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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호 신작단편/이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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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있었으되 지금은 없는
/이호림
늑대인간-나자리노
늑대인간은 참 한심하다. 도대체 늑대인지 인간인지 헷갈린다는 거다. 늑대인간은 늑대냐, 아니면 인간이냐, 이거 명확하게 얘기해줄 수 있는 사람 아무도 없을 것이다. 늑대인간 자신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모든 사물이란 자기 정체성을 확고히 하는 게 좋은 일일 터다. 카멜레온처럼 이랬다저랬다 하는 것도 있긴 하는 거지만, 그럴 경우 그런 건 사람들로부터 별로 대접받지 못하는 게 사실이다. 그래서 카멜레온은 사람들로부터 별로 대접받지 못한다. 좀 부정적인 의미로 쓰일 때 사람들은 카멜레온이란 명칭을 가져다 붙이는 것이다.
물론 중도란 게 있을 수는 있는 일이다. 예부터 사람들은 어느 극단에 치우치지 않는 중용의 미를 높이 쳐왔고, 이를 중도라는 이름으로 기렸던 게 분명하다. 늑대인간은 늑대도 아니고 그렇다고 인간도 아니고, 늑대가 아닌 것도 아니고, 인간이 아닌 것도 아니라는 점에서 어느 면에서 늑대와 인간의 중간이라 할 수 있고, 이런 점에서 보면 늑대인간이란 중용의 미를 구현하고 있는 존재라고도 볼 수 있는 게 사실이다. 늑대인간은 중도의 구현체일 수 있다는 것이다. 중도의 구현체라면, 늑대인간은 참 한심한 존재라는 언설은 하루 빨리 취소하는 게 체면을 구기지 않는 일이겠다. 중도란 참 좋은 것일 텐데, 이를 두고 참 한심하다고 했으니, 한심하다고 말을 낸 ‘내’가 오히려 한심하게 여겨질 공산이 커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늑대인간이 중도의 구현체일 수 있다는 걸 감안한다 하더라도, 참, 여전히 목에 탁 가시가 걸린 것처럼 께름칙한 구석이 남기도 한다. 늑대인간은 참 한심한 존재라는 언설을 하루빨리 취소해야 함에도 섣불리 그러고 싶지도 않게 하는 뻗댕김이랄까 하는 게 있다는 것이다. 왜 하필 늑대와 인간의 중간이냐고 하는 것이다. 개와 인간의 중간이면 뭐 안 되나. 어디 덧나나. 고양이와 인간의 중간이면 또 어떠냐는 거다. 왜 하필 늑대와 인간의 중간이냔 말이다. ‘나’처럼 늑대를 영 좋아하지 않는 사람에겐 늑대와 인간의 중간인 늑대인간이 영 중간이고 중용이고 중도라 해도, 좋게 넘어가지지가 않는 것이다. 하긴 ‘내’가 인간보다 늑대인간을 더 싫어하는 것은 아니니까 늑대인간이 인간보다 못하다고는 할 수 없는 일이긴 하겠지만.
하여간 늑대인간을 참 한심하게 보든 참 두심하게 보든 참 세심하게 보든, 좌우지당간에 늑대인간은 조심해야 한다. 이 점은 늑대인간에 대한 선호를 떠나서 깊이 명심해야 할 일인데, 늑대인간은 위험한 중간이기 때문이다. 늑대인간이 위험한 중간인 것은 늑대인간이 산 자의 인육을 먹는 까닭이다. 그러니까 당신이 산 자라면 필히 늑대인간을 조심해야 한다. 당신이 산 자라면 당신도 늑대인간의 잠재적 먹잇감인 게 피할 수 없는 운명인 거니까. 물론 당신이 산 자가 아니고 죽은 자라면 이는 해당사항이 없는 일이다. 늑대인간의 먹잇감이 될 수 있는 가능성에서부터 벗어나 있는 거니까. 그러나 당신이 죽은 자라고 해서 마냥 안심만 하고 있는 것도 곤란하다. 세상에는 위험한 게 늑대인간만 있는 게 아니고 산 자만을 먹잇감으로 하는 것들만 있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죽은 자들을 먹잇감으로 하는 위험한 것들도 있는 것이다. 그 대표적인 게 흡혈마귀이다. 저승사자라고 하는 무서운 사자도 있는 거고. 저승사자만 있고 저승호랑이는 없는 건 다행이겠지만.
늑대인간이 평상시에는 멀쩡한 사람이었다가 둥그런 보름달이 뜨는 보름만 되면 늑대로 변한다는 것은 참 보는 사람 헷갈리게 하는 일이다. 참 코메디라는 거다. 늑대인간이 참 한심하든, 중용의 미의 구현체이든, 중도의 길을 가는 존재이든 다 용서할 수 있겠는데, 이 헷갈리게 하는 점에 있어서만큼은 영 용서가 안 되고 감정이 안 좋다. 하긴 ‘내’가 늑대인간을 용서하고 안 하고 할 입장에 있는 것은 아닌 거지만.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 하더라도 이건 너무 좀 심하고, 너무 헷갈리게 한다는 거다. 사람 돌아버리게 할 정도라는 건데, 사람 돌아버리게 하는 건 좋은 일이 아니지 않겠는가.
우리 마을에 나자리노라는 너무 어여쁜 소녀가 살고 있었다. 나자리노는 너무 어여쁜 소녀여서 우리 마을 청년 모두가 그녀를 흠모하고 사랑하고 애지중지했는데, 나도 우리 마을의 청년이니까 당연히, 나자리노를 흠모하고 사랑하고 애지중지했다. 만일 나자리노를 보고 흠모하고 사랑하고 애지중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청년이 아니든가 우리 마을 사람이 아니든가 둘 중의 하나였다. 우리 마을의 청년인데도 나자리노를 흠모하고 사랑하고 애지중지하지 않는 자가 있다면, 그는 껍데기만 청년이고 실속은 청년이 아닌 자든가, 눈이 먼 자든가, 아님 나자리노의 비밀을 이미 알아버린 자든가, 이 셋 중의 하나였다. 나자리노의 비밀을 이미 알아버린 자라는 건, 나자리노가 늑대인간이라는 걸 이미 알아버린 자라는 의미였다. 그러나 우리 마을에 나자리노가 늑대인간이라는 사실을 이미 알아버린 청년은 한 명도 없었다.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이유에서였다.
첫째는 나자리노는 늑대인간이었지 캣우먼은 아니었다는 점이다. 캣우먼은 섹스할 때 오르가즘에 도달하는 순간 고양이로 변해버리고 말아 그 정체가 쉽사리 들통 나고 마는 거지만, 나자리노는 섹스할 때 아무리 오르가즘에 도달한다 하더라도 늑대인간으로 돌변해버리지는 않는 까닭이다. 보름달만 뜨지 않는 한 나자리노는 늑대인간이 되지 않고, 그래서 나자리노가 늑대인간이라는 사실은 웬만해선 들통 나지 않고, 들통 나기 어렵게 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보면 늑대인간인 나자리노가 캣우먼보다는 행복한 존재라고도 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이건 들통 난다는 점에서만 그렇다는 거고, 실제로 늑대인간인 나자리노가 캣우먼보다 더 행복한지는 결정내리기 어려운 일이다. 더 불행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캣우먼은 섹스를 통해서 쉽게 들통 나지만, 그런다고 해서 자기가 사랑하는 연인을 잡아먹지는 않는 반면 나자리노는 쉽게 들통 나지는 않지만 늑대인간으로 변할 경우 자기가 사랑하는 연인을 잡아먹고 그 인육을 취한다는 것이다. 사랑하는 연인을 제 입으로 잡아먹는 것만큼 불행한 일이 어디 있겠는가. 나중에 보름달이 지고 다시 사람으로 돌아와 이 사실을 알고 나면 나자리노는 자기 심장을 쥐어뜯으며 통곡하고 다신 사랑하는 연인을 만들지 않겠다고 다짐하게 되는 것이다. 자기 심장을 쥐어뜯으니 이 얼마나 아플 일이며 다신 사랑하는 연인을 만들지 않겠다고 맹세하니 이 얼마나 서글픈 일인가.
둘째는 나자리노가 늑대인간이라는 사실을 안 마을청년들은 전부 나자리노에게 잡아먹혔기 때문이다. 나자리노가 늑대인간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마을청년들은 모두 한때 나자리노의 연인들이었는데, 그건 당연한 일이었는데, 나자리노의 연인이 되지 않고서는 나자리노가 늑대인간이라는 사실을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나자리노는 자기 연인과 꼭 보름달이 뜨는 보름에만 섹스를 했었다. 다른 때에는 섹스를 하지 않았는데, 연인이 섹스를 하자고 아무리 졸라대어도 하지 않았는데, 당연한 일이었다. 보름달이 뜨는 보름 이외에는 나자리노의 거기가 열리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보름달이 뜨는 보름이 아니고서는 아무리 섹스를 하고 싶어도 아무리 연인을 사랑하더라도 나자리노와 연인은 섹스를 즐길 수 없었던 것이다. 이게 늑대인간 나자리노의 운명이요 숙명이요 비애였다고 할 수 있다.
이렇게 보면 늑대인간 나자리노와 캣우먼과는 본질적으로 차이가 없는 존재라고도 할 수 있는 일인지도 모르겠다. 나자리노는 캣우먼과는 달리 언제든지 섹스를 할 수 있는 경우는 아니지만 섹스를 할 경우 캣우먼이 고양이로 변하듯이 나자리노도 늑대인간으로 변해야 할 운명이기 때문이다. 나자리노는 보름달이 뜨는 보름이면 늑대인간으로 변하게 되어 있는데, 나자리노에게 섹스가 가능한 날은 그 날, 보름달이 뜨는 보름에만 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자리노의 연인들은, 나자리노가 늑대인간이라는 사실을 안 연인들은 그걸 아는 순간 마을에서 사라지게 되었던 것이다. 마을에서 사라졌다는 것은 다른 사실을 의미하지 않는다. 늑대인간이 된 나자리노에게 잡아먹혔다는 것이다. 많은 청년들이 나자리노에게 잡아먹히는 바 되었었다. 사람으로 돌아온 나자리노는 자신이 저지른 끔찍한 일에 경악하고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슬픔에 다시는 연인을 만들지 않겠다고 다짐하지만, 그 다짐은 번번이 지켜지지 않았다. 왜냐하면 너무도 어여쁜 나자리노를 마을의 청년들이 가만 놓아두려 하지 않았고, 나자리노에게 잡아먹힌다 하더라도 나자리노의 연인이 되고 싶다고 마음먹는 청년이 한 둘이 아니었고, 나자리노 자신 막 꽃이 피는 생기발랄한 나이에 남자를 유혹하지 않고는 배겨낼 수 없었기 때문이다.
너무 많은 마을 청년들이 늑대인간에게 잡아먹혔기 때문에 마을사람들 사이에서 늑대인간을 경계하는 우려의 목소리가 생겨났다. 보름달 뜨는 보름이면 문을 꼭 걸어 잠그고 결코 집 밖으로 나가선 안 된다는 금기가 마을 사람들 사이에서 생겨났다. 그러나 그 금기를 꼭 깨는 사람들이 있었다. 마을 청년들이었다. 마을어른들은 마을청년들이 혈기왕성해 그 혈기를 참지 못하고 그 금기를 깨고 집 밖으로 나가는 거라고 하는데, 그래서 늑대인간에게 희생당하는 거라고 혀를 내두르곤 했다. 마을청년들은 혈기를 누를 줄 알아야 하고, 그래야 생명을 보존할 수 있고, 늑대인간의 습격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할 수 있다고 했다. 그러나 마을의 금기와 마을어른들의 충고에도 불구하고 마을청년들이 늑대인간에게 희생되는 사건은 잊을 만하면 일어났고, 결코 근절되지 않았다. 너무 어여쁜 나자리노가 늑대인간이라는 진실을 마을사람들이 결코 몰랐기 때문이었다.
셋째는, 나자리노가 늑대인간이라는 사실을 안 사람이 마을을 떠났기 때문이었다. 이 경우는 단 한사람의 경우만이 해당된다. 이 사람은 우연한 기회에 나자리노가 늑대인간으로 변신하는 걸 목도하게 되었고, 그 광경에 너무 충격을 받고 말문을 잃었다가, 결국 생에 환멸을 느끼고 마을을 떠나게 되었던 것이다.
이렇게 해서 나자리노가 늑대인간이라는 사실이 마을에 알려지지 않았던 것이다. 알려질 수 없었기 때문에 알려지지 않았던 것이다. 그 사실을 아는 모든 사람은 늑대인간 나자리노에게 죽임을 당했고, 산 유일한 사람은 마을을 떠났기 때문이었다.
헌데, 나자리노가 늑대인간이란 사실을 알고 마을을 떠난 유일한 산 사람에 대하여 독자들은 궁금할 것이다. 궁금하지 않다면 그게 이상한 일이 될 것이다. 왜냐하면 그 사람이 늑대인간 나자리노의 비밀을 알고 있는 유일한 산 사람이니까 말이다.
나자리노의 비밀을 알고 마을을 떠난 유일한 산 사람이 다름아닌, 바로 ‘나’였다. 내가 나자리노의 비밀을 알고 마을을 떠난 그 사람이었던 것이다.
내가 나자리노가 늑대인간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은, 나의 이종사촌 팽이 덕분이었다. 나의 이종사촌 팽이는 정말이지 팽이처럼 생겼는데, 어떻게, 내가 그렇게 바랐으나 되지 못했던, 나자리노의 연인이 되었던 것이었다. 이렇게 볼 때 나자리노는 팽이를 좋아하는 것 같았다. 그렇지 않다면 나보다 나을 게 없는 나의 이종사촌 팽이가 나를 제치고 나자리노의 연인이 되었다는 건 설명키 어려운 일이었다.
보름달이 뜬 보름에 팽이가 마을의 금기, 보름달이 뜬 보름에는 문을 걸어 잠그고 집 밖으로 나가지 말라는 금기를 깨고 집 밖으로 나갔었다. 나의 이종사촌 팽이네 집은 우리집과 이웃해 있었고 화장실을 같이 썼는데, 화장실을 갔다오다 우연찮게 팽이가 마을의 금기를 깨고 남몰래 집 밖으로 나가는 걸 보게 되었던 것이었다. 나는 팽이에게 ‘너 마을의 금기를 깨고 집 밖으로 나가 어디로 가는 거냐’ 이렇게 묻고는 말 참이었었다. 팽이의 뒤를 밟을 생각은 애초에 없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나는 팽이에게 묻고자 하는 바를 묻지 못했고 이상한 호기심에 이끌려 팽이의 뒤를 쫓아 따라 나가게 되었는데, 묻고자 하는 바를 못 물은 것은 말로 묻기에는 팽이가 너무 떨어져 있었고 또 너무 신속하게 집 밖으로 빠져나갔기 때문이었다.
팽이는 우리 마을의 상징나무인, 500년이 넘었다는 은행나무 아래로 갔고, 놀랍게도 거기서 나자리노를 만났다. 나는 한 백여 미터쯤 떨어진 곳에서 삼나무 뒤에 숨어 나의 이종사촌 팽이와 나자리노가 만나는 광경을 훔쳐보았다. 밤이었고, 백여 미터라면 훔쳐보기에는 가깝지만은 않은 거리였지만은 나는 팽이와 나자리노의 만나는 광경을 선명히 목격할 수 있었는데, 아주 휘영청 밝은 보름달이 뜬 덕분이었다.
나자리노와 팽이는 처음 얼마간은 무슨 말인가를 속닥이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 속닥이는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아주 짧았다고도 할 수 있겠는데, 훔쳐보는 나를 위해 아주 잘 된 일이었다. 나자리노와 팽이가 속닥이는 시간이 쓸데없이 길어졌다면 분명 나는 지루함을 느꼈을 게 틀림없었다.
나자리노와 팽이는 내가 짐작한대로 곧 그 짓으로 돌입했다. 남자와 여자가 이렇게 달 밝은 보름달 뜬 밤에 남몰래 만나 무슨 짓을 하겠는가. 뻔한 일이 아닌가. 물론 나는 그러지 않기를 삼나무 뒤에 숨어서 간절히 바랐었다. 나는 나자리노를 연모하고 있었고, 내가 연모하는 나자리노가 나 이외의 남자와 그 짓, 섹스를 한다는 게 도저히 용납되지 않았다. 특히 나의 이종사촌 팽이와 그런다는 건 더욱 눈이 뒤집어질 일이었다. 그러나 나자리노는 여지없이 나의 바람과 기대를 저버렸다. 나는 나자리노가 팽이와 섹스를 하는 모습을 훔쳐보면서 삼나무 뒤에서 홀로 울어야 했다. 가슴이 너무 아팠고, 내 사랑이 나를 뒤흔들어 눈물 흘리지 않고는 견딜 수 없게 만들어놓고 있었다.
그러나 사랑의 상실감에서 오는 나의 아픔은 오래가지 않았다. 나의 사랑의 상실감은 곧 다른 감정으로 대체되었는데, 공포였다. 나는 울음을 뚝 그칠 수밖에 없었다. 울고 싶어도 더 이상 울 수가 없었다.
나는 어느 순간, 나자리노가 늑대인간으로 변해가는 모습을 목도하게 되었던 것이었다. 그건 정말이지 예기치 않는 황당한 일이었고, 경악스런 일이었고, 끔찍한 일이었다. 마을에서 상당히 오래전부터 마을청년들이 늑대인간에 희생을 당해왔고 그래서 늑대인간을 경계하는 목소리가 마을에 있었는데, 정작 그 늑대인간이 마을의 처녀 중에서 가장 어여쁜 나자리노라니 경악할 일이 아닐 수 없는 일 아닌가.
그러나 진짜 끔찍한 일은 나자리노가 늑대인간으로 변신한 이후에 일어났다. 늑대인간으로 변신한 나자리노가 방금 전까지 그녀와 섹스를 즐기던 나의 이종사촌 팽이를 거침없이 때려눕히고 잡아먹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물론 팽이는 도망도 쳐보고 저항도 해보는 거지만 다 부질없는 짓이었다. 늑대인간 나자리노에게는 그 모든 게 통하지 않고, 통할 수 없는 것이었다.
처음 나자리노는 팽이의 얼굴을 물어뜯었고 다음에는 목을 물어뜯었고, 다음에는 오른손 다음에는 왼손 그리고는 몸통을 물어뜯기 시작했다. 나자리노가 팽이를 물어뜯는 것은 순식간에 일어났는데, 늑대인간 나자리노는 몹시 허기진 것 같았고, 식욕도 왕성하고 먹는 솜씨도 능수능란한 것 같았다. 하여간 거기까지였다. 더 이상 나는, 공포와 환멸 때문에, 늑대인간 나자리노가 나의 이종사촌을 물어뜯는 모습을 지켜볼 수 없었고 눈을 감았고, 자리를 떠야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 자리를 떠야한다는 나의 의지와는 달리 나의 발은 나의 의지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꼼짝을 하지 않았다. 꼼짝을 하지 않는 나의 발걸음 때문에 움직여야 한다는 나의 의지는 더욱 절실해져가고 있었다. 그러나 나의 의지가 절실해져갈수록 그에 반비례해 나의 발걸음은 오히려 무거워지고 불가능해져간다는 것이었다. 마치 꿈을 꾸는 것만 같았다. 악몽을 꾸는 것만 같았다. 정말이지 이 모든 게 악몽 같았다. 어떻게 나자리노가 늑대인간으로 변할 수 있고, 늑대인간이 된 나자리노가 나의 이종사촌 팽이를 잡아먹을 수 있고, 공포에 질린 나는 움직일 줄 모를 수가 있단 말인가.
결국 나는 무거워지고 불가능해진 나의 발걸음 때문에 보름달이 지고 해가 뜰 때까지 삼나무 뒤를 떠날 수가 없었다. 나는 삼나무 뒤에서 밤이 새도록 늑대인간 나자리노에게 들키는 게 아닐까 공포에 떨어야만 했다. 그러나 나는 다행히 늑대인간 나자리노에게 들키지 않았다. 아니,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 내가 늑대인간 나자리노에게 들켰다 하더라도 팽이처럼 늑대인간 나자리노에게 잡아먹혔으리라고 하는 데에는 의문의 여지가 있는 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왜냐하면 늑대인간 나자리노는 나의 이종사촌 팽이를 잡아먹은 것으로 이미 충분히 배가 부른 듯 했고, 굳이 또 누구를 잡아먹어야 할 필요성을 못 느끼는 듯했기 때문이었다. 하여간 늑대인간 나자리노는 나의 이종사촌 팽이를 순식간에 잡아먹고는 내가 숨어있던 삼나무와는 반대방향, 마을을 둘러싸고 있는 늑대산을 향해 쏜살같이 사라져갔던 것이었다.
그날 이후 나는 사람이 변했다. 인생의 너무 큰 비의를 보아버렸다는 기분이었고, 한마디로 말해서 인생이 피곤해지고 말았다.
나는 갈등에 사로잡혔다. 나자리노가 늑대인간이라는 사실을 마을어른들께 알리고 더 이상의 마을청년들의 희생을 막아야 할지 아니면 나는 아무것도 못 봤고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처럼 그 사실을 외면할지. 마을청년들이 수시로 늑대인간에게 희생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당연히 마을어른들에게 나자리노가 늑대인간이라는 사실을 알려야 했다. 그러나 나자리노를 생각하면, 내가 연모하는 그 어여쁜 나자리노를 생각하면 그러고 싶지가 않았다. 내가 나자리노가 늑대인간이라는 사실을 밝히면 그 순간 나자리노는 끝장나고, 더 이상 생명을 부지할 수 없을 터였다. 나는 나자리노가 더 이상 생명을 부지할 수 없다는 데에 참을 수가 없고,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늑대인간으로 변한 나자리노는 더할 수 없이 끔찍하고 가공스러운 게 사실이었지만, 다시 사람으로 돌아온 나자리노는 한없이 어여쁘고 내가 연모하는 나자리노였다. 솔직히 나는 내 눈으로 확인한 일이었으면서도 사람으로 돌아온 나자리노를 보고 있노라면 나자리노가 늑대인간이라는 사실이 도저히 믿기지 않았다. 그리고 나자리노가 늑대인간이 되는 것은 한 달에 한 번, 보름달이 뜨는 보름 밤 뿐이라는 것이었다. 보름달 뜨는 그 몇 시간의 밤시간만 빼면 나자리노는 한 달 내내 사람이었다. 보름달 뜨는 그 몇 시간 때문에 사람으로서의 나자리노가 부정당하는 게 그게 정말이지 가하고 바람직하다고 할 수 있는 일인가.
나는 오래 고민했고, 결국 마을을 떠나기로 결심했다. 인생의 비의를 보고 안 사람은 더는 고향에 머물 수 없고, 그렇게 마을을 떠나야 하는 것 같았다.
나는 나자리노가 늑대인간이라는 사실을 마을어른들에게 밝히지 않았다. 밝힐 수가 없었다. 그리하면 나자리노가 생명을 부지할 수 없다는 게 확실했기 때문에, 나는 차마 내 입으로 나자리노의 생명을 빼앗는 짓을 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마을의 청년들이 늑대인간에게 희생당하는 걸 태평하게 지켜보고만 있을 수도 없는 일이었다. 내가 내릴 수 있는 결론이란, 결국 마을을 떠날 수밖에 없다는 것이었다. 나자리노가 늑대인간이란 진실을 아는 사람은 마을을 떠날 수밖에 없다는 것이었다. 나자리노가 나의 이종사촌을 잡아먹고서 또 다른 마을청년 두 명이 늑대인간에게 희생되었을 때, 나는 그 다음날로 마을을 떠났다. 더 이상 마을에 머무를 수가 없었다.
이제 마을을 떠난 지 일 년이 지났다. 지금 나는 또 다른 고민에 휩싸여 있다. 마을로 다시 돌아가야 하는 게 아닌가 하는 고민이었다. 인생의 비의를 알아버린 사람은 결국 고향을 떠나게 되어 있는 것이지만, 또 인생의 비의를 알아버린 사람은 결국 고향으로 되돌아가야 하는 게 아닌가 싶어지는 까닭에서였다.
나는 여전히 나자리노를 사랑하고 있었다. 나자리노가 늑대인간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고, 마을을 떠난 지 일 년이나 된 지금에도 말이다.
나는, 살아있는 한 나의 나자리노에 대한 사랑, 연모는 끝나지 않으리라는 걸 요즈음 깨닫고 있었다. 나는 나의 사랑에 충실하고 싶었다. 인생에서 이보다 더 소중하고 값진 것은 없었다. 물론 내가 나의 사랑에 충실해지는 데에는 문제가 있는 일이었다. 나의 이종사촌 팽이의 운명과 동일한 운명을 맞이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죽음을 면할 길이 없다는 것이었다. 죽음을 면할 길이 없는데도, 내가 나의 사랑에 충실해야 하는가.
내가 내린 결론은, 이랬다. 죽음을 면할 길이 없다 하더라도, 내가 나의 사랑에 충실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게 인생이고, 인생이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나는 조만간 마을로 돌아갈 참이었다. 돌아가 나자리노의 연인이 될 참이었다. 그래서 보름달 뜨는 보름날 밤 마을의 상징나무인 500년 넘은 은행나무 아래서 나자리노를 만나, 나자리노와 섹스를 할 것이었다. 그리고는 늑대인간으로 변한 나자리노에게 내 이 버거운 육신을 양식처럼 바칠 것이었다. 나의 이 못 말리는 사랑을 위하여.
구미호
꼬리 아홉 개 달린 여우를 구미호라고 한다.
헌데, 구미호와 관련해서 세상에는 심각한 오해가 있는 듯하다. 세상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구미호는 암컷인 것으로 알고 있다는 것이다. TV드라마를 봐도 그렇고 영화를 봐도 그렇고 동화책을 봐도 그렇다. 필자가 과문이어서인지는 몰라도 아직껏 구미호를 수컷으로 표현하고 있는 TV드라마 영화 동화책을 본 적이 없다.
이건 참 심각한 오해다. 이게 참 심각한 오해인 건, 이게 구미호 사회의 실상을 심각하게 왜곡시키고 사람 사회에 구미호 사회에 대한 잘못된 정보를 전달할 수 있다는 데에 있다. 사람 사회에 구미호 사회에 대한 잘못된 정보가 확산되면, 그건 사람 사회의 손해이다. 구미호 사회에는 아무런 손해도 없다. 물론 사람 사회가 구미호 사회에 대한 잘못된 정보를 지니고 있다는 데에 대해 구미호 사회가 답답해하고 기분나빠할 수는 있지만, 그런 기분나빠함을 빼놓고는 구미호 사회가 입을 손해란 실질적으로 없다. 오히려 실질적인 이익만이 있을 것이다. 구미호 사회가 사람 사회에 대한 적대감을 지니고 있고, 사람 사회를 정복하겠다는 강력한 의도를 지니고 있다면 말이다.
구미호 사회가 사람 사회에 대한 적대감을 지니고 있고 이를 정복하려는 강력한 의도를 지니고 있는가에 대해서는 사실 알려진 정보가 없다. 구미호는 다 암컷이라는 이런 어두운 정보 수준에 허덕이는 사람 사회에 그보다 더 고급정보인 이런 게 알려져 있을 턱이 없지 않겠는가. 구미호 사회가 사람 사회에 대해 적대감을 지니고 있고 사람 사회를 정복할 강력한 의지를 지니고 있다면 사람 사회는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다. 꼭 정복당할 수밖에 없게 되어 있다는 것이다. 구미호 사회에 대한 정보를 우리 사람 사회가 무지할 정도로 너무 갖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내가 이렇게 구미호에 대하여 쓰고자 하는 게 이와 연관 지어서 보면, 그러니까 어찌 보면 말이지, 사람 사회에 대한 우인충정憂人忠情에서 비롯된 일이라고도 할 수 있는 일이겠다. 구미호 사회에 대해 너무 무지한 사람 사회에 구미호에 대한 정보를 주어 경각심을 심어주고자 하는 일이 될 수 있겠기 때문이다. 물론 내가 아는 구미호에 대한 정보는 별 것 아닌 것이긴 하다. 구미호와 한 보름쯤 생활한 데에 불과한 거니까. 보름이라면 인간의 길지 않은 인생과 비교해 볼 때에도 정말이지 너무 짧은 기간인 게 틀림없는 일이다. 하지만 사람 사회가 구미호 사회에 대해 너무 무지한 걸 감안하면, 그것마저도 결코 무시할 수 없는 기간인 것만큼은 분명하고, 나는 내 나름이긴 하지만 그런 자부심과 진정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하긴, 우인충정이란 말은 좀 지나친 말이긴 하겠다. 듣는 사람이나 말하는 나 자신이나 거부감이 이는 말임에 틀림없다. 우인충정이라니, 난 그런 걸 가슴 속에 품고 있을 위인이 못된다. 일단은 나는 별로 사람을 대단하게 여기지 않는다. 나는 구미호를 사람보다 더 대단하게 여긴다. 사람의 일 족속이면서도 사람보다 구미호를 더 대단하게 여긴다는 건 종족 배반자처럼 여겨질 수 있는 일이겠지만, 나처럼 구미호에 대해 좀 알고 나면 나를 탓할 일만은 아니라는 걸 누구든 수긍할 수 있게 된다. 그리고 나는 좀 별 볼 일 없는 놈이라는 거다. 별 볼 일 없는 놈이 우인충정을 갖게 되기란 바늘이 낙타귀를 뚫지 못하는 것처럼 희귀한 일이 될 것이다. 우인충정이란 대체로 별 볼 일 있는 사람들이 갖고 품게 되는 것이니까 말이다.
이렇게 따져놓고 보니까, 내가 구미호에 대한 정보를 사람 사회에 전달하려고 하는 것은 무슨 큰 목적이 있어서가 아니라는 걸 인정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다. 우인충정에서 비롯되었다는 말은 거짓말이고, 원래가 나는 무슨 얘기든, 내가 알고 있는 걸 조잘대지 않고는 못견뎌내는, 내 지극히 주관적인 성향 때문에 구미호에 대한 정보를 사람 사회에 전하려 하는 것 뿐이라는 게 옳겠다. 사실 나는 내 못 말리는 주절거림 성격 때문에 구미호에 대한 얘기를 하려는 것뿐이다. 이 얘기를 하지 않고는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고 고자질하지 못해 병이 난 이발사처럼 병이 나버릴 것 같으니까 말이다. 다른 의도는 없는 거다. 내 얘기를 듣고 사람 사회가 구미호 사회에 대해 경각심을 갖든 말든, 구미호 사회의 사람 사회에 대한 정복을 방지하는 데 일조를 하든 말든 거기에는 나는 아무런 관심이 없는 것이다.
사람들이 구미호는 모두 암컷이라는 잘못된 오류에 빠지게 된 그 결정적인 원인은 무엇보다도 사람들의 사물에 대한 잘못된 비유에서부터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다. 사람들은 여자를 여우로 남자를 늑대로 비유하는데, 늑대에 대해서는 잘 몰라 할 말이 없지만 구미호에 대해서는 이 비유는 전적으로 틀린 비유이다. 구미호는 여자도 있지만 남자도 많다. 오히려 구미호 사회에 가보면 알겠지만 남초 현상을 빚고 있어 남자 구미호가 더 많은 것이다. 남자 구미호가 더 많은데도 구미호를 여자로 알고 여자로 비유한다는 것은 구미호 입장에서는 기분이 상할 일임에 틀림없다. 기분이 상해도 크게 상할 일임에 틀림없다. 안 그렇겠는가. 멀쩡한 남자를 두고 여자에 비유하니, 기분 안 상할 구미호가 어디 있겠는가. 사람인 나도 그럴 진데 말이다. 구미호를 기분 나쁘게 하는 것은 좋지 않다. 아주 좋지 않다. 왜냐하면 구미호는 알려진 대로 힘이 세고, 조화가 무궁무진하기 때문이다.
구미호에 대한 사람의 첫 실수가 구미호를 여자에 비유한 여기에 있다. 구미호는 이 때문에 기분이 많이 상했고, 자신들의 이미지를 왜곡한 사람에 대하여 안좋은 감정을 갖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사람 사회에 구미호에 대하여 크게 잘못 알려진 정보가 구미호가 사람이 되고 싶어 하는 존재라는 정보이다. 구미호는 여우로 태어났으나 오래 묵어 꼬리를 아홉 개나 갖게 되었고, 그 꼬리를 통해 온갖 술수와 조화를 부릴 수 있는 존재인데, 궁극적으로 사람이 되고 싶어 하는 존재라는 것이다. 구미호가 사람의 간 백 개를 잡아먹으면 사람이 되게 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구미호를 만나면 간은 없는 척하고, 쓸개는 내보여줘도 간은 내보여주지 말라고 하는 것이다. 간도 쓸개도 없는 놈처럼 굴지 말고 간은 없고 쓸개는 있는 놈처럼 굴라는 것이다.
이건 정말이지 인간 중심적인 사고이다. 이 정보 속에는 은연중에 인간이 짐승 중의 최고이고, 적어도 구미호보다는 나은 존재이고, 그래서 구미호가 사람이 되고 싶어 한다는 인간중심적, 인간 우월적이면서 구미호 비하적 의식이 깔려 있는 것이다. 비록 사람이 구미호 같은 조화를 부릴 줄 모르고 힘이 없어 잡혀 간을 먹히면서도 그렇다는 것이다.
이건 정말이지 아전인수식 정보다. 사람들이 사람들 듣기 좋으라고 지 멋대로 만들어내고 조작한 정보다. 구미호들이 들으면 정말 깜짝 놀라고 화가 나게 할 만한 정보고, 오해를 사기에 딱 좋은 정보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이건 결코 사실이 아니라는 것이다.
구미호는 결코 사람이 되고자 하는 존재가 아니다. 사람보다도 더 오래 이 지구상에서 지구의 일원으로 살아왔지만 구미호의 탄생 이래 구미호 족속의 어떤 존재도 사람이 되고자 한 존재는 없었다. 구미호에게 인간이란 단지 간이라는 식사를 제공하는 자연의 반찬이요 음식물에 지날 뿐이었다. 세상의 어떤 존재가 자기의 음식물에 지날 뿐인 존재가 되고자 하는 존재가 있을 수 있겠는가. 물론 구미호 족속 중에도 사람 족속에 있어서처럼 특이한 것들이 있어 그런 엉뚱한, 희한한 꿈을 꾸는 것들이 있을 수는 있겠지만, 그건 말 그대로 꿈이었다. 실현되라고 꾸는 꿈이 아니라 심심해서 꾸어보는, 리비도가 전혀 개입되지 않은 꿈이라는 것이었다. 말하자면 망상이요 몽상이라는 것이었다.
사람들 사이에 퍼져있는 구미호에 관한 정보 중에 맞는 것도 있긴 하다. 구미호가 사람의 간을 필요로 하고, 사람에게는 참으로 두려운 존재라고 하는 것이다. 그리고 구미호가 사람의 간 백 개를 먹고 무언가 다른 존재로 거듭나려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구미호가 사람의 간을 필요로 하고, 그 간을 먹고 무언가 다른 존재로 거듭나려 한다고 해서 그게 사람으로 거듭나려 한다고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구미호가 사람의 간을 백 개 취하고 거듭나려 하는 존재는 사람이 아닌 것이다. 사람과는 아무런 관련도 없는 존재인 것이다.
사람들에게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아니 전혀 알려져 있지 않지만, 꼬리 아홉 개 달린 구미호 말고 꼬리 열 개 달린 여우가 있는 것이다. 구미호 사회에서는 사람 사회에서와는 달리 아주 잘 알려진 존재인데, 꼬리 열 개 달린 여우란 여우의 완성태를 의미한다. 사람에게는 전혀 알려져 있지 않아 꼬리 열 개 달린 여우에 대해서 부르는 이름이 사람 사회에서는 없지만, 구미호 사회에서는 꼬리 열 개 달린 여우가 아주 잘 알려져 있어 이를 부르는 이름이 있다. 시미호라고 하는 게 그것이다.
시미호란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여우라는 존재의 완성태를 의미하는데, 사람 사회에서의 신과 같은 역할을 하는 존재가 구미호 사회에서 아니 전체 여우 사회에서 일컫는 시미호라는 존재였다. 사람 사회에서는 신은 결코 모습을 드러낸 적이 없고 그 있음이 있다고 하는 사람도 있고 없다고 하는 사람도 있을 정도로 심히 의심스러운 바이지만, 구미호 사회에서 시미호는 결코 의심스러운 존재가 아닌 실재하는 존재였다. 사람 사회의 신과 같은 역할을 하면서도 시미호는 구미호 사회에서 실재하는 것으로 누구나의 구미호에게 인정받고 있다는 것이다. 어째서 그런가 하면 시미호가 구미호 사회에서 수시로 출몰하여 자기 존재를 확인해주는 까닭이다.
시미호가 구미호 사회에서의 신과 같은 존재라고 하므로 그 능력이 얼마나 대단한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가히 못하는 바가 없는, 무소불위의 존재라고 상상하면 딱 들어맞을 것이다. 그렇지 않겠는가. 신이란 능력 그 자체이니까 말이다.
구미호가 되고자 하는 것은 바로 여우의 신인, 꼬리 열 개 달린 이 시미호인 것이다. 구미호가 쉽사리 죽지 않고 그렇게 오래 살면서 되고자 하는 존재가 암중모색하는 존재가 바로 시미호인 것이다. 이게 구미호들의 욕망이고 궁극의 목표요 목적인 것이다. 사람이 되고자 한다는 건, 새빨간 거짓말인 것이다. 정말이지 구미호들을 오해해도 너무 크게, 너무 어처구니없게 오해한 일인 것이다. 구미호에게 사람은 목적이 아닌 것이다. 단지 수단일 뿐이지. 목적을 이루기 위한 하나의 수단일 뿐이라는 것이다. 그것도 지극히 하찮은 수단 말이다.
구미호는 꼬리 열 개 달린 여우의 신인 시미호가 되려고 할 뿐인데 사람들이 구미호가 사람이 되고자 한다고, 그래서 자신들의 간을 필요로 한다고 오해하고 착각했으니 구미호 입장에서는 크게 자존심이 상할 일임에 틀림없었다. 하찮은 사람이 오히려 구미호보다 사람을 더 윗길의 존재로 올려놓는 오류를 범한 탓이었다. 구미호에게 사람은 오크나 흡혈귀나 마귀처럼 하급의 존재일 뿐이었다. 그런 사람이 구미호를 하챃게 여겼으니 구미호 입장에서 보면 충분히 모욕감을 느낄 일임에 분명했다.
지구상에 존재하는 존재들 가운데에서 사람이 구미호보다 못한, 하급의 존재라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었다. 무엇보다도 사람은 조화를 부릴 줄 모르는 반면 구미호는 자신의 아홉 개의 꼬리를 사용해 아흔아홉 가지나 되는 오묘한 조화를 부릴 줄 안다는 점이었다. 그리고 이건 더욱 중요한 이유인데, 사람이란 구미호의 반찬거리였을 뿐이지 그 이상의 존재가 아니었다는 것이었다. 반찬거리에 지나지 않는 사람이 어떻게 구미호보다 더 나은 존재일 수 있느냐는 거였다. 확실히 이건 맞는 소리였다. 구미호가 사람의 밥이 된다면 모르지만 사람이 구미호의 밥이 되는 이상 사람이 구미호보다 더 나은 존재일 수는 없는 일이었다.
사람이 구미호를 폄하하고 사람이 구미호보다 더 나은 존재라고 세상에 거짓을 퍼뜨렸기 때문에, 구미호는 사람에 대하여 크게 화가 나고 말았다. 그 화가 어느 정도였느냐 하면 결코 사람을 용서할 수 없다는 정도였다.
사실 구미호는 사람이 자신들을 모두 여자로 환원시켰을 때부터 사람에 대하여 어느 정도 화가 나 있었다. 여자 구미호들은 그 때문에 별 화를 내지 않았지만, 남자 구미호들은 사람이 자신의 성 정체성을 혼란스럽게 한 바가 있었기 때문에 화가 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이렇게 사람에 대하여 감정이 좋지 않던 구미호들이었는데, 사람이 구미호보다 자신들이 더 나은 존재라고, 구미호가 되고자 하는 존재가 사람이라고, 얼토당토않은 소문을 퍼뜨리는 바람에 그 화가 극에 달하고 말았던 것이다. 여기에는 남자 구미호 여자 구미호의 구별이 없었다. 구미호가 되고자 하는 존재가 사람이라는 소리는 구미호에게 사람이 시미호라는 소리로 들렸고, 시미호는 여우의 신이데, 이는 단지 구미호에 대한 모욕일뿐더러 자신들이 받드는 신에 대한 모욕으로도 여겨졌던 것이니, 구미호가 사람을 용서할 수 없게 된 것은 당연하다 할 수 있는 일이었다.
이 일로 해서 구미호 사회에서 사람 사회로 쳐들어가 사람에게 본때를 보이고 다시는 사람이란 존재가 지구상에서 오만방자해지는 일이 없도록 하자는 의론이 생겨났다. 그 의론은 구미호 사회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았고 여차하면 구미호들은 들고 일어나 사람 사회를 칠 기세였다.
그러나 그 의론은 구미호 사회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았으면서도 실상 실행에 옮겨지지는 않았다.
이리 된 데에는, 의외로 시미호의 역할이 컸다. 구미호들이 들고 일어나 오만방자한 사람을 혼내주러 막 가려 할 때, 시미호가 홀연히 구미호들 사이에 나타나, 출현해, 구미호들의 거사를 막았던 것이었다. 시미호는 구미호들의 되고자 하는 바의 존재, 즉 구미호들의 신이었으므로 모든 구미호들이 그러기를 바란다 하더라도 시미호가 그러기를 바라지 않는다면, 모든 일이 그러기는 어려운 일이었다. 아니,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래서 구미호들은 사람을 치겠다는 거사를 아쉽지만, 포기했던 것이었다.
시미호가 구미호들이 사람 사회를 치겠다는 걸 막은 것은 결코 사람 사회를 위해서가 아니었다. 시미호는 여우의 신이므로 사람 사회를 위할 턱이 없는 거니까 당연한 일이었다. 그렇다고 구미호들을 위해 그런 것도 아니었다. 시미호가 구미호들의 거사를 막아선 것은 순전히 시미호 자신의 이기심에서 였을 뿐이었다. 구미호들이 사람 사회를 치면 한꺼번에 너무 많은 시미호가 탄생되지 않을까 하는 우려심에서 그리했던 것이었다.
구미호들이 사람 사회를 치면 구미호들은 필경 수많은 사람들의 간을 빼먹을 게 틀림없는 일이었다. 수많은 사람들의 간을 빼어 먹다보면 구미호 한 마리당 백 사람의 간을 빼어먹는 일도 부지기수로 생길 게 불을 보듯 뻔한 일이었다. 구미호 한 마리당 백 사람의 간을 빼어먹으면, 그 구미호는 존재변이를 일으켜 꼬리가 하나 더 생기고 시미호가 되게 되어 있었다. 구미호들이 사람 사회를 치면 얼마나 많은 시미호들이 생길지 예측키 어려운 일이었다. 하여튼 어마어마한 수의 시미호들이 생길 가능성이 있다는 건데, 사람이란 게 하도 쪽수가 많아 그럴 수가 있다는 것이었다. 시미호로써도 사람들이 너무 오만방자하고 안하무인이라는 생각이지만, 이건, 한꺼번에 너무 많은 시미호가 탄생하는 건 결코 시미호가 바라는 바가 아니었다.
시미호는 그 희소성에 가치가 있는 것이었다. 그 희소성 때문에 가치가 있고, 뭇 존재들로부터 추앙을 받는 것이었다. 물론 시미호의 조화가 하도 오묘난측해서이기도 하지만, 희귀성에서 오는 귀함에 비하면 그건 부차적인 조건이었다. 그러므로 시미호로써는 너무 많은 구미호들의 시미호로의 탈바꿈을 가져올 수 있는 이런 거사는 기필코 반대하고 막아야 하는 것이었다. 웬만해선 시미호가 구미호들 사이에서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것이지만, 신이란 감추어진 맛이 있어야 한다고 알려져 있기 때문에 그런 것이지만, 그런 원칙을 깨고 모습을 드러내었던 것은 이런 급한 사정이 있어서였던 것이다.
사실 구미호 사회를 좀 더 파고들어가 그 실상을 들여다보면 시미호가 얼마나 구미호들을 견제하고 있는가를 알게 되고 조금 놀라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구미호는 사람과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뛰어난 존재이고 그 수명이 몇 배가 되고 그 조화가 오묘 망측한데도 어째서 사람을 잡아 간을 빼어먹는 일이 어렵고 드물게만 일어나고 쉽지 않느냐 하는 거였다. 그게 다 이 시미호의 장난에서 비롯된 일이었다. 위에서 잠깐 언급한 것처럼 시미호는 구미호들이 너 나 할 것 없이 시미호가 되는 걸 몹시 경계하고, 그 구미호들이 시미호가 되는 걸 별로 바라지 않고, 그래서 구미호들이 사람을 잡아 간을 빼어먹는 걸 방해하고 어렵게 만들어놓은 것이었다.
사람들은 잘 모르겠지만, 자신들이 좋아서 술을 먹고 담배를 피우고 마약을 하고 대마를 한다 생각하겠지만, 이건 정말이지 큰 착각이다. 물론 개중의 사람들 중에는 진짜 좋아서 이것들을 하는 예외적인 사람도 있었지만, 대부분의 경우에는 이건 시미호의 농간이다. 사람들이 술을 먹고 담배를 피우고 대마를 하고 마약을 하면 간이 병들게 되어 있다. 단 한번이라도 거기에 입을 댄 사람은 그 간은 쓸모없는 것이 되게 되어 있다. 물론 사람이 사는 데는 지장이 없겠지만, 구미호가 시미호로 거듭나는 데에는 쓸모없는 간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사람이 사는 데에는 지장이 없으면서 구미호가 시미호로 탈바꿈하는 데에는 영향을 주는 이런 오묘한 조화는, 감히 시미호가 아니고서는 할 수 없는 짓이었다.
이런 사실을 사람은 모르지만, 실은 구미호도 모르고 있었다. 이런 사람의 간을 만나면 구미호들은 이건 불량 인간의 불량품이로군 이렇게 치부하고는 말 뿐이었다. 이게 시미호가 꾸며놓은 농간이라고는 꿈에도 생각해보지 않는 것이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시미호가 구미호보다 뛰어난 존재라는 것은 분명한 일이었고, 구미호들이 시미호를 신으로 받들고 시미호로 존재변이를 일으키고자 바라는 것은 당연한 바람이라고 할 수 있는 일이었다.
하여간 구미호들이 사람들의 오만방자함을 참지 못하고 사람 사회를 치기 위하여 거사를 일으키고 시미호가 이를 막은 게 일천 년 전의 일이었다. 시미호가 구미호들의 이 거사를 막지 않았다면 사람 사회는 일천 년 전에 멸망하였을 게 틀림없는 일이었다. 멸망까지는 아니라 하더라도 그 세가 현격히 축소되고 지금과 같은 번영을 구가할 수는 없게 되었을 것이었다. 이런 점에서 보자면 우리 사람들은 구미호들의 거사를 막아준 구미호들의 신인 꼬리 열 개 달린 시미호에게 크게 감사를 해야 마땅할 일이었다. 그러나 예나 지금이나 구미호들의 신인 시미호에게 감사를 하는 사람들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저 예나 지금이나 착각에만 빠져있을 뿐이었다. 자신들이 시미호라고. 구미호가 되고 싶어하는 존재가 자신들, 사람이라고.
사람들도 참 태평하다. 사람들은 일천 년 전에 시미호에게 감사를 표시했어야만 했다. 비록 시미호가 자신의 이기심에서 구미호들의 거사를 막았다 하더라도 그게 결과적으로 사람들을 위해준 일이 되었으므로, 그게 도리였다. 그랬다면 그로부터 일천년이 지난 오늘날 사람들이 이와 같은 위험에 봉착하지 않아도 되었을 수도 있었다. 그때 사람들이 시미호에게 감사했다면, 시미호는 사람들을 다시 보게 되었을 테고, 사람들에게 일말의 동정의 념이라도 품게 되었을 게 분명하겠기 때문이다.
일천 년이 지난 오늘날 구미호들은 사람 사회를 치기 위한 거사를 다시 도모하기 시작했다. 이유는 일천년 전과 동일했다. 아니, 한 가지 뚜렷한 이유가 덧붙었다는 게 실상이겠다. 사람 사회는 여전히 구미호들을 모두 여자로 착각했고, 구미호가 사람이 되고 싶어 하는 줄로 믿고 있었다. 아니, 거기서 한걸음 더 나아가 구미호란 전설 속에서나 나오는 상상의, 비실재의 존재로 존재강등을 시켜놓고 있었다. 이건 도저히 묵과할 수 없는, 구미호들로서는 자존심이 상할 수밖에 없는 일임에 틀림없었다. 하지만 이번 거사의 궁극적인 원인은, 이것들도 그 원인이긴 하였지만, 보다 궁극적인 원인은 다음과 같은 데에 있었다.
구미호들이 수시로 잡아다 빼어먹는 사람들의 간이 한결같이 술에 찌들었거나 담배에 찌들었거나 환경호르몬에 찌들었거나 방사능에 오염되어 찌들었거나 폐수에 찌들었거나 각종 오염물질에 찌들었거나 해서, 모두 불량품들이었다는 사실이었다. 신선한, 쓸 만한 간이 없었다는 것이었다. 구미호들은 지난 백년 동안 쓸모없는 간들 밖에 구할 수 없었기 때문에, 모두 기갈에 걸려 있었고, 이 기갈을 해결하기 위해서 사람 간의 대량공급이 무엇보다도 필요한 지경이었다. 이 사람 간의 대량공급이라는 필요성을 채우기 위해서 구미호들은 사람 사회를 치겠다는 거사를 도모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이번 거사는 단순히 오만방자한 사람 사회를 손을 봐주어야겠다는 단순한 자존심상의 문제를 넘어 기갈의 해소라는 현실적 문제에서 비롯된 것이었다고 해야 할 일이었다.
일천 년 전에 그랬던 것처럼 이번 구미호들의 거사에도 시미호가 나타나 이를 막는 게 예상된다고 할 수 있는 일이었다. 너무 많은 수의 시미호가 한꺼번에 생기는 걸 원치 않는 시미호로서 당연히 예상되는 일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러나 이번에는 시미호는 예상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구미호들 사이에 나타나 구미호들의 신으로서의 위용을 과시하며 거사의 불가함을 논하지 않았다. 이유는 간단했다. 이번 구미호들의 거사에는 그럴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구미호들이 거사를 일으켜 사람 사회를 친다 하더라도 구미호들 중에 시미호로 탈바꿈할 수 있는 구미호들은 없었다. 사람들의 간이 모두 쓸모없는 간으로 변한 탓이었다. 시미호는 모든 사람들의 간이 존재변이를 일으킬 수 있게끔 신선한 간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다. 시미호가 구미호들의 신이어서도 그렇지만, 일천년 전부터 그가 공을 들인 일이기 때문에 이미 잘 알고 있었다.
시미호는 더 이상 자기 같은 존재, 위대한 신적 존재가 생기는 걸 원하지 않았고, 남과 신의 지위를 공유하고 싶지 않았고, 신의 지위를 독점하고 싶었고, 그래서 간에 치명적인 각종 오염물질을 사람 사회에 퍼뜨렸던 것이었다. 일천 년이 지난 지금 모든 사람들의 모든 간은 시미호가 퍼뜨린 각종 오염물질에 의하여 각종으로 오염되었고, 더 이상 구미호들에게 쓸모없는 간이 되어버렸던 것이었다. 그러니 이번 거사에는 시미호는 구미호들 사이에 홀연히 나타나 거창하게 구미호들을 설득하고 자시고 할 필요가 없었던 것이었다…….
이제 구미호에 대한 나의 얘기는 여기서 끝이다. 이게 내가 우연한 기회에 구미호 사회에 빨려 들어가 보름간 그들 틈새를 숨어 다니면서 알아낸 정보다. 사람 사회가 나의 얘기에 귀를 기울인다면 어쩌면 사람 사회는 좀더 오래 생존을 영유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사람 사회가 나의 얘기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그게 무슨 황당한 뻥이냐 하고 나의 애기를 축구공 차듯 뻥 차버린다면, 그 결과는 내 입으로 말하기도 끔찍하지만, 뻔하다. 하긴 사람 사회가 나의 얘기에 귀를 기울인다 하더라도 그 결과는 귀를 기울이지 않을 때와 그다지 차이가 나지는 않을지 모르겠다. 나의 얘기에 귀를 기울이든 기울이지 않든 사람 사회가 구미호들의 거사를 막을 방도는 없겠기 때문이다.
아무튼, 이러하든 저러하든 지금 이 순간 나로서는 만족이다. 나는 그게 뭐가 됐든 내가 알고 있는 걸 미주알고주알 주절대지 않고서는 못 베기는 성격이고, 구미호 얘기를 이렇게 실없이 털어놓음으로써 내 이런 성격을 충분히 충족시킨 까닭이다.
하이드씨와 요괴인간
하이드씨와 요괴인간이 만났다.
하이드씨와 요괴인간이 만난 것은 획기적인 사건이었는데, 그러나 주요 언론사들은 이 사실을 외면했다. 요괴들이 만난 건 인간을 위한 신문에서 다룰 수 없다는 취지에서였다. 언론사들의 외면은 충분히 이해할 만한 바가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하이드씨와 요괴인간의 만남은 주요 언론사들이 이를 외면했지만, 금방 전세계의 대부분의 종족들에게 알려졌다. 하여간 그건 지구라는 별에서 일어난 금세기의 사건 중 몇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센세이셔널한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하이드씨와 요괴인간의 만남을 주선한 것은 미팅 전문업체 듀오였다.
듀오에서 다른 많은 요괴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굳이 하이드씨와 요괴인간만을 골라 만남을 주선했던 것은, 하이드씨가 서양의 요괴를 대표한다고 생각하고 요괴인간은 동양의 요괴를 대표한다는 관점에서였다. 그러나 이는 듀오측이 밝힌 명분이 그렇다는 거고, 실상은 좀 다른 바가 있었다.
서양의 많은 요괴들을 접촉했는데, 서양의 많은 요괴들이 이런 이벤트에 참가하는 걸 꺼려했고, 오로지 하이드씨만을 설득할 수 있었기 때문에 하이드씨가 서양을 대표하는 요괴에 졸지에 뽑혔던 것뿐이었다. 요괴인간의 경우도 마찬가지고 말이다. 그러니까 듀오측이 서양을 대표하는 요괴로 하이드씨를 동양을 대표하는 요괴로 요괴인간을 뽑았다 하더라도, 이는 듀오의 발표 그대로 믿기는 어렵고 이러한 사정을 감안해서 이해해야 할 일이었다.
하이드씨와 요괴인간은 서양과 동양의 요괴를 대표한다는 상징성을 십분 살리기 위해서 동양과 서양의 경계, 우랄산맥의 정상, 꼭대기에서 만났다. 우랄산맥의 정상은 한여름에도 눈이 쌓여있을 정도로 몹시 춥고 환경이 열악한 곳이었지만, 하이드씨나 요괴인간이나 요괴들이어서 그런 열악함에 영향을 받지 않았다. 문제는 미팅을 주선한 듀오 측의 참관인, 즉 커플 매니저였는데, 커플 매니저는 인간이어서 그 열악함에 심각한 영향을 받을 수 밖에 없어서였다. 하여간 이 열악함 때문에 하이드씨와 요괴인간의 만남을 주선한 듀오 측의 커플 매니저는 상당히 애를 먹고 고생을 해야만 했다. 우랄산맥을 오를 때 그리고 내려올 때 두 번에 걸쳐 생명을 잃을 뻔 했다는 게, 들려오는 후문이었다.
실은 하이드씨나 요괴인간도 다른 요괴들과 마찬가지로 이 만남 이벤트에 참가하기를 한사코 거절했었다고 한다. 원래 요괴들이란 남 앞에 나서기를 좋아하지 않고, 어두운 곳에서 그림자처럼 있는 듯 없는 듯 움직이는 걸 좋아하고, 그게 습성화된 탓이었다. 이렇게 한사코 거절하는 하이드씨와 요괴인간을 움직인 건 어마어마한, 정말이지 천문학적인 수치의 개런티 때문이었다고 했다.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미팅 전문업체 듀오의 전 자산에 맞먹는 개런티가 주어졌다고도 했다. 이 소문이 맞다면, 이 만남이 사람들의 주목을 끌지 못하고 유야무야 넘어가게 된다면, 듀오는 틀림없이 망하게 된다는 얘기였다. 그만큼 듀오가 하이드씨와 요괴인간과의 만남을 사운을 걸고 추진한 일이라는 걸 짐작할 수 있는 일이겠다.
요괴들의 일반적인 성향, 어두운 곳에서 있는 듯 없는 듯 움직이는 성향 때문인는 몰라도, 하이드씨와 요괴인간과의 만남은 그리 길지 않았다. 아니, 그리 길지 않았다고 하기에는 뭣하고 매우 짧았다고 하는 게 올바른 표현이겠다. 그 만난 시간이 십분 남짓이었으니까 말이다. 준비하고 선전하고 요란법석을 떤 시간에 비하면 차라리 존재하지도 않는다고 할 만한 수준의 시간이었다. 그러나 이 십분 남짓의 만남이 전 세계인들의 심금에 깊은 인상을 남겨놓았다. 적어도 앞으로 삼세대까지는 지워지지 않을 깊은 인상이었는데, 그래서 듀오는 투자금액을 회수하고도 큰 이득을 남겼고 회사 이미지도 제고했고, 망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 이벤트를 통해 미팅주선업체에서의 독보적이고도 세계적인 주자로 우뚝 올라서게 되었던 것이다.
하이드씨와 요괴인간과의 십분 남짓한 만남에서의 대화가 이들의 만남에 동참했던 커플매니저에 의하여 정리되어 세상에 전해졌다. 커플매니저는 우랄산맥을 오를 때와 내려올 때 두 번 죽을 고비를 넘겼다고 하는데, 만일 커플매니저가 그 죽을 고비에서 결국 살아남지 못하고 죽었다면, 인류는 하이드씨와 요괴인간과의 만남에서 이루어진 대화의 내용을 전해들을 수 없었고, 그건 인류를 위해 어마어마한 손실이라 할 수 있었을 일일 텐데, 듀오는 더욱 큰 손실이 되었을 일이었다. 그 대화가 전해지지 못했다면 듀오는 투자금을 회수하지 못하고 그냥 주저앉아 망해버렸을 터이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인터넷이 없었다면 이도 큰일이었을 것이었다. 하이드씨와 요괴인간과의 십분 남짓한 만남에서의 대화가 세상에 알려지지 못했을 것이었다. 왜냐하면 세상의 주요언론들이 하이드씨와 요괴인간과의 만남은 요괴들의 만남이고 인간 사이의 만남이 아니기 때문에 인간 사이의 만남을 다루는 자신들이 다룰 수 없다고 외면했기 때문이었다.
다음은 하이드씨와 요괴인간과의 대화를 정리한 커플매니저의 노트이다.
하이드씨가 말했다.
“어째서 당신 요괴인간은 인간이 되고자 하는 거요. 나로서는 이해할 수가 없소. 신이나 부처나 제석천이나 천자 등등이 되고자 하지 않고 말이요.”
요괴인간이 말했다.
“하이드씨가 나를 이해하지 못한다고 하는데 나는 하이드씨를 이해할 수가 없소. 원래 인간인 지킬박사이면서, 어떻게 하이드라는 당신과 같은 요괴로 변할 수가 있느냐 하는 거요. 인간 속에 왜 요괴가 들어 있느냐 하는 거요.”
하이드씨가 말했다.
“요괴인간 당신은 착각하고 있는 거요. 인간은 완전체가 아니요. 지금 요괴인간 당신은 인간이 되고 싶어 하지만, 인간이 되고나면 알게 될 거요. 인간이 얼마나 불완전한 존재고, 이중적인 존재인 줄을 말이요. 그때 되면 요괴인간 당신도 인간이 되기를 바란 걸 후회하게 될 거요. 목표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게 될 거란 말이요.”
요괴인간이 말했다.
“아니, 나는 후회할 일이 없소. 나의 목표는 잘못된 것이 아니니까. 인간이란 불완전한 존재가 아니고, 이중적인 존재도 아니라는 거요. 그러니 요괴인간인 내가 추구할 존재인 게 맞게 되는 거지. 나는 하이드씨 당신이 후회하게 되리라 보오. 하이드씨 당신은 인간인 지킬박사의 분신이고 자신이 그것의 이면이라고 주장하지만, 그건 틀린 말이오. 인간 지킬박사와 하이드 당신은 다른 것인 것이요. 하이드 당신은 인간 지킬박사 속에 빌붙어 사는 그런 야비한 생존방식을 버리고 떳떳하게 독립해 나와야 하오. 독립해나와서, '내가 인간의 이면'이라는 얼토당토않은 얘기는 그만 하고 나처럼 인간이 되기를 추구해야만 하오. 그게 요괴의 도리라고 나는 보오.”
하이드씨가 말했다.
“참 답답하군. 누군 인간 지킬박사와 함께 하는 게 좋아서 내가 지킬박사로부터 독립해 나오지 못하고 있는 줄 아오. 지킬박사가 날 붙잡고 놓아주지 않기 때문에 그러지 못하고 있는 것일 뿐이오. 지킬박사가 나를 자신의 분신, 제이의 지킬박사로 알고 있기 때문에 그런 것이란 말이오. 아니, 그 정도를 넘어서지. 지킬박사는 나 하이드를 자신의 본성으로 이해하고 있단 말이오. 인간 지킬은 지킬박사의 껍데기일 뿐이라고 이해하고 있고 말이오.”
요괴인간이 말했다.
“하이드씨 그건 틀린 말이오. 껍데기는 하이드씨 당신이오. 내가 껍데기인 것처럼 말이오. 인간 지킬박사가 실체인 거요.”
하이드씨가 말했다.
“내 이럴 줄 알았소. 당신을 만나면 얘기가 겉돌 줄을. 난 더 이상 당신과 얘기하고 싶지 않소. 나는 이제 그만 어둠 속, 그림자 세계로 돌아가 버릴 테요.”
요괴인간이 말했다.
“누가 할 소리를. 나도 하이드씨 당신과 더 이상 얘기하고 싶지 않소. 나도 이제 그만 요괴들의 지하세계로 돌아가 버릴 테요.”
커플매니저가 하이드씨와 요괴인간의 대화 마지막에 짤막하게 자신의 견해를 피력하는 토를 달았다.
아마도 이게 서양요괴와 동양요괴의 근본적 차이가 아닌가 싶다. 서양요괴는 인간을 불완전체로 본다는 것이다. 인간을 이중적 존재요 신성과 마성을 동시에 지닌 존재라고 본다는 것이다. 아니, 더 나아가 인간이야말로 마성적 존재라고 인식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서양요괴는 자신이 인간의 본성, 본질이라고 주장한다. 하이드씨가 자신을 지킬박사의 본성이라고 주장하는 것처럼 말이다.
반면에 동양요괴는 인간을 완전체로 본다. 완전체까지는 아니라 하더라도 적어도 선성을 지닌 것으로 인정한다. 그래서 동양요괴는 인간을 존재의 규범으로 삼고 인간을 목적으로 간주한다. 인간이라는 존재로 거듭나고 싶어한다는 것이다. 동양요괴는 결코 자신이 인간의 본성이요 본질이라고 주장하지 않는다. 인간의 본성은 완성체로서 따로 있고, 자신은 이를 추구할 뿐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이런 서양요괴와 동양요괴 중 어느 쪽이 더 무서운 걸까.
아니, 질문을 바꾸는 게 좋겠다.
서양요괴와 동양요괴 중, 그러니까 하이드씨와 요괴인간 중 어느 쪽이 더 사물의 진실에 접근해 있다고 해야 하는 걸까.
이호림∙1995년 ≪작가세계≫ 소설부문 신인상으로 등단. 2002년 ≪문학공간≫ 평론부문 신인상. 소설집 사랑은 끝나지 않는다, 웅녀야 웅녀야 등. 평론집 친일문학은 없다, 자유주의, 전체주의 그리고 예술(공저), 유정의 소설은 왜 웃긴가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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