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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호 신작시/김인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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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인자
유배지에서 온 편지 외 1편
선배, 드디어 섬 생활이 시작되었다우
외롭냐구요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아요
숙박은 하루 만 원 하는 파도여인숙에
두 끼 밥값도 만 원을 넘지 않으니
내 수준에 딱 맞는 건지 살짝 과한 건지
저녁상 물리고 나면 달달한 유자차도 주는 걸요
아시다시피 사는 일 어디 만만하던가요
먼 길 달려온 바람의 동지들은 밤마다 철조망을 넘는 모양이지만,
해질녘 빈 들판에 나가 찬바람에 뺨때기 얼얼하도록 걷는 것 말고는
대여섯 번 훑어본 그도 사랑이라고 뒤늦게 찾아온 불륜을 당당히 자백한
여배우의 신파극 같은 기사가 실린 짬뽕국물 진하게 밴 월간지를 넘기다가
쪽방에 처박혀 담배벌이도 안 되는 이놈의 그림만 죽어라 그린다우
쉰이 되어서야 북녘을 지척에 둔 이곳으로 자처한 유배니
캔버스 위에 펼쳐진 황량하고 춥고 옹색한 이 모든 것들
마지막이라 생각하고 운명처럼 한 번 빡세게 껴안아 보려구요
때가 되면 지금껏 견뎌온 시간들 모두 섬이었다는 걸 알게 될 테지만
지금으로선 섬에서 섬으로 흐르는 일만이 일인 것 같아
그냥 이렇게 섬으로 견뎌내는 일만이 할 일인 것 같아서,
근데 선배, 밤은 왜 이리 길고 배는 왜 이리 자주 헐거워지는 거유
삼류소설을 너무 많이 읽은 나는
첫 결혼기념일이 이혼기념일이 된 후배의 변은
걷잡을 수 없는 남편의 바람기가 원인이었단다
30년을 한 남자와 살고 있는 나도
실은 한 남자와 사는 게 아니다
영화나 소설처럼 호시탐탐 친구의 애인을 넘보고
선후배에게 추파를 던지고 이웃사내에게 침을 삼켰다
단언하지만 이런 외식이 없었다면
나야말로 일찍이 다른 삶을 살았을지도 모르는 일
결혼제도란,
한 여자가 한 남자만을 거래할 수 있도록 규정지어진
공소시효가 불분명한 합법을 가장한 희대의 불법 사기극
나는 달콤한 미끼에 걸려든 망둥어, 위장취업자, 아니 불법체류자,
결혼이라는 기업에 청춘의 이력서를 쓰고
정규직이라는 달콤한 유혹에 넘어간 상근봉사자,
가문의 대소사엔 대를 이은 비정규직 노동자,
자식에겐 만료가 없는 무보수 근로자.
이런 근로조건에서 이 정도 바람 없기를 바란다면
인간이 아닌 건 내가 아니라 후배일 터,
나는 삼류영화, 삼류소설을 너무 많이 봤고
후배는 너무 오래 교과서만을 탐닉한 결과다
김인자∙1989녀 ≪현대시학≫으로 등단. 시집 슬픈 농담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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