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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호 신작시/최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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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서림
노인과 상치 외 1편
그의 말 속으로, 들어갈 수 없다
침묵이 슬라브 지붕보다 무겁게 내리누르고 있다
수채화 그리기에 좋을 만큼 퇴락한 집들
시멘트 독을 먹고 자란 이끼가 담벼락에
저승꽃처럼 번지고 있다
안으로 제방을 쌓지 못한 채 무너져 내리고 있는 노인들,
너덜너덜 찢겨진 책갈피 같은 추억을 되새김질 하고 있다
이 세상의 다정스런 무관심 속에서,
상치만 공장에서 막 찍혀 나온 듯 시퍼러둥둥한
더는 돌아가고 싶지 않는, 돌아보고 싶지 않는
개여뀌
이슬 먹고 자란 꽃은 다 아름답다
언제 피었다 지는 줄도 모르는 오이풀, 제비꽃, 개망초도
눈에 밟힐 때가 있다
길 가에 채이는 개여뀌도
몸을 낮추어 자세히 들여다보면
아리도록 아름답다
눈비 맞으며 대로변에서 개여뀌 같이 검붉어진 얼굴,
먼지를 삭여내느라 늘 쿨럭거리는
짙은 그늘만큼이나 깊어진 生,
개여뀌 같이 이슬 머금은
그녀의 눈이 서러워서 아름답다
슬픔이 슬픔을 끌어안듯,
삶의 고삐를 놓쳐버린 그녀가 포장마차 앞에서
두 팔로 자신을 끌어안고 있다
짓뭉개진 개여뀌가 새벽이슬에 기대어 일어서듯
진물 같은 눈물로 추스르고 있다
최서림∙1993년 ≪현대시≫로 등단. 시집 이서국으로 들어가다, 유토피아 없이 사는 법, 세상의 가시를 더듬다, 구멍. 시론집 말의 혀. 서울산업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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