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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호 신작시/김재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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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부
댓글 0건 조회 2,263회 작성일 08-07-15 23: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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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석
도르가의 집* 외 1편


1.
도르가*의 집에는 
처녀인 베개, 이불, 침대보, 커튼이 
얌전하게 임자를 기다리고 있다
불혹에 삶을 업그레이드한 도르가는    
과부들을 위하여
이제 속옷과 겉옷을 짓지 않는다
어린 시절 반짇고리 속 골무, 바늘, 실을 벗 삼고
뜨개질로 푸른 초장에 사슴을 수놓기를 
즐기던 도르가는 재봉틀로 침구와 커튼을 만들며
탈탈탈 세상의 번뇌를 털어낸다,
툴툴거리는 세상의 어리광을 다 받아낸다

2.
한때 세상의 터진 곳, 헤진 곳을 
은유와 환유로 봉하려 했던 도르가가
재봉틀을 돌린다
사람에게는 다 자신의 길이 있는 것
진솔함을 생에 가장 우선시 하는 도르가에게
상상력에 기초한 낯설게 하기는
뜬구름 잡는 일,
더욱 예술과 인간의 상이함에 분개한 도르가는
차라리 재봉틀로 시를 쓰기로 했다  
파김치가 된 영혼을 위로해 줄 
침구만한 시가 어디 있는가
뜨거운 햇살을 가려 주고, 
남에게 드러내기 어려운 곳을 가려 줄
커튼만한 시가 어디 있는가

3.
소음 속에서 태어난 침구와 커튼이
이마를 찡그리자 눈치 빠른 도르가가
재봉틀을 돌리는 걸 멈추고 차를 마신다
삶에 정답이 없다는 식상한 말이
오늘따라 가슴에 와 닿는다
한때 시에 발목 잡힌 시절
풀밭에 누우면 먼 하늘 구름 속에서
유년의 추억이 손짓을 하였다 
이정표를 쳐다보면 
버들잎만 외로운 것이 아니었다
한때 골머리 아프게 했던 
은유와 환유가 도르가는 그립다
재봉틀로 아무리 시를 써도
영혼의 배가 채워지지 않는 것은
무슨 연유인가

4.
도르가가 종이를 꺼내어 시를 쓴다 
재봉틀로 쓴 시인 침구와 커튼들이
도르가의 시작을 훔쳐본다 
은유와 환유가 살아 숨쉬고
시적 영향의 불안으로부터 자유로운 
누구도 넘보지 못할 시의 월척을 
노리는 것이 도르가의 병 
더불어 진솔함을 꿈꾸기에  
도르가의 병은 덧나는 것이다
몇 장의 파지에도 
손을 들지 않는 도르가,
또 다시 시에 발목 잡힌 걸까
못 고치는 병,
침구와 커튼들이 혀를 찬다

* 도르가의 집:가게 이름.
* 도르가:사도행전 9장 36절부터 43절에 나오는 여인.





나무들은 간여하지 않는다


나무들은 
새들의 사생활에 간여하지 않는다

무상으로 
새들에게 보금자리를 내주거나
놀이터가 되어준 나무들 

아침에서 저녁까지
새들이 무슨 일을 하고 다니더라도 
새들에게 언짢은 소리를 않는다

다만 
나무들은 새들이 전해 주는
먼 세상의 이야기를 놓치지 않으려
수많은 귀인 잎사귀들을 곤두세운다 

나무들은 새들의 이야기에 취해 
그에 대한 답으로
해와 달, 별빛의 이야기를 
울긋불긋 전해 주기도 한다

그러다 듣는 일도 
답하는 일도 식상해지면
나뭇잎 귀를 지상에 내려놓기 시작한다

때론 바람이
나무들과 새들 사이를 갈라놓으려 
새들의 험담을 하면, 나무들은   
마지못해 나뭇잎 귀를 끄떡인다 

나무들은
새들의 사생활을 속속들이 알고 있지만 
새들의 아픈 곳을 건드리지 않는다


김재석∙1990년 ≪세계의 문학≫으로 등단. 1993년 시집 까마귀, 샤롯데모텔에서 달과 자고 싶다, 기념 사진,  헤밍웨이, 달에게 보내는 연서. 번역서 즐거운 생태학 교실. 목포 마리아회고등학교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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