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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호 특집/유준/박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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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부
댓글 0건 조회 2,413회 작성일 09-01-19 12: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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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대의 ‘유사―직업인’들과 문학
유  준|문학평론가




  1. ‘직업’의 착잡함 혹은 ‘유사-직업인’
나는 직업이 없다.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고, 이렇게 평론가로서 원고도 쓰고 있지만 어떤 필요에 의해 적업란이 포함되어 있는 서류를 작성해야 할 때, 무어라 써야할지 난감해진다. 대학강사는 일년에 반(방학 때는 강의가 없으니)만 해당하는 직업인 동시에 그마저 학기마다 사정이 다르며, 프리랜서라고 하기엔 그야말로 너무 프리(without pay)하다. 즉 그 둘은 겉으로 보기엔 제법 폼 좀 나는 직함이지만 그저 비정규직일 뿐이다. 즉, 그 이름들은 나의 가난과, 사회적, 경제적, 심리적 불안정함을 가리는 베일에 불과하다. 그래서 정직하지 못한 이름이다. 또 (안 그러려고 해도) 부끄러워지는 이름이기도 하다. 그럴 수밖에. 삼십대 중반을 바라보는 나이다. 착잡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이 착잡함은 다행인지 불행인지, 나만의 것은 아닌 듯싶다. IMF이후 신자유주의의 무차별 폭격 속에서 많은 사람들이 고용불안에 시달리고 있다. 취업 자체도 힘들 뿐만 아니라, 취업을 해도 대개는 비정규직이며, 정규직이라 해도 언제 해고될지 모르는 처지에 놓여 있다. 그러니까 직업인이라고 하기도, 그렇다고 무직자라고 하기도 힘든 이른바 ‘유사-직업인’이라고나 할까. 바야흐로 이제 경제적 약자는 소수가 아니라 다수가 된 것이다. 사정이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2000년대 문학은 어쩐 일인지 이들을 조명함에 있어 상당히 나태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2000년대 이후 소설의 키워드는 단연 욕망이다. 시니피에의 공백을 화려한 욕망의 기표놀음이 채우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물론 또 그 나름대로 동시대의 실존이 놓여 있는 자리를 정직하게 응시하려는 시도임에는 굳이 이의를 달고 싶지 않다. 욕망은 허무하나, 그 허무 자체가 오늘날 숨길 수 없는 모럴의 다른 이름임을 부인할 수 없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근래에 들어서는 가령 윤성희나 천운영의 근작들이 보여주듯 그 욕망이 주체의 사도-마조히즘적 나르시시즘을 넘어 타자를 발견하고 화해의 공간을 마련하고 있기도 하다. 그러나 그렇다손 치더라도 문학이 본래적으로 지녀왔던 약자들에 대한 관심이 여전히 턱없이 부족하다는 점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더군다나 앞서도 말했거니와 경제적인 측면에서 볼 때, 승자독식으로 진행되는 게임에서 다수가 패자(저널리즘의 용어를 빌리자면 무려 80%-80대20-에 이른다)의 길을 갈 수밖에 없는 오늘 아닌가. 
이와 같은 사항을 고려할 때, 2000년대 박민규의 출현은 단연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는 때로 미메시스의 논리를 고의적으로 배반하며 보편적 성정에 합치하기 힘든 SF의 늪에서 유희를 벌이기도 하지만, 성공적인 작품의 경우 경제적 약자들의 실존을 적확하게 묘사해내고 있다. 여기서는 그런 작품들을 주목해보고자 한다. 그런데 미리 말하거니와 그 주목의 최종 목적이 그의 작품을 추동하고 있는 미학적 특질들을 규명하는 데에 있지는 않다. 그에 대해서는 이미 기존의 많은 논의가 있었거니와, 여기서는 동어반복을 피하고 경제적으로 소외되어 있는 직업군을 그리고 있는 그의 작품의 실질적이고 세부적인 내용과 디테일들 자체에 주목함으로써, 오늘 우리가 도대체 어떤 일을 하며 어떻게 살고 있는지, 또 그러한 것을 문학적으로 형상화하는 일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에 대해 이야기해보기로 한다. 


  2. 알바
‘학생이나 직업을 가진 사람의 부업’. 아르바이트의 사전적 정의다. 이 정의에 의하면 아르바이트는 마치 주업이 있는 사람들의 여가 활동인 것처럼 보인다. 즉 생계와는 거리가 있는 경제적, 문화적 여유의 산물인 것 같다. 그러나 현직 알바생에게 이런 말을 했다가는 아마도 곱게 넘어가기는 힘들 것이다. 알바라는 게 비단 2000년대에 등장한 것은 아니지만 그것이 용돈벌이의 수단에서 생계의 직접적인 수단이 된 것은 근래의 일이며, 또한 그 연령대나 주체가 20대의 대학생에게만 한정된 것이 아니게 된 것도 역시 2000년대 들어서 보편화된 일이다. 그러니까 이제 아르바이트를 통해 여분의 무엇을 산다거나 여행을 가기보다, 쌀을 사고 집세를 내며, 등록금을 마련하고, 학원에 다닌다. 즉 먹고 배우고 살기 위해 아르바이트를 한다. 그런 점에서 「그렇습니까? 기린입니다」(이하 「기린」)는 주목해 볼 만한 작품이다. 화자 ‘나’는 십대의 상고생인데, 그의 일과는 지하철 푸시맨에서 시작해서 잠시 학교를 경유한 후 주유소를 거쳐 편의점에서 마무리 된다. 그리고 잠시 눈을 붙인 후 다시 지하철로. 그런 점에서 ‘나’의 주업은 학업이 아니라 알바다. 그런 그의 꿈이라면 시간당 이천원 정도의 임금을 받는 것이다. 

주유소에선 시간당 천오백원을, 편의점에선 천원을 받았으므로 나는 늘 불만이 가득했다. (중략) 편의점의 사장은 이러면서 세상을 배운다-라고 말했지만, 이천원씩 받고 배우면 어디가 덧나나? 뭐야, 그럼 당신 자식에겐 왜 팍팍 주는데? 를 떠나서-못해도 이천원 정도의 일은 하고 있다고 나는 늘 생각했다. 글쎄 천원이라니. 덥기만 덥고, 짜디짠, 지구.(69-70쪽)

물론 ‘나’는 고아도 아니다. 부모 구존하며 다들 무고하시다. 단, 경제적으로만 그렇지 못할 뿐. 그의 아버지는 유명무실한 상사의 직원이며, 어머니는 청소일을 하시고, 할머니는 아프시다. 나에게 알바는 곧 가족의 생계 문제와 관련된 일이다. 그래서 아버지는 늘 ‘나’에게 미안해한다.

미안하구나.
아버진 그렇게 얘기했다. 또 그 소리. 내가 일만 한다 하면 늘 같은 소리였다. 처음엔 들을 만했는데, 결국 들으나마나가 돼버린 지 오래다. 나이 마흔다섯에 시간당 삼천오백원, 즉 그것이 아버지의 산수였다.(72쪽)

즉 이 가정의 경제엔 수학의 논리가 들어설 일이 없다. 시간당 천원에서 삼천오백원 사이를 오가는 산수 수준에서 맴도는 삶. 그런데 이게 꼭 이 가정만의 일일까?

물론 세상엔 수학 정도가 필요한 인생도 있겠지만, 대부분의 삶은 산수에서 끝장이다(73쪽) 
   
화자는 동시대 삶의 보편을 수학보다는 산수에서 찾고 있다. 산수에서 수학으로 전진하고 있다는 게 적어도 90년대 IMF이전까지 우리가 공유하고 있던 믿음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 반대다. 다시 한 번 상식화된 용어를 빌리자면 80이 그 믿음의 역전을 실례로 보여주고 있다. 이렇게 산수 수준에서 맴도는 삶의 사회-경제학을 적확하게 묘사해내고 있다는 게 이 소설의 기억할만한 의의다. 또, 이 소설의 주인공은 그 가난한 삶을 제법 건강하게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기도 하다. 

정기적금 정기적금, 또 한 통의 자유적금. 시급 천오백원과 천원이 따로따로 쌓여가는 통장들을 생각하면, 세상에 힘든 일은 없었다. 말할 것 같으면, 내 주변은 주로 그랬다.(73쪽)

물론 때로 “왜 고작 이따위로 사는 걸까”(87쪽)라는 푸념-여기에 푸념이란 단어를 쓸 수 있을까?-을 늘어놓긴 하지만, 여하튼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열심히, 또 건강하게 살아간다. 아울러 비슷한 삶을 살고 있는 ‘인류’에게 동정과 연민의 시선을 보내기도 한다. 이 작품이 한없이 우울하지만, 그런 한편으로 건강하고 따뜻한 이유다. 
그런데 ‘그러니 젊은이들이여, 현실을 받아들이고 감내하며 그 안에서 건강과 안녕을 도모하라’라고 속 편히 이야기할 수 있을까? 이 문제에 대해서는 다른 작품들을 아우른 후 마지막에 집중적으로 논해보기로 하자. 

  3. 블루칼라
언젠가부터 우리 소설에서 막노동꾼이나 작부 같은 인물들이 사라졌다. 이를테면 ‘영달’이나 ‘백화’(이상 황석영, 「삼포가는 길」)를 더 이상 소설에서 만나볼 수 없게 된 것이다. 우리의 삶이 윤택해지고 상향평준화되어 이들이 현실공간에서도 모두 사라졌기 때문일까? 전혀 그렇지 않다는 게 우리의 판단이다. 우리가 느끼고 있는 구체적 실감이라든가 객관적인 실제 자료들은 신자유주의의 물결 속에 점점 기형화되어 가는 경제구조가 경제적 약자와 소외자들을 예전의 어느 시대보다도 훨씬 더 많이 양산해내고 있으며, 이들을 삶의 낭떠러지로 내몰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런데 이에 대한 소설적 관심이 소홀하다는 것은 일종의 직무유기에 가깝다. 그나마 박민규의 「굿바이, 제플린」(이하 「제플린」)에서 우리는 영달과 백화의 2000년대 버전을 볼 수 있다. 지방 소도시에 있는 사원 네 명뿐인 이벤트회사 직원인 ‘나’-이벤트 ‘회사’ 직원임에도 불구하고 이 인물을 블루칼라로 분류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이 인물이 실제로 하는 일이 사무실 밖에서 몸으로 뛰며 땀 흘리는 게 전부이기 때문이다. 즉, 노가다란 소리다.-는 한여름 인근 상점 오픈 행사에 “가면라이더”(276쪽) 복장을 하고 “코찔찔이들”(같은 곳)과 사진촬영을 하는 수고를 감내하며 생계를 이어간다. 그의 꿈은 다음과 같다. 

꿈. 나에게도 꿈은 있다. 지금은 비록 미려의 원룸에 얹혀사는 신세지만, 아무에게도 말 못 한 꿈이 있는 것이다. 말해도 될는지 모르겠다. 일단 서른까지는 지금의 직장에 뼈를 묻는다. 삼 년 만에 직원 넷의 사무실을 번듯한, 한 서른 명 정도가 일하는 회사로 만들겠다면 나만의 오산일까? 그렇지 않다고 나는 생각한다. 말하자면 부사장, 혹은 이사란 직함을 달고 미려에게 웨딩드레스를 입혀주는 것이다. 신혼은 물론 아파트에서 시작한다. 그리고 이 년 정도 주식투자로 돈을 불린다. 틈틈이 그 와중에 몰래 공부를 시작한다면 모두가 놀라 나자빠질 일일까? (중략) 나는 결국 변리사 시험에 합격한다. 미려는 아예 넋이 나간다. 마구 축하전화가 결려 온다. 그리고 펑펑 우는 미려를 꼭 안아주는 것이다. 얼마나 따뜻할까. 아마도 그럴 거라고, 나는 생각한다.(279쪽)

정말 꿈같은 꿈이다. 그 맹랑한 몽유의 와중에 광고용 비행선을 띄울 일이 생긴다. 이름도 찬란한 ‘드림마트’ 사장인 한 지역유지는 이 지역에 진출을 노리고 있는 유명 유통기업에 맞서기 위해 비행선을 띄워 광고를 하기로 결심하는데, ‘나’의 회사가 그 일을 맡게 된다. 그 일을 맡은 회사의 면면이란 순박하기 이를 데 없는 ‘천사장’, 미국 오퍼상 출신인 나이 마흔의 철부지 ‘제이슨’, 그리고 ‘나’가 전부다. 마치 '삼미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한겨레신문사, 2003)에서 프로의 세계에 아마추어 정신을 실현하려고 하는 야구선수들을 연상케 한다. 그러니 당연히 이들의 비행선 띄우기도 삼미의 야구와 같을 수밖에 없다. 로프는 끊어지고, 비행선 제플린은 혼자 유유히 구름과 같이 떠다니는데, 이 제플린을 쫓는 게 서사의 줄기다. 여기서 제플린은 두 말할 것도 없이 꿈에 대한 메타포인 바, 이 작품은 결국 「기린」을 빌려 말하자면 ‘산수의 세계’에서 살아가는 자들의 꿈꾸기와 좌절이라는  주제에 대한 변주이다. 이 작품에는 내용상 두 개의 ‘거리’가 존재하는데, 하나는 이 땅 위의 나와 하늘에 떠 있는 제플린 사이의 거리이고, 다른 하나는 원룸(미려와 함께 거주하고 있는)과 아파트 사이의 거리이다. 이 두개의 거리는 현실과 꿈 사이의 거리라는 점에서 만나는데, 그것은 쉽게 좁힐 수 없는 거리라는 점에서 ‘한숨’을 유발한다.

걸렸다. 라는 느낌이 들 정도로 제플린을 가까이서 볼 수 있었다. 하지만 정작 언덕 위에 올라서자, 그것이 장대나 밧줄이 닿을 만큼의 거리가 아니란 걸 알 수 있었다. 아아, 절로 한숨이 나왔다. (중략) 조롱을 당한 느낌이었다. 하지만 확실히 가까이 있었다. 미려의 원룸과, 외근을 나갔다 발견한 모델하우스 정도의 거리랄까. (291쪽)

꿈을 이루어가고 있다(“걸렸다. 라는 느낌이 들 정도로”)는 느낌의 순간은 곧 아직 요원하기만 하다(“닿을 만큼의 거리가 아니란 걸 알 수 있었다.”)는 통렬한 인식의 순간으로 바뀌고, 그것은 다시 한숨과 조롱을 유발한다. 희망적 느낌과 절망적 인식의 교차와 공존에서 우리는 삶의 아이러니한 진실을 마주하게 된다. 그러나 여기서 진정한 아이러니는 이보다는 그 이후의 구절 즉 “하지만 확실히 가까이 있었다. 미려의 원룸과 외근을 나갔다 발견한 모델하우스 정도의 거리랄까”에서 생겨난다. 그 절망 끝에서의 긍정과 희망이 피어나는 순간 실제로 일어나는 일들은 다음과 같다. 한 무리의 아이들이 제플린을 향해 비비탄을 발사하고, 제플린은 다시 어디론가 날아가버리며, 또 한 무리의 사내들이 제플린을 표적삼아 사냥을 해대고, 노래방 개업 행사에 나간 미려는 꽃등심을 사주고 술을 먹이는 그곳 사장에게 겁탈을 당하게 된다. 그러는 와중에 제플린은 결국 낡은 양로원 마당에 추락한 채 “해변에 떠밀려온 고래의 시체처럼”(297쪽) 누워있다. 짓밟힌 꿈마냥. 절망 속에서의 긍정에의 다짐마저 무참히 다시 절망으로 귀환시키는 게 현실이 지닌 힘이다. 그리고 이 마지막 장면은 드림마트 개업행사에 가면라이더 복장을 하고 나가 외쳐대던 “아시겠죠? 어린이 여러분, 정의는 언제나 승리한다는 사실을. 언제나 꿈과 희망을 잃지 말고 공부 열심히 하세요!”(276쪽)라는 명제의 서두와 수미상관을 이루어 아이러니의 진폭을 확대시킨다. 나와 미려의 미래는 제이슨과, 말미에 등장하는 양로원 할머니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을 거라는 짐작을 우리는 쉽게 해 볼 수 있고, 우리 역시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이 짐작의 주체이자 동시에 대상일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비애가 생겨난다. 그게 2000년대 경제 현실 속에서 약자들이 처해있는 보편적 상황이므로. 그래서 “세상은 스스로 고개 숙인 자를 돕는다. 내가 보기엔 확실히 그렇다. 열심히 살자. 기다려, 미려야!”(282쪽)라는 나의 다짐은 우리가 이미 「기린」의 상고생에서 보았듯, “그래서 열심히 사는 거 외엔  달리 방법이 없는 게 아닌가”(「기린」, 88쪽)와 마찬가지로 지독한 아이러니가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이 작품은 극으로 치닫는 후기 자본주의를 살고 있는 인간들의 비루한 실존을 다루는데, 그 배면에는 비애와 연민이 짙게 깔려 있으며, 다소 완화된 형태로이긴 하지만 쓸쓸한 유머 역시 스며있다(이점은 특히 나와 제이슨 사이의 대화와 행동에서 두드러진다). 이를 ‘웃기고도 눈물나는 니힐리즘’ 정도로 요약할 수 있으리라. 창공을 나는 청운의 꿈은 다음에서 보듯 ‘고래의 시체’처럼 볼품없고 초라한 것으로 귀결되고 마는 게 오늘의 경제구조 속에서 젊은 블루칼라들이 놓이게 되는 불우한 귀결점이다.
   
결국 수면 위로 올라온 고래처럼 제플린은 지쳐 보였다. 모든 걸 포기한 채 인간의 포획을 기다리는 흰 고래가 눈앞에서 울고 있었다. (293쪽)/ 정신을 잃은 고래처럼 제플린은 산의 중턱을 향해 추락하고 있었다. (중략) 해변에 떠밀려온 고래의 시체처럼 제플린은 누워 있었다.(297쪽)

즉, 출구 없는 ‘산수’의 미로를 헤매며 그 안에서 추락하고 겁탈당하고, 시체가 된다. 영달과 백화보다 하등 나을 게 없는 것이다. 그럼 화이트칼라라고 사정이 다를까? 

  4. 화이트칼라-비정규직
과문한 탓인지 ‘비정규직’이란 말을 1990년대까지만 해도 들어본 적이 없다. 물론 그때도 비정규직은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처럼 사회문제화 될 정도로 많지는 않았다. 비정규직이라는 단어를 이렇게 정규적으로 들어본 것도 근래에 들어서의 일이다. 기업가들은 노동의 ‘유연성’이나 ‘탄력성’이란 그럴듯한 수사로 무장한 채 마음대로 고르고 자르며, 그 가운데 자기 마음과는 무관하게 골라지고 잘라지고 하는 게 비정규직의 운명이다. 비정규직은 또한 옷깃의 색(블루칼라/화이트칼라)을 가리지 않는다. 그런데 비정규직 문제를 다루고 있는 소설 또한 만나보기 쉽지 않다. 소설이 언제나 현실의 사회적 문제만을 다루어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어느 특정 작가의 작품에서만이 아니라 동시대 작품들의 대부분에서 매우 중요한 사회적 문제들이 별다른 주목의 대상이 되지 못한다는 데에는 단순히 미학적 취향의 변화로만은 설명될 수 없는 문제적 성격이 존재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런 점에서 한 기업체의 젊은 인턴사원의 우울하고도 어처구니없는 인턴 과정을 묘사하고 있는 박민규의 「고마워, 과연 너구리야」(이하 「너구리」)는 그 소재 자체만으로도, 또 그 소재가 함축하는 동시대의 문제적 의미만으로도 주목해볼 만한 작품이다. 
‘나’는 ‘월 커뮤니케이션’의 인턴사원으로 근무하고 있다. 일곱 명의 경쟁자와 함께. 

존경스럽다. 잘도 이따위 일을 사 개월째 하고 있으니 말이다. 인턴은 모두 여덟 명. 즉 일곱 명의 경쟁자가 나와 함께 일하고 있다. 월급이라고는 말 못 하겠고, 그저 왔다갔다 차비 정도를 받고 있다. 일은 거의 날밤을 새는 수준, 육 개월의 연수기간이 끝나야 그중 한 명이 정식 사원으로 발탁된다. 그럼 나머지는? 글쎄다. 이곳의 인사부장은 ‘좋은 경험으로 여기세요’라고 말했지만, 떨어지기만 해봐라.(39-40쪽)

‘나’는 학교에서는 록그룹의 싱어로 날리는 인물이었지만, 회사에선 “온종일 자료를 찾고, 파일을 정리하고, 전화를 걸고, 조사를 하고, 커피 심부름을 해야”(40쪽)하며, 때로는 “과장의 민방위 훈련을 대산 가서 받”(같은 곳)기도 한다. 오직 정규직으로 발탁되기 위해. 그야말로 “참으로 어려운 회사생활!”(42쪽)이랄 수밖에 없다. 그뿐만이 아니다. 다음 장면은 처연하기에 앞서 섬뜩하기까지 하다.

샤워를 하고 있는 내 몸을 뒤에서 부장이 껴안았다. 이상하게도 아무 느낌이 없었으며 나는 말 그대로 잠깐 참자는 결심을 했다. 부장은 내 몸의 이곳저곳을 더듬더니 나를 목욕용 의자 위에 가만히 주저 앉혔다. 미끈미끈한 부장의 손이 나의 페니스를 일으켜세우려 갖은 시도를 다 하였다. (중략) 가만히 있어. 명령조로 말을 바꾼 부장의 입이 내 페니스를 빨기 시작했다. 부장의 오른손이 천천히 자신의 페니스를 흔들기 시작했다.
잠깐이다. 후회는 없다. 돌이켜보면 딱히 하고 싶은 일도 없었던 청춘이다. 경쟁자는 많고 취업은 힘들고, 세상은 엉망이었다. 잠깐이다. 잠깐이다. 잠깐이다. (중략) 나는 그 거대한 욕탕의 바닥 위에 말없이 주저앉았다. 그리고 피부가 견딜 수 있는 가장 뜨거운 수치의 온수를 머리끝부터 뒤집어쓰기 시작했다. 증기가 피어오르는 그 물줄기 속에서 나는 갑자기 혼자란 느낌이었고, 쓸쓸했고, 눈물이 났다.(62-63쪽)

‘나’는 원래 이렇게 순종적인 인물이 아니었다. 대학생 때만 해도 ‘나’는 기성세대를 향해 “닥쳐 개새끼야!”(50쪽)라고 서슴없이 외치던 락커였다. 그 호기와 객기, 도전과 저항의 에너지는 남색가인 인사부장에게 몸을 허락하는 굴욕적 순종의 자세로 바뀌어 버린다. 오직 정규직이 되기 위해서 말이다. 따라서 이 작품은 비정규직에서 정규직으로의 이동을 열망하는 예비 화이트칼라가 어떻게 주체적인 힘을 상실하고, 후기 자본주의가 강요하는 체제내적 인간이 되어가는가에 대한 우울한 삽화로 더없이 적실하다. 그런 점에서 이 작품에서 말하고 있는 “너구리 광견병”(43쪽)이란 것은 오직 경쟁만을 생존의 최후 논리이자 유일한 논리로 내세우는 후기 자본주의가, 끝없이 자신의 “열외”(45쪽)를 만들고 그를 추방함으로써 자신의 견고한 상징체계를 오차 없이 작동시키기 위해 만들어낸 프로젝트에 대한 메타포라 할 것이다. 


  5. 2000년대 경제적 약자와 문학
이상으로 살폈듯 박민규의 몇몇 작품들은 2000년대 들어 다수가 되어버린 경제적 약자 직업군들의 현실을 실감나게 묘파해내고 있다. 그것은 문학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작업이기에 어떤 보도자료나 통계수치보다도 더 구체적인 실감을 지니고 있고, 직접적으로 호소해오는 힘이 있다. 그의 작품들을 통해서 우리는 알바생이, 블루칼라가, 그리고 비정규직으로서의 화이트칼라가 얼마만큼의 우울한 실존을 견디고 있는지를 바라볼 기회를 얻는다. 이는 앞서도 말했듯 동시대의 소설들이 그러한 실존을 서사의 중심으로 위치시키는 데 소홀하기 때문에 더욱 각별하게 여겨지기도 한다. 그러면 앞서 미뤄두었던 질문으로 다시 돌아가보자. 「기린」을 통해 알바생의 삶을 논하는 자리의 말미에서 나는 ‘그러니 젊은이들이여, 현실을 받아들이고 감내하며 그 안에서 건강과 안녕을 도모하라’라고 속 편히 이야기할 수 있을까? 라고 물은 적이 있다. 반복하진 않았지만 유사한 질문이 불루칼라를 그리고 있는 「제플린」에도, 또 비정규직으로서의 화이트칼라를 다루고 있는 「너구리」에도 행해질 수 있다. 이 질문 앞에서 이 세 작품은 어쩐지 조금 궁색해 보인다. 이들이 보여주고 있는 것은 소박한 감내의 미학이다. 이들은 모두 자신들이 처한 상황을 ‘그저’ 받아들이고 공히 ‘눈물’을 흘린다. 물론 그 가운데 페이소스가 생겨나고 따스함이 생겨나지만, 그것은 때로 현실적 질서를 더욱 공고히 하고, 그 외부를 꿈꾸지 못하게 하는 데 알게 모르게 기여를 하기도 한다. 세 작품 모두 일인칭 화자를 택하고 있다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 생각해 볼 수 있다. 박민규는 현실의 경제적 논리 속에 소외되어가는 자를 그리되, 인상적으로 그린다. 그 구조적이고 심층적인 문제의 핵심에 가 닿으려고 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삼인칭으로 객관화해서 문제의 문제성을 객관적으로 철저히 파고들려고 하기보다는 일인칭 화자를 내세워 심리적 등가의 미적 정서를 창출해내는 데 더욱 큰 관심을 기울인다. 

이상하게도, 군대를 다녀오니 매사가 긍정적으로 여겨졌다. 짜증은 눈 녹듯 사라지고, 나는 취업을 준비하는 성실한 학생으로 변모해 있었다. 뭐야, 음악 같은 거 하고 앉아 있을 때가 아니잖아. 나는 벌떡 일어섰다.(「너구리」, 51쪽)

이거야 원, 하고 탓할 수도 없는 일이다. 이미, 세상이 이렇게 생겨먹어버린 걸(「너구리」, 40쪽)

인용한 구절에서 보이는 성실성은 엄밀히 말해 체제에의 편입과 순치에 대한 욕망의 다른 이름일 뿐이다. 짜증이 더 필요한 것 아닐까? 때문에 그의 작품에는 노마드나 스키조, 아나키 등이 등장하지 않는다. 그의 작품에 빈번히 등장하는 환상적인 요소들이 유쾌한 탈주가 되지 못하고 불우한 순치가 되어버리는 이유다. 그의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나름대로 유쾌하고 발랄하며 때로 저돌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다들 순한 양들일 뿐이다. 물론 순한 양을 두고 우리는 사악하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그 양의 순함이 현실의 악함에 대한 사유를 중단하는 데서 생겨난 것이라면 마냥 순한 눈길로만 바라볼 수는 없지 않을까? 다른 작품을 빌어 이야기 해 보자면 박민규식 현실 대처법의 요체는 대략 다음과 같다. 

힘든 게 싫다. 

반론을 제기하고, 싸우고, 그런 건 너무 힘든 일이다.
―「비치 보이스」, ≪현대문학≫, 2005년 11월호, 78쪽

그래서 박민규의 주인공들은 임금을 착취당해도(「기린」), 성적 유린을 당해도(「너구리」, 「제플린」) 절대 반론을 제기하거나 싸우지 않는다. 그저 ‘세상은 원래 그래, 다 그런 식이지 뭐.’라고 지레 비관조로 되뇌며 혼자 눈물을 흘리는 게 대부분이다. 앞서 본문에서 다룬 작품들이 그 모든 미학적 미덕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에게 개운치 않은 느낌을 남기는 것도 이와 같은 이유에서이다. 「제플린」에서 사랑하는 ‘미려’가 노래방 사장에게 몸을 빼앗겼다는 사실을 알고 난 후 ‘나’가 하는 말이란 “그 새끼…… 콘돔이나 쓰고 했냐?”(295쪽)에 불과하다. 그마저 “소릴 지를 뻔했지만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같은 곳)고 혼자 속으로만 중얼거릴 뿐, 실제로는 “사랑해”라는 무력한 말 한 마디만 남긴다. 그러나 이는 그러한 사정을 차마 말하지 못하고 울기만 하고 있는 미려를 배려한 처사라 너그럽게 보아 넘길 수 있다. 문제는 그 다음이다. “형, 산다는 건 뭘까요? 창밖을 바라보며 내가 물었다. 백미러를 이리저리 조절하며 제이슨 형이 말했다. 별 거 있냐? 먹고 자고 싸면서 시간을 보내는 거지. 그럴지도, 라고 나는 생각했다.(중략) 둥실, 고도가 낮아진 제플린을 보고 있자니 이상하리만치 마음이 잔잔해졌다. 다친 데 없으면 일단 가서 잠을 자라고 나는 미려에게 얘기했다. 아침은 꼭 챙겨먹으라고도 얘기했다.(중략) 그제야 찔금 눈물이 났다. 열심히 먹고 자고 싸다 보면 시간도 가겠지…… 라디오를 들으며 나는 눈물을 참았다. (중략) 제플린을 찾으면 좋아지겠지, 변리사가 되면 모든 게 좋아지겠지.”(같은 곳). 순해도 순해도 너무 순하다. 물론 최서해식으로 사장을 찾아가서 칼로 찔러 죽이거나 노래방에 불을 지르는 것도 결코 정당하다고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며, 그보다 조금 점잖은 방식으로 노동자들의 연대나 법적인 조치를 강구하는 것도 모두 쉬운 일이 아님은 사실이다. 또 그렇게 하는 순간, 박민규가 박민규다운 모든 매력을 상실하는 역설에 부딪히게 될 거라는 점도 우리는 쉽게 예상해 볼 수 있다. 문제는 그가 행동을 보이지 않는다는 데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의식, 그 부정적 정신이 보이지 않는다는 데에 있다. 너무도 손쉽게 비관주의의 안온한 평화로 안착해버리는 것은 그리 믿음직스러운 실존적 사유라 할 수 없다. 한나 아렌트가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서 말했듯, 사유하지 않음(inability to think)은 유죄다. 
그러나 다시 한 번, 이런 비판들은 너무 가혹해 보인다. 어쩌면 문학이 감당해야 할 부분은 박민규가 그려 보이고 있는 딱 그 정도선 까지일지도 모른다. 리얼리즘의 섣부른 인파이터 지향이 얼마나 상투적이고 거친 결과들을 낳았는지는 이미 경험과 학습을 통해 알고도 남음이 있다. 일단 문학은 실존에 대한 소박하고도 정직한 관찰에서부터 자신의 존립근거를 마련해야 함이 옳은 일일 것이다. 더군다나 우리가 같이 살펴 본 박민규의 작품들은 그 문제적 성격에도 불구하고 동시대의 소설이 외면하고 있는 내러티브들을 형상화내고 있지 않은가? 알바로, 노가다로, 비정규직으로 연명해야 하는 불행한 ‘유사-직업인’들, 그들은 오늘의 다수파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소수파의 대접과 취급을 받는다. 경제적, 사회적으로도 그렇고, 문학적으로도 그렇다. 그런 가운데 그들을 끊임없이 문학적 주인공으로 호명하고 있는 박민규의 작업은, 이미 그 호명 자체로 문학의 근원과 위의에 더없이 충실한 일이라 불러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다만 그 호명이 더욱 의미있는 울림과 힘을 갖기 위해서는 미메시스적 세밀함을 넘어서는 전체성에 대한 사유, 그 사유과정에 있어서의 부단한 부정의 움직임이 동반되어야 함은 말해두어도 될 듯하다.

유 준∙1975년 강원도 춘천 출생. 2007년 ≪문학동네≫를 통해 등단. 서울예대, 한국예술종합학교, 항공대 강사






특집_우리 시대 문학에 나타난 직업의 상징코드
스포츠맨은 어떻게 성장하는가?
박인호|영화평론가


  1.
생계를 위한 수단이면서 자아실현의 기회이기도 한 직업은 우리 삶을 구성하고 정체성을 드러내 주는 중요한 키워드가 된다. 우리의 삶과 유사하다는 환상을 이미 내포한 극영화의 경우, 사람들의 살아감을 다룸에 있어 직업의 묘사는 현대사회로 올수록 중요한 지위를 차지하게 된다. 
1990년대 들어서면서 직업은 인물을 구성하는 요소 중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게 되었지만 1960년대, 근대화가 추진되던 당시의 영화에서도 직업적 분류와 유형에 따른 캐릭터가 부각되는 경향을 찾아볼 수 있다. 전문직의 대표격이었던 대학교수와 경제 성장에 따른 상승적 지위를 누렸던 사장, 임원과 같은 조직의 우두머리와 말단 직원간의 대립, 가정주부와 bar girl, 하녀와 식모, 양공주와 같은 대조적인 직업은 그 인물의 현재 삶을 구체화시키면서 영화적 내러티브 전개의 중요한 요소가 되었고, 직업군에 따른 대립이나 갈등을 통해 근대화 시기의 한국 사회를 엿볼 수 있게 만들어주었다. 
1970년대에 들어서면서 지나친 검열로 인한 제작 여건 악화와 억압적인 사회적 분위기는 호스티스 멜로드라마를 양산하게 만들었다. 시골에서 상경한 처녀가 버스 안내양을 거쳐 공장 노동자, 식모, 호스티스가 되기까지 퇴락해가는 삶을 직업을 통해 극단적으로 보여주고 있으며 이 여성의 직업적 변화를 통해 그 당시 사회가 억압하는 여러 가지 방식을 간접적으로 드러내주었다. 
1980년대에도 비슷한 현상을 보이지만, 매춘녀라는 직업을 가진 여성이 주류를 이루면서 당시 성적 거래를 암묵적으로 인정하면서도 법적으로는 금지하던 이중적 억압의 사회상을 극단적으로 드러내주었다. 
1990년대 들어와서 한국영화의 제작 시스템이 변화하는 과정에서 전문직에 종사하는 여성이 등장하는 것과 젊은 맞벌이 부부의 갈등과 연애담을 주요 내러티브로 삼고 있는 로맨틱 코미디가 주류를 이루면서 한국 영화에서 직업은 점점 더 정교해지고 다양해지기 시작한다. 2000년대에 접어들면서 조직 폭력배와 경찰과 같은 거친 남성들의 직업이 영화에 자주 등장했으며 이들을 다루는 방식은 코미디 장르에서 멜로드라마에 이르기까지 다양해졌지만, 오히려 제한적인 화법의 영화와 비슷한 컨벤션을 지닌 장르 영화적 속성에만 치중한 나머지 직업적 묘사는 오히려 퇴보하는 경향을 보인다. 

  2.
스포츠는 정해진 시간 안에 삶의 희노애락을 보편적인 방식으로 전달해주는 오락거리가 된다. 1970년대 영화에서 여성의 몸으로 구체화된 사회적 억압의 기제들을 발견한 관객들은 가난한 남자들이 부와 명예를 위해 배고픔을 이겨내며 주먹 하나를 혹독하게 단련하는 권투 또한 즐기게 되었다. 레슬링을 통해 쇼의 기능을 아우르는 엔터테인먼트를 즐기기도 했지만, 한․일간의 나쁜 감정을 간접적으로 느끼기도 했다. 이들의 승리와 패배는 관객들 자신의 기쁨과 분노가 표출되는 통로를 만들어 주었고, 억압적인 환경에 숨죽여 살아가던 사람들의 숨통을 미약하나마 풀어주는 역할을 했다. 1980년대 프로 야구가 등장하면서 모든 국민들이 함께 관람하고 환호하는 스포츠에서 벗어나 자신의 고향이나 지역을 토대로 한 우리들만의 스포츠를 통해 연대감을 경험하게 되었다. 

스포츠를 소재로 한 영화들은 1990년대 후반에 들어서야 제작되기 시작해서 2000년대에 들어서면 야구, 권투, 태권도, 인라인 스케이트, 스포츠 댄스, 마라톤에 이르기까지 다양해진 영화들을 만날 수 있게 되었다. 
특히 실화를 바탕으로 한 스포츠 영화는 우리의 기억 속에 감광된 한 장의 사진처럼 어릴 적 향수를 일깨워주거나 좋아했었던 인물을 불러들이는 역할을 하고 있다. 
곽경택 감독의 「챔피온」과 송해성 감독의 「역도산」은 김득구와 역도산이라는 인물이 살아온 삶의 시간들을 그 시대의 변화상과 함께 기록하고 있기 때문에 스포츠를 통해 그들의 삶과 시대에 대한 감동을 함께 전달해준다. 임순례 감독의 「우리 생애 가장 특별한 순간」은 결과를 이미 알고 있는 경기 장면 이전의 시간을 보여줌으로써 이들이 살아온 과정과 이겨 나가야 할 문제들을 오랜 시간 지켜보게 되고 결국은 사람들이 살아가는 이야기와 경기의 감동이 일치되어 드러남을 체험하게 만든다. 정윤철 감독의 「말아톤」은 장애를 지닌 사람이 느끼는 좌절을 넘어서서 희열에 이르는 과정을 면밀히 보여준다.  
로맨틱 코미디로 접근한 장진 감독의 「아는 여자」, 김지운 감독의 블랙 코미디 「반칙왕」, 조선 말 야구를 처음 접한 사람들의 이야기인 김현석 감독의 「YMCA 야구단」, 여자 권투 선수가 등장하는 윤제균 감독의 「1번가의 기적」, 남상국 감독의 「돌려차기」, 이해영․이해준 감독의 「천하장사 마돈나」, 김씨 성을 가진 체육관 관장들의 소동극인 「김관장 대 김관장 대 김관장」은 모두 코미디의 장르적 속성을 가진 영화들이다. 
류승완 감독의 「주먹이 운다」, 「챔피온」, 「역도산」, 「우.생.순」, 「말아톤」은 스포츠를 통해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 교류를 강조하는 경우라 할 수 있고, 「천하장사 마돈나」, 「돌려차기」는 성장영화의 테두리 안에서 스포츠를 활용하고 있는 경우이다.

이 글에서는 스포츠 영화를 통해 감독이 바라보는 직업적 특성이 영화에서 어떻게 구체적으로 드러나고 있는지, 직업을 통해 드러나는 인물의 특성과 사회적인 관계망, 자아의 성장을 어떻게 드러내고 있는지 알아볼 것이다.
  
  3.
「챔피언」은 1970년대 무작정 상경한 어린 소년이 챔피언이 되어가는 과정과 시대상에 따른 변화들을 아우르면서 보여준다. 아버지가 여럿인 복잡한 내력을 가진 소년 김득구가 ‘끝까지’ 가는 버스를 타고 서울로 온다. 앵벌이, 구두 닦기, 버스 행상, 막노동을 하던 그가  누구에게나 공평한 스포츠인 권투를 하게 된다는 것은 그 시대 가난한 사람 모두에게 일종의 판타지로 자리잡은 열기를 보여준다. 
감독은 인물을 통해 가장 정직한 자신의 주먹 하나로 챔피언이 되어 부와 명예를 얻음으로써 시대적 판타지를 제공하고 있지만, 눈앞의 적보다 자신과의 싸움이 중요함을 강조함으로써 감독이 늘 그려왔었던 남자들의 세계에 대한 전망을 제시한다. 
스포츠를 통한 성취와 상승보다 중요한 구도로 자리잡은 것은 동료와의 유대감(포장마차에서 아버지 없는 어린 시절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장면), 대리아버지인 관장과의 관계, 가정을 이루는 과정(첫눈에 반하는 과정, 집안의 반대, 권투 경기를 통한 극복)으로 집약되어 그의 혹독한 자기훈련도 결국 살아감의 한 부분임을 드러내고 성공보다 중요한 것이 의리와 믿음으로 구성된 남자의 법칙임을 보여준다. 
링이라는 공간을 잡아내는 감독의 시선은 이 영화가 스포츠맨으로서의 긍지와 명예를 얼마나 강조하고 있는지 알게 해준다. 실감나는 권투 장면을 위해 카메라가 인물들을 분절하고, 반응하는 장면을 보여주기보다는 다소 긴 시간동안 몸의 부딪힘과 둔탁한 마찰, 부어오른 눈두덩이, 거친 숨을 내쉬는 얼굴을 보여줌으로써 행동-반응으로 일관하는 스펙터클을 차단하고 있다. 또한 경기 장면 자체보다 링에 오르기 전의 표정이나 승패에 따른 결과적 행위(고향에서의 카퍼레이드 장면, 음식을 준비하는 엄마와의 짧은 대화, 동양 챔피언이 된 후 혼자 샤워하면서 흐느끼는 장면)를 강조함으로써 김득구라는 인물이 링 안에서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 그러한 삶의 방식이 현실에서는 어떻게 드러나는지를 바라보게 만든다. 
특히 거울 앞에 선 김득구의 장면은 그가 깨달음을 얻거나 한 단계 성장하는 지점, 희열의 순간 동반되는 눈물, 외로운 스포츠인 권투를 통해 자신을 성찰하고 반성하는 자기 응시의 도구가 됨과 동시에 관객들 또한 이 지리한 싸움의 과정을 관찰하게 만들어준다.  
감독이 바라보는 남자의 세계는 아버지 없이 자란 남자가 대리아버지를 통해 삶의 지혜와 투지, 인간답게 살아가는 것을 배우게 되는 과정을 통해서도 드러난다. 부재하는 아버지로 인한 고통과 설움을 아는 그 또한 아버지의 역할을 하지 못하고 죽음에 이르게 되고, 십 수 년의 시간이 흘러 김득구의 아들은 아버지의 아버지에 의해 이미 쇠락해버린 도장으로 인도된다. 텅 비어 있는 죽음의 공간에서 한 줌 모래가 떨어지면서 샌드백을 두드리고, 줄넘기를 하고 스파링을 하는 움직임들이 아들의 눈에 비치기 시작한다. 백일몽처럼 나타나고 사라지는 장면을 통해 죽음 이후에도 살아 숨쉬는 김득구의 세계가 현재에도 지속됨을 강조하고 있으며, 부재하는 아버지에 대한 위로를 선사하고 있다. 두 부자 모두에게 대리아버지로서의 역할에 충실한 관장으로 인해 남자의 판타지는 완성된다. 
가장 격렬한 몸의 부딪힘과 관절의 꺾임에서 오는 고통, 경기에서 이겼을 때의 희열은 「반칙왕」에서도 찾을 수 있지만, 두 영화가 담고 있는 숨결은 확연하게 다르다. 「반칙왕」은 사각의 링과 은행이라는 직장을 철저하게 분리시켜 낮과 밤의 직업이 다른 인물을 보여주고 있지만, 결국은 링처럼 구성된 먹이사슬의 현실을 역설적으로 말해준다. 
주인공 강대호라는 인물을 구성하는 두 가지 세계는 실적이 곧 결과이며 인간성이나 믿음보다 약육강식의 법칙으로 돌아가는 은행과, 거대한 프로모션이 만들어내는 일종의 버라이어티 쇼인 레슬링의 세계이다. 낮의 직장인 은행에서는 무능력하고 게으른 직원이고, 밤의 직장에서는 절대로 경기에서 이길 수 없는 반칙 전문 레슬러이기 때문에 그는 늘 이중의 실패를 떠안고 살아가야 된다. 이러한 구도는 조직에서 겪어야 되는 억압과 조롱을 풀어내는 곳이 링이기는 하지만, 궁극적으로 그가 성공할 수 없음을 보여준다. 
강대호는 아버지에게도 떳떳한 대접을 받지 못하고, 인사고과에서 좋은 성적을 낼만한 자질은 하나도 갖추지 못했다. 길에서 만난 어린 아이들에게마저 쫓기던 그가 변두리의 횅한 바람이 부는 곳에 들어선 순간, 어릴 적부터 좋아하던 복면을 쓴 반칙왕으로 변신하게 된다. 하지만 훈련의 과정은 「챔피온」에서처럼 자신을 극복하고 성장하는 것과 다르게 진행된다. 
뭔가 열심히 해본 적이 없는 인물이 링에서 신나고 즐거운 것을 발견하게 되지만, 그가 익히는 기술은 쇼에서 보여질 것들이고 미리 짜여진 대본에 의한 것이지, 자신의 기량을 극한까지 내보이기 위한 단련과는 거리가 멀다. 
애초에 헤드락을 풀기 위해 시작한 레슬링이지만 그는 끝까지 부지점장을 이기지 못한다. 철저하게 얼굴을 숨기고 활동하는 복면 레슬러가 되어야 하지만 뜯겨져 나간 가면 아래 그의 맨 얼굴이 공개된다. 그는 또 다시 아침이 되면 정글 속으로 진입해야 되고 링처럼 구성된 건널목과 사각형의 높은 빌딩들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 
김득구와 강대호가 다르게 묘사되는 것은 장르의 다름에서 비롯된다기보다 인간과 세상을 바라보는 감독의 시각이 다르기 때문이다. 곽경택 감독이 회고의 시선을 가진 채 그 시대의 꿈과 판타지로 김득구에게 접근했다면, 김지운 감독은 어쩔 수 없이 생존의 법칙에 따라 살아가야 되는 현대인의 살아감에 초점을 맞춘다.
또 다른 코미디인 「아는 여자」는 사랑을 위해 공을 던진 투수였으나 현재는 2군 외야수로 밀려난 동치성의 사랑에 대한 이야기이다. 첫사랑도 하지 못하고 고작 3개월 주어진 시간을 살아야 되는 그에게 야구라는 스포츠보다 중요한 것은 사랑이다. 늘 사랑이라 믿었지만 헤어질 때엔 한번도 사랑을 하지 못했다는 생각을 극복해야 하고, 자신에게 남겨진 삶의 시간을 어떻게 보내야 하는지에 대한 갈등을 마무리지어야 한다. 승리를 눈앞에서 놓쳐버린 실수로 인한 부진을 넘어서야 하고, 다시 투수로 마운드에 서고 싶은 그의 의지는 야구 외에도 존재하는 생의 의지에 대한 부분이 된다. 아는 여자와의 만남을 통해 ‘괜한 대출로 집도 날리고, 공도 날아갔지만’ 그는 사랑을 얻음으로써 야구보다 중요한 것을 획득하게 된다. 이 영화에서 스포츠는 고단한 훈련 과정보다는 돌이킬 수 없는 실수로 인한 심적인 부담, 그로 인한 부진, 하지만 또 다시 시도하게 되는 무모함을 통해 웃음을 유발하는 도구가 된다. 특히 야구의 기본적인 룰을 깨어버리는 야구 선수를 통해 스포츠의 규칙보다 중요한 것이 사랑임을 말하고 있다. 
「우.생.순」은 앞날을 보장받지 못하는 선수들의 힘겨운 삶과 다양한 가족의 형태를 보여줌으로 시작한다. 우레와 같은 환호성도 없고, 늘 찾아주는 팬도 없는 핸드볼, 그것도 여성들의 팀은 생활과 훈련을 동시에 진행해야 하는 입장에 놓여진 그녀들의 삶을 통해 운동과 결부된다. 
감독은 중반부에 이르기까지 오랜 시간 동안 각자 다른 삶의 모양새와 그들이 겪는 현실적인 고통을 소소하게 보여준다. 빚에 쫓기는 남편을 둔 사람, 남편과 행복하지만 아이가 없어 고민하는 사람, 돈과 명예는 있지만 이혼한 사람, 자존심과 고집이 세서 불화를 일으키는 사람등 다양한 인간 군상이 동일한 스포츠의 세계로 들어서게 되지만, 이들의 삶에서 패어진 골들은 쉽게 매꾸어지지 않는다. 또한 단체로 하는 운동이기 때문에 이들은 다 함께 성장하지 못하면 실패로 끝나야 할 공동의 운명을 가지고 있다. 이들의 성장은 모두 함께이며, 그들의 실패 또한 모두의 문제가 되는 것이 이 영화에서 특별한 감동을 주는 지점이 된다. 
「주먹이 운다」에서 권투는 두 인물을 이어주는 매개체가 됨과 동시에 지치고 힘든 삶의 면면을 드러내주는 장치이다. 아시아 게임 메달리스트였지만 아내에게 버림받고 살아가는 중년의 남자와 소년원에서 권투를 처음 배운 깡패 소년이 대결하는 링은 이들이 살아왔던 오랜 시간이 격돌하는 공간이자 자신의 마지막을 걸고 싸워야 할 운명의 갈림길이 된다. 
권투 시합을 담아내는 카메라의 시선이 「챔피언」과 다른 지점에서 볼 수 있듯, 이 영화는 스포츠 자체보다 인물을 중시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서로 빙글빙글 돌면서 노려보고, 팔을 뻗어내고, 오가는 주먹을 카메라는 집요할 만큼 링 내부에만 국한시킨다. 심지어 3분으로 진행되는 시합을 분절 없이 오래 보여주는 장면을 보면서 관객은 권투 시합을 구경하는 것이 아니라, 이들이 마침내 만나서 스스로의 운명과 싸우는 과정을 지켜보게 된다. 
깨어진 가정을 위해 주먹을 휘두르는 남자와 그나마 자신을 지탱해주던 할머니의 병 앞에서 마음 아파하는 소년은 각자의 가족과 화해하고 새롭게 시작하기 위해 서로를 마주보게 된다.

위의 영화들이 생계와 운동 두가지 모두를 이야기하고 있다면, 「천하장사 마돈나」와 「돌려차기」에서는 학교를 배경으로 한 성장의 과정을 보여주고 있다. 
「돌려차기」는 50년 태권도 명문이라는 전통이 끊어질 위기에 처한 고등학교를 배경으로 불량한 학생들이 점차 변화되어가면서 ‘진정한 남자의 길’을 찾게 됨과 동시에 또래의 집단 갈등을 해소하고 한 팀으로 완성되는 이야기를 만화적 상상력과 코미디의 장르적 특성을 활용해서 보여준다. 
이들은 소년에서 남자로 성장하는 경계에 서 있다. 주먹질로 어설픈 어른의 흉내를 내던 소년들은 자신들의 모습과 닮은 감독을 만나면서 서서히 어른으로 자라난다. 쓸데없는 경쟁심을 하나씩 버리고 함께 땀을 흘리는 과정, 자신보다 강한 적을 만났을 때의 투지를 알게 됨으로 이들은 철없던 시절에서 벗어나 진정한 자아를 향해 걷게 된다. 다양한 캐릭터가 주는 재미들은 사회 안에 위치한 많은 사람들의 모습을 드러내고 있으며, 인물간의 갈등과 화해는 하나의 팀으로 공동의 목표를 얻게 되었을 때의 기쁨을 성장 영화의 공식에 따라 전개시킨다. 
「천하장사 마돈나」는 여자로 성장하고 싶은 소년의 성장담을 통해 성정체성의 문제와 가정 여건으로 인한 혼란, 꿈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돌려차기」와 마찬가지로 만화적인 공간 활용, 다양한 캐릭터의 조화, 코미디의 법칙을 활용해서 유쾌하고 밝게 보여주고 있지만, 씨름이라는 지극히 남성적인 전통 스포츠를 하는 소년을 다루는 방식에 있어 감독의 시선이 드러나고 있다. 
감독은 늘 술을 마시고 밥상을 뒤엎는 아버지의 폭력적인 모습 속에 숨겨진 나약한 내면과 소년의 불안을 대칭적으로 보여주고 있는데, 아버지의 거대한 포크레인 앞에 마주선 소년의 왜소함이나 로봇처럼 소년을 공격해오는 아버지의 포크레인 장면에서 아버지과 아들 모두가 남성으로서의 불안감을 느끼고 있으며 각자의 모습에서 연민을 느끼고 있음을 보여준다. 
오히려 인자한 아버지의 역할을 하고 있는 씨름부 감독은 동구의 꿈도 모르고, 어떻게 성장해야 되는지 모르지만, 그의 훈련과 스스로 길을 모색하는 방법에 있어서 조언을 해준다. 잔소리가 심한 주장은 아버지의 또 다른 모습으로 드러나면서 어린 동구를 지속적으로 못살게 구는 역할을 하고 있지만, 결국 동구에게 패배함으로 동구가 남자들로부터 겪은 갈등은 해소되고, 그는 예쁜 여자로 살고 싶은 꿈을 이루게 된다. 
이 영화에서 씨름은 남성적인 세계와 동구의 꿈이 대립되는 지점을 드러내는 장치이면서 그가 성장할 수 있는 시간을 마련해주는 도구가 된다. 

  4.
스포츠맨이 주인공인 영화를 통해서 인물들이 사회나 다른 인물과 만나는 여러 가지 양상은 투쟁의 장, 자기 발견의 도구, 거대한 먹이 사슬의 일부, 성장의 과정, 사랑의 깨달음, 죽음의 극복, 함께 살아감의 체득, 깨어진 관계의 회복으로 나타난다. 
스포츠의 극적인 순간에 동반되는 감동을 보여주는 다양한 감독의 시선 또한 함께 발견할 수 있다. 카메라가 어느 곳에 위치해서 인물들을 보고 있느냐의 문제는 움직임이 수반된 볼거리와 TV 중계를 통해 익숙해진 장면을 재현할 것인지, 삶의 여러 층차가 담긴 삶의 운동감으로 제시할 것인지에 달라진다. 「챔피언」에서 링 밖을 꽉 매운 경기 장면은 인물을 지켜보는 무수한 시선들 안에서도 순수하게 자신과의 싸움을 이어나간다는 것을 강조하는 방식이다. 「반칙왕」은 링 안에서의 숨 막히는 승부가 장외의 싸움으로 번져나가는 장면을 함께 사용함으로써 레슬링의 규칙을 넘어서는 사회적 영역에서의 대결까지 아우르고 있다. 링 안에 국한되지 않는 카메라의 움직임은 스포츠의 세계와 직장의 세계가 동일함을 암묵적으로 드러내준다.   
「우.생.순」은 극적인 맥락 속에서 진행되는 긴장감을 느슨한 시선으로 대체했고, 이를 통해 관객은 이들이 주고받는 공의 움직임에서 그들의 마음과 삶이 서로에게 건네주는 방식이 됨을 깨닫게 된다. 

어떤 방식으로 스포츠를 다루건, 영화 속 인물들은 성장하고 깨달음을 얻게 된다. 
이런 구조는 표피적으로 직업군이 설정되어 사회적인 현상을 드러내는 배경으로 존재했던 1960-1990년대까지의 영화에서 볼 수 없었던 현실감을 구축하고 있으며 개인과 직업, 사회와의 긴밀한 관계를 설정해준다. 또한 다양해진 직업은 이 시대가 어떻게 변화하고 있는지 가늠할 수 있는 증거가 되고, 현실적인 인물들로 인해 영화의 내러티브는 더욱 공고해진다. 
하지만 경찰이나 조직 폭력배와 같은 직업군을 보여주는 방식이 정형화되면서 변별성을 잃은 경우가 다른 직업에까지 번지고 있다는 것은 문제라고 할 수 있다. 폭력이 정당화되고 미화되어 나타나는 대부분의 영화들, 깡패들보다 더 악한 경찰, 부패와 오점을 남기는 형사, 너무나 직업 윤리에 투철한 경찰, 병원이 소재가 되면 늘 등장하는 외과 의사처럼 일종의 클리세를 형성해버린 직업군에 대해서는 냉정한 검토가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또한 트렌드에 적합한 직업들이 단발적으로 사용된 저급한 코미디나 성차를 이용한 직업을 다루는 방식에 있어서도 소재주의를 탈피해야 됨을 느낀다.

박인호∙영화평론가. 경성대 강사.
추천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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