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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호 특집/이경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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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부
댓글 0건 조회 2,747회 작성일 09-01-19 12: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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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_우리 시대 문학에 나타난 직업의 상징코드

부유하는 삶, 떠도는 사람들

이경수|문학평론가




1. 전지구적 자본주의 시대의 직업과 시

요즘의 시를 읽다 보면 특정 주제를 가지고 시를 읽는 방법에 대해 약간의 회의가 드는 것이 사실이다. 특히 최근의 젊은 시인들의 시를 읽을 때 주제를 의식하며 시를 읽는 방법은 그다지 유효해 보이지 않는다. 더구나 그것이 ‘직업’ 같은 주제일 경우 그 어려움은 배가된다.

‘직업’이라는 주제나 소재에 주목해서 시를 읽을 때 그것이 의미를 지니려면 아무래도 최근 우리 사회의 변화를 반영하는 현상이 시에 나타나야 할 텐데, 과연 그런지에 대해서 나는 솔직히 회의적이다. 물론 특정 경향의 시를 읽는 데는 이 주제가 의미를 지닐 수 있다. 최근 우리 사회의 문제로 떠오르고 있는 ‘비정규직’ 문제라든가 ‘88만원 세대’의 문제, 평생직장 개념이 사라져 가고 투잡족이나 쓰리잡족이 늘어가는 추세 등을 생각할 때, 아무래도 그런 현상이 어떤 형식으로든 반영된 시를 읽는 데는 이 주제가 유효할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곤혹스러움이 해소되는 것은 아니다. 나는 이미 지난 계절에 ‘파트타임’이라는 주제를 가지고 평론을 쓴 적이 있고, 그 주제에 대해서 그로부터 생각이 더 진전되지는 않았다. 게다가 최근의 우리 사회에 나타나는 여러 가지 직업적 특성이 시에 반영된 방식에만 주목하다 보면 글의 방향이 미리 결정될 우려가 있고, 그런 방향이 ‘시와 직업’이라는 주제를 전체적으로 조망하기에는 좀 협소하다는 판단이 들기도 한다. 최근 시에 나타난 직업이라는 주제를 중심으로 시를 읽다 보면 아무래도 특정 경향의 시를 중심으로 읽게 될 가능성이 높아진다. 시 작품 속에서 새로운 현실을 구축하고 있는 시들의 경우, ‘직업’이라는 코드를 동원해 시를 읽는 것이 별 의미가 없을 수 있기 때문이다.

예측 가능한 이런 한계들을 어느 정도 인정하면서, 이 글에서는 가급적 다양한 경향의 시들을 포괄하여 ‘직업’이라는 프리즘을 통해서 최근의 우리 시들을 다시 읽어 보고자 한다. ‘시와 직업’이라는 주제는 다소 생소해 보이고 서로 거리가 멀어 보이기도 하지만, 이런 기준으로 시를 읽어오지 않았기 때문에 ‘시와 직업’이라는 코드를 통해 시를 읽었을 때 무언가 새로운 지점이 발견될지도 모른다는 다소 막연한 기대감을 가지고 이 글은 시작된다. 우선 최근의 시를 중심으로 비교적 여러 시인들의 시에서 의미를 가지고 등장하는 직업을 먼저 추려 보았으며, 그것이 시 작품에서는 물론이고 사회적으로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살펴보고자 했다.


2. 샐러리맨이 살아남는 법

자본주의의 바깥을 상상하기 힘든 사회에서 대개의 직장인들은 거대한 기계의 작은 부품이나 나사 하나로 존재한다. 나사 하나가 빠지거나 작은 부품이 고장 나도 기계 작동에 문제를 일으킬 수 있는 것을 생각하면 어쩌면 그만큼의 존재감조차 갖기 힘든 것이 오늘날의 샐러리맨들의 현실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관료화 사회의 문제점이 지적되어온 지 오래되었지만, 거대한 조직의 일원으로 살아가는 전지구적 자본주의 사회에서 관료주의적 속성은 점점 더 강화되어 가고 있다. 게다가 90년대 중반 이후의 한국 사회에서는 신자유주의의 논리까지 가세해 무한경쟁 체제 속에서 살아가도록 대부분의 사람들을 몰아가고 있다.

자로 잰 듯 정직 성실한 보폭이


남들 부러워하는 오늘의 그를 만들었다

맹금류의 매서운 눈 전방을 응시할 뿐

그는 우연이라도 하늘 우러르거나

주변 돌아보지 않는다 일상의

주행속도 십계명인 양 지켜온 그에게

시간의 낭비는 죄를 짓는 일

그는 때로 먹는 시간조차 아까워

노변 식당에 서서 끼니를 때우기도 하면서

시간의 연병장 제식훈련병처럼

각진 자세로 보내온 것이다

귀가해서도 신문과 티브이

한 눈으로 읽고, 한 눈으로 시청하면서

저녁 먹고 전화 받고 메일 보내고

정신없이 보낸 일과

꼼꼼히 복기한 뒤 잠자리에 든다

묶인 일에서 풀려날까 전전긍긍인 그는

꿈속에서도 서류 꾸미고 결재란에 사인을 한다

―이재무, 「날카로운 각」(<저녁 6시>, 창비, 2007) 전문


이재무의 시는 바깥이 없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살아가는 샐러리맨의 모습을 전형적으로 보여준다. 조직사회에서 샐러리맨이 무한경쟁을 뚫고 성공하기 위해서는 “자로 잰 듯 정직 성실한 보폭”으로 평생을 살 수밖에 없을 것이다. 아니, 그렇게 살아서 성공할 수만 있다면 그나마 희망이 있는 사회이다. 개인의 노력을 떠나 있는 문제들이 성패를 좌우하는 경우도 많다. 어쨌든 “남들 부러워하는 오늘의 그를 만들”기까지 그는 “맹금류의 매서운 눈”으로 “전방을 응시”하며 살아왔다. 우연이라도 하늘을 우러르거나 주변을 돌아볼 시간 따위는 없다. “시간의 낭비는 죄를 짓는 일”이다. 이것은 신자유주의 경쟁체제를 들여온 오늘의 자본주의 사회가 그 사회의 구성원들을 세뇌하는 논리이다. 그들이 한눈팔지 않고 온몸을 바쳐 일해 줄수록 자본가들에겐 이익이 된다. 야근을 밥 먹듯이 하고 밥 먹는 시간과 화장실 가는 시간까지 아껴가며 일하는 것을 그들은 선호할 수밖에 없다. 조직에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온몸으로 체득한 “그는 때로 먹는 시간조차 아까워/ 노변 식당에 서서 끼니를 때우기도” 한다. “늘 늦은 점심을 먹”고, 그가 밥을 먹는 것이 아니라 “밥이, 그를 먹는”(유홍준, 「지하급식소」(<나는, 웃는다>, 창비, 2006)) 샐러리맨의 일상을 그린 유홍준의 시도 밥에 의해서도 소외되는 자본주의 사회의 그늘을 그린다.

조직사회라는 점에선 군대나 사회나 다를 바 없다. “시간의 연병장”에서 “각진 자세로” 살아가는 “제식훈련병처럼” 살아야만 경쟁사회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 “묶인 일에서 풀려날까 전전긍긍인 그는” 일중독임에 분명하다. “꿈속에서도 서류 꾸미고 결재란에 사인을” 할 정도다. 하지만 남보다 앞서가기 위해서는 일중독이 되지 않을 수 없다. 여가를 즐기는 생활 따위는 잠시 잊어야만 한다. 평범한 샐러리맨이 남들과의 경쟁에 이기기 위해서는 남들보다 더 노력하고 오로지 일만을 위해 모든 개인적 시간을 포기해야만 한다는 것을 그들은 조직사회의 생리를 통해 체득한다. 그런 삶을 행복하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내일의 행복을 위해 현재를 저당 잡힌 채 살아가야 하는 것이 자본주의 사회의 구성원으로 살아가는 오늘날 직장인들의 운명이라고 할 수 있다. 자본주의의 바깥을 사유하기 힘든 이 시대에 누군들 그 운명으로부터 쉽게 벗어날 수 있겠는가.

i는 술병을 들고 테이블 위로 올라갔다 그가 든 술병엔 술이 없었다 술이 없는 술병이란 애주가를 종종 실연의 슬픔에 젖게 한다 i는 조금만 써도 똥이 나오는 0.7mm 모나미153볼펜이었다 그가 다니는 석세스컴퍼니에는 그와 같은 153볼펜들이 수두룩이 앉아 있었다 i의 회사는 사원 복지와 근무 환경 개선에 모범적인 직장으로 근로복지공단에서 AA평가를 받은 업체였다 그래서 볼펜들은 오전 열시 반 오후 세시 반이면 사내 방송에서 틀어주는 모차르트의 「터키 행진곡」에 맞추어 중간 체조를 해야 했다 볼펜들의 체조는 일종의 전위 무용 공연이었다 무용 공연이 끝나면 153볼펜들은 다시 얌전히 앉아 열심히 잉크 똥을 만들어야 했다 그러기를 반복반복반복. 그가 술병을 들고 테이블 위로 올라가게 된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i는 애주가가 되기를 희망해본 적이 없다 그는 자신이 무언가를 사랑하게 되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테이블 위의 i를 끌어내리려는 BAR의 e마담은 전직 회계사무소직원이었다 e마담은 i를 사랑했다 i는 늘 얌전했으므로 그녀가 애용하던 모나미153볼펜 같았으므로 그를 위로해줄 수 있는 이는 자신밖에 없었으므로 i를 사랑했다 e마담에게는 뭐든지 이유가 필요했다 이유 없는 지출은 연말결산신고에서 애를 먹였기 때문에 그런 버릇이 생긴 것이다 매달 열세 번째 수요일 오후 다섯시면 그녀의 BAR가 있는 거리엔 비가 내렸다 비가 내리고 난 다음날이면 e마담은 어김없이 생리를 시작했다 그런데 그녀의 i에 대한 심적 지출은 이유가 분명치 않았다 i는 e마담의 손을 뿌리치며 옆 테이블로 건너갔다

―유형진, 「애주가i」(<피터래빗 저격사건>, 랜덤하우스중앙, 2005) 부분


유형진의 시는 조직사회의 논리에 철저히 길들여진 샐러리맨들을 ‘모나미153볼펜’에 비유한다. 그러고 보니 소문자 i로 표상된 왜소화된 주체는, 정체성을 가지고 살아가기 힘든 현대인을 표상하는 동시에 똥이 잘 나오는 모나미153볼펜의 모습을 닮았다. 그들의 삶이란 누르면 나오는 모나미153볼펜과 다를 것도 없다. 사회구성원을 기계의 부품으로 길들이는 자본주의 하의 조직사회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이렇게 사물화 된다. “사원 복지와 근무 환경 개선에 모범적인” 석세스컴퍼니는 사원들의 휴식까지도 철저히 관리한다. “오전 열시 반 오후 세시 반이면 사내방송에서 틀어주는 모차르트의 「터키 행진곡」에 맞추어 중간 체조를 해야”하며 “무용 공연이 끝나면 153볼펜들은 다시 얌전히 앉아 열심히 잉크 똥을 만들어야” 한다. “그러기를 반복반복반복”, 다람쥐 쳇바퀴 돌듯 하는 그들의 철저히 관리된 삶은 마침내 “술병을 들고 테이블 위로 올라가”는 일탈을 불러온다. 그렇게라도 스트레스를 풀지 않고는 미치지 않고 살아가기 힘들 것이다.

김중일은 “지구로 파견된 SMLC의 영업사원” K를 통해, 그것을 뒤집는 거대한 손에 의해 모든 것이 세팅되어 있는 ‘지금, 여기’의 모래시계 같은 삶을 그린다. 그곳에서는 심지어 기억마저 “당신이 찾을 수 없는 폴더에 모조리 백업된다.” “모래기둥이 아주 조금씩 바람에 깎여 나가듯, 흔적도 없이 증발하는 날들”(김중일, 「모래시계-made by SMLC」(<국경 꽃집>, 창비, 2007))은 ‘지금, 여기’에서의 우리네 삶을 닮았다. 이 거대한 조직 사회에서 개개의 구성원의 의지 따위로 바꿀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음을 모래시계의 비유를 통해 김중일은 그려내고 싶었을 것이다.


3. 시들어가는 노동자와 불안의 징후들

최근 노동계를 강타한 최고의 이슈는 비정규직 노동자의 처우 문제일 것이다. 4대 보험의 혜택을 받을 수 없고 내일이 보장되지 않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삶은 그날 벌어 그날 먹고 사는 하루살이와 다를 바 없다. IMF 외환 위기 이후 평생직장 개념이 무너진 한국 사회에서 비정규직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내일이 불안한 하루하루를 근근이 살아간다는 뜻이다. 최근에는 예비 비정규직 인생이 될 운명에 처한 젊은 세대들을 가리켜 ‘88만원 세대’라고 명명할 정도로 내일이 보장되지 않는 생계에 대한 사회적 불안이 확산되어 가고 있다. 한국 사회의 양극화가 심화되면서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겪는 사회적 불안은 더 이상 남의 일이 아닌, 누구에게나 언제든지 닥쳐올 수 있는 일이 되어가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노동현장에서의 체험을 기반으로 시를 쓰는 시인들의 시에서 적나라하게 그려진다.

일을 하다 말고 김형과 박형이 싸운다


종두도 덕형이도 얽혀든다

최씨도 이반장도 얽혀든다

나는 고장난 그라인더나 뜯어말리자

네 개의 고정나사를 푼다

커버를 벗기고

또 네 개의 기어 고정나사를 푼다

모터와 베어링을 뜯어말린다

엉켜 있는 기어와 접속기어를 뜯어말린다

차분히 앉아 담배를 피우는 동안

부품들은 따로 떨어져서 반성중이시다?

어이? 김형 이리 와봐, 풀 때는 풀었는데

이거 어떻게 조립하는 거야?

박형 이 베어링 새거 있나?

박형은 베어링을 찾으러 창고로 가고

김형은 나에게 오고 있다

그라인더는 다시 조립되고

모두 제자리로 돌아간다

저마다 하나의 나사가 되어

조여지고 있다

―최종천, 「나사들」(<나의 밥그릇이 빛난다>, 창비, 2007) 전문


21세기에도 여전히 노동자로서의 정체성을 가지고 시를 쓰고 있는 최종천은 노동 현장에서 흔히 일어나는 김형과 박형의 싸움을 빌려 그들을 나사에 넌지시 비유한다. 김형과 박형이 벌인 사소한 싸움에 종두도 덕형이도 최씨도 이반장도 얽혀든다. ‘-도’라는 조사를 반복적으로 사용함으로써 시인은 이들 외에도 누구나 그 싸움에 얽혀들 수 있음을 우회적으로 보여준다. 그런데 화자인 ‘나’의 행보가 좀 남다르다. 다른 이들처럼 싸움에 얽혀드는 대신 ‘나’는 “고장난 그라인더나 뜯어말리자” 생각하며 “네 개의 고정나사를” 풀기 시작한다. 모터와 베어링을 뜯어말리고 “엉켜 있는 기어와 접속기어를 뜯어말린다”. 그렇게 나사를 풀어 엉켜 있는 문제점을 하나하나 해결하듯 ‘나’는 그들의 싸움을 말린다.

어느새 엉켜 있던 그들은 따로따로 떨어져 나와 어색한 시간을 보내고 있다. ‘나’는 “차분히 앉아 담배를 피우”다가 넌지시 싸움에 가담했던 동료들을 한 사람씩 불러 어색함을 해소하도록 돕는다. 김형에게는 그라인더의 조립 방법을 묻고, 박형에게는 새 베어링이 있는지 묻는다. 물론 조립 방법이나 새 베어링이 있는지 여부를 몰라서 물었다기보다는 어색함을 풀고 그들이 다시 평온한 일상으로 돌아가도록 돕기 위한 질문이라고 봐야 한다. 어느새 김형과 박형은 노동자로서의 일상으로 돌아간다. 그라인더가 조립되듯이 그들은 모두 제자리로 돌아간다. 이 시는 나사의 비유를 통해, 잘못 조립된 우리 사회도 그렇게 나사들의 재조립에 의해 다시 짜여질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말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이 시가 흥미로운 것은, 그 이중성에 있다. 노동자를 나사에 비유하는 시선이 흔히 거대조직의 일원으로서 자유의지가 상실된 인간의 모습을 주로 그려 왔다면, 이 시에서는 그런 기존의 시각을 바탕으로 하면서도 나사를 풀어 다시 조립하는 것이 가능한 것처럼 얽히고설킨 관계를 푸는 변화의 가능성을 지닌 존재로 나사의 비유를 사용하고 있다. 이러한 전유는 노동자의 시선을 통해 가능한 것이기도 하다.

그는 “인간의 유일한 실재인 노동보다/입에서 쏟아지는 허구가 힘이 되고 권력이” 되는 세상에 절망하면서도 “실재의 아무것도 만들지 않으며/ 허구조작에 전념하고 있”는 “노동을 잃어버”(최종천, 「가엾은 내 손」(<나의 밥그릇이 빛난다>))린 자신에게 비판의 화살을 돌리는 것 또한 잊지 않는다. 이러한 자기반성의 시선이 최종천의 시에 시적 긴장을 불어넣는 힘으로 작용하고 있다. 21세기의 노동시에 필요한 윤리적 시선은 아마도 이런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KTX 여승무원이 되고 나서

나는 껌을 씹지 않는다.

컵라면도 통조림도 먹지 않는다

봉지 커피도 티백 보리차도

드링크도 탄산음료도 마시지 않는다

물티슈도 내프킨도 종이컵도

나무젓가락도 볼펜도 쓰지 않는다

[중략]

KTX 여승무원이 되고나서야 나는

이 세상이

한번 쓰고 버려지는 것들의

눈물이라는 것을 알았다

흐르고 넘쳐

자꾸자꾸 밀려오는

파도란 것을 알았다

―김명환, 「계약직-KTX 여승무원이 되고 나서」 부분


비정규직, 계약직, 임시직……. 4대 보험의 혜택을 받을 수 없고 신분보장이 되지 않는, 비정규직을 이르는 말은 많기도 하다. 김명환의 시는 한동안 서울역에 가면 볼 수 있었던 KTX 여승무원의 처우 개선 문제를 계약직 여승무원의 입을 빌려 직접적으로 노래하고 있다. 대개의 노동현장에서 그려지는 시가 선동성이 강한 데 비해, 이 시는 여승무원의 비정한 현실과 그로 인한 서러움을 그리는 데 주력하고 있다.

현대인이라면 누구나 일회용품을 쓸 기회가 많다. 환경을 의식해 일부러 쓰지 않으려 애쓰지 않으면 일회용품을 쓸 기회는 얼마든지 널려 있다. 이 시의 화자인 KTX 계약직 여승무원도 일회용품이나 인스턴트식품을 별 의식 없이 써 왔다. 하지만 KTX 여승무원이 된 후에는 차마 그럴 수 없었다고 그녀는 고백한다. “껌을 씹지 않”고 “컵라면도 통조림도 먹지 않는다”. 한번 마시고 버리는 인스턴트식품이나 시중에서 파는 일회용으로 포장된 음료수, 종이컵이나 나무젓가락 같은 일회용품도 쓰지 않는다. “한번 쓰고 버려지는 것들”이라는 점에서 그것들이 마치 자신의 신세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KTX 여승무원이 되고 나서 “이 세상이 한번 쓰고 버려지는 것들의 눈물”임을 비로소 깨달았다고 그녀는 말한다. 김명환의 시는 이렇게 정서에 호소한다. 다소 감상적으로 느껴질 수도 있지만, 내일이 보장되지 않는 비정규직의 노동조건을 남의 일이 아니라고 느끼는 사람들에게 이 시는 공감의 힘을 자아낸다. 저들의 목소리가 저들만의 것이라고 어찌 단언할 수 있겠는가.


4. 뿌리 뽑힌 사람들의 비애

직업이라는 프리즘으로 최근 시를 읽을 때 가장 두드러진 현상은 직장을 잃거나 직장으로부터 밀려난 사람들, 고향이나 고국을 떠나 떠돌아다니는 사람들을 그린 시가 부쩍 많아졌다는 점이다. 노동현장에서 씌어지는 시나 비정규직 노동자를 그린 시와 함께 최근 우리 사회의 노동환경의 변화를 가장 잘 보여주는 시가 이런 유형의 시들이라고 할 수 있겠다. 직장을 잃고 백수가 되어 고시원을 전전하거나 노숙자가 되어 살아가는 사람들, 어느새 우리 사회 노동력의 상당 부분을 차지했지만 여전히 경제적으로나 정서적으로나 소외되어 있는 외국인 노동자들, 뿌리 뽑힌 디아스포라들이 모두 이 부류에 속한다고 볼 수 있겠다.


물이 신고 가는 물의 신발과 물위에 찍힌 물의 발자국, 물에 업힌 물과 물에 안긴 물

물의 바닥인 붉은 포장과 물의 바깥인 포장 아래서

국수를 만다

허기가 허연 김의 몸을 입고 피어오르는 사발 속에는 빗물의 흰머리인 국숫발,

젓가락마다 어떤 노동이 매달리는가

이국의 노동자들이 붉은 얼굴로 지구 저편을 기다리는,

궁동의 버스종점

비가 내린다,

목숨의 감옥에서 그리움이 긁어내리는 허공의 손톱자국!

비가 고인다,

궁동의 버스종점

이국의 노동자들이 붉은 얼굴로 지구 이편을 말아먹는,

추억이 허연 면의 가닥으로 감겨오르는 사발 속에는 마음의 흰머리인 빗발들,

젓가락마다 누구의 이름이 건져지는가

국수를 만다

얼굴에 떠오르는 얼굴의 잔상과 얼굴에 남은 얼굴의 그림자, 얼굴에 잠긴 얼굴과 얼굴에 겹쳐지는 얼굴들

얼굴의 바닥인 마음과 얼굴의 바깥인 기억 속에서

―신용목, 「붉은 얼굴로 국수를 말다」(<바람의 백만 번째 어금니>, 창비, 2007) 전문


“이국의 노동자들이 붉은 얼굴로 지구 저편을 기다리는,/궁동의 버스종점”에 비가 내린다. 궁동의 버스종점에 붉은 포장을 치고 자리 잡은, 비 내리는 포장마차에서 얼굴이 붉은 이국의 노동자들이 국수를 말아먹는다. 추적추적 비는 내리고 바닥에 물은 흥건히 고여 가고 허연 김이 나는 국수는 계속 삶아지고 이국의 노동자들의 작업복은 비에 젖어 비 젖은 포장마차처럼 축축 처져 간다. 포장마차 바깥은 어둡고 안은 허연 김이 서려 있다.

국수를 말아먹으며 그들은 지구 저편에 두고 온 추억도 함께 말아 먹는다. 그들에게도 사랑하는 가족이 있을 것이고, 사랑하는 연인이나 조국도 있을 것이다. 위화감 없이 쓸 수 있는 그들의 언어도 있을 것이다. 그 모든 것을 버리고 낯선 땅 한국에 와서, 허기에 젖은 채 위화감과 소외감을 느껴가며, 종종 부당한 대우와 폭력에 시달림을 당하며 이국의 노동자로서 그들은 살아가고 있다. 그들 역시 오래 전 우리가 그랬듯이 가난을 벗어나기 위해, 가족의 더 나은 미래를 위해 낯선 땅에 일하러 온 이들이다. 우리가 아메리칸 드림을 가지고 미국으로 사우디로 돈 벌러 갔듯이, 그들 역시 코리안 드림을 품고 이곳에 왔다.

고향에 두고 온 사랑하는 사람들에 대한 그리움쯤은 이렇게 추적추적 비가 오는 날, 허기를 달래기 위해 국수를 말아먹으며 잠깐 떠올릴 뿐이다. 신용목의 시는 이국의 노동자들이 이 땅에서 겪을 외로움과 소외감을 물기 어린 서정의 언어로 그려낸다. 전지구적 자본주의의 재편을 가장 첨예하게 보여주는 이 존재들은 오늘의 우리를 돌아보게 한다는 점에서 타자임에 분명하다. 3D업종에서 일하며 우리의 노동시장의 빈자리를 메워주는 중요한 노동인력이 되었지만, 다른 언어를 쓰고 다른 국적을 가지고 있으며 경제적으로 약자라는 이유로 그들은 대개 부당한 대우를 받으며 착취당하고 있다. 피해자의 얼굴을 하고 있던 우리는 어느새 가해자로 둔갑해 우리가 당한 것 이상을 그들에게 행사하고 있다. 이 패권주의와 힘의 논리의 악순환을 극복하지 않는 이상 인류 사회에 희망은 없어 보인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그들에 대한 동정이 아니라 타자에 대한 최소한의 윤리이다. 그것은 국가와 인종의 문제를 떠나 더 근원에서 맺어지는 연대와 관련이 있는 문제이다. 그러나 많은 논의들이 있었듯이, 패권주의가 지배하는 인류사회에서 그 최소한의 윤리를 지키는 일이 결코 쉽지는 않다.

신용목의 시는 뿌리를 잃고 떠돌아다니는 사람들을 그리는 데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구두수선 구두닦음”이라는 표어를 내걸고 서울에 정착하기까지 뗏목 하나에 의지해 여러 차례 위기를 겪으며 표류해온 허봉수의 일대기를 그린 「허봉수 서울 표류기」(<바람의 백만번째 어금니>) 역시 비슷한 문제의식을 지닌 시이다.


화장실 변기통에 앉아서

콩팥을 팝니다 전화 주세요, 를 보다가

나도 내 장기를 팔아 노후를 준비하듯

우리나라를 조금씩 떼어서 해외로 수출한다면

사람들은 모두 부자가 될 것이다

당겨쓴 카드빚과 텅 빈 통장을 생각하면

개인이 겪는 슬픔 따윈 아무것도 아닌

다수의 다수를 위한 두루마리화장지처럼

계속 풀려나오는

누군가의 슬픈 낙서 앞에서

나라가 있어야 개인이 있는 것이다,라고 말하지 말자

누가 나를 좀 팔아다오

나도 그에게로 가서

기꺼이 삼사만원의 현찰이 되어줄 테니

의지할 곳 하나도 없이 늙어가는 건달들아

제 손금을 들여다보지 마라

거기엔,

낳으시고 기르신 부모님 은혜가 없다

그 손으로 태극기 앞에 맹세할 의무가 없다

변기통의 물을 내리고

씩씩하게 지퍼를 올리고 아무리 다짐을 해도

갈 곳이 없는 사람들이

자신의 생으로 뭔가를 증명해야 한다면

화장실 벽에

이렇게 쓸 수밖에 없다

제일 싼 血 팝니다,

자본주의 만세!

―최금진, 「팝니다, 연락주세요」(<새들의 역사>, 창비, 2007) 전문


최금진의 시는 한층 더 냉소적이고 직접적이다. 그는 우회하기보다는 대놓고 이 대책 없는 자본주의 사회를 비판한다. 화장실에서 “콩팥을 팝니다, 전화주세요”라는 문구를 본 화자에게 그 문구는 지극히 현실적인 상상력을 불러일으킨다. 실제로 자신의 장기를 팔아서라도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려 들거나 자신의 생계를 이어나가야 하는 사람들이 우리 사회에는 많다. 불법 장기 매매가 얼마나 위험하며 사기당할 확률이 얼마나 높은지 그 위험성을 그들이 몰라서 피하지 못하는 것은 아닐 게다. 그만큼 벼랑 끝까지 몰려서 다른 방도가 없으니까, 어차피 죽을 수밖에 없으니까 혹시나 하며 마지막 몸부림을 쳐보는 것뿐이다.

벼랑 끝으로 절박하게 몰린 그들에게 ‘신체발부수지부모’니 나라가 있어야 개인이 있는 것이라느니 아무리 떠들어봐야 소용없다. 그보다 훨씬 절박한 것은 “당겨쓴 카드빚과 텅 빈 통장”이다. 바깥이 없는 자본주의 사회가 무섭고 끔찍한 것은, 가난을 인간으로서의 최소한의 도리와 윤리마저 행할 수 없는 비인간적 조건으로 몰아넣는다는 데 있다. 이 가난에 낭만 따위가 있을 리 없다. 그것은 어느새 부끄럽고 죄스러운 것이 되어 버렸다. 조국도 부모도 인간다움도 모두 자본주의의 논리를 앞설 수 없다. “낳으시고 기르신 부모님 은혜”를 갚을 의무도 “태극기 앞에 맹세할 의무”도 그들에겐 부과되지 않는다. 그러니까 이 갈 곳 없는 사람들이 “자신의 생으로 뭔가를 증명해야 한다면/화장실 벽에/이렇게 쓸 수밖에 없다”. “제일 싼 血 팝니다”. 정말이지 위대한 “자본주의 만세!”라고 말이다. 최금진의 시는 우리 시대의 자본주의가 그 내부자들을 어떻게 관리하고 통제하는지 정확하게 꿰뚫어보고 있다. 최금진은 적나라하게 현실을 보여줌으로써 바깥 없는 자본주의를 냉소한다.


5. 친절과 속도로 무장한 서비스업종의 이면

자본주의 사회에서 급속도로 증가할 수밖에 없는 업종이 있다면 그것은 아마 서비스업종일 것이다. 소비를 찬양하는 자본주의의 논리를 경배하는 업종이 바로 3차 산업인 서비스업종이다. 친절과 속도와 편의로 최상의 서비스를 제공하는 각종 서비스업종은 불황 속에서도 호황을 누리고 있다. 불황으로 서민경제는 위태로워져도 백화점에서는 고가의 제품일수록 더 잘 팔리는 아이러니가 현실이 된 지 이미 오래다. 빈익빈부익부는 점차 심화되어서 사회 전체를 양극화로 몰아가고 있는 것이다. 서울은 물론이고 지방의 대도시들도 어김없이 양극화 되어가고 있다.

친절과 속도를 모토로 하는 서비스업종을 그린 시들은 대개 그 이면을 그리는 데 관심을 갖는다. 고객 앞에서 늘 친절한 웃음을 웃어야 하는 서비스업종 종사자들의 비애를 그리거나 속도로 상징되는 자본주의의 위태로움을 그리고자 한다.


언제나 당신들이 옳았다는 것을……

변기에 얼굴을 처박고 나는 생각했다

당신들의 비슷비슷한 외모 태도와 말솜씨

그런 것들은 오랜 시간이 흘러도

당신들의 주문이 옳았다는 것을 확신케 하고

될 수 있으면 나는 이런 식의 이야기들을

유니폼과 에이프런,

검은색과 흰색으로만 적고 싶었다

먹고 토하고 먹고 토하는 일에 대해

스탠드의 불빛이 흰 벽을 스치듯

식기와 찻잔을 나르는 일에 대해

수저를 주워 당신들의 테이블에 되돌려놓는

혼자만의 시간에 대해

변기의 물을 내리고

입술을 씻으며 나는 생각했다

언제나 당신들의 계산이 옳았다는 것을

당신들의 지나간 날들 얼룩진 과거와 현재

그런 것들은 오랜 시간이 흘러도

더 이상 당신들의 감수성이

당신들의 삶을 변화시킬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하고

되도록 나는 이런 식의 이야기들을

메뉴와 빌즈,

검은색 흰색으로만 쓰고 싶었다

속고 속이고 사랑하고 배신하며 죽이고 살리는 일에 대해

낡은 오디오의 음악이 흰 벽을 타고 흐르듯

침묵 속에서 조용히 칼과 포크를 나르는 일에 대해

부서진 컵 조각을 주워 당신들을 안심시키는

혼자만의 시간에 대해

밤이 지나고 아침이 와도

아침이 가고 또 다른 밤이 찾아와도

언제나 되돌아오는 그 시각 그 테이블에서

당신들의 멈추지 않는 식욕이 옳았다는 것을

흰색 블라우스와

검은색 스커트의 주름을 바로잡으며

이 불빛의 도시에서 가장 초라하고 더러운 화장실 밖으로

그 어떤 웨이트리스보다 더 밝고

친절한 얼굴로 걸어 나가는 일에 대해

역시 옳다고 믿는 앞으로의 기나긴 시간들에 대해.

―황병승, 「웨이트리스」(<트랙과 들판의 별>, 문학과지성사, 2007) 전문


“당신들의 멈추지 않는 식욕”이 지배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화려한 소비도시의 밤을 책임지는 웨이트리스의 삶에 대해 황병승의 시는 그녀의 입을 빌려 노래한다. 식기와 찻잔을 나르고, 손님들이 주는 술을 받아먹고 토하고 먹고 토하는 일을 되풀이하고, 침묵 속에서 조용히 칼과 포크를 나르며 사는 그녀들의 “혼자만의 시간에 대해” 황병승의 시적 주체는 관심을 갖는다. 항상 최고의 친절과 봉사와 웃음으로 고객 앞에 서는 그녀들이지만, “이 불빛의 도시에서 가장 초라하고 더러운 화장실” 안에서는 받아먹은 술을 고통스럽게 토하고 “변기의 물을 내리고/입술을 씻으며” “흰색 블라우스와/ 검은색 스커트의 주름을 바로잡으며” “당신들의 멈추지 않는 식욕이 옳았다는 것을” 깨닫는 웃음기 가신 그녀들이다.

굵은 글씨로 쓰여 있는 “언제나 당신들이 옳았다는 것을……”에서 느껴지는 것은 계란으로 바위를 쳐본 사람이 갖게 되는 무력감이다. 그러므로 그녀들은 “그 어떤 웨이트리스보다 더 밝고/ 친절한 얼굴로 걸어 나가”며 “옳다고 믿는 앞으로의 기나긴 시간들”을 살아가려고 한다. 흥미로운 것은 “-에 대해”라는 표현이 반복된다는 데 있다. ‘-을’이 정면으로 대하는 태도라면 ‘-에 대해’는 조금쯤 사선으로 비껴서 있는 태도이다. 거기서 사유의 공간이 생겨난다. “검은색 흰색으로만 쓰고 싶”은 흑백의 세계에서 벗어날 가능성이 이 사유의 공간에서 열린다. 그녀는 여기서 ‘아는 자’가 된다. 그것은 속지 않는 자이기도 하다. “당신들의 멈추지 않는 식욕이 옳았다는 것을” 알면서 “초라하고 더러운 화장실 밖”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아는 존재. 그녀에게 일말의 희망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이 앎에서 올 것이다.


검은 옷과 검은 헬맷의 퀵서비스맨 오토바이로 차들 사이사이를 비집으며 달린다 등 뒤에서 밀봉된 박스가 덜컹거리고 엉덩이 아래 양쪽에서 주황색 비상등은 쉴 새 없이 동시에 깜박인다 비상등은 허공의 맥박이다 몸의 주술이다 시간의 다급한 구토다 퀵서비스맨 쉴 새 없이 차선을 바꾼다 납작하고 가파른 사이드 미러에 차들과 허공을 담았다 뱉어버린다 차들의 사이드 미러에 느닷없이 들이닥쳤다 나와버린다 허공의 암벽에 시선을 척척 갖다 건다 퀵서비스맨 허공의 암벽을 뚫는다 소리가 울퉁불퉁하다 파편들이 사방으로 튄다 시간이 하혈한다 퀵서비스맨 몸이 줄줄 샌다 길은 계속 질주한다 퀵서비스맨이 흘리고 가는 몸을 차들이 짓이기며 간다 몸은 잘 다져진다 길에서 살냄새가 난다 몸이 빠져나간 바지와 점퍼가 펄럭인다 퀵서비스맨 곧 철거될 임시 천막 같다 어깨를 따라 둥글게 새겨진 성실퀵서비스가 타다 남은 뼈처럼 덜그럭거린다 낡은 오토바이의 비좁은 난간 위에 악착같이 붙어 있는 것은 두 발인가 굳어버린 절규인가 절망이라는 새살인가 바람이 천막의 앞가슴을 퍽퍽퍽 치며 묻는다 텅 빈 몸 안에 바람의 근육을 달고 질주하는 퀵서비스맨 살을 내어주고 삶의 시간을 얻는 퀵서비스맨 느닷없이 급브레이크를 밟는다 허공이 쭉 찢어진다 짙은 곰팡이 냄새가 난다 브레이크 등에서 흘러내리다 멈춘 퀵서비스맨의 심장이 펄떡거린다 심장은 아직 붉다 물컹하다

―이원, 「퀵서비스맨」(<세상에서 가장 가벼운 오토바이>, 문학과지성사, 2007) 전문


이원의 최근 시집 <세상에서 가장 가벼운 오토바이>는 속도에 관한 시집이다. 퀵서비스맨과 오토바이들이 자주 등장하는 것도 속도에 대한 그녀의 탐색 때문이다. 디지털 시대야말로 속도가 지배하는 세계이다. 그런 점에서 그녀의 선택은 필연적인 것이기도 하다. 작은 오토바이 하나에 몸을 싣고 달리는 퀵서비스맨. 이들은 종종 밤이면 폭주족들로 변신한다. 그들은 속도를 온몸으로 체감할 수 있는 자들이다. 위험을 담보하는 만큼 그들이 느끼는 속도는 가장 현실감 있는 스릴을 선사한다. 오토바이에 올라타 속도를 내는 퀵서비스맨은 곧 오토바이와 하나가 된다. 속도에 몸을 실은 퀵서비스맨은 도로에 몸을 흘리고 간다. 속도는 존재의 얼굴과 몸을 지워 버린다. 빠른 속도를 추구하는 전지구적 자본주의 사회에서 살아가는 우리의 삶도 시간이 하혈하고 도로에 몸을 흘리고 가는 퀵서비스맨과 그리 달라 보이지 않는다.


6. 제도와 억압의 상징으로서의 교사

최근 젊은 시인들의 시에서 빈번히 등장하는 직업 중 하나가 교사이다. 제도의 폭력과 억압에 민감한 젊은 시인들의 시는 주로 가정 폭력과 학원 폭력을 대상으로 하는 경우가 많은데,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교사라는 직업이 자주 등장하게 된다. 이때 교사는 대개 제도와 억압의 상징으로서 그려지며, 부정적인 기성세대의 이미지를 갖는다.


어제는 담배 오늘은 귀걸이 우리들은 허벅지에 테이프로 붙인 커닝 페이퍼 윤나는 머리털 이런 거 다 빼앗겼지만 아아아 고마워라 자 합창합시다 악보를 읽을 줄 몰라도 공식적으로 소리 지를 수 있다면 무슨 노래라도 부를 수 있었다 이즈음이면 방화가 잦던 산 아래 학교였고 나무를 좋아했지만 숲을 피해 다녔다 나는 있는 둥 마는 둥 한 아이였다 잃어버리거나 압수당할 물건도 없었다 강당에 다녀오니 빈 지갑이 없어졌고 그날 주번이 바뀌었다

붕괴 조짐이 보이는 옥상을 뛰어다녔다 제발 부서져라 부모님은 뭐 하시니 가정 방문 온 담임을 보고 새엄만 홀복처럼 찰랑찰랑했다 이브 몽탕 닮으셨어요 아버지는 밀수하다 또 걸려간 후였고 나는 신발을 구겨 신고 부둣가를 서성거렸다 몽땅 얕고 좁고 짧은 목구멍을 탓했다 다 합창하세요 아아아 보답하리 학교에 다녀오니 새엄마가 사라졌다 양복장이 홀가분해져 있었다 다음 날 담임이 결근했다

결손은 불어 제시문같이 낯설었지만 미지수를 소거한 후 답을 찾는 규칙과 그 부질없는 답처럼 정해져 있었다 합창하세요 아아아 선생이란 입만 벌렸나 소리를 내나 뚫어져라 쳐다보는 사람이었고 키 큰 학생과 구분하기 위해 붙인 이름이었고 부모와 견줄 만큼 이상한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또 하느님처럼 절대 이해할 수 없었고 무조건 맞아요 하면 옳다고 대답했다

체육관 창가에 오래 붙어 서 있다 아버지가 먹다 던진 두부 같은 구름은 비와 옛날을 불러오고 마이크에 팅팅 불어 나오는 노랫말 소리는 십수 년 전과 변하지 않았다. 아아 고마워라 천벌 같은 폭풍우를 좋아하지만 우산을 잊지 않는다 학생들의 것도 빼앗아 쓴다 이제 나는 선생을 이해하고 모자람 없이 결손되었다

―김이듬, 「합창합시다-스승의 날」(<명랑하라 팜 파탈>, 문학과지성사, 2007) 전문


‘아아아 고마워라 스승의 사랑 아아아 보답하리 스승의 은혜’라는 후렴구가 붙어 있는 노래 ‘스승의 은혜’는 아직도 스승의 날이면 종종 학교에 울려 퍼지지만, 진정한 스승이 사라져가고 스승의 권위가 땅에 떨어진 지 오래인 오늘의 학교에서 그 노래에 진심이 담겨 있기는 쉽지 않다. 김이듬의 시에서 인용된 ‘스승의 은혜’ 노래 역시 마찬가지다. “아아아 고마워라”, “아아아 보답하리”하며 아이들의 합창이 울려 퍼질 때 거기엔 존경과 감사가 아닌 조롱과 경멸이 차라리 담겨 있다. 아이들은 그 노래에 공감하거나 그 노래를 원해서 불렀다기보다는 “악보를 읽을 줄 몰라도 공식적으로 소리 지를 수 있다면 무슨 노래라도 부를 수 있었”던 것에 불과했다. “어제는 담배 오늘은 귀걸이” “허벅지에 테이프로 붙인 커닝 페이퍼 윤나는 머리털”, 아이들은 할 수 있는 한 일탈과 반항을 시도했고 선생들은 그 모든 일탈의 흔적을 압수하기에 바빴다.

담임교사의 가정 방문이 있던 시절, 학교라는 조직에 의해 ‘결손 가정’으로 낙인찍힌 아이들이 느꼈을 상대적 박탈감이란 엄청난 것이었을 게다. 그것은 사회에 나가서 그들이 겪을 소외감에 대한 선행학습 같은 것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운이 좋아서 좋은 교사를 만나는 학생들은 좀 달랐겠지만, 그렇지 않은 학생들에게 학교에서의 생활이란 지옥 같은 것이 아니었을까.

“결손은 불어 제시문”처럼 해당 아이들에게도 낯설지만 이미 정해져 있는 것이었다. 아이들의 눈에 비친 선생들이란 “부모와 견줄 만큼 이상한 사람들이었다”. 아이들에게 선생들이란 “절대 이해할 수 없”는 존재들이었고 “무조건 맞아요 하면 옳다고 대답”하는, 복종만을 원하는 사람들이었다. “천벌 같은 폭풍우를 좋아하지만 우산을 잊지 않는” 현실주의자인 선생을 시의 화자는 이제 이해한다고 말한다. 그것은 곧 그가 선생들과 마찬가지로 제도의 편에 선 어른이 되었음을 의미한다. “모자람 없이 결손되었다”고 그녀가 말하는 까닭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이 이상한 사회에 너무도 잘 적응해 사는 대부분의 어른들은 진정으로 모자람 없이 결손된 존재들인지도 모른다.


파리채 선생

진짜 인생을 모르는 늙은 노처녀가 있다 그녀가 어떻게 선생이 되었는지 아무도 모른다 국가적인 위협이 아닐 수 없다 이를테면 수업이 끝나는 즉시 집에 가서 숙제를 하고 불쌍한 부모를 도우라는 식이다 우리는 차라리 학교라는 게 없었으면, 하고 바라는 열일곱인데 그것을 표현하기라도 하면 또 등짝으로 파리채가 떨어진다 바보 같은 짓이다 우리를 일깨워주기는커녕 늙은 노처녀 선생의 이마에서는 땀이 흐르니까 말이다 국가적인 시간 낭비가 아닐 수 없다 서로의 인생관이 너무나 다르고 말이 통하지 않는다

―황병승, 「트랙과 들판의 별」(<트랙과 들판의 별>, 문학과지성사, 2007) 부분


황병승의 「트랙과 들판의 별」 한 부분에는 ‘파리채 선생’이 등장한다. ‘파리채 선생’은 그의 첫 시집부터 종종 등장하던 황병승 특유의 알레고리화된 인물들 중 하나이다. “수업이 끝나는 즉시 집에 가서 숙제를 하고 불쌍한 부모를 도우라는 식”의 교과서적인 충고를 일방적으로 전달하는 노처녀 선생에 대해 황병승 시의 주체는 “진짜 인생을 모르는 늙은 노처녀”라고 생각한다. 사실상 그것은 삐딱한 그 나이 아이들이 흔히 가질 만한 불만어린 시선이다. 아이들과 교감을 하는 방법을 모르는 선생에게도 책임이 있을 것이다. 저 나이의 아이들이란 대개 “차라리 학교라는 게 없었으면, 하고 바라는 열일곱인데” 그녀는 그것을 이해하려 들기는커녕 그런 마음을 표현하기라도 하면 아이들의 등짝을 사정없이 파리채로 후려친다. 그녀는 이미 아이들을 교감의 대상으로 보지 않는 매너리즘에 빠진 교사라고 할 수 있다. 아이들 또한 그것을 잘 알고 있다. “서로의 인생관이 너무나 다르고 말이 통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말이다. 아이들에게 그녀는 그저 ‘파리채 선생’일 뿐이다. 자신들을 한낱 파리로 취급하는 선생. 그 아이들에게 그녀의 존재도 다를 리 없다.

젊은 시인들에 의해 그려지는 교사의 모습이란 이렇게 제도와 억압과 불통의 상징인 기성세대 그 자체이다. 아이들과 선생들 사이에 대화란 차단되어 있고, 선생들은 오히려 아이들의 갑갑증을 더욱 부추길 뿐이다. 말이 통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그들은 부모와 닮아 있다. 이런 젊은 시인들의 시각은 사실상 이미 권위가 땅에 떨어질 대로 떨어진 우리 사회의 스승의 모습을 핍진하게 그리고 있다. 그들은 더 이상 스승이 아닌 수많은 직업 중 하나인 교사일 뿐이다. 씁쓸하지만 그것이 우리 사회의 현주소다.


7. 디지털 시대를 살아가는 시인과 예술가들

부정적인 이미지의 교사와 함께 최근 젊은 시인들의 시에서 자주 등장하는 직업은 시인을 비롯한 각종 예술가들이다. 여기에는 시인을 비롯해 순수예술을 하는 예술가들뿐만 아니라 랩퍼와 같은 대중 예술가, 빵을 굽는 장인, 마술사 등에 이르기까지 디지털 시대의 전문 기술직을 포함시킬 수 있다. 최근 젊은 시인들의 시에서는 그들과 시인 자신을 동일시하는 시적 상상을 보이는 시들이 종종 눈에 띈다.


당신의 기차는 내 창가에 묶여 있어요

창을 열면 낯선 구두가 이마를 꾹꾹 눌러요

하늘엔 새들이 오래도록 멈춰 서 있고요

여섯 가닥의 먹구름이 흘러가요 그 위로

한 줄기 번개가 소리 없이 디스토션을 걸어요

고압선을 따라 당국의 메시지가 전송되는 아침

소리 분리 수거법이 강화됐다는 전갈이에요

주부들이 소음을 가득 채운 쓰레기봉투를 던져요

기타줄은 소각됐고 당신의 기타는

기다란 손톱을 사랑하는 소리의 방주예요

레일을 잃은 기차예요

당신의 기타는 너무 오래 묶여 있어요

창을 닫으면 낯모를 신음이 벽을 두드려요

소녀들이 수화를 재잘거리며 지나가요

음반 가게에선 침묵을 구워 팔아요

아나키스트들은 복화술로 지령을 전달하고

사람들은 초음파로 대화하는 데 익숙해져가요

그 많던 기타줄은 다 어디로 갔을까요?

역사가는 백가쟁명의 선사라 우기고

정치가는 반국가적 복화술 책동이라 우겨요

사람들은 몰라요

기타는 달리고 기차는 울고

소리 없이 뛰는 건 당신의 심장이에요

자궁 위로 초음파가 지나듯 해가 저물어요

빈 술독 틈에서 소리 없는 나날이 저물어요

―신동옥, 「악공, Anarchist Guitar」(<악공, 아나키스트 기타>, 랜덤하우스코리아, 2008) 전문


신동옥이 그리는 풍경 속에서 모든 움직이는 것들은 정지해 있고, 소리 나는 것들은 침묵에 갇혀 있다. 고압선을 따라 “소리 분리 수거법이 강화됐다는” 당국의 메시지가 전송되는 아침 주부들은 “소음을 가득 채운 쓰레기봉투를 던”지고 기타줄은 소각된다. 기타는 “레일을 잃은 기차”가 되어 “너무 오래 묶여 있”다. 소리가 금지된 세상 속에서 소녀들은 “수화를 재잘거리”고 “음반 가게에선 침묵을 구워” 판다. “아나키스트들은 복화술로 지령을 전달하고/사람들은 초음파로 대화하는 데 익숙해져” 간다. 시인은, 당국의 공식적인 언어만이 일방적으로 사람들에게 전달될 뿐, 제대로 된 소리들은 모두 금지된 세계를 그린다. 그것은 시인이 이해하는 ‘지금, 여기’의 모습에 가까워 보인다.

기타줄 없는 기타를 연주하는 악공은 복화술로 지령을 전달하는 아나키스트인 셈이다. 신동옥은 언어에 대한 믿음이 사라지고 소통가능성이 줄어든 이 시대를 살아가는 시인 역시 그런 점에서 저 아나키스트와 다르지 않다고 본다.


내 육체 속에서는 무언가 가끔씩 덜그럭거리는데

그것은 가끔씩 덜그럭거리는 무언가가 내 육체 속에 있음을 상기시킨다

욕조 속에 몸 담그고 장모님이 한국에서 보내온 황지우의 시집을 다 읽었다

시집 속지에는 “모국어를 그리워하고 있을 시인 사위에게”라고 씌어 있었다

(장모님이 나를 꽤나 진지한 태도의 시인으로 오해하는 것이 사실은 부담스럽다)

문득 무중력 상태에서 시를 읽는 기분이 어떨까, 궁금해져

욕조 물속에 시집을 넣고 한 장 한 장 넘겨보았다

그렇게 스무드할 수 없었다

어떤 시구들은 뽀골뽀골 물거품으로 올라와 수면 위에서 지독한 냄새를 터뜨리기도 했다

욕조에서 나와 목욕 가운을 걸치며 나는 생각했다

정말 이 안에 아무것도 안 입어도 되는 것일까?

도덕적으로 그리고 미적으로 그래도 되는 것일까? 그러나

현 자본주의의 존재는 정당화될 수 있는가?

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나는 오랫동안 미루어왔다, 아니, 사실은

그런 질문을 애초에 던지기라도 한 것인가?

머리를 드라이어로 말리고 있는데

사회운동가인 맥에게서 전화가 왔다

그는 마찬가지로 사회운동가인 애인 레슬리 집에서 동거 중이다

오늘 밤에 자기네 집에서 식사나 같이 하자는 것이었다

(그가 나를 한국에서 온 좌파 급진주의자로 오해하는 것이 사실은 부담스럽다)

네 시인데 방 안은 벌써 어둑어둑해지고 있었다

주관적 조건과 객관적 조건이 맞아떨어질 때, 혁명이 일어나듯이

블라인드의 각도를 태양 빛의 입사각에 정확하게 맞출 때

이 방은 제일 밝다, 그러나 그런 일은

나 같이 게으른 인간에게는 거의 일어나지 않는다

대학 다닐 때, 데모 한번 한 적 없는 아내는 의외로 나의 좌파 친구들과 잘 어울린다

심지어는 오늘 또 다른 사회운동가 아라파트도 오는 거냐고 묻기까지 했다

(그러고 보니 아내는 지난 대선 때 민중 후보를 찍었다)

지난번 우리 집에서 「위 섈 오버컴」을 다 함께 합창할 때도

아내는 옆에서 녹차를 따르며 잠자코 웃기만 했다

아내는 그러나 이혼을 의식화시키는 결혼이라는 제도 속에서

그럴듯한 열매 한번 못 맺은 나쁜 품종의 식물, 나를 가꾸며 삼 년 동안 잘 버텨왔다

문득 고마운 마음이 들어 컴퓨터 앞에 앉아 있는 아내에게 다가가 목욕 가운을 활짝 펼쳐 보이고 싶었으나

나는 그런 짓이 도덕적으로나 미적으로 용납이 될 수 있을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의자에서 일어나 블라인드의 각도를 고치며 아내는 투덜거렸다

더 밝은 곳으로 이사 가고 싶어

하지만 집세를 생각해야 할 것 아냐. 그리고 당신, 내가 한 질문에 먼저 대답이나 하란 말이야!

그러나 내가 어떤 질문을 아내에게 한 것인가? 질문을 과연 하기나 한 것인가?

를 난 기억할 수 없었다, 기억하려고 애쓰는 동안

태양 빛이 블라인드의 각도를 심각한 수준 이상으로 초월하였으므로

방은 속수무책 어두워져갔고 이내 모든 것이 암흑속에 잠겨버렸다

―심보선, 「엘리베이터 안에서의 도덕적이고 미적인 명상」(<슬픔이 없는 십오 초>, 문학과지성사, 2008) 부분


21세기형 지식 룸펜 시라고 불릴 만한 성향을 보이는 심보선의 시에서도 시인으로서의 자의식이 종종 노출된다. 시인의 육체 속에서는 “무언가 가끔씩 덜그럭거리는” 또 다른 분신이 존재한다. 장모의 눈에 비친 그는 “모국어를 그리워하고 있을 시인”이며, 사회운동가인 맥에게 그는 “한국에서 온 좌파급진주의자”이다. 아내에게는 삼년 동안 잘 가꿔온 조금은 별 볼일 없는 남편이지만, “나는” “도덕적이고 미적인” 문제 앞에서 항상 갈등하고 번민하는 21세기의 시인이다. 한때 사회운동에 헌신했을 것으로 추정되고, 지금은 “현 자본주의의 존재”가 “정당화될 수 있는”지 스스로 질문을 던져보고 답을 미루며 회의하는 존재이다.

바깥의 시선과 스스로의 자의식 사이에 괴리감이 있고, 그 사이에서 혼란스러워하고 갈등하는 존재. 심보선이 그리는 시인의 자화상은 시의 위기를 맞은 21세기에 미적인 문제와 도덕적인 문제 사이에서 방황하고 갈등하는 지식 룸펜 시인의 모습을 적실하게 그려내고 있다.


8. 자본의 논리와 시의 존재론

‘직업’이라는 주제를 중심으로 최근의 우리 시를 살펴보았을 때,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자본의 전지구적 재편과 신자유주의의 논리가 시에도 어떤 형식으로든 반영되고 있는 점이라고 할 수 있다. 당장 한치 앞이 불안한 샐러리맨들과 비정규직 노동자들, 그리고 그들의 불안한 미래가 될 수도 있는 실직자와 노숙자들 같은 뿌리 뽑힌 사람들의 삶을 그린 시는 말할 것도 없고, 모든 것을 상품화하는 자본의 논리에 가장 잘 적응하고 있는 서비스업종이나 제도와 억압의 상징으로서의 교사, 디지털 시대를 살아가며 회의하는 예술가들을 그린 시에서도 전지구적 자본주의와 신자유주의의 그림자가 어른거린다. 21세기의 한국 사회에서 그것은 이미 시적 취향이나 이데올로기의 문제를 벗어나 있는 것으로 보인다.

전지구적으로 확장된 자본주의의 바깥을 상상하기 힘든 오늘의 한국 사회에서 발표되는 시들은, 주로 미래에 대한 불안감으로 흔들리고 있거나 무기력하게 소외되어 가는 직장인들을 그리는 데 바쳐진다. 뿌리 뽑힌 채 떠돌아다니는 것이 어디 그들의 삶뿐이겠는가. 우리의 미래라고 그와 다르다고 누군들 확언할 수 있겠는가. 아니, 현재의 문제에 붙들려 미래는 잊은 지 오래거나 상상할 여유조차 없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직업’에 주목하면서 최근의 우리 시를 읽을 때 두드러진 것은 역시 전지구적 자본주의 시대의 첨예한 풍경이었다. 시적 취향과 이데올로기의 문제를 떠나 전지구적 자본주의 시대의 삶의 방식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존재는 아무도 없다는 사실을 새삼 확인할 수 있었다. 자본의 논리는 점차 창궐하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시는 존재의 이유를 갖게 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자본주의의 바깥을 상상하기 힘든 시대이지만, 또한 체제의 외부자가 되지 않고는 꿈틀거리는 동력을 얻을 수 없는 것이 시의 운명일 테니 말이다.



이경수∙1999년 <문화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주요 저서로 <불온한 상상의 축제>, <한국 현대시와 반복의 미학>, <바벨의 후예들 폐허를 걷다> 등이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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