자신의 “외상”으로 인식함으로써 가능한 것이기에, 결국 시적 주체의 자리는 “황폐화한 나의 이 내면”으로 귀결된다. 그러나 이 시적 주체는 결코 “황폐화”한 비윤리적 주체가 아니다. 왜냐하면 “여기서 이름 없는 꽃이 피어날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새로운 시적 주체의 형성은 시적 현실의 마이너리티와의 교섭으로 인해 가능하다. 따라서 이 새로운 시적 주체는 단단한 중심으로서의 주체가 아닌, 시적 현실 속에서 형성되는 ‘과정으로서의 주체’이며, 마이너리티에 대한 인식으로부터 탄생한 ‘윤리적 주체’이다. 그러나 이 과정은 특권화 된 시적 주체를 폐기하는 과정을 동반하는 것이기에 “황폐화한 나의 이 내면”을 경유해야 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것이 마이너리티의 인식론과 그 윤리가 지니는 무게감이기도 할 것이다.
3. 근대적 질서의 해체와 비-주체의 복권
그러나 마이너리티는 주체의 ‘외부’에 존재하는 것만은 아니다. 기실 주체라는 것은 모순의 통합체이며, 이 과정에서 주체 내부에는 수많은 비-주체가 억압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 비-주체 역시 가상의 ‘주체’에 의해 억압된 주체 ‘내부’의 마이너리티라는 점에서 우리 시대의 시적 현실과 그 모순의 한 축을 구성한다.
나는 즐겁다/(즐거워야 한다)//나는 너그럽다/(내 심장은 퀼트처럼 조각나 있다)//나는 웃는다/(울음은 멈춰지지 않으므로)//나는 늘 기도한다/(십계명의 ‘하지 말라’가 ‘하라’로 읽힌다)//나는 노래한다/(내 귀를 막고)//나는 아픈 적이 없다/(병명을 모른다)//얼굴 위에 얼굴을 덧씌운다/(버릇이 되면 숨 막히지 않는다)/나는 나다/(나는 내가 아니다)
― 강기원, 「가면우울증」, ≪세계의 문학≫ 겨울호, 전문
강기원의 「가면우울증」은 주체의 이면에 억압되어 있는 비-주체의 양상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위의 시는 ‘가면-얼굴 위의 얼굴’로 표상되는 주체와 ‘맨얼굴’로 표상되는 비-주체간의 균열을 다루고 있다. 이는 “나는 나다/(나는 내가 아니다)”라는 언명에서 가장 첨예하게 나타난다.
기실 주체란 사회의 이데올로기적 장치들에 의해 호명되어진 가상의 존재이다. 이 주체는 근대 부르주아지의 가치관에 의해 만들어진 존재이며, 각각의 개체들이 지닌 개체성과 이질성의 욕망을 억압하는 기제로 작동한다. 이 주체는 즐거워야 하며, 너그러워야 하며, 기도해야 하며, 노래해야 하며, 건강해야 하며, 가면을 써야 하는, 그러면서도 나는 나라고 언명해야 하는 존재이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개체성과 이질성의 욕망은 철저히 억압된다. 주체가 이와 같은 근대적 시적 현실의 결과물이며, 개체성과 이질성의 욕망에 기반한 다양한 비-주체적 양상을 배제한 결과물이라면, 강기원의 시가 보여주는 주체 이면의 비-주체의 양상은 근대적 시적 현실에 대한 근본적인 비판일 수 있다. 더욱이 근대적 주체의 이름으로 개체성과 이질성의 욕망에 대한 체계적인 배제와 억압이 강화되는 후기 자본주의의 질서 속에서, 강기원의 시적 주체에 대한 전복적 상상력은 그 의미를 지닌다.
당신은 이것을 리얼리즘이라고 부를 것입니다 해석은 풍요롭고 예찬과 힐난은 존중할 만한 선택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사실인지 재현인지 구분하려고 여기에 앉지 않았습니다 즐거운 상상에 몸을 맡기세요 우리는 지금 세상의 거울 앞에서 모든 오브제에 스며들고 마는 회의를, 그것의 이미지를, 탄생과 소멸을 기록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벨이 울리면 침이 고이겠지만, 우리의 前口에서 後口로 나아가는 낯선 외계 물질들의 화학적 변형을 경험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일종의 예술적 추체험/미소를 함빡 머금고 눈을 감습니다 더욱 집중하세요 나를 잊으세요 그렇다고 해서 입을 잊으면 안 됩니다 조금씩 갉아내고 뜯어냅니다 씹어봅니다 천천히 자신이 사라지는, 녹아내리는, 흡수되는 과정을 체험하게 됩니다 이제 우리 모두는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몰아지경이라고나 할까요 이건 일종의 판타지입니다 당근과 양파와 감자와 양송이와 올리브유와 커큐민이 도덕적 갈등 없이 용해되는 단계 사실주의는 완성되고 있습니다//두 손을 모으고 가슴을 펴고 질서정연하게 입장합니다 절제는 악덕입니다 진정한 세계의 입구에서 허리띠를 푸세요 오늘 당신은 쾌적합니다
― 장석원, 「미각」, ≪리토피아≫ 겨울호, 전문
장석원의 「미각」은 사실과 재현이라는 근대적 사유에 대한 근본적 회의를 보여준다. 근대적인 시적 현실이란 단단한 사유의 중심인 시적 주체에 의해 “해석은 풍요롭고 예찬과 힐난은 존중할 만한 선택이 될 수 있”는 “리얼리즘”의 세계이다. 그러나 후기 자본주의에 살고 있는 우리에게 이와 같은 단단한 사실과 재현의 개념이 적용될 수 있을까? 오히려 이데올로기적 표상들로 구성된 메커니즘들이 ‘실재’로서 작동하는 것, 따라서 고전적인 사실과 재현의 개념으로 설명할 수 없는 새로운 시적 현실의 탄생과 대면하고 있는 것이 지금-여기 우리 시의 현실이다.
그렇다면 장석원은 지금-여기의 새로운 시적 현실에 대해 어떠한 인식론적 방법론을 제기하는가? 이를 한 마디로 ‘미각’의 복권이라고 할 수 있다. 근대적 사유 체계는 ‘시각’을 통해 작동한다. 시적 주체의 시각에 의해 ‘대상’은 지각되며, 이를 통해 ‘대상’은 시적 주체에 의해 전유된다. 반면 ‘미각’은 어떠한가? ‘미각’은 ‘시각’과는 달리 주체와 대상간의 위계질서화 된 구분을 전제하지 않는다. “천천히 자신이 사라지는, 녹아내리는, 흡수되는 과정을 체험하게 됩니다 이제 우리 모두는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몰아지경이라고나 할까요”. 미각은 대상과 주체를 합일시키는 감각이다. 따라서 이 영역에서 주체/타자의 구획은 해체되며 “몰아지경”의 새로운 시적 현실이 탄생한다. 이는 근대적인 “리얼리즘”의 세계와는 구분되는 시적 현실이기에, 사실과 재현의 개념 너머에 존재한다. 이를 “일종의 판타지”라고 명명할 수 있을 것인 바, 이 판타지를 통해 근대적인 시적 현실로 설명되지 않는 시적 현실을 제기하는 것이 장석원의 성과이다.
강기원과 장석원의 시는 모두 근대적인 시적 현실로 해명되지 않는 새로운 시적 현실과 이에 기반한 비-주체의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그러나 이 새로운 시적 현실이 구체적으로 근거한 세계는 어디이며, 그 세계가 작동하는 메커니즘은 무엇인가에 대한 탐색이 뚜렷이 보이지 않는 점은 다소 아쉽다.
차가 중앙분리대를 넘을 듯 위태롭게 질주한다 사내의 혼다 인테그라가 열광적인 음악을 타고 튜닝을 위한 포인트를 올린다 젖은 밤의 출구를 향해 핸들을 움켜진 채 미끄러져 들어간다 차마 삼키지 못해 내뱉은 눈물에 끊겨버린 시드니 국제 전화, 못본 지 삼년이 넘은 두 딸을 잊기 위해 원형 경주판 자동차의 페달을 밟는다 삼차원 입체화면에 후두둑 떨어지는 얼굴들이 흐르는 눈물처럼 와이퍼에 쓸려간다 빗물에 바퀴가 휙휙 돌아가며 아케이드를 부숴도 사내의 가상 자동차는 아랑곳 않고 질주한다 원룸형 오피스텔을 가리키는 이정표도 차선도 종내 사라지고 분리대의 야광 불빛마저 분간할 수 없는 밤, 차의 불빛에 반사되는 표지판을 딛고 검은 외로움이 달려온다 가속 페달을 밟을수록 더 빠르게 유령처럼 따라붙는다 줄곧 추월해 오는 술기운에서 벗어나기 위해 귀국을 미루며 버티는 아내의 손목을 잡아끌기라도 할 듯 마구 레이싱 기어를 당긴다 한때나마 좋았던 시절의 백미러를 응시하며 시속 이백오십 킬로미터로 내달린다 줄줄 새는 마음이 금세 바닥나 시멘트 난간을 들이받고 끝내 전복하고 마는 방배동, 번개 치는 비바오락실
―김지유, 「비바오락실」, ≪문학수첩≫ 겨울호, 전문
김지유의 「비바오락실」은 버츄얼 리얼리티와 현실을 접속시키면서 새로운 시적 현실이 기반한 구체적인 삶의 문제를 제기한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이 작품은 버츄얼 리얼리티의 영역인 레이싱 오락이 사내의 현실적인 삶의 고단함과 결합되면서 버츄얼 리얼리티와 현실의 영역을 결합시킴으로써 버츄얼 리얼리티가 정치적 무중력의 공간이 아닌 새로운 시적 현실이자 삶의 영역임을 보여준다. 김지유의 시에서 버츄얼 리얼리티는 단지 가상의 영역이 아니라 현실 법칙으로 움직이는 주체에 의해 억압된 비-주체의 욕망이 분출되는 새로운 시적 현실이다. 이 버츄얼 리얼리티라는 시적 현실은 비-주체의 전복적인 욕망을 통해 자명한 것으로 여겨지는 현실 법칙을 의심하게 만드는 사회적 상상력의 발현 공간이다. 이 공간을 통해 사내는 자신의 삶이 결국 “시멘트 난간을 들이받고 끝내 전복하고 마는” 질서로 귀결되고 있음을 인식하게 된다. 이 “방배동, 번개 치는 비바오락실”은 버츄얼 리얼리티를 통해 현실 법칙으로부터 억압된 비-주체의 욕망이 분출되는 새로운 시적 현실의 공간이며, 이 공간을 통해 우리는 현실의 “중앙분리대를 넘을 듯 위태롭게 질주”하는 비정함을 인식할 수 있다. 버츄얼 리얼리티가 구체적인 현실과 접속될 때, 이와 같은 전복적 상상력이 폭발될 수 있는 것이다.
4. 보다 근본적인, 전복적 상상력을 위하여
우리 시를 둘러싼 시적 현실은 부단히 변화하고 있고, 이에 따라 시적 주체 역시 부단히 변화하고 있다. 따라서 시적 현실의 변화를 간과한 채 이루어지는 시적 주체의 변화에 대한 논의는 그 담론의 급진성에도 불구하고 구체적인 설득력을 얻기 힘들다. 다시 말하자면, 왜 시적 주체가 변화하고 있는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이 시적 현실의 변화라는 구체적인 컨텍스트적 맥락과 접속될 때, 비로소 생산적인 논의가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지난 계절 발표된 시들을 바라본다면 한 편으로는 마이너리티에 대한 새로운 인식론과 윤리학을 통해 기존의 시적 주체를 갱신하려는 성과가 주목되며, 다른 한 편으로는 근대적 인식론과 그 체계를 전복시키며 이를 통해 비-주체의 욕망을 복권시키려는 성과가 주목된다. 물론 이 두 가지 성과는 각기 다른 시적 현실에 대한 인식론적 틀에 기반한 것이며, 이들이 모색하는 시적 주체의 새로운 위상 역시 서로 상이한 것이 사실이다. 그럼에도 이들의 모색을 함께 논의할 수 있는 것은, 무엇보다 이들이 선험적인 시적 주체의 변모를 추구하기 이전에, 구체적인 시적 현실의 변모에 대해 천착하는 성실함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난 계절의 시를 살펴보는 가운데 몇 가지 아쉬움이 남는 것이 사실이다. 우선 사회적 마이너리티에 대한 탐색과 형상화가 변화된 시적 현실에도 불구하고 기존의 방식으로부터 크게 벗어나지 못한다는 점이 그렇다. 여전히 소재주의적 차원에서, 혹은 시적 주체의 윤리적 우월성에 기반한 채 사회적 마이너리티를 바라보는 관점에서 사회적 마이너리티의 문제에 접근하는 방식으로는 ‘과정으로서의 주체’라는 새로운 마이너리티의 인식론과 그 윤리학에 대한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두 번째로는 비-주체를 새로운 시적 주체로 설정하려는 시들 중 많은 작품들이 ‘왜 비-주체인가?’라는 문제에 대한 치열한 자의식과 변화된 시적 현실에 대한 본원적인 천착을 보이기보다는 다소 생경한 ‘전위성’만을 강조하고 있다는 점이 그렇다. 새로움이란 언제나 중요한 문학적 화두이지만, 이 새로움에는 그 만큼의 치열한 자의식과 시적 현실과의 대결의지가 수반되어야 한다.
새로운 시적 현실과의 대결이라는 과제는 결코 만만한 작업은 아닐 것이다. 그리고 몇몇 시인들의 작품이나 몇몇 비평가들의 논의만으로 이 과제가 해결될 리도 만무하다. 다만 지난 계절에 발표된 시들을 통해서 읽어낼 수 있는 사실은 우리 시의 시적 현실의 지형도가 급격히 변모하고 있으며, 이에 기반한 새로운 전복적 상상력이 발랄하게 분출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 가능성이 새로운 시적 현실과의 대결이라는 문학사적 과제를 해결하는 실마리가 될 수 있을까? 아마도 그럴 것이다. 적어도, 우리 시는 새로운 시적 현실과의 대면을 팽팽한 긴장감을 지니고 진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긴장감의 밀도야말로 새로운 시적 현실에 대한 우리 시의 전복적 상상력의 근원이기 때문이다.
장성규∙1978년 서울 출생, 2007년 <경향신문> 신춘문예로 등단. 서울대학교 박사과정 재학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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